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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20강.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요 19:14-22)

by coroa 2022. 2. 6.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0강.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요 19:14-22)

-.정낙원 목사

 

요 19:14-22=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牌)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 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牌)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 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는 모든 일은 모두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창세전에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심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시간표대로 일을 해 나가셨습니다.

탄생도 정한 때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정한 때에 맞추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계시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다가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 또한 계시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라틴)어 이 세 언어는 그 당시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 전체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였습니다.

이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만국의 언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이 예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종교를 상징하고!

로마는 법과 정치와 경제를 상징하고!

헬라는 문화와 예술을 상징합니다.

이는 온 세상의 모든 종교나 정치나 경제나 문화와 예술의 주인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하였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하였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어는 구약을 상징하고, 헬라어는 신약을 상징하고 있어요.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이고, 헬라어는 이방인의 언어에요.

 

그런데 예수의 이마에 구약과 신약의 글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져 있어요.

이는 곧 이 예수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유대인들에 왕이란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육적 유대인을 뛰어 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온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구세주이십니다.

세상 속에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영적 유대인들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빌라도는 로마 사람입니다.

이방인이에요.

그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어로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는 온 세상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로마 총독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로마의 힘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하여 만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이 창조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 할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창조했습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 가십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과 연관이 있음이 됩니다.

즉 역사 자체가 예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 즉 그 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분이란? 만물은 만드신 그 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고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어느 시대나 항상 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는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역사 속으로 오시면서 육신을 입고 오십니다.

이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말씀이신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보내셨을까요?

이는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구원 해 내는가 하면 자기 피로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에 정점(頂点)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고 선언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가 영광을 받았다고 화답을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하실 일을 다 끝냈다는 말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죽음으로 그 사명을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셨나요?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죽음으로부터 빼내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장자들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킬 때 이스라엘을 죽음으로부터 넘어가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넘어가게 하셨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서 넘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신 어린 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어린 양이라 하지 않고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게 한 어린 양이란 말입니다.

 

유월절이란? 넘어 간 날이란 말입니다.

 

무엇이 넘어 갔나요?

죽음이 넘어 갔어요.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 갔어요.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죽음에서 살아난 날이기도 하지만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청산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월절 속에는 두 가지 해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둘째는, 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두 가지로부터 해방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이고!

둘째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일을 유월절에 맞추어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의 유월절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로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전에는 애굽에서 살았지만!

유월절 후에는 가나안으로 가는 삶을 삽니다.

 

유월절 전에는 바로 왕 아래서 종살이 하면서 애굽 사람으로 살았지만!

유월절 후에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죄에서 자유하며 하늘나라 백성으로 삽니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새로운 날의 시작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 다른 민족이란 뜻입니다.

너희는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이제 죄와 사망 아래 있지 않고 의와 영생 안에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서 종에서 해방이 된 민족이 되었고, 죽음을 이긴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날을 명절로 주셔서 영원토록 기념케 하였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유월절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것이 어린양의 죽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건을 벌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럽니까?

하나님이 그러고 계세요.

그것도 유대인을 들어서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역으로 이용하여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를 희생 제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 중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입게 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죽음이 이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주는 은혜로 작용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에게 용서가 부어졌어요.

그래서 죄사함의 은혜인 겁니다.

 

구약에서는 어린 양의 피로서 죄사함이 일어났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뿌림이라는 모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상으로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살아나고 애굽에 종살이를 청산하는 일들은 모두가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을 입게 되고 율법의 종에서 해방이 되는 예표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처럼 유대인 구원이 따로 있고 이방인 구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육적 유대인과 영적 유대인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어요.

표면적 유대인이 있고,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어요.

 

표면적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을 말하고,

이면적 유대인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말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고 했어요.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영적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지 않아요.

모두가 예수 안에서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 것만 있어요.

구약에서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장차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의 모형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모형은 실제가 오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8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율법을 뭐라고 하는가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율법이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율법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참이 아니고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럼 유대인도 참 형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 형상이 누구라고 했나요?

장차 오시는 분이에요.

 

장차 오시는 분이 누구신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럼 구원을 받는 자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 자들이 참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3절 4절을 보세요.

 

짐승의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지 죄 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죄사함은 짐승의 피로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한 몸이 흘린 피로서 주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옵소서!

내가 왔습니다!

내가 바로 창세전에 아버지와 약속한 그 한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림으로서 영원히 온전케 하는 죄사함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예수의 피로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그 동안 드려지던 짐승의 제사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서처럼 매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던 것을 이제는 자기 몸으로 단 한 번에 끝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제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어지게 하려고 새 언약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새겨준 새 언약이라는 법이 있는 성도는 구약의 모형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실상이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9-15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 비유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장막은 율법적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짐승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걸 비유라고 합니다.

비유란? 참(진짜)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거룩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에요.

참(진짜)이 아니기 때문에 개혁 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면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첫 언약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약속으로 난 자들이 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들의 죄까지 소급하여서 적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죄사함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만 주어져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거룩해 진다는 것을 진짜가 와서 이룰 때까지 즉 개혁 할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를 들어서 구약의 짐승에 제사는 약속 어음을 받은 것이에요.

약속 어음은 나중에 현금으로 바꾸어야 해요.

현금으로 바꿀 때까지는 약속 어음은 현금 구실을 합니다.

현금이 아니고 현금 구실을 하는 거에요.

이걸 혼동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구약에는 약속 어음과 같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약속 어음도 실제와 같이 믿으면 그것도 실상과 같은 효력이 있어요.

언제까지냐 하면 현금으로 받을 때 까지입니다.

 

이제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피로 단 번에 모든 제사를 이루시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새 언약을 세우시고 구약에 약속 어음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즉 약속 어음이라는 짐승이 제사를 회수해 가시고 현금인 예수님의 피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짐승의 제사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일을 이룰 것이라는 것으로 믿음으로 드린 사람들은 적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짐승의 제사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드리는 제사라고 믿고 드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그 속에 믿음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에 믿음으로 드려진 짐승의 제사도 예수님의 제사로 간주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는 세대주의자들의 신앙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세대주의자들이 왜? 이런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언약을 모르니까 구약에 구원 받는 자가 따로 있고 신약에 구원 받는 자가 따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언약 안에 있어요.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만 주어져요.

 

구약에도 예수의 피고 신약에서도 예수의 피에요.

구약에서는 예수의 피를 짐승의 피로 예표적으로 뿌린 것이에요.

이 예표적인 것이 이제 예수가 오셔서 실상으로 완성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올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혁 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졌다고 하면 새 언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져요.

 

옛 언약은 새 언약 안으로 귀속이 되었어요.

그럼 옛 언약적인 방법으로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적 방법으로 구원이 없다는 말은 육적 유대인의 구원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 속에 또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약속으로 난 자인 이삭 안에서 두 아들이 나오지요.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어요.

예수님도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분이에요.

 

이삭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요?

하나님이에요.

이삭은 성령의 능력으로 낳아진 자에요.

이삭은 육적 아버지가 없어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낳았어요.

예수님도 육적인 아버지가 없어요.

 

이삭이나 예수님은 둘 다 어머니만 있어요.

어머니만 있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가죽옷을 입혀 주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면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신다고 하였지요.

이는 곧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식을 낳는 여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삭이나 예수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신 자식들이에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했지요.

 

그럼 이삭도 장차 오시는 분을 보여주는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삭이 여자의 후손에 실제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곧 구약의 이삭은 예표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삭에게서 두 아들이 나오지요.

하나는 육에 속하였고, 하나는 영에 속하였어요.

즉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나온 것입니다.

 

에서는 표면적 유대인을 상징하고,

야곱은 이면적 유대인을 상징하고 있어요.

표면적 유대인을 육적 유대인이라고 하고,

이면적 유대인을 영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면 야곱처럼 영적 유대인들이 받아요.

그러니까 구약에도 옛 언약에 속한 자가 있고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은 율법으로 나아오고,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은 은혜로 나아와요.

구약에도 은혜로 산 자들이 있고 법으로 산 자들이 있어요.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보지 말고 한 통으로 보아야 해요.

세대주의자들처럼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나누어서 보지 말고 하나로 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이스라엘을 모형으로 하여 신약의 참 성도들의 구원이야기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지 않아요.

또한 구약과 신약을 나누지 않아요.

구약과 신약은 하나에요.

하나의 이야기를 해 준다는 의미에서 하나라는 말입니다.

마치 창세전 언약 속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이 하나로 있듯이 구약과 신약도 하나에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구약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장차 신약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읽고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신약의 성도로 읽어내요.

중요한 이야기를 했으니 잘 이해하세요.

 

다시 강조합니다.

죄사함은 예수의 피로만 주어지지 짐승의 피로 주어지지 않아요.

만약에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죽으실 필요가 없어요.

 

짐승의 피로서도 죄가 사해지는데 무엇 하려고 예수가 죽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으로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은 예수의 피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로 보기 때문에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나누는 것입니다.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지금도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식의 구원을 받아야 해요.

즉 구약처럼 짐승의 피로 죄사함 받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어졌어요.

이는 곧 유대인들의 구원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유대인 구원이 남아 있다고 합니까?

 

이는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에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했어요.

짐승의 피로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께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내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언약으로 하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한 몸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죽어서 내 백성들을 단번에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옛 언약에 속한 것들을 자기 몸으로 다 완성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언을 유효화 해 주어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믿어지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약의 율법이라는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하셨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豫表)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에요.

그럼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예표를 통해서 실제를 만나면 됩니다.

 

그 실제가 지금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마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는 구약의 대 제사장인 아론의 이마에 쓴 패와 같은 의미가 있어요.

 

구약의 예표가 예수님에게 어떤 식으로 실체로 나타났는지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28장을 봅시다.

 

출 28:36-38절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37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38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을 쓴 패를 이마에 두르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아론은 이 패를 쓰고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패를 쓰고 드린 아론의 제사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죄건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해 주셨어요.

죄건이란? 죄와 허물을 말해요.

이는 곧 모든 잘못을 용서 해 준다는 말입니다.

 

아론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 이라는 패를 쓴다는 것은 아론이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 앞에 성결한 제사라는 말입니다.

즉 죄 용서를 위한 제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 이라고 쓴 패를 쓰고 있는 아론을 성물로 받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곧 죄를 성결케 하는 제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아론이 누군가요?

대 제사장이에요.

그럼 신약에 대 제사장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마에 아론처럼 패를 하나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마에 쓴 패가 어떤 것인가요?

“유대인의 왕” 이라는 패에요.

 

왕이란? 백성을 대신하는 자에요.

하나님은 왕 하고만 상대해요.

왕이 잘못하면 이스라엘 전체에게 화가 돌아가고 왕이 잘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복을 받아요.

 

왕은 백성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은 영적 유대인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영적 유대인을 대표하여서 예수님과 상대를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무엇으로 죽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죽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을 대신하여서 성결케 하는 제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적 유대인들이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영적 유대인을 대표로 죄 값을 치루고 있어요.

그러니까 영적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유대인이 누구인가 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에요.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표를 실제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종에서 해방이 되고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들을 보여주신 그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약의 유월절 사건을 가지고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으니 이제 실상으로 받으면 되어요.

 

구약의 유월절이 뭔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온 나라의 장자들이 죽는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넘어간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만 죽음에서 살아나는 법을 알려 주셨어요.

그 법이 바로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러한 일을 모두 하나님께서 하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 자기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지 않았어요.

죽여도 유월절 명절을 지나고 난 후에 죽이려고 하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으로 죽이는 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겐 유월절은 최고의 명절이에요.

우리나라의 설날과 같은 날이에요.

그래서 명절에 죄수를 죽이는 일들은 피하였어요.

예수도 명절 지나고 난 후에 죽여도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명절에는 말자고 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빌라도에게 예수님 때문에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총독으로서 예수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라도를 동원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동원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동원하셨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일컬어 “보라 너희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무슨 말이냐?

우리의 왕은 “가이사” 라고 합니다.

예수가 얼마나 미웠으면 가이사를 왕이라고 하겠어요.

 

알다시피 가이사는 로마 황제에요.

로마를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마귀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즉 세상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지금 가이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자기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를 자기 왕이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서슴치 않고 우리 왕은 가이사 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는 마귀 백성입니다 라는 것을 스스로 자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죄에서 구원을 하려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죄인 인줄을 몰라요.

죄인인 주제에 자기들이 엄청 잘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놈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벌이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죄 아래 가두는가 하면 하나님 아들을 죽게 함으로서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컬어 “시온의 거치는 반석”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무엇을 넘어지게 하는가요?

그들이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뭔가요?

율법 지킴이라는 신앙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알라고 주었더니 이 놈들이 율법으로 치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율법으로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버리신 것입니다.

 

어떤 수치인가 하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은 잘 한다고 한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보낸 것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키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고 있어요.

자기들이 지금 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지고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예수님을 미끼로 삼아서 유대인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벌이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죄 아래 가두는가 하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내서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보라 너희 왕” 이라고 하잖아요.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고자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조롱을 도리어 진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을 받을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도리어 그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요.

조롱하는 것으로 보여요.

 

지금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조롱하고자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 패를 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쓰지 말라고 하여도 빌라도는 아니다 나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그것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고 썼어요.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사셨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탄생 후에 헤롯이 죽이려고 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러다가 헤롯이 죽고 난 후에 다시 유대로 돌아오시는데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셔서 정착합니다.

그래서 나사렛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에요.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어요.

예수님을 다른 예수와 구분하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이미 두루 알려진 이름이었어요.


그리고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갈릴리의 시골이었으므로 경멸받던 성읍이었어요.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하면서 나사렛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야냥 거렸어요.

 

유대인에게 나사렛은 촌 놈들이 사는 천한 동네에요.

그런데 지금 빌라도가 야! 너희들이 그렇게 천한 놈들이 사는 곳이라고 무시하던 그 곳에서 난 예수가 너희 왕이란다 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말이에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

그것도 나사렛 촌 놈이 말이에요.

이 얼마나 쪽 팔리는 일입니까?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야! 빌라도야 그 패를 떼라고 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싫어~!

그럽니다.

재미있고 우습지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에 반발을 합니까?

이는 예수가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 할 수가 없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부정으로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적개심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이 많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바람과는 상반된 모습으로 일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소원을 외면하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이들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이들을 죄 아래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유대인이 바라는 모습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것의 반대의 모습으로서의 초라한 왕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으로서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에요.

하늘에 속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땅을 지향하고 산단 말입니다.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면 줄수록 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이들의 소원을 빼앗아 가는 왕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유대인의 반대편에 서서 일을 하셨어요.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는 식으로 일을 하셨어요.

 

이는 너희는 세상 사람과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너희는 땅에 기운으로 땅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는 땅을 떠나야 할 민족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이방인과 동등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가치로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복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하여서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구원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하여서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왕도 세상적 기준에서의 왕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깨트려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하여서 땅에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이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믿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유대인들의 가치관도 땅에서 하늘로 바꿔주는 일을 하시면서 죄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하는지도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틀렸음이 발각당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원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히 구원해 달라는 말 조차도 할 수 없는 악당임을 아셔야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 시대 많은 성도들이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어요.

이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격이 없다는 말은 구원이 추상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고마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크고 비밀한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몸을 불 사르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만 구원이 가져다주는 부산물일 뿐이에요.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입었다는 것을 실제 삶 속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고맙고 자랑스러워야 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해요.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구원에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비록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하늘에 소망으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냥 짐승처럼 세속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을 행복의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 몇 푼 있다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하고 소중해요.

이건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듯이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신 것도 실제이고 사실이에요.

또한 예수님의 피로 내가 구원을 얻은 것도 사실이고 실제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도 실제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실제화 하여 살게 하세요.

성령이 범사에 믿음으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초월하게 하고 물질적 가치를 이기게 해 주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이 예수님이 틀렸든지 유대인들이 틀렸든지 둘 중에 하나는 틀렸어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아니던가?

아니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말하는 유대인이 아니든가?

둘 중에 하나가 틀렸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지금 유대인들은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어요.

의미심장하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내셨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누구인가요?

육적 유대인들이지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이지요.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에요.

그런데 육적 유대인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는 육적 유대인의 왕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면 예수를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유대인들이 따로 있겠지요.

누구인가요?

이면적 유대인들이에요.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는 이면적 유대인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영적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예수님의 나라는 육적 나라가 아니고 영적 나라에요.

그러므로 예수님 나라 백성들도 육적인 방법으로 생산 되지 않고 영적인 방법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이세요.

그럼 그 나라 백성도 영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이 되나요?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이 되어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영적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해요.

이렇게 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진짜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유대인들 손에 죽게 함으로서 지금 유대인은 가짜라는 것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염두에 둔 유대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유대인들이 따로 존재해요.

 

이들이 언재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나타나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진짜 유대인을 찾아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진짜 유대인과 가짜 유대인들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참 유대인들을 찾아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 유대인이 누구인가요?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를 자기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하나님의 구원에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포하셨어요.

이제 여기에 동의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갈라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어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놓은 것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낸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으로 이해해 봅시다.

 

애굽에서는 혈통적 이스라엘로 있었어요.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고 난 후로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의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겨 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자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인 겁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겨날 것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도 유월절 어린 양으로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과 어린 양의 피로 생겨난 이스라엘로 갈라졌듯이 신약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온 세상에 흩어진 진짜 유대인들을 찾는 일을 하세요.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짜 천국 갈 유대인과, 지옥으로 갈 가짜 유대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여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어디로 파송하는지 봅시다.

 

마태복음 10장을 봅니다.

 

마 10:5-7절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 ~ 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지요.

 

이는 구약 이스라엘로부터 버림당한 자들이란 말입니다.

누가 구약 이스라엘로부터 버림 당하였나요?

예수님이 버림 당하셨어요.

 

예수님을 버린 자들이 누구인가요?

율법주의자들이지요.

예수님은 육적 이스라엘에게 버림 당했어요.

 

그럼 누가 잃어버려진 자들인가?

율법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왜? 율법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할까요?

이는 율법 신앙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판치는 세상에서 율법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다는 것은 제도권에서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제도권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은 초라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복음은 항상 초라하게 증거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였어요.

왜냐하면! 복음 속에는 세상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의 법칙으로 돌아가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힘 없음은 곧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육에 가치로 사는 자들은 힘 없음을 수치로 여겨요.

그래서 힘을 갖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힘을 주시지 않아요.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고난이라고 해요.

 

구원이란?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 기존에 있어요.

그러니까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다는 말은 곧 힘을 다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걸 이 시대 교회로 적용해 보세요.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교회들이 힘을 가지고 있는가요?

그리고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들이 어떤 것인가요?

고지론이에요.

 

고지론이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에요.

기복 사상을 말해요.

이게 힘에 논리에서 나온 사상이에요.

 

힘에 논리에서는 가진 자는 곧 옳음이 되어요.

남 보다 많이 가진 자가 되려면 열심히 해야겠지요.

그래서 고지론은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일명 인간의 행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고지론을 가지고 있었어요.

육적 이스라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어요.

부국강성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어요.

 

이러한 것은 영적 이스라엘은 동의하지 않아요.

그래서 버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육적 부흥을 꿈꾸는 자들로부터 버림 당하였어요.

그럼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생겨난 영적 이스라엘들은 육적 부흥을 꿈꾸는 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는 육적 부흥을 주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는 세상 것이 없어요.

하늘에 것들만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생겨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 화려함이나 힘을 쫓아가지 않아요.

이러한 모습은 힘을 가진 육적 신자들에게는 초라하게 보여요.

그래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세상에 것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도가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적 교인들에겐 십자가는 피하고 싶고 창피한 것이에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아먹지 못해요.

인간의 생각에 반하는 역설적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초라하게 보내셨고 초라하게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초라해요.

육에 속한 자들은 힘 있고 강력한 메시야를 바랬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힘 없고 초라하게 보냈어요.

 

이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들은 알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12 제자들을 예수님처럼 초라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12 제자들을 파송하는 모습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의 모습과 같아요.

예수님이 초라하게 오셨듯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초라하게 보냅니다.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12제자들을 영접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도는 지극히 작고 낮고 천한 모습의 종들을 통하여서 전해지고 있어요.

우리 생각 같아서는 대형교회에서 십자가 도가 증거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대형교회치고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교회는 거의 없어요.

저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어요.

 

십자가 도를 전하면 교회가 대형화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천국 복음을 가루 서말 속에 있는 누룩처럼 두셨어요.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어리석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들은 다 복음 전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교회가 크다 작다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복음의 증거되는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복음이 세상 속에서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전달되도록 해 놓으셨어요.

이는 세상 지혜로 도무지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복음 전하면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복음은 세상에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복음을 전하면 오히려 하찮게 여기고 무시당하고 자존심이 뭉개지는 아픔을 당해요.

 

그래서 복음은 인간이 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늘로부터 성령으로 거듭 난 자들만이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누가 존경해 주거나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착각이에요.

도리어 욕을 먹고 무시당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주어도 탐심 때문에 외면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여서 온 이스라엘에 파송하시면서 이스라엘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들을 찾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요.

어떤 교회이냐 하면 육적 유대인들과 같이 세상에 속한 교회들을 말해요.

세속적 가치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곳이에요.

교인들에게 땅에 행복을 주겠다고 하는 교회들이에요.

 

예수님은 이런 교회들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어요.

예수님 당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었어요.

제사장도 강도였고 백성들도 강도였어요.

모두가 땅에 이익을 얻고자 모였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시대가 예수님이 곧 오실 때가 된 시기이니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과 같겠지요.

맞아요.

 

이 시대 교회들이 예수님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과 같아요.

세상 가치가 자리 잡고 있어요.

교인들마다 세상 성공 신화를 써가고 있어요.

 

교인들 마음 속에 가이사의 형상으로 가득 그려져 있어요.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인 세상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가이사를 왕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은 예수를 왕으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은 우리의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나의 왕이 맞습니까?

왕이라고 한다면 무엇은 주는 왕인가요?

세상에 영광을 주는 왕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왕인가요?

 

무엇을 위하여 예수를 찾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지금 누구를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육신은 가이사를 왕으로 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 이를 어찌할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를 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가이사를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예수를 왕으로 섬길 수가 없음을 알고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제사로 나아가지 말고 긍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안에서 범사가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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