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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16강. 가시관을 쓰신 하나님의 아들 (요 19:1-7)

by coroa 2022. 2. 2.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6강. 가시관을 쓰신 하나님의 아들 (요 19:1-7)

요 19:1-7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정낙원 목사

 

 

 

본문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 할 수가 없었는가요?

이는 예수님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아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아들이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식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로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다운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과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스스로를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고 잇단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정서로서는 도무지 용인 할 수가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죄로서 죽임당하여야 하는 죄인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란 신성불가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어기는 자는 신성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죽였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자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당하였다는 자부심이 충만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다른 차별성으로서의 특권의식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겐 율법이 있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의미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율법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자랑했어요.

그리고 율법을 생명처럼 지켰어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에 반(反)하는 행동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에 반(反)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금기시 하는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기가 찬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군중들이 그런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두면 유대교 자체가 붕괴가 되어요.

자칮하면 유대 민족이 예수를 따르는 자와 반대하는 자들로 두 쪽으로 나누어져서 분열이 일어나게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를 죽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참지 못한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등함으로 여겼어요.

동등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대신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그대로 보고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니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모습인 것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럼 상식적으로 보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버지가 주신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아들답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주신 율법을 어기는 일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성전을 부정하고 안식일을 어기면서 율법이 금하는 일들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터부시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정한 일들이에요.

이러한 것은 개 같은 이방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서슴지 않고 개 같은 이방인들과 같은 자들과 어울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신봉론자들인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화가 나고 열을 받겠어요.

 

유대인들이 볼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반(反) 율법적인 언사와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율법에 충실하였으면 하였지 율법을 폐하는 짓은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절대로!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는 율법을 훼손시키는 이단에 불과한 자인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이름을 모욕하는 이단 중에서도 악질 이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율법적 상식을 가지고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율법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모르고 표피적인 것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율법 지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핵심은 버린 채 형식인 껍데기만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데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외식이에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외식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은 율법 지킴에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의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인간의 가치를 긍정하는 인본주의 성화론자들이 성경을 표피적으로 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요.

봐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법들로 가득하지 않느냐!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의 근본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사고에요.

 

겉으로 들으면 그럴 듯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래서 말씀대로 안 사는 놈들이 이상한 놈들이고 그런 놈들은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럽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성경대로 가르쳤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문자적으로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나와 있는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문들을 문자대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쳤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성경을 펴서 보이면서 봐라!

내가 뭘 잘못 가르쳤느냐!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라고 교인들을 윽박지르고 자기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냥 공갈을 치고 있어요.

 

그럼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은 그 말이 진리인줄 알고 그래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지 라고 하면서 앞으로 더 잘 할게요 라고 하면서 주눅이 들고 목사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이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에요.

 

왜? 목사나 교인들이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가요?

그건 성경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식이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성경을 상식으로 보면 안 되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사람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이를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간 자체를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죄를 생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일들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선악 기준과 하나님의 선악 기준은 다릅니다.

인간들은 인간의 행함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 자체를 죄로 규정합니다.

죄로 규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가 안 되는 것은 모두가 죄에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선이 나오지 않아요.

인간들이 선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이고,

인간들이 악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모두가 죄인에게서 나온 죄인들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동의와 상관없이 인간들의 행함은 죄라고 합니다.

 

죄가 뭔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보세요..

 

시 2:7-12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영을 내렸어요.

무슨 영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낸다는 영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이는 그이 말을 듣고 그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를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아들인가 하면 죽으로 오신 아들이에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러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에요.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야 하는 희생 제물로 보냈어요.

 

죽으라고 보냈단 말입니다.

이걸 대속 제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죽는다.

이상하지 않나요.

어떻게 하나님이 죽는단 말입니까?

우리들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상식이 어떤 상식인가요?

죄인의 상식이에요.

그럼 우리의 상식은 이미 틀린 것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죄인의 상식이니까요.

 

그래요.

우리 상식은 틀린 상식이에요.

그러니 신앙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도 상식적으로 보면 안 되어요.

 

이러면 성경을 상식적으로 보는 것이 죄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이 곧 죄가 주는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죽을 수가 없는 분이에요.

우리의 상식은 신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죽으면 신이 아니지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잘 나타났어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조롱하지요.

야! 니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죽느냐!

 

좌편 강도가 말했어요.

좌편 강도가 우편 강도에게 말합니다.

야! 임마! 같이 죽어가는 처지에 무슨 부탁을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죽는단 말이냐!

죽는 놈이 누슨 하나님이냐! 라고 비아냥거렸어요.

 

좌편 강도나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는 자들이나 지극히 상식적이에요.

그들이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 아들로서의 죽음으로 인정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정신 나간 자가 죽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에요.

인간들은 신을 섬기기에 분주하지 절대로 신을 죽여서는 안 되어요.

그럼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섬김의 대상이지 인간들이 조롱하고 죽일 대상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새 집에 이사 가는 날도 신으로부터 택일을 받아야 하고 이사를 가서도 집에 못 하나도 신의 노여움을 살까봐서 마음대로 박지 못하잖아요.

길을 가다가도 성황당의 고목나무에 매여진 금줄을 보고서 합장하고 인사하고 가야지 어떻게 돌을 던지고 간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더군다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인다는 것은 더더구나 천부당만부당 한 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면 죽였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단 말입니까?

또한 신은 지극한 정성으로 섬겨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신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아덴에 가서 이러한 사실들을 고발하잖아요.

아덴은 만신전이 있는 곳이에요.

세상에 신이란 신은 다 모셔 놓은 곳이에요.

그런데 그 신들은 모두가 인간들이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신들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바울이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들이 신의 섬김을 받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인간을 섬기는 그 신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소동이 일어납니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아니 어느 정신 나간 신이 인간을 섬긴단 말이냐!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이 맞지! 라고 웅성웅성 합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바울이 틀렸고 아덴 사람들이 맞아요.

그래서 우리도 아덴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기에 바빴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 받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아쉬움만 있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왜? 날 안 도와주느냐는 원망만 있지 이렇게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하고 다르면 배척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문제가 되면 배척이 아니라 죽입니다.

자기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자를 곁에 두면 자기 신앙이 틀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의 옳음을 위해서 자기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자는 축출하고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단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죽이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죽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섬기고 있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합니다.

인간들 손에 하나님이 죽었어요.

그것도 자기 백성들 손에서 말이에요.

우리가 자기 백성들이잖아요.

 

그럼 우리가 예수를 죽인 자들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죽인 자란 말입니다.

이걸 인정하시나요.

 

이게 인정이 되면 신자이고, 이것이 인정 되지 않으면 불신자입니다.

 

신자 되고자 억지로 인정하지 마세요.

이건 억지로 인정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연히 인정 할 수밖에 없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주여 제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라고 회개하는 무리들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반대로 우린 절대로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도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임한 성도는 자기가 예수를 죽인 죄인임을 고백하게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 되는 성도는 어떤 심정으로 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어떤 마음이 일어날까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겠지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겠지요.

 

자기가 예수를 죽인 죄인임을 아는 자가 복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여 나를 구원 시켜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나는 저주 받아도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까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겠지요.

 

그래요.

자기가 예수를 죽인 죄인임을 아는 자는 자기 구원을 챙기고자 하지 않아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놀랄 뿐입니다.

이건 자학하라는 말이 아니고 심정적으로 그런 반응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자기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건 종교인이에요.

 

종교인은 항상 자기 주체를 챙기고자 해요.

내가 살고자 신을 이용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구원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 종교인인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자기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살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를 위하여 예수 믿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부모고 자식이고 전토까지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지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요?

우리는 살기 위해서 예수 믿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것은 죽는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함과는 반대로 죽고자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정신 나갔습니까?

죽고자 예수 믿게!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살고자 나를 따르게 되면 그것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나를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고로 나를 따르려고 하지 말라는 거에요.

 

살고자 예수를 믿는 자는 여전히 자기 주체를 챙기고자 예수를 이용하는 자에요.

이들은 예수를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안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어느 인간도 죽고자 예수 믿을 인간이 없어요.

다 살고자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있어요.

결국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 없어요.

 

그래요.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은 살고자 예수를 믿겠다고 덤비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주제도 모르면서 살고자 덤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고자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를 못 믿게 하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예수를 믿으라는 거냐?

믿지 말라는 거냐?

헷갈리지요.

 

헷갈릴 것이 없어요.

예수 믿지 마세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그 믿는 값을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복을 달라고 하잖아요.

나 예수 믿었으니 이제 복 주세요.

그러잖아요.

 

이 시대 대 부분의 교인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충성하여서 축복 받자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복 받기 위해서 불철주야로 충성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합니다.

이런 목사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소경이에요.

자신이 소경이니까 소경인 목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아요.

 

구덩이에 빠진 증거가 절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절간 신앙생활이란?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이에요.

땅에서 열심히 빌면 하늘에서도 응답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기도하면 복 받는다는 사상입니다.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열심히 충성해서 축복 받자고 하잖아요.

교인들은 그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잖아요.

누굴 나무랄 것이 없어요.

초록은 동색이라고 목사나 교인들이나 똑 같아요.

부창부수에요.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고 이러한 무당 같은 목사들이 많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무당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많다는 증거에요.

하나님께서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거짓 목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입니다.

 

결국 돈 놓고 돈 먹기에요.

내가 빌고 바친 만큼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교인들에게 충성이란? 복 받는 수단이고 열심은 복을 얻어 내고자 하는 뇌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충성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말했어요.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10-15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이 무서운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합니다.

소돔 고모라 백성들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으로부터 유황 불 벼락을 맞아 죽는 자들이잖아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황 불 벼락을 맞아 죽을 놈들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소돔 고모라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럽니까?

 

한마디로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제물을 드리는 근본 마음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자기 욕심을 챙기고자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가지고 온 제물이란 말이에요.

요즘 말로 복 받기 위해서 충성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제물을 받으면 어찌 될까요?

꼼짝없이 복을 주어야 하잖아요.

그럼 죄인의 세계만 확장이 될 것이 아닙니까?

 

이걸 하나님이 허락하겠어요.

허락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다시는 내 앞에 그런 제물을 들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받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꼴도 보기 싫다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오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믿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와 흥정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 얼굴에다 절기의 똥을 쳐 바른다고 하였어요.

 

똥이란? 양분이 없는 찌꺼기를 말해요.

절기의 똥이란? 절기 속에 담긴 의미는 다 엿 바꿔 먹고 형식만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껍데기만 붙잡고 있다는 겁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없으면서도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있어요.

 

이게 어디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하신 말씀인가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다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자기 욕심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저주 받을 도적놈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보시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지요.

이는 그 속에 전부 하나님과 거래하는 장사꾼들만 모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봉사하고 충성하지만 그 속에는 그것을 근거로 복을 따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구원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강도들이지요.

 

여기서 위로의 말씀을 하나 전하고 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모든 말씀은 다 사랑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반어법(反語法)으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저주의 말씀을 끌어 붓는다고 하여도 사랑의 소리에요.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는 것과 같아요.

 

저주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겉으로는 저주의 형식을 띄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하여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어도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이건 마치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것과 같아요.

내 자식이기 때문에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고 매질을 하면서 온갖 욕을 퍼붓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하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욕하고 두들겨 패도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모든 것은 다 사랑이에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면 선지자들을 보내서 욕을 하고!

그래도 말은 안 들으면 이방인들을 몽둥이로 사용해서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사야가 하는 말씀은 사랑의 소리인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새끼들이라고 하여도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이 속을 섞이면 온갖 험한 말을 다 쏟아 내잖아요.

 

죽일 놈이니!

등신 새끼라느니!

나가서 죽으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이 저 사람이 진짜 내 엄마가 맞나!

계모인가? 라고 의심을 하지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건가?

 

부모가 속 썩이는 자식을 욕하고 매질하고서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보듬고 안아 주잖아요.

많이 아프지!

그러면서 맛난 것도 사주고 위로해 주잖아요.

이게 부모의 사랑이에요.

 

지금 하나님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욕을 실컷 해 놓고,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패 놓고서는 많이 아프지 하면서 치료해 주세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말을 못 알아먹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알아먹습니다.

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랬구나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발 강가에 서서 하나님의 언약을 추억하면서 찬송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암튼 이사야가 한 말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 더러 예수 믿지 말라는 말이에요.

왜?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기복사상으로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예수를 믿고자 하는 그 바탕엔 예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꼼수가 있어요.

예수를 이용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고 천국이 좋은 겁니다.

내가 천국에 가야 하니까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주체 챙기기인 겁니다.

 

이걸 하나님이 속겠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도록 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는 자들로 만들어 버려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다.

 

구원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만듭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이름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입니다.

우리도 여기에 포함 되어 있어요.

 

우리가 유대인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에요.

우리도 그 당시 유대인이었다면 이들과 함께 동조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복 받고자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잖아요.

그 화냄이 나 예수 인 믿을래 라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 2천 년 전에 유대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면 안 되어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 신앙을 추인 받고자 하면 안 되어요.

도리어 우리의 신앙이 틀렸음을 날마다 고발당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도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구나를 알아야지!

그래 나는 절대로 예수를 죽이지 않아!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럼 그 사람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요.

 

우린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는 자들이에요.

또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도 없어요.

그러니 어쭙잖게 예수의 편을 들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우린 항상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지 의인으로 드러나면 안 되어요.

그럼 내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려요.

예수와 충돌이 일어나야 내가 예수를 죽인 자로 드러나요.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은혜로 베푸세요.

 

자비와 용서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이지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너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일을 하세요.

말씀을 통해서 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발가벗김바 되어야 해요.

아!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이건 자학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라는 말이에요.

 

제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인지! 

또한 누구를 위한 죽으심인지 좀 아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좀 발각을 당하시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이 심연 깊숙이 서부터 터져 나와야 해요.

 

어렵지요.

제가 늘 그러잖아요.

천국에는 예수를 죽인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다시 말해서 천국은 나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가요.

 

나는 절대로 예수를 죽이지 않았어! 라고 하는 착한 사람들은 지옥에 가요.

빌라도처럼 난 죄 없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가요.

천국에는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가요.

무슨 말이 참으로 요상하지요.

 

그래요.

복음이 요상해요.

복음은 절대로 상식적이지 않단 말입니다.

성경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도리어 상식적인 이야기를 죄라고 하고 비진리라고 해요.

 

쉽게 말할게요.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에요.

그럼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곧 하나님과 다른 상식이 되겠지요.

 

하나님과 다르다고 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상식은 하나님 앞에선 틀렸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우리 상식은 하나님 앞에서 틀렸어요.

 

그러니 인간들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절대로 하나님을 죽일 수가 없어요.

예수를 죽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빌라도를 보세요.

빌라도는 상식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난 예수 죽이지 않았다!

난 예수 죽이는데 동참하지 않았다!

예수 죽인 죄 값는 유대인 너희들이 책임지라고 하면서 손을 씻잖아요.

 

그러자 유대인들은 앞뒤 분간도 못하면서 분기탱천하면서 그래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예수 죽인 자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잖아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이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가요.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인 빌라도는 양심과 상식으로 예수는 죄가 없다고 하면서 살려주고자 하는데,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데모하고 있잖아요.

이걸 어찌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한단 말입니까?

이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상식을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죽여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인 만드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죽여서 죄인이 되어야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자비가 쏟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 역설을 이해 하셔야 해요.

 

복음이 역설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죄인이 구원 받는 거잖아요.

그러니 복음 자체가 인간의 상식을 깨트리는 역설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누가 갑니까?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잖아요.

누구로부터 용서 받은 자들인가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들이에요.

 

용서는 누구에게 주어지나요?

원수에게 주어지지요.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누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까?

예수를 살리고자 한 빌라도 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용서가 부어지고 빌라도에게는 용서가 부어지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요?

자기 백성들인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를 죽인 죄인이고,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고자 한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 하나님이 용서 해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하나님 앞에 당당해요.

왜냐하면! 예수를 안 죽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 죽였으니 용서가 주어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당당함 때문에 지옥으로 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에게는 용서가 부어져서 천국으로 갔어요.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심오하지요.

이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떤 것인지 감이 조금 잡히시는가요.

 

다시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나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 용서가 주어지고 구원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만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만 가득하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을 너희는 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라는 하나님 아들이 동원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을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를 죽이도록 하셨어요.

 

베드로가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한 것은 예수를 죽인 것과 동일해요.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어요.

이들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이나 도망을 친 제자들이나 그놈이 그놈인 것입니다.

둘 다 하는 짓들이 오십보 백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 손에 가시관을 쓰신 것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복음에 비밀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들이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하면서 채찍질 하지요.

그리고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지요.

누가 그럽니까?

유대인들이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요.

이 기막힌 사건을 누가 만들었나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이런 기가 막힌 사건을 만드셨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3장을 봅시다.

 

창 3: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합니다.

원래 땅은 저주 받지 않았어요.

인간이 범죄 하자 하나님이 땅을 저주 하셨어요.

그러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가시와 엉겅퀴는 “죄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시와 엉겅퀴는 죄로 인하여 보태진 것이에요.

죄가 없었으면 가시와 엉겅퀴가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죄 때문에 더하여진 저주의 산물인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죄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 있어요.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 주었어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뭔가요?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입니까?

죄를 안 지었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죄인에게 율법을 보태 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가시를 준 것과 같아요.

이러면 율법이나 가시나 영적으로는 동일한 의미가 되겠지요.

둘 다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시도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고 율법도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이나 가시나 동일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겠지요.

구약에서는 죄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 가시인데,

바울은 신약에서 죄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을 율법이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구약에 가시는 신약에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나 율법이나 영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그럼 신약에서 가시를 상징하는 율법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보아야겠지요.

 

로마서 3장입니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뭐냐?

인간들을 죄인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죄인이 아닌척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어서 너는 이런 죄인이야 라고 고발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여서 입을 닫게 만들고!

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구나! 를 알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셨나요?

이스라엘에게 주었지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한 자기 백성들에게 주었어요.

 

왜? 자기 백성들에게 줍니까?

그들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너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알려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너희들이 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이걸 아담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자 가죽 옷을 입혀 주시고는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어 쫓습니다.

그리곤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여서 가시가 나게 하였어요.

아담은 가시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시는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가시만 보면 안 되어요.

그럼 실족해요.

 

하나님께서 왜? 가시를 주셨는지를 추적해 들어가야 해요.

 

그럴 때 그 가시를 통해서 아! 내가 죄인이지!

내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가시를 더하여 준 것이지!

이런 죄인이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야!

 

그 은혜를 추적해 가면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준 희생 제물이 나옵니다.

아담은 가죽 옷을 보면서 자기 대신 죽어준 희생제물을 잊으면 안 되어요.

자신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덕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시는 자기 대신 죽어주신 희생 제물을 보게 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 때문에 주어진 가시가 어디로 인도 합니까?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지요.  



이건 마치 죄를 고발하는 율법이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몽학선생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이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율법은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그럼 조금 더 오늘 본문을 봅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지요.

왜? 가시관을 씌웁니까?

예수가 죄인이라고 씌우는 것이잖아요.

 

유대인들이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합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정죄해서 너는 저주 받아야 할 놈이야! 라고 하면서 저주의 산물로 난 가시를 가지고 왕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죄인이라고 고발하려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기 치장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게 하여서 그들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고 있잖아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율법을 폐하는 예수를 죽임으로서 우리는 의인입니다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함인데 이 놈들은 지금 율법으로 의인 노릇하고 있단 말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벗어나고 있어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율법을 자기들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상식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게 하여서 죄인 만드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고자 예수를 죽이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그 율법으로 유대인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다시 설명 할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우리가 율법대로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예수를 죽였어요!

우리 율법 잘 지켰지요!

우리 의인 맞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복 주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느냐!

너희들이 율법으로 내 아들을 죽였잖아!

너희는 죄인이야!

그러니 너희는 그 율법 때문에 죄인이 되고 만 것이야!

복은 고사하고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놈들이야!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요.

 

예수를 누가 죽이고 있나요?

자기 백성들이 죽이고 있어요.

우리가 하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과 동일해요.

예수를 이용해서 복 받고자 하는 것이 예수를 죽이는 죄와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예수가 만약 유대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면 죽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예수를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어요.

이는 떡 주는 예수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떡 주는 예수를 원해요.

내 소원 들어주는 예수를 원하고 있잖아요.

나 복음 아니까 행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나 유대인이나 그 놈이 그놈인 것입니다.

 

유대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러할 때 유대인에게 부어진 용서를 나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요.

 

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에요.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방법이에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인의 자리로 앉히는 일을 하세요.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그러지게 하여서 하나님을 미워하게 하세요.

하나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는 일들을 벌리신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바탕엔 온통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이것이 깨달아져야 사나 죽으나 감사가 나와요.

신앙생활이란? 용서 받음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끝에는 항상 감사가 나와야 해요.

 

다시 가시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가시관이란? 가시로 만든 왕관을 말합니다.

왕관은 왕이 쓰는 것이에요.

왕이란? 백성을 책임지는 자에요.

 

그럼 예수님이 가시로 만든 왕관을 썼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 죄를 몽땅 짊어 지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가시 왕관을 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한 죽으심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었듯이 죄로 인한 저주의 산물인 가시관을 예수님이 쓰심으로서 예수님이 죄로 인한 저주를 몽땅 해결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라는 가시를 해결하시는 왕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곧 죄를 도말하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세례요한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잖아요.

이걸 직역하면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어린 양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분이 여러분의 죄를 몽땅 짊어지고 죽으실 분입니다! 라는 말이에요.

 

유대인들이 죄로 인하여 주어진 가시를 가지고 왕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씌우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예수님에게 몽땅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걸 모르고 하였어요.

나중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 사실을 알고 경악을 하게 됩니다.

어찌 할꼬! 통곡을 하였어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죄로 인하여 주어진 자기 백성들의 저주를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죄 값을 다 치룬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의 죄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이 나 버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율법이 예수님에게 완성이 되었듯이 예수님이 가시로 만든 왕관을 쓰심으로서 죄 문제를 다 해결 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이러한 모든 것을 누가 했나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게 하셨어요.

이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어요.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1-6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요?

예수님에게 나타났지요.

여호와의 팔이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말해요.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

예수님에게 하세요.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를 어떻게 봅니까?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지 않지요.

그래서 침 뱉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하고 죽이잖아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그에게 담당을 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즉 자기 백성들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를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다 그에게 담당시켜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고 조롱하고 하는 일을 누가 시킨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왜? 이런 일을 하게 하시는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인의 자리로 앉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즉 죄인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죽이게 하여서 죄인을 만듭니까?

이는 용서를 부어 주시기 위함이에요.

자기 백성들을 구원 하시려고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죄 아래 가두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왜? 가두냐 하면 빼내려고 가두는 것입니다.

 

빼내 올 때는 그냥 빼내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를 바르고 빼내 오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피를 바르고 빼내고자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죄에서 건져져서 구원이 주어 질 때는 용서 덩어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할 자들을 먼저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죄 아래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려고 애굽에 내려가게 하신 것과 같아요.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 하면 구원을 예수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 남기고자 하심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뭘 바르고 나옵니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지요.

애굽은 죄악 된 세상을 말해요.

 

이걸 신약 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 아래 태어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바르고 구원을 받기 위함이에요.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무리들 위에는 무엇이 뒤집어씌워져 있나요?

예수님의 피이지요.

 

그래요.

죄에서 구원받아 천국에 간 백성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시온 산에 서 있는 구원 받은 144.000명의 성도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써져있다고 합니다.

 

아주 쉽게 말할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예수라는 피에 풍덩 담갔다가 빼내기 위함이에요.

마치 김장을 할 때 시퍼렇게 살아 있는 배추를 소금물에 풍덩 담갔다가 빼내서 숨을 죽여서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죄 아래서 났으면서도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율법 지켰다고 의인인줄 알고 기고만장하는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이게 만들어서 찍 소리 못하게 하시고서는 그 위에다가 용서를 부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간 모든 성도들을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는 모습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는 말씀이었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신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을 시키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을 시키셨을까요?

이는 창세전에 언약 하시기를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은혜를 입게 되어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 나라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사건 속으로 이끌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도살당하는 양처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잠잠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러한 고난과 수모를 당하고 있나요?이는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대속 제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생명은 곧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란? 이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 덕에 사는지를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해요.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곧 죄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큰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도 아니에요.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철이 든 자식이 부모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고 자기가 많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에요.

그것은 감사하여야 하는 일이지 자랑 할 것이 아니에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효도에요.

그럼 우리의 신앙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 할 때 아버지 앞에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바탕에는 부모의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아이는 부모의 희생이라는 죽음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해산의 고통이란? 곧 어미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살펴본다면 피조물은 창조주의 죽음을 근거로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성도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항상 예수님의 은혜가 묻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때문에 산다는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를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졌어요.

생명을 빚진 자들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짜로 탕감을 해 주셨어요.

 

탕감을 받은 자가 할 일은 탕감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감사 밖에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킨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그 사랑을 많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만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저주를 예수님에게 씌웠습니다. 이런 악당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악당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용서 해 주셨다고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셔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게 하여서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감사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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