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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56강. 서원 정신으로의 삶 (레 27:1-34)

by coroa 2022. 1. 1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56강. 서원 정신으로의 삶 (레 27:1-34)

-.정낙원 목사

 

레 27:1-3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3.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4.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5. 오 세로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6.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7.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9.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10.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 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11.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12. 제사장은 그 우열 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3.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14.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16. 사람이 자기 기업 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 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17.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18.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19.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20.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22.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으면 23. 너는 정가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너의 정가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을 삼을지며 24. 그 밭은 희년에 판 사람 곧 그 기업의 본주에게로 돌아갈지니라 25. 너의 모든 정가를 성소의 세겔대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지니라 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28.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34.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레위기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하는지 또한 언약백성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5대 제사를 통해서 말씀 하셨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1장 제사제도로부터 시작 하여서 25장 안식년과 희년으로 끝을 냅니다.

그리고 26장과 27장은 전체의 내용을 축약하여서 부록과 같이 주어집니다.

26장에서는 복의 민족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보충으로 설명을 하고,

27장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27장은 레위기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 결론을 서원과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헌신을 서원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서원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죄인이 과연 하나님과의 약속이 가능한가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이렇게 해 주면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식의 주고받는 약속을 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약속은 그것을 지킬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서원을 할 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거래하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서원을 받지도 않습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서원은 인간들이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서원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서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었으니까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먼저 주시고 내어 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거래가 아닙니다.

너희는 내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정해 놓은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각 사람에 따라 주신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따라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드리는 예물의 양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정한 값을 정해 주었습니다.

 

3-7절.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4.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5. 오 세로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6.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7.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생후 1개월에서 5세까지 어린아이는 남자는 5세겔, 여자는 3세겔이고,

5세부터 20세까지 남자는 20세겔, 여자는 10세겔이고,

20세부터 60세까지 남자는 50세겔, 여자는 30세겔이고,

60세 이상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을 바치도록 규정을 정해 주었습니다.

 

잘 보시면 노동력의 차이에 따라서 바치는 양이 다릅니다.

20세에서 50세까지는 가장 건강하고 힘이 있는 시기로서 노동력이 왕성하므로 가장 많이 바치라고 하고 어린 아이와 노약자는 노동력이 약하니까 적게 바치라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어른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노동력에 차이가 있으니까 여자는 남자보다 적게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힘이 강한 남자로부터 약한 어린아이 순서대로, 50세겔, 30세겔, 20세겔, 10세겔, 이런 식으로 그 값을 정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노동력이 전혀 없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남자는 5세겔 여자는 3 세겔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이라고 한다면 노동력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헌신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을 다른 말로 감사라고 합니다.

구약의 서원 예물은 신약으로 오면 감사와 찬송과 헌신입니다.

 

서원 예물로 바쳐진 세겔은 성전을 유지 보수하는데 사용을 하였습니다.

서원 예물은 성전세와 같은 것입니다.

일종의 세금과 같은 것입니다.

 

서원 예물은 언약의 후손이 된 것에 대한 주민세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액수에 차이는 있어도 다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나 노약자나 그 은혜를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깨닫는 것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에 따라서 감사하는 것에 경중이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각자 깨달음에 비례하여서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깨달으면 많이 감사하고 적게 깨달으면 적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어린아이나 노약자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문자적 의미로 보아야 하지만 신약에서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신앙적인 깊이를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는 많이 탕감 받은 종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종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노동력과 살아온 연치에 따라서 높은 값을 정해 주신 이유는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았으니 많은 것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깊이에 따라 감사의 생활이 많아져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오래 되고 믿음이 좋을수록 편 손이 되어야지 움켜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성도의 신앙 과정을 아이와 청년과 아비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아이는 부모 아래서 순종을 배워가는 때입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자발적으로 행하지 못하고 강요에 의하여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한창 왕성하게 일을 할 때이므로 이는 성령강림으로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진 후에 열심과 충성으로 일을 하는 때를 말합니다.

청년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물을 교회로 내어 놓으면서 날마다 교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시절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는 모든 일에 은퇴를 하고서 집안의 어른으로서 뒤에서 자식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묵묵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때를 말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모든 일을 하도록 맡기시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어린아이와 같고 성령이 임하고 난 후는 어른과 같은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는 육적으로는 나이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의 분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나자 율법 아래서 움켜쥐고 살았던 사람들이 손을 펴서 내어 놓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영적 어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것을 서원으로 둔 것은 신앙생활 자체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을 위하여서 정한 금액을 제사장과 조절케 하였습니다.

 

마음은 바치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정해진 값을 낼 수 없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제사장을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아뢰라고 합니다.

 

레 27:8절.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형편이 어려운 서원자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 정한 세겔대로 낼 형편이 안 된다고 하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형편에 맞도록 값을 다시 책정해 줄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제사장이 책정해 준 금액만 내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50세겔을 내야 하는데 몸이 아파 노동을 하지 못하여서 형편이 어려우면 제사장에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형편에 맞도록 값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액수는 탕감을 해 주어도 완전하게 면제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작은 정성이라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금액은 제사장이 대신 담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가난한 자의 고엘(돕는 자)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로 서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가난한 자의 고엘로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무적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서원 예물을 바치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너희가 나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심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바치라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치라고 한 것은 너희가 내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도 있고 적게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 깨닫는 만큼만 바치라는 것입니다.

액수에 관계없이 자기 형편대로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 당시에 과부의 두 렙돈으로 나타났습니다.

 

막 12:42-44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수님은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을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소유를 바쳤다는 것은 과부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향유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가지고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많이 탕감 받았음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헌신을 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을 허비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은 허비가 아니라 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이 없이 하는 것은 허비가 되지만 깨달음으로 하면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은 절대로 변개하지 말라고 합니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고 합니다.

언약을 목숨처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을 존재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10절. “그가 서약한 것이 주께 제물로 바치는 짐승이면 주께 바친 짐승은 모두 거룩하게 된다. 10.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바꾸지 못한다.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이미 바친 짐승을 다른 짐승과 바꾸면 본래의 것과 바꾼 것이 둘 다 거룩하게 바친 것이 된다.”

 

만약에 A 라는 짐승을 서원 예물로 드린다고 약속을 하였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제물로 교체하여서 드리는 것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럼 둘 다 바치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정한 마음은 변치 말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일구이언(一口二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늘 바뀌기 때문에 은혜 받았을 때 그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님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습니다.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예물은 변개치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늘 여일(如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바치려는 짐승이 부정한 것이라고 여겨지면 그 짐승을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고 합니다.

 

11-13절. “바칠 짐승이 부정한 짐승 곧 주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짐승일 경우에는 그 짐승을 제사장에게로 끌고 가고 12. 제사장은 좋은지 나쁜지 그 질을 판정하여야 한다. 제사장이 값을 얼마 매기든지 그가 매긴 것이 그대로 그 값이 된다. 13. 소유자가 그 짐승을 무르고 싶으면 그는 그 짐승 값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서 내야 한다.”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으라는 말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이 드리려고 하는 것을 취소하려면 20%의 가산금을 보태서 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집을 바치기로 하였다가 취소하여도 마찬가지로 20% 가산금을 보태서 내라고 하고,

또한 밭을 바치겠다고 하였다가 취소를 하여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첫 새끼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만약에 그것이 부실한 것일 것 같으면 그것도 20%를 가산해서 내라고 합니다.

 

모든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26-33절.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28.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약에 초태생이 부정하면 20%를 가산해서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곡식이나 과실 중에서도 구별하여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합니다.

 

양이나 소는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여서 열 번째 통과하는 놈은 여호와의 것으로 구별하여서 드리라고 합니다.

열 번째 놈을 다른 놈과 바꾸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꾸게 되면 둘 다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친다고 하였다가 취소하면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손해 볼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손해 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가 나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취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너 내꺼’ 라고 찜을 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히 6:13-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 하실 때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맹세를 할 때는 나 보다 더 높은 분의 이름을 걸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확실한 맹세인가 하면,

하나님은 한번 뱉은 말은 절대로 취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십니다.

이를 맹세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창세전에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하신 약속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인 창세전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을 해 내시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드라마를 찍기 전의 시나리오와 같은 것입니다.

감독은 시나리오대로 드라마를 찍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반드시 구원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부정한 짐승과 같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부정함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로 있을 때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죄인을 구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롬 6:6-11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죄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해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자를 구원해 주셨는데 죄 지었다고 취소하겠느냐 입니다.

그럴 순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 했는데 죄 지었다고 잘라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냐 입니다.

하나님은 손해 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구원을 해 주셨는데 구원을 받은 자를 더 확실하게 그 구원을 지켜주시지 않겠느냐 입니다.

너희가 뭘 잘못했다고 해서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느냐,

이걸 믿느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해 놓고 법으로 잘라내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서원 예물을 가지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약속을 해 놓고서는 안 지키면 좋겠느냐?

싫을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번 약속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지켜낸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너희들도 한번 서원 하였으면 중간에 변개하지 말고 동참 하라는 것입니다.

 

서원 예물을 바치라는 것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삶으로 늘 확인을 하십니다.

그것이 서원 예물입니다.

 

말로 은혜 받았다고 하지 말고, 행함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내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으로서 그 자체는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약 2:14-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산 나무는 반드시 잎을 내듯이 살아 있는 믿음도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만들어 냅니다.

살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지 움직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으로서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산 믿음을 가진 자와 죽은 믿음을 가진 자를 분별케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을 출발하여서 광야 길을 행하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광야를 통해서 누가 참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구별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와 순종치 않는 자를 구분해 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나 출애굽을 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출애굽을 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니므이 백성만이 순종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하라는 것은 너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너는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시 49: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감사치 못하는 자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감사하는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감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 받은 자들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용서가 부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성막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성막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상번제인 짐승의 제사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서원 예물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증감 할 수가 있습니다.

 

정해놓은 것을 고정화 하지 않고 증감 할 수 있게 한 것은 강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강제하지 않는다 함은 자발적인 깨달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깨달은 만큼만 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이 비판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비싼 향유를 가지고 발을 씻는단 말이냐,

그것도 죄인인 여자가 그러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두고 보고 있느냐 라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탕감 받은 종을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눅 7:36-47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이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어떤 부자에게 두 사람의 빚진 자가 있습니다.

주인이 두 사람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50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럼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많이 탕감을 받은 자가 더 감사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탕감 받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이 많은 은혜를 입은 것을 알고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탕감 받은 것을 죄사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죄사함의 은혜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죄사함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모든 헌신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죄사함의 깊이를 많이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되고 적게 아는 자는 적게 사랑하게 됩니다.

깨달음에 따라서 사랑의 온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받은 깨달음의 경중에 의하여 감사하는 생활이 다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시험을 하십니다.

시험지를 우리 앞에 두고서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맡긴 자에게만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주시고 나중에 달라고 하십니다.

구원 해 주시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서원 예물을 제사장에게 바치라는 이유는 예물의 출처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물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것은 그 예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받은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예물인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감사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내가 부모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서 효도의 순수성이 달라집니다.

 

어린 아이 때는 이걸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때는 효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효도하지 않아도 나무라지도 않고 섭섭해 하지도 않습니다.

 

효도는 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까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고 키워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사랑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야 올 바른 효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효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인 것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의무적이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자랑만 있었지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감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감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는 동의어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감사하고 감사하는 자는 은혜 받은 자입니다.

 

서원 신앙을 계명(명령)으로 주신 것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산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은 생명의 정한 법칙인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원리로 백성들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시내 산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출발하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 속에서도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자발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말씀을 나는 어떻게 받습니까?

 

법입니까?

은혜입니까?

 

내가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어떤 것인가요?

 

억지로 하는 수고입니까?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까?

 

나의 행위 속에 의와 인과 신이 담겨져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적 지킴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지못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헌신은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살고 있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내가 왜 긍휼의 자리를 벗어 날 수가 없는지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즐겨드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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