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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4강. 아들의 창세전 영화와 영생 (요 17:1-5)

by coroa 2022. 1.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4강. 아들의 창세전 영화와 영생 (요 17:1-5)

-.정낙원 목사

 

요 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아버지께 때가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때란? 정한 시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라고 하시는 것은 아버지와 약속을 한 그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언제 약속을 했나요?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예수님은 보호막과 같았어요.

그런데 그 보호막처럼 자신들을 지켜주던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 불안하고 근심이 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자신들도 유대교로부터 핍박 받을 것을 생각하니 염려와 근심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아시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은 너희와 함께 살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한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그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되고, 또한 아버지와도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그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를 말합니다.

자신이 죽고 다른 보혜사가 오셔야 할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일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5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이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도 영화롭게 될 것이 아니냐! 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영화롭게 된다는 말은,

언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또한 아들도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뭔고 하니!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고 그 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창세전에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가 맡겨 주신 임무를 무사히 다 마치고 귀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귀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입장에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의 자리로 돌아가는 영광된 일인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적으로는 아픔이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죽음이라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난과 영광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고난 뒤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은 고난이지만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그 영광은 말로 형언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연합된 한 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광 속에는 성도의 영광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질 때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합니다.

이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셔야 할 사명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받은 사명이 있어요.

무슨 사명인고 하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의아한가요?

 

자 보세요.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럼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이나 우리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보면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성도가 할 일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야 해요.

이를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생을 가지고 왔어요.

자기 백성들에게 주려고요.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영생하시는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가서 영생을 주어야 하고!

자기 백성은 예수를 만나서 영생을 받아야 해요.

이게 서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합니다.

이해되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할 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우리나 동일하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각각의 사명이 있어요.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살려내야 해요.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고 살아나야 해요.

이게 서로의 사명이에요.

 

예수님도 사명 자이지만 우리도 사명 자에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하는 사명 자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 구원 받음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사명 자들이에요.

예수님은 죄를 사해 주시는 의원이시고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합니다.

제가 엊그제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약간 다쳤어요.

그래서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한의사가 하는 말이 내일도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럼 저는 내일 다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나는 한의사가 자신의 의술로서 다친 내 허리를 고치도록 해서 한의사로서의 본분을 감당케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한의사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제가 치료를 받아 멀쩡해 져야 한의사가 기뻐요.

의사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환자가 자신의 치료로 나음을 입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환자는 열심히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이걸 목사와 성도로 비유하면 목사는 설교를 하는 자이고 성도는 설교를 들어야 할 자입니다.

저는 열심히 설교를 하고 여러분은 열심히 설교를 들어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각자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이에요.

목사는 하나님 말씀으로 성도를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성도는 그 말씀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성도를 욕 되게 하는 것이고!

반면에 성도가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목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에요.

요즘같이 푹푹 찌는 찜통 같은 더운 날씨에 교회에 왔는데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지 않고 세상이야기나 하면서 자기 지식을 나열하면 그건 성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오는 것은 하늘 소식을 듣고자 함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함이에요.

그런데 목사가 하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땅 이야기를 한다거나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말씀을 증거하지 않고 전통과 유전과 같은 신학이나 철학으로 양념이 된 설교를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잘 요리해서 성도에게 먹여야 해요.

그게 목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명이에요.

그럼 성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성도는 목사가 요리해 놓은 말씀을 잘 먹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이건 마치 자식들이 부모의 도움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는 열심히 설교하는 것이 사명이고!

성도는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이 사명이에요.

목사가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게을리 하는 것이에요.

반면에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는 것도 사명을 게을리 하는 것이에요.

 

복음을 알았으니 내 맘대로 살 것이야! 라는 것은 없어요.

우리는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내가 내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았는데 이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종이므로 내 맘대로 살면 안 되어요.

 

바울이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 몸은 값으로 산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니까 너희 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영광이란?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이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하세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에 것을 드러나게 하세요.

예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이미 그린 그림이 있고!

지금 그리는 그림이 있고!

장차 그려질 그림이 있어요.

 

“이미 그린 그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 받은 그림이에요.

이건 아담 안에 있던 자를 예수 안으로 옮겨 놓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의와 영생의 세계로 이사를 했어요.

예수님이 옮겨 주셨어요.

이걸 구원의 시제(時制)로 말하면 이미 얻은 “과거 구원” 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리는 그림”은,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서의 그림입니다.

이건 계속해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이사를 왔으니 이젠 예수 안에서 살아가야지요.

 

우리 안엔 아담의 것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제 아담의 것은 제하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야지요.

이 일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고 계세요.

이걸 일컬어 구원을 이룬다고 해요.

구원의 시제로 말하면 지금 이루어 가고 있는 “현재 구원” 이라고 합니다.

 

“장차 그리는 그림”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 몸을 하늘에 신령한 몸으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이건 창자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이사를 시키세요.

그러자면 몸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살려면 하늘에 몸을 입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의 몸을 땅에 몸에서 하늘에 몸으로 바꿔주십니다.

이걸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장막을 입는다고 합니다.

이걸 구원의 시제로 말하면 장차 이루어지는 “미래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 구원, 현재 구원, 미래 구원이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이 3개란 말이 아니에요.

3 토막이란 말이 아니에요.

구원이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이미와 아직”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과거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그려졌고!

현재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있으며!

장차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모두다 예수님이 하세요.

 

그렇다고 구원이 미완료가 아니에요.

이미 완료 된 것을 역사적 사고로 3 시제로 말할 뿐이에요.

우리 몸이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어요.

또한 지금도 죄 아래서 난 육신의 몸으로 살고 있으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받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몸이 역사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묵시적으로 보면 구원은 단회적이고 완료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미완료가 아니에요.

묵시는 완료 세계에요.

그런데 묵시적인 일이 역사 속에서 나타 날 때는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적 모습으로 나타나요.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요.

창세전 언약은 묵시적 언약이에요.

그래서 묵시에 속한 성도의 구원을 역사적인 시제로 과거 현재 미래로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미완료의 세계이고, 묵시는 완료의 세계에요.

성도는 비록 역사에 있지만 묵시로 살고 있어요.

미완료의 세계에서 완료로 살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게 묵시에요.

다른 말로 영원이고 영생이에요.

 

성도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영원을 오늘로 살게 하고 영생을 현재로 살게 하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영생한 자로서 이미 천국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천국 안이 바로 예수 안이에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그리신다고 했지요.

 

그런데 창세전 언약을 들여다보면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있고!

구원 받은 자로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어요.

구원 받음을 죽음에서 살려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자로서의 삶을 말해요.

 

구원 받음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이루셨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이루어 가시고 계세요.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을 살게 하세요.

그 삶에 모습을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살아가게 하는 그림을 그려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성도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이사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어요.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 혼자서 다 하셨어요.

 

예수 안으로 이사를 해 놓고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사용을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 몸에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세요.

여기에 우리 몸이 언약을 위하여 소모품처럼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서 초가 녹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몸을 초처럼 녹이면서 예수라는 빛을 밝히세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삶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영적 싸움이에요.

 

우리는 나로 살고 싶은데 예수님은 나로 살지 못하게 하고 예수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라 내 삶을 차압당하고 예수님의 삶으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했어요.

“내”가 아니고 “우리”에요.

 

“우리”란? 어떤 모임을 말해요.

“나” 라는 개체가 모여서 “우리”라는 집합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다른 말로 “교회”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나” 를 “우리” 라는 “교회”를 겨냥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라는 내가 “우리”라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나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나”라는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면 더 이상 “나”는 없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다가 하나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편지를 하지요.

“나”에게 편지 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다 편지하세요.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 편지를 받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다 편지를 합니까?

이는 성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받아야 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지체들에게 각각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지체는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어 있어요.

헌신이 되어질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 그림을 그리세요.

그러니 성도는 교회 생활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천국을 모형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들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임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금의 교회에요.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에요.

물론 이 속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어요.

 

교회가 우리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면 됩니다.

옳다 그르다는 분별을 하되 심판은 하지 말고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면 되어요.

약속으로 난 자는 약속을 믿고 살면 되어요.

 

심판은 주께서 알아서 하세요.

주께서 넘어질 자는 넘어지게 하시고 세울 자는 세우세요.

그런데 우리는 받은 은사로 섬기지는 않고 옳으니 그리니 심판만 하고 있어요.

이건 어리석음이고 악이에요.

 

하나님은 모든 심판은 주께 맡기라고 하는데도 우린 기어코 자기하고 다르면 잘라내는 심판을 행사하고 있잖아요.

원수 갚는 것은 주께서 하신다고 하는데도 우리가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그러세요.

야! 정낙원이 너는 네가 받은 일이나 잘해!

남 보지 말고!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찾아가서 베드로에게 야! 너는 젊어서는 니 맘대로 다녀도 늙으면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젊다 늙다 라는 말은 나이가 많다 적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시기 전과 성령이 오시고 난 후를 말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니 맘대로 살지만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다니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에 쌓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곁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그럼 얘는 어떻게 되는데요!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걸 니게 왜? 신경을 쓰느냐!

내가 요한을 볶아 먹든 삶아 먹든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럽니다.

애들아! 남 신앙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라!

그래서 교회 안에서 남에 신앙을 판단하지 말고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에 신앙을 간섭하려고 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왜? 이 자리에 불러 놓았는지!

다 뜻이 있어서 불러 놓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주신 은사로 섬기면 되어요.

남이 복음을 알든 모르든 상관치 말고!

남이 봉사를 하든 말든 상관치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봉사하고 섬기면 되어요.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 신앙을 판단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께 맡기고 각자 받은 은혜로 감사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어요.

 

교회 안에는 양과 염소가 있어요.

염소를 골라내는 것은 목자가 할 일이지 양이 할 일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양과 염소를 배치해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다 뜻이 있어서 그래요.

 

교회 안에 마귀가 심어 놓은 원수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양을 가지고 마귀가 심어 놓은 염소를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양은 누가 하나님의 원수인가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다.

 

누가 이리냐?

양을 잡아먹는 놈이 이리에요.

교회 안에 누가 이리냐?

성령으로 난 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이리에요.

 

어느 시대이고 육체로 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괴롭혔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육체로 난 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잖아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복음은 없어요.

그건 뱀의 말이에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은 사단의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더 열심을 내고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 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임무를 잘 마치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도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아들이 실패하면 아버지 망신을 시키는 일이니 아버지 체면을 위해서라도 아들이 해야 하는 일을 무사하게 잘 마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성도가 구속이 된 것은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하지요.

이를 언제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합니까?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라고 합니다.

 

구속이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됩니까?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됩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처리해 주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일컬어 보배로운 피라고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피 안에서만 거룩하다고 여기심을 얻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대로 자신의 피를 뿌릴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그 일을 하고자 아버지께 도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잘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또 우리의 생각과 역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요.

어떤 기도를 합니까?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합니다.

 

무슨 잔입니까?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이 잔을 옮겨 달라는 것은 십자가를 안 지고 싶다는 말입니다.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수종을 들게 합니다.

어떻게 수종들게 하는가 하면 십자가를 지도록 수종을 들게 하세요.

천사들이 예수님의 원대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라고 도웁니다.

 

천사들이 지금 예수님 곁에서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 창세전 언약을 기억하세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죽어야지요!

 

그런데 이렇게 안 죽겠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예수님이 죽어야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나올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마음을 고쳐 잡숫고 얼른 십자가 지러 갑시다!

이제 그 때가 되었으니 얼른 죽으러 가자고 수종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내용이 그 내용이에요.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할 때 천사들이 수종들면서 하던 이야기를 지금은 예수님 자신이 천사 입장에서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서 아들을 죽게 하시는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을 아셔야 해요.

이 마음을 알아야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이해 할 수가 있어져요.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에 넘기우는 일을 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성도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로 죽으러 보내는 것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명을 줍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보냈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해서 죽으라고 보냈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가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이 일을 인간의 힘으로 감당 할 수가 없으니 성령을 주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죽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정과 욕심이 죽고!

자존심이 죽고!

옛 사람이 죽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은 죽으러 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으러 보낸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죽으러 보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것 속에는 예수님이 성도를 대하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성도들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기 싫어요.

육신은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의 몸이나 우리의 몸이나 똑 같아요.

 

때리면 아프고!

밥 안 먹으면 배 고프고!

힘들고 피곤하고 그래요.

 

사람들은 예수님은 우리 몸과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의 몸이 만약에 우리 몸과 다르면 우리의 중보자가 되지 못해요.

 

중보자가 되려면 우리와 똑 같아야 해요.

그래야 인간의 아픔을 알고 중보를 할 수가 있어요.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체휼이란? 우리의 아픔을 그대로 다 느끼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겁니다.

육신을 입고 와서 육신에 갇혀 있는 자들을 빼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육신으로부터 빼내 주시는가 하면 대신 죽어줌으로서 빼내 주십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란? 대신 바쳐진다는 말인데 이를 쉬운 말로 물물교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을 대신 밀어 넣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예수님하고 맞바꾼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육신의 죽음 앞에서는 두려운 겁니다.

이 두려움을 해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러 왔으니 십자가를 지기는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화를 다시 가질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이 일을 잘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사히 잘 마쳐서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가졌던 그 영화를 가지자고 합니다.

 

영화란? 어원적으로 꽃이 활짝 핀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일로 말하면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일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간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육신은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하여서 물물교환으로 주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의 육신이 죽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일을 다 하시고 반납하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 이제 이 몸을 반납할게요.

받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 육신이 필요가 없어요.

이 육신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에 가면 하늘에 몸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목숨을 버리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지금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지요.

이는 버려야 할 목숨과 얻어야 할 목숨 두 목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버려야 하는 목숨은 어떤 목숨이고, 얻어야 할 목숨은 어떤 것입니까?

버려야 할 목숨은 흙에서 난 몸이고!

얻어야 할 목숨은 하늘로부터 난 목숨입니다.

 

죽음이란? 땅에 몸을 주고 하늘에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하늘에 목숨을 얻기 위해서 땅에 목숨을 반납하는 것입니다.

마치 헌 집 주고 새 집을 받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슬퍼 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영화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화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고 말이에요.

 

원리적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있어 죽음은 영화로운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고통이고 슬퍼요.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죽음도 창세전에 그 영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을 끝내고 안식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을 보면 성도의 죽음은 침상에서 평안히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이 죽는 것은 화액 전에 데려감이라고 하지요.

한마디로 고생 그만하고 오라는 거에요.

죽음은 세상에서 제대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 퇴근하고 집에서 편히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일컬어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 자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또는 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서는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에요.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두려워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보이는 이 세상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만 보아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을 통하여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너머에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우리 목숨으로 비교해 보세요.

보이는 목숨이 있고, 보이지 않는 목숨이 있겠지요.

보이는 목숨은 흙에서 났고, 보이지 않는 목숨은 하늘에서 납니다.

 

예수님이 버려야 한다고 하는 목숨은 땅에서 난 목숨이고, 얻어야 할 목숨은 하늘에서 난 목숨입니다.

이 목숨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에게도 있어요.

 

바울이 삼층천에서 이 목숨을 보았어요.

삼층천에 갔더니 거기에 바울이 있는 겁니다.

분명히 육신은 이 세상에 있는데 말이에요.

 

바울은 거기서 두 바울을 본 겁니다.

세상에 있는 바울과, 하늘에 있는 바울을 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바울은 하늘에 있는 바울의 아바타와 같은 것이에요.

 

이 모습을 보고 난 후 바울은 죽고자 소원했어요.

아! 빨리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그 영광을 보고 나니까 이 세상에 환란이나 실패가 두렵거나 겁나지 않는 겁니다.

 

바울은 이 세상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성도들에게 얘들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장막을 덧입게 되니 안심하라고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이 어디입니까?

보이는 이 땅 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입니까?

하늘나라이지요.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하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요?

하늘나라를 지향하고 살겠지요.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살겠지요.

여기는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으로 생각하겠지요.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살던 몸을 반납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땅에다 반납하고 가야해요.

 

우린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우리의 기도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에게 영생을 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에요.

그럼 영생을 알아야겠지요.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무엇이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우리는 영생 그러면 영원토록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문자적인 의미로만 안단 말입니다.

 

물론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영생 속에는 영원히 산다는 의미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있어요.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요.

 

예수님은 영생을 문자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잖아요.

예수님은 영생이라는 문자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영생은 이런 것이다” 라고 하나님 입장에서 해석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뭐냐?

한마디로 예수가 참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성경이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하였지만 그 언어 속에 성령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문자로 찾아내지 못해요.

오직 성령만이 찾아내세요.

 

그러니 성경은 아무나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세상 지식으로 읽어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 지식으로 읽어내면 기껏해야 문자 풀이하는 것 밖에 안 되어요.

문자 풀이로 읽어내면 영생을 기껏해야 영원히 사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참 하나남과 그에 보내신 자 곧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시간성으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은 안다는 관계성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 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아진 관계를 말해요.

 

영생이라는 단어를 원어를 가지고 연구를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것으로 찾아 내지 못해요.

그러니 원어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은 원어를 몰라도 성령이 감동하면 다 이해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보면 예수님처럼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식으로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영생의 본질을 말씀하고 계신 거에요.

 

문자는 하나의 기호에요.

인간들이 “이렇게 하자” 라고 서로 합의헤서 정해 놓은 기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할게요.

 

여기 볼펜이 있어요.

이 볼펜은 인간들이 볼펜이라고 하자 라고 해서 볼펜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볼펜이라고 하지 말고 작대기라고 했으면 우리는 볼펜이라 부르지 않고 작대기라고 부를 겁니다.

이게 문자가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성경은 인간들의 문자로 기록을 했어요.

인간들은 영생을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합의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영생이라는 단어를 보면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을 바탕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영생이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가 합의해 놓은 것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이 합의 해 놓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영생이 틀린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린 예수님이 알려주신 영생으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영생관을 수정하여야 합니다.

 

영생이 무엇이냐?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냥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참 하나님이라고 말할까요?

 

왜? “참” 이라는 말을 붙일까요?

이는 가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참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가짜 하나님은 드러나 있어요.

 

참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누구를 보내서 일을 하세요.

참 하나님은 뒤에 숨어 계시고 누군가를 앞 세우고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앞세우고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라는 그리스도에요.

이게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있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라는 그리스도에요.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직임을 감당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직임이 뭔고 하니 참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 시켜주시는 중보자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일을 시킨 겁니다.

어떻게 화목 시켰는가 하면 자기 피로 화목케 하셨어요.

이게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이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또한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말씀 하시는 하나님 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워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워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아버지란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참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요.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압니까?

 

이는 오직 성령으로만이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이 오시면 그때 너희들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고 했어요.

 

여기서 알게 된다는 말이 곧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그 앎을 말해요.

이건 잠시 후에 설명할게요.

 

암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함이라고 했지요.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영생을 예수님이 알려주신 영생으로 이해하겠지요.

자기 백성들은 영생을 영원토록 사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알고 있겠지요.

 

교회 안에는 예수님처럼 영생을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에요.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영생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요.

 

목사님들이 예수 믿으면 영생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육적 신자들은 할렐루야~ 아멘!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다고 해요.

그러나 이건 틀린 거에요.

 

또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이해하세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지옥에 간 자들도 영원히 죽지 않아요.

인간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해요.

그러니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으로 알고 있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말해요.

아버지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느냐! 에요.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느냐!

아니면 원수의 관계로 있느냐!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하나님을 안 자들이에요.

예수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고 영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러나 하나님과 원수 관계로 있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없이 자기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요.

이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요.

그러니 예수라는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다고 합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영생이란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걸 역(逆)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백성들이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중보자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바로 아버지와 너희를 만나게 해 주는 중보자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고 있는 거에요.

아버지는 아들을 앞세워서 일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일을 하고자 했어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니까 아들을 영접하지 않고 제사를 지낸다고 분주했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 만나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제사를 통해서 만나고자 했어요.

제사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헛되이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고 있어요.

제사를 지내면서도 그 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흠 없는 제물이 죄인을 위하여 대신 희생함으로 죄인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에요.

그럼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덕분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의 핵심은 의로운 제물의 희생에 있어요.

의로운 제물은 곧 참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자를 겨냥하고 주어졌어요.

즉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통해서 장차 흠 없는 분이 오셔서 너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죽어 주실 것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유대인들은 제사를 지내면서도 자기 죄를 대신 지고 죽어 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했어요.

예수님이 지금 내가 바로 아버지가 너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줄 희생 제물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참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과 아버지를 연결해 주는 중보자라고 합니다.

이걸 아는 자가 바로 영생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의로운 제물의 희생에 의미를 모른채 문자적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설교한 내용을 한번 들어 볼까요.

 

사도행전 7장을 봅시다.

 

행 7:42-43=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神)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이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야! 이 사람들아!

하나님 말씀을 좀 들어 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상들이 사십년을 광야에서 희생과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드렸는데!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너희들이 언제 나 한데 제사를 드렸느냐!

우상한데 드렸지!

너희들이 사십년 동안 꼬박 꼬박 드린 제사는 나에게 한 것이 아니고 몰록이라는 우상에게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돌아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빼 먹지 않고 매일 매일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렸어요.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제사를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제사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로운 한 몸인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스데반이 하는 말은 이걸 모르고 드리는 제사는 모두가 헛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생각으로 드린 거에요.

자기들 생각으로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했어요.

율법대로 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문자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그 문자적으로 한 것이 문제에요.

 

문자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 의미는 찾아 내지 못하고 문자에 적힌 대로 했어요.

그러니 했다는 행위만 있지 그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드린 것입니다. 

이걸 말라기는 절기(제사)의 똥이라고 하면서 얼굴에 쳐 바른다고 했어요.

 

말라기 2장을 봅시다.

 

말 2:1-3=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지금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말하지요.

알다시피 제사장들은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에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에요.

그냥 건성으로 제사 지내기에만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이걸 절기(제사)의 똥이라고 했어요.

 

똥이란? 양분은 다 빠지고 난 찌꺼기를 말해요.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외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지키는 그 제사라는 절기(제사)를 확 걷어차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곤 그 절기(제사)의 똥을 너희들 얼굴에 쳐 바르겠다고 하십니다.

 

절기(제사)의 똥이란 말은 절기(제사)를 지켰다는 것만 있었지 그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절기(제사) 속에 담겨 있는 그 의미를 붙잡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절기(제사)를 지키기에만 급급했지 이 절기(제사)를 왜? 지켜야 하는지!

또 이 절기(제사)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기(제사) 속에 영적 의미를 담아 놓았는데 이스라엘은 영적 의미는 모르고 절기(제사)만 지킨 겁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건 신약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종말 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마태복음 7장을 보면 똑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어요.

그리고 갖가지 일들을 했어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고 선지자 노릇도 했어요.

 

요즘 식으로 주님에 대한 열심으로 교회에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목사 노릇도 하고 장로와 집사 노릇도 했어요.

분명히 예수 이름으로 믿음으로 했어요.

진심으로 했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모른데요.

도리어 불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불법이 뭔가요?

법을 잘못 집행한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예수를 잘못 믿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오해했어요.

자기들 식으로 예수를 믿은 겁니다.

자기들 맘대로 예수님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전부 자기 신학이라는 틀에 맞추어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헛되이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랬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장로들의 유전으로 나를 섬기니 헛되이 경배 하는 도다” 라고 했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예수를 잘 못 믿고 있어요.

전부 자기 식으로 믿고 있어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가 중요해요.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인가!

아니면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인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요?

복 주는 예수인가요?

아니면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인가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안다면 신앙생활이 달라져요.

법으로 하는 제사 신앙이 아니고 긍휼을 바탕으로 하는 감사 신앙이 되어요.

 

하나님은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아요.

긍휼을 원해요.

 

제사를 왜? 지내는지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죄 때문에 지내는 것이잖아요.

그럼 제사 속에는 하나님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제사를 지내면서도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흠 없는 제물의 대신 죽음으로 용서받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제사 지내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어요.

그 속에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는 상한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니 선지자들이 책망을 하면 우리 제사 지냈잖아요!

제사 지내라고 해서 제사를 지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냈는데 왜? 그럽니까? 라고 항변 하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말을 빌리면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이런 제사를 지냈어요.

광야 사십 년은 구약 전체를 함축하고 있어요.

그러니 구약 내내 이런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내가 언제 이런 제물 달라고 했느냐,

다신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제사 지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제자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제사를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그 의미를 몰랐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시면서 이 모두가 장로의 유전으로 배워서 나를 헛되이 경배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의 그림자입니다.

영적 상태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은 곧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남에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에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어요.

예수를 잘못 믿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신앙생활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른대요.

 

불법을 행하였다고 한다구요.

전부 예수를 엉터리로 믿고 있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잡아 주시려고 오셨어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하여서 바로 잡아 주시지 않으면 또 구약 이스라엘처럼 자기 생각으로 알아진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진 그 생명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을 올바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을 올바로 아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인데!

그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 라는 말은 경험으로 알아진 것을 말해요.

학습으로 배워서 알아진 지식이 아니고 실제 만남으로 알아진 앎이에요.

마치 부부간에 잠자리를 통해서 서로를 알게 된 앎을 말해요.

 

이 앎은 성령이 임하면 일어나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갖게 됩니다.

이 증거가 있는 성도는 더 이상 예수를 찾아다니지 않아요.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험된 증거를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두려움이 없어요.

 

성령이 임하면 성경 속에 하나님이 눈으로 본 바가 되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어요.

이것은 성경이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어요.

하나님이 실제로 내 삶 속에서 간섭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것이 믿어져야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지 않아요.

이것이 안 믿어지면 지식으로 습득 된 영생 관을 갖게 되어요

그럼 신앙이 마르다 신앙이 되어요.

 

마르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베다니 라는 곳에 나사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 사람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 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자기 오라비가 병이 들었으니 얼른 와서 고쳐 달라고 기별을 합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예수님에게 오빠가 아프다고 하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한 걸음에 달려와서 고쳐 줄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합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고도 가지 않고 있다가 장사를 다 지내고 난 후 죽은지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의 장사를 다 지내고 난 후 넋을 놓고 있는데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섭섭함이 몰려 들고 갑자기 예수님이 원망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자기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사로가 부활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마르다가 톡~ 쏘면서 하는 말이 나도 압니다!

알아요!

세상 끝 날이 되면 부활 할 줄을 우리도 다 안다구요!

비아냥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니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아!

지금 부활한다고 합니다.

 

마르다 신앙은 부활과 영생을 문자풀이식으로 아는 것이에요.

마르다의 부활관은 모든 유대인들의 부활 관이에요.

유대인들은 세상 끝 날이 되어서 부활을 한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들은 부활 그러면 아! 나중에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부활관은 역사적인 부활관이에요.

역사를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은 다 이러한 부활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밖에서 오셨어요.

역사 밖을 묵시라고 해요.

흔히들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묵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요.

묵시적인 일이 역사 속에서는 사건으로 나타나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일들을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서 사건화 시켜요.

 

지금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날 믿는 자는 지금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지고 부활이란 먼 훗날의 일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지금 현재 여기서 일어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시청각 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죽으면 끝인 줄 알고,

또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단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단다!

내가 그 곳에서 왔단다!

 

그곳은 죽음이 없는 곳이란다!

그곳을 일컬어 부활의 세계라고 한단다!

내가 너희를 그리로 인도 하겠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잠시 후면 너희들도 그리로 갈 것이다!

내가 너희를 그리로 초대 하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아라!

여기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났듯이 나도 죽음에서 살아나서 너희들 안으로 올 것이다!

이러한 것을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들도 죽으면 나사로처럼 부활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란? 예수 안을 말해요.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부활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하고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영생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천국이 왔다고 하였어요.

하늘나라가 임했다고 하였어요.

이는 곧 예수님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천국이 어디냐?

예수님 안이에요.

 

그런데 역사에 속한 사람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어요.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장소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부활도 역사적 관점에서 나중에 일어난다고 믿고 있어요.

 

구원이란? 역사에서 묵시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성도는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묵시적으로 이해해요.

묵시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어요.

예수 안이냐!

예수 바깥이냐! 만 있어요.

 

예수 안이 영생이고!

예수 안에 부활이고!

예수 안이 천국이에요.

우린 여기서 마르다를 욕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신앙이 마르다 신앙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세상 끝에 살아나는 부활을 알고 있잖아요.

죽어서 가는 천국을 알고 있잖아요.

 

지금 천국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지금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지금 영생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이 지금 알려주고 계신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 자고 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묵시적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역사적으로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를 통하여서 제자들을 고발하고 있으면서 또한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든 천국이든 현재화하고 있어요.

우리는 역사라는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이해를 해요.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요.

 

그러니 천국이라고 하면 어느 공간을 생각하는 겁니다.

저 하늘 멀리 어딘가에 있는 그런 천국을 그려요.

부활도 나중에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마르다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지 않아서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만 자기 집에 오셨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예수님은 어떤 장소에 매여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육이에요.

어둠의 사고란 말입니다.

육은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서 고정화하고자 해요.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성전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신이 계신 집이 필요한 거예요.

집이 있으면 만나는 날짜도 있어야 해요.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들은 성전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런 사고는 지금 우리의 사고에요.

우리도 은연중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된다고 믿고 있잖아요.

그것도 철야 시간이나 새벽 시간에 말이에요.

이게 육에 속한 사람의 생각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세요.

무소부재 하세요.

안 계신 곳이 없고 존재치 않는 때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디든지 계세요.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있든지 없든지 개의치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고치고자 했다면 집에 가지 않아도 낫게 할 수 있었어요.

그냥 말씀만 하시면 나아요.

이걸 묵시적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칠 때 묵시적으로 일을 하셨어요.

 

어떤 백부장의 집에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인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찾아 갑니다.

예수님에게 청을 합니다.

예수님 지금 우리 집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좀 고쳐 주세요 라고 했어요.

 

이에 예수님이 그래 가보자!

너희 집이 어디냐!

가자고 합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주님!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어찌 집에 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말씀만 하시면 다 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집에 가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 말씀만 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세상에 온 이스라엘을 다 뒤져봐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네 믿음이 크다” 고 했어요.

 

백부장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어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 밖에서 오신 묵시에 속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백부장을 칭찬하지 않고 그 믿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백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은 묵시로 일하시는 분이란 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크다고 믿음을 말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묵시적으로 이해를 해요.

그러니 부활이나 영생이나 천국을 현재화 하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그 사고의 틀을 깨트리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지금 현재적 사건으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봐라!

지금 부활했잖아!

내가 부활이고 영생이야!

그러니 나와 있는 것은 부활 안에 있는 것이란다!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들이 나사로처럼 부활의 세계 안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도 동일해요.

영원히 산다는 개념보다 영생하시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으면 이미 영생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오래 산다는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들아 영생이 무엇인줄 아니!

그것은 아버지와 나를 아는 것이란다!

내가 너희 죄를 대신하여 죽은 그리스도란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으로 너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니!

누가 너희를 참소하거들랑 내 피를 내어 놓으려무나!

 

그리고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고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니 우리가 천국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국 안에서 영생으로 살고 있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천국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이 벌레만도 못한 놈을 위해서 아들을 속전으로 내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찬미합니다.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에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항상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케 하셔서 그 어떤 사단의 참소에도 흔들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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