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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38강. 흠 있는 자와 제사장 직무 (레 21:16-24)

by coroa 2021. 11. 2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8강. 흠 있는 자와 제사장 직무 (레 21:16-24)

-.정낙원 목사

 

레위기 21:16-2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22. 그는 하나님의 식물의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23.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4. 모세가 이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였더라”

 

제사장은 성전의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성전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고 거룩을 유지케 해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거룩케 하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모든 것에 거룩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백성들의 어른으로 삼은 것도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성막에서 드려지는 각종 제사와 성소 안에서 행하여지는 제사장 직임을 담당 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제사장 가문으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지목하는 것이지 인간의 조건으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론의 아들들은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제사장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도의 구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구원이 제사장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지목을 당하고 선택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 43장에서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창조 하였고 조성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를 일컬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신분을 누리는 것과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육체의 흠이 있는 자들은 제사장이라는 신분은 유지를 하지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 직분은 육체적으로 흠이 없는 거룩한 자만이 감당 할 수가 있습니다.

육체에 흠이 있는 자가 성소를 드나드는 것은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하였습니다.

성소를 더럽힌다는 말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성막의 뜰에는 들어와서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의 제물인 지성물은 먹을 수는 있어도 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소 안은 오직 흠 없는 자들만이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흠이라는 말은 “뭄” 이라고 하는데,

이는 “더러운 것”, “얼룩”, “결함”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고 결함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흠은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흠은 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육체적인 흠을 통해서 죄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육체의 여러 가지 흠처럼 삶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죄가 이러한 부패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흠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선천적인 장애도 있고 살아가면서 다치거나 병이 걸려서 생기는 후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흠은 눈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코, 손발, 몸통, 피부,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온 몸에 퍼져 있습니다.

 

소경은 보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절뚝발이는 두 다리의 길이가 달라서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자를 말합니다.

코가 불완전한 자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지체가 더한 자는 수족의 숫자가 많은 자를 말합니다.

손발이 부러진 자는 온전히 일을 할 수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곱사등이나 난장이는 몸이 기형적으로 성장하여서 생긴 자를 말합니다.

눈에 백막이 있는 자는 눈이 흐려서 사물은 온전하게 분멸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괴혈병이나 버짐은 피부가 깨끗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불알이 상한 자는 생식 기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죄인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육체적 결함은 신약에서는 영적 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문자적으로 육체의 결함을 가지고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즉 장애자라고 해서 구원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육체적 흠을 가진 사람은 제사장 직분을 감당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제사장을 신약에서 목사라고 말을 한다면 신약에서는 장애자라고 해서 목사가 되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육체적 조건으로 성도로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육체적 흠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영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세워졌습니다.

신약 교회에서의 제사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에서는 율법의 의를 가진 자는 제사장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려면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의 의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만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자는 눈을 뜬 자이고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소경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는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소경이 눈이 떠진 것입니다.

눈이 떠지고 나니까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 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 즉시로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주 라는 것을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앞을 보지 못하면 제물을 분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제물이 온전한 것인지 아니면 흠이 있는 것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럼 부정한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소경이면 율법의 의로 하나님에게 나오고자 합니다.

신약에서 율법의 의로 나오는 것은 부정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을 일컬어 소경이 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뚝발이는 두 다리의 길이가 달라서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자를 말합니다.

솔로몬 성전에 보면 두 놋 기둥이 있습니다.

“야긴”과 “보아스”라고 합니다.

 

오른편 곧 남쪽 기둥의 이름을 “야긴”이라고 합니다.

야긴은 “그(여호와)가 세우실 것이다”, “그분이 일으키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성전을 세우시고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왼편 곧 북쪽에 세워진 기둥은 “보아스” 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그(하나님) 안에 능력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에 여호와의 능력이 머문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성전은 성도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성도들 심령에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십니다.

성전을 두 기둥이 받들고 있듯이 성도들 안에 세워진 성전도 두 기둥이 받들고 있습니다.

 

두 기둥은 두 언약과 같습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죄에서 구원하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짝입니다.

 

율법은 은혜를 전제로 있고,

은혜는 율법을 바탕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은 율법과 은혜를 동일한 중수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은혜를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은 내용을 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내용을 가진 사람은 그릇도 귀히 여깁니다.

천국의 서기관들은 옛 것과 새 것을 귀하게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두 언약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언약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언약 중에서 어느 한 쪽이 경홀히 여기게 되면 절뚝발이 신앙이 됩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자는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의 길이가 다르고 중수가 다르면 절뚝발이가 됩니다.

절뚝발이 신앙으로서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뚝발이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입니다.

코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향기를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향기는 삶을 말합니다.

 

두 가지 향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의 향기와 사망의 향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냄새는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이 토하는 향기이고,

사망의 냄새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토하는 향기입니다.

 

제사장이 코가 이상이 생기면 이것이 은혜로운 예수그리스도 생명의 향기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의인 사망의 율법의 향기인지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도 할 수가 없습니다.

새 언약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에서 율법의 향기를 토하게 되면 그것은 성소를 더럽히는 것과 같습니다.

 

지체가 더하거나 손발이 부러진 자는 제사장 직무를 담당 할 수가 없습니다.

수족은 일하는 기관입니다.

손발이 부러졌다는 것은 온전하게 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족이 더한 것은 넘침을 말하고,

손발이 부러진 것은 온전치 못함을 말합니다.

과유불급입니다.

 

신앙은 넘쳐도 안 되지만 모자라도 안 됩니다.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두 가지 행함이 있습니다.

율법적 행함과 믿음의 행함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행함은 법으로 하는 것이고,

믿음의 행함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함을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고,

믿음의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으로 인하여 분쟁을 할 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들은 먹지 못하는 자들을 업신여기기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나 안 먹는 것이나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자유 때문에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든다고 하면 나의 자유가 연약한 자의 양심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므로 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일수록 자신의 자유가 연약한 자들에게 시험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아래 있어도 때로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율법적으로 행할 때도 있습니다.

은혜 아래 옮겨짐을 당하여도 아직까지 율법의 습성이 남아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적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하다고 하여서 이들 앞에서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행동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때론 율법주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어른은 어린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행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행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할 수 있어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배려하여야 합니다.

강함이 약함을 배려하지 않을 때는 약한 자를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연약한 자들이 시험이 든다고 하면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율법적 행함도 필요하고 때로는 믿음으로 하는 행함도 필요한 것입니다.

강건한 사람은 율법과 은혜를 조화롭게 잘 사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체가 더하여도 안 되고 손발이 부러져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교만한 자도 안 되고 균형을 잃은 자도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곱사등이나 난장이는 몸이 기형적으로 생긴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성장 발육에 문제가 있는 자들입니다.

신앙은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거나 게을리하는 사람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므로 제사장 직무를 담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어린아이로서 교회 안에서 어른인 제사장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백막이 있는 자는 눈이 흐려서 사물은 온전하게 분멸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눈이 흐리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눈이 없다는 뜻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실족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리거나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사람을 여자라고 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하는 것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성도는 교회에서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는 목사가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는 목사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라도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남자입니다.

남자라도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여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란?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괴혈병이나 버짐은 피부가 깨끗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이는 살아가는 삶에 흠이 많은 것을 말합니다.

삶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삶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그려내는 그림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성도의 삶은 신앙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런데 괴혈병이나 피부병이 번진 사람들처럼 삶이 깨끗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이 문란한 사람은 사단으로부터 참소를 당하게 됩니다.

사단은 항상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성도의 삶을 윤리적 온전으로 말하는 것은 사단으로부터 참소를 막기 위함입니다.

 

불알이 상한 자는 생식 기능을 상실한 자를 말합니다.

생식 기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강건한 남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신앙의 미숙함을 말합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예수의 생명으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린아이로부터 출발하여 남자답게 강건한 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남자는 생명이 영글어서 씨를 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알은 생식기관입니다.

그런데 고장이 난 것입니다.

불알이 상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 “메로아흐” 라고 하는데 이는 “멍들어 찌그러진”, “부서진” “약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병이 들거나 외부의 충격에 의하여 부서지거나 찌그러져서 생식기능이 유약해진 불알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진리의 길을 버리고 비진리를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단은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이단의 교리를 따르는 자는 불알이 상한 자와 같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므로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거룩 또한 전인적인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는 화면과 같습니다.

 

구원은 몸의 구속까지입니다.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도 거룩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단번에 이룬 거룩을 현재화 시켜서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하늘에 가치로 하늘을 지향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흠이 있다고 하여서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육체의 흠이 있으면 제사장 직분은 행사하지 못하여도 제사장 신분은 상실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록 육체의 흠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제물인 지성물을 먹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성막에서 드려지는 모든 제사의 제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지성물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록 성도가 흠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구원은 유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5:1-13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음행이 만연하였습니다.

음행은 이방인 신전에서 행하여지던 종교의식입니다.

그래서 성적인 문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방 문화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교회 안에서까지 들어와서 만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계모와 교합하는 음행의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제제를 하지 않고 방치를 해 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교회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인데 어찌하여 세상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방치할 수가 있느냐?

이러한 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교회의 거룩성을 헤치는 것이 되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누룩과 같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듯이 교회 안에 작은 죄도 방치해 두면 온 교회를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지은 자를 출교를 시키라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출교를 당한다고 해서 구원에서 잘려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는 몸은 사단에게 내어주었지만 그 영혼은 마지막에 살리심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육신의 흠은 있지만 그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육체의 흠이 있는 제사장들이 비록 제사장 직임은 감당 할 수는 없어도 제사장의 신분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흠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지성물을 먹게 한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므로 행위로 취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이므로 은혜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에서 절려 나가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켜내는가 하면 은혜로 지켜내십니다.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구원은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으로 잘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흠을 통하여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하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는 그 어떤 것에서도 잘려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보존해 주십니다.

 

요 17:9-15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죄는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죄는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죄는 엄청난 아픔을 몰고 옵니다.

 

성도는 징계는 당하여도 구원에서 잘려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징계가 훨씬 아픈 것입니다.

징계는 죄를 짓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이는 정답을 아는 자가 답을 틀리게 적었을 때 정답을 모르는 자보다 훨씬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답을 모르는 자는 답을 틀리게 써도 아픔을 모릅니다.

아픔은 답을 아는 자들만이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아파하는 것도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에 대한 아픔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대한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에 대하여 압니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죄 때문에 고통스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불신자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살아 있는 자만이 느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살려 놓고 죄 아래 살게 하신 것은 죄를 미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긍휼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서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긍휼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흠 있는 자들입니다.

흠 없는 제사장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제사장 신분은 가졌지만 제사장 직임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성물을 먹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비록 죄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죄인이지만 긍휼의 자리에서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눈앞에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울듯이 우리도 우리의 눈앞에서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울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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