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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레위기강해)36강. 너희는 만민 중에서 구별된 자니라 (레 20:1-27)

by coroa 2021. 11. 1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레 20:22-27절.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24.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25. 너희는 짐승의 정하고 부정함과 새의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곤충으로 인하여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 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27.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36강. 너희는 만민 중에서 구별된 자니라 (레 20:1-27)

-.정낙원 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만민 중에서 구별된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방인들의 풍속을 쫓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들과 다른 삶을 살아감으로서 구별 된 백성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입니다.

말만 구별된 백성이지 실제로는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의 음식을 먹고, 애굽의 교육을 받고, 애굽의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명분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지 실제로는 뼛속 깊이 애굽 사람인 것입니다.

 

애굽 사람에게 애굽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불가능 합니다.

애굽 사람에게 애굽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은 기어 다니는 짐승에게 기어 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에게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만유를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이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문자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왜 하나님께서 이치에 맞지 않는 이러한 명령을 내리셨을까?

여기엔 필시 무슨 다른 뜻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인에게 의롭게 살라고 하는 데에는 분명히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진의를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죄성은 본성입니다.

죄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본능(속성)은 인간이 의지적으로 억제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속성은 본능적으로 자연히 유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속에는 긍휼과 진노가 있습니다.

이를 드러내고자 두 그릇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또 다른 그릇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시려고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긍휼은 역설적이게도 죄를 통해서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검은 색이 흰 바탕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이실 속성은 긍휼입니다.

긍휼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하고,

진노를 다른 말로 미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모세에게는 긍휼로 대하시고 바로는 강팍케 하셨다고 합니다.

 

이 둘을 두 토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두 그릇이 있습니다.

이를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귀히 쓸 그릇에게는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시고, 천히 쓸 그릇에게는 진노를 담는 일을 하십니다.

긍휼을 담는 그릇은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시고 진노의 그릇에게는 엄위와 법으로 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선택을 입었습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만민 중에서 구별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만민 중에서 구별을 입은 이스라엘에게는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긍휼을 담는 속성을 가지고 게십니다.  

죄인이 죄를 멈출 수가 없듯이 하나님은 사랑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멈출 수 없는 그 사랑을 보여 줄 대상으로 이스라엘이 선택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의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려고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긍휼의 하나님이다’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나는 용서의 하나님이다’

 

이를 보이시려고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구별을 하였다고 합니다.

 

복의 민족은 복의 민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의 민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복은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것입니다.

 

이미 사랑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으며,

장차도 받을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애굽인들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 하여도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자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아낼 수가 없다고 한다면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성도들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에 떨어진 명령은 곧 우리에게 떨어진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출애굽 하기 이전에는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같은데 장소만 애굽에서 광야로 이동이 된 것입니다.

광야로 나왔어도 그 속에는 애굽의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속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교회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어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세상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세상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에서 난 자들에게 너희는 애굽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 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죄를 이길 수가 있다면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잔소리는 하는 것은 안하기 때문입니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잔소리 하지 않습니다.

자식도 잘 할 수 있으면 굳이 잔소리 들어가면서 하지 않습니다.

 

잔소리해서 듣는 자식은 없습니다.

하는 척 하는 것뿐입니다.

부모가 없으면 여전히 자기 좋은 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잔소리 하는 부모도 부모 아래서 잔소리를 듣고 자라 왔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을 쏟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사랑을 쏟은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성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성도(이스라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화면과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의 어그러짐 속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가운데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거룩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큰 의미에서 레위기는 십계명을 해설해 놓은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두 가지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을 규례와 법도로 주신 것은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횡령하지 말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건 명령법입니다.

여기에 죄가 본질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사랑으로 키워갑니다.

하나님은 창조 아래로 피조물들에게 사랑을 주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사랑을 모릅니다.

이게 죄입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서 너희들은 내 사랑을 도적질하는 도적놈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죄와 이웃에 대한 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는 우상숭배로 말해주고 있고,

이웃에 대한 죄는 음행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광야에 나와 율법을 받고 보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고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지 못하고 횡령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추상같을수록 죄는 더욱 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실제의 삶 속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이웃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떨어질 때마다 인간들의 죄는 더욱 더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숭배자를 그냥 두지 말고 죽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웃과 음란하게 교합하는 자들도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 하는 것이나 음행하는 것이나 의미는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자와 이웃과 음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그래서 음란히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이웃과도 음행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행위도 음행이라고 하고 이웃과 간음하는 것도 음행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우상숭배 하는 것과 음란하게 사는 것을 동일하게 말을 할까요?

이는 그 근본이 같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목적과 이웃과 음행하는 것이 그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나 음행은 모두가 육신의 쾌락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육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애굽식 신관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자기를 위하여 찾으면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 의미로는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을 찬송키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찬송을 받고자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자기가 찬송을 받고자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습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는 인간에게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이를 육신의 쾌락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쾌락은 자기만족입니다.

 

어떤 이는 돈으로 만족을 누리고,

어떤 이는 권력으로 만족을 누리고,

어떤 이는 명예로 만족을 누리고,

어떤 이는 대중의 인기로 만족을 누리고,

어떤 이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함으로서 만족을 누립니다.

 

죄가 자기만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그 모든 것은 죄라고 규정을 합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그 어떤 것을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마음에는 원래 하나님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죄인이 하는 모든 일은 자기를 위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모든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삶을 음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뿌리이고,

음란은 그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위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인은 마음속에 미움이 일으킨 사건이고,

간음은 마음속에 음욕이 일으킨 사건이고,

도적질은 마음속에 탐욕이 일으킨 사건이고,

우상 숭배는 마음속에 탐심이 유발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마음이 부패한 자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의 현상들은 그림자이고 실상은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무이고, 행위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시비를 하는 바리새인들을 행하여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짖는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어디에서 기인이 된 것인지를 알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구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간음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고 돌로치려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과연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자인가 묻고 있는 것입이다.

너희도 속에 음욕으로 가득한 자들이 아니냐.

그럼 돌로 칠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으로 그 여자에게는 율법이 되어서 계속하여서 고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 말씀 앞에서 너는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여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없이는 살 수없습니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건 오해하지 마세요.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말씀 몇 자락 지킨 것을 가지고 의인인체 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너 죄인이잖아!

그런데 말씀 몇 자락 지켰다고 죄인 아닌 척 하고 있잖아!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죄에 대하여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말씀 지킴이라는 제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한 자신을 감추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너는 죄를 짓고 안 짓고와 상관이 없이 타고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네가 저지른 죄는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은 죄악 중에 출생된 자임을 알고 탄식하면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제사 행위를 그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긍휼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자신이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를 이길 수가 없는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죄를 짓고 난 후에는 긍휼을 입기 위하여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근거로 나아오는 것은 구약의 제사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것은 신약의 제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구약적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모든 규례와 법도들은 나단 선지자를 만난 후의 다윗의 심정으로 보아야 하고,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전부 예수그리스도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재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의 얼굴에 가려졌던 수건이 벗겨진 것입니다.

비로소 율법의 진의를 올바르게 해석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0장은 죄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 죄이며,

둘째, 성적(性的) 음란 죄입니다.

 

이러한 범죄는 성소를 더럽히고 여호와의 성호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누구라도 우상을 숭배하거나 음행하는 자가 있거든 그 동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죄인의 죽음에 동참케 하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죄인에게 돌을 던지면서 자기 자신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돌을 던지는 자들도 돌에 맞아 죽는 죄인과 동일한 죄를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던지면서 자신도 돌에 맞아 죽는 사람처럼 죽임을 당할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죄를 범한 죄인은 돌을 던지는 자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돌로 쳐 죽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모든 백성이 죄인과 연합하여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범죄한 자를 그 동네 모든 백성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고 인간 쪽에서 해석을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앞서서 왜 이러한 말씀을 주셨는지 그 의도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 채 말씀을 지키는 것은 말씀을 지키지 않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글을 오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 글을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기에 앞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할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인가?

 

지혜로움이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을 돌로 쳐 죽일 자인가?

아니면 내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인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자는 돌로 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면 죄인을 향하여 돌로 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의 편에 서서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실존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바로 간음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돌에 맞을 자들이지 남을 돌로 칠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간음하는 자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사정에 동참하여서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어리석어서 자신도 법으로 심판을 받으면서 법으로 남을 심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한 말이 나중에 너희를 심판하게 된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DNA는 죄를 짓는데 최적화가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하는 모든 일은 죄입니다.

죄인은 죄를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품은 죄는 환경만 조성이 되면 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죄가 밖으로 기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는 의인이라 여기고 죄를 밖으로 토해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자신은 의인인체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인체 하는 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죄인에게 거룩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거룩할 수 없는 자임을 알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쉬운 말로 자기 얼굴에 똥이 묻어 있는 데도 보지 못하고 괜찮은 줄 알고 잘난 척을 하고 있으니까 거울을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울을 준 것은 네 꼬라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거룩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과 밖 모두를 발가벗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라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음에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찌 해야 합니까?

자신들이 살고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고 긍휼하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죄인에게 거룩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시면서 죄인이 살 수 있는 성막의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흠 없는 짐승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만 거룩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속에 담긴 긍휼을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라는 것은 긍휼을 가르치기 위함이지 제사를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모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성도에게 추상같은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인은 하나님이 정답을 알려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곁에서 도와주어도 죄를 못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맺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평을 바랐더니 오히려 포학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민 중에서 구별을 입은 자들에게 거룩한 백성의 기준을 제시함으로 인간의 한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법대로 하면 당연히 죽어야 할 자들에게 흠없는 짐승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용서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려고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 자리에 흠 없는 짐승이 대신 죽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누군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몸을 구속할 구원자를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그리스도가 희생당하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산 바탕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 거리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자랑으로만 가득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자들입니다.

이를 만민 중에서 구별을 입었다고 합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각종의 행위들을 지킴에 여부로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범죄는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수많은 범죄 중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인간의 타락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범죄이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느냐?” 를 묻지 말고, “누구를 믿고 있는냐?” 를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았습니까?” 를 묻지 말고, “누구를 믿습니까?” 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 짓지 말고 삽시다”가 주어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읍시다” 가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죄짓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의 끝에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끝에도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온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말씀대로 산 것으로 나오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주여 내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남을 향하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당신과 같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자입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상숭배하지 않은 자가 되고 음행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아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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