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20강. 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자 (아가 6:1-3)

by coroa 2021. 11. 2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0강. 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자 (아가 6:1-3)

-.정낙원 목사

 

아 6:1-3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보면 항상 긴장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의 우리들의 신앙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늘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어떨 땐 천사가 울고 갈 정도로 하늘 위를 나는 것처럼 하다가도 어느 때는 중풍병자처럼 무기력증에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모습으로 쳐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죄 아래서 난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세상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환경을 이겨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도, 봉사와 섬김도, 연보도, 심지어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예배의 자리에 참석을 하여서 말씀을 들어도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밥상 아래 긍휼의 자리에서 주의 은혜를 사모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잠시라도 살 수가 없습니다!

 

땅은 스스로 산물을 낼 수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아야지만 됩니다.

햇빛도 받아야 하고 비도 받아야 합니다.

생명에 속한 것들은 모두가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우리들은 하늘이신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지켜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도 솔로몬이 지켜냅니다.

술람미는 그 사랑을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신랑을 문전박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이 왔음에도 잠을 깨우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육신을 이길 인간은 없습니다.

잠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사랑을 받은 술람미라 할지라도 잠을 깨우는 신랑은 싫은 것입니다.

신랑이 싫어서가 아니라 몸뚱이가 신랑의 소리를 들어도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긍휼로 용서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속을 썩여도 부모는 일향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술람미가 비록 문전박대를 하였어도 솔로몬은 사랑의 흔적을 남겨주고 떠났습니다.

이는 술람미의 조건과 상관없이 솔로몬이 그 사랑을 지켜낸다는 싸인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린 늘 예수를 부인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릴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이 깨달으면 많이 사랑하게 되고 적게 깨달으면 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농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술람미처럼 천하디 천한 죄의 종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건 엄청난 은혜이고 경천동지할 사건입니다.

 

이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같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고 원수 노릇을 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인 중에서도 괴수 일 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키셨다고 합니다.

죄인일 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취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못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다가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파내는 그런 일은 없어요.

말을 안 들어도 부모 자식 관계는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열심히 하면 구원시켜주고 잘못하면 탈락 시키는 그런 구원은 없어요.

 

구원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 문제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러면 어쩔까, 저러면 어쩔까, 고민하지 마세요.

그럼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요.

신앙생활은 구원 받은 자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뒤에 일은 다 잊어버리고 쫓아간다는 것은 구원이 세상의 모든 걸 다 버려도 아깝지가 않은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율법 아래서 자랑하던 가문이나 학벌이나 업적이나 열심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자랑거리가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도록 고생한 것조차도 자랑 하지 않고 주의 은혜로 이겨냈다고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만 자랑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죽도록 고난을 받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려고 고난 속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난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원수 노릇을 한 바울을 구원한 목적을 봅시다.

 

행 9:15-16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바울이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바울은 예수쟁이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중에 예수님이 빛으로 찾아옵니다.

 

빛 가운데서 말씀 하십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자 바울이 놀라서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이에 빛 가운데서 들리는 음성이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바울을 그 소리에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고 맙니다.

혼절을 해 버립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소경이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울을 아나니아 라는 선지자에게 인도하여서 바울을 안수토록 해서 눈을 뜨게 하여서 보게 하라고 합니다.

이 때 아나니아가 주님께 싫다고 합니다.

아니~ 이 놈은 스데반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악명 높은 놈인데 왜 이런 놈을 살려 주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러자 주께서 이 놈은 내 이름을 전하다가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당한 것만큼 이 놈에게 당하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놈이 예수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죽인 것같이 자기도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임 당할 것이란 말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어야 할 놈으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바울만 그러느냐?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러해요.

모든 성도는 예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한 목적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자신은 하늘나라로 가고 그 자리에 성도를 세워 놓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한 그대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자 용이 땅으로 내어 쫓깁니다.

그러자 용이 화가 나서 땅에 있는 예수쟁이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당한 것을 성도들에게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다가 마귀의 세력들에게 죽임 당할 팔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천국복음을 전하자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고 발악을 했듯이,

성도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증거하면 마귀의 종들이 발악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마귀를 끄집어내는 미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도를 마귀의 세력을 끄집어내는 미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끼는 원수를 유인하는데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의 정체를 폭로시키는데 이용되고 있어요.

그러니 성도는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걸 증인된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세요.

 

우린 예수를 증거하는 도구에요.

그래서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종(從)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은 일을 시키려고 값을 주고 샀어요.

 

무슨 일을 시키느냐 하면 예수님 자랑하는 일을 시켜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케 하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1:4-6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에 있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서 구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구원을 거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구원을 해 주셨다고 합니다.

난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라고 구원 해 주신 것입니다.

 

용서가 은혜로 드러나려면 원수 됨이 먼저 있어야겠지요.

원수 같은 놈을 용서 해 주어야 그 용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해 준 것입니다.

원수 같은 바울을 용서해 준거에요.

 

베드로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옴팡 뒤집어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제자를 대표하고 있어요.

제자는 또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구요.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자들이에요.

이런 놈들을 예수님이 찾아가서 용서해 주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뒤집어쓰고 있어요.

우리가 존재하는 자체가 은혜 덩어리에요.

원수를 용서해서 성도로 삼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 덩어리입니까.

그러니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 용서로 삽니다!

나의 난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계 4:10-11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5:11-14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국을 보니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던지면서 어린 양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어린 양을 찬양하라고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에요.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을 찬미케 하는 언약이에요.

찬미케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정점에는 항상 예수님의 피 공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양을 찬양하는 곳이에요.

어린 양을 찬양하면 그 사람은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현재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 한마디로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죽은 자는 찬송치 못한다고 했어요.

이는 찬송치 못하는 자는 곧 예수 밖에 있는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어린 양을 찬양하지 않는 곳은 지옥이에요.

 

우린 원래 지옥에서 태어났어요.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은 지옥에서 태어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천국으로 옮겨 주셨어요.

 

지옥에서 빼내 준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가요.

너무 고마우니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은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깨달아지면 자연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 내가 예수님 피로 구원 받았구나!

세상에 이렇게 황감 할 때가 있나!

그러니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찬양하는 데에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가 없어요.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아파도 감사 할 수가 있고!

사업이 망해도 감사 할 수가 있고!

핍박을 받아도 감사 할 수가 있어요.

 

성령을 받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요.

왠지 주님이 고마워요.

이상하게 감사가 나온다구요.

감사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범사가 감사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감사하고 사는 것을 일컬어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어요.

신앙생활이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 자랑하고 살면 되어요.

가난하면 가난한 속에서 이미 천국 백성 되었으니 감사하고!

아프면 아픈 대로 천국에 소망을 품고 있으니 감사하면 되어요.

성령이 이렇게 하도록 해 주세요.

 

신앙생활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고 듣고 깨달은 것에 감사하면 되어요.

세상의 조건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가 없어요.

종이든 자유자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상관이 없어요.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고전 2: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구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진 의미를 아는 것은 세상 지식과는 무관해요.

성령께서 알려 주셔야지만 해요.

하나님 은혜를 깨닫는 데에는 인간의 지식은 필요치 않아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져요.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일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다가도 깨달아지고, 운전을 하다가도 깨달아지고,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깨달아지고, 교회에서 말씀을 듣다가도 깨달아져요.

범사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라요.

우리의 신앙은 감사 보다는 원망이 더 많아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몸이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알겠는데 정답대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간단하면서도 힘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몸은 두 주인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 마귀가 주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쉽게 말해서 마귀가 사는 집에 성령이 들어 온 것입니다.

 

옛 사람 속에 새 사람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원주민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간 것과 같아요.

우리 몸은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이 함께 살고 있어요.

 

성도는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달라요.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있어요.

이 둘은 원수에요.

 

두 법이 우리 몸뚱아리를 가지고 항상 싸워요.

 

새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고 하고, 옛 사람은 자기 뜻을 이루라고 해요.

옛 사람은 나를 위해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예수를 위해 살라고 해요.

옛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예수를 자랑하고 살라고 해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요.

옛 사람은 자기 존재를 위해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예수님 언약을 위해 살라고 해요.

 

마귀는 옛 사람을 주관하고, 예수님은 새 사람을 주관해요.

옛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고, 새 사람은 예수님이 주인이세요.

마귀는 옛 언약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고, 예수님은 새 언약식으로 하라고 해요.

 

옛 언약은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내가 했다고 하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했다고 해요.

옛 언약식 신앙은 인간을 자랑하게 되고, 새 언약은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동일한 일을 가지고도 일을 한 주체가 달라요.

주체가 다르니 자랑하는 것도 다르지요.

옛 사람은 주체가 자기가 되니 자기를 자랑하고,

새 사람은 주체가 예수님이니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요.

 

내가 했다고 하는 사람은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님이 했다고 하는 사람은 새 언약에 속한 사람이에요.

즉 인간을 자랑하면 마귀의 자녀이고, 예수님을 자랑하면 여자의 후손이에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뱀의 후손이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자랑하고 있었거든요.

자기들 행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었어요.

이건 옛 사람이 하는 신앙이에요.

옛 사람은 마귀가 주관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관이 마귀가 가르치는 신앙관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신앙관이 뭔가요?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거잖아요.

유대주의가 곧 마귀적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이 이런 신앙관이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었어요.

 

이런 바탕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주어진다고 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거저 주어진다고 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건 마귀의 구원관과 정 반대에요.

마귀는 말씀을 지키라고 하고 예수님은 날 믿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과 예수 믿음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이단이라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럼 예수님의 구원관으로 살면 마귀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요.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아요.

 

성도는 예수님의 것으로 세상에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는 예수님이 당한 그 고난을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까?

세상과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법과 은혜에요.

법과 은혜는 상극이에요.

결국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 지배하는 나라에 예수님이 은혜를 몰고 오셨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곳에 아니야 구원은 내가 거저 주는 것이야 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뱀의 후손인 바리새인들이 넌 뭔데!

왜 다른 말을 해!

우리 전통 신앙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이 오자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율법 지키면 안 되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거저 주신다고 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그러자 뱀의 후손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넌 또 뭐냐?

왜 우리와 다른 말을 하느냐고 이단이라고 하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행합니다.

 

이게 지금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미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법이 난무하는 교회에서 은혜를 말하니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과 다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의 조건으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아 낼 자신이 있다고 믿었어요.

자신들에게는 솔로몬의 사랑을 끄집어 낼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문과 혈통과 학벌과 아름다운 외모로 솔로몬의 사랑을 차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술람미는 자기 신랑은 인간의 외적 조건으로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조건에 희비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도 용서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신랑을 외면해도 사랑을 철회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자기 신랑은 자신을 위하여 피를 흘려준 신랑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엔 그런 신랑이 없습니다.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사랑은 이 세상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나를 위하여 상대방을 희생케 하는 사랑입니다.

상대에게 얻어 내고자 사랑해요.

세상 사람들은 얻어 낼 것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얻고자 사랑하지 않았어요.

천한 노예가 무슨 매력이 잇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불쌍히 여겨서 사랑을 준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자기 것을 주고자 사랑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모두 준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뭘 달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받으라고 합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의 섬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드리려고 하는 거에요.

 

드리려는 것은 행함이고 받는 것은 은혜에요.

드리면 할 말이 있어지고 받으면 할 말이 없어져요.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노력도 좀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인간들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신 섬기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이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들에게 받고자 하겠느냐!

하나님은 도리어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고 합니다.

신께 바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고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전혀 새로운 죄관을 알려 주었어요.

 

구약 시대 때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말립니다.

나는 하늘을 보좌로 삼고 땅을 밟고 사는데 뭐가 부족해서 집을 짓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도리어 다윗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구원도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축복도 받는 것입니다.

 

받으라고 구원해 주셨어요.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주려고 사랑한 것처럼 말이에요.

거지가 왕에게 주면 뭘 주겠어요.

거지가 왕에게 바치고자 하는 것이 교만이고 죄에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모든 것을 준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 것과 같아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워 죄인을 사랑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이야기에요.

거룩한 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은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에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런 신랑이 있으면 우리도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합니다.

물론 불순한 동기로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지만 말이에요.

솔로몬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들 탐욕을 위해서 만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도야 그렇다고 하지만 여자로서 참 다운 사랑을 받아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솔로몬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이건 인간들의 사랑이에요.

 

얼마 전에 행복 전도사라고 하던 분이 부부동반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사람이 자살 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면 자살할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면 이런 사고방식이 죄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해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죄에요.

 

인간은 예수님을 위해서 생겨났어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기뻐도 살아야하고 슬퍼도 살아야 해요.

아파도 살아야 하고 건강해도 살아야 해요.

영광을 받아도 살아야 하고 수욕을 당하여도 살아야 해요.

우리는 우리의 행,불행과 상관없이 예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살 한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밖에 있으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다양해요.

 

어떤 분은 가난해서 자살 할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 할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사랑에 실패해서 자살 할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자살 할 수도 있고!

어떤 학생은 시험 점수가 안 나온다고 자살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행복전도사와 같이 아파서 자살 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대구에 사는 어떤 엄마는 자식이 공부를 안 한다고 목을 매 자살을 했어요.

 

모두가 육신이 고달프고 살기 어려워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몸뚱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자기 몸뚱이 겨우 하나 챙기고 살아가는 짐승인 것입니다.

그러니 몸뚱이가 힘들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몸뚱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잠재적으로 모두 자살할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세상엔 자살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 누구도 자기 삶에 만족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마음속엔 탐심이 있어요.

채워도 채워도 허전하고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다고 느껴요.

인간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작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국정이 운영되지 않으니 에이~ 대통령도 못해 먹겠다고 내어 놓으려고 하다가 주변에 만류로 근근이 임기를 마쳤어요.

임기를 마치곤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에 흠이 가는 일이 발생하니 자살을 하고 말았어요.

 

대통령이 되려고 할 때는 대통령이 되면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니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차라리 촌에서 농사짓는 농부가 행복하고 부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퇴임 후에 농사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살했어요.

이게 인간의 실존이에요.

 

인간에게 있어 행복하게 보이는 것은 전부가 신기루에요.

남의 손에 있는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남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다 행복하게 보여요.

그러나 막상 본인이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보세요.

거기도 행복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농부는 대통령이 부럽고 대통령은 농부가 부러워요.

결국 둘 다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힘든 것이 있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욕심이 있고, 아프면 아픈 대로 어려움이 있어요.

탐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죄입니다.

죄가 불행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모두가 다 아픈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죄인의 삶이란 다 아픈 것들뿐이에요.

 

진정한 행복은 삶에 조건이 어떠하든지와 상관없이 행복하여야 합니다.

행복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픔 속에서도 그 아픔을 이겨내야 행복한 것입니다.

이 행복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예수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육신이 어떠하든지 행복했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산을 적몰 당하고 지하 무덤에서 초근목피 하면서도 감사했어요.

자기 존재에 의미를 예수님에게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태장을 다섯 번씩이나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감옥에 가두어져 있어도 행복해 하였어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행복하였고!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개가 핥을 정도로 아팠지만 행복하게 살았어요.

 

모두가 아픔 속에서도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연결되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인생으로 살지 않고 예수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 편안함 = 행복” 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예수 안 = 행복” 이라고 해요.

예수 안에는 안 아프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 존재 보다 예수가 더 소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와 연결이 되어 살아가면 아파도 행복해요.

이건 십자가 안에 있는 비밀이에요.

십자가 밖에선 이해 불가에요.

어떻게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자를 용서 할 수가 있고 웃을 수 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새겨들으세요.

예수 믿으면 안 아프다는 것이 아니고 아파도 그 믿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행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뚱이가 편한 육적 행복관으로 가지고 있지 않고 예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영적 행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영적 축복이라 합니다.

이건 성령이 주는 행복이에요.

행복은 영적인 것이지 육적인 것이 아니에요.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거지나사로는 육신은 비록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영적으로는 행복했어요.

 

행복전도사의 자살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인간이 왜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살려주니까 사는 겁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게 했고! 하나님이 살려주니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사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죽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요.

 

우린 살 권리도 없지만 죽을 권리도 없어요.

죽이고 살릴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하면 거지 나사로처럼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아도 살아야 하고!

죽기 싫어도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하나님이 죽이면 죽어야 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자 그 분이 또 묻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왜 살려 주십니까?

그건 하나님이 인간(만물)을 왜 창조했는지를 알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만물)을 왜 창조했는지 살펴봅시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성경은 인간의 창조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어요.

 

만물(인간)을 “그가 창조 했다”고 합니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왜 창조 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답이 나왔습니다.

내가 왜 태어나고 존재하고 있는지 해답이 나왔어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맡은 배역이 있어요.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데 필요한 배역을 맡겨 주었어요.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두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어요.

 

나사로는 거지라는 역할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사로는 거지로 아픈 몸으로 개하고 친구하면서 일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개가 핥았으니 얼마나 쪽팔리고 아팠겠어요.

그런데도 참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부자 집 앞에서 거지로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이 무대장치를 배치해 놓은 구조에요.

거지로 살면서 부자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그냥 거지로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 세상 연락에 취하여 하나님을 모르고 산 부자를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자 집 앞에서 평생 거지로 산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삶이었어요.

나사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충실하게 잘 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고 했다고 나사로를 천국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가난하면 가난 한 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삶이고!

병들어 아프면 아픈 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속을 섞여도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든 구조라고 생각하고 사세요.

 

내가 왜 이런 인간을 만나서 이 고생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내게 붙여 주었구나 생각하고 사세요.

내가 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하세요.

 

모든 일을 예수님과 연결된 구조로 보세요.

범사에 믿음으로 살면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안에서 주어진 팔자려니 생각하고 자기 인생은 독자적인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결이 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게 신앙생활이에요.

 

큰 일을 안 해도 좋으니 산을 옮기려고 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예수님 생각하고 사세요.

가난해도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파도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모든 삶이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세요.

 

내 인생 따로 예수님 삶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 모두가 예수님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예수님의 인생과 얽어매 놓았어요.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얽어 매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도구들인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자를 고발하는데 소모품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나사로처럼 예수님이 일을 하는데 사용되어지는 도구에요.

이건 인간이 무가치 하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존재의미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물이 그 안에서 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 안에서 섰다는 말은 곧 만물은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 밖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예수와 단절된 것은 죽음이에요.

예수를 모르는 자는 살아도 산 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모르는 자를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합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은 예수와 연결이 되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해요.

다른 말로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판단해요.

부자라 하여도 예수 밖이면 죽은 자이고, 거지라도 예수 안이면 산 자에요.

 

그러니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자신을 못 났다고 비하하지 마세요.

부자라고 뻐기지 말고 가난하다고 비관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아프다고 낙망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픔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고 장차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말이니 귀담아 들으세요.

 

여러분의 인생살이가 여러분 뜻대로 살아지지 않지요.

우리의 인생살이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세요.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충돌하는 판을 깔아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한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위선의 천재들이에요.

겉으론 축복하지만 속으론 저주를 하고 있어요.

 

죄인들의 속은 악마가 들어 있는데도 겉으로는 천사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천사가 아니고 악마라고 들추어내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을 성도들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미움과 원망이 왜 나옵니까?

이는 그 속에 미움과 원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움과 원망이 없는 것처럼 위선을 떨어요.

이 위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각양의 죄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기어코 들추어내십니다.

넌 나를 미워하는 죄인이라고 고발을 하세요.

 

하나님은 왜 성도들의 죄를 드러내시고자 합니까?

이는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는 일에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지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지려면 불의한 자로 있어야 합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으면서도 죄인 아닌 척 하고 살아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고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넌 죄인이라고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자기 백성에게 국한 된 일이에요.

자기 백성에게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들들 볶아 대는 것입니다.

볶아대면 연탄불에 알밤이 터져 나오듯이 우리 안에 숨겨 있던 죄성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우린 들들 볶이면서 죄를 토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자면 죄가 그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되려면 원수 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해서 원수 되게 하시고 싸우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심으로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죄를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광야 40년 길이에요.

광야에서 우리 속에 있는 죄성들을 다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일부러 없는 원망을 만들어서 원망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그 죄를 끄집어내고자 하심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죄를 품고 있어요.

그러면서 아닌 척 하고 살아요.

만사형통 잘해주면 미움과 원망을 평생 품고 있어요.

없는 척 한단 말입니다.

이런 놈을 천국에 데리고 가면 고마움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미움과 원망을 끄집어내려고 만사불통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뭔가 좀 행복해지려고 하면 자꾸만 문제를 일으켜요.

가만 내 버려두면 좋은데 가만두지 않고 자꾸만 시비를 걸어요.

 

어렵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그 위선을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폭로시켜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고 난 저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그래야 용서가 은혜로 드러나게 되거든요.

 

하나님은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다르게 간섭하세요.

천국백성은 간섭을 하시고 지옥백성을 유기하세요.

쉽게 말해서 천국백성은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는 것처럼 간섭을 하시고, 지옥 백성은 고아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유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라기와 신약의 로마서를 봅시다.

 

말 2: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롬 1:24-2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말라기는 알다시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에요.

하나님께서 구약을 이렇게 마감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셨어요.

 

어떤 저주를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는 저주를 하셨어요.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고아처럼 내 버려두겠다는 것입니다.

니 마음대로 살라고 합니다.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해요.

그러니 구약은 망하는 것입니다.

유기는 저주이고, 간섭은 축복인 것입니다.

 

이건 자식 키워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어요.

그 어느 자식도 부모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발 자신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잖아요.

내 버려둬 보세요.

망해요.

 

부모가 간섭하지 않으면 거지 인생을 면하지 못해요.

그래서 부모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가만 두지 못한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부모의 집요한 간섭 때문에 이나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처럼 우리를 간섭해 오셨기 때문에 이 지경이라도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로마서에서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그대로 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니들 마음대로 살으라고 했다잖아요.

그러니 온갖 범죄를 행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아요.

 

죄인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와 같아요.

제어가 안 되니 자기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굴러가다가 보니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징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행복하다고 여겨요.

반대로 누가 간섭하면 불행하다고 여겨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누가 간섭하면 짜증을 내요.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 죄 짓는 일 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뭔 줄 아세요.

죄 짓는 일이에요.

죄인은 죄 짓는 재미로 살아요.

죄 짓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쉽고 재미있어요.

그래서 죄 짓는 일은 밤잠 안자면서도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안 해도 게임하고 놀라고 하면 밤새워 가면서 2박 3일을 해도 싫다 소리를 안 해요.

학교 수업 시간에도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이 싫어서 선생님에게 옛날 연애하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잖아요.

교과서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공부 말고 다른 것 하자는 거에요.

 

이걸 일탈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늘 일탈을 꿈꿔요.

일상이라는 틀에 매이길 싫어해요.

그래서 금지하는 것을 소망하고 살고자 일탈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내 버려두니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서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죄인은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하고자 해요.

이게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죄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꾸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하거든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하거든요.

왜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느냐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술람미 안에 감추어진 죄성이 솔로몬이 새벽에 찾아오자 귀찮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를 사랑해 주었더니 자기를 귀찮게 한다고 자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왕을 문전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문전박대하고 난 후 자신은 솔로몬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자신의 사랑은 솔로몬이 지켜주는 것이지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님을 알았어요.

그러니 신랑이 떠나고 나니 신랑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을 찾아 나섭니다.

 

이를 보고 예루살렘 여자들이 놀립니다.

뭐 그리 대단한 신랑이라고 찾아 나서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자 술람미는 신랑을 자랑합니다.

우리 신랑은 이 세상에 없는 신랑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신랑을 버렸는데 신랑은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에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럼 그 좋은 신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술람미가 솔로몬이 있는 곳으로 안내합니다.

 

신랑이 어디에 있는지 가보기로 합시다.

 

2절에 신랑이 있는 곳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신랑은 자기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있다고 합니다.

 

2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가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목자가 양을 양식 있는 곳으로 인도하세요.

양 떼를 먹인다는 것은 생명을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 할까요?

우리가 먹을 양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잖아요.

성도가 먹을 양식이 뭔가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성도들의 밥상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있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이 공급이 되어요.

양 떼가 먹을 양식은 푸른 꼴이듯이 성도가 먹을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속에만 생명이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양 떼를 먹이는 자기 동산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증거 되는 교회가 자기 동산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품은 성도가 자기 동산인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쉼을 얻어요.

죄인이 쉴 곳은 십자가 안이에요.

죄인은 죄사함을 받아야지만 쉼을 얻을 수가 있어요.

십자가에서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특징은 다 그릇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릇 행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단 말입니다.

죄인은 죄 짓는 것이 삶이에요.

 

사는 것 자체가 죄에요.

우린 늘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요.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단 불순종하면서 살아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문전박대 한 것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에요.

육신은 잠 하나도 이기지 못해요.

잠이 오면 자야 돼요.

잠 잘 땐 신랑도 귀찮아요.

 

우린 예수 잘 믿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에요.

잘하고 싶어도 잘 안 되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예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아요.

그래서 솔로몬이 술람미의 문빗장에 피(몰약)를 발라놓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 마음에 피를 발라주셨어요.

그 피는 용서 해 주겠다는 증표에요.

이 피가 발라져 있기 때문에 신랑을 문전박대하고도 쫓겨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죄를 이기지 못하면 저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저주를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셨어요.

예수님이 피를 흘려 주셨다구요.

우린 그 신랑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에겐 신랑의 피가 곧 생명이고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심령 속에 계세요.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은 예수님의 동산이에요.

신랑의 동산엔 꽃들이 향기를 만발 한다고 했어요.

 

신랑이 백합화를 꺾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향기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거니는 동산에서 나는 꽃향기는 성도가 토해내는 각양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믿음 속에는 각종 은사적인 삶이 담겨져 있어요.

이런 은사적인 삶은 자기부인을 바탕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가 백합화를 꺾듯이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꺾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옛 사람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어요.

 

그리스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자신의 향기를 토해냅니다.

예수님이 준 것을 우리 몸으로 토해내게 간섭하세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다는 은혜를 드러내세요.

그 은혜가 감사로 각양의 헌신의 모습으로도 드러내게도 하시고!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고, 봉사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나게 하세요.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광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다.

옛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다.

신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세요.

육신의 소욕을 죽이세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해요.

예수님께서 간섭을 하니 육신의 소욕은 죽이고 성령의 소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툭툭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간헐적이지만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나타나는지를 3절에서 말해주고 있어요.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

 

“나는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 몸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는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해집니다.

결혼은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짝을 지워준 한 몸이라고 해요.

 

솔로몬과 술람미는 하나님이 짝을 지워 주었어요.

어떻게 짝을 지워 주셨는가 하면 왕이 노예를 책임져 주는 것으로 짝을 지워 주셨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책임져 주는 것으로 짝을 지워준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는 식으로 엮어 놓았어요.

 

이걸 알려면 아담과 하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아담 한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리곤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빼내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하와는 아담 안에서 나왔어요.

이건 마치 만물이 예수 안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고 하와는 성도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나온 하와를 아담 속으로 다시 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결혼을 통해서 하와는 다시 아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래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이럴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 안에서 없는 자에요.

더 이상 하와가 아니라 아담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 속에서 죽은 자에요.

하와로 살지 않고 아담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와의 삶은 더 이상 하와의 삶이 아니고 아담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라는 이름은 아담이라는 이름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자는 독자적인 이름이 없고 항상 누구 누구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아내에요.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다스려요.

그러므로 성도가 토해내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원리에요.

 

그런데 죄가 가만두지 않고 하나님이 짝을 지워준 것을 자꾸만 헝클어지게 만들어요.

예수님의 아내로 살지 못하게 하고 나로 살게 만들어요.

내 주인은 예수라는 것을 잊게 만들어요.

 

이는 우리 안에 죄로 인하여 생겨난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아가 자꾸만 난 예수님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단 말입니다.

그리곤 독자적으로 살라고 해요.

 

성도는 몸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두 구조를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두 주인이 있단 말입니다.

옛 주인과 새 주인과 서로 육신을 놓고 치열하게 전투를 해요.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은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의가 터져 나오기도 해요.

어떨 땐 성령의 소욕이 나와서 예수의 생명에 향기를 만발하는가 하면 어떨 땐 마귀의 죄에 향기를 만발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두 법이 충돌을 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늘 이런 탄식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이런 탄식을 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알려 줍니다.

바울아! 바울아! 하나님께서 너의 이런 연약함을 알고 네가 육신으로서 하지 못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탄식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외부에서 시켜 주었다는 것을 말해야 해요.

이 고백을 신앙고백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예수의 피로서 구원을 받은 자에요.

 

성도가 살아가는 바탕엔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어요.

우리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고 있어요.

구원은 예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이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것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이걸 찬미의 제사라고 해요.

이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구원을 해 준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노예인 술람미를 사랑한 것도 왕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라고 하였어요.

왕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자격도 없는 자를 사랑해 준 것입니다.

 

“왁스” 라는 가수가 부른 “화장을 고치고” 라는 노래 가사 말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아무 것도 해 준게 없고 받기만 했는데”

“그래서 미안해”

“하지만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

 

이게 복음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위하여 해 준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받기만 했어요.

문전박대 했지만 사랑 해야해요.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것으로 온 몸에 둘둘 말고 있어요.

옷도 아버지 것이고 신발도 아버지 것이고 먹고 마시는 것도 다 아버지 것이에요.

자기 생명도 아버지가 준 것이에요.

탕자는 그냥 아버지 것을 받기만 했어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일평생 아버지가 주는 것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미안해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탕자가 구원을 받은 성도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지 아세요.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 바로 탕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탕자처럼 자기 딴엔 잘하겠다고 한 것이 아버지 재산을 말아 먹는 것 밖에 할 줄 몰라요.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망신시키는 그 아들을 용서해 주심으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냈어요.

우리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에요.

 

그런데 이웃집에 있는 남의 아버지들은 이런 일을 하지 못해요.

이웃집 아버지는 마귀에요.

마귀라는 아버지는 죄를 용서하지 못해요.

법대로 처리해요.

그래서 마귀의 집에선 탕자처럼 살면 법대로 처리해서 옥에 가두어 버려요.

아버지 망신을 시켰다고 집에서 쫓아내 버려요.

이런 놈은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죽여 버려요.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자기가 신랑을 문전박대 했는데도 신랑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피를 뿌려 놓고 갔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런 신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잖아요.

 

어느 신랑이 먼 길 다녀왔는데도 잠 잔다고 문도 안 열어주는 여편네를 가만두느냐고 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 속엔 아마도 자기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자기들 신랑은 죽였을 것이라는 말이 담겨져 있어요.

그들의 신랑은 법대로 하는 신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잘못해도 법대로 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그런 신랑이 있으면 우리도 그런 신랑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까.

예루살렘 여자들에겐 술람미를 무조건 용서해 주는 그런 신랑이 너무도 부러운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신랑은 잘못하면 죽이는 율법이라는 남편이에요.

그런데 술람미의 남편은 잘못해도 무조건 용서해주는 은혜라는 남편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에겐 이런 솔로몬은 너무도 낯선 신랑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없는 낯선 신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술람미는 세상에 없는 신랑을 소개하는 메신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상에 없는 무조건 용서해 주는 신랑을 자랑하라고 세상에 없는 사랑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술람미처럼 무조건 용서해 주는 신랑을 세상에 소개하고 자랑해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랬잖아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내가 알려 주겠다고 했어요.

아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알고 있는 신랑이에요.

바치지 않으면 혼 내는 그런 신랑이에요.

그러나 바울이 알려준 신은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 신이에요.

 

바울이 만난 그 신이 바로 술람미가 만난 그 신랑이에요.

술람미가 만난 그 신랑이 바로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세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그 피 남편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마치 술람미가 난 신랑을 내어 쫓았는데도 이런 못난 여편네를 용서해 준 그 신랑을 자랑하듯이 우리들도 나 같이 이런 못된 죄인을 용서해 주신 그런 신랑인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신부의 몸에는 신랑의 사랑을 많이 담고 있어야 해요.

신부의 옆구리를 찌르면 신랑 자랑이 튀어 나와야 해요.

신랑 자랑하라고 구원해 주셨어요.

 

천한 노예를 신부로 맞이할 때는 신부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요.

신랑의 은혜를 보이려고 일부러 천한 죄인을 신부로 맞이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천한 노예까지도 다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온 세상을 가득 덮고도 남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를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해 줄 수가 있어요.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겨울철 내리는 하얀 눈과 같아요.

밤새 내린 눈은 온갖 더러운 세상을 다 덮어서 하얗게 만들어요.

세상엔 갖가지 더러운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눈이 더러운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다 덮어요.

 

눈 속에 파 묻혀 있는 각종 더러운 것들이 우리의 죄들이에요.

우리 안에는 각종 죄들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눈처럼 그 더러운 죄들을 다 용서해 주셨어요.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우리 등 뒤로 던져 버렸어요.

다시는 보이지 않게 하셨다구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어요.

솔로몬은 술람미가 문전박대해도 용서하고 사랑했어요.

솔로몬의 사랑은 술람미의 그 어떤 허물도 다 덮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이에요.

 

술람미를 사랑한 솔로몬이 바로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세요.

우리가 이미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해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그 어떤 것도 다 용서하세요.

이미 죄 지을 줄 알고 사랑했어요.

앞으로도 죄 지을 줄 뻔히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피를 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피로 덮어주는 것입니다.

하얀 눈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세요.

내가 뿜어 낼 수 있는 그 모든 죄를 그 피로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다니까요.

그 어떤 죄로도 결코 정죄당할 수 없는 것이 성도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죄 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높고도, 더 넓고도, 더 깊고도, 더 풍성하고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얕게 보지 마세요.

이런 죄는 용서 하지 않을 거야 하지 마세요.

죄의 경중으로 은혜의 충만함을 훼손치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처럼 온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어요.

 

예수님의 피는 용서 못할 죄가 없어요.

 

도적질을 해도 용서하고!

간음을 해도 용서하고!

사기를 쳐도 용서하고!

살인을 해도 용서하고!

인간들이 죽을 죄라고 하는 것도 다 용서 하고도 남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것들을 다 덮고도 남아요.

이런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는 그 모든 죄로부터 다 넉넉히 용서해 줄 수 있는 피에요.

이 피의 가치를 좀 알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피 뿌림을 입고 있어요.

 

성도가 살아가면서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나 이러면 짤리는데!

나 죄 지으면 지옥에 가면 어쩌지 그러지 마세요.

그건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탕자처럼 살았을지라도 아버지~ 하고 나아오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에요.

우리가 아버지 하고 부르면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 나와서 맞아 주세요.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아요.

자식의 몸부터 챙기는 것이 부모에요.

 

어서 와라 내 새끼!

밥은 먹고 살았느냐!

추운데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래 잘 왔다!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고 소를 잡고 잔치를 해 주세요.

그동안 고생한 것 다 잊고 편히 쉬라고 하세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 자식이야 말로 아버지의 은혜를 은혜로 잘 드러내주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야 말로 은혜 중에 은혜의 아버지란 것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보다 더 깊고도 넓고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이 비밀을 이해하시겠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탕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린 이미 탕자보다 더 탕자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새삼스럽게 집 나가겠다고 하지 마세요.

 

용서 받은 탕자는 죄를 즐기는 자가 아니라 죄를 부끄러워하는 자에요.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마음은 늘 죄를 미워하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부러 또 나가면 용서해 주겠지 하는 놈은 아버지의 용서의 의미를 모르는 자에요.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흙장난 하면서 옷을 더럽히자 엄마가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더니,

이 녀석이 영악하게 아~ 우리 엄마는 내가 흙장난해서 옷을 더럽혀도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네! 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또 흙장난을 해서 옷을 더럽히는 것과 같아요.

 

이건 새 옷을 갈아 입혀준 의미를 모르는 것이에요.

구원이 무엇인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개인 용도로 쓰는 자는 죽여요.

예수의 피를 자기 죄지은 것을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것으로 여기는 자는 피를 모욕하는 자로 간주해서 죽여 버려요.

일부러 죄 짓는 것과 육신이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은 달라요.

 

그래서 바울이 성만찬 할 때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만찬을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어요.

 

성도가 죄를 대하는 자세는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야 해요.

죄를 위하여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은 예수의 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죄를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일부러 죄 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건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란? 예수님의 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믿지 않는 것도 죄이지만 예수의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죄에요.

예수님의 피는 그 어떤 죄도 다 덮고 용서하고도 남아요.

하지만 그 피가 모욕당하는 것은 용서치 않아요.

예수의 피가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아요.

 

이는 예수님의 피가 죄를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피가 죄를 즐겨 먹고 마시는 것을 사해주는 용도로 쓰여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개인 구원의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지으면 용서해주고 또 죄를 지으면 용서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 피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성도는 죄와 싸워는 자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합니다.

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에 가치를 더 깊게 깨닫고 감사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의 피를 자랑 할 수가 있어져요.

술람미처럼 신랑 자랑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내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 해 주시는 그 신랑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우린 그런 피 남편과 살고 있어요.

우리의 피 남편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기다려요.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항상 십자가가 보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신랑을 자랑하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랑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신랑이 주는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하나 되게 하시고 신랑의 품에서 쉼을 얻게 해 주심도 감사합니다. 이 편안하고 행복한 신랑의 품속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