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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아가서강해)17강. 잠근 동산과 덮은 우물 그리고 봉한 샘 (아가 4:11-16)

by coroa 2021. 9. 9.

 

 

17강. 잠근 동산과 덮은 우물 그리고 봉한 샘 (아가 4:11-16)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신부의 신비로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한 신비로움이 이 시대 성도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잘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의 사랑이야기로 들려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는 사랑이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말하는 것도 아름답고,

웃는 모습도 아름답고,

행동하는 것도 아름다워요.

 

이를 편애라고도 하고 또한 편견이라고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부모들 눈에는 자식은 늘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기준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흔히들 마음에 들면 내 스타일이야! 라고 하잖아요.

이는 자기의 미적(美的) 기준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의 눈에 비친 술람미가 그러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향한 칭찬을 보노라면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술람미를 선택한 것은 솔로몬이에요.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은 항상 옳다고 여깁니다.

솔로몬도 술람미를 선택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존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최상으로 칭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뻐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순전하고 흠이 없다고 하였겠어요.

순전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말입니다.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를 지난 시간에 한 뿌리에서 나온 하나였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나의 누이야! 라고 함으로서 너와 나는 하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누이는 근본이 같은데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 됨을 한 몸이라고 합니다.

신약식으로는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이니 순전하고 흠 없는 사랑을 하게 되는 거구요.

 

사랑이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인식하게 합니다.

연인들이 커플 반지를 끼고 커플 티셔츠를 입는 것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는 유치하게 보이지만 본인들에게는 하나 된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애정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둘은 한 몸이에요.

한 몸이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게 되어요.

솔로몬과 술람미가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의 누이라고 하고 나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랑을 일컬어 창세전 사랑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천생연분이라고 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태초부터 한 몸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어요.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핏줄이 당기듯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한 것은 마치 아담이 하와를 보고 ‘너는 나의 뼈 중의 뼈고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아요.

원래 한 몸이었기 때문에 첫 눈에 서로를 향하여 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넌 내꺼야!’ 라고 하는 것이나,

하와가 그 말에 ‘예, 난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순순히 응한 것은 모두가 뿌리가 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예수님과 성도 이야기로 말하고 있어요.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부부가 되는 일은 곧 복음에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신비이고 비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 속에 예수님과 성도의 만남에 비밀이 담겨져 있고,

솔로몬과 술람미의 만남 속에도 예수님과 성도의 만남에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이야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지금까지 아가서를 강해하면서 제일 힘이 들 것 같아요.

해석이 힘든 게 아니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부부간에 일어나는 사랑이야기를 표현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곤혹스럽지만 해 봅시다.

 

우수갯 소리이지만 영적으로 미성년자는 영적으로 어른의 지도 아래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일어나는 사랑이야기를 복음으로 풀어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언중유골이니 잘 새겨서 들으세요.

 

이런 이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미혼자이거나 30세 이하는 아가서를 보아서는 안 되는 금서로 정해 놓은 것입니다.

부부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칫하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근 동산이니’,

‘덮인 우물이니’,

‘봉한 샘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남녀 간에 일어나는 성적인 비밀스러운 이야기거든요.

 

이단들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요.

이단의 교주들은 아가서를 비밀 교리로 만들어서 특별한 추종자들에게만 은밀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추종자들에게 자신들만이 뭔가 특혜를 입었다는 것을 심어주기 위해서 에요.

인간은 남과 특별하게 대우를 받는다고 하면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하늘을 찔러요.

그것도 신적 계시를 특별하게 받았다고 해 보세요.

앞뒤 안 가리고 몸 바쳐서 충성해요.

 

이단들이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잘 알기 때문에 특별교리로 만들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복음을 가지고 특별하다느니 자기들만 아는 비밀이라고 은밀하게 말을 한다면 그 놈은 100% 사기꾼이라고 보세요.

 

복음은 비밀이지만 은밀하게 선포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알아먹기 때문에 은밀하게 가르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말해도 육에 속한 사람은 몰라요.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뻔히 보고도 메시야인줄 모르듯이 복음을 말해도 몰라요.

그러니 복음을 비밀 교리로 만들어서 은밀하게 감추고 가르칠 이유가 없어요.

복음을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사기를 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단만 옳다고 하는 자들은 경계하세요.

진리는 인간이 사유화 할 수가 없어요.

도리어 진리가 인간을 장악하여 복음에 도구로 사용해요.

그러므로 나만 옳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진리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떤 사람을 추종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다 부분적으로 알아요.

내가 안다고 하는 진리도 일부분이지 전체는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어요.

자기 색깔에 맞으면 복음적이라고 하고 아니면 비 복음적이라고 판단해요.

이건 교만이에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가 달라요.

은혜의 분량에 따라서 복음을 깨닫는 깊이와 폭도 달라요.

그러니 누가 나와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비판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지만 않으면 형제로 대하여야 해요.

 

각 사람에게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니까요.

성령이 각 사람 안에서 깨닫게 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속지 않아요.

 

막말로 이단의 소굴에 있어도 이단의 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믿지 않게 하시고 빼내 주세요.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세요.

저도 많은 사이비와 이단을 접해 보았어요.

위태위태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셨어요.

그리고 창세전 언약이라는 십자가 복음 안으로 밀어 넣어 주셨어요.

 

마치 노아를 방주 속으로 밀어 넣었듯이 예수님 안으로 밀어 넣어 주셨어요.

저를 간섭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간섭하세요.

그러므로 제가 아가서를 어떻게 풀어도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분별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암튼 잘 이해하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듣지 말고 복음적으로 들으세요.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최상의 칭찬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1-12절을 봅시다.

 

아 4:11-12절.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술람미의 입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입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것은 달콤한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랑의 밀어를 말합니다.

 

마치 연인들이 밤새도록 나누는 사랑의 속삭임과 같아요.

연인들은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연인들은 입에서 꿀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마도 술람미가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사랑고백을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입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하고,

혀 밑에서 꿀이 샘처럼 솟아난다고 하고 있지요.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언어에요.

그러므로 말은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 보세요.

저절로 흥얼거려지지요.

 

성도가 주님을 향한 고백이 이러하여야 합니다.

사랑 받음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고 또는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면 자기 안에 기쁨이 밖으로 표현이 되어요.

표현되는 것은 각양의 모습일 수가 있어요.

 

봉사로 나타날 수도 있고!

형제 사랑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전도로 찬양으로 나타 날 수가 있어요.

 

부부끼리도 사랑하는 연인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해요.

특히 여자 분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 보세요.

황홀하잖아요.

 

솔로몬은 술람미가 하는 사랑의 표현을 레바논 산에 기화요초들이 뿜어내는 각종 향기로운 향과 같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런 향기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잠근 동산이고, 덮은 우물이고, 봉한 샘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이고, 덮은 우물이고, 봉한 샘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잠그고, 덮고, 봉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공개 되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은밀하고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인 혼자 먹으려고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만 드나들 수 있는 동산이고,

솔로몬만 퍼 마실 수 있는 우물물이고,

솔로몬에게만 열리는 샘이란 말입니다.

 

그 당시에 왕들은 자기만 먹는 우물이 있었어요.

왕의 우물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도록 잠그고 덮고 봉하여서 관리를 하였어요.

그 우물물은 왕만 마셔요.

 

우물은 개인 재산이에요.

옛날 대감집 앞마당에 우물을 파 놓은 것과 같아요.

이는 자기만 먹는 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우물에 뚜껑을 해서 자물쇠로 잠가 놓고 관리를 한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만날 때 우물가에서 만나지요.

라헬이 양에게 물을 먹이고자 우물에 왔는데 그 우물을 돌로 막아 놓았어요.

돌로 막아 놓은 것은 아무나 물을 먹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때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던 돌을 치워서 라헬의 양떼에 물을 먹입니다.

 

신약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와서 물을 길으려고 할 때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하자 우물이 깊어서 물길을 그릇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요.

물 길러 온 여인이 그릇도 없이 옵니까?

 

이는 그릇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물이 덥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물을 자신은 열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이를 우물이 너무 깊어서 아무나 뜰 수 없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물은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덮인 우물을 열어 준다는 의미에요.

수가성 여인이 찾아온 우물이 야곱의 우물이에요.

이는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만남은 곧 야곱과 라헬의 만남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수가성 여인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이 오시면 수가성 여인의 마음을 열어 준다는 말입니다.

 

수가성 여인 속에 덮인 돌을 예수님께서 옮겨 주시는 것입니다.

창기로 살면서 삶에 지쳐서 천근만근처럼 덮여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잠근 동산이다,

덮힌 우물이다,

봉한 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잠겼다!

덮였다!

봉했다! 라는 말은 열고 닫는다는 말입니다.

 

여자를 열고 닫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는 취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술람미는 솔로몬만 사랑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술람미는 솔로몬 이외의 다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해석해 봅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열쇠를 가지셨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성도의 마음을 열고 닫을 수가 있어요.

우리 마음의 열쇠를 예수님이 가지고 있어요.

내 마음을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오로지 예수님이 열고 닫아 주셔야지만 해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예수님이 믿게 해 주셔야 믿어져요.

우리가 은혜 받는 것도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세요.

 

우린 술람미이고 예수님은 솔로몬이에요.

그럼 우리도 예수님 이외 그 누구도 침입 할 수 없도록 잠그고 덮고 봉해져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도 예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고 우리의 마음도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마치 하나님이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한 에덴동산과 같아요.

솔로몬이 지금 술람미에게 너는 잠근 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너는 나의 에덴동산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동산이고!

솔로몬만 마실 수 있는 우물물이고!

솔로몬만 사랑 할 수 있는 샘이에요.

 

동산은 몸과 같고,

우물은 마음과 같고,

샘은 성(性)과 같아요.

 

여자를 잠그고 덮고 봉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너의 몸은 내 것이란 말이에요.

나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의 몸과 마음은 전부 솔로몬의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솔로몬 것이에요.

술람미가 사랑할 대상은 오직 솔로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도 마찬가지에요.

솔로몬의 사랑 또한 술람미에게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근 동산이고 덮은 우물이고 봉한 샘물이라는 것입니다.

 

동산이니 우물이니 샘은 모두가 생명에 속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천국 복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러지요.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누구이고, ‘저희’는 누구인가요?

‘너희’는 제자들이고, ‘저희’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천국은 세상에 감추어져 있어요.

천국은 죄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밀이에요.

비밀은 원수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자기편에게만 열려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12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편이니까 내가 천국에 대하여 알려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천국이 왔다고 하였어요.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비밀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예수는 가짜란 말이지요.

진짜 예수는 보이는 예수 속에 있어요.

육신의 예수 속에 감추어진 영의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진짜 예수는 목수로서의 예수가 아니고 메시야로서의 예수입니다.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비밀이에요.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너희인 제자들에게만 허락이 되었고,

저희인 표면적 유대인들인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면적 유대인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만 보았지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보다 더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으로 예수를 정죄하여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자기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오신 구원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허락이 되었어요.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따르지 않고 구원하실 주님으로 믿고 따른 것입니다.

 

이런 구주로서의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한 집안 식구라도 몰라요.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인간 예수로만 보았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가 하는 일을 보고서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나 예수님을 영접 할 수 없어요.

제자들처럼 택한 자들에게만 예수님은 영접 되도록 열려져 있어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덮여 있어요.

감추어져 있어요.

그러니 뻔히 보고도 구원자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도는 열린 문서와 닫힌 문서로 있어요.

구원을 얻을 성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고, 멸망 받을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요.

 

오늘 본문에선 술람미가 솔로몬에게만 허락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신약에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만 허락이 되었다고 하였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잠근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은 아무나 믿어지지 않아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도가 아무나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로지 술람미처럼 택함을 입은 성도에게만 깨달아져요.

 

세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잠긴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이에요.

예수님은 아무나 먹고 마실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로지 술람미처럼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예수님을 먹고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최후의 만찬으로 보여 주었어요.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에 감격하셔야 해요.

예수가 믿어지면 만유를 얻은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아요.

이게 안 믿어지니 환경에 휘둘림을 당하면서 죽네! 사네! 난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 잠근 동산을 천국이라고 합시다.

그럼 천국은 술람미만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다.

 

덮인 우물을 말씀이라고 합시다.

그럼 천국 말씀은 오직 술람미 같은 성도에게만 깨달아진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성도에겐 구원의 능력이지만 멸망 받을 자들에겐 미련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도는 덮인 우물인 것입니다.

 

봉한 샘을 성령이라고 합시다.

성령은 성도에게만 주어져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준다고 하셨어요.

그 안에서 생수가 솟아난다고 했어요.

그 생수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잠근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 자신 만이 술람미에게 들어갈 수가 있으며,

반대로 솔로몬 역시 술람미에게 들어가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허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서로가 서로에게 잠근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이에요.

왜냐하면! 비밀은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잠근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이외는 술람미를 열 사람이 없고,

술람미 이외는 솔로몬을 열 사람이 없어요.

서로가 서로에게는 열려 있으니 오직 둘 만이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를 은밀한 동산 가운데 우물과 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이나 우물이나 샘은 모두가 술람미가 솔로몬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에요.

 

동산이란 안식하는 곳을 말해요.

그렇다면 솔로몬에겐 술람미는 평안히 쉬게 하는 동산이고!

목마른 갈증을 해갈 시켜주고 우물물이고!

마음속을 시원케 하는 샘물이에요.

솔로몬 역시 술람미에겐 안식하는 동산이에요.

 

잠언을 5장을 봅시다.

 

잠 5:15-18절.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잠언에서 우물이나 샘을 마신다는 것은 아내와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내와의 사랑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감추어둔 꿀단지의 꿀을 몰래 먹듯이 은밀하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왜 감추어 두었습니까?

이는 자기 것이니까요.

술람미는 솔로몬 것이에요.

솔로몬이 돈 주고 술람미를 샀어요.

 

솔로몬은 신하들의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이는 곧 돈 주고 산 것과 같아요.

왕의 체통을 버리고 비천한 노예를 취하였으니 왕의 위신과 체통은 말이 아니지요.

솔로몬은 술람미를 얻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서도 남편이 지참금을 주고 아내를 사왔어요.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에요.

그러므로 아내의 몸은 오직 남편에게만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열려져서는 안 되어요.

아내는 자기 남편 이외에는 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되어요.

만약 남에게 몸을 열어 준다고 하면 그는 창기로 취급당해서 돌로 쳐 죽임 당해요.

 

아내는 내 주인은 남편이다,

난 남편의 소유물이다,

이 사실을 가슴에 인(印)처럼 품고 살아야 되요.

 

지금부터 노골적인 표현이지만 참고로 들으세요.

 

사랑은 둘만이 하는 은밀한 행위에요.

그러므로 부부의 사랑은 덮인 우물 같고 봉한 샘과 같은 것입니다.

부부는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 되기 전에는 남남이었어요.

그런데 하룻밤 잠자리만 하고 나면 하나가 되어요.

한 몸이 되고 나면 이상하게 서로가 서로를 주장한단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생판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을 자고 나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느냔 말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것은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사랑하고 나면 흔적으로 남는 것이 자식이에요.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낳는 일이에요.

그래서 남녀 간에 사랑하는 행위인 성(性)이라는 말 속에는 생명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으로 낳아진 자식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에요.

자식에게는 남편의 것과 아내 것 둘 다 섞여 있어요.

사랑으로 생겨난 자식은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연결하는 끈이에요.

 

“남남”이 사랑으로 “우리”가 되고, “둘”에서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서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게 또 어려운 말인데,

 

태초에 지음을 받은 아담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냈어요.

그러자 아담은 남자가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사람에게서 남자와 여자를 분리했어요.

분리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요.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본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생겨난 제 3의 사람이 바로 자식이에요.

자식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사람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성별로 따지지 않아요.

그냥 사람으로 여겨요.

결국 부부간에 사랑으로 자식을 낳음으로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이 되어서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아요.

죄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요.

비로소 태초에 창조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만들라고 예수님을 보냈어요.

원래 예수 안에 있던 자를 찾아서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하와가 아담 안에서 나왔듯이 예수 안에서 나왔어요.

원래 하나였는데 지금은 둘이 떨어져 있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신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나온 신부를 찾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도는 마치 아담 안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예수 안에서 나왔어요.

예수 안에 들어갈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부부가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남녀 간의 성(性)문제를 엄격하게 다루어 왔던 것입니다.

이방인의 성생활과 언약의 후손의 성생활은 다르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을 봅시다.

 

레 20:7-23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1.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2.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4.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찌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15.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16.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7.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찌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18.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19.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찌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20.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 21.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거룩을 지키는 일을 성(性)문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원주민을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간음을 허용하지 않고,

동성애도 허용하지 않고,

수간도 금하고,

근친상간도 금하라고 합니다.

 

이런 짓은 짐승 같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을 죽은 자라고 하고 짐승으로 취급해요.

그래서 음란히 행하는 자는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속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이방인처럼 죽은 자로 간주하여서 가나안에서 쫓아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성적 문란을 허용하지 않을까요?

이는 남녀 간의 사랑은 생명을 낳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性)이라는 것을 통하여서 생명의 가치를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산 자만이 알아요.

죽은 자는 생명을 몰라요.

 

이방인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을 잉태하는 성(性)을 쾌락의 도구로 문란하게 하고 경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생명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산 자에요.

산 자라고 한다면 생명의 근원을 귀하게 여겨야 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겐 율법으로 이방인과 같은 성적 문란을 금기시 하라고 한 것입니다.

성(性)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을 경홀히 여기는 마귀적인 사고에요.

그래서 가나안에 사는 이방인의 죄악을 단적으로 성적 타락을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은 항상 성적 타락으로 나타나요.

성경은 이방인들의 성적 타락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죽은 자들이 행하는 죄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인들의 성(性)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 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생명에 속하였어요.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생명을 낳는 성생활은 부부간에만 허락을 한 것입니다.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입니다.

 

말라기를 봅시다.

 

말 2:14-15절.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어려서 취한 아내는 하나님이 짝 지워준 아내를 말합니다.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해서 어려서 취한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귀히 여기라는 말은 아내하고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한 것도 모두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다른 종(種)으로 보아요.

이스라엘은 산 자이고 이방인은 죽은 자로 보아요.

그러니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섞이는 것을 금지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시켜요.

이걸 창조라 하고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창조이든 구원이든 기존의 곳으로부터 분리 되어 나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을 남편으로 묘사하고 이스라엘은 아내로 묘사 했어요.

그래서 우상을 섬기면 간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남편으로 보고 우상은 외간 남자로 보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믿음의 문제로 나타나요.

진리 문제로 말해요.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 말을 해요.

 

신앙적으로는 믿음이냐! 행함이냐! 로 나타나고,

삶으로는 하늘 지향적이냐! 세상 지향적이냐! 로 나타나요.

너의 근본을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로 물어요.

하늘이냐! 땅이냐!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선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 4:4-5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요한계시록 17장을 보면 음녀가 나오지요.

음녀는 간음한 여인을 말해요.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고 있어요.

 

계 17:1-15절.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음녀가 많은 물위에 앉았다고 하지요.

많은 물이란? 세상을 말하고 그 위에 앉았단 말은 세상 사상에 취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섞인 사상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음녀가 땅의 왕들과 음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짝한 모습을 말해요.

한마디로 교회가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세속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해요.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해요.

음행의 포도주란? 음행케 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인 것을 말해요.

하나님의 말과 뱀의 말이 섞였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이 섞인 것을 말해요.

 

음행은 인본주의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는 인본주의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 기복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 인본주의 세속주의로 시험했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시험을 했어요.

음녀가 세상 것으로 취하여 있어요.

 

신약은 새 언약 시대에요.

새 언약 시대에 비 진리란 옛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지는 것이고,

옛 언약은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 음행의 포도주란? 예수의 피와 인간의 행함이 섞였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음행의 포도주란? 갈라디안식 신앙을 말해요.

바울이 갈라디안식 신앙을 다른 복음이라고 저주 하였잖아요.

이 시대 갈라디안식 신앙은 <믿음+행함= 온전한 신앙> 이라고 가르치는 인간의 선행도 의가 된다고 하는 인본주의 성화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예수 믿음과 성도의 행함으로 온전해 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은 다 음행의 포도주에요.

 

구약의 육적 간음은 곧 신약의 영적 간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간음을 남녀 간의 성문제로 접근해선 안 되고 영적인 것으로 접근하여야 해요.

복음 문제로 접근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모르면 맨 날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을 벌린다고 난리를 쳐요.

교회가 순결 지키기 운동을 한다구요.

이게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 순결을 지키면 의로운 자이고 순결을 잃으면 죄인으로 취급당하게 되어요.

 

하지만 신약에서의 죄는 예수님 피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간음은 옛 언약적인 간음관이에요.

새 언약에서의 간음은 복음과 다른 복음이 섞이는 거예요.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인다고 합니다.

 

옛 언약 신앙과 새 언약 신앙을 짬뽕으로 섞어 버렸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세상과 짝하는 간음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인 물량 주의에 빠진 교회는 매음굴이고 교인들은 음녀에요.

이걸 예수님은 초림 때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을 거짓 지도자들이 매매하고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씨를 말씀이라고 합니다.

음녀가 음행한다는 말은 말씀을 혼합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고 신앙의 가치를 세상의 가치관을 섞어서 가르치고 있어요.

신자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서 되겠느냐고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손00 장로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타락했다고 하면서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을 먹고 있으니까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소리치는 걸 기사로 보았어요.

물론 그 안타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윤리 도덕을 하나님의 경건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구약적 경건이에요.

 

세상은 예수 안 믿는다고 욕하지 않아요.

그건 세상에서 죄가 아니에요.

개인의 종교적 성향이기 때문에 절에 다니든 교회에 다니든 신경 안 써요.

다만 국가가 정한 규범을 지키고 사회통념상 죄라고 하는 것을 안 하면 되어요.

그러면 욕을 안 해요.

 

성경을 펴면 예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해요.

성경은 인간의 착함과 악함으로 죄를 규정하지 않아요.

교회는 성경의 죄관으로 말해야지 세상 죄관으로 말하면 안 되어요.

세상 죄관으로 신앙적인 죄로 규정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착함은 의가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해요.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 죄라고 해 주어야 해요.

예수 믿는 것이 선이고 예수 안 믿는 것이 악이라고 해 주어야 해요.

바리새인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의 착함을 의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까 윤리 실천 운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령이 말하는 죄관이 안 나오고 율법적인 죄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 됨을 세상 사람들처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착함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 죄를 규정하면 교회나 세상이나 뭐가 다릅니까?

똑 같아요.

이게 바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닌 괴물 같은 교인들이 신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성령이 오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고 하시지요.

왜 책망합니까?

인간의 착함을 의라고 여기는 율법적 죄관이 틀렸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말하는 죄관은 세상이 말하는 죄관과 다르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요.

성령이 말하는 죄관과 세상이 말하는 죄관이 달라요.

다시 말해서 구약의 죄와 신약의 죄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윤리 도덕적으로 판단해서 죄로 규정해요.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규정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으니 인간은 그 어떤 착함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면할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주여 저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누가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예수를 본적도 죽인적도 없는데,,,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일괄 취급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요.

이렇게 되면 시대를 초월하여서 모든 인간은 한 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도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예수님을 죽인 그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착함과 악함이라는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죄관은 기독교 윤리실천에서 말하는 죄관과 전혀 다르지요.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선 손 장로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개혁주의 목사들이 성화를 가르치면서 외치는 거룩한 삶의 레퍼토리잖아요.

 

기독교 방송을 틀어보세요.

다 이런 류의 설교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마다 세상 죄관으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너도 나도 반듯하게 산 것을 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도적질 안하고!

사기 안치고!

뇌물 안 받고!

술 담배 안 먹고!

 

교회 생활 착실하게 한 것으로 믿음 좋다고 행세하잖아요.

반대로 이런 짓을 한 사람은 기가 죽어서 찍소리도 못하고 죄인으로 살잖아요.

오죽 했으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사람이 손에 성경을 들고 있겠어요.

 

나 교회 다니는 장로입니다.

난 착한 사람이니 국회로 보내달라고 하잖아요.

결국 교인들이 세상 죄관으로 세상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켜요.

 

나 착하거든,

나 예수 안 죽였거든,

그러니 예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용서가 필요한데,

난 예수를 안 죽였다고 극구 부인하는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싶어도 못해주어요.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면서 난 예수를 안 죽인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찌 용서해줍니까.

 

천국은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가요.

반대로 지옥은 예수를 안 죽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에요.

그래서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나 착하게 살았는데 왜 지옥에 와야 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잡힙니까?

여러분은 용서가 필요한 사람입니까?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입니까?

 

지금은 교회마다 성경을 구약 식으로 해석을 해서 율법적인 죄관을 가르치고 있어요.

여러분 착하게 사십시오!

죄 짓지 마세요! 라고 하니 고작해서 세상 법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세상에서는 양심적으로 산 것을 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이상한 신앙을 가진 괴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닌 변종들인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영적으로 간음하여서 생겨난 자들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새상 죄관도 함께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예수님의 말씀만 받아야 하는데 마귀의 말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결국 교인들 속에 두 가지 종자가 뿌려진 것입니다.

교인들이 두 가지 말로 양육을 받으니 변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종이 사회 현상론적으로도 나타나고 있어요.

뭔가 하면 이종교배(異種交配)하는 것입니다.

이종교배는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파하는 악한 것이에요.

이종교배는 인간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에요.

 

수박과 호박을 접붙여서 호박수박을 만들어내고,

오이와 고추를 접붙여서 오이고추를 만들고,

사자와 호랑이를 교미시켜서 라이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발전해서 인간을 복제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에 인간도 복제된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의 징조에요.

세상은 두 종자가 교배되어 이상한 종자들이 생산되어지고 있고,

교회 안에는 두 물(말씀, 씨)이 합하여 이상한 교인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 신자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신자에요.

잘 새겨서 들으세요.

착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죄는 인간의 착함과 상관없이 예수 안 믿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의 간음에 대하여서 알겠지요.

 

다시 또 어려운 부분을 살펴봅시다.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은 한 몸이 되는 행위에요.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나뉘었다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헤어졌다 다시 만남으로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만 열려져 있어요.

남자와 여자는 마치 열쇠와 자물쇠 같아요.

자기 것에만 열려져요.

아담과 하와가 자기 것이므로 서로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적으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복음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셔야 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아가서는 외설로 흘려버려요.

 

복음적으로 풀어야 솔로몬이 술람미를 왜 꽁꽁 잠그고 숨겨 놓았으며,

왜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해두었느냐를 알 수가 있어요.

그래야 간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복음적으로 들려지게 되어요.

이걸 더 살펴봅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정절을 여자가 몸을 지키는 것으로 인정해 주었어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것이 성욕입니다.

그만큼 유혹을 많이 받고 지키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래서 부족마다 국가마다 간음을 큰 죄로 다스렸어요.

잘 지킨 여자에겐 열녀문을 세워서 공덕을 기렸어요.

 

성(性)은 부부간에만 허락된 것이에요.

남편만 아내의 몸을 주장할 수 있고 아내만 남편의 몸을 주장할 수가 있어요.

이 틀이 깨어지면 혼인관계가 지속 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법으로 이 틀을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性)이란 말 속에는 목숨이란 뜻을 담아 놓았어요.

여자들은 성(性)을 목숨과 동일시해요.

그래서 여자들 중에선 성(性)을 유린당하면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性)을 잃으면 몸을 버렸다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제부터 엄청나게 중요한 말인데 귀담아 새겨들으세요.

 

성경을 보면 일부다처(一夫多妻)제는 있어도 일처다부(一妻多夫)제는 찾아보지 못해요.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허용하여도,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허용하지 않아요.

 

왜 일부다처제는 허락이 되지만 일처다부제는 허락되지 않을까요?

왜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느려도 되고,

왜 여자는 한 남자만 거느려야 합니까?

 

어떤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왜 남자는 연애를 해도 되고 여자는 안 되는 거냐

다 똑 같은 건데, 왜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느냐, 라고 해요.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게요.

영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육적으로는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기 때문에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되어요.

이게 참으로 오해 받을 만한 말인데!

잘 이해하세요.

 

왜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는가 하면 이는 씨와 밭의 차이 때문이에요.

영적이라고 했어요.

영적으로 들으세요.

참 조심스럽다! 조심스러워!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입니다.

혹시라도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봐서 염려가 되어요.

 

성경은 남자와 여자를 씨와 밭으로 묘사해요.

 

쉬운 말로 남자는 씨고 여자는 밭이에요.

그럼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밭에다 씨를 뿌리는 행위가 되겠지요.

이러면 왜 남자가 여러 여자에게 씨를 뿌리는 것은 허용이 되는데,

왜 여자는 한 남자에게만 씨를 받아야만 하느냐 라는 말로 해석이 되겠지요.

 

여자는 왜 여러 씨를 받으면 안 될까요?

이는 밭은 두 씨를 받아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두 씨를 받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생명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한 배에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종자를 심으면 싸움이 일어나요.

반드시 누구 하나는 죽게 되어 있어요.

이건 생명의 특성상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밭에 한 가지 종자만 심기를 원해요.

 

성경은 하나의 생명만 말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하지요.

예수님만 참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보아요.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어요.

이렇게 되면 세상에 있는 생명은 가짜라는 말이 되겠지요.

세상은 밭이고 예수님은 밭에 뿌려지는 씨에요.

 

성도가 밭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의 씨(생명)만 받아야 하잖아요.

마귀의 생명을 받으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과 마귀가 함께 어울릴 수가 없지요.

이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빛과 어둠이 어울리는 것은 타락이에요.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 빛과 어둠이 섞어 있는데 혼돈과 공허라고 했어요.

이 때 하나님이 혼돈 속에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잖아요.

이를 창조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섞인 것은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섞인 것을 갈라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연유입니다.

 

한 밭에 두 종자가 섞인 것을 타락으로 보아요.

그래서 한 여자가 두 씨를 받는 것을 타락으로 보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다처제는 허용을 하여도 일처다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씨를 받는 것은 혼합주의에요.

이 시대 종교 다원주의가 득세를 합니다.

이는 두 씨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혼합은 타락을 말해요.

두 씨가 섞이면 변종이 생겨나요.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섞이면 홍수가 나요.

 

두 마음을 품었다느니!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타락을 의미해요.

순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씨가 다른 두 종자가 혼합하여 섞였기 때문에 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밭에 두 종자를 뿌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래요.

솔로몬에게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술람미는 꽁꽁 숨겨 놓았어요.

왜 그럴까요.

 

자기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씨를 뿌리면서 왜 술람미는 이씨 저씨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꽁꽁 숨겨 놓았습니까?

이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지금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예수님 역할을 하고 있고 술람미는 성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하는 행동은 곧 예수님의 하는 일이고, 술람미가 하는 행동은 곧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 난해한 것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냥 패스 할까 하다가 오해 받더라도 제가 깨닫고 은혜 받은 것으로서 말하고자 영적인 의미로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견해이니까 옳으니 그르니 따지지 마세요.

은혜가 되면 받고 아니다 싶으면 별 미친놈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그냥 흘러 보내세요.

 

먼저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를 알 필요가 있어요.

성경은 씨를 주는 자와 받는 자로 남자와 여자로 구분해요.

이는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과 피조물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과 성도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남자는 씨를 주는 자이고, 여자는 씨를 받는 자로 창조를 했어요.

이는 하나님(예수님)과 성도를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그러므로 남자는 씨를 주는 창조주 위치에 있어요.

여자는 창조주가 준 씨를 받는 땅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남자는 예수님 위치에 있고, 여자는 성도 위치에 있는 것이 되지요.

솔로몬은 남자이고 술람미는 여자에요.

그럼 솔로몬은 예수님 입장에 있고, 술람미는 성도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에요.

하늘은 주는 위치에 있고, 땅은 받는 위치에 있어요.

남자가 씨라면 여자는 씨를 받는 밭이에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조그마한 자투리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콩을 심든지 팥을 심든지 하잖아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바래요.

그래서 온 세상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처럼 씨를 뿌리는 자에요.

온 세상 구석구석에 자기 씨를 퍼트리는 일을 해요.

 

이건 씨를 가진 남자의 본성이에요.

씨의 특성이 퍼트리고자 하는 속성이에요.

씨는 아무 밭에라도 떨어지면 뿌리를 내려요.

이 밭, 저 밭 가리지 않아요.

그냥 밭이면 아무데서나 생명을 틔워요.

이 모두가 생명을 많이 퍼트리고자 하는 씨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속성 때문이에요.

 

상징적으로 남자의 정자(精子)는 한번 쏟아 낼 때마다 수억 마리씩 쏟아 내요.

이건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게 하신 씨의 속성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사람이든 짐승이든 수컷들은 많은 암컷들에게 자기 씨를 뿌리고자 해요.

수컷은 본능적으로 하나로 만족하지 않아요.

 

그런데 암컷은 오직 하나의 난자(卵子)만 쏟아요.

수많은 정자들 중에 오직 하나만 받아 들여요.

이는 하나님께서 여자는 오직 하나의 씨만 받아 두는 그릇으로 창조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여자는 자기 안에 씨만 용납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자기 자식만 귀하지 남에 자식은 귀하지 않아요.

내 배로 낳은 자식만 자식이지 남의 배로 낳은 자식은 자식이 아니에요.

그러나 남자는 어떤 배에서 낳았든지 따지지 않고 자기 핏줄만 따져요.

 

이게 수컷과 암컷의 차이에요.

이는 하나님께서 암컷과 수컷 속에 하나님의 생명에 비밀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 속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원리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에게 뿌려진 자기 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씨를 받은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자기 밭에 다른 씨를 뿌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남자는 여자의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해요.

자신은 온 세상의 여자를 다 품고 있어도 자기 여자는 다른 놈 품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이게 남자의 속성이면서 곧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해요.

 

남자들의 이런 사랑의 독재적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에게 눈길을 돌리면 불같이 진노해요.

너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처럼 씨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 때문에 여자에게는 정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기 안에 심어진 씨가 중요해요.

자기 안에서 태어난 씨만 중요해요.

 

여자에게는 그 씨가 김가 씨든, 박가 씨든, 최가 씨든 상관치 않아요.

오로지 자기 뱃속에서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만 중요해요.

씨와 엄마는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여자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씨를 위해서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자기 뱃속에서 나온 씨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도우미에요.

씨를 위해서 남편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엄마의 속성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어느 뱃속에서 나왔느냐가 중요치 않고 그 씨가 자기 씨냐 아니냐만 따져요.

자기 씨가 아니면 죽여 버려요.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씨받이에 불과해요.

그러니 남자는 이씨 여인이든 김씨 여인이든 박씨 여인이든 상관치 않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의 속성상 자기 씨만 남기면 되니까요.

 

이걸 하나님과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남자로서 씨를 뿌리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여자로서 씨를 받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남자 입장이니 어느 여자가 중요치 않고 누구 씨냐를 중요시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자 입장에서 누구 씨냐가 중요치 않고 내 뱃속에서 나왔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여자에게 있어 남편이란 자기 뱃속에서 나온 씨를 키워주는 도우미라고 하였지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여자에요.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자기 자식을 키우기 위한 보호막으로서의 남편일 뿐이에요.

그만큼 여자에게는 자식이 남편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편은 버려도 자식은 못 버리는 것입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풀어 봅시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처럼 씨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밭에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지요.

여기서 밭이란? 인간들입니다.

 

이 세상에 씨는 두 가지 씨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에요.

그러니 이 세상에 인간들은 두 종류 즉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만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두 부류만 있어요.

 

씨가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 말씀과 마귀의 말이 있겠지요.

하나님과 마귀는 서로가 인간들 속에 말씀을 심어 놓고자 하겠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든지 아니면 마귀의 말을 받든지 둘 중에 하나를 받게 되어 있어요.

받은 말씀이 자기 안에서 자라가요.

그러면 그 말씀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하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늘사람으로 나아가고 땅의 말을 받으면 땅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어요.

 

말씀이 그 사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고,

마귀의 말을 받으면 마귀의 말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밭인 여자는 씨를 결정하지 못해요.

그냥 받을 뿐이에요.

누가 뿌려주든지 뿌려준 씨를 잉태하여서 키워낼 뿐이에요.

 

그런데 여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의 씨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뱃속에서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만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여자가 마귀와 간통을 하고 자기 뱃속에 마귀의 씨를 받아놓았다면 그 씨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술람미가 솔로몬하고 연애를 하면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서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술람미는 어미의 본성으로 자기 뱃속에 심어진 아이를 위하여 살겠지요.

자기 뱃속에 아이를 위해서 솔로몬을 이용할 것이 아닙니까?

 

마치 KBS 드라마 제빵 왕 김탁구에서 전인화처럼 외간남자와 사랑해서 낳은 자식을 위해서 자기 남편을 철저히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인화에게는 남편은 안중에 없어요.

오로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뿐이에요.

그 아들에게 남편의 회사를 빼앗아서 물려주고 싶어해요.

이게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을 둔 어미의 속성이에요.

 

여자에게 있어 아들은 곧 자기 분신이에요.

그러므로 아들을 위해서 남편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 남편을 사랑하는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여자의 속성이에요.

 

솔로몬은 하나님 입장이잖아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술람미를 다른 사람의 씨를 뿌리지 못하게 꽁꽁 감추어 놓는 것입니다.

마치 정조대를 채워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재에요.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아요.

하나님만 섬기라고 해요.

다른 신을 섬기면 무자비 할 정도로 질투하고 진노를 해요.

이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말씀이 씨라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만 듣도록 하겠지요.

만약에 마귀의 말을 들으면 그 마귀의 말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것이 아닙니까?

 

이걸 믿음과 행함으로 말해 봅시다.

하나님은 믿음을 강조하고 마귀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럼 믿음과 행함은 씨와 같이 되겠지요.

말씀으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 말씀이고 행함은 마귀의 말입니다.

 

성도는 밭이니까 믿음을 받든지 행함을 받든지 어느 것을 받게 됩니다.

믿음을 받으면 오직 예수님 피를 위해서 올인 하겠지요.

그런데 마귀의 말인 행함을 받을 것 같으면 행함을 붙잡을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귀의 씨인 행함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행함을 신앙으로 인정하면 믿음을 밀어내고 죽여요.

믿음은 하나님 것이지만 행함은 우리 것이에요.

 

행함은 마치 내 뱃속으로 낳은 자식과 같아요.

행함도 의(義)가 되는 신앙이라고 인정해 주면 우리는 여자처럼 내 육신에서 나온 행함을 남기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를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을 보세요.

이들은 자기가 행한 것을 자랑하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아요.

입만 열면 바리새인들처럼 세리들과 비교해서 자기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했다고 자랑질을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되자고 합니다.

벌써 말이 어폐가 있지요.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지만 온전케 되는 것은 행함으로 된다고 하잖아요.

온전케 되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니 믿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 피로 부족하다는 말이 되겠지요.

예수님 피로는 온전치 못하니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은 믿음을 자랑하지 못하고 행함을 강조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여러분~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 집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처럼 자기가 행한 성화라는 행함을 붙잡고 믿음은 밀어내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과 같고 믿음은 남에 자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남에 자식인 믿음은 없고 자기 자식인 행함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지자고 하는 성화는 마귀의 말(씨)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온전해요.

온전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역을 말해요.

우리가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온전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온전해져요.

 

예수 안은 온전하고 거룩해요.

예수 밖은 모두가 부정해요.

예수 안은 생명의 세계이고,

예수 밖은 죽음의 동네에요.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다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썩은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함을 의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의로 인정해 주어요.

 

이게 하나님이 세상에 제시한 의에 법칙이에요.

이렇게 되면 성화주의자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지자고 하는 것은 마귀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마귀의 말인 성화를 받아 들이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의는 날아가 버려요.

십자가는 감추어지고 자기 열심과 충성으로 만들어 낸 성화라는 의만 자랑하게 되어요.

난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다 를 자랑하지 않고 나 말씀 지켜서 온전하다고 한단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서 진노 받을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피 값으로 산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서 마귀의 말(씨)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를 꽁꽁 감추듯이 예수님도 성도의 귀를 막아서 마귀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그러고 있어요.

술람미에게 넌 절대로 외간 남자를 보아선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그고, 덮고, 봉인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남자는 질투가 많은 것입니다.

왜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지 아세요.

이는 자기가 뿌린 씨가 죽을까봐서에요.

 

남자의 질투는 살인을 불러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기 씨를 남기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에요.

 

수컷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요.

하지만 암컷은 수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아요.

수컷들끼리 싸우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곁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요.

이긴 놈만 오라고 해요.

이긴 놈의 씨를 받아 주겠다고 해요.

 

암컷은 씨를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수컷이 결정해요.

암컷은 수컷이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에요.

그러므로 암컷은 싸움에서 이긴 수컷의 씨를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수컷이 심어준대로 키우면 되어요.

 

우리는 암컷처럼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워서 이긴 씨를 받으면 되어요.

그런데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암컷인 우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는데 예수님이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품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긴 자가 되어서 우리 속에 예수님의 씨인 말씀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넣어 주신 말씀은 다름 아닌 예수님 피로 거룩하고 죄사함을 받는다는 새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여자들인 성도 속에는 새 언약이라는 말씀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속에 심겨진 씨를 지키려고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씨를 받은 성도는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잘못 들으면 또 오해할 수 있으니 잘 들으세요.

 

수컷들이 온 세상에 자기 씨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본능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을 퍼트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뜻이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란 말이 아니에요.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남자들 바람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래서 미성년자는 아가서를 부모의 입회아래서 보라고 한 것입니다.

참! 조심스럽다! 조심스러워!

이거 혹시 과유불급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냥 대충대충 넘어갈 것을 세세히 말하다가 도리어 오해를 불러 올 것 같아서 영 찜찜합니다.

하지만 이왕 언급했으니 더 나가봅시다.

 

그럼 수컷과 암컷을 예수님과 성도로 비유해 봅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자로 오셨어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자기 신부를 만듭니다.

그 속에 자기 씨를 심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의 모습을 보세요.

신랑은 어린양 혼자인데 신부는 천천이고 만만이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이 온 세상에다 자기 씨를 퍼트린 것입니다.

여기선 씨와 신부를 동의어로 보세요.

같은 뜻이니까요.

 

성도는 밭처럼 예수님의 씨를 받은 자들이에요.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어요.

이를 두고 바울은 질 그릇 속에 보화를 담았다고 했어요.

성도는 마치 왕의 씨를 회임한 왕비와 같아요.

왕은 자기 씨를 위해서 왕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심은 씨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 심은 씨에요.

그래서 성도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서 감시케 하셨어요.

 

그리고 자기 씨를 받은 성도에겐 경고를 합니다.

절대로 다른 씨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 말만 듣고 다른 말을 절대로 듣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술람미에게 자기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다른 놈은 절대로 쳐다보지 말라고 잠그고 덮고 봉해 놓았어요.

넌 나만 보아야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고 성도를 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얻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었어요.

 

성도는 투자한 것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투자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성도를 샀단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살을 찢기고 성도를 샀단 말이에요.

사랑이 강할수록 질투가 강해요.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잠근 동산이고, 덮인 우물이고, 봉한 샘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한마디로 술람미가 정절을 굳게 지켜서 다른 사람에게 한 눈을 팔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복음적으로 말하면 믿음에 정절을 잘 지켜주었다고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향기가 만발한다고 합니다.

 

13절.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여자가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정조입니다.

남자의 씨를 잘 키워주는 것입니다.

오직 그 남자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남자만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여요.

남자만 사랑하면 다른 것 부족해도 다 용납해요.

 

살림 못해도 용서하고!

음식 못해도 용서하고!

사치해도 용서하고!

게을러도 용서하고!

다 용서해요.

 

신앙이란?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는 오직 한 남자만 보여야 해요.

내게 생명을 주는 그 남자 말이에요.

 

그 남자가 누굽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님입니다.

술람미에겐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눈에 오직 자신만 담겨져 있음을 보았어요.

 

술람미의 몸과 마음속에 자기 이외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음을 보았어요.

그러니 술람미가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 바라보는 그 모습을 동산에 있는 각종 화초들이 뿜어내는 향기와 같다고 합니다.

 

그 향기가 코를 찌르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의 믿음에 절개가 생수가 되어서 자신의 마음속을 흐른다고 합니다.

자신만 사모하는 술람미의 사모함이 시내처럼 자기 마음을 흡족케 해준다고 합니다.

 

15-16절.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신부의 아름다움은 신랑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한 가치입니다.

신앙은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주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이러한 가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솔로몬의 사랑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천하디 천한 여자를 왕비로 간택하여준 솔로몬의 약속이야 말로 그 어떤 유혹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준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소리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불어오라!

 

내 마음의 동산에 불어서 온 세상에 이 사랑의 향기를 날리라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님과 나누는 사랑을 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해 주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어요.

 

북풍은 강한 바람이고,

남풍은 부드러운 바람입니다.

 

때로는 북풍처럼 급하고 강하게 불고!

때로는 남풍처럼 훈훈하고 부드럽게 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요.

성령이 일을 한 어떤 행함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면 가전제품이 돌아가듯이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 반응이 없는 자는 죽은 자에요.

반응이 없는 믿음은 가짜에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반드시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부드러움이 있어야 해요.

강하고 담대할 땐 남자처럼 든든하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울 땐 마치 자식을 품에 안고 젖먹이는 엄마처럼 평화롭고 자애로워요.

 

진리라는 본질적인 면에선 일체의 양보나 타협이 없는 강직함이 있어야 하지만,

살아가는 비본질적인 면에선 용서하고 이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여유로움이 생겨요.

우리 안엔 진리를 대할 때는 북풍처럼 강함이 있어야 하고,

그 진리를 삶으로 풀어 낼 때는 남풍처럼 부드러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를 받고 증거 할 땐 남자처럼 강하여야 하지만,

그 십자가 도를 삶으로 토하여 낼 때는 여자처럼 부드러워요.

우린 싸울 줄만 알았지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여 키워가는 그런 사랑이 부족해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기다려 줄줄 모르고 다 쫓아내고 있어요.

자신은 마치 태어나면서 복음을 아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과 다른 말을 하면 무조건 복음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깔보고 업신여기고 있어요.

 

복음이라고 외쳐대고 댕댕거리는데 그 속에 생명의 훈훈함이 묻어나지를 못하고 있어요.

말은 맞는데,

그 말로 생명을 살려 내지를 못하고 있어요.

생명이 지식으로 가지고 있지 삶으로 토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여유로움이 없어요.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따뜻함이 없어요.

이런 것은 그 속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래요.

자신이 죽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유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여자는 부드러워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온유하고 겸손해요.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포학하고 사나워요.

사랑을 마음으로 받지 않고 지식으로 받으면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냥 자기 기준에 안 맞으면 몽땅 복음을 모르는 이단이라고 매도해 버려요.

 

우리는 킬러들이 되었어요.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정죄하고 잘라내고 쫓아내고 있어요.

 

이건 그 안에 남자 되신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가난하다는 증거에요.

여자가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니 심령이 피폐하고 메말라서 깨어진 징소리 마냥 깽깽 거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섭섭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말로는 사랑 사랑하는데 정작 자기 안에 사랑이 비처럼 뿌려지지 않으니 밭이 메말라서 생명의 씨를 틔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척 하지 말고 사랑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척 하지 말고 사랑하셔야 해요.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여자들이에요.

그럼 술람미처럼 사랑의 향기를 토하여내게 되어 있어요.

 

주님 이런 못난 죄인을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고,

연약한 사람이 있거든 일으켜 세워주고 이해하고 보듬어 주게 되어요.

 

제발 자기 안에 술람미처럼 동산 가득히 신랑께 받은 사랑으로 향기를 피우세요.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서 온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세요.

거울 속에 비췬 자기 얼굴을 한번 보세요.

어떠한지!

 

그 속에 누가 있나요.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행복한 술람미가 있나요?

아니면 신랑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심술보가 가득한 몰골의 예루살렘 여자들이 있나요?

 

사랑 받은 여인처럼 나긋나긋하고 애교가 있어 보세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술람미의 마음속에서 부는 북풍이 불고 남풍이 붑니까?

 

어떤 향기가 토해집니까?

예수의 냄새입니까?

마귀의 냄새입니까?

 

도덕군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자로서 좀 관대함이 시내처럼 흘러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유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사랑받은 여자답게 부드러워지란 말입니다.

 

제발 좀 댕댕거리지 말고 나대지 마세요.

나대는 것을 보면 겁이 나요.

저 사람은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온 사방에 썩은 냄새만 풍기고 다닐까 궁금해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복음을 안다고 설치지만 남에게 피해만 주고 있어요.

 

과연 그 속에 예수가 있는지 버선 뒤집듯이 까보고 싶어요.

입으로만 사랑을 했지 몸으로 사랑을 해 보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사람처럼 보여요.

예수를 만나지도 못하고서는 만난 것처럼 사기치고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를 만난 사람처럼 보이진 않고!

어디서 남에게 들은 예수를 중계방송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져요.

 

분명히 천사의 말을 하는데 왜 울리는 꽹과리 소리로 들려지는지 모르겠어요.

말은 현란한데 공허해요.

말 속에 생명의 흐름이 포착되지 않아요.

죽은 말이에요.

 

예수를 구경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과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속에 봉한 샘물을 먹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의 사랑으로 든든해지고 넉넉해지세요.

예수님 사랑으로 좀 녹녹하고 흐물흐물해 지세요.

맛대가리 없이 굴지 말고 제발 맛나게 구세요.

 

남에 신랑 확인하러 다니지 말고 제발 자기 안에 있는 신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나 확인하세요.

남에 신랑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하나님께 맡겨두세요.

그건 우리가 확인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제발 너나 잘하세요.

 

내가 신랑의 사랑을 받고 흡족하면 돼요.

남이야 사랑을 받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에요.

술람미처럼 예루살렘 여자들이 뭐라고 하여도 신경 쓰지 말고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행복하면 됩니다.

 

신랑의 사랑을 실컷 받아서 먼저 우리 안에 사랑의 바람이 불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봉한 샘물이 터져야 해요.

우물물이 솟아나야 해요.

시내가 되어 마음 구석구석을 흐르게 될 때 각양의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어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 기다리고 안아 주세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안다면 그 누군들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지식으로 있으니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 모두가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도적놈이고,

내가 살인자이고,

내가 간음한 여인이 될 때 비로소 도적을 용서하고 살인자를 용서하고 간음한 자를 용서할 수가 있어져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손가락질을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할 몫이 아니에요.

우린 다만 다가가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우린 언제쯤에나 연약한 자에게 다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그런 여유로움은 구경할 수가 있을까요?

나에겐 언제 이런 시내가 흐를까요?

 

우린 그동안 싸운다고 복음이 주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하여야 할 일을 내가 한다고 설치고 다녔어요.

연약한 자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두셨다는 것을 간과한 채 내가 마치 하나님인 냥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였어요.

 

우리는 왜 하나님이 저 사람은 여기에 보내고 두셨을까 를 생각하지 않고 왜 여기 왔어! 하고 쫓아 버렸다고요.

아! 하나님이 저 분을 우리교회에 보내셨구나! 라고 그 사람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우린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자기하고 안 맞는다고 뿔로 들이받고 밀치고 쫓아내버렸어요.

 

제가 그랬단 말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이런 배은망덕한 악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 언제쯤 내 안에서 남풍이 불까나!

 

오늘 아가서를 보면서 내가 너무도 가난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 마음이 너무도 피폐되어 있고 황량한 사막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주의 자비와 긍휼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라도 복음이 주는 느긋함으로 우리 마음을 녹이셔야 해요.

아가서가 그냥 글이 아니라 양식이 되어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술람미의 사랑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야 술람미처럼 누가 뭐라고 하여도 씨익~ 웃어 줄 수 있는 그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어요.

 

복음은 살아 있는 능력이에요.

그냥 죽은 문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곳이에요.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우리 안에 이런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린 천사도 부러워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어요.

우리 안에 마귀가 막아 놓았던 우물이 열렸고 봉한 샘이 터졌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어요.

수가성 여인처럼 말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자답게 터진 샘처럼 흐르는 시내가 되어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향기를 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속에 있는 깊은 생수의 샘을 열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린 모두가 수가성 여인처럼 가짜 신랑과 살았는데 이제 진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덮인 우물을 열어주시고 봉한 샘물을 터트려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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