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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성경강해)18강. 상사병을 주고 가신 님 (아가 5:1-8)

by coroa 2021. 9. 20.

 

 

18강. 상사병을 주고 가신 님 (아가 5:1-8)

-.정낙원 목사

 

 

 

아 5:1-8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기서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상사병이 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솔로몬은 술람미를 잠근 동산이고, 봉한 샘이고, 덮인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잠갔다, 봉했다, 덮었다 라는 말은 외부인에겐 허락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솔로몬 혼자만이 드나들 수가 있고 혼자만이 먹고 마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것입니다.

값을 주고 산 자기 소유물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성도를 구원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성도를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소유이듯이 성도도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이 값을 주고 성도를 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 이외 다른 것을 사랑하면 간음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를 자기 동산이라고 합니다.

 

아 5: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하면서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동산에서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자기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자기의 포도주도 마셨다고 합니다.

이는 술람미와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몰약이니 향 재료나 꿀 송이나 포도주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받은 사랑을 토하여 내는 각양의 반응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준 것들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토하여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전부 “내 것” 이라고 합니다.

 

내 동산이고!

나의 몰약과 향 재료라고 하고!

나의 꿀송이와 꿀이라고 하고!

내 포도주라고 하고!

내 젖을 마셨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맡겨 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모든 성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도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깔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에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토해내는 몰약이니, 향이니, 꿀이니, 포도주니, 젖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솔로몬을 향한 사랑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걸 성도의 신앙생활로 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전도와 기도며, 봉사와 충성이며, 찬양과 헌신이며, 구제와 헌금과 같은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행한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를 은혜 또는 은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성도가 토해내는 것도 전부가 주님이 주신 은혜이고 은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을 주시고는 다시 회수해 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만물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술람미가 토해내는 것들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가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봉사와 같은 것들은 향이고, 꿀이고, 포도주이고, 젖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감사하는 성도의 삶을 일컬어 ‘영적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을 봅시다.

 

롬 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성도의 삶을 “영적 예배” 라고 하고 또한 “산 제사” 라고도 합니다.

 

제사란? 제물을 죽여서 각 부위별로 각(脚)을 떠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드려졌듯이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란? 각자 받은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입술의 열매라고 하고 찬송의 재사라고 합니다.

 

성도와 예수님은 한 몸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성도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영적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생명의 교류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가며 꼴을 얻고 나가며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성령이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영적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오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 하에서의 영적 예배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만 예배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건 여러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모임이에요.

이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더 중요한 것은 범사에 내 생활 전반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요.

사소한 것 하나에서 주님의 은혜를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배에요.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영적 예배에요.

물론 이 속에 교회 생활도 포함되어 있어요.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을 나눌 필요가 없어요.

믿음 안에서는 성과 속이 없습니다.

범사에 믿음으로 행하면 성(聖)이 되고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속(俗)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계시고 교회 밖에도 계세요.

그러니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세 가지로 축약해서 말하였습니다.

 

살전 1:2-5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삶으로 표현을 해 냈습니다.

이를 믿음에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믿음에 역사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단의 그 어떤 참소도 예수님의 피로 넉넉히 이기며 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죄 용서 받음에 감사하며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유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란? 주께 받은 사랑을 형제에게 갚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은혜와 사랑을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나누며 베풀고 섬기는 모습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란? 장차 오는 세상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도 천국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심치 않고 산 것입니다.

 

영적 예배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봐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극심한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의 역사와,

그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사랑의 수고와, 천국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인내를 잃지 않고 살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이런 삶을 본 삼으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음으로서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삶을 모든 교회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수고와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아! 내 동산에 들어와서 이 아름다운 것들을 맡고,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 하면서 내 동산에서 뿜어지는 각종 향기를 온 세상에 날리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운 신앙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를 친구들을 자기의 동산으로 초대해서 먹고 마시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 5: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토해내는 사랑과 섬김과 봉사를 받으라고 합니다.

감사와 사랑과 찬양과 봉사가 꿀송이고 포도주이고 각종 향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들이 토하여 내는 꿀송이도 있고, 포도주도 있고, 젖도 있고, 몰약도 있고, 각종 향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친구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 것은 전부 솔로몬의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모든 것을 주고선 친구들에겐 마치 술람미가 한 것처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솔로몬은 술람미를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남편이 자기 마누라 자랑하고 싶어서 아이 돌 잔치를 핑계 삼아 직장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과 같아요.

음식은 전부 장모님이 해 놓았어요.

그러면서 친구들에겐 이 맛난 음식들은 전부 자기 마누라가 한 것인 냥 자랑하고 있어요.

 

야! 어때!

우리 마누라 음식 솜씨 좋지!

끝내 주지 않니!

내가 이런 마누라와 산다는 것 아니냐!

많이 먹어!

실컷 마시라고 하고 있어요.

 

지금 솔로몬이 그러고 있어요.

팔불출처럼 말이에요.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으면 자기가 모든 것을 줘 놓고선 친구들을 부르겠어요.

 

솔로몬은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봐라!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 신앙을 보아라! 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래요.

예수님의 것을 몽땅 뒤집어씌워 놓았어요.

그리고는 야! 어떠냐! 내 신부 예쁘지! 그러고 있어요.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고 있잖아요.

 

욥 1: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아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세상에 저렇게 순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없다고 자랑하잖아요.

하나님은 마치 자식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세상에선 마누라 자랑하는 것과 자식 자랑하는 것은 팔불출이라고 하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비록 팔불출 소리를 듣더라도 자기 마누라를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기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마누라는 자기와 한 몸이고!

자식은 자기의 자존심이고 자아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아내는 멋진 남편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남편은 예쁜 마누라를 자랑하고 싶어 하잖아요.

자식 자랑하고 싶잖아요.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면 자식 키 큰 것을 자랑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1절에선 그렇게 칭찬을 하였는데,

2절 이후로는 이별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느닷없이 1절과 2절의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마치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모습과 같지 않나요.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어요.

아주 기분 좋은 말씀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2절에서는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요.

갑자기 음산해졌어요.

1절과 2절은 반전(反轉)인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모습과 같지 않나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다!” 라고 하자 예수님이 칭찬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보호해 주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예수님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어요.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완전히 천사와 악마를 보여주고 있지요.

지금 솔로몬과 술람미가 그래요.

1절과 2절 이하의 모습이 그렇다구요.

 

1절과 2절은 완전히 다르게 반전이 되어 있어요.

앞에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는데,

뒤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듯이 냉랭해졌어요.

 

두 사람의 사랑 전선에 이상이 생겼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귀찮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들 신앙이 이래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어요.

그것도 매일같이 말이에요.

 

본문 속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면 술람미가 교만해졌어요.

솔로몬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신랑 알기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상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신랑이 멀리 출타를 하였다가 새벽에 돌아왔어요.

밤이슬 맞아 가면서 단숨에 돌아 와서 술람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여보~ 나왔어!’ 하고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잠을 깨운다고 짜증을 내고 있어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일어나지도 않아요.

신랑을 집에 들이지도 않고 문전박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자 신랑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자신이 왔다 갔다는 흔적만을 남기고 쓸쓸히 새벽 먼 길을 떠나 가 버렸어요.

 

이건 너무도 극단적이에요.

중요한 것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내 쳤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솔로몬이 술람미를 모른 척 한다면 이해가 가요.

수많은 여인들 숲에서 사는 왕이니 천한 노예가 싫증이 날수도 있으니까요.

왕이 그냥 하룻밤 노리개로 데리고 놀다가 싫증이 나서 안 만난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완전히 반대에요.

노예가 왕을 싫다고 한단 말입니다.

천한 것이 존귀한 분을 내 쳤단 말입니다.

어떻게 노예가 왕의 사랑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술람미는 죄인을 상징하고,

솔로몬은 하나님(예수님)을 상징해요.

죄인 주제에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어 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도 하나님을 싫다고 하잖아요.

날 간섭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툭 하면 ‘나 예수 안 믿을래!’

‘나 교회 안 갈래’ 그러잖아요.

웃기지요.

우리가 그렇게 웃기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시건방지게 말이에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이야기에요.

그러니 술람미와 같은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술람미처럼 그러고 있잖아요.

우린 우리 주제를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죄인 주제에 예수님을 믿네! 안 믿네! 하면서 꼴값을 떤 다구요.

 

꼭 철없는 자식 놈이 부모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과 같이 하고 있어요.

그냥 집에서 내어 쫓으면 거렁뱅이로 살아갈 놈이 꼴에 덤빈단 말입니다.

부모에게 잘했니 못했니 따진단 말입니다.

이 건방진 놈이 말이에요.

꼴 같지 않게!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돌려준단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어미 잡아먹은 살모사(殺母蛇) 새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행동은 마치 우리들의 신앙을 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술람미를 통해서 우리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한번 봐라!’

‘저기 저 술람미가 하는 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술람미를 보고 욕을 합니다.

아니 저런 미친 여자가 있나!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욕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술람미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술람미를 통해서 ‘이 놈아! 술람미가 바로 너란 말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천지분간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술람미처럼 미친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 신앙은 조석(朝夕)으로 변해요.

아침에는 천국인데 저녁에는 지옥이에요.

우린 신앙생활을 미친 여자 널뛰듯이 하고 있어요.

마치 사사시대처럼 타락과 매맞음과 회개와 구원을 반복하고 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주여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라고 하더니 오늘은 무슨 심사가 뒤 틀렸는지 시큰둥해하고 있어요.

아침에는 찬송이 흥얼거리더니만 저녁에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습이 그렇잖아요.

 

우리들의 신앙은 마치 갈릴리 바다 같이 변화무쌍해요.

갈릴리 바다는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풍랑이 일어나 배를 집어삼킬듯합니다.

 

지금 술람미가 그런 짝입니다.

언제부터 신랑이 귀찮아진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신랑이 싫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신랑을 내어 쫓지요.

 

여기서 잠깐 성경의 구조로서 아가서의 흐름을 이해하고 갑시다.

 

아가서의 전체 흐름을 보면 한 사건 한 사건 중심의 “옴니버스” 식으로 되어 있어요.

옴니버스 식이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각각의 테마로 전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가서 전체 내용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사랑을 전개하는 방식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계시록이나 아가서는 순서적으로 기록이 된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기록이 되었어요.

그러니 연결해서 보면 이해가 안 되어요.

 

오늘 본문처럼 극의 흐름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갖는 구조에요.

아가서는 요한계시록과 같이 사건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아가서 해석이 안 되어요.

 

이건 마치 옴니버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같아요.

오래전에 독립기념관 영화관에 들어가서 옴니버스 영화를 관람한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해했어요.

그 땐 별 생각 없이 신기하게 보았는데 지금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영화관에 들어가면 온 사방 벽면과 천장 전체가 모두가 조각 조각난 화면으로 꽉 채워져 있어요.

각 화면마다 다른 영상이 나와요.

이건 마치 TV를 수십 대 매 달아 놓은 것과 같아요.

각 화면마다 다른 영상이 나오는데 정신이 없더라고요.

온 세상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었어요.

 

한 쪽 화면에선 씨를 뿌리면!

다른 한 쪽 화면에선 물을 주고!

또 다른 한 쪽 화면에선 추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일생을 각각의 화면에 담아서 방영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한 쪽에선 내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른 쪽 화면에서 내가 자라서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 시절을 보여주고!

또 다른 화면에선 내가 결혼을 해서 자식 낳고 사는 장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다른 화면에선 내가 늙어서 죽어가는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다른 화면에선 내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아요.

 

성경은 마치 옴니버스 극장에 누워서 천장에 달린 화면을 이리저리 보면서 각기 다른 그림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각 장마다 사도 요한이 본다는 말이 나오지요.

 

내가 보니!

내가 또 보니!

내가 또 보니! 라고 하지요.

볼 때 마다 장면이 다르지요.

이는 천사들이 사도요한에게 화면을 이쪽저쪽으로 옮겨서 보게 한 것입니다.

천상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 장면마다 다른 그림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한 쪽에선 대접이 쏟아지고!

다른 쪽에선 나팔이 불고!

또 다른 쪽에선 인이 떨어지고!

또 다른 쪽에선 바다와 땅에서 짐승이 올라오고!

또 한 쪽에선 기근과 지진과 온역으로 사람들이 죽어지고!

또 다른 쪽에선 시온 산에 어린 양과 성도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또 한 쪽에선 타락한 교회가 창기 노릇을 하고 있고!

또 한 쪽에선 하늘 예루살렘에서 24장로들이 어린 양을 창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의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들이에요.

 

예수를 찬양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는 놈들도 있어요.

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가요.

 

마치 TV 뉴스처럼 그 날에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한 장면 한 장면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것과 같아요.

 

어제 밤 뉴스에 보니,

한 쪽에선 홍수가 나서 물난리로 사람이 죽어가고!

다른 한 쪽에선 무더위로 사람이 죽어가고!

다른 한 쪽에선 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죽어가고!

또 다른 쪽에선 해수욕을 하다가 쓰나미로 죽어가고!

또 다른 쪽에선 탄광이 무너져 사람이 매몰되어 죽어가고!

또 다른 쪽에선 전쟁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다가 사람들이 죽어가고!

종교적으로 보면 한 쪽에선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고!

다른 쪽에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또 한 쪽에선 목사라는 놈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이를 찬양하고 미국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남한 괴뢰 도당인 이명박 정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 감옥에 가는 모습이 나와요.

이 모두가 오늘 하루 하나의 지구촌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이에요.

우린 TV를 통해서 오늘이라는 날에 지구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보고 있어요.

 

성경이 그래요.

이 세상 인간들이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간 시간 토막을 내서 앵글에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한 세대 한 인간들이 사는 한 동네 이야기인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잖아요.

이는 하나님 나라에는 시간 개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6천년 역사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란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타난 일들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늘 반복하여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잖아요.

 

전 1:2-11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하지요.

이는 인간은 땅에서 동일한 일을 하고 간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한 일을 지금 우리도 하고 있어요.

 

아담 한 사람 속에 온 인간이 들어가 있어요.

그렇다면 아담 한 사람이 살았던 삶은 곧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란 말입니다.

아담은 모든 인간의 샘플과 같아요.

아담 하나를 보면 모든 인간을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보면 오고 오는 세대를 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6천 년 전 아담 때 인간이나!

4천 년 전 아브라함 때 인간이나!

2천 년 전 예수님 초림 때 인간이나!

지금 이 시대 인간이나 똑 같아요.

모든 인간은 한 본성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행사 머리를 그대로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적용하면 술람미가 한 짓을 지금 우리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한 사랑을 예수님도 지금 우리에게 하고 계세요.

죄인이 하는 짓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해요.

그러니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 우리와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지금 하는 일들이 오래전 조상들이 이미 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보고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한 일을 반복해요.

모습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동일해요.

인간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아요.

한 사람을 보면 모두를 본 것과 같아요.

모두가 한 아담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똑 같은 짓을 하다가 죽어요.

이는 곧 모든 인간은 아담과 같은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 역사를 한 책에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지요.

 

아브라함이 살았던 때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때는 시간상으로는 약 2천년이 차이가 나요.

또 예수님의 초림 때와 지금 이 시대도 2천년의 갭이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시대나 동일해요.

이는 곧 인간 역사는 하루에 불과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펴면 한 쪽에선 창세전 언약이 나오고!

다른 쪽에선 타락이 나오고!

다른 쪽에선 구원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쪽에선 종말이 나오고!

다른 쪽에선 천국과 지옥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가서도 예언서와 같아요.

성경 전체가 예언서이니 아가서도 예언서인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이 시가서로 분류를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시작과 끝을 전부 담고 있기 때문에 예언서와 같아요.

그래서 아가서도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들처럼 사건이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면 짝 찾아 맞추기식 문자풀이 한다고 난리입니다.

 

아가서를 보면,

어떨 땐 사랑을 하고!

어떨 땐 헤어지고!

헤어졌다간 또 만나고!

또 헤어지고!

종국엔 사랑하게 되어요.

 

이건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여일(如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조석지변으로 갈대처럼 움직인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랑이 끝까지 실패하지 않고 지켜지는 것은 이 사랑을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도 우여곡절이 많지만 끝내 결실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을 솔로몬이 행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지키고 이루어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고 끌려가는 객체에요.

솔로몬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녀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외면하여도 끝내는 솔로몬이 술람미를 찾아와 사랑을 하고 말아요.

 

마치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예수님이 끝까지 찾아가서 용서하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결국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여도 천국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보고 안심하고 술람미를 보고 안심하고 사세요.

이런 인간을 끝까지 보듬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오늘 본문에서 술람미가 솔로몬을 문전박대하여서 헤어졌지만 종국에는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솔로몬이 술람미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솔로몬이 먼저 한 것이기 때문에 술람미의 행동에 의하여 취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구원에 확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랑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술람미처럼 신랑이 귀찮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끝끝내 찾아 와서 우리를 보쌈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가 없이 견고하고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이걸 히브리서에선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은혜가 되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신랑이 찾아 왔는데도 신부가 귀찮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아요.

그러자 신랑이 문빗장에 몰약을 발라 놓고 떠나갑니다.

신랑이 떠나가고 난 후에 신부는 후회하고 일어나서 신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서 매질을 당하고 옷을 빼앗기고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 신랑이 그리워 상사병이 난 내용입니다.

 

그럼 본문을 추적해 봅시다.

 

신랑이 밤이슬을 맞으면서 찾아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술람미가 잠을 자다가 일어나기 귀찮다고 문전박대를 합니다.

신랑이 밤이슬을 맞아 가면서 왔다는 것은 신랑의 마음속에는 항상 신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먼 길을 출타 하였다가 그 새벽에 돌아 왔지요.

 

신랑은 해가 저물면 그냥 객점에서 자고 아침에 와도 될 것을 사랑하는 신부가 너무도 보고 싶어서 밤이슬 맞아가면서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문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은 떠나버렸어요.

 

이건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디 감히 노예 주제에 왕을 문전박대합니까?

속된 말로 술람미가 간땡이가 부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주제도 모르고 일어나기 싫다고 새벽에 찾아온 왕을 가라고 배신하지요.

 

이건 우리의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린 늘 주님을 배반하고 살아요.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구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문 밖에서 문 열어 달라고 두드리고 있잖아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어요.

그러니 술람미는 곧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이 어떤가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부르다는 말입니다.

예수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배가 부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 배 밖에 몰라요.

그래서 바울은 배를 신(神)이라고 합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성경은 자기 배를 위하여 섬기는 신을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이를 이방인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것을 구하는 신이라고 합니다.

일명 애굽의 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배를 신으로 사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성경은 땅에 기운으로 사는 자를 짐승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지요.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곳이에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셨어요.

그리고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근본 된 토지란? 아담의 본질이고 근원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났어요.

흙에서 난 것을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땅에 기운으로 살아요.

그래서 인간은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땅을 애굽이라고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도 자꾸만 애굽의 것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애굽이 육의 고향이기 때문이에요.

육은 애굽에 것을 먹어야 행복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음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떡을 준다고 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먹을 양식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떡으로 살아가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요.

말씀은 성령으로 난 자들의 음식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애굽에 음식을 달라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게 해 달라는 것과 같아요.

우린 눈만 뜨면 세상에서 잘 살게 해 달라고 하잖아요.

 

마귀는 항상 땅에 것으로 유혹을 해요.

세상 것은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세상에 주는 쾌락은 포도주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요.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역사를 해요.

인간은 죄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무도 몸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항상 육신을 근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술람미도 육신이 편하니 신랑이 귀찮은 것입니다.

등따습고 배가 부르니까 신랑도 귀찮은 것입니다.

그러니 신랑이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쫓아 보낸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장을 보면 음녀가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는 곧 교회(성도)가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를 바벨론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은 ‘바벨탑’의 기원에서 나왔어요.

바벨탑은 인간들의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해 보자는 사상을 말해요.

인간의 힘을 모아서 성을 쌓아 하늘에까지 닿아서 다시는 하나님이 홍수 같은 것으로 심판을 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힘으로 피하자고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바벨론이란 말은 바벨에서 유래가 되었어요.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잡하다” “섞이다” 라는 뜻이에요.

즉 “혼합주의” 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말하는 바벨론은 온 세상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상과 하나 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해요.

그래서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물은 세상의 모든 사상을 말해요.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많은 물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이를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많은 물의 바탕에는 마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을 하나님께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게 해요.

세상의 부요함을 주어서 하나님을 잊게 만든단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만들어요.

 

지금 술람미가 그러고 있어요.

신랑의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배가 불렀어요.

 

술람미는 왕의 사랑을 받고 난 후 교만해졌어요.

왕이 가볍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왕을 우습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왕의 사랑을 경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밤이슬 맞아 가면서 왔는데도 달콤한 잠을 깨우기 싫다고 문도 안 열어주고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이런 경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술람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어요.

 

술람미가 문전박대를 하자 솔로몬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고선 몰약을 문빗장에다 발라 놓곤 가버립니다.

솔로몬이 발라 놓은 몰약은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과 같아요.

솔로몬이 몰약을 문빗장에 바른 것은 ‘나는 너를 위해서 피 흘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피를 흘렸다는 것은 자기를 비워서 낮추었다는 말입니다.

왕의 신분을 버리고 노예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넌 내 사랑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몰약을 문에 발라 놓고 간 것입니다.

 

이건 마치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을 하였음에도 못 믿으니 예수님이 손바닥과 옆구리를 보여준 것과 같아요.

‘봐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라고!’

‘내 손과 옆구리를 보고 믿으라’고 책망하는 것과 같아요.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도 못 믿겠다고 한 것이나 술람미가 솔로몬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여도 귀찮다고 안 열어 준 것이나 동일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못 박혀 피 흘리신 손바닥을 믿지 않는 도마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이 솔로몬도 자신의 흔적인 몰약을 술람미에게 남겨두고 떠난 것입니다.

 

몰약은 솔로몬의 피와 같아요.

솔로몬은 자신을 비워서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왕이 천하디 천한 노예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과 같아요.

왕은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사랑했어요.

 

그럼에도 술람미는 그런 사랑을 잠시 잊은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왕의 사랑이 어떤 것인 줄 잊고 있어요.

왕의 희생을 잊으니 이젠 왕이 귀찮은 것입니다.

밤에 찾아오는 것이 귀찮은 것입니다.

왜 날 귀찮게 하느냐 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의 모습들이 그래요.

우린 어느 샌가 예수님이 귀찮아졌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무덤덤해졌어요.

먹고 살만 하니 천국이야기도 식상 한 것입니다.

육신이 편하니 천국이야기도 그저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어서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하고 있어요.

산해진미 먹어 가면서 유희를 즐기고 있어요.

세상 연락에 취하여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천국 이야기를 해도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린 이미 배부르고!

우린 이미 왕 노릇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처럼 푯대를 행하여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고난에 동참하려고 앞으로 달려가는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님이 반갑지 않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그저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없고 맨 날 같은 말만 하느냐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이젠 말씀을 먹지 않고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말을 하는가? 비평하기 바쁜 것입니다.

 

마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박한 만나를 이젠 그만 좀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광야 이스라엘처럼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데모를 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잘 살게 해 달라고 하고 있어요.

천국도 좋고 구원도 좋지만 이젠 세상에서 고생 좀 그만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그래요.

이제 교회 좀 부흥시켜 주면 안 되느냐고 투정하고 있다구요.

처음 복음을 알고 방성대곡하면서 울던 그 시절을 다 잊고 이젠 복음에 배가 불러서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술람미가 곧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솔로몬처럼 내 마음의 문빗장에다 피를 발라 놓고 가셨어요.

내 안에 새 언약을 새겨 주셨어요.

솔로몬이 왜 문빗장에다 피(희생)를 발라놓고 갔겠어요.

이는 술람미가 솔로몬의 낮아지심을 잊고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잊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술람미처럼 신랑의 사랑을 잊었어요.

그러니 우리들도 언제부터인가부터 예수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편한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라는 값을 주고 우리를 샀어요.

우릴 세상에서 연락하게 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어요.

 

우리더러 내 마음대로 살라고 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우리를 샀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려고 산 것이에요.

 

그런데 우린 어느 샌가 내 몸을 위해서 살고 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했어요.

복음을 핑계대고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챙기다 보니 이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헌신이 사라졌어요.

교회 다니는 것이 우습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행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행함을 쓰레기통에다 다 갖다 버렸어요.

행함이란 말이 아주 낯설고 생소해졌어요.

주의 은혜로 토해내는 행함을 무슨 염병처럼 생각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누가 교회에 봉사하고 형제를 섬기고 주일날 교회에 빠지지 않고 꼬박 꼬박 나와서 열심을 내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있어요.

아주 이상한 신앙으로 변해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이젠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성도를 위한 섬김이 없어요.

낮아짐과 자기 비움이 없어요.

교회 생활을 우습게 여기는데 무슨 섬김이 있고 희생이 있고 낮아짐이 있겠어요.

입으로만 예수를 믿었지 몸으로 믿지 않아요.

 

몸뚱아리를 편안한 침대에 누이고 예수님의 피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주절거리고 있다구요.

내 몸 하나 추수리게 하지 못하는 화석화된 십자가를 운운하고 있다구요.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열심을 내라고 하면 술람미처럼 왜 내가 편히 자는데 깨우느냐고 짜증을 내고 있어요.

 

옷 입기 귀찮고 발 씻기 귀찮다는 것입니다.

옷 입고 발 씻기 귀찮다는 것은 일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신부를 볼 것이라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찾아온 신랑에게 밥 차려주는 것이 귀찮다고 문도 안 열어주고 있어요.

 

우리가 그래요.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은 챙기고 그 피 뿌림의 현장 속으로는 안 들어가고 있어요.

입으로만 믿고 몸뚱이로는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없는 귀신의 믿음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이 지식이다 보니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위하여 제물이 되어 살아가는 산 제사로 드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겉돌고 있어요.

 

말은 바울이 와도 울고 갈 정도로 잘하는데 바울처럼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없어요.

아마도 지금 사도 바울이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면 성화주의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럽니다.

내가 가서 입으로 따박 따박하는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고전 4:19-21절.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너희들의 말을 알아보지 않고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그 능력이란? 너희들의 삶을 달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을 사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말해요.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삶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애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너희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고 너희의 삶을 알아보겠다고 한다구요.

 

예수님이 지금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하고 있어요.

너희가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을 사는지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은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와 용서를 삶으로 토해내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바울은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술람미가 꼭 그런 꼴이에요.

그러니 마음으로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면서도 몸은 그대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감격하고 감동했는데 이젠 다 잃어버렸어요.

처음 사랑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러니 새벽에 찾아온 신랑이 싫은 것입니다.

신부가 보고 싶어서 그 새벽에 찾아온 신랑의 사랑을 헌신짝 차버리듯이 문전박대하면서 차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이 자기 핏 자국을 남겨 놓고 떠나 간 것입니다.

 

난 밤 잠 안자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자기 보고 싶어서 왔는데!

난 너를 이렇게 사랑했는데!

난 내 목숨을 버려서 너를 사랑했는데!

그런데 넌 잠을 깨운다고 날 문전박대 했구나!

옷 입기 싫다고 나를 쫓아냈구나!

그러면서 떠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럽니다.

 

사 1:2-4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저 놈들이 다 나를 차버렸다고 합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은 아는데 내 백성은 모른다고 합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나를 버렸다고 하나님이 탄식을 하고 있어요.

 

지금 솔로몬이 그러고 떠났어요.

내가 저 노예같이 못난 놈을 사랑해 주었더니 이젠 귀찮다고 문도 안 열어주고 문전박대를 한다고 탄식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나요.

이사야의 탄식이 들리나요.

이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나야 해요.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그 사람이 귀찮아져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 잔소리로 들려요.

잔소리로 들리면 짜증이 나요.

신랑의 소리가 잔소리로 들리면 이건 타락한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증거에요.

 

바울의 경고를 들어 봅시다.

 

고후 11:2-4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사도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정결한 한 처녀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맺어주는 중매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염려하는 것은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 퍼져 있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그리 쉽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뭡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조합해낸 예수입니다.

인간들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 낸 예수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겠다고 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채워주겠다고 하는 예수에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와 고린도서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말했어요.

그런데 그 배경이 달라요.

 

갈라디아서에선 율법지킴을 의롭다고 한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즉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행함을 섞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행함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바울이 지금 읽었던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은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일락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해요.

 

다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서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하게 된 배경이 달라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다가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을 섞는 것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화주의에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행함으로 온전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함도 의로워지게 되어요.

이러면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여야 해요.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된다고 했어요.

여기에 그 어떤 것도 보태고 빼면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말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를 이용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면서 육신의 일락을 즐기며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기복주의 신앙을 말하고!

또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하는 성공주의 신앙을 말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면 교회가 부흥 된다는 부흥 신앙을 말해요.

 

이건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욕망이에요.

예수를 안 믿어도 이런 신앙관을 다 가지고 있어요.

불교에서도 이런 신앙을 말해요.

그런데 이런 사상이 고린도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교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목사를 참된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따른다는 거예요.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다가 보니 이젠 도리어 바울처럼 예수 믿고 고난당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 복음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발전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니 고난당한다고 거짓 종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연히 거짓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꼭 이 시대 교인들이 교회가 부흥이 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고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진짜와 가짜가 뒤 바뀌어져 있어요.

거짓 선지자들은 복음을 핑계 삼아 세상에서 연락을 즐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들을 용납하고 있어요.

이에 바울은 너희들도 그러고 싶으니 그들의 말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럼 난 뭐냐!

난 예수 때문에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참 사도됨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세상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선 거짓선지자들의 탐욕스러운 삶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바보라서 복음 때문에 숱한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아느냐!

이는 복음 속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난 복음으로 인하여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편의상 이 부분만 읽지만 11장 전체를 읽어보세요.

그러면 바울이 말한 고린도교회에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어떤 식의 삶에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봅시다.

 

고후 11:23-27절.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함을 참 사도의 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자기 영웅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에요.

 

거짓 종들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 연락을 즐기게 하고 눈을 세상에 고착시키기 때문에 자신이 복음으로 인하여 당한 고난들을 거짓 종들의 삶과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왜곡하여 전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왜곡하면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챙기는 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거짓 선지자들이 삶을 가지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도(道) 닦는 것이 아니에요.

머리로 도(道) 닦는 것은 깨우치면 되어요.

그러나 복음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분들이 제가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어서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안 다닌다고 합니다.

 

‘난 복음 아는데,’

‘너희는 모르지’

‘그러니 난 교회 안 가’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합니다.

본인이 복음을 진정으로 안다고 하면 어느 교회다 따지지 말고 복음을 아는 자로서 섬기면 된다고 합니다.

 

복음 안 전한다는 핑계로 교회 가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면 그 복음을 위해서라도 교회에 가라고 합니다.

빛은 어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 교회 안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만 있다고 한다면 복음을 아는 당신이 가서 복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삶으로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알면 어느 교회이냐는 중요치 않아요.

그 교회가 혹은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복음으로 사느냐에요.

내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어디에서든지 그 복음으로 살면 되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그 복음으로 살아내지를 못한다면 그건 지식이에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앎은 지식이에요.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지만 사는 것은 몸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움직이고 풀어내니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성도를 빛이라고 하는 것은 어둠에 가서 우쭐거리면서 남을 깔보고 뻐기라는 말이 아니에요.

빛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빛이다!

빛에 속한 사람은 이런 가치관으로 이렇게 산다 라고 살면 되어요.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빛을 어둠에 보낼 때는 어둠을 고발하기 위함이니까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빛으로 오셨어요.

유대인들은 이 세상 영광을 꿈꿨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영웅되게 하는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세상엔 관심이 없었어요.

이게 빛으로서의 삶이에요.

 

복음을 알면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면 되어요.

교회가 비(非) 복음으로 나가면 난 참 복음으로 응수하면 되어요.

그럼 충돌이 생기겠지요.

이건 필연적인 것입니다.

 

충돌이 생기면 어둠이 너 왜 그러는데 하면 응! 이게 빛이야! 라고 하면 되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빛으로서 어둠에게 대접을 받고자 해요.

쬐끔 아는 것으로 아는 것으로 어둠에게 대장 노릇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난 복음을 아니 앞으로 잘 모셔 그러면서 알아주기를 바래요.

그러니 복음을 아니까 다닐 교회가 없다는 식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속지 마세요.

아는 것은 지식이에요.

지식은 습득으로 알아요.

이건 얼마든지 배워서 알 수가 있어요.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듯이 복음도 자꾸만 들으면 학습효과가 있어서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식으로 아는 것은 능력으로 나타내지 못해요.

이걸 야고보서는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지식으로 아는 복음은 그 복음대로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 반(反)하는 것들로 담겨져 있기 때문에 복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해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 내가 가면 너희들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을 알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음대로 사는 삶이에요.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머리로 십자가 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알면 말쟁이가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보세요.

속지 말라고 하지요.

왜 속지 말라고 합니까?

교회 안에 거짓 종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쟁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들의 특징이 뭐라고 했나요?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하지요.

이는 이방인들처럼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는 말입니다.

악한 동무들은 복음을 핑계로 자기 일신상의 유익을 도모하고 살아요.

 

이들을 일컬어 광명의 천사라고 합니다.

겉으론 엄청나게 믿음이 좋은 척 하는데 그 속엔 죽은 말씀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듣고 배운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예 노골적으로 복음대로 살지 않는 놈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아그노시아” 라는 말인데,

이는 “신적 지식” 즉 “성령의 감동”이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의미에서 “아그노시아” 즉 하나님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안에 하나님도 없는 놈들이 사기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죽은 믿음 즉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자들이 많아요.

어느 시대나 가짜는 항상 존재했으니까요.

복음을 지식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 합리화를 시켜요.

 

그래 난 죄인이다!

죄인이 죄 짓는 것 당연하지!

내 마음대로 내 꼴리는 데로 산다! 왜?

니가 뭔데 나에게 잔소리 하느냐! 라고 그런다고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말은 엄청 잘해요.

말로는 못 당해요.

예수님도 울고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으로 인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삶이 없어요.

자기 부인이 없어요.

그러니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것을 신앙 있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교회도 안가고!

교회에 안 가니 섬기고 봉사 할 일이 없지요.

 

어떤 사람은 누가 교회에 봉사 하면 그딴 거 뭘 하려고 하느냐고 딴지를 걸어요.

그것도 자기 의(義) 쌓는 거라고 하면서 빈정거려서 멀쩡히 잘하는 사람도 시험 들게 만들어요.

이건 일하는 소의 발목에 힘줄을 끊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상하게 안하는 것이 믿음 있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이건 복음을 가리는 짓이에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훼방을 받아요.

 

복음을 오해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행함은 아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행함엔 의가 없다고 하니 숫제 안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에는 의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서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지 행하지 말란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에도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반 복음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능력이에요.

움직이고 일을 하게 하는 힘이란 말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요.

그 은혜가 임하니 방주를 짓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산 증인들을 보세요.

모두가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도록 역사를 하잖아요.

 

믿음이나 은혜나 동일한 말이에요.

모두가 살아 운동하는 하나님의 힘이에요.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그 은혜가 이끄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세상 가치관과 반하는 모습으로 이끄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남들 다 놀고 있는데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는 것은 조롱당하고 아픔을 겪었다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방주 짓는다고 박수쳐주지 않았어요.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보짓을 하고 산 것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바보처럼 복음 전하다가 매 맞고 굶고 욕먹으면서 산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거짓 종들은 편안하게 자기 꼴리는 대로 살았어요.

그러므로 바울은 악한 동무들에게 속아서 선한 행실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이 뭡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이에요.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선한행실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는 말이에요.

 

고린도 교회 안에 워낙 복음 안다는 것을 빙자하여서 개판으로 사는 인간들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이런 자들은 다른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고 했겠어요.

어느 때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엔 항상 복음을 훼방하려고 복음을 자기 육신이 편한 것으로 이용하는 거짓 신자들도 들끓었어요.

 

어느 시대이고 거짓 신자들의 특징이 복음을 빙자하여 육신의 안락을 추구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만약에 복음을 빙자하여서 육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악한 자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고린도교회 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봅시다.

 

살후 3:6-15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을 합니다.

규모 없이 행하고 유전대로 행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만 만드는 자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저희들과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규모 없이 행하고 일을 만든다는 것이 뭔가요?

일은 안하고 말만 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이에요.

교회 안에서 입으로만 말하고 행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이건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육신이 죄 아래 팔려서 하나님 뜻에 반하는 자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이에요.

말씀에 순종이 안 되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8: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임을 알고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했어요.

그러자 성령께서 네가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네 연약함을 처리 하셨는가 하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으로 보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말씀 앞에서 네 연약함을 알고 이 연약함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순종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에요.

그리하여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서 구원이 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셨구나! 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붙잡으라고 합니다.

새 언약을 믿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음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빛은 내가 어둠일 때 드러나요.

내가 죄인임을 깊이 아는 것만큼 예수님의 피는 귀한 복음으로 남게 되어요.

이 사실이 깨달아져야 자기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主)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우리를 말씀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리는 일을 하세요.

 

성경이 수없이 하라! 하지 말라! 는 명령문으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넌 안 되니 예수님의 대속을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심으로 우리의 주(主)가 되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게 새 언약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적 해석은 모든 말씀의 끝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말씀을 지켜서 성화하는 것이 아니고 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어요.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아요.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지켜서 자기 치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육신에 본성과 반(反)하는 것들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가 우리 육신의 본성과 반대 되는 것들이에요.

 

원수를 사랑하고!

주리면 먹이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 본성과 반하는 일이에요.

 

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목숨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건 불가능해요.

우린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몸뚱아리를 챙기고자 하지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지 않아요.

 

그리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 보라고 합니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지 남의 몸을 내 몸처럼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배고프면 내 입에 먼저 들어가지 남의 입에 넣어주지 않아요.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내서 내 입에 채우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럼에도 성경을 그렇게 살라고 해요.

왜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하라고 합니까?

이는 모두가 우리 인간에겐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넌 죄인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나 지옥 갈게요!

두 손 들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대속하심으로 얻은 구원이 은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늘 우리 안에 죄를 고발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린 아주 쓰레기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아주 발가벗긴바 되어야 해요.

그래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고 자랑 되어져야 해요.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내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걸 역(逆)으로 이용해서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해요.

한다는 것이 고작해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일만 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은 이런 사람은 아예 이름을 불러서 지목해서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부끄럽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발 우리 서로 나대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굴 판단하지 말자고 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으니 하나님이 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구경하면서 기다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기다림이 없어요.

전부 완장을 차고 남의 믿음을 검열하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은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도 제가 한 설교에 책망을 받아요.

내 죄악을 까발림 당한 단 말입니다.

설교 하면서도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줄 아세요.

쥐 구명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설교 때려치우고 목사도 그만두고 싶다구요.

 

그러면 누가 좋아 하겠어요.

마귀만 좋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얼굴에 철판 깔고 또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래 난 뻔뻔스러운 놈이다!

이런 뻔뻔스러운 놈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고 이렇게 외치고 있어요.

 

누굴 정죄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린 모두가 이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모두 말씀으로 책망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악당을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감사하고 자랑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도들도 자기가 말한 대로 살아내지를 못했어요.

바울도,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그 누구도 말씀대로 살아내지를 못했어요.

그 어떤 인간도 말씀대로 살아 내지를 못해요.

모두가 자기가 한 그 말에 심판을 받아요.

그러므로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 육신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고난 속으로 밀어 넣어요.

세상에서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이 새벽에 찾아오지요.

그것도 한참 잠 잘 때 말이에요.

왜 그 시간에 찾아옵니까?

그건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이란? 항상 현재성을 띠고 있어요.

박상철이라는 가수가 무조건이라는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랫말을 보면 “당신이 부르면 달려 갈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태평양은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 갈거야!

무조건 달려 갈거야” 라고 하지요

사랑하는 애인이 부르면 언제, 어디, 어느 때라도 부르면 달려간대요.

이게 사랑이에요.

 

그럼 술람미가 솔로몬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다렸다면 새벽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이제 왔느냐고 안겨야지요.

그런데 새벽에 왔다고 쫓아내고 있어요.

이건 평상시에 안 기다렸다는 말이에요.

신랑을 사랑한다는 말도 다 거짓이란 말이에요.

 

솔로몬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다고 한다면 잠자는데 깨운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있느냔 말입니다.

네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래 잠자는 것을 깨웠다고 문도 안 열어주고 신랑을 내어 쫓을 수 있느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사랑이 어떤 것인데!

그래 네 몸뚱이 하나 편하자고 신앙생활을 그 따위로 하고 있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면 어떻게 십자가 복음 핑계를 대고 너 편한 대로 살 수가 있느냐!

어떻게 꼴리는 대로 산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행함을 끄집어내기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사랑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새벽에 곤히 잠자는 것을 깨우면 화가 나지요.

하루 일을 마치고 곤히 단잠을 자고 있는데 깨우면 짜증이 나겠지요.

 

아가서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결론을 내리지요.

이는 사랑을 잠자는 것보다 강하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서 먼 길 다녀온 신랑에게 새벽에 밥 하나 못해주느냐 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술람미가 일어나기 싫어하는 두 모습을 보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뭔가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안 일어난 것임을 엿볼 수가 있어요.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내가 “어찌” 옷을 다시 입겠으며!

내가 “어찌” 발을 다시 더럽힐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어찌” 란 말은 “어떻게” 란 말입니다.

 

“어찌” 란 말 속엔 “내가 왜 해야 한단 말입니까?” 라는 부정적인 뜻이 담겨져 있어요.

“난 당신의 종이 아닙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일어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당시엔 신랑이 먼 길을 다녀오면 아내는 따뜻한 밥을 해서 상을 차려서 먹게 하였어요.

그게 아내의 도리였어요.

그럼 술람미도 신랑이 왔으니 얼른 옷을 입고 일어나 나가서 밥을 해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술람미는 귀찮은 것입니다.

 

밥을 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고,

밖으로 나가면 발이 더러워지고,

발이 더러워지면 다시 씻어야 하는데 귀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 옷을 입고!

내가 어찌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가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신앙의 자세를 무익한 종의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먼 길을 출타를 하였다가 새벽에 돌아 왔어요.

그러면 종은 주인이 돌아오면 얼른 밥상을 차려들고 주인을 공궤하여야 합니다.

이게 종의 본분이라고 했어요.

주인은 이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 종을 돈 주고 사 왔어요.

 

그러니 주인이 새벽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일한다고 피곤해서 자는 종이 일어나 밥상을 차려 왔다고 해서 그 종에게 미안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종도 그 새벽에 주인의 밥상을 차려 주었다고 해서 생색을 낼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종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이 뭐라고 하여도 예! 전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술람미의 행동은 종이 아니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 아니라 주인을 쫓아 내 버렸으니 주객이 전도가 되고 만 형국인 것입니다.

이건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에요.

 

술람미는 우리의 표상이에요.

그럼 우리도 이런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맞아요.

우리도 그러고 있어요.

게으름을 피워요.

 

요한계시록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다시 회복하라고 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랑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예전 갖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를 부패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부패한 자라고 합니다.

부패한다는 것은 변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변해요.

자기 유익에 따라서 수시로 변합니다.

우린 모두가 자기 유익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부패하고 변해요.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도 변해요.

죄인의 사랑이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변해요.

우리의 믿음도 변해요.

우리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도 변해요.

 

신앙도, 믿음도, 사랑도 우리들 것이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 것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야 변하지 않아요.

 

인간들에겐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어요.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인간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것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내용도 바로 우리의 사랑은 변해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잠이 깨고 나서 신랑이 남기고 간 몰약(피)을 보고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신랑이 남기고 간 그 핏 자국을 만져 보면서 기겁을 합니다.

화들짝 놀라서 문을 열고 신랑을 찾으나 이미 신랑은 떠나고 없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어요.

 

내가 미쳤지!

내가 정신이 나갔지!

내가 죽일 년이야!

세상에 내가 신랑을 내어 쫓다니!

 

신랑을 잃어버리면 강도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뒤늦은 후회이지만 이제 신랑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신랑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랑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신랑이여!’

‘나에게 피를 뿌리고 간 신랑이여!’

‘피 남편이여 어디 있나요!’

 

그러자 순찰하던 파수꾼들이 신랑 잃어버린 여자라고 생각하고 매질하고 옷을 벗겨 가져갑니다.

여자의 웃옷을 벗겼다는 것은 강도를 만났다는 말이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보면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거반 죽을 정도로 매질을 하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유린당하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신랑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 세상에선 신랑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강도들에게 사정없이 유린당해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넘어간단 말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비웃습니다.

자신들의 꼬라지를 보고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시큰둥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떠난 뒤에 사라의 몸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미 이삭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릅니다.

그러다가 먹고 살려고 가데스 땅 그랄로 이사를 갑니다.

 

그런데 그 동네 그랄 왕인 아비멜렉이 사라의 외모를 보고 탐을 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고자 이번에도 전에 애굽 왕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팔아먹었듯이 또 자기 누이라고 속이고 또 팔아먹습니다.

이 웬수가!

자기 마누라 뱃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씨가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이런 쳐 죽일 놈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라의 뱃속에 약속의 자녀가 있기 때문에 사라를 지켜줍니다.

아비멜렉에게 그 여자에게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여잔 내 여자라고 합니다.

그 여자 뱃속에 내 아이가 있으니 손대지 말라고 했어요.

사라의 뱃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 지켜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비록 술람미처럼 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지켜 주세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약속의 증표로 몰약을 주고 갔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피를 주고 가셨어요.

 

성령께서 우리의 눈길을 십자가로 향하게 하세요.

성령이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세요.

새 언약 안으로 밀어 넣으세요.

 

술람미는 신랑이 건네주고 간 몰약을 보고선 신랑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되었어요.

몰약이 신랑의 사랑을 찾아 나서게 만든 것입니다.

몰약이 회개케 한 것입니다.

 

급기야 술람미는 신랑을 향한 상사병(相思病)이 들고 맙니다.

상사병엔 다른 약이 없어요.

신랑 이외엔 약이 없어요.

신랑은 술람미에게 사랑병만 안기고 간 것입니다.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몰약을 주고 간 것입니다.

‘너 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두고 보자’면서 흔적만 남기고 떠난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못살아요.

그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어요.

그래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랑을 찾아서 헤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 본 성도는 십자가 이외에 다른 것은 눈에 차지 않아요.

만족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고픕니까?

사랑이 고파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에요.

 

솔로몬은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갔어요.

이는 술람미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 간 것입니다.

 

술람미는 신랑이 남기고 간 몰약을 통해서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상사병이 난 것입니다.

상사병은 신랑을 찾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술람미가 난 상사병은 축복인 것입니다.

 

술람미는 신랑이 준 사랑의 맛을 알기에 그 신랑의 사랑을 고파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술람미처럼 사랑을 고파하는 상사병이 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술람미처럼 신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그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피 흘린 사랑을 깨닫게 되면 지금의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고 지금의 아픔이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괜한 것으로 고민하고 슬퍼했구나!

내가 또 선악과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 십자가 아래로 가십시오.

솔로몬이 문빗장에 발라준 그 몰약을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를 보세요.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 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술람미가 박대 하여도 그냥 떠나지 않고 흔적을 남기고 떠나신 그 사랑을 아시나이까!

이는 ‘넌~ 날! 박대해도 난~ 널! 박대 할 수 없다’는 솔로몬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 왔다 갔다’고 흔적을 남기고 숨어 버리신 것입니다.

‘난 널 많이 사랑한다’는 흔적입니다.

술람미가 문 열고 나오길 바라면서 말이에요.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찾으면 내가 여기 있다고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봐라! 내 손에 못자국과 내 옆구리에 창 자국을!’

‘난 널 이처럼 사랑했단다!’

‘난 널 포기 할 수 없다’고 흔적을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그 흔적을 보고 주님의 사랑을 다시 찾으라고!

 

주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눈을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심령마다 주님의 사랑이 불 일듯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애타고 고파하는 상사병이 들게 하옵소서!

 

부디 주님의 사랑을 고파하는 상사병이 드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천하디 천한 종을 사랑해 주셨는데 우린 자기 주제도 모른 체 배부르게 살았습니다. 우리 안에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을 향한 상사병이 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앉으나 서나 신랑의 사랑을 고파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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