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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성경강해)57강. 생명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계 22:1-5)

by coroa 2021. 10. 31.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57강. 생명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계 22:1-5)

-.정낙원 목사

 

계 22:1-5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넘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열 두 가지 과실을 달마다 맺힙니다.

그리고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삶이 고달플수록 천국을 더욱 더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일컬어 안식의 세계라고 하지요.

이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수고한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가장 기쁜 소식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표현을 천국에 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천국이 우리에게 침노해 오는 것입니다.

창조 자체가 묵시가 역사를 침노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의인화와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침노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침노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침노를 당한 자들은 천국이 임하였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안식은 엿새 동안 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엿새 동안 종노릇하던 자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는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실제 안식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몰고 오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이라는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은 천국의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지요.

출근을 하였기 때문에 퇴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노는 사람에게는 퇴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출근을 했다가 퇴근을 하여야 쉼을 누립니다.

출근하지 않은 사람은 쉼도 없습니다.

백수는 퇴근이 없으니까 쉼도 없는 것입니다.

백수가 집에 있는 것이 바늘방석입니다.

백수의 소원은 출근 좀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천사보다 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성도는 이 세상에 출근을 하였다가 퇴근을 하여서 천국에서 쉼을 누릴 수가 있지만 천사는 출근을 하지 않아서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은 영원토록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천사들을 부리는 종으로 두고 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사보다 훨씬 복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이라는 회사로 출근케 하신 것이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이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을 일이라고 할까요?

이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천국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으면 고난을 당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빼앗기고, 넘어지고, 욕을 먹고, 눈물을 흘리고,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을 고난으로 두었을까요?

이는 예수 믿는 것을 엿새 동안 일하는 것으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일을 해야 안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가 힘들지요.

힘들어야 정상이에요.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살면 안 되어요.

지옥으로 살아야 해요.

 

이 땅에서 예수를 이용해서 천국으로 사는 자들은 나중에 지옥으로 들어가고,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은 나중에 천국으로 갑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의 적그리스도 세력인 음녀가 이 땅에서 왕 노릇하면서 천국으로 살았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재림 하여서 이놈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무저갱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라고 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살라고 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예수를 이용해서 쉼을 누리라고 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고생 좀 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회사에 출근을 해서 하나님의 일인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쫓아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이 바로 영생을 위한 양식을 쌓는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의 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 때입니다.

역사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퇴근 시간도 가까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국이라는 우리 집으로 퇴근을 하여야 합니다.

 

만물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만물이 우리에게 너희들 퇴근 시간이 가까이 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퇴근 시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가 퇴근해서 돌아갈 집이 구약의 역사 속에서 에덴동산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담이 어디에 살았나요?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어디로 출근을 하였나요?

이 세상입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시작을 에덴동산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우문(愚問)을 할 터이니,

똑똑한 여러분들이 현답(賢答)을 해 보세요.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 때에 행복했을까요?

 

1번, 행복했을 것이다,

2번, 아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답은 2번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담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불행의 반대입니다.

불행을 알아야 행복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는 불행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담은 행복한 곳에 살면서도 행복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사망이 없는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고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고 죽임 당하는 것들이 천국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불행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런데 갓 지어진 아담은 불행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행복한 것을 발로 차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가 받는 고난을 복이라고 합니다.

 

왜 고난이 복인가요?

고난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안식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중함을 알려 주려고 지옥에 던져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옥을 통해서 천국의 소중함을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죽음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막지 않은 것은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과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통해서 구원을 알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조장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아담 스스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비로소 죄의 정체가 세상에 노출이 된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바탕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엄청난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이 엄청난 저주라는 걸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야 비로소 에덴동산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욕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여기에 신앙이 동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살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합니다.

이는 영생하시는 산 자의 하나님은 죽은 자와 함께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추방하면서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범죄한 아담에게 저주 하십니다.

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소망은 오직 하나 죄의 권세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입니다.

죽음에서 건져줄 메시야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구원은 여자의 후손의 손에 이끌려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어떤 곳인가요?

눈물이나 고통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슬픔이 없고 사망이 없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영생하는 곳입니다.

구원은 수고와 슬픔을 그치고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환경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의 나라이지만 천국은 의와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과 다른 눈물이 없고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죽음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하늘과 땅을 의역하면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마치 생명과 사망과 같습니다.

빛과 어둠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둠을 창조하였고,

천국을 설명하고자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이 죄 아래 있던 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전 언약의 결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맨 마지막 장입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따지면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시작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죄사함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천국에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종말과 시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가서 가나안으로 빼내십니다.

이러면 갈대아 우르에서의 삶은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의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일찍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시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성막을 짓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시작합니다.

출애굽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 모습을 엿새 동안 일하다가 일곱째 날에 성전에 모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형제들 간에 축제하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엿새 동안 일하는 기간이 있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죄와 싸우는 삶을 말하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성막’과 ‘회막’이라는 의미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40장을 봅시다.

 

출 40:1-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3 또 증거궤를 들여 놓고 또 장으로 그 궤를 가리우고 4 또 상을 들여 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들여 놓고 불을 켜고 5 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장을 달고 6 또 번제단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 7 또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놓고 그 속에 물을 담고 8 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장을 달고 9 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10 너는 또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그 안을 거룩하게 하라 그 단이 지극히 거룩하리라 11 너는 또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12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13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14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15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16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가지고 온 예물들을 가지고 성막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자들에게 성신으로 감동케 하시고 하늘에 지혜를 주어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막은 성신의 감동으로 지어진 것이 됩니다.

성신이 성막을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성령이 성도 안에 성전을 지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성신이 성막을 지은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 속에 성전을 지을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봅시다.

 

13절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컬어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이고 하나님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백성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신이 성막을 짓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지으십니다.

이것을 알려 주려고 성신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서 성막에 필요한 예물들을 바치게 하고 성신이 주신 지혜로 성막의 각종 기구들을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바친 예물로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성막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성막 속에 하나님이 거하게 되는데 이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거하는 집인 처소가 되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거룩한 장소인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고 어떻게 하나님과 동거하게 되었는지를 성막을 통해서 알려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뜰과 성소라는 두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뜰에서는 죄사함이 일어나고,

성소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어납니다.

 

본문을 보시면 모세가 ‘정월 초 하루’에 성막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합니다.

백성들이 성막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 하는 날이 정확하게 출애굽 한 지 1년만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후 1년이 지난 ‘정월 초 하루’ 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출애굽한 자들이 가나안으로 진군하지 않고 광야에서 1년 동안 성신의 감동으로 성막을 지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은 성막의 인도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가나안은 천국을 예표하고 성막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천국은 예수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한 백성들을 진군시키지 않고 성막을 짓게 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자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성전으로 지어져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는 것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나 영적인 의미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 것은 천국은 너희들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성막을 상징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인도함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천국으로 인도 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아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하자 말자 성막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1년 동안 성막을 다 지어서 하나님에게 가지고 오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러 성막의 모든 기구들에게 기름을 발라서 거룩케 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성막에서 수종을 들게 되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도 기름을 부어서 거룩케 하여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삼으십니다.

 

이러면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의 공간이 됩니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발생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릅 부음을 입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거룩케 하는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거룩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백성들을 성막을 통해서 거룩함을 입게 됩니다.

백성들은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흠 없는 짐승의 제사를 통해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입게 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게신 것입니다.

흠 없는 짐승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그것이 제사장들이 뜰에서 흠 없는 짐승으로 속죄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러면 성막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뜰에서 흠 없는 짐승의 희생 제사로 죄사함을 입는 것입니다.

둘째는 뜰에서 죄사함 받은 자들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을 ‘성막’이라고도 하고 ‘회막’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2절 “너는 정월 초 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정월 초 일일에 성막과 곧 회막을 짓지요.

왜 성막이라고도 하고 회막이라고도 할까요?

이것은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이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이라는 이름은 짐승의 제사를 지내는 뜻을 담고 있고,

회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만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만날 때는 회막이라고 하고 백성들이 죄를 사함 받는 일을 할 때에는 성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짐승의 제사로 죄인이 죄사함 받는 영역이고,

회막은 짐승의 제사로 죄사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영역입니다.

이것이 성막에서는 뜰과 성소로 나타납니다.

뜰은 성막이고,

성소는 회막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은 뜰과 성소로 되어 있습니다.

 

뜰에서는 짐승의 제사가 이루어지고,

성소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막이라고도 하고 회막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정월 초 하루에 짓지요.

정월 초 하루는 유월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 년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난 날을 새해 첫 날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 12:1-2절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온 날입니다.

애굽은 죄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출애굽은 죄에서 건져진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죄사함 받은 날입니다.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았나요?

어린 양의 피로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 년 전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건 마치 성막의 뜰에서 흠 없는 짐승의 제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2절을 보면 이 달로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시지요.

즉 새해 첫 날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이는 새로운 시작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시작의 날은 초 하루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해방이 된 날은 죽음의 나라에서는 마지막 말이 되고 죽음에서 해방이 된 것으로서는 첫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은 초 하루와 같은 것입니다.

유월절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생명의 나라에서 첫 날이 되는 것이므로 초 하루가 되는 셈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유월절이 새해 첫 달이면서 새해 첫 날 초 하루와 같은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자들이 일 년 동안 광야에서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 정월 초 하루에 성막을 하나님께 봉헌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서 거룩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기름으로 거룩케 한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케 한 것과 같습니다.

기름 부음으로 거룩케 된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케 한 것은 그들과 동거키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정월 초 하루에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을 입는 날인 것입니다.

 

일 년 전 첫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에는 죄사함을 받았고,

일 년 후 두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에는 거룩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에는 성막의 뜰에서 드려지는 죄사함을 받는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면,

두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에는 좌사함을 받은 자들이 거룩함을 입고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화목하는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구속사로 말하면,

첫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주신 것이고,

두 번째 유월절 정월 초 하루는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셔서 친히 성전이 되어서 성도들을 거룩한 자로 거듭나게 하여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월 초 하루란? 새로운 시작의 날을 말합니다.

 

구약 교회의 시작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출애굽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그리하여 성막을 짓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광야 40년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실제적으로 구원의 완성은 성막을 짓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 온 것은 심령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영적인 의미에서는 성령 강림으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신약의 2000년 역사는 광야 40년의 역사와 같습니다.

 

이처럼 ‘정월 초 하루’에는 두 가지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지는 것도 정월 초 하루이고,

성령으로 거듭 나는 것도 정월 초 하루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 정월 초 하루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이야기 하면,

첫 번째 정월 초 하루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두 번째 정월 초 하루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을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일도 하셨고 회막에서 행하여지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체가 성막이기도 하고 회막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은 성막의 일이고,

예수님의 성령의 사역은 회막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회막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회막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일컬어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성도 가운데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두 정월 초 하루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은 구원을 지켜야 하고,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신 초 하루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 할 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탈출을 알리는 정월 초 하루를 말하고,

성막을 지어서 이제부터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말해주고자 정월 초 하루에 성막을 하나님께 봉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구원이 있습니다.

 

죄에서 건져지는 구원이 있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두 가지라는 말이 아니고 구원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봅시다.

 

창 3: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생명과 길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이는 죽은 자들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할까봐서 라고 합니다.

이는 선악의 사람으로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막아 버린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막았을까요?

이는 선악의 사람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게 되면 큰 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의 사람을 에덴동산으로 추방하고 천사들을 시켜서 죄인이 생명나무로 나아오지 못하도록 그 길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으려면 먼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죽어야 합니다.

선악을 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선악과를 먹기 전의 처음 창조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이 죽는 것은 아담 속에 담긴 선악의 독을 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육체로 보내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먼저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죽여 놓은 자들에게 성령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줄 터인데 그가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하는 것도 성령은 아들의 생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도 구원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거룩함을 입는 것도 구원입니다.

죄사함의 구원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죽이는 것이고,

거룩함을 입는 구원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 받은 구원과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구원을 7대 절기에 담아 놓았습니다.

 

7대 절기 속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나누면 초림의 사역이 있고 재림의 사역이 있습니다.

초림의 사역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재림의 사역은 죄사함 받은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기도 큰 틀에서 봄 절기와 가을 절기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봄 절기는 초림으로 죄사함을 주는 절기이고,

가을 절기는 재림으로 천국으로 데려가는 절기입니다.

 

봄 절기는 과거적 사역이고,

가을 절기는 미래적 사역입니다.

가을 절기는 축제의 절기입니다.

 

나팔절이 되면 제사장이 성전 꼭대기에 서서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광주리에 담아서 제사장에게로 가지고 옵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팔절에 재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팔절에 일어나는 모습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장차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재림하십니다.

이 때 온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공중으로 이끌림을 당하게 됩니다.

 

공중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공중으로 이끌림 받은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를 천년 왕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은 장차 천년 왕국에서 행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초막절은 축제의 절기입니다.

초막절의 축제가 천년 왕국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축제입니다.

온 동네가 기쁨으로 충만한 날입니다.

이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축제는 누가 즐길 수 있느냐?

엿새 동안 수고한 자들입니다.

엿새란? 역사 속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엿새에 속하였습니다.

 

엿새가 차면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안식의 세계에 계시던 예수님이 엿새에 속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서 일곱째 날인 안식의 세계로 데려 가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누가 가느냐?

엿새 동안 이 땅에서 수고한 자들입니다.

어떤 수고이냐?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20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세상은 예수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 세상이 예수를 미워할까요?

이는 예수님이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이고 이 세상은 어둠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니까 어둠이 자기 악함을 인하여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에게 속하였습니다.

빛의 아들들입니다.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은 의가 다릅니다.

빛의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살고 어둠의 아들은 율법의 의로 살아갑니다.

율법의 의로 살아가는 곳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율법의 의는 서로 충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언약적으로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도를 누가 핍박하느냐?

예수를 핍박한 자들이 합니다.

예수를 누가 핍박 했나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주의자와 적그리스도 세력은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율법의 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과 적그리스도 세력들은 인간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이고 인간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서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영생하시는 분에 의해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신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을 육신을 입혀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반발을 합니다.

자기들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는 의가 되지 않는 가짜라는 것이 폭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과 적그리스도 세력들은 가짜 의로 진짜 행세를 한 것입니다.

 

짝퉁을 가지고 진품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가짜인 자기들의 의를 진짜로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이걸 일컬어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천국에 누가 가느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자들이 갑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목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지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버려짐과 되찾음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택함을 입으면 율법의 의를 가진 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합니다.

예수님에게는 택함을 입었지만 율법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과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에 대하여 죽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마귀에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하고 우리 육체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운다고 합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적그리스도 세력이 누구였나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왜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이 자랑하는 의를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율법 지킴을 훈장처럼 자랑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와서 그건 의가 아니라고 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로부터 부정당하면 살 수가 없어요.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

이건 본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인간을 부정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적개심이 들어요.

예수님의 의가 너는 틀렸다고 기분 나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와 적그리스도 세력과 이 세상은 하나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는 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초림 때에는 모든 교파가 하나가 되고 유대교라는 종교와 로마라는 정치가 하나가 되어서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종말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 의를 증거하는 두 증인들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로마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게 열심 당원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룟 유다가 열심 당원입니다.

가룟 유다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인본주의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로마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을 틀렸다고 고발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들 편을 안 들어주고 도리어 너희는 죄인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너희나 세리와 창기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들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 점잖은 종교 지도자들이 뚜껑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점잖은 처지에 대 놓고 화를 내지 못하니까 무식한 군중들을 동원해서 예수를 죽이게 한 것입니다.

종교적 포플리즘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는 누가 죽이는지 아세요.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죽여요.

그래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고,

에서가 야곱을 핍박했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어요.

교회 안에서도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핍박해요.

 

요한계시록은 전부 적그리스도 세력이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종말에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일망타진 하는 심판을 단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재림하시느냐?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은 교회 밖에 있지 않아요.

교회 안에 있어요.

 

요한계시록 2-3장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계 2: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 2:13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3:9절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교회 안에 “자칭 사도”가 있고, “자칭 유대인”들이 있고, “사단의 회”가 있다고 하잖아요.

자칭이란 겉 무늬만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짝퉁이란 뜻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사단의 회” 라고 하는 것은 큰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차 하나님께서 환란 당한 너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너희로 환란케 한 자들은 환란으로 갚아 주신다고 합니다.

이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공의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예수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아 주는 그 세계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년 왕국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이 안식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몰고 온 새 하늘과 새 땅은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없으니까 죄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니까 사망이나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음이 없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생명이 강물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름의 모습들을 생명수 강이 온 세상으로 흘러서 가는 곳마다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 2장을 봅시다.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성경의 구조를 잘 보세요.

성경은 강 이야기로 시작해서 강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 밖은 생명으로부터 단절이 된 죽음의 세상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음의 세상에서 난 자들은 일평생 사망의 종노릇 하면서 살다가 필경은 죽음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러자 자기 백성들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요 4:2-30절 “예수께서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한 동네로 찾아 갑니다.

거기에 자기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면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생명수를 마시지 못하고 목말라하는 아담과 같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야곱을 자기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우물의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의 우물물을 먹었지만 목마름을 해결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오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하면서 말을 겁니다.

그러자 여인은 어찌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과 상종하지 않는데 당신은 어떻게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네가 지금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럼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자가 물을 길을 그릇도 없을 뿐더러 이 우물은 너무 깊은데 어디 가서 생수를 찾겠느냐고 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도 생수를 주지 않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생수를 준다고 하느냐,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 자인가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은 먹어도 갈증만 유발 시키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야곱의 우물 물은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물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물이 아니고 배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야곱의 우물에는 생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우물 물은 갈증만 잠시 해결 할 뿐이지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물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율법과 같습니다.

율법으로는 영생에 대하여 갈급한만 유발 시키지 영생을 줄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율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의 우물에 예수님이 찾아 갔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간 것입니다.

왜 찾아 갔느냐?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로 목마름을 해갈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라하는 수가성 여인에게 어떻게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여인이 예수님에게 그럼 그 생수를 자기에게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

여자가 ‘난 남편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들은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생수를 주신다고 하면서 남편 이야기를 할까요?

이는 이 여인은 남편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이미 다섯 남편과 살았고 지금 여섯째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남편을 수시로 바꿨다는 것은 세상 남편들이 여인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남편을 찾는 것은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 남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여자를 만족케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쉴 만한 그늘입니다.

 

여자의 일생은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수가성 여인은 안식을 주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정오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온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서 주겠다고 하는 생수는 무엇인가요?

또한 수가성 여인이 목말라 한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남편입니다.

 

남편으로 목말라 하는 여자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남편 이야기를 하자 여인은 대뜸 예수님을 보고 선지자라고 합니다.

자기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 온 것도 이상한데 거기에 자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사를 낱낱이 알고 있는 것을 보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하니까 어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인들의 성전에 가서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드려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아 성전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라고 합니다.

장차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를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것은 그리스도가 와야 되는데 그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물동이를 내 던지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자 동네 사람들이 우물가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이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으로 보낸다고 하신 메시야를 보낸 그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명을 목말라 하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언약적으로 말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율법 아래 있는 구약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으로 야곱의 우물물을 먹는 자들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로서 오는 물이 아니고 땅에서 나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늘로서 오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땅에서 나는 물을 마시면서 장차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실 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쉬운 말로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던 생명수 강물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입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시는 분을 기다리게 합니다.

이를 약속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남편으로 오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목마름으로부터 해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주는 물이 배에서 솟아난다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 될 때 온전해지고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냈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자기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허전합니다.

하와가 본래의 자리로 들어 올 때 아담도 목마름이 해갈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나온 자기 신부들을 찾아가서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안식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않고서는 안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구원을 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구원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가서 예수님 안으로 끌어 당겨서 구원을 해 내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 안에서 목마름을 해결 하였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가 옵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천년 왕국에서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되어서 남편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생명수 강이 예수님이 재림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년 왕국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생수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흐르게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초막절 행사 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봅시다.

 

요 7:37-39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으로 올라가서 초막절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초막절이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천년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이 이르기 전까지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천국이 이루어질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 명절 끝 날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생수가 바로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남편의 오심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된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영적으로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이 됩니다.

예수님이 남편이 되어서 성도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러면 바깥에 있는 세상 남편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속에 예수라는 남편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고 살아갑니다.

비록 죄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예수라는 남편이 사단의 참소로부터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았습니다.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 때는 늘 목말랐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남편은 항상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해 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 때는 잠시라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쫓아다니면서 정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남편이 찾아 왔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가서 참 남편이 되어 주었듯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다.

새로운 남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라는 남편은 인자하기가 끝이 없어서 우리의 모든 허물들을 덮어 주십니다.

긍휼히 여기면서 용서하고 감싸 안아주십니다.

결코 정죄 당함 없이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자신이 대신 담당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라는 참 남편 때문에 마음에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새 남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만족케 해 주십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그 세계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넘칩니다.

큰 강을 이루어서 온 세상에 흐르면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합니다.

이 모습을 일찍이 에스겔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봅시다.

 

겔 47:1-12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신이 지은 성전을 보았습니다.

성신이 지은 성전의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소성케 합니다.

이렇게 생명수를 흘러 보내는 그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뜻은 ‘여호와가 그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도의 심령에는 성신이 지은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어린 양과 아버지가 함께 계십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생명수 강이 흘렀고,

에스겔에서는 성신이 지은 성전에서 흘렀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도의 심령에서 흐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넘칩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생명수 강이 이 세상 속에서는 성도들이 심령에서 흐르다가 장차에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게 됩니다.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른다고 할까요?

이는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생명을 아들에게 주었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이끄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아버지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예수에게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아버지가 이끌고 온 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 때 떡과 포도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을 일컬어 사망이 없고 어둠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에 달마다 열 두 과실이 맺히는 것입니다.

이는 항상 생명이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를 영생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인가요?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치 추석 명절날이 가까이 오듯이 오고 있습니다.

명절날이 기다려지듯이 천국으로 돌아갈 날이 기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령으로 지어진 심령의 천국은 장차 올 천국을 맛보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맛보기 천국이 실제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천국을 맛본 자들이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맛보게 한 것을 일컬어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약속은 장차 주어지는 실제의 맛보기입니다.

천국은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곳입니다.

약속을 받으면 목마름이 일어납니다.

약속을 하면 기다림이 생기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약속을 심어 놓으니까 그 약속이 기다림을 불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받은 자들은 천국을 소망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은 생수를 소망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물물을 길으면서 아~ 목마르지 않는 물이 없는가!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셨습니다.

밖에서 물을 길을 필요가 없으니까 물동이를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밖에서 물을 길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외부의 조건으로 행복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목마름이 없는 곳이고,

이 세상은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안에 하늘에 것으로 채워진 상도는 세상 것으로 인하여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목마름은 왜 생기는가요?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결핍은 소유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것을 줍니다.

세상 것은 목마름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 것은 소유하면 할수록 목마름을 불러 옵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을 먹어야 목마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하늘에 것입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성도는 세상 것으로 인하여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세상 물을 먹고 결핍을 느끼는 사람은 열등감으로 남과 경쟁을 하지만,

하늘에 물을 먹고 자족하는 사람은 일체의 경쟁을 버리고 관대함으로 살아갑니다.

배가 고프면 악함이 나오고 배가 부르면 선함이 나옵니다.

세상 물은 늘 결핍을 주지만 하늘에 물은 풍요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하늘에 물을 먹는 사람들은 경쟁과 다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족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지족(知足)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주어지는 만족을 말합니다.

지족(知足)이 자족(自足)을 불러 옵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4-17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라고 하지요.

이들에게 무어라 합니까?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를 알았다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흉악한 자들을 이기게 하십니다.

 

흉악한 자가 누구인가 하면 세상 것으로 미혹하는 자입니다.

마귀이기도 하고 적그리스도이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무엇으로 미혹하나요?

세상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불행하게 합니다.

이러한 것은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항상 결핍을 몰고 옵니다.

 

사람이 언제 행복하다고 느낍니까?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무저갱과 같이 밑 빠진 독이에요.

인간의 탐심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세상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세상 남편은 탐심을 채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수가성 여인처럼 남편을 수시로 바꿔치기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혹시 나를 만족 시켜 줄까!

아니면 저 사람일까!

그렇게 해서 바꿔치기 한 남편이 여섯입니다.

 

여섯 남편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나로 만족케 하는 것들이 남편입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권세 일 수도 있고, 명예 일 수도 있고, 인기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자 쫓아가는 모든 것이 세상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곱째 남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라는 일곱째 남편은 이 세상에 속한 남편이 아니고 하늘로서 온 남편입니다.

하늘로서 온 일곱째 남편인 예수는 이 세상 것을 주지 않습니다.

 

하늘에 신령한 것을 주십니다.

하늘에 신령한 것을 받고 보니까

이 세상에 것들은 시시해 보이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편이 준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고 보니까

이 세상 것들이 다 허구이고 다 지나가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남편과 사는 성도들은 지족(知足)하고 자족(自足)하게 되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없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고 있다고 자랑 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거부이면서도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고서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산 것입니다.

잠시 후면 하늘에 있는 그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도요한의 눈을 열어서 하늘에 있는 성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그 성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흐르는 생명수 강물이 지금은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생명수 강이 흐르는 천국에 살 자들에게 심령에 생수가 흐르는 강을 주셨습니다.

예수 하나로 만족 하시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고,

예수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면 땅에 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물을 마시는 사람은 만족함이 못하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독과 정죄와 비판과 같이 죽이는 것들만 쏟아 냅니다.

이를 사망의 향기 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 물을 마시는 사람은 만족하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과 기쁨과 긍휼과 자비와 같이 생명을 살리는 것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생명의 향기라고 합니다.

 

하늘에 물을 먹는 자와 땅에 물을 먹는 자는 달라요.

물은 정직합니다.

속일 수 없습니다.

먹는 물에 따라서 토해내는 것이 다릅니다.

 

지족하고 자족하십니까?

사는 게 감사입니까?

그럼 일곱째 남편인 예수님이 주는 하늘에 생수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핍을 느낍니까?

사는 게 쫓깁니까?

불평이고 불만입니까?

그럼 땅에 신랑이 주는 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초 신자라 할지라도 예수로 만족 하시면 하늘에 신랑을 품고 사는 성도이고,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라 할지라도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면 땅에 신랑을 품고 사는 종교인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천국은 교회 오래 다닌 연수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교회의 직분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라는 신랑과 사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은 천국에 갈 자들을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갔듯이 찾아가서 내가 너의 진짜 신랑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생수를 주십니다.

 

천국이 믿어지십니까?

믿는 척 하십니까?

하나님은 믿는 척 한다고 해서 속지 않습니다.

천국은 믿는 자가 가는 곳이지 믿는 척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 부귀영화라는 물동이를 들고 쫓아갑니까?

아니면 예수 하나로 만족하여서 부귀영화라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쫓아갑니까?

예수라는 신랑은 세상의 부귀영화라는 물동이를 버리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신랑이 주는 것이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물동이를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속된 말로 미친 여자가 됩니다.

예수라는 신랑 만나면 머리에 꽃을 꽂게 됩니다.

예수에게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라는 신랑에게 미치는 것뿐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예수에게 완전히 미쳐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미친 여자가 되었습니다.

 

미치니까

우겨쌈을 당해도 실실거리고,

모든 것을 빼앗겨도 실실거리고,

욕을 먹어도 실실거리고,

매를 맞아도 실실거리고,

넘어짐을 당해도 실실 거립니다.

풍부에 처해도 자고치 않고 비천에 처하여도 낙심치 않았습니다.

이는 바울 속에 살아가는 가치가 하늘에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설에 따르면 로마의 황제 네로가 예수쟁이들 때문에 미쳤다고 합니다.

 

예수쟁이들은 사자 굴에 집어넣어도 찬송을 하고,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도 기도하고,

기름으로 범벅을 해서 태워도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죽이려고 하면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데 예수쟁이들은 도리어 감사하고 찬송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이려고 하던 네로가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에 것이 채워지면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세상 부귀영화를 어떻게 이기는 줄 아세요.

돈 자랑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내어놓고,

명예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내어놓고,

권세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천국을 내어놓으세요.

 

세상 것은 하늘에 것으로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천국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부디 예수라는 하늘에 신랑을 만나서 세상 것이 없어도 웃을 수 있는 미친 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가로 한마디만,,

미친 사람은 암이 안 걸린다고 하더군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소망케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더 이상 신랑 찾아다니지 말게 하시고 예수 안에서 지족하고 지족하며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이 큰 울림이 되게 하여서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달음질하게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 안에 생수가 철철 흘러 넘쳐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생명의 향기가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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