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성경강해)54강. 하나님의 큰 잔치 (계 19:17-21)

by coroa 2021. 10. 16.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54강. 하나님의 큰 잔치 (계 19:17-21)

-.정낙원 목사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음녀가 멸망의 심판을 당합니다.

그런데 음녀가 멸망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심판과 잔치는 서로 모순적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전쟁과 잔치를 동의어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녀의 멸망을 앞서 18장에서는 큰 맷돌이 바다에 빠지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계 18:20-21=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음녀의 멸망을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원수를 갚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음녀의 세력을 멸망시키는 것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기쁨과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진 자 편에서는 애곡하는 일이지만,

이긴 자 편에서는 기쁘고 즐거운 잔치입니다.

한쪽은 슬픔의 날이고,

다른 한 쪽은 축제의 날입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 때 홍해 바다를 통해서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홍해에서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다 살아나서 광야에서 춤을 추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동일한 바다였는데 뱀의 후손을 상징하는 애굽의 군대는 다 멸망당하였고,

여자의 후손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장차 일어날 종말의 전쟁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은 반드시 진 자와 이긴 자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 자에게는 저주이지만,

이긴 자에게는 축복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세요.

각 교회마다 이기는 자에게 큰 상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각 교회의 상마다 그 시대에 신앙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에서는,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데 교회에서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긴다는 말은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신앙생활이란 전쟁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전쟁입니다.



왜 전쟁인가요?

이는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것입니다.

최초의 전쟁이 아담의 집안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형제 싸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나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전쟁의 원인을 하나님이 제공한 셈입니다.



맞습니다.

인류의 전쟁 원인 제공자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두 편으로 갈라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집안 속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 때 전쟁을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전쟁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한다는 말은 죄의 세력을 멸하고 찾아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죄의 세력과 예수님이 찾아 와야 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적대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붙잡고 종살이를 시켜야 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쟁입니다.

이를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음녀를 멸망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전쟁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인류가 어떻게 전쟁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합니다.

아담을 추방하실 때 뱀도 함께 추방을 하십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을 발꿈치를 물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깨트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뱀과 여자를 원수로 두셨다는 뜻입니다.

그럼 자연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에 전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뱀은 사단을 말하고,

여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 세상에는 뱀의 후손과 예수그리스도의 후손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집안에서 두 아들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이고,

아벨은 예수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이 둘의 싸움이 인류 역사의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전쟁은 가인과 아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전쟁으로도 나타나고 정치적인 전쟁으로도 나타납니다.



알다시피 뱀과 예수님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에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집 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에 충돌이 일어났듯이,

한 교회 안에도 뱀의 사고를 가진 자들과 예수그리스도의 사고를 가진 자들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전쟁은 인류 역사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으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이 나는 것도 이 세상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에 나타나는 전쟁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다름은 세상의 모든 것에 스며 있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나누어졌고,

이념과 사상적으로도 나누어져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나타나고,

사상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타나고,

이념적으로는 좌파와 우파로 나타나고,

신앙적으로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나타나고,

언약적으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우리 안에서는 옛 사람과 새 사람간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종입니다.

마귀의 종이든지 예수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귀의 종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예수의 종은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각자의 소속에 따라서 영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하였습니다.

종신토록 흙은 먹으라는 말은 땅을 근본으로 살도록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자들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소속은 땅입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일컬어 땅 속한 자라고 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땅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땅의 가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떡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자기 종들을 떡으로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소속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일컬어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늘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하늘의 가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종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으로 다스려 가십니다.



교회 안에는 떡의 가치로 사는 자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떡의 가치로 사는 자를 육적 교인이라고 하고,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를 영적 성도라고 합니다.



교인과 성도는 다릅니다.

교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성도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교인과 성도는 각자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교인들은 예수를 이용하여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장차 오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땅의 주인으로 살지만, 성도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과 성도는 가치관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다릅니다.

동일한 말씀도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 복이라고 합시다.

그럼 뱀의 후손인 교인들은 성경의 복을 육적으로 이 땅의 복으로 해석합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인 성도들은 성경의 복을 영적인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와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내어 놓는 의도 다르고 행함도 다릅니다.

뱀의 후손들은 인간의 의와 인간의 행함을 말하고,

여자의 후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예수그리스도의 행함을 말합니다.



육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말씀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말씀을 해석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면 인간의 의가 남게 되고,

예수님이 주체가 되면 예수님의 의가 남습니다.

결국 인간의 의와 예수님의 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족장 시대에는 한 집안에서 일어났고,

신약에서는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교회는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육적 교인과 영적 성도 간에 의로 인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율법의 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사회성을 가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집단이 작게는 가족으로 시작해서 이웃을 형성하고 이웃이 사회를 만들고 사회가 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사상이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한다고 하였습니다.

각각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로의 다름을 용납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상은 빛과 어둠처럼 속성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에 속성이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인간들을 두셨을까요?

싸울 수밖에 없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두셨을까요?

이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두 민족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天地創造)로 나타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지가 만들어진 것은 어떤 목적에 의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 원인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과 땅은 속성이 전혀 다릅니다.

천지를 의인화하면 하늘 백성과 땅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이고,

땅에 속한 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를 여자의 후손이라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를 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하나 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 2절에서 빛이 흑암 속에 가두어져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조를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이 죄와 사망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하나님의 말씀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니까 창조가 일어납니다.

“가라사대”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창조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면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면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하니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이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귀신이 쫓겨 가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풍랑도 잔잔해지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병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창조의 일입니다.

예수로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아멘.

예 아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하여 하늘에 사람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창조도 갈라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구원도 갈라내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갈라내게 하셨습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너희와 저희 두 부류로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라는 자기 백성은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고,

저희라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세상에 그대로 두는 것으로 갈라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종말에는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영원히 갈라내십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천국으로 데려가고,

땅에 속한 자는 지옥으로 데려가십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는 구원은 심판을 전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섞여 있다가 갈라냄을 당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있는 쪽은 저주의 심판이고, 뽑혀 나오는 쪽은 구원의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종말에는 갈라지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밭의 가라지 비유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밭에다가 곡식을 심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피 값으로 세운 교회 안에 자기 백성들을 불러들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교회 안에 자기 백성들을 심어 놓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가라지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곡식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가 다릅니다.

마치 염소와 양처럼 다릅니다.

양이 염소가 되고 염소가 양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하실 때 염소는 염소로 창조하고 양은 양으로 창조 하셨습니다.



그런데 염소와 양이 이 세상에서는 함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갈라지게 됩니다.

양은 양들이 살아갈 나라인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염소는 염소가 살아갈 나라인 지옥으로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히 갈라놓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는 한 집 안에 같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집안에 두 부류의 자식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 집안에 영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자식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집안에도 가인과 아벨이라는 종자가 다른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고,

이삭의 집안에서도 에서와 야곱이 있었고,

야곱의 집안에도 요셉과 그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도 곡식과 가라지라는 종자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광의적으로 말하면 세상 속에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24절을 보세요.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렸다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이므로 예수님의 밭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밭은 어디인가요?

교회입니다.



그러니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일차적으로는 교회 안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 이야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비유를 자기 밭이라고도 하고 온 세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36-43=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절에서는 자기 밭의 비유라고 하시고서는,

38절에서 해석을 하실 때는 자기 밭을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으로 확대하여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음이 됩니다.



교회 안에도 종자가 다른 두 종류의 교인들이 있듯이,

세상에서도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항상 다투게 됩니다.

각자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전쟁은 이념과 사상의 정치적인 전쟁으로 나타나지만,

교회 안에서의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 간의 영적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백성들인 가라지가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요?

예수님의 백성인 곡식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합니다.



41-42절을 보세요.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가라지를 일컬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고 교회를 타락케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불법을 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그 죄값을 물어서 풀무 불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짐승을 잡아서 유황불 못에 던져 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그리스도 음녀의 세력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짐승이 들어가는 유황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비 진리를 가지고 진리를 훼손하고,

옛 언약 신앙을 가지고 새 언약 신앙을 훼손하고,

신본주의로 세워져야 하는 교회를 인본주의로 만들어 버리고,

영적 가치를 추구하여야 하는 교회를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게 종말에 음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교회 안에 가라지들을 거두어서 풀무불 속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비유입니다.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종말이 되면 어부가 그물 속에 고기를 선별을 하듯이 예수님이 오셔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선별한다고 하십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기준은 주인이 어떤 고기를 잡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만약에 주인이 멸치를 잡고자 그물을 쳤으면 그물 속에 멸치는 좋은 고기이고 멸치 이외 고기들은 나쁜 고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어부(漁夫)입니다.

예수님이 잡고자 하는 고기는 자기 백성들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자기 백성이 좋은 고기입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고기들이 있어도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골라 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심판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을 잡아서 유황 불 못에 던져 넣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비유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싸우고,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싸웁니다.



교회가 전쟁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듯이 곡식들이 교회 안에서 가라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음녀가 뭡니까?

타락한 교회이잖아요.

그 교회 안에 누가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땅에 속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합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가문 속에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약속으로 난 이삭을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싸움이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어디서 죽나요?

교회 안에서 죽습니다.

누가 죽입니까?

짐승이 죽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죽은 곳을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주께서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죽임 당하였나요?

구약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전쟁이 확대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세상의 전쟁입니다.

세상의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요?

민족 간의 전쟁이고 국가 간의 전쟁입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는 진영 논리로 싸웁니다.



이 시대 민족 간의 전쟁이나 국가 간의 전쟁은 모두가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영적 전쟁을 예표하는 전쟁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종말의 징조를 말씀 하실 때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서로 싸움을 하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전쟁은 두 세력 간의 충돌입니다.

본질이 다른 두 세력은 서로를 배척하게 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세력이 서로를 점령하고자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점령하면 전쟁이 사라집니다.



힘의 균형이 깨어져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잠식하고 있을 뿐이지 전쟁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영원히 사라지려면 사상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상은 하나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고 하여도 사상이 하나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힘으로 얻어낸 평화는 위장된 평화인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반시 고요한 때라고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2절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도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반시 고요한 때라고 합니다.

반시 고요한 때란? 불안전한 평화 모드를 말합니다.



강함이 약함을 지배 할 때 나타납니다.

예수님 초림 때가 그러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힘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쥐 죽은 듯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반시 고요한 때입니다.

종말에도 이러한 일이 잠시 일어납니다.



계 6:1-2=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서 첫째 인을 떼니까 흰 말이 나타납니다.

흰 말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마귀는 본성이 속이는 자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시니까 자기도 흰 말을 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면류관을 쓰고 오시니까 자기도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속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쓴 면류관은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경기에서 이긴 자들이 쓰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면류관입니다.

재림 하시는 예수님이 쓰는 면류관은 디아데마타 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나라 왕이 쓰는 왕관을 말합니다.

이 왕관은 예수님이 쓰는 면류관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는 말은 미완료로서 잠시 이긴 척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긴 자이지 이기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승리 하셨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잠시 이김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잠시 이긴 자처럼 두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인봉을 뗀다는 것은 어린 양의 허락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잠시 비 진리가 홍수처럼 온 세상을 뒤 덮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서 여자의 후손들을 다 떠내려가게 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광야로 피신을 시키십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 시대에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을 때 하나님이 남겨진 7000명을 숨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온 세상이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 초림 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고,

영적으로는 율법주의가 성전을 장악하여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오셔서 은혜로 남겨진 자들을 찾아내십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의 모습은 예수님의 재림 때와 같습니다.

영적 상태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방문을 하실 때는 항상 어둠의 세력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입니다.

이 모습을 창조 때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봅시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이는 흑암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십니다.

흑암인 줄 알았는데 그 속에 빛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엘리야 시대 7000명이 숨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흑암 속에 숨어 있던 빛을 불러내서 빛과 어둠을 나누어 버리십니다.

고요하던 세상이 둘로 찢어진 것입니다.

반시 고요한 때가 하나님의 말씀의 출현으로 깨어지고 빛과 어둠이라는 두 세력 간에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는 하나였는데,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고 난 후 둘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 다름이 되어 평화가 깨어지고 전쟁모드가 돌입이 된 것입니다.

마치 남북한과 같이 적대적 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창세기 1장의 확대판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 빛과 어둠이 서로 섞여서 반시 고요하게 있다가 예수님의 출현으로 평화가 깨어지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일으키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이 땅에 큰 전쟁이 일어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종교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펼쳐지는 진리의 싸움이지만,

육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벌리는 종교적인 전쟁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뱀 사상으로 통일된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종교 통합운동을 일으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 세상의 흐름이 종교 통합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종교 통합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도하는 세력이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큰 음녀입니다.



카톨릭이 가짜 교회 단체인 WCC 라는 세계교회 협의회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는 종교 통합 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계시록 17장 18장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9장에서 재림 하여서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들을 몽땅 붙잡아서 유황 불 못에 던지는 큰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로마 카톨릭이 온 세상의 종교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로마 교황의 품에 안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세입니다.

쓰나미처럼 온 세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밤이 깊으면 낮이 가깝습니다.

종교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창궐이 슬픈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것이므로 기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려면 흑암이 깊음 중에 있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이 온 세상을 뒤덮어야 합니다.

이러한 때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하늘의 뜨인 돌이 거대한 금신상의 발을 쳐서 무너뜨리듯이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재림을 하여서 큰 성 바벨론인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들을 일망타진 하여서 유황 불 못에 집어넣고 멸망을 시켜버릴 것입니다.



언어는 사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 구석구석에 전쟁 용어들로 가득합니다.

사는 것이 전쟁 용어를 쓴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사니까 전쟁인 것입니다.



경쟁은 곧 전쟁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가정주부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살이 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공존과 공생이라는 말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식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지고 살아라! 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자식이 이겨야 기분이 좋고, 내 자식이 지면 속이 상합니다.

어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그걸 진리처럼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도 무한 경쟁시대입니다.

내 교회가 살려면 남의 교회 교인들을 빼내 와야 합니다.

이 시대 전도는 다른 교회 교인 빼내오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약육강식의 원리로 살아가는 짐승이고, 교회도 힘을 쫓아가는 짐승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세상에 일어나는 제국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세상은 짐승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적그리스도를 일컬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도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짐승을 붙잡아서 유황 불 못에 던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계 19:17-21=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천사가 공중에 나는 새들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이 차려 놓은 큰 잔치 상에 놓인 고기들을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잔치 상에는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멸망과 그 결과가 처참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전쟁터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독수리와 까마귀와 각종 들짐승들이 새까맣게 달려들어서 뜯어 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상징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큰 음녀를 따라서 이 땅에서 왕노릇 하던 자들입니다.

큰 음녀를 의인화 하면 적그리스도이고,

세력화 하면 종교 통합을 이루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를 땅에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이 땅에서는 땅에 속한 자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 잔치는 저주의 잔치입니다.

불 못에 던져져서 통곡하고 아우성치는 잔치입니다.



예화가 적절한지를 모르겠지만 마치 이 시대 나이트클럽에서 현란한 싸이키 조명 아래서 술에 취하여 시끄러운 음악에 소리치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마귀의 졸개들이 불 못에서 아비규환의 광란의 춤추는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 시대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잔치는 종말의 지옥 잔치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하여 춤을 추는 자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자들도 이 세상에서 부와 사치와 연락을 누리는 것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할까요?

왜 몸의 사욕을 쫓지 말라고 할까요?

신앙은 죄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육신의 쾌락으로 다가옵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다가옵니다.

육신의 달콤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과 싸우고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화는 그 시대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문화는 벌거벗는 문화입니다.

이는 죄의 수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발가벗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을 발가벗고 무덤가에 머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죄인의 몸을 주었습니다.

죄인의 몸은 새들이 뜯어 먹는 죽은 자의 시체와 같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몸을 볼모로 잡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어서 몸에 사욕을 쫓아가도록 합니다.



육신의 쾌락은 마약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자들은 육신의 쾌락을 주는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술일 수도 있고, 도박일 수도 있고, 마약일 수도 있고, 섹스일 수도 있고, 스포츠일 수도 있고, 다양한 취미 일 수도 있습니다.



육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의 것으로 가두고,

영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영의 것을 거두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이고 평안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시면 각자 심은 대로 거두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육신을 위하여 산 자들에게는 이 땅을 주고,

영을 위하여 산 자들에게는 하늘을 주십니다.

목자가 낮에는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격리시킵니다.

염소는 염소의 우리로 들여보내고, 양은 양의 우리로 들여보냅니다.



이제 그 때가 가까이오고 있습니다.

낮이 이미 기울었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두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늘에서는 축제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땅에서는 통곡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일찍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과 살아서 고난당하던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고,

마귀에게 속하여 이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던 자들은 유황 불 못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큰 잔치에 참예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눈물 흘린 성도들에게는 하늘에서 기쁨과 찬송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로 인하여 부와 사치로 연락하면서 왕노릇 하던 음녀의 세력들에게는 저주의 통곡으로 갚아주십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를 부자와 거지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봅시다.



눅 16:19-25=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름이 있고 한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고,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뜻이고,

이름이 없다는 것은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름 있는 자는 산 자이고, 이름이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산 자는 천국으로 가고, 죽은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로보건데 나사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름 없는 부자는 이 땅에서 재물의 힘으로 살아갔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며 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보면 음녀가 자색 옷을 입고 금은보화로 꾸미고 왕처럼 부와 사치로 연락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부자는 음녀를 상징합니다.

부자는 음녀처럼 이 땅에서 왕 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고난으로 살았던 나사로는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나사로처럼 산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죽임을 당한 자라고 합니다.



부자는 돈이 힘이 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이 힘이었습니다.

부자는 육신의 연락이 삶에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것이 삶의 가치였습니다.



이 세상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돈을 가진 자가 왕입니다.

오죽하면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할까요?

부자처럼 돈을 힘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삽니다.



부자는 돈으로 세상의 쾌락에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자를 하나님을 떠나 살던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인 지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25절을 보세요.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정의는 간단합니다.

부자가 탄원하자 하나님은 다정하게도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지 않느냐!

너는 세상에서 돈을 의지하고 부와 사치와 육신의 연락을 누렸으니 여기서 고난을 받는 것이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다가 육신의 고난을 받았으니까 여기서는 위로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삶의 댓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삶을 낳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았습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음녀는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았고,

성도들은 지옥으로 살았습니다.

음녀는 이 세상을 소망하고 살았고,

성도들은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각자 속한 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부자처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이 땅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나사로처럼 하늘에 속한 성도는 하늘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의 멸망을 두 가지 잔치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갈라짐입니다.

하나로 섞여 있다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각자의 자리로 찾아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 할 때는 반드시 심판을 동행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는 함께 섞여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영원히 갈라짐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영적으로 갈라졌지만,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으로 영벌과 영생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초림 때는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지고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게 됩니다.



땅에 속한 자는 이 세상에 두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로 데려 가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종말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양들에게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천국으로 가고,

염소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이란?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다시 오실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있으면 몸도 하늘에 것을 소망하고 살 것이고,

마음이 세상에 있으면 몸도 이 세상 것을 쫓아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산이 좋은 사람은 산으로 가고,

바다가 좋은 사람은 바다로 갑니다.

이와 같이 떡이 좋은 사람은 떡을 쫓아가고,

말씀이 좋은 사람은 말씀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양은 양의 속성으로 살고,

염소는 염소의 속성으로 살아갑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땅의 속성으로 살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속성으로 삽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쫓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속성입니다.

근본이 하늘인 사람은 하늘의 것을 얻고자 살아가고,

근본이 땅인 사람은 땅의 것을 얻고자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땅에 속한 짐승들을 잡아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왜 유황 불붙은 못에 던져 낳는다고 할까요?

이는 이 세상이 바로 유황 불 구덩이기 때문입니다.

TV에서 인도네시아 화산 지대에 대하여 방송을 하는데 오늘 본문과 어찌나 똑 같은지 몰라요.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용암이 뿜어내는 가스가 유황이에요.



이 땅이 유황 불 못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하늘에 속한 자기 백성들은 하늘로 빼내고 땅에 속한 자들은 그대로 두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땅이 세 갈레로 갈라지고 큰 지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이 세상은 유황 불 못이 펼쳐지게 됩니다.

불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지구가 유황 불 못이에요.



땅에 속한 자들이 이 세상에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 바로 유황 불 붙은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지옥에 간 부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물 한 방울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하지요.



천지(天地)를 말할 때 지(地)는 이 땅을 말합니다.

지옥이란? 땅의 감옥이라는 말입니다.

땅의 감옥을 유황불 못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합니다.

아담이 살아가는 땅이 이 세상입니다.

이는 이 땅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지옥인 것입니다.



이 땅은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죄인을 일컬어 죽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들이 사는 동네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크게 보면 지각과 맨틀과 핵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지각은 우리의 피부와 같고 맨틀은 살과 같고 핵은 몸속에 흐르는 피와 물 같아요.

핵을 마그마라고 하는데 이게 밖으로 나오면 용암이에요.



마그마는 불구덩이에요.

이게 분출을 해 보세요.

온 천지가 불구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불구덩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안 떠나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말뚝을 박지 못하게 우리의 인생을 자꾸만 지진 나듯이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우리 뜻대로 인생이 안 살아지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태클 거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종말을 천지 만물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징조라고 합니다.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 아 ~ 이곳은 살 곳이 못 되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빨리 떠나야 하겠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바다가 우는 쓰나미가 일어나고 난리와 소문과 민족이 민족과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을 종말의 징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거든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왔다고 하잖아요.



천재지변은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싸인입니다

싸인을 제대로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세요.

그럼 하늘의 싸인을 읽어내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님이 오신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들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물을 통하여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 을 수 있는 귀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징조를 읽어내게 하옵소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세상에 빼앗기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맞이하는 소망과 설렘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