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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15강.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아가 4:1-5)

by coroa 2021. 4. 27.

 

[15강.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아가 4:1-5)]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녁에 수변 공원을 산책을 나갔습니다.

날씨가 선선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왔어요.

그 중에 어떤 여자 분이 강아지 두 마리를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강아지에게 각종 액세서리로 치장을 해 놓았어요.

두 마리인데 한 놈은 남자 옷을 입히고 다른 한 놈은 여자 옷을 입혔어요.

머리도 묶고 핀도 꼽고 리본도 달고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오늘 본문 속의 술람미 생각이 번개 치듯이 스치는 것입니다.

야~ 저거다!

 

오늘 본문이 뭔가 하면 솔로몬이 술람미를 보고 예뻐서 칭찬하는 내용이에요.

술람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워 하고 있어요.

너무 예뻐서 감탄하고 있어요.

콩깍지도 이런 콩깍지는 없을 것입니다.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사랑아!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싫지 않는 내 여인아! ♬~

 

솔로몬이 나훈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너무 예쁜 것입니다.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것입니다.

 

야~ 술람미야!

넌 어쩜 그렇게도 예쁘니!

넌~ 아무리 봐도 싫지가 않단다!

난~ 널 보면 기쁘단다!

 

앞서 강아지 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겠는가요?

대충 감이 잡히지요.

바로 강아지를 꾸민 주인의 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자기가 꾸미지 않았어요.

주인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몄어요.

주인이 기쁘기 위해서 주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준 것입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기뻐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아지에게 주인이 기뻐하는 것들로 치장해 놓은 것입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꾸며준 것으로 가만있으면 되어요.

그럼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요.

 

만약 강아지가 주인님 전 그 옷이 싫어요!

색깔도 마음에 안 들고요!

난 이걸 입을래요!

그러면서 주인이 입혀준 옷을 벗고 자기가 좋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면 그 강아지는 그날 부로 그 집에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값을 치르고 샀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몸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치장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어요.

우린 모두가 예수님께서 새겨놓은 흔적들이 있어요.

마치 강아지에게 주인의 흔적을 새겨놓은 것과 같아요.

 

강아지를 보면서 술람미가 생각났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며 놓았어요.

그리곤 술람미를 보면서 이쁘다고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이뻐하는 것은 술람미는 솔로몬이 치장한 것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의 차이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자신들이 치장을 하였고 술람미는 솔로몬이 좋아하는 것들로 솔로몬이 치장을 하였어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단 하나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하면 되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가 좋아하는 색깔이나 기뻐하는 옷을 입고 나아가요.

 

술람미가 그런 것입니다.

술람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솔로몬이 기뻐하는 것으로 도배를 하였어요.

술람미는 자기가 꾸민 것이 하나도 없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솔로몬이 꾸며 준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람미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꾸몄을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꾸민다는 말은 곧 자아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자기 좋은 대로 하게 되어요.

 

죄가 주체를 확립시켜 놓은 것입니다.

주체가 살아 있으니 자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아 중심으로 사는 것을 죄라고 해요.

 

원래 인간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우린 토기에요.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토기가 주인으로 살겠다고 반항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지 않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살아요.

 

이게 노아 시대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지음을 한탄하사 노아 시대에 홍수로 쓸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바퀴벌레를 소독약으로 싹 쓸어버리고 야~ 속이 시원하다! 라고 한 것과 같아요.

그리곤 노아를 시작으로 다시 인류 역사를 시작했는데 또 다시 노아 시대와 같이 죄악이 관영해 진 것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 기쁨으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기쁨을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사 43: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2:8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하나님의 애완견이에요.

 

하나님이 기쁘려고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겐 하나님을 위한 것보다 더 우선 적인 것이 없어요.

내가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선이에요.

 

목사에게 적용해 봅시다.

목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자에요.

복음을 증거케 하려고 목사를 세웠어요.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말이에요.

그럼 목사에겐 복음 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없어요.

 

가정도 복음 보다 우선일 수 없고!

가족도 복음 보다 우선 일수 없고!

살아가는 일도 복음 보다 우선 일 수 없어요.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을 보세요.

사생활이 없었어요.

그들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어요.

가족들과 알콩달콩한 삶도 살지 못했어요.

가족에게 도리어 아픔만 안겨 주었어요.

가족들 입장에선 불량 남편이고 불량 아빠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예수님보다 더 사랑 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다고 하는 것도 용납 하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비정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은 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생명의 길이에요.

그러니 죽은 자에게 매이지 말란 말입니다.

 

너와 아비는 다른 존재란 말입니다.

아비는 죽은 자이고, 넌 산 자라는 뜻입니다.

아비는 율법 아래 있고, 너는 은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와 아비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정으로 대할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존재가 다르고 영역이 때문입니다.

아비는 죽음의 영역에 있고,

너는 생명의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 밖은 죽음으로 보아요.

그래서 죽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따르겠다고 하니까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날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너무 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송장하고 살고 싶습니까?

싫지요.

 

산 자는 죽은 자와 같이 하기 싫어요.

아무리 죽고 못 살겠다고 하던 사람도 살아 있을 때 일이지 죽으면 싫어요.

그래서 죽은 자는 무덤에 묻어 격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송장하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에게 선택을 입은 자는 산 자이고 선택을 입지 않은 자는 죽은 자에요.

그러니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엔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도 복음 보다 우선 일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복음 밑으로 내려 와야 해요.

내가 사는 것보다 복음이 우선이란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놈은 이 구도를 역리로 바꾸어 버렸어요.

내가 있고 복음이 있는 것이라고 만들어 버렸어요.

복음 보다 자기 존재를 우선에 두었어요.

그러니 항상 내가 살아야 복음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 편을 들어 주면서 달콤하게 속삭여요.

여기에 말려들면 내 존재가 복음보다 우선이 되어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 되어요.

 

그럼 복음은 나를 존재케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아요.

항상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복음이 있게 되어요.

그러면 복음도 나를 존재케 하는 수단으로 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했어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했어요.

결국 죄라는 놈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우리의 존재 이유는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런데 죄가 내 존재가 먼저이고 언약은 나중이라는 식으로 주객을 전도시켜 놓았어요.

 

예수님을 내 시다바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모두가 신을 자기 삶에 도우미로 이용하려는 우상숭배자에요.

이게 역리거든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역리를 바꿔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던 자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을 인생을 차압당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아니에요.

죄 때문에 온전히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삶에 방향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란? 정답을 알려주어도 정답대로 살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먹은 대로 살아 내지를 못해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 사실을 알아야 자신은 죄를 이길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야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인간의 행위에 포카스를 맞추면 종교가 되어요.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해요.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인간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예수님을 주체로 삼고 자신은 예수님 안으로 귀속되어 사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살지 않고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것을 일컬어 모든 영광을 예수님에게 돌린다고 해요.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럽니다.

너희는 너희 영광을 구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광을 구한다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랑만 가득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마귀 새끼니까 자기 영광을 구한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치장했어요.

제사로 치장했어요.

 

아버지는 긍휼을 바라는데 바리새인들은 제사로 나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고 오라고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한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과 연결시켜 봅시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보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넌 어쩜 눈도 밝고 초롱초롱하고!

머리카락도 아름답고!

이빨도 든든하고 가지런하며!

입술은 앵두처럼 매혹적이며!

뺨은 석류처럼 화사하고 예쁘고!

목은 시원하게 뻗어 있고!

유방은 쌍둥이를 밴 노루처럼 풍만 하느냐고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술람미가 이런 여자였냐 입니다.

알다시피 술람미는 게달의 장막처럼 볼품이 없다고 했어요.

 

게달의 장막이란? 다 떨어진 천막을 말하는데 이는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외모로는 도무지 사랑을 받을 만한 매력이 없는 여자에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로 볼 땐 술람미는 추녀에요.

못난이란 말입니다.

자기 쪽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솔로몬이 사랑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에요.

 

외모로 반할만 한 미녀들은 오히려 예루살렘 여자들이에요.

여자로서의 매력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더 많았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아서 피부도 곱고 하나 같이 예뻐요.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매력을 따진다면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근처도 못가요.

 

객관적인 사실이 이럴 진데도 솔로몬은 술람미를 극찬하고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극찬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걸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람미를 본받읍시다! 가 되어요.

 

제가 시중에 나와 있는 강해 집을 여러 권과 인터넷에서 얻은 것하고 열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 같이 술람미를 본받자는 일색이에요.

이는 모두가 성화론을 바탕으로 아가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설교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성화론의 신앙은 인간의 주체로 출발해요.

그래서 인간의 변화된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설교를 하여도 자아라는 자기 주체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우리 존재로부터 출발하면 성화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성화론은 자아 꾸미기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잘났다는 자아를 꾸미는 것입니다.

성화론 신앙은 바리새인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성화주의자들이에요.

그러니 아가서를 강해해도 술람미를 본 받읍시다!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변하는데 초점이 있지 않아요.

예수님이 무얼 하셨느냐!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 몸에 예수님의 피를 발랐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도대체 뭘 한거야!

뭘 어떻게 치장을 했길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거야!

그걸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지니고 있는 매력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매력은 어디까지나 솔로몬의 눈에 비친 매력이에요.

솔로몬의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매력이 아니에요.

객관적인 매력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있어요.

그러므로 술람미가 그래 난 매력 있는 여자야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큰 착각입니다.

 

술람미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노예에요.

그것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간에 일했어요.

손은 곰 발바닥처럼 투박하고!

얼굴은 타서 검둥이고!

옷은 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있고!

신발은 다 헤어진 짚신이고!

거기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서 영양결핍에 말랑깽이에요.

 

얼굴이 예쁘길 합니까!

그렇다고 피부가 윤기가 납니까!

옷이라도 명품을 입었습니까?

거기다가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여자에요.

예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어요.

이게 객관적인 술람미의 모습이에요.

 

누가 이런 여자를 아름답다고 하겠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최상의 극찬을 하고 있어요.

솔로몬이 극찬하는 것을 술람미에게서 찾고자 하면 안 되어요.

솔로몬에게 찾아야 합니다.

 

제가 설교 초두에 강아지 이야기를 했지요.

강아지에게 옷을 입히고 액세서리로 꾸민 분이 누구입니까?

강아지의 주인이지요.

 

주인이 기쁘기 위해서 강아지를 꾸몄다고 했지요.

주인이 강아지를 예뻐하는 것은 강아지에게 주인의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강아지에게 한 수고와 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주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강아지에게 찾아선 안 되어요.

주인이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니까 사랑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되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꾸며 놓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며 주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솔로몬이 치장해 주었어요.

 

이건 마치 엄마가 어린 아이를 꾸민 것과 같아요.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할 때 엄마가 아이를 꾸미지요.

그래서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야~ 고 녀석 참 예쁘네! 라고 하면 누가 흐뭇합니까?

엄마가 흐뭇하지요.

 

엄마가 자식을 단장시키는 것은 엄마가 기쁨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자식을 통하여서 기쁨을 얻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이에게 자기가 좋아 하는 것으로 꾸며서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랬어요.

술람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어요.

그러니 술람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가 다 솔로몬 것이에요.

술람미 것은 아무도 없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솔로몬 것이에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요.

예수님의 것으로 꾸며요.

 

지난 시간에 술람미가 꿈에서 신랑을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잖아요.

지금 신랑이 왔어요.

 

오늘 본문은 신랑이 와서 신부를 보는 내용이에요.

와서 보니 신부가 치장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신랑이 준 것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 넌 어쩜 이렇게 내가 준 것을 그대로 간수하고 치장을 잘했니!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랑이 준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섞으면 안 되어요.

성경은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부패한다고 합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에 복음이에요.

물은 인간들 의에요.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는 말은 복음에 인간의 것을 섞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것이란? 율법적인 행함을 말해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인간의 행함을 보태는 것입니다.

성화주의가 이런 부류들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아요.

십자가에다 자기 행함을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십자가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야 된다고 말해요.

기껏 나아간다는 것이 고작해서 인간 변화되기에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함을 포기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피 뿌려 주신 은혜를 찬미하고 살면 되는데!

자기가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서 하나님께 당당해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굿~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을 믿지 않고 자기들이 거룩해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려 놓은 그림에 관람객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덧칠을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노발대발하겠지요.

그럼 그림의 가치가 상실이 되어요.

그림 속에는 작가의 철학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이 그려 놓은 그림에 자기가 덧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몸에 예수의 것으로 그려 놓았어요.

그 아들에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놓았어요.

더 보태고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 놓았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생각으로 보니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보아요.

그래서 자기 행함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에 인간의 행함을 섞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섞어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었어요.

갈라디안식 신앙은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예수님 십자가도 믿고 성화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미흡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쁘지 않는 거예요.

자신들이 성화 한 것이 기쁘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이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안식 신앙을 가지면 입만 열면 자신들이 뭘 하였다는 것만 자랑을 하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랑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리가 할 것이 없다고 하면 비아냥거리면서 무슨 큰 득도라도 한 것처럼 아직도 십자가에 머물고 있느냐!

어린아이 같이 십자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말해요.

 

저는 구원을 골동품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골동품은 원형 그대로 간직하여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골동품을 손대면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날아가잖아요.

 

복음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를 간직해야지 거기다 뭘 보태거나 빼면 가치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풍습 속에서도 섞이는 것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옷도 두 가지 재료로 직조된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고!

소나 나귀로 겨리해서 밭을 갈지 못하게 하였고!

한 밭에 두 종자를 뿌리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과 혼인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을 힘써 지키는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뭔가요.

구원이잖아요.

구원이 우리의 조건으로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주어졌잖아요.

 

우리가 흔히 구원이야기를 할 때 야곱과 에서를 예표적으로 말을 합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운명이 결정이 났습니다.

야곱은 천국가기로 결정이 되었고!

에서는 지옥가기로 각자의 길이 정해져 있는 상태로 태어났어요.

 

이걸 “예정론” 이라고 합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조건이 섞일 틈이 없어요.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졌어요.

 

저는 과거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할 때는 예정론을 믿지 않았어요.

예정론대로 라면 내가 애써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정 되었으면 내가 꼭 예수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천국 가기로 예정 되었으면 가만히 놀아도 천국에 보낸 줄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구태여 내가 뭘 애써서 예수 믿을 필요가 있느냐! 라고 비아냥 거렸어요.

또 지옥가기로 예정 되었으면 내가 죽도록 충성을 해도 지옥에 갈 텐데 뭣 하러 예수 믿는다고 고생을 하느냐 라고 말했어요.

그 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도 이런 딜레마에 빠진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정론은 누구라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할 교리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주체를 포기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창세전 언약을 깨달으면서 이 딜레마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니까 모든 성경이 언약 중심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 중심에서 성경을 해석했는데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난 후 언약 중심으로 해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언약 중심으로 해석한다 함은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이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고!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먼저 입니까?

창세전 언약이 먼저 입니까?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지요.

 

드라마를 찍기 전에 시나리오가 먼저 있고 배우가 정해지지요.

배우는 시나리오에서 운명이 결정이 되어요.

시나리오에 그 배역이 없으면 그 배우는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배우의 운명은 시나리오에 의해서 좌우 되어요.

 

창세전 언약은 시나리오와 같아요.

왜냐하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언약이 먼저였으니까요.

인간은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생겨났어요.

인간은 자기 존재보다 언약이 우선이에요.

 

시나리오가 예정이에요.

저와 여러분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해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 예정론이 맞지요.

 

그런데 죄가 언약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기 있음으로부터 출발하도록 바꿔 놓았어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무리 신이 있다고 하여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있고 하나님이 있어요.

내가 죽고 나면 하나님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어요.

 

그럼에도 죄라는 놈이 인간에게 죽으면 끝이라고 가려 놓아 버린 것입니다.

죽고 나면 신도 없다고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신을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본주의 자유의지에요.

 

자유의지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해요.

모든 결정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주체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자기 존재로부터 성경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주체가 자기가 되어요.

그럼 자신이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이 예정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정론대로라면 인간은 로봇이기 때문이에요.

자기 영광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받고 싶은데 내가 말씀지킴과 상관없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되었다고 하면 자기 영광이 사라지잖아요.

그러니 짜증나는 것입니다.

 

그런 난 뭐냐!

내가 시다바리냐!

 

맞아요.

인간은 예수님 시다바리에요.

시다바리를 종이라고 해요.

바울이 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시다바리로 살기 싫어하는게 죄에요.

 

지난번에 수원에서 목사님들과 성경 공부를 하는데 구원론에 대하여 토론을 하다가 예정론을 말하게 되었어요.

그 분은 구원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합니다.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해요.

거기까진 믿겠대요.

 

그러면서도 예정론은 동의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수 없이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키지 못하면 짤린다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된다는 것과 상반되는 말이에요.

 

은혜란? 공짜란 말입니다.

우리 조건과 상관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거저 준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지켜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 되지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은 구원은 은혜가 아니고 조건이 되고 행함이 되어요.

이게 유대교식 구원관이에요.

 

지금도 유대교식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믿었어요.

이 사람들이 내어 놓는 논리는 율법은 쌍무 언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유대인들이 서로 쌍방 간에 맺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망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지켜서 유대인처럼 망하지 말자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키지 못하여서 망했으니 우린 지켜서 성공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을 동원해요.

성령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지키도록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쌍무 언약으로 준 것은 이스라엘을 죽음에 집어넣기 위함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런데 마귀가 죽은 자라는 것을 가리고 산 자라고 미혹했어요.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있으니 산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는 이미 죽은 자이다!

죽었기 때문에 내 말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을 죽은 자에서 살려 내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죽음에서 건져낸 것의 예표에요.

애굽은 죽음이에요.

애굽에 장자를 죽인 것은 애굽은 죽은 곳이란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너희도 저 애굽 사람들처럼 죽어야 하는데 어린양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걸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어서 확인 사살을 하는 것입니다.

에라이~이 놈들아 죽어라!

그래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쌍무 언약으로 준 것입니다.

지키라고 쌍무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죽이기 위해서 맺은 거예요.

 

너희는 진노 받아야 할 놈들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쌍방 간에 약속을 하였다구요.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바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에요.

 

너희들이 이런 애굽의 바로와 같이 열 가지 재앙을 보고서도 마음이 완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똑 같은 악당인데도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창세전의 용서하심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몰라요.

그러니 유대인들과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핏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아직도 십자가에서 놀고 있느냐고 빈정거리면서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따내거나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겐 은혜를 주시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세요.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각자의 운명이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은혜가 되지만 그래도 우리가 구원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면 그건 행함이 되어요.

 

예정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에요.

결국 자기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 라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산 자 라고 보니까 말씀을 지킬 주체를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라는 존재를 창세전 언약 중심으로 접근하지 않고,

자아 중심으로 접근하니 말씀을 지킬 주체를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분은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함 여부에 따라서 구원을 지켜지기도 하고 상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은 완료가 아니고 미완료로 남게 되어요.

구원이 미완료가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짐이 되고 항상 불안해요.

 

구원은 끝까지 가 보아야 알 수가 있어져요.

그러니 개 발에 땀나도록 열심히 뛰고 또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한국교회의 실상에요.

저도 과거 수십 년을 이런 사고로 예수를 믿었어요.

 

우린 지금까지 선을 행 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고 배웠어요.

성경은 이런 생각 자체가 죄라고 규정을 하는데도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죄인의 상식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에게선 선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선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악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활용해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눈길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챙기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성경은 제발 눈길을 우리에게 두지 말고 예수님에게 두라고 하는데도 이게 안 믿어지니까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어떻게 말씀대로 살지! 라고 해요.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자기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죄인들의 생각이에요.

죄인은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한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아니다 너희도 열심히 하면 된다고 가르쳐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둔단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마귀의 꾐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내가 각오만 단단히 하면 죄도 안 짓고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저도 과거 40여 년 동안 그게 옳은 신앙이라고 믿고 그렇게 열심과 정성을 다하여서 지켜왔어요.

 

자유의지란? 자신의 의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자유의지 속에는 내 인생을 내가 관리 할 수 있다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자기를 살게 하는 주체가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신앙생활을 내 마음 먹은 대로 할 수가 있어지거든요.

각오만 단단히 하면 죄도 안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경의 증거는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해요.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는 말은 순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불순종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죄라는 세력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각오로 해결 될 성질이 아니라 주권의 문제에요.

우리는 내가 내 주인인줄 알지만 실상은 우리 주인은 따로 있어요.

우리 주인은 죄에요.

그래서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종속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인간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우리 몸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인간이 왜 죄를 짓느냐?

죄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자 하는 그 마음은 알겠는데!

마음이 가상하다고 해서 신앙이 될 수가 없어요.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상이에요.

그러니 마음이 가상하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더러 너희들 죄짓지 말라고 하지 않아요.

너희는 죄 아래 팔린 죄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너희가 죄를 이기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때부터 예수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준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라는 주인 아래 종속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죄라는 주인이 우리 몸을 주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신앙생활의 근본이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죄인임을 안다면 여러분~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죄를 짓지 마세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느냐 하면 ‘여러분~ 우리 육신은 죄의 종이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 입니다!’ 라고 말을 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이건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우린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신세에요.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이 뭘 해서 의로워지겠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하지 못해요.

 

우린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이에요.

자기 주제를 안다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말이 나온다고요.

‘앞으로 잘 할게요!’ 가 아니라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은 이런 사실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 죽을 몸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만든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이걸 사도 바울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예수 안에서 산다 함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 몸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로 산다고 해요.

내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용서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이기지 못하면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하는데 저주 받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 몸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고 산다는 생명이 나와야 해요.

내 생명이 나오면 안 되어요.

 

이렇게 되면 자유의지가 틀린 것이 되지요.

자유의지가 되려면 내가 죄를 거부 할 수가 있어야 하잖아요.

내가 죄를 거부 할 수 있으려면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어야 해요.

내가 내 몸의 주인일 것 같으면 죄를 안 지을 수가 있어요.

 

죄를 안 지으면 죽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지으니 죽을 이유도 없지요.

 

그렇잖아요.

자유의지를 말하는 자들이 말대로라면 내가 내 몸을 주관하니 죄 안 지을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 안 죽으려면 내가 죄를 안 지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도 이건 동의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이건 안 되거든요.

죄는 안 지을 수 있다고 말은 할 수가 있는데 죽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이 없거든요.

결국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는 말은 사기인 것입니다.

 

흔히 성화주의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죄를 안 지어야 된다고 해요.

아니 죄인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가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죄를 경중으로 나누인다는 말이잖아요.

 

죄는 경중이 없어요.

죄이면 죄이지 큰 죄, 작은 죄가 없어요.

죄는 질의 문제이지, 양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린아이도 죄인이고 어른도 죄인이에요.

어린아이는 작은 죄이고 어른은 큰 죄가 없어요.

둘 다 죄인이에요.

그래서 어린아이도 죽고 어른도 죽고 둘 다 죽는 것입니다.

 

죄인은 마치 강아지를 온전한 강아지와 덜 온전한 강아지와 나눌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50% 강아지와 100% 강아지가 있나요?

없지요.

강아지면 강아지이지 온전한 강아지와 덜 강아지가 없어요.

 

죄인이면 죄인이지 큰 죄인, 작은 죄인이 없어요.

죄인이란? 존재의 문제이지, 수준의 문제가 아니에요.

종자(種子)의 문제이지, 품질이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에요.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는 구원을 받은 것이 맞지만 수준론 적으로는 미진하니 성령의 충만으로 점점 나아져야 한다고 해요.

이건 마치 강아지가 점점 더 온전한 강아지로 변하라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최선을 다 하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은 ‘아버지가 온전한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어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어요.

몇 퍼센트 온전하고 거룩해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같이 온전하라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고발하기 위함이지 우리 열심을 끄집어내기 위함이 아니에요.

성경은 우리의 가능성을 묵사발을 내요.

넌 꺼져! 그런다구요.

 

‘하나님 같이 온전하라!’

‘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말은 하나님과 비교해 보라는 말이지 하나님 같이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는 온전치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라고 한 것입니다.

죄를 더욱 더 드러나게 하려고 온전하고 거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가 가까이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알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화주의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고 해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 이런 해석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인간입장에서는 인간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으니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지요.

온전해 질 수가 없겠지요.

죄를 이기지 못하겠지요.

죄를 이기지 못하면 죽음을 이겨낼 수가 없잖아요.

그럼 자유의지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지요.

 

자유의지를 말하면 반드시 내 책임을 동반하게 되어요.

흔히들 예를 들어 말하는 레퍼토리가 내가 교회에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한발 더 나아가서 내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결단을 요구받게 됩니다.

 

연말연시 송구영신 예배 때가 되면 지나간 해는 잊어버리고 오는 새해엔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산상 기도를 가곤 하잖아요.

저도 과거엔 송구영신 예배가 끝나면 온 교인들을 이끌고 기도원으로 가서 산 기도를 하였어요.

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말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면서 옛 것을 뜯어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웃겨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자기 꼬라지 뜯어 고치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요.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습니다 라고 하여야 하잖아요.

그래야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새로운 피조물이지요.

 

그런데 그런 말을 못해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여러분 올해는 각오를 새롭게 합시다! 라고 해요.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어요.

그러니 전부 모순이지요.

 

그 땐 이 모순도 몰랐어요.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아주 무식하게 용감했어요.

 

12월 31일 자정만 되면 촛불 예배드린다고 쑈를 했어요.

연말연시만 되면 헌 공책 버리고 새 공책 받는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한 학년이 올라가면 낙서로 얼룩진 헌 노트를 버리고 새 노트로 이젠 깨끗하게 사용하여야지 다짐하는 것과 같이 하였어요.

 

지난해의 헌 노트는 다 버리고 이제 새해의 새 노트에 우리의 신앙을 써갑시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갑디까?

얼마안가요.

도로아비타불이에요.

 

선교단체에선 흔히 영접기도를 하라고 하지요.

예수를 영접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잖아요.

‘마음 문 열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은혜를 받으세요!’

‘축복을 받으세요!’

‘성령의 은사를 받으세요!’ 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부 모순적인 말들이에요.

 

구원이니!

은혜니!

축복이니!

은사니! 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에요.

 

이런 것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노력으로 따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받아 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교인들의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강단에다가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플랜 카드를 붙여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마귀의 소린인데 말이죠.

얼마나 무식합니까?

 

목사들이 무식하면 교인들이라고 똑똑해서 목사가 미친 짓을 하면 목사님 그건 아니잖아요 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왜 그런가 하면 교인들이 소경이기 때문이에요.

목사도 소경이고 교인들도 소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일컬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하여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어요.

 

영적 소경들이 인본주의 성화주의 신앙을 낳았어요.

성화주의의 바탕은 자유의지가 깔려 있어요.

열심히 예수를 닮으라고 하니 성화한다고 난리인 것입니다.

속은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 거룩 거룩 하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놈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속은 송장이 썩은 것처럼 썩어서 냄새가 풀풀 나는데 겉은 잔디를 입혀놓으니 사람들이 속아서 그 위에서 도시락도 까먹고 노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선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바리새인들이 되어가요.

특히 목사나 장로들 보세요.

거룩 그러면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잖아요.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입만 열면 주여! 믿습니다! 그러고 있잖아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폼을 보세요.

눈을 지그시 감고 말끝마다

주여!

아버지!

아멘!

할렐루야! 하잖아요.

 

기도를 해도 가만있지 않고 몸을 전후로 흔들든지 아니면 좌우로 흔들든지 하잖아요.

아주 적당하게 시계불알처럼 흔들잖아요.

그리곤 입으로는 쉬잇~ 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해 가면서

주여! 아버지! 하면서 무슨 성령의 바람이 임하는 것처럼 하잖아요.

 

저도 과거에 이런 짖을 자동으로 했어요.

그냥 예배당 의자에 앉으면 자동으로 좌우로 움직였다니까요.

입만 열면 주여!

아버지!

아멘!

할렐루야! 는 달고 살았어요.

목사님 설교 들으면 자동으로 주여!~ 아버지~ 아멘이 나왔어요.

 

그도 그럴 것이 교회에서 급수가 높다고 하는 인간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이러고 있으니 나도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고 배운 도적질이 그건데요.

그러니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긴 너나 나나 마찬가지에요.

처음 온 교인들만 순진해서 몰라요.

이 종교적 위선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순진한 교인들이 주여! 아버지! 아멘! 할렐루야! 하는 소리가 얼마나 거룩하게 보이는데요.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기도하면서 쉬잇~ 쉬 하는 것이 얼마나 도사 같은데요.

일단 폼에 압도당하잖아요.

주여!~ 하는 소리에 그만 꼬르르륵 넘어가요.

 

야!~ 어쩜 저렇게 멋있냐!

야! 우리 목사님! 대단하다!

야! 우리 장로님! 대단하네!

어쩜 저렇게 믿음이 좋을까!

어쩜 저렇게 천사 같을까!

그래서 목사님 장로님 하잖아요.

 

믿음 좋아하시네!

천사는 개뿔!

한번 성질을 돋구어 보세요.

자존심 상하게 해 보세요.

미친개가 되어요.

 

거룩하긴 개뿔이 거룩해요.

속은 수챗구멍인데!

냄새 풀풀 나는 하수구란 말입니다.

 

배운 것이 위선 뿐이니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왜 이런 위선을 떠는가 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안 믿어지니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믿음이 좋은 척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런지 몰라도 전 그렇게 살았어요.

 

인간이란 묘해서 인간에게 가능성을 주어야지 움직여요.

무시해 보세요.

가만있어요.

움직이지 않아요.

날 잡아 잡수세요!

돌부처처럼 꼼짝하지 않아요.

자기가 뭘 해야 신이 나고 재미가 있는데 가만있으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르쳐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인간은 죄인이에요.

어떤 죄인이냐 하면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죄인이에요.

자기 필요에 따라서 선을 내 놓기도 하고, 악을 내어 놓기도 해요.

 

이러면 죄인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요.

자기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어요.

이런 의지로 교회 갈 수도 있고 안 갈수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성경은 이런 선악의 구조 자체를 죄라고 규정해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도 죄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선 자유의지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백날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선하게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선 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유의지대로 삽시다!

그러면 그렇게 사세요.

하지만 그 자유의지대로 산 그것도 하나님 앞에선 죄입니다! 라고 말해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선이고 의란?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해 주세요.

 

예수님 피에다 뭘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놈은 이단이에요.

요한계시록에서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하였잖아요.

더하거나 빼는 놈은 지옥 불에 집어넣는다고 하였어요.

 

제발 골동품처럼 그대로 두세요.

죄인입니까?

그럼 죄인으로 있으세요.

애써 의인이 되고자 하지 마세요.

 

왜 자꾸만 의인이 되고자 합니까?

의인 되어서 자기자랑 하고자 합니까?

그러면 안 되어요.

 

우리 몸에서 예수님 자랑거리가 나타나야지 예수 믿는 내가 자랑되어지면 안 됩니다.

그건 반칙이에요.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구원했는데 자기를 자랑하면 어찌합니까!

 

성도에겐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그럼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으킨 사건이 도대체 뭔지를 알아야지요.

하나님이 성도에게 일으킨 사건이 뭔가 하면 예수님 피를 뿌려 놓았어요.

예수님 피로 화장을 해 놓았어요.

 

오늘 본문이 뭡니까?

술람미의 아름다움이잖아요.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편의상 화장을 했다고 합시다.

 

술람미의 화장을 누가 했습니까?

솔로몬이 했지요.

 

눈 라식 수술도 해 주고!

머리카락을 파마도 하고!

입술에 립스틱도 짙게 발라주고!

볼에 색조화장도 해 주었어요.

 

모두 솔로몬의 취향에 맞게 하였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술람미를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미용사가 신부화장을 해 주듯이 해 주었어요.

술람미는 가만히 있었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해 준 화장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을 최고로 대접하는 것이고 예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술람미의 신체 각 부분을 칭찬하는 것은 곧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준 것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술람미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려지더라도 그건 술람미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에요.

술람미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솔로몬이 준 것이지요.

그러니 술람미를 닮읍시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아가서의 중심 사상은 솔로몬의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술람미를 본받자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 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 왕이 사랑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랑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술람미의 이목구비(耳目口鼻) 하나 하나를 칭찬 할 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 해요.

우리의 신앙으로 말하면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을 주셨구나!

내가 받은 것이 이런 것이지!

내가 지금 소유한 것이 모두가 주님의 것이지! 라는 마음으로 보아야 해요.

 

 

그럼 지금부터 솔로몬이 술람미를 칭찬하는 모습을 살펴봅시다.

 

먼저 눈을 봅시다.

 

아 4: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술람미의 눈은 너울 속에 있는 비둘기 눈이라고 합니다.

너울은 면사포에요.

면사포는 신랑만이 벗길 수 있어요.

 

술람미가 면사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너머에 비둘기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하나의 사물만 본다고 합니다.

비둘기 눈에는 자기 짝만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까 술람미 눈에는 자기의 면사포를 벗겨줄 신랑인 솔로몬만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술람미가 솔로몬을 바라보는데 눈에서 하트가 뽕뽕 나오는 것입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 모습을 보니까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네 눈은 너울 속의 비둘기 눈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술람미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 솔로몬만 보였어요.

오로지 솔로몬만 바라보고 살아 왔어요.

마치 이은미가 부른 ‘애인 있어요’ 의 가사처럼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여요 나만 볼 수 있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술람미는 솔로몬 하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었을까요?이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만 사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솔로몬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하지요.

늙은이에게 가장 큰 꿈은 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장막을 벗을 날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갖게 되니 세상에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사랑을 받게 되어요.

 

술람미도 이런 사랑을 받았어요.

세상에선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에요.

그러니 술람미 눈에는 오직 솔로몬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둘이 될 수 없어요.

그러므로 술람미가 솔로몬만 바라보는 그 눈은 솔로몬이 준 눈이에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솔로몬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눈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솔로몬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술람미의 모습이 마치 비둘기가 자기 짝만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울 속에 감추어진 비둘기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눈은 하나님이 주셨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는 눈을 받은 것을 감사하란 말입니다.

 

어제 밤에 회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어요.

거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내용이 나와요.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은 이단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우상숭배자로 보아요.

 

우리는 이방인임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어요.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우상숭배자로 보는데 우리는 메시야로 보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 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것을 의심없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 눈에 십자가만 보인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이는 하나님이 십자가만 보라고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이 오직 십자가 이외는 보이지 않게 해 주셔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오직 예수 외는 보이지 않더라고 하지요.

그건 하나님이 오직 예수 이외는 보이지 않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비둘기 눈을 받았어요.

비둘기 눈을 받고 보니 바울의 눈엔 오직 예수님 밖에 뵈는 게 없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다고 합니다.

 

아 4:1절.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길르앗 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산인데 그 기슭에 넓은 초원이 있어요.

목동들이 이곳에 양과 염소를 풀어 놓고서 방목을 하였어요.

이곳에 방목이 되는 염소들은 검고 힘이 좋아서 달릴 때 보면 그 털이 깃이 되어서 펄럭였어요.

그 모습이 너무도 멋진 것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의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절대 순종하고 헌신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자기 영광의 상징이에요.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른다는 것은 권세 아래 있다는 표시에요.

이는 곧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표시에요.

 

이게 나실인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나실인은 머리를 길게 기르게 한 것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 된 자 즉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란 말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말과 나사렛은 그 뜻이 같아요.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실인이라는 뜻이에요.

 

술람미가 나실인처럼 머리를 길게 길렀다는 것은 솔로몬에게 바쳐졌고 온전히 순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순종은 강요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종케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을 받게 되면 자연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있어요.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씻긴 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에요.

마리아가 긴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은 나실인과 같이 절대 순종을 보여주고 있어요.

어떻게 마리아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너무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사랑을 받은 자가 토해내는 순종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귀를 뚫은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근본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지를 알아가는 것으로 두고 있어야 하겠지요.

일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어야 해요.

은혜가 나로 하여금 뭔가 하게 하여야 올바른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끼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고자 하는 순종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순종하는 그 순종도 솔로몬의 사랑으로 기인 된 것이므로 솔로몬이 준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긴 머리카락을 보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순종하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 를 칭찬합니다.

 

아 4:2절. “네 이(齒)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직역을 하면 ‘네 이는 털을 깎으려고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나온 암양 떼 같이 희고 윗니 아랫니가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가지런하고 완벽하구나!’ 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흰 양을 양털을 깍기 전에 목욕을 시켰어요.

또한 제물로 드리기 전에도 목욕을 시켰어요.

제물로 드리기 전에 사흘 동안 잘 보관해서 털도 손질을 하였어요.

제물로 바쳐지는 날이면 깨끗하게 목욕을 시켰어요.

그럼 흰 털의 모습이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이가 그렇게 빛이 난 것입니다.

이는 건강의 바로비터에요.

영화에 보면 노예들을 사고 필 때 보면 노예의 입을 벌려서 살펴보지요.

이는 이빨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가 돌도 씹어 먹을 만치 건강해야 노예로서 일을 소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씹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니 이가 건강하다는 것은 단단한 음식을 잘 씹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어린아이가 먹는 젖이 있고 장성한 자가 먹는 단단한 음식이 있어요.

어린 아이가 먹은 젓은 율법이고 장성한 자가 먹는 단단한 음식은 은혜에요.

 

율법 신앙은 감정 기복이 심해요.

미친 여자 널뛰듯이 해요.

율법 신앙은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어린아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듬직해요.

요동치 않아요.

은혜를 받아야 정성한 자가 되어서 시험 들지 않고 교회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가 좋다는 것은 장성한 자가 먹는 단단한 음식을 소화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양식이라고 합니다.

술람미가 먹는 양식은 솔로몬의 약속입니다.

술람미의 이가 건강하다는 것은 곧 솔로몬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노예와 같은 천민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이 지방 나들이 때 만났어요.

왕조 시대에서는 왕이 한 여인을 취하는 것은 비일비재 했어요.

그러니 술람미도 솔로몬의 여행 중에 피로를 풀기 위한 하룻밤 노리갯감 일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그 하룻밤의 사랑으로 주신 약속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솔로몬의 약속이 얼마든지 공수표로 들릴 수가 있지만 술람미는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았어요.

만약에 술람미가 자기 꼬라지로 솔로몬의 약속을 판단했다면 지금까지 믿고 기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도 자기 주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왕이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하여도 그냥 빈말로 들을 수 있단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대로 자기 꼬라지를 보면 왕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온갖 조소와 비아냥거림과 숱한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솔로몬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살았어요.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수많은 시험거리들이 밀려옵니다.

이럴 때 시험을 이기는 것은 말씀이에요.

자신이 말씀으로 든든히 서 있지 않으면 실족을 하게 되어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문의를 했어요.

어느 목사님 설교를 좀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제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을 한다고 해서 본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아무리 그 분의 설교가 옳다 그르다고 판단해 준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는 판단 할 몫은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판단하지 못하면 제가 아무리 판단을 해 주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판단하지 않고 누가 판단해 주는 것으로 판단을 하게 되면 “카더라 통신” 밖에 안 되어요.

 

“카더라” 통신이 뭔지 아세요.

자기는 모르면서 누가 그렇다고 하더라!

예를 들어서 제가 누구를 판단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정낙원 목사가 그러는데 그 목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는 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건 제 판단이지 그 분의 판단이 아니에요.

제가 비록 판단을 해 달라고 하는 목사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본인이 그 목사님이 왜? 이단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 말을 맹종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린아이에요.

 

어린아이란? 분별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이 되면 사람을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카더라 통신에 빠져서 야~ 정낙원 목사가 그러는데 그 목사는 복음을 모른다더라! 고 앵무새처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신 분은 말씀을 들어 보면 알아요.

성령이 분별하고 걸러 주세요.

그러니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남이 다 저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제 안에 성령이 넌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고 한다면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이걸 요한일서에서는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온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러니 남의 판단에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온전한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니 옆에서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하여도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남에게 판단 받을 이유도 없어요.

자기 신앙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아요.

그러니 누구에게 확인받고자 하지 마세요.

 

신앙은 스스로 확인하여야지 어느 목사에게 확인 받고자 하지 마세요.

확인 해 줄 목사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목사도 판단 받을 자이지 남을 판단 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은 맞다고 하여도 그건 어디까지나 제 판단이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에요.

 

제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전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전합니까?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따지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자기 의견을 내어 놓으면 되어요.

 

제가 아가서를 설교 하면서도 전 이렇게 은혜를 받아요.

제가 틀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이렇게 깨닫고 은혜를 받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 설교는 너무 주관적이세요! 라고 말할 수 있어요.

맞아요.

설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성경은 객관적 진리에요.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말해요.

예수 이야기이에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이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에요.

이것을 각 사람마다 깨닫는 것이 달라요.

받아들이는 믿음이 달라요.

각자 깨달아지는 것만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주관적 진리인 것입니다.

 

모든 목사는 주관적으로 설교해요.

이는 각자 깨닫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에요.

 

목사는 증거자에요.

그럼 어떻게 증거자가 됩니까?

성령의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에 계셨어요.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게세요.

 

우린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성경을 통하여서 믿을 뿐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보지 못한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 것처럼 증거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성령이세요.

한 성령 안에 있으면 아멘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노멘이 되겠지요.

 

각자가 받은 믿음의 패를 내 보이세요.

그러면 같은 믿음을 받은 사람은 서로 통할 것이고 다른 믿음이면 안 통하겠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고 헤어지면 되어요.

바락 바락 싸울 필요가 없어요.

변론 할 필요도 없어요.

신앙은 변론해서 굴복당하지 않아요.

그래서 변론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맞으면 듣고 안 맞으면 안 들으면 되어요.

목사에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떠난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싫다고 간다는 데야 누가 말려요.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교인을 자기 소유화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양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자기가 그 양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으면서 왜 성도가 자기 양이라고 합니까.

 

성도를 위해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세요.

예수님만 선한 목자세요.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양이에요.

예수님이 알아서 이러 저리 옮겨요.

 

그러니 교인이 왔다가 간다 하여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 놀다가 갔구나! 그래야지!

그렇지 않고 너 두고 보자 그러면 안 되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런 생각을 하면 자기 마음만 상해요.

저도 과거엔 이런 시험에 든 적이 있어요.

복음을 깨닫고 보니 제가 압살롬인 것을 알았어요.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놈이에요.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왕에게로 향하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가 중간에 가로챈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하여야 할 목사가 도리어 자기에게 붙잡아 두고 자기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보니 제가 도적놈이고 사기꾼이었음을 안 것입니다.

 

목사는 중매쟁이에요.

성도를 예수님에게 중매하는 자에요.

그러니 목사는 복음만 전하면 되어요.

그 후에 일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전 이젠 교인들이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신경 안 써요.

무관심하다는 말이 아니고 오고 가는 것에 의미를 안 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을 믿지 않아요.

언제든지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있는 시간에 죄를 고발하자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살펴가면서 해요.

하지만 눈치 보고 타협하지 않아요.

 

교인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장기판에 졸처럼 옮기시는데 누가 말립니까?

교인 없으면 교회 문 닫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편해요.

교인들 눈치 볼 필요도 없구요.

 

교인이 있든 없든 내가 복음 안에서 자유하면 되잖아요.

누가 나를 이단이라고 하든 말든 내가 십자가 피가 기쁜 소식으로 갖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니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이 주셨어요.

제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배짱을 주세요.

마치 술람미에게 어떤 음식이라도 꽉꽉 씹어서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이빨을 준 것처럼 하나님이 저에게 믿음을 주셨어요.

그러니 흔들리지 않고 담대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의 이빨을 칭찬하고 있지요.

이빨은 말씀을 잘 분별하여서 씹어 먹고 소화하는 능력이에요.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수많은 말을 들었어요.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언감생심 어디 왕을 넘보느냐!

넘 볼걸 넘보아야지!

노예 주제에 어딜 왕을 넘보느냐고 수많은 비웃음을 당하였어요.

자기 주제도 모른채 왕을 사랑한다고 핀잔을 들었어요.

 

하지만 술람미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든든한 이빨처럼 솔로몬의 약속을 굳게 씹어서 소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찰떡같이 믿은 것입니다.

이 찰떡같은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건 솔로몬이 다시 데리러 온다는 약속을 농담으로 듣지 않고 사실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확고한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에요.

 

이는 솔로몬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굳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장성한 사람처럼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단단한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는 이빨은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 술람미의 이러한 믿음은 어디서 났을까요?

이는 모두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준 사랑이 아니면 이 믿음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은 자기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술람미가 예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지요.

술람미에게 믿음이 없었으면 솔로몬이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술람미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넌 어쩜 그렇게 이빨도 튼튼하냐 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번엔 입술과 입과 뺨을 살펴봅시다.

 

아 4:3절.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이건 마치 여자들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것과 같아요.

입술이 홍색 실 같다는 말은 붉은 줄과 같단 말입니다.

홍색 실은 속죄와 관계되어 있어요.

 

홍색 실은 제사장의 에봇을 만들 때 사용하였어요.

또 성막의 앙장을 만들 때도 사용했어요.

특히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을 할 때 피를 뿌리는 데 사용하였어요.

 

입술이란? 말을 하는 문(門)이에요.

그렇다면 술람미의 입술이 홍색실과 같이 빨갛다는 말은 술람미의 입에서는 구속의 말만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입만 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랬지요.

자기는 오직 예수님의 십지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술람미에게 구속의 말은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이여기입니다.

술람미는 누가 어떻게 왕을 사랑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 자신이 사랑받는 것은 솔로몬의 희생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천한 종을 사랑해준 솔로몬의 낮아지심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뺨이 석류 같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석류 같은 뺨은 내면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석류는 익으면서 그 속에 빨간 알갱이를 터트립니다.

 

술람미의 얼굴에는 기쁨이 철철 넘치는 것입니다.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감추지 못하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찬송하는 술람미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찬송을 제사라고 하고 입술의 열매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술람미의 붉은 색 입술과 붉게 물든 뺨은 신약적인 의미로 본다면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찬미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다시 말합니다.

정 목사 당신은 왜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합니까? 라고 따지지 마세요.

전 그렇게 은혜 받아요.

 

아가서는 복음을 전부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은유와 상징을 역으로 복음적으로 이렇게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알레고리 라고 시비를 겁니다.

 

알레고리란? 상징을 해석하는 하나의 성경 해석법이에요.

바울이 사라와 하갈을 갈라디아서에서 시내 산 언약과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해석을 했어요.

이게 알레고리에요.

바울의 알레고리 해석을 시비 삼지 않아요.

 

알레고리 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이 아니고 복음적으로 풀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단들처럼 비유와 상징을 자기 집단이나 인물로 풀면 악한 것이 되어요.

예를 들어서 신천지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고 하면서 보혜사를 “그” 라고 했다고 하여서 “그” 란 한 인물을 말하는데 “그” 가 바로 이만희라는 식으로 풀면 이단인 것입니다.

 

은유와 상징을 복음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나 비 복음적인 것으로 풀면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복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장려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아가서를 설교하면서 기존에 주석과 목사님들의 강해 집을 참고하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다만 기존에 목사님들은 은유와 상징을 술람미를 닮자! 라는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유를 해석하는 부분은 많은 부분은 공감을 해요.

 

이번은 술람미의 목을 봅시다.

 

아 4:4절.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술람미의 목은 마치 무기를 보관하는 망대와 같다고 합니다.

다윗은 전리품으로 얻은 무기를 높은 망대에 보관하였어요.

전리품은 싸움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술람미는 싸움에서 얻은 것들을 잘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싸웠습니까?

솔로몬이 싸웠어요.

술람미가 얻은 사랑은 솔로몬이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주어진 사랑이에요.

황실에서는 왕이 근본도 모르는 천출을 사랑한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더군다나 황후 자리를 준다는 것은 더 더욱 안 되는 일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 했어요.

 

왕궁에는 엄연히 왕후가 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를 왕후로 세웠어요.

그러니 얼마나 극심한 반대가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솔로몬이 술람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어미도 왕후가 아니고 비빈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빈은 정실부인이 아니고 첩이란 말입니다.

 

솔로몬의 어미 밧세바도 신하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다윗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냈어요.

이처럼 술람미가 받은 사랑도 밧세바가 다윗 왕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과 같았듯이 자신도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얻은 전리품이에요.

 

그런 사랑을 잘 지켜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솔로몬이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술람미가 얻은 사랑은 솔로몬이 지켜준 것입니다.

 

술람미가 얻은 전리품과 같은 사랑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황실의 법도를 어겨가면서까지 신하들과 싸워서 얻어낸 사랑을 술람미가 잘 간직하고 있으니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지켜낸 사랑을 다윗의 망대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구원도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온갖 핍박 속에서 싸워서 십자가로 승리하고서 주어진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싸워서 술람미에게 준 사랑과 같아요.

우린 이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싸워서 얻어낸 것이에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건져 주었어요.

그런데 어찌 다시 천한 초등학문인 율법으로 돌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어요.

 

이걸 지키라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다윗의 망대와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싸워서 이긴 전리품인 구원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의 피를 사수하는 것도 예수님의 피가 저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 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긋지긋한 율법에서 건져 주셨어요.

 

그러니 어찌 십자가 피를 사수하지 않겠어요.

온갖 비아냥거림과 이단소리 들어가면서 십자가를 사수하는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 오직 십자가만 붙잡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지요.

 

이제 두 유방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아 4:5절.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유방은 젖을 머금고 있는 기관입니다.

술람미의 유방은 젖으로 가득차 있어요.

얼마나 많이 차 있었으면 노루가 쌍둥이를 배어서 배가 부른 것과 같다고 했겠어요.

 

젖은 말씀을 상징해요.

술람미는 남에게 나누어줄 풍성한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달음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란 다름 아닌 솔로몬의 약속인 것입니다.

 

두 유방은 두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은혜 또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제자는 서기관처럼 옛 것과 새 것을 곳간에서 마음대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 13: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옛 언약이 없는 새 언약은 없어요.

새 언약이 새 언약으로서 빛을 발하려면 옛 언약이 있어야 해요.

그러므로 새 언약 아래서도 옛 언약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고 살아서 그 역할을 하고 있어요.

 

율법을 모르면 은혜를 몰라요.

율법을 통하여서 죄를 깨달아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왜 복음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에요.

신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말씀이에요.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낱낱이 까발려서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요.

그러므로 난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어 그러면 안 되어요.

여인에게는 두 유방이 있어야 하듯이 성도에게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신앙이 함께 있어야 해요.

 

율법은 우리 육신이 살아 있는 한 항상 함께 해요.

우리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하니까요.

성도는 율법적 요구로부터는 자유하지만 율법이 지적하는 것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술람미는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서 솔로몬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술람미의 모습이 솔로몬에게는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칭찬하는 것은 술람미 속에 자신의 것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상의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우린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어요.

그럼 우리도 술람미처럼 예수님이 주신 피를 손상하지 말아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려 놓은 흔적을 지우지 마세요.

포도주처럼 물이 섞이지 않도록 하세요.

부디 골동품 신앙으로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새겨 놓은 것이 흐려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몸에 예수님의 피 이외 다른 것이 발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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