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만유의 주가 하는 일 (창 41:32-57)
-.정낙원 목사
오늘은 요셉이 만유의 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만유의 주가 되는 모습 속에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란? 온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합니다.
주인이란? 나를 만드신 분입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가 본말을 전도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말이 전도가 된 것을 바로 잡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성도의 구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가 만물을 만드셨고,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으며,
종국에는 주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부터 나와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다가,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을 그가 창조하였다고 하지요.
또한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필요해서 만들었고,
예수님의 필요로 사용하시다가,
예수님이 다 사용하시고 나면 하늘나라 창고에 보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만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존재하다가 예수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 가운데 예수님이 충만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만물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만물을 창조하였을까요?
이는 만물을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가지고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 안에서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만물이 그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없이도 존재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 예수님이 있으면 존재하는 의미가 있지만,
내 인생에 예수님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티끌이라고 합니다.
흙이라고 합니다.
흙 속에 예수가 심겨지면 사람이 됩니다.
예수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흙입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산 자라고 하고,
예수 밖에 있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합니다.
죽은 자는 수에 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을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는데,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하고,
짐승은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하늘로 올라가고,
예수의 생명의 없는 자는 땅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천국에 간다고 하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말은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뭐냐?
짐승이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된 자들은 예수를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을 삶에 가치로 두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의 양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의 꿈대로 칠년 풍년이 온 후에 칠년 흉년이 옵니다.
흉년이 오자 풍년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기근 앞에서 죽어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요셉이 양식을 줍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는 자는 살고,
요셉의 양식을 먹지 않은 자는 다 죽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의 양식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았지만,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먹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온 산 떡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근 속에서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나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받게 되는데,
알다시피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 아닙니까?
그럼 구약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시간적 사관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시간적 사관으로 이해를 하니까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계신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에는 예수님이 안 계셨는데 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이것은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존재한다는 말은 영생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항상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니까 구약에도 계시고 신약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일컬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분이라고 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이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서 6장을 봅시다.
히 6:1-7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축복을 하였습니다.
축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위란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존재케 한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 할 수 있는 분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럼 멜기세덱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니까 아브라함을 축복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이는 멜기세덱은 살렘 나라의 왕으로서 의를 주시는 왕이고 평강을 주시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의를 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의를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렘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평화의 나라는 천국을 말합니다.
천국의 왕이라는 말은 천국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난 후 감추어졌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 여호와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구약의 여호와가 바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말씀이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마당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시니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7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합니다.
이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신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여호와가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약적인 관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일컬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일컬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셨으니까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인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가현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말씀 하시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도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 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구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방법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틀린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따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을 봅시다.
출 2:23-25절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먼저 언약을 심어 놓습니다.
그리곤 애굽이라는 나라로 보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정한 때까지 애굽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권념하셨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을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해 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만 구원하십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는 것을 구약에서는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출애굽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건 시청각 교제 입니다.
죄와 사람으로부터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즐거워했나요?
이는 아브라함도 예수님에 의해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죽으면 열조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품에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하실 때 아브라함 품에 있는 것으로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육신을 입고 사람들 앞에 가현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진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를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다고 합니다.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예수님의 백성들을 죽음에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자들이 일어나서 예수님이 부활 하시고 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아브라함 품에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덤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 가두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덤에 가두어진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이 다 해결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무덤이 더 이상 예수님의 백성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값이 다 치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 죽으시자 무덤이 사망으로 붙잡고 있던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인 아브라함 후손들을 다 뱉어내고 만 것입니다.
무덤에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로가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지는 재앙을 당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을 다 애굽에서 나가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은 죽음을 상징하는 애굽 땅에 더 붙잡아 둘 수가 없기 때문에 다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면서 우리의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 후손들처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창세전 언약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후손들을 “이렇게 구원을 해 내시는구나” 로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은 나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모든 성경은 나의 구원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을 그림자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은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제사로는 온전해지지 않고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기근 속에서 그의 형제들을 살려 내는 이야기도 작은 섹션으로 나누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왜 구원을 합니까?
이는 주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란?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보살피고 도와주는 개념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살아난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로 살아난 자들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미는 그 은혜를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찬미는 깨달음의 열매입니다.
깨달음이 찬미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끝자락에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찬미를 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 먼저 고난에 던져졌다가 다시 되찾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근 뒤에 양식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근은 양식을 가진 자 즉 양식을 주는 분을 찾아가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배부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배고픔을 주는 것입니다.
배부름으로 있을 때는 양식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양식의 소중함은 배고픔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고픔이 얼마나 큰 아픔인가를 알게 하려고 먼저 배부름을 주신 것입니다.
배부름은 배고픔을 알게 하려는 미끼입니다.
배부름으로 있을 때는 요셉을 찾지 않았습니다.
배부름으로 있다가 배고픔을 당하니까 배부름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배부름으로 있을 때는 배부름이 복인 줄을 몰랐습니다.
배부름이 복이라는 것은 배고픔 아래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배부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배고픔을 주십니다.
그러자 양식 가진 자를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식은 양식을 먹어본 자들만이 찾아 갑니다.
양식을 먹어보지 않은 자들은 양식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식 가진 자를 찾게 하시려고 먼저 배부름을 주셨다가 양식을 끊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양식이 끊어지고 나니까 양식을 가진 자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양식 가진 자를 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쁘고 감사함으로 말이에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리면서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요셉을 어떻게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어떻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기쁨으로 드리면서 감사하는지를 알아보십시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듣고서 방책을 알려 줍니다.
바로가 꾼 꿈은 칠년 풍년이 오고 난 후에 칠년 흉년이 오는 것입니다.
그레서 요셉이 기근 때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요셉을 바로 왕에게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서 풍년 기간 동안 오분의 일을 거두어서 창고에 보관하라고 합니다.
풍년 기간에는 수확이 많으므로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라고 하여도 넉넉하니까 백성들의 반발이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분의 일씩 칠년 풍년 기간 동안 곡간에 모아두었다가 칠년 기근이 당할 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도 굶어 죽지 않고 다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의 말을 가만히 듣고 보니까 그럴듯한 것입니다.
모두 좋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디 가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얻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요셉을 애굽에 치리자로 세웁니다.
38-43절을 보세요.
창 41:38-43절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바로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합니다.
총리란? 임금에게는 백성을 대신하는 자로 서 있고, 백성들에게는 임금을 대신하는 자로 서 있습니다.
총리는 임금과 백성들 사이에 서 있는 중보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신약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기백성들을 연결해 주는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가지신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기의 인장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것은 임금의 권세를 이양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 목걸이를 주고, 자기가 타고 다니던 버금수레를 내어 주었습니다.
요셉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순찰을 하면 다 그 앞에 엎드려서 예를 갖추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공포하기를 누구라도 요셉을 욕하거나 모함을 하는 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이는 요셉이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므로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최고의 제사장 가문인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을 요셉에게 아내로 주고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 바네아” 라고 개명해 줍니다.
“사브낫 바네아” 라는 말은 두 가지 합성어입니다.
“사브낫”이라는 말은 “주다, 유지하다” 라는 뜻이고,
“바네아” 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둘을 합하면 “생명을 주는 자” 또는 “생명을 지켜주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요셉이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지켜주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생명을 주고 생명을 지키는 자라고 지어준 것은, 바로가 신하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입은 자라고 선포 한 것으로 보아서 신격화 한 모습인 것입니다.
요셉은 백성들 앞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요셉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요셉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온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는 주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유의 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主)란? 백성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을 말합니다.
주는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낸 자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근으로부터 살리심을 입은 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살려주신 분을 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바로 왕의 모습 속에는 두 가지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에게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를 준 것으로 볼 때는 바로 왕은 하나님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바로 역시 인간이고 죄인입니다.
바로 왕도 요셉이 준비한 양식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왕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가 자신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내어 놓은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자기 인생을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고 난 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교회에 내어 놓은 것은 바로가 요셉에게 모든 것은 위임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만 그런 것이 아니고 수많은 성도들이 서로 간의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구원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자신의 모든 재산과 같은 향유든 옥합을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12 사도를 위시하여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령 강림 이후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만난 사람들은 자기 삶을 예수님에게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예수님에게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증인이란? 예수를 증거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삶의 가치가 예수에게 올인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를 온전히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이 이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동참케 한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 보세요.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 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면서 말씀을 주고받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자세히 풀어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축사를 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제자들이 발걸음이 어떻게 되었나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걸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은 자기 삶을 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 것은 예수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못 만났을 때는 자기 삶을 살고자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자기 삶을 모두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에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가 자기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바친 것이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인 영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를 바로 만나면 삶의 자세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안에서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을 예수님을 위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에 모습입니다.
바로 왕은 요셉이 자신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서 자기 인생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을 한다는 것은 요셉의 자기의 인생을 콘트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자신은 왕이라는 명분만 있지 실제 왕은 요셉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왕은 스스로가 요셉을 주로 모시고 자기는 요셉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바로는 백성들에게 이 요셉이 바로 만유의 주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백성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된 사람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유의 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두 가지 받은 꿈이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봅시다.
창 37:6-11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꿈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을 묶고 있는데 요셉의 곡식단이 일어서고 형제들의 곡식단들이 요셉의 곡신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형제들이 요셉에게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네가 우리를 다스린다는 말이냐? 라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요셉이 꾼 꿈은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꿈을 듣고서 마음이 담아 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이고,
두 번째 꿈은 만유의 주가 되는 꿈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려면 집에 있으면 안 됩니다.
온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당시 온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려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기근이 들게 하고서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양식을 가진 자가 주(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양식을 얻었나요?
꿈을 해석해서입니다.
꿈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꿈을 통해서 얻어진 양식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유의 주입니다.
백성들은 요셉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아질 때 비로소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강도가 다릅니다.
이걸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면 조석으로 변하고 얼마 못갑니다.
우리 힘으로 하게 되면 사람들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누가 알아주면 하는 척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안 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들은 여일하지 못하고 업 다운이 심한 것입니다.
어떨 땐 하늘로라도 올라 갈 것 같다가도, 어떨 땐 날 잡아 잡수세요 라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시험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시험들 일이 없으니까 신앙이 늘 여일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왜 힘이 드느냐 하면 자기 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재미도 없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없으니까 구경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과 같습니다.
군중들은 호기심이 생기면 따르고 없으면 떠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교회에 오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안 옵니다.
신앙생활이 항상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볼 일이 우선이고 교회 생활은 나중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예배드리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고 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와도 불편한 것이 없고, 교회에 와도 편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떠납니다.
이 모두가 예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신앙생활을 대충대충 할 수가 없어요.
생명처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달란트 비유에서 가진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아 버리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예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 사람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살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비유했습니다.
왕은 고을 사람 모두에게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고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과 참석치 않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치 않은 사람들은 왕의 일보다 자기 일이 더 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잔치에 참석치 않은 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왜 그럽니까?
왕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왕의 관할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왕으로부터 은택을 입고 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왕이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이걸 아는 사람들은 왕의 초청에 응하였고 왕의 즐거움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모르는 자들은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왕과 자신을 별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왕이고 자기는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볼 일을 보러 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 밖에 거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들이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법으로 대하십니다.
죄인을 법으로 대하면 죽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왕이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군대를 보내서 진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왕이 고을 백성들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은 왕을 주(主)로 모시고 사는 자와 아닌 자들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왕을 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은 잔치에 참석을 하고,
왕을 주로 모시지 않는 자들은 잔치에 참석치 않은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자이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요셉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요셉에게 감사 할 것이고,
요셉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요셉에게 감사치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신앙 얼굴입니다.
기근 속에서 먹는 양식이 누구의 것인가요?
요셉이 준비한 양식입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 양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럼 요셉이 준비한 양식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온 애굽을 순찰하면서 풍년 때는 양식을 창고에 들이고 기근 때는 양식을 창고에서 풀어서 백성들을 살려내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린 백성들에게 먹인 사건은 요셉이 기근 속에서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어서 살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죽게 된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생명과가 양식인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생명과는 영생을 주는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인류의 생명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식인 것입니다.
이를 최후의 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알려 주셨습니다.
요셉의 양식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양식입니다.
요셉이 순찰을 하면서 기근 당한 자들에게 양식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기근 당한 백성들에게 자기 몸을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만유의 주는 자기 백성들을 돌보는 자리에요.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서 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언자로 중간에 서서 아버지 앞에서 변호를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롬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한1서에서는,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대언자가 되어서 중보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로마서에서는,
누가 우리의 잘못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소를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 할 때 예수님의 공로를 앞세우고 당담하게 나아가도록 도우신다고 합니다.
잘 보시면 우리를 돕는 것이 다릅니다.
요한1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살 때 도우시는 것이고,
로마서에서는 누가 우리를 참소하면 변호해 주시는 것이고,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낙심하고 있을 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만유의 주로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공의의 하나님이에요
자기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 할 때에는 법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의가 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성도의 죄를 가지고 참소하면 하나님은 추궁을 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 가운데서도 멀쩡히 살고 있는 것도 전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매를 맞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잘 보시면 우리의 자리에 그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이신 예수님 때문에 면죄를 받고 있는 것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건 기근을 당한 자들이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6-11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만유의 주는 자기 백성들 위하여 대신 죽어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만유의 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형제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음에도 그들을 용서하고 기근으로부터 살려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은 자는 요셉을 주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과 그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주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자신들이 요셉의 양식으로 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살아난 자들만이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살아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24장로들이 자신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어린 양에게 던지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찬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찬송을 감사의 표현입니다.
기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산 자만이 찬송 할 수가 있어요.
죽은 자는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찬송은 예수님의 양식을 먹은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된 앉은뱅이입니다.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찬송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고 싶고 찬송도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중풍병자처럼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품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들 속에 있는 나사렛 예수를 앉은뱅이에게 줍니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먹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앉은뱅이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양식을 먹은 자들은 감사함으로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은 자는 반드시 일어나서 걷고 뛰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서 걷고 뛴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수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하던 입술이 감사로 바뀌게 되고,
죽은 신앙이 산 신앙으로 바뀌게 되고,
타율에 의해서 억지로 하던 것이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품은 사람은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먹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은 사람은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이던 말이 긍정적인 말로 바뀌고,
남을 험담하고 헐뜯던 말이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로 바뀌고,
불평 불만하던 입술이 감사하고 찬송하는 입술로 바뀌고,
땅에 말만 하던 사람이 하늘에 말을 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함으로 바뀌고,
움켜잡고 인색하던 사람이 손을 펴고 나누는 사람으로 바뀌고,
죽이는 일을 하던 사람이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이란? 살아나게 하는 양식이기도 하지만 살아가게 하는 양식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살아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양식으로 먹게 되어 있습니다.
산 사람이 떡을 찾듯이 예수로 살아난 사람은 예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살아난 사람은 예수를 먹고 예수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주가 되어서 다스려가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은 자들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찬송이어야 하고 감사이어야 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더욱 더 왕성해져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 안에 있던 예수를 앉은뱅이에게 나누어주어서 일어서고 걷고 뛰게 하여서 하나님을 찬송케 하였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품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주어서 중풍병자와 앉은뱅이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 걷고 뛰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들 속에 있는 생명의 기운들을 발산하여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로 전염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 열매는 예수를 양식으로 먹은 성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먹고 또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많이 먹고 예수로 충만하여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기운들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어집니다.
우린 땅의 음기를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양기를 먹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땅의 음기는 죽이는 기운이고,
하늘의 양기는 살리는 기운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나에게 음기가 발산이 되는지 양기가 발산이 되는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을 하고 있는지 불평의 말을 하고 있는지,
생명의 냄새를 풍기는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지 살펴보세요.
입술의 열매가 그 사람의 본질입니다.
시기와 분냄과 불평하는 음기를 내뿜으면 뱀의 말을 양식으로 먹고 있는 것이고,
감사와 찬송과 기쁨의 양기를 내뿜으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있는 것입니다.
먹은 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뱀의 말을 양식으로 먹으면 부정적이고 사납고 차갑고,
예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면 긍정적이고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산 자는 따뜻하고 죽은 자는 차갑습니다.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있나요?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나요?
예수를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가슴으로 믿는 것입니다.
삶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식이면 그림의 떡을 먹은 사람처럼 말쟁이가 되지만,
예수가 생명이면 실제로 떡을 먹은 사람처럼 배부름을 얻고 넉넉해집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배가 부릅니까?
배가 고픕니까?
진짜 젖을 먹고 있나요?아니면 공갈젓꼭지를 빨고 있나요?
지금은 말씀의 기근 때입니다.
외치는 자는 많지만 생명수는 없습니다.
홍수 속에 생수가 없듯이 수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마실 물이 없는 때입니다.
말씀을 잘 분별하여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이 마시고 있는 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처럼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토해내면 예수를 먹고 있는 성도이고,
뱀처럼 차가운 기운을 토해내면 마귀를 먹고 있는 교인들입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다릅니다.
교인은 신자가 아닙니다.
성도가 신자입니다.
교인은 세상에 속한 자이고,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교인은 뱀의 말을 양식으로 먹는 자들이고,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들입니다.
뱀의 말을 양식으로 먹는 자는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성도는 하늘이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떡으로 사는 자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마귀는 떡으로 살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뱀의 말을 양식으로 먹는 자는 소망을 땅에 두고 세상 가치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은 소망을 하늘에 두고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십시오.
예수의 양식을 먹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성도는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먹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권하여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양식으로 보내 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남은 인생이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예수로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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