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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70강. 어떤 꿈을 꾸고 사시나요? (창 40:1-23)

by coroa 2021. 9. 13.

 

 

70강. 어떤 꿈을 꾸고 사시나요? (창 40:1-23)

-.정낙원 목사

 

 

 

모든 성경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모든 세대 속에 일어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 주시려고 구약 마당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가지고 미리 예표 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간섭하시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는 신약의 성도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들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이 아닌 자들도 다스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국가 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 중에서 선한 자들도 있고, 악한 자들도 있습니다.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립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함께 살면 선한 자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악한 자들은 격리 조치를 합니다.

 

악한 자들을 격리한 공간을 감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처럼 죄인을 가두는 곳이 있습니다.

이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이 이들을 음부에 던졌다고 합니다.

그 음부를 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하나님 나라의 상대적인 곳을 말합니다.

이것이 천지 창조 속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죽은 땅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하니까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 낸 것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죄인이 쫓겨나서 살아가는 땅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범죄한 자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죄인들이 살아가는 땅을 무덤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무덤이고 감옥인 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 밖으로 격리를 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에덴동산은 선한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악한 자들이 살아가는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에덴동산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쫓겨남으로서 그 사명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쉬운 말로 에덴동산이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채워야 합니다.

어떻게 채우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구속주로 보내서 아담과 하와의 죄값을 대신 치루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여서 데려오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구원이 뭐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본래의 자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에덴동산(하나님 나라)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제사장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받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제사장으로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구약 이스라엘 속에 아론과 그 아들들을 가지고 보여주었습니다.

아론은 대 제사장이고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대 제사장이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난 자들인 성도들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에 계획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두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구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들을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셨습니다.

 

너희는 예수에게 속한 자이고,

저희는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는 하늘에서 살고,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는 땅에서 삽니다.

하늘을 천국이라고 하고, 땅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두 민족을 만드신 것을 토기장이 비유로 알려 주었습니다.

 

토기장이가 두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입니다.



두 그릇은 두 사람을 뜻합니다.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였고,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는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신앙은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예(아멘)”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아니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멘으로 화답을 하고,

불신자들은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의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일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필요에 의하여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지으신 분에게 항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는 왜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있느냐?

결코 그럴 순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진다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입장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음 받은 물건은 토기장이가 자기를 어떻게 사용하든지 토를 달아서는 안 됩니다.

토기장이가 사용하는 대로 군말 없이 사용되어지는 것이 토기장이에게는 영광인 것입니다.

국그릇에는 국을 담고 간장 그릇에는 간장을 담을 때 토기장이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릇은 토기장이가 사용하는 대로 말없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그릇이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면 누군 인삼 먹고 누군 무 먹느냐고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악이고 죄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행사 할 수 있는 고유 권한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으로 유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에게 너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법을 가지면 안 되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담겨 있는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선악과가 무슨 훈장님의 꿀단지라도 되어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피조물이 먹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아담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들의 벌거벗음이 수치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발가벗겨 놓은 거야? 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가벗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고 다니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였으면 옷을 해 입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발가벗고 살게 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대로 보존이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누군가가 손을 대서 원형을 망가지게 하면 화를 내십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쉬운 말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합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라는 동산에 좋아하는 꽃들로 심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발가벗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발가벗고 다니게 하신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좋아 보이지 않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치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악과는 아담에게 저주를 몰고 왔습니다.

왜 저주를 몰고 왔는가 하면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들 마음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노의 그릇을 만드니까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인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니까

그럼 에서가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 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에서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합니다.

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합니까?

이는 자기들 기준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들 기준에 안 맞으면 하나님도 죽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훗날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나도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는데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왜 아벨의 제사만 받느냐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 마땅하여서 반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가인을 향하여 죄가 가만히 숨어 있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아담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한 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함께 살면 계속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고 분가를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가 버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가 되어서 나온 아담은 이 세상에 자기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이 살아가는 나라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모두가 저주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 중에서 얼마를 하나님의 긍휼을 담을 그릇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세상에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일컬어 무덤이라고 합니다.

무덤을 다른 말로 감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감옥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 마당에서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옥 같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감옥 속에 있는 자기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이 모습을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서 하는 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감옥에 들여보낸 것은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감옥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어떻게 갈라내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옥에는 두 부류의 죄수가 있습니다.

동일한 죄수이지만 살 자와 죽을 자가 있습니다.

이를 두 꿈꾸는 자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5절을 봅시다.

 

창 40:1-5절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4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니까

그 속에 바로의 신하 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술 맡은 관원장이고,

다른 하나는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관원장이란? 왕을 보좌하면서 국정을 논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막강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를 모르지만 바로 왕에게 범죄하고 감옥에 가두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꿈이 각기 다릅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입니다.

 

9-11절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포도나무 꿈을 꾸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 포도를 따서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립니다.

 

요셉이 해몽합니다.

이 꿈은 길몽으로서 당신이 사흘 후에 복직이 되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후에 복직을 합니다.

 

이번에는 떡 맡은 관원장의 꿈입니다.

 

16-17절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은 흰 떡 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습니다.

광주리 속에는 바로에게 드리려고 각종 구운 식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바로에게 드리려던 음식들을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꿈은 사흘 후에 죽게 되는 흉몽이라고 해석합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사흘 후에 죽어 버립니다.

두 사람 다 요셉의 해몽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이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살펴봅시다.

 

꿈은 내가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계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꿈은 작게는 그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 하고 있고,

크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실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요셉이 옥에서 꿈을 꾼 사람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두 사람 다 요셉의 해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꿈대로 운명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꿈은 그 사람의 운명을 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요셉도 두 꿈을 꾸었습니다.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과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온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꿈이 요셉을 애굽으로 이끌고 온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결정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는 살아나는 꿈을 주었고,

떡을 굽는 관원장에게는 죽는 꿈을 주었습니다.

 

이걸 야곱과 에서를 비유헤 봅시다.

야곱과 에서의 운명은 태어나기 전에 결정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야곱과 에서의 운명을 꿈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두 관원장으로 비유하면,

야곱은 살아나는 꿈을 받았고,

에서는 죽는 꿈을 받은 것입니다.

리브가가 꿈에서 본 대로 야곱와 에서는 살아갔습니다.

꿈이 야곱과 에서를 끌고 다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꿈에 예수를 낳을 것이라고 지시합니다.

마리아는 놀라서 나는 아직까지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데 어찌 아들을 낳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성령이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주신 꿈대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이러면 꿈이 마리아를 끌고 다닌 것이 됩니다.

 

에서나 야곱 그리고 마리아도 꿈대로 인생이 살아졌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옥 속에 두 관원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꿈대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각자에게 꿈을 주시고 이 세상에 보냅니다.

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 받을 꿈과 구원 받지 못하는 꿈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이 세상으로 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차표 한 장씩 받아서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행선 표를 받고서 천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하행선 표를 받고서 지옥으로 갑니다.

 

각자 정해진 코스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운명이라고도 합니다.

 

두 관원장은 두 부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두 관원장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갑니다.

 

이 세상이라는 감옥 속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옥에 요셉에 들어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이 보낸 것입니다.

감옥 속에 있는 자들에게 각자 받은 꿈을 해석해 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살아 날 자와 죽을 자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도 죄수이고 떡 맡은 관원장도 죄수입니다.

둘 다 같은 죄인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도 죄인이고 불신자도 죄인입니다.

신자는 긍휼을 입은 죄인이고 불신자는 긍휼을 입지 못한 죄인입니다.

누가 긍휼을 입었는지 누가 긍휼을 안 입었는지는 인간들은 모릅니다.

꿈을 해석하는 자가 와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꿈을 해석하는 자가 요셉이었고,

신약에서는 꿈을 해석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셉은 지금 예수님을 예표하여서 감옥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감옥의 모습을 봅시다.

 

8절을 보세요.

 

8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요셉이 감옥에 가니까 죄수들이 우리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복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두 관원장으로 나타납니다.

 

관원장들이 꿈을 꾸고서 우리가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요셉이 꿈은 하나님이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은 당신들이 꾼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꿈은 하나님만이 해석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하는 말이 압권입니다.

그 꿈을 내가 해석해 줄게! 라고 합니다.

아니, 조금 전에 꿈은 하나님이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래 놓고는 자기가 해석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이 누가 됩니까?

자기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자라는 뜻입니다. 

꿈을 주고 꿈을 해석하는 나라에서 온 자라는 뜻입니다.

꿈을 주고 꿈을 해석하는 나라가 어디인가요?

하나님 나라이지요.



이렇게 되면 요셉은 하늘나라에서 온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나는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강을 영적으로 죽음 너머 세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건넌 홍해나 광야 40년을 청산하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모두가 기존의 세상과 단절하는 죽음 너머의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나는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죽음 너머의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추적해 보세요.

그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구덩이에 빠집니다.

구덩이에 빠졌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상징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요셉은 부활 한 자로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애굽은 온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럼 요셉은 부활 한 자로서 온 세상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것과 같습니다.

그럼 요셉은 세상 바깥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바깥사람이기 때문에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셉의 꿈꾸는 자입니다.

이는 꿈을 품고 있으면서 꿈을 해석하는 자라는 뜻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품은 꿈은 형제들이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꿈은 애굽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 보낸 것입니다.

 

주라는 말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을 하려면 서로 다른 두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감옥에 있는 두 관원장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꾼 자들의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봅시다.

 

어느 날 요셉이 감옥을 들어갑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있는 것입니다.

심상치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너 왜 그러는데’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하는 말이 내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이건 뭔가 징조인 것 같은데 자신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니 불안한 것입니다.

 

이에 요셉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야!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만이 해석할 수가 있어!

그러면서 내가 그 꿈 해석해 줄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술 맡은 관원장이

야! 임마! 너 조금 전에 꿈은 하나님만 해석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단 말이냐?

니가 하나님이라도 되냐?

 

그러자 요셉이 하는 말이 맞아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야!

내가 히브리인이잖아요.

히브리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야!

그러니 그 꿈을 내가 해석 할 수 있는 거야!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그럼 내 꿈을 해석해 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꾼 꿈을 쭈욱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꿈에 보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세 송이가 있는 거야!

그런데 그 포도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열매를 따서 즙을 만들어서 바로에게 드렸어!

그러자 요셉이 어~ 그 꿈은 네가 복직한다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12-13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내가 해석 할 테니 잘 들어 봐!

네가 꿈에서 본 포도나무 세 가지는 사흘을 말하는 것이고,

네가 포주 열매를 따서 즙을 만들어 바로에게 드렸다는 것은 예전에 네가 하던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바로가 너를 복직시켜 준다는 뜻이야!

그건 길몽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떡 맡은 관원장이 나도 꿈을 꿨는데,

내 꿈도 좀 해석해 줄래 라고 합니다.

그래 넌 어떤 꿈을 꾸었는데,

그러자 떡 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꾼 꿈을 쭈욱 이야기 합니다.

 

내가 꿈이 보니까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 위에 있는데,

그 속을 보니까 각종 구운 식물들이 있었어!

근데 내가 그걸 바로에게 드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새가 와서 다 먹어버렸어!

그러자 요셉이 그건 네가 사흘 후에 죽는다고 합니다.

 

18-19절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22절 “제 삼일은 바로의 탄일이라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으로 머리를 그 신하 중에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여 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요셉의 해석대로,

사흘 후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장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째서 술 맡은 관원장은 살고 떡 맡은 관원장은 죽었습니까?

그건 그 꿈의 내용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둘 다 누구의 신하입니까?

바로의 신하입니다.

 

포도주를 만들고 떡을 만드는 것은 누구에게 바치기 위한 것입니까?

바로에게 바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다서 즙을 만들어서 바로에게 드렸습니다.

하지만 떡 맡은 관원장은 몽땅 새들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바로에게 드린 자는 살아났고,

바로에게 돌아갈 것을 새들에게 빼앗긴 자는 죽었습니다.  

이걸 우리 신앙으로 이해해 봅시다.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 13:1-9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은 7가지 천국 비유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다 밭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씨는 길 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밭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 버렸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의 기운에 막혀서 결실치 못하고,

밭에 떨어진 씨만 결실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나중에 제자들만 따로 불러서 알려 주십니다.

 

18-23절을 봅시다.

 

18-23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씨를 천국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천국 말씀은 아무나 다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말씀은 천국 백성들에게만 들려진다는 뜻입니다.

천국 말씀이 들려진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여도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마귀가 막아서 못 따르고,

어떤 자들은 호기심으로 잠시 따르다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떠나가고,

어떤 자들은 세상에서 노는 것이 재미가 있고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 떠나가고,

어떤 자들은 끝까지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

 

밭은 사람을 말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하지요.

새는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씨를 말라 죽이는 일을 합니다.

즉 예수를 못 따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밭은 다 같은 것입니다.

모두 마귀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얻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떡 굽는 관원장이 바로에게 드리려고 밥상을 다 차려 놓았는데 새들이 와서 다 먹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누구의 신하입니까?

바로 왕의 신하입니다.

바로 왕은 온 세상의 왕으로서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떡 맡은 관원장은 떡을 마귀에게 다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맡은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마귀를 위하여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떡 맡은 관원장과 같는 자들은 자기 뜻을 이루고자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들이 섬기는 신은 자기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이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실 것을 구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을 위하여 예수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천국을 말하고 그 의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말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천국을 위하여 따르는 것이지 세상 것을 얻고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나를 따르는 길은 부모와 자식과 전토를 버리는 것이고, 또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서 따르는 길이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 돌아갑니다.

예수를 떠나 돌아간 군중들은 모두가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던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주로 따르고자 함이 아니고 떡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를 따르는 길은 모든 것을 잃는 길이라고 하니까 다 돌아간 것입니다.

 

이 모습이 곧 떡 맡은 관원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떡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돌아갈 것을 마귀에게 다 빼앗긴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다 가로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상이 누구이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고,

모든 것이 주로 인하여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주께 돌려드리는 것이 술 맡은 관원장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포도 열매를 따서 즙을 만들고 바로에게 다 드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수고를 바로에게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바로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말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도 주의 은혜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의 은혜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산 제사라고 합니다.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영적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나와 왕을 수종드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성도가 장차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서 수종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자입니다.

이건 마치 포도 열매를 으깨어서 즙을 만들어 잔에 담아서 바로 왕에게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옛 사람이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옛 사람이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워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되면 떡 두덩이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성령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오순절이 되면 곡식을 맷돌에 넣고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듭니다.

그리고 물과 기름을 넣고 반죽을 하여서 불에 굽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드릴 떡을 만들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말씀으로 갈아버리는 것입니다.

포도를 으깨어서 즙을 만들 듯이 우리를 말씀으로 깨트려서 가루를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을 일컬어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술 맡은 관원장이 포도즙을 바로 왕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젊어서라는 말은 성령이 임하기 전을 말하고,

늙어서는 성령이 임하고 난 후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삶을 팽개치고 옛날의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꺼꾸러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건 베드로의 실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베드로 속에서 강권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베드로를 포도즙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 갈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것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합니다.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갑니까?

그건 가루가 되면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옛 사람을 말씀이라는 맷돌에 넣고서 가루를 만드십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오직 구속한 주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처음 교회에 올 때는 우리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다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열심을 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성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꿈은 하나 둘씩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계획들을 하나님께서 하나 둘씩 차압해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늙어서 띠 띠고 원치 않은 길을 간 베드로처럼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꿈은 태산 같았지만 갈수록 그 꿈은 깨어지셔 급기야는 가루가 되어 갑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꿈을 다 깨트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우겨쌈을 당한 것 같으나 자유 하는 자요.

넘어진 것 같으나 일어선 자요.

만물의 찌끼 같으나 하늘나라의 왕자임을 알게 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땅에 소망은 사라지고 하늘에 소망으로 가득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감사 할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풍부에 처한다고 해서 자랑치 않고, 비천에 처한다고 하여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는 족히 비교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서 알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뭐라고 합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천지 지으신 여호와께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계신 시온 산을 늘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떡 맡은 관원장과 같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구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말씀을 들어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아무리 천국 복음을 전해도 땅에 이야기로 듣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어도 중풍병자처럼 머리로는 아는데 손발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심령이 점점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까칠해지고 차가워지는 게을러지고 인색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강퍅해져서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사람이 더 따뜻해져야 합니다.

욕심이 점점 줄어들어야 합니다.

더 열심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점점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떡 굽는 관원장과 같은 사람들은 그 반대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흡수하지 못하니까 심령이 메말라서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도 두 부류의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각자 받은 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종자가 다르듯이 양과 염소도 종자가 다릅니다.

양이 염소가 되고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곡식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곡식이 되는 것도 없습니다.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곡식은 곡식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그 본성은 바꾸지 않습니다.

 

양은 낮은 곳을 좋아하고 염소는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곡식은 고개를 숙이고 가라지는 고개를 쳐듭니다.

양과 곡식은 순종적이고 염소와 가라지는 불순종적입니다.

양과 곡식은 겸손하고 염소와 가라지는 교만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1년을 믿어도 양처럼 믿고 10년을 믿어도 양처럼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염소는 1년을 믿어도 염소처럼 믿고 10년을 믿어도 염소처럼 믿습니다.

양은 양의 성질로 살고 염소는 염소의 성질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희미하다가도 자라가면서 그 성질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포도즙처럼 날마다 깨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떡 맡은 관원장은 날마다 교만해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세요.

야곱은 장자권을 얻고자 팥죽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팥죽을 얻고자 장자권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의 이러한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귀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히니까 땅에 떡을 움켜잡고자 하늘의 구원을 버린 것입니다.

 

에서는 떡이 좋은 것입니다.

에서에게 살아가는 의미는 떡을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권을 떡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장자권은 하늘의 구원과 같습니다.

야곱은 세상에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살아가는 의미는 하늘나라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세상의 떡을 버리고 하늘의 장자권을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에서가 받은 꿈과 야곱이 받은 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에게 다른 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이들을 이끌고 다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꿈대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각자의 꿈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자기가 받은 꿈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자 각자의 꿈이 드러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누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은혜에 속하였고,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은 법에 속하였어요.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은혜로 살고,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법으로 살아갑니다.

 

은혜에 속한 사람은 은혜로 살아야지 편합니다.

법으로 살면 불편합니다.

그래서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법에 속한 사람은 법으로 살아야 편합니다.

은혜로 살면 불편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각자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내어놓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서 자기가 받은 꿈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술 맡은 관원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떡 맡은 관원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지금 교회 안에서 양처럼 살고 있는지 염소처럼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바울은 그럽니다.

스스로 확증하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버리운 자라고 합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자는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갈 것이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사람은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누굴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방의 신앙을 왈가왈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받은 꿈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각자 행하는 대로 내 버려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들어나는가 하면 각 사람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라고 합니다.

반면에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각자의 본성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의가 좋은 사람은 의를 행하고 불의가 좋은 사람은 불의를 행할 것입니다.

거룩이 좋은 사람은 거룩으로 살고 더러움이 좋은 사람은 더러움으로 살 것입니다.

각자 좋은 것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와 불의 거룩과 더러움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냐로 가늠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 것을 위하여 살면 불의하고 더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각자의 삶대로 심판을 하십니다.

거룩한 자는 거룩한 곳으로 보내고 더러운 자는 더러운 곳으로 보내십니다.

의로운 자는 의에 나라에 살게 하시고 불의한 자는 불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먼저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16-17절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잘 보시면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좋게 해석하는 것을 보고서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의 꿈도 해석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떡 굽는 관원장은 꿈을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옆에 있는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길몽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해석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쉬운 예가 되어서 말합니다.

예전에 ‘미운우리새끼’ 라는 프로그램에서 토니와 그의 친구들이 점집에 가서 점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점쟁이가 토니의 점괘를 아주 좋게 쳐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붐이 나도 좀 봐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붐은 점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토니의 점괘가 길함으로 나오니까 자기도 좋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점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썩 좋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떡 굽는 관원장이 붐처럼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는 꿈 해몽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이 길몽으로 나오니까

그 안에 욕심이 발동해서 요셉에게 자기 꿈도 해석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요셉처럼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오셨습니다.

세상이라는 감옥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술 맡은 관원장처럼 살아서 천국에 가는 꿈을 받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떡 굽는 관원장처럼 죽어서 지옥으로 가는 꿈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12 제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핫한 것입니다.

자연히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예수에게로 쏠립니다.

이 모습을 본 12 제자들은 어깨가 으쓱해 집니다.

자신들은 선택을 입은 자라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삽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님이 선택해야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은 자기들이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앞 다투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행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오래지 않아서 예수가 정권을 잡을 것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정권을 잡으면 12제자들은 다 한 자리씩 해 먹을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지난번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수많은 교수들이 몰렸습니다.

왜 몰렸을까요?

가만히 보니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앞 다투어 명함을 내 민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떡 굽는 관원장과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좀 더 리얼하게 말합니다.

이 시대 목사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왜 목사가 되고자 할까요?

가만히 보니까 한국 교회 안에서는 목사라는 직업이 엄청나게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목사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가 되는 길은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목사가 되고자 할까요?

12 제자와 바울처럼 죽임 당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목사가 되고자 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를 보니까 죽는 길이 아니고 잘 사는 길인 것입니다.

인생 망하는 길이 아니고 흥하는 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취직하기 어려운 때에 목사만 하면 팔자를 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들 하는 걸 보세요.

완전히 신(神)입니다.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자리가 좋으면 자식에게까지 세습을 시키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떡 굽는 관원장과 같은 자들입니다.

 

물론 사명을 받고 목사가 되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명으로 목사가 되는 분들은 술 맡은 관원장과 같은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목사가 되신 분들은 자기 몸을 던져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은 희귀합니다.

대부분이 목사의 화려함을 보고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는 거짓 종들은 우후죽순처럼 많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봅시다.

 

마 24:1-13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끝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어떤 징조들이 일어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첫 마디가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이는 목사들이 많이 일어나서 교인들을 미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많다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뜻입니다.

수요가 공급을 났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거짓 신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무엇으로 미혹합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예수님을 미혹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예수야 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 아들다움을 보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하나님 아들다움은 세상에서 부자 되고 출세하고 권세를 잡고 호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에게 네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에 내가 도움을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 이걸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고 있나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성도가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자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바알 종교가 되었습니다.

목사들이 예수를 모릅니다.

교인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모두가 복 받기 위해서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떡 굽는 관원장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복을 바꿔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 세계의 교회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신약의 전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시작해서 종말에 일어나는 교회 시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상징하는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교회 시대가 열립니다.

그리고 순교 시대를 상징하는 서머나 교회를 지나서,

로마 국교 시대를 상징하는 버가모 교회와,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두아디라 교회를 지나고,

종교 개혁 시대를 예표하는 사데 교회와,

교회 부흥 시대를 상징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나서,

예수님 재림 직전의 종말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어떤가요?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이 시대 교회와 성도의 모습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합니다.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늬만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원인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 배부름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취미 생활하듯이 동호회 모임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을 문 밖으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교인들 마음속에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예수 대신에 세상 왕인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단하는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고 합니다.

심령들을 피폐하여 있고 영적으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인간의 의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에 불순물들을 다 제거 하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에게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예수를 떠나게 하였나요?

세상의 풍요입니다.

물질의 풍요로 인하여 하나님을 다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교회들은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처럼 강도들이 우굴 거리는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고 거짓 신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구약의 아합 왕 시절 엘리야가 사역한 때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엘리야가 그 당시 백성들의 신앙을 묘사하기를 두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사이를 머뭇거릴 것이냐 빨리 돌이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으로 와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으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내용입니다.

 

두 증인들이 교회에 가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땅에 거한다는 것은 세상 것으로 안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부요와 사치로 연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을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봅시다.

 

계 17:1-6절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성령께서 사도 요한에게 음녀를 보여 줍니다.

여자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있습니다.

손에는 금잔을 들고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와 사치와 연락하면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옷입니다.

이는 목사들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사치하고 연락하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는 것은 참 예수를 믿는 자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참 복음을 전하면 욕하고 이단이라고 매도한다는 뜻입니다.

 

18장을 봅시다.

 

계 18:2-5절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마귀의 말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말을 땅에 말로 전락시켜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미혹하던 그 말을 목사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포도주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음행케 하는 포도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차원으로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전부 땅에 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음녀는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무속 종교가 되었습니다.

목사들이 무당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이라는 이름의 복채를 받고 길흉화복을 점쳐주고 있습니다.

 

조금 지각 있는 목사들은 교회가 물질만능주의로 흘러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으니까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너무 돈만 밝히고 기업화 되었다고 하면서 개독교라고 욕을 하니까 우린 욕먹지 말자고 하면서 신자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착한 사람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고매한 인격 수양을 위하여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아니라 유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인격 수양의 도량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복주의로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것이나,

착한 사람 되게 하는 것이나 복음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는 것이고,

내게는 선이 없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 이외는 소망이 없음을 알고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바라보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땅에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인격을 수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내게는 의가 먼지만큼도 없음을 알고 술 맡은 관원장처럼 자신을 다 비우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채움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난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뱉어내야 하는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찬송은 아무나 불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도들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발함과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안에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을 때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충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술 맡은 관원장처럼 자신의 삶을 포도즙처럼 하나님께 드려짐이 됩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우신 은혜를 이 시간 마음껏 맛보게 하여 주어서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주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창세전 언약을 심겨준 이가 주님이십니다. 언약을 심어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가는 이도 주님이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찬송하고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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