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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71강. 바로의 꿈과 종말의 때 (창 41:1-36)

by coroa 2021. 9. 16.

 

 

71강. 바로의 꿈과 종말의 때 (창 41:1-36)

-.정낙원 목사

 

 

 

오늘은 바로가 꾼 꿈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그 당시 애굽은 온 세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은 온 세상의 임금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임금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곧 온 세상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꿈은 계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꿈속에 역사 속에서 하실 일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처럼 개인에게 담겨지면 개인의 운명이 되고,

바로 왕처럼 세상의 지도자에게 담겨지면 역사의 운행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지 13년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이 17세에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였으니 30세가 되는 해가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남자 나이 30세는 제사장 직을 감당하는 나이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 하신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세상에 드러났듯이 요셉도 30세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감옥의 갇혀 있던 죄수에서 꿈 해석을 통하여서 온 천하를 다스리는 총리가 된 것입니다.

 

이건 세상적인 질서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모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삼은 것은 역모도 아니고 순리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세상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요셉 속에 담겨져 있던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요셉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이 있습니다.

형제들의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꿈입니다.

그 꿈이 드디어 실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꿈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 내실 것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꿈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꿈속에는 인류 종말의 때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바로가 꾼 꿈을 먼저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요셉이 30세가 되던 해에 바로가 두 가지 꿈을 꿉니다.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서 갈밭에서 뜯어 먹고 있는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두 번째 꿈은,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입니다.

역설적입니다.

 

바로가 꾼 꿈은 상식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꿈이 깨고 나서 번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꾼 꿈이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으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깁니다.

살찐 소가 파리한 소를 잡아먹고, 통통한 이삭이 마른 이삭을 삼켜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꾼 꿈은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고, 마른 이삭이 통통한 이삭을 잡아먹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 이치와는 다른 이치인 역리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해석하지 못하고 번민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온 나라에 영험하다고 하는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서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술 맡은 관원장이 퍼뜩 요셉을 기억한 것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이 자기의 꿈을 해석하여 준 것을 기억하고서 바로 왕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부릅니다.

이에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을 합니다.

꿈의 내용은 7년 풍년 후에 기근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근에서 살아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에게 총리직을 수여하고는 나라를 맡겨버립니다.

바로는 명분만 왕이고 실제 통치는 요셉이 하게 됩니다.

애굽이 총리란? 온 세상의 총리입니다.

드디어 요셉은 자기의 꿈대로 만유의 주가 되었습니다.

 

꿈은 계시라고 했습니다.

계시를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합니다.

바로의 꿈은 이 세상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요셉이 해석합니다.

그리고 꿈의 내용을 요셉이 다 실행을 합니다.

바로는 꿈만 꾸었지 요셉이 다 그 꿈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럼 세상을 통치하는 실제 통치자는 요셉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럼 요셉이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징하고 있음이 됩니다.

그럼 바로 왕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운행하겠다고 하는 언약이 됩니다.

그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6장을 봅시다.

 

계 5:1-7 / 6: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시도 요한이 천상에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보니까 보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보좌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 손에 책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이 책은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봉인을 해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이 엉엉 웁니다.

이때 장로 중 하나가 그 책의 인을 때실 분을 알려 줍니다.

그가 바로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손에서 책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6장 1절에서부터 그 인을 하나씩 뗍니다.

그러자 각종 말들이 뜁니다.

말들이 뛸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각종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이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를 예언서라고 합니다.

앞으로 역사가 이렇게 진행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를 기록한 책을 어린 양에게 맡긴 것은 어린 양으로 하여금 세상 역사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책의 인봉을 하나씩 해제 할 때마다 세상 속에서 각양의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감독이 한 장면 한 장면을 연출 하듯이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연출하는 영화의 내용은 종말에 되어질 일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그 계시가 장차 될 일이고 반드시 속히 될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을 모두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게 다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들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이 역사 세계의 실질적 운영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바로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을 하여서 온 나라를 통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바로의 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이 역사 세계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온 세상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요셉이 하는 일들 속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담겨져 있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이야기를 요셉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고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에 객이 되었다가 돌아오려면 먼저 이방 나라로 내려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기근이 임하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을 애굽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내고서 야곱의 후손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기근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먼저 보냈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은 나중에 보내어지는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누가 애굽으로 내려가나요?

요셉의 형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낸 것은 장차 온 세상에 기근이 임할 때 그 형제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에 있습니다.

 

가나안은 영적으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 이삭도 있었고 야곱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인 언약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요셉도 가나안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요셉의 형제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형제들도 내려 보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먼저 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언약의 후손들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 모습이 형제들보다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와서 요셉이 준 양식을 먹고 정한 때까지 살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출애굽 할 때 요셉의 시신을 앞세우고 나옵니다.

그르고 그 요셉의 시신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요셉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고 나와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요셉에 의하여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됩니다.

 

이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언약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이끌려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들어간 가나안은 영적으로 보면 천국입니다.

그럼 애굽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먼저 구원자를 애굽으로 보내고 나중에 그 형제들을 보내서 앞서간 구원자에 의하여 그 형제들이 이끌려 나오는 것으로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조상을 먼저 세우시고 그 후에 언약의 후손들을 구원하는 방식이 됩니다.

이 그림을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언약의 조상으로 먼저 세우시고 그 후손들이 애굽에서 정한 때까지 종살이하다가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언약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 후에 언약의 후손들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적용을 받고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요셉과 그 형제들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후손이 사대(400년)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언약의 수순에 따라서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내려갑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때가 되어서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징하는 애굽에서 나온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약의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장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땅이 진동을 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이 죽으면 아브라함 품으로 간다고 합니다.

이것을 열조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하실 때도 그들이 죽어서 아브라함에게로 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아브라함 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의 문을 열어주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무덤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가두어져 있던 성도들이 해방을 맞이하고 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자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구약의 아브라함 품에 있던 성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모습을 가지고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죄인만 무덤에 가둘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죄값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마귀가 언약의 후손들을 더 이상 무덤에 잡아 둘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죄인만 사망에 가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마귀가 구약의 언약의 후손인 아브라함 후손들을 사망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후손들이 무덤 속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더 이상 언약의 후손들을 무덤에 붙잡아 둘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젠 죄인이 아니니까 무덤 문을 열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사망이 언약의 후손들을 가둘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서는 성도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바로의 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해석을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봅시다.

 

25절 보세요.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요셉이 바로에게 당신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통하여 하실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 바로의 꿈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실 일들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는 바로의 시대이고, 멀리는 예수님의 오실 때입니다.

 

꿈의 내용을 누가 이룹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바로를 가지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자기의 권세를 요셉에게 다 위임을 했습니다.

바로가 할 일을 요셉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요셉이 바로를 대신하여서 일을 합니까?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꿈 해석을 애굽에 술사와 박사들은 하지 못하고 요셉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꿈은 하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이야기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이루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가 꾼 꿈을 하나님이 해석해 주실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정작 그 꿈은 요셉이 해석을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16절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신다고 하지요.

그리고는 요셉이 꿈을 해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요셉에게 모든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자 요셉은 거절하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받습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것은 요셉도 꿈을 품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형제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난 후 13년 동안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시편 105편에서는 하나님이 요셉을 차꼬에 채워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라는 말은 요셉에게 주신 꿈이 영글기까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 정한 때까지 하나님께서 요셉을 말씀으로 단련을 시키셨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를 말씀이 저를 단련시켰다고 합니다.

 

이제 그 때가 되자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요셉으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 요셉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서 해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가 요셉의 나이 30세입니다.

이 모습이 약 2천년 후에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30년 동안 초야에 묻혀서 하나님의 언약의 때까지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나이 30세가 되어서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육적 기근으로부터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영적 기근으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꿈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꿈속에는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술사와 박사들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오직 요셉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의 운명을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애굽에 술사와 박사들은 꿈을 계시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언약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언약을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바로의 꿈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은 꿈을 하나님이 하실 계시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그러잖아요.

이 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당신에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바로가 곧이곧대로 듣는 것입니다.

그리곤 꿈을 해석한 요셉에게 자기의 모든 권세를 위임해 줍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도 자기가 꾼 꿈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자기가 꾼 꿈을 역사 속에서 현실로 이루어가도록 위임을 한 것입니다.

 

바로 왕의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위임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와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시는 창세전 언약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압니다.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나 듣지 않습니다.

오직 언약의 후손들만 듣습니다.

 

언약의 후손들도 바로가 요셉에게 모든 것은 맡긴 것처럼 예수님에게 맡기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사람이 언약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믿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어떻게 납니까?

그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님에게 인생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12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을 예수님에게 송두리째 맡기는 것입니다.

인생을 예수님에게 맡긴다는 것은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살아가는 궤적이 바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짐승처럼 오로지 먹고 살아야한다는 자기 인생을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삶에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이 삶에 목적이라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고 살던 자들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요셉의 떡을 먹은 자들이 나중에 자기의 모든 토지를 바로에게 바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토지는 삶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근원인 토지를 바로에게 바친 것은 생명을 바로에게 의탁한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니까 실제로 통치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럼 온 나라 사람들이 토지를 바로에게 바친 것은 곧 요셉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결국 요셉이 온 인류의 생명을 주관하는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를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요셉을 통해서 살아난 자들은 예수님에 의하여 살아난 자들의 모형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살아난 자들은 두 부류입니다.

첫째는 요셉의 형제들입니다.

둘째는 온 애굽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유대인들과 같고,

온 애굽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되기도 하지만 만유의 주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 그림이 예수님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아브라함 후손들의 구원자이면서도 동시에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의 구원자이기도 하십니다.

결국 온 인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고 한 성령을 마셨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요셉은 아브라함 후손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 후손은 야곱의 후손인 요셉의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애굽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꿈속에는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종말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때를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종말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으로 바뀌는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인생을 바꿔치기 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자들은 기존에서 빼내심을 입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전향이 일어나게 됩니다.

살아가는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이걸 종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 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살까?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전부 땅에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땅강아지처럼 오로지 땅에 것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종신토록 흙만 먹는 뱀의 후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것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고 영원한 것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달프더라도 지나가는 것들이므로 낙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세상이 한결 가벼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없음 속에서도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옛날 같으면 돈 없고 실패하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칠 텐데,,,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 강도가 약해졌어요.

똑 같은 환경인데도 예수 믿기 전하고 예수 믿고 난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돈 없으면 어떻게 살까?

병들면 어찌할까?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속을 썩이면 죽니 사니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이러한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물론 완전치는 않지만 옛날하고는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른 것입니다.

 

돈 없어도 괜찮아요.

병들어도 괜찮아요.

누가 속 썩여도 괜찮아요.

 

지금 사는 신랑이 맘에 안 들고, 마누라가 맘에 안 들고, 자식이 맘에 안 들어도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임을 알기 때문에 목을 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전부 가짜입니다.

부모도 가짜이고 자식도 가짜이고 남편이나 아내도 가짜입니다.

모두가 하늘에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누가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온다고 하니까 누가 내 모친이고 형제이냐,

우리의 모친이나 형제는 하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 난 자들이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족은 하늘나라 가족을 알게 해 주는 그림자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족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 안에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가족들은 참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청년이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예수를 따른다고 하자 죽은 자는 죽은 자들끼리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너의 참 가족은 예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자들에게 야곱과 에서처럼 각자의 운명을 주셨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육적으로는 한 형제이지만 영적으로는 남입니다.

야곱은 언약의 후손이고 에서는 비언약의 후손입니다.

야곱은 유대인이고 에서는 이방인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의 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에서는 떡을 위하여 살았고 야곱은 장자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육적으로는 가족이라도 영적으로는 가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각자의 길을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집안 식구라도 믿음 안에서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 중에서도 영적으로 같으면 희노애락을 함께 하여야 하지만,

영적으로 다르면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형제로 대하여도 영적으로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함께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기 전처럼 형제들에게 목을 매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각자 팔자려니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단들처럼 가족들을 버리고 돌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들에게 목을 매고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천국 백성이니까 육적 형제들에게도 잘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너무 기대를 걸고 살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움켜잡는 사람이 아니고 손을 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게 불이익이 닥친다 하여도 섭섭해 하지도 말고,,,

양보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늘에 것을 가졌기 때문에 땅에 것을 양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빼앗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이 바로의 꿈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의 꿈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가 꾼 꿈의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파리한 암소가 살진 암소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충실한 이삭이 마른 이삭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이건 역리입니다.

세상의 순리는 양육강식입니다.

세상 순리대로라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는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이걸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죽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꿈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가정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뜯어 먹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 생명을 받은 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곳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죽임 당한 사건입니다.

이건 피조 세계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인간들에게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십니다.

살려주는 영이란? 살려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살려주시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살려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것은 십자가 아래 있는 자들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아래 누가 있습니까?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 피를 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죄인에게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집의 대문에 뿌린 것과 같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를 뿌린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이란?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재앙이 그 피를 보고서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일컬어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세례 요한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죄인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구약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세례를 받는 자가 세례를 주는 자에게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자,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 말 말고 나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마지못해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자기 죄를 전가 시킨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을 받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의 죄가 속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살찐 암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 되어진 자들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연합하여 죄인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 죽이셨습니다.

그것이 물 속에 잠기는 세례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온 것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후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오심을 일컬어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물세례에 동참한 자들을 성령으로 오셔서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죄인을 죽이는 물세례이고,

둘째는 의인으로 살아나는 성령세례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물세례는 예수님이 육체로 담당을 하셨고,

의인으로 살려내는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오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먼저 죽임 당하고 나중에 살려냄을 당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셨는데 그 강한 자가 말도 안 되는 죄인들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강하신 예수님이 왜 죽었나요?

우리를 살려내려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난 살았다 자랑 할 것이 아니라 날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셨어!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야!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야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럼 파리한 소는 누구 때문에 사는 것이 됩니까?

살찐 소입니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 나는 살찐 소 때문에 살고 있구나 해야 합니다.

살찐 소를 대신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찐 소입니다.

우리는 파리한 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뭔 줄 아세요.

예수님을 열심히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그 속에 영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먹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먹는 것이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이 마르다 집에 찾아 간 것은 그들에게 먹힘 당하고자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참람이고 죄입니다.

 

예수님은 밥 얻어먹고자 간 것이 아닙니다.

밥을 주고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고자 가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들을 다 받아먹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나중에 보세요.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먹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준비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드리고 자기의 모든 영광을 예수님에게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향유든 옥합을 깨트리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모든 재물도 드렸고 모든 영광도 드렸습니다.

어째서 그런가요?이는 자기의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하는 것도 나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헌신이라고 합니다.

 

헌신이란? 자기 몸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 12장에서는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 제사를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서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걸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성령이 드리게 하는 예배라고 하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헌신을 일컬어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받아먹은 자들만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배는 다른 말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은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것으로 나오는 자들의 것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것만 받으시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자기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걸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는 예수를 먹은 자들만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지 않은 자들은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먹지 않으면 자기 것으로 드리게 됩니다.

 

예수를 먹지 않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가 없는 예배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를 뜯어 먹은 자들만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의 밥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밥통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찐 소로 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수라는 살찐 소를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파리한 소들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목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애들아 너희를 위하여 내가 하늘에 양식을 보냈으니 가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들의 목자들이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먹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 천하에 호적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호적이란? 아버지의 아들로 등재하는 것입니다.

아들로 아버지의 호적에 등재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먹은 자들이 하나님의 호적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먹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이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은 성도는 교회 생활을 등한시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먹은 성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기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생활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는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초대교회가 이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는 이런 곳이다 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교회를 귀히 여기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난 사람들이 요셉을 어떻게 대할까요?

주로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집을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온 정성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요셉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섬김이란? 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받지 않은 자는 섬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섬김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일컬어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는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으니까 교회에서의 섬김이라는 열매를 내어 놓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섬김이 없다는 것은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섬김은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자는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살찐 소입니다.

기근을 당한 자들은 파리한 소입니다.

파리한 소들이 요셉이라는 살찐 소를 잡아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근으로부터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자기들의 모든 토지를 요셉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강요했나요?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요셉의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주야로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이걸 시편에서는 복 받은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다고 합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곧 예수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먹습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가 먹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먹은 사람은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금방 금방 시장 끼를 느껴서 또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한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밥을 먹고 살 듯이 예수도 날마다 믿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우리로 살게 하는 것이 밥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밥 먹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최우선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날마다 예수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자기 삶에 늘 적용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범사 속에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의 꿈속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살펴봅시다.

 

바로의 꿈은 7년 풍년 후에 7년 기근이 온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먼저 풍년을 주고 나중에 기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7년 풍년을 준 것은 나중에 오는 7년 기근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속에서 펼쳐질 복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처음에는 7년 풍년처럼 임했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기근으로 변해 갑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박해가 닥칩니다.

언제 풍년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낼 수가 있었던 것은 7년 풍년 때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전개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 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축 환영” 이렇게 맞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입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일이 룰루랄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이고 눈물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좋았던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때문에 미움을 받고 고난당하는 것뿐입니다.

이러 할 때 소가 먹었던 것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듯이 풍년 때 받은 그 은혜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들을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늘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양한 은사들도 체험을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즉각 즉각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사이다가 튀듯이 황홀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신이 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베드로처럼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아골골짝 어디라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거품이 빠지듯이 싹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도해도 소식이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광야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져 있듯이 밧모섬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가슴 속에 사이다가 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려진 것과도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기근인 것입니다.

마음이 겨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요만큼이라도 지켜낼 수가 있는 것은 처음 받았던 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마다 그 처음 사랑으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되 새김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말씀(은혜)을 먼저 주시고 난 후에 환란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두 증인을 보세요.

먼저 작은 책을 먹입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 밀어 넣습니다.

 

환란 속에서는 말씀을 못 듣습니다.

환란 속에서는 먹은 것을 끄집어내서 되새김질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재물들은 모두가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모스 4장과 8장을 봅시다.

 

아모스 4:6-8절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8:11-13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하나님께서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비를 멈춘다고 합니다.

어떤 성읍에는 비를 멈추게 하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영적 기근이 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이 추수 때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약 교회를 추수하고,

예수님의 재림은 신약교회를 추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시기 전에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절이 된 시기였습니다.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침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근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추수하러 오십니다.

 

그럼 초림 때처럼 또 말씀의 기근을 당하게 됩니다.

아모스의 예언처럼 청년과 처녀들이 물을 마시지 못하여 기갈을 당하여서 비틀거립니다.

물을 찾아서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 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죽는 줄 압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얻고자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값으로 젖을 산다고 합니다.

 

지금은 돈을 죽고 젖을 살 때입니다.

성경을 보면 값없이 젖을 먹으라고 할 때가 있고.

값을 주고 젖을 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초보 당시에는 값없이 젖을 먹을 때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열매를 맺어서 추수하여야 하는 가을 때는 값을 주고 젖을 사야 합니다.

말씀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주는 밥을 먹지만, 어른은 밥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가을 때입니다.

가을에는 잎사귀들이 다 떨어집니다.

열매가 영글어가려면 잎사귀가 떨어져야 합니다.

잎사귀가 붙어 있으면 열매에게 갈 양분들을 다 먹게 됩니다.

그래서 나무는 열매가 익어 갈 때가 되면 잎사귀들을 하나 둘씩 떨어뜨리는 일을 합니다.

잎이 먹어야 하는 양분들을 열매로 보내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육적인 양식들을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영적 양식이 없습니다.

그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 재림 직전의 교회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아쉬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라본 모습은 정 반대입니다.

가련하고 곤고하고 헐벗고 소경이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기근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예수님의 모습은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육적인 풍요는 반드시 영적 기근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육적으로 부요하면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물질적으로는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돈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에 기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 속에 받은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말씀의 맛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7년 풍년 동안 양식을 먹어본 사람은 기근이 닥치면 돈을 주고서라도 양식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납니다.

믿음과 말씀을 동일한 중수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건강한 성도는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한 끼만 굶어도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밥을 안 먹어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믿음이 건강한 사람이고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은 믿음이 병든 사람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을 듣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7년 흉년의 마지막 때입니다.

곧 기근이 닥칠 때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위기의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요셉과 같은 종들을 만나야 합니다.

기근에서 살아날 말씀들을 들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젖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말씀들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선지자들을 보냅니다.

종말에는 제사장들을 보내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은 도닥거려 주지만 선지자들을 방망이처럼 강한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들을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에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백성들과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 초림 때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으로 와서 강한 말씀으로 회개 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초림 때의 영적 모습이 엘리야의 시대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 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세례요한처럼 엘리야의 능력과 심정으로 외치게 됩니다.

 

이들을 두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두 증인들이 교회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을 두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세상 것으로 안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두 증인들이 세상 것을 쫓아가지 말고 하늘에 것을 쫓아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말씀은 연장과 같습니다.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할 때는 호미를 사용합니다.

이랑을 매고 할 때는 싹이 다치지 않도록 무딘 연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추수 할 때는 날카로운 낫을 사용합니다.

열매 없는 가지는 가차 없이 잘라내고 열매만 추수합니다.

말씀이 연장과 같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말씀은 호미와 같이 무딘 것이지만 선지자들의 말씀은 낫과 같이 날카롭습니다.

 

7년 풍년일 때는 요셉의 말을 듣지 않아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7년 기근일 때는 요셉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7년 풍년일 때는 요셉도 나긋나긋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닥치면 달라집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강한 말씀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부드러웠습니다.

구약 교회에는 선지자였지만 신약 교회로서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구약 교회는 추수를 당하는 때이었고,

신약 교회는 씨를 뿌리는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신약 교회를 추수하러 오십니다.

강한 분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 모습이 철장 권세를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는 전쟁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기 때문에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마십시오.

심각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밥은 한 끼 안 먹으면 죽겠다고 하면서도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안 들어도 배가 고픈 줄 모른다고 한다면 그건 죽은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병들어 보세요.

나타나는 처음 증상이 밥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은 밥 먹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곁에서 간호하는 분들이 밥을 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살기 때문입니다.

약을 받아들이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 입맛이 없더라도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그걸 잔소리로 듣고 짜증을 냅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줄 모르면 그건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아도 감각이 없다고 한다면 그 영은 죽은 것입니다.

예배 빠지지 말고 말씀 열심히 들으라고 하는 말을 잔소리로 듣지 마십시오.

반드시 기근을 당할 때가 옵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을 가득 채워 놓으셔야 합니다.

 

나중이란 없습니다.

나중은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중에 형편이 되면 듣는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들으셔야 합니다.

 

7년 풍년이 있으면 반드시 7년 기근이 닥칩니다.

평안이 있으면 환란이 있고 환란이 있으면 평안이 있습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 마음껏 배를 채워 놓으셔야 합니다.

곧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다를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평안과 환란을 가지고 다스려 가십니다.

우리의 육신이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가 있고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할 때가 옵니다.

 

지금은 풍년이 끝나고 기근이 도래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절대로 게으름을 합리화 하지 마세요.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지런히 주를 섬기고 열심히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부디 오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죽어 마땅한 우리들을 위해서 그 아들을 생명의 떡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라는 떡을 먹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라는 양식을 먹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게 하시고 더 많이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들을 주시고 말씀에 기근을 당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발 걸음이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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