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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69강. 요셉의 고난과 여호와의 형통 (창 39:1-23)

by coroa 2021. 9. 5.

 

 

69강. 요셉의 고난과 여호와의 형통 (창 39:1-23)

-.정낙원 목사

 

 

 

겨울철에 보면 길가에서 파는 각양의 풀빵들을 보게 됩니다.

국화빵도 있고, 붕어빵도 있고, 바나나빵도 있고, 땅콩빵도 있습니다.

재료는 같은데 모양은 제 각각입니다.

 

왜 그런가요?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재료를 집어넣어도 틀에 따라 각양의 모습으로 빵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각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으로 해석을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해석을 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땅 차원으로 해석을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 차원으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이 그러합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요셉의 형통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이해하는 형통과 영에 속한 사람이 이해하는 형통이 다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인 형통으로 이해를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형통으로 이해를 합니다.

 

육과 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그럼 요셉의 형통을 이해하는 것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형통의 의미는 자기 유익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만사형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의 형통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요셉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가 됩니다.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고 합니다.

분명히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데 이를 형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과연 무엇이 형통인가요?

오늘은 하늘 차원에서 영적인 형통을 살펴볼까 합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 형통을 탐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가지고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차이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는 부모와 자식 같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이 사랑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간섭하는 것과 잔소리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라는 사랑은 간섭하지 말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올까요?

이는 우리는 우리 육신의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언약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먼저 언약을 심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간섭을 해 가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형통입니다.

이를 요셉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출생 자체가 다른 형제들과 다릅니다.

다른 형제들은 육으로 낳지만 요셉은 합환채(성령)로 났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합환채로 난 요셉에게 언약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이 어떤 건가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형제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에게 절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곡식단의 꿈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고,

해와 달과 별의 꿈은 온 세상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만유의 주는 예수님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꿈을 꾼 것입니다.

요셉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표 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만유의 주가 되셨는지를 보면 요셉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이시고 살리는 방식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셔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자로 삼았습니다.

 

요셉도 이 코스를 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만유의 주가 되는 코스로 인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하는 메시야를 예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언약의 후손들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구원하는 메시야이면서 언약의 후손을 대표하는 자로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인생 속에는 메시야와 언약의 후손들의 운명이 동시적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일어날 언약의 후손들도 요셉과 같은 코스를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하다가 4대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의 후손을 이방나라로 내려가게 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셨는지를 시편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6 (5절과 같음)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즉 파리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37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3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의 탄생과 버려짐과 구속이라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시편 105편은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의 구속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시편 105편은 창세전 언약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후손들을 주십니다.

후손들은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간섭을 당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서 종살이하다가 돌아오는 코스를 밟게 된 것입니다.

 

그 선두 주자가 요셉입니다.

요셉을 먼저 보내 놓고서 형제들을 나중에 내려가게 하십니다.

요셉의 후광으로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나라에서 번성을 합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죽고 난 후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 볼모로 잡혀서 아브라함과 언약한 정한 때까지 종살이하게 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서 이방나라에서 빼내 오십니다.

 

내려 갈 때는 요셉 한 사람으로 내려갔지만 돌아 올 때는 큰 민족을 이루고 돌아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서 돌아 갈 때는 큰 민족을 이루어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 이야기를 요셉과 그 형제들을 가지고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형제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요셉이 애매히 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였다고 합니다.

요셉은 고난을 당하는데 그 주변의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떤 집에 가면 그 집이 복을 받고,

요셉이 감옥에 가면 그 감옥의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요셉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은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복을 주기 위하여 요셉을 보낸 것이 됩니다.

나중에 보면 요셉에 의하여 온 세상이 기근으로부터 살아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그림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구약 마당에서는 요셉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성경을 보는 안목입니다.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건마다 구속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참으로 신비한 것은,

단편적 사건 속에도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고 전체 속에서도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요셉 이야기 속에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으면서도 이것을 이스라엘로 확대하면 그 속에서도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 큰 사건이 일어나서 이야기가 확대 되어 스토리가 전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크게 보면 3 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아담으로부터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나는 이야기까지이고,

둘째로, 홍수 후 새로운 시대를 연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의 부르심까지이고,

셋째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이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것까지입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속에도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한 구속사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확대시켜서 보여주십니다.

홍수 이후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 속에도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이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서 바로 왕에게 바치는 것 속에도 구속사 전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자 따로 보아도 하나의 그림이 되고 연결해서 보아도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가지고 있는 신비인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합환채로 태어난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고 애굽에 내려가서 총리가 되고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서 바로에게 바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죄와 사망 아래 있던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이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두 애굽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하고,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키던 애굽은 다릅니다.

요셉을 총리를 시켜준 바로는 좋은 왕이고,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킨 바로는 나쁜 왕입니다.

요셉 시대의 애굽은 좋은 나라이고,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키던 애굽은 나쁜 나라입니다.

요셉 시대의 바로 왕은 복을 받은 셈족이었지만,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킨 바로 왕은 저주 받은 함족이었습니다.

 

셈과 함은 노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셈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복을 받았고,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셈족은 언약 계통이 되고, 함 족은 비언약 계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섬기던 애굽의 셈족의 바로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을 압제한 함족의 바로 왕은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팔려간 애굽은 언약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상징하고 있음이 됩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땅에 요셉이 구원자로 내려간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기근 시에 온 나라 백성들을 다 살려내고 바로에게 바치게 됩니다.

요셉이 바로 왕에게 바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바친 성도들을 예표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요셉으로부터 살아난 사람들은 언약의 후손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보낸 것도 장차 형제들을 위한 구원의 초석이기도 하지만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이러면 이렇게 질문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어떻게 요셉이 내려간 애굽의 사람들은 언약의 후손으로 볼 수 있느냐고 의문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 의문은 요셉을 예수님 이야기로 보면 간단하게 해소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그럼 구속사 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 보낸 것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듯이 요셉을 통하여 살아난 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요셉을 총리로 삼은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바로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게 되고 요셉이 바로에게 바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음이 됩니다.

 

만약에 역사가 요셉 시대에 끝이 났다고 한다면 요셉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영적으로 요셉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충분이 의문이 해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그림으로 요셉의 애굽 행을 살펴봅시다.

그럼 요셉에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요셉 이야기와 예수님 이야기와 교차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요셉 당시의 애굽 왕은 노아의 세 자녀 중 여호와를 찬양하는 셈의 후예였습니다.

셈은 “높은 지위”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셈족은 높은 지위에 계신 분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셈을 축복 할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 셈족인 바로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언약 계통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보디발이라는 귀족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간 집이 보디발의 집입니다.

 

보디발이라는 이름은 “태양 신을 섬기는 자” 라는 뜻입니다.

태양 신을 이방인의 사고로 보면 나쁜 신으로서 우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후손 입장에서 보면 태양은 하나님을 상징하므로 태양 신은 좋은 신으로서 하나님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애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섬기던 신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마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이 왕으로 섬긴 바로 왕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상징하는 바로 왕의 신하인 보디발이 섬기는 태양 신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셉이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반 종으로 산 것이 아니고 보디발의 집안을 관리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의 종들과 재무를 맡아서 돌보았습니다.

 

보디발의 이름이 뭐라고 했나요?

태양 신을 섬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사장을 뜻합니다.

제사장이 사는 곳은 교회에요.

그러니까 보디발의 집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 이야기로 그려 보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디에 오셨습니까?

구약 교회인 유대인들에게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약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교회를 돌보게 된 것입니다.

 

그럼 요셉이 팔려간 보디발의 집은 구약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바로 왕이 다스리는 애굽은 유대인과 같이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교회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듯이,

요셉이 구약 교회와 같은 애굽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러 간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무슨 일을 하였나요?

본문을 봅시다.

 

창 39:1-6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습니다.

시위대장은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자리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요셉은 종이 아니고 주인처럼 있었습니다.

보디발이 자기 집을 요셉에게 전부 맡겨 버립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디발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가 함께 하는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집안을 다 맡긴 것입니다.

요셉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재산을 다 관리하였다는 것은 그 집의 제사장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집 안에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음녀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무슨 짓을 하는가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창 39:6-20절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 하였더라 7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 었더라”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다고 합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좋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항상 시험이 많습니다.

마귀는 항상 믿음 있는 자들을 시험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마귀라고 보세요.

그럼 마귀가 요셉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유혹하는가요?

자기하고 동침하자고 합니다.

이건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종으로 팔려간 자가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그 집안을 전부 맡아서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주인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하고 재미 좀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의 반응을 보세요.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 악이 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을 합니다.

 

그럼에도 보디발의 아내가 끈질 지게 유혹을 합니다.

마귀의 시험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평생 지속이 됩니다.

시험은 파도처럼 계속 밀려옵니다.

그러므로 한번 시험을 이겼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서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겉옷이란? 그냥 옷을 뜻하지 않아요.

 

옷이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겉옷을 벗은 것은 자신이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거부해서 자기의 지위와 신분을 박탈당한다고 하여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가 죄를 요셉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이 일로 요셉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수없이 예수님과 화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도리어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 책망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민족의 분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모함을 하고 죽여 버립니다.

 

요셉은 믿음을 지키다가 애매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가두어진 것은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죽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죄수들을 돌보는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구약의 언약 백성들들 살리는 일을 하셨어요.

 

나중에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서 어떤 일을 하는가요?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도 죽음에서 살아나서 만유의 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합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일생이 오버랩이 되지요.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실상인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살아간 것을 보면 둘로 나누어집니다.

 

감옥에서의 일생과,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로서의 일생이 있습니다.

 

요셉의 두 일생을 두 언약으로 보세요.

 

감옥에서의 일생은 구약이고,

감옥에서 나와서의 일생은 신약입니다.

 

감옥에서 돌보던 자들은 구약 교회가 되고,

감옥에서 나와서 구원한 자들은 이방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왜 감옥에 갇힙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죄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가지고 자기 쾌락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구약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으니까

그럼 보디발의 아내는 구약 교회의 종교지도자들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의적으로는 구약 교회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교회를 보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사하는 소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몸보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음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용해서 로마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통해서 유대 나라의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나라의 해방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도리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열심 당원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는 구원주가 아니에요.

그래서 늘 선생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데 가룟 유다는 한 번도 주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이는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구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구주입니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선지자나 선생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 뜻이 관철 되지 않으니까 예수를 판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보디발의 아내와 유대인들은 같은 부류인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는가요?

본문을 봅시다.

 

창 39:20-23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주인이 요셉을 옥에 가둡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자 여호와 하나님이 인자를 더하시고 온 감옥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감옥에 간 것은 감옥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고자 함이 됩니다.

 

이건 예수님 사건으로 보면 더 확실해 집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이 들어갑니다.

무덤은 감옥과 같습니다.

무덤 속에 누가 있나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구약 교회 성도로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언약의 후손들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이걸 요셉 식으로 말하면 요셉이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도 애매히 고난을 받았고,

예수님도 애매히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감옥에 갇힌 일을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단련시켰다고 합니다.

 

말씀이 응하기까지라는 말은 언약이 이루기까지라는 뜻이고,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는 것은 언약이 이루어지는 정한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도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간 것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옥 속에서도 요셉을 형통케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이루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면 아멘!

예, 아멘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버지 집에 있던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립니다

요셉은 뜻하지 않게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총리가 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을 이 땅의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무덤 속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생명책을 주시고서 무덤 속에 있는 언약의 후손들을 끄집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자기백성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자기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에서 꺼내 줄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으면 열조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열조란?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사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구원을 받아야 할 나사로들을 전부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애매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이 들어간 감옥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죄수들이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걸 여호와의 형통이라고 합니다.

 

요셉을 일컬어 형통한 자라고 합니다.

 

형통한 자를 호크마 주석을 보면 “이쉬 마츠리아흐” 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라는 이쉬와 “번성하다”는 마츠리아흐가 합쳐진 말입니다.

합성하면 “번성의 사람” “생명을 주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이 무슨 사람인가요?

복의 사람이죠.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하는 것은 요셉이 생명을 주고 번성케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줍니다.

누구에게 나누어 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 복의 조상 만들어 주겠다고 하시지요.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한다고 합니다.

이러면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상이라는 뜻입니다.

상과 복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인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에 속한 사람과 복에 속하지 아닌 자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영접하는 자는 복을 받을 자이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복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영접해서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복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을 영접하게 되어 있고, 복의 자손이 아닌 자들은 아브라함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를 영접하게 되어 있고,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거부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을 요셉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요셉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생명이 번성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일생은 언약이 이루기까지 버려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감옥 속에 보낸 것은 구원받을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 속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감옥에 들어가서 죄수들을 관리를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듯이 요셉도 감옥 속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 간 것을 차꼬에 채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옥 속에서 복의 사람으로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한 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그 말씀이 저를 단련시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에게 빛을 발하는가 하면 죄인들에게 발합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의로운 요셉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서는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납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 죄인이 누구였나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어디에서 구원을 하셨습니까?

 

12 제자를 율법신앙으로부터 빼냈습니다.

12 제자는 12 지파를 상징합니다.

12 제자를 율법으로부터 빼낸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언약의 후손을 빼낸 것입니다.

다 빼내는 것이 아니라 녹명된 자들만 빼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7장에서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씩 인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144000명입니다.

144000명이 24장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4 장로를 확대하면 144000명이고,

144000명을 확대하면 온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할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길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라고 하셨지요.

이는 언약의 후손들을 찾아 가라는 말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구약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보낸 이이야기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기백성을 찾으러 보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소유였는데 잠시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원래 유업을 이을 아들인데 잠시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청지기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끄집어내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초림 때는 구약 교회가 율법 아래 가두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와 사망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는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12 제자를 대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이방 나라로 내려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이방 나라에서 다시 되찾아오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것도 하나님이고,

우리를 구원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었다가 하나님이 되찾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있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이 잠시 이 세상에 버려짐을 당한 것입니다.

다시 되찾기 위해서 버려두신 것입니다.

 

누가 찾습니까?

주인이 찾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되찾음을 당함 속에는 찾아주시는 분의 공로만 오롯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잃은 양 비유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어깨에 울러 매고 집으로 가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음에 대한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잔치는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의 잔치인 것입니다.

잃은 양은 목자의 기쁨을 위하여 버려졌다가 되찾아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세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서 죄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느냐 하면 그 아들의 피로서 하십니다.

아들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은 양자로 삼아서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케 하십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이 백성이란? 언약의 후손을 말합니다.

언약의 후손을 누가 지었다고 하나요?

하나님입니다.

 

지었다는 것은 구원을 했다는 뜻입니다.

왜 구원 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찬송을 받고 싶어서 죄 아래 가두어 놓았다가 구원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싶어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으며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잠시 동안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끝 지점인 천국에서의 모습을 보시면 구원의 목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봅시다.

 

계 4:1-1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5:13-14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24장로들이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말하는데,

이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24장로들이 무엇을 하나요?

자기들이 쓴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에게 던지면서 세세토록 찬미하고 있습니다.

찬미는 구원 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찬미는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해 주신 분에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하나님께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찬송을 드리느냐?

자기를 구원해 주신 분에게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속에는 예수님의 공로만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 땅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미리 맛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빼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로 모인 성도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천국에서 하는 일을 교회에서 예표 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은혜 받은 자들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를 섬길 수가 없어요.

교회를 섬기는 것은 은혜 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왜 키웁니까?

자식을 통해서 기쁨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영광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영광을 받아요.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보세요.

한숨이 나옵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속을 썩이면 내가 왜 이걸 낳아 가지고서 이런 속을 썩느냐고 탄식을 해요.

부모들은 자식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있어요.

그 기대치에 못 미치면 속이 상합니다.

 

부모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부모와 마찬가지에요.

뭔가 우리에게 기대치가 있는데 그 기대치에 못 미치면 하나님이 속이 상해요.

 

그 기대치를 누가 못 이루게 합니까?

죄입니다.

마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멸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을 시켜 놓았는데 마귀라는 놈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뭐로 나타나느냐?

자기 영광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두 부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깨달음을 이룬 자를 말합니다.

 

깨달음을 이루면 도솔천으로 넘어갑니다.

도솔천은 신들이 사는 나라를 말합니다.

거기가 신천지에요.

거기서 신선놀음 하는 겁니다.

불교는 인간이 영광을 받게 해준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에요.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 간 것을 예수님이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뭐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인가요?

그건 창세전 언약 속에 잘 나와 있어요.

창세전 언약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아서 그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구원을 받은 24장로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들이 찬송을 받아요.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하는 것은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해야 될 일들을 미리 맛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천국에서 행하여야 하는 것들을 하게 하십니다.

 

얘들아! 장차 너희들이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 찬송해야 해!

그 일을 여기서 예행 연습하는 거야!

연습을 게을리 하면 안 돼!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여서 감사케 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고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예배(감사)하고,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예배(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늘 감사하게 되고,

찬송하는 사람들은 늘 찬송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갈수록 메말라가요.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심령들이 강퍅해져가요.

손이 오그라들고 인색해져요.

매사에 부정적이에요.

교회를 허무는데 서 있어요.

이걸 가시와 엉겅퀴라고 합니다.

이게 모두가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는 성도들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항상 푸르러요.

신앙생활이 생기가 있고 감사가 넘쳐요.

손을 펴서 후덕해요.

항상 긍정적이에요.

교회를 세우는데 서 있어요.

이 모두가 은혜를 받으니까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것을 빼앗아서 남긴 자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있는 자는 더 있게 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십니다.

이게 천국을 세워가는 원리에요.

은혜 받지 못한 자들은 움켜잡고 모아도 이리 저리 다 날아가고 모아지지 않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손을 펴서 베풀어도 모자람이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손이 오그라들고, 은혜 아래서는 손이 펴져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었어요.

움켜 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에 복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이 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하늘에 복을 받고 보니까 이 세상이 하찮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 전부라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하늘에 있는 세상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세상 것에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있는바 족한 줄 알고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때문에 감옥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죄사함을 받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사건을 통해서 장차 일어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서 필치는 구원이 이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으로 자식이 살듯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남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난 자들은 또 다른 예수의 사람이 되어서 버려짐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버려진 곳에서 또 다른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를 피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얻어진 구원의 바탕에는 예수 때문에 버려짐을 당한 선배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졌어요.

결국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간섭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세상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 때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죽을 자리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다고 하셨어요.

가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자 모두가 죽을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와의 형통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세상적으로 보면 고난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것이 여호와의 형통이고 복인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그럼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간섭을 당하게 되는지 그 답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승장구 일취월장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호세아서에서는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는다고 합니다.

호세아의 처 고멜의 손에 돈이 있으니까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돈줄을 끊어 버립니다.

돈의 힘으로 살아가는 고멜에게 돈줄이 끊기는 것은 고난입니다.

그런데 돈 줄이 끊기자 고멜이 본 남편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고멜이 바로 우리에요.

우리는 고멜처럼 의지 할 것이 있으면 예수를 떠납니다.

건강하고 돈 있어 보세요.

교회를 떠나서 세상과 짝하고 살아갑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차압해 가는 것입니다.

사업도 망하게 하고 건강도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도록 만드세요.

다 잃고 나면 그때 고멜처럼 본 남편인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복이라는 것은 고난 속에 들어가 보아야 알게 됩니다.

이건 경험하지 않으면 몰라요.

알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러지요.

네가 젊어서는 마음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않은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젊었다는 것은 성령이 오시기 전을 말하고, 늙었다는 것은 성령이 오신 후를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내 팽개치고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는 길로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 길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 여호와의 형통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피 흘림의 바탕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피 흘림은 예수님의 피 흘림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니까요.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한국교회도 대동 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으로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사람이 나중에 대동 강변에 세워진 교회의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선배 목사님들의 죽음으로 영적으로 부흥하였어요.

그런데 교회에 물질이 들어오기 시작 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간음하는 음녀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와 같이 강도의 굴혈이 되고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돈이 주인입니다.

중들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도 잡아먹는다고 하듯이 목사들이 돈 맛을 알고 나서 무당들이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교회는 절간과 같아요.

목사들이 주지승이에요.

대한예수교 장로교가 아니라 대한 불교 조계종이에요.

중들이 가사장삼 휘날리며 세상 복을 주겠다고 하듯이 목사들이 가운을 휘날리며 물질의 복을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만 명이 새벽마다 기도하면 무얼 합니까?

전부 땅에 것을 구하고 있는데,,

교회가 기업이 되다 보니까 명성이 자자한 어떤 교회처럼 자식에게 세습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목사의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한다면 자식에게 세습을 시킬까요?

자신이 목사 노릇을 해 보니까 이건 왕이거든요.

그러니 자식에게 그 왕권을 계승시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교회 안은 조선왕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를 왕으로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하는 모든 일에 교인들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일컬어 땅의 음녀라고 합니다.

목사들이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어요.

 

목사들이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교인들이 소경이니까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소경이 소경은 인도하여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형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성경과 반대로 가고 있어요.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동일해요.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처럼 예수를 전부 문 밖으로 쫓아내고 말았어요.

 

목사나 교인들이 돈에 취하여서 하나님을 더 떠나고 말았어요.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는 풍요한데 영적으로는 기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

예수를 믿지 않는 교인들!

예수가 없는 교회들로 가득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구약 교회를 바벨론에 던져서 정금으로 빼내 오셨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신약 교회도 큰 환란 속에 집어넣어서 정금처럼 재련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 이 모습으로는 안 되어요.

 

지금은 영적으로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 어떻게 등불을 준비하고 서 있어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파수꾼들이 되어서 외쳐야 합니다.

신랑이 오신다고 외쳐야 합니다.

 

만물이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고 싸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늘을 보세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십시오.

여호와의 형통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왜 고난이 여호와의 형통인지를 아래 노래를 들으면서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B4OKEYqCCc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 한 사람의 버려짐으로 온 사람들이 복을 얻었듯이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가 사는 바탕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을 몰고 다녔듯이 우리도 가는 곳마다 복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셉에게 하셨던 그 형통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서 마지막 때 두 증인들의 사명들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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