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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14강. 님이 오는 소리 (아가 3:6-11)

by coroa 2021. 4. 12.

 

♣ -.14강. 님이 오는 소리 (아가 3:6-11).-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님이 오는 소리에 기뻐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이 오시느 소리를 듣고 기뻐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잠시 잠간후면 오신다고 하신 주님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어둠을 싫어합니다.

어두우면 사물을 분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간이 안 되면 불안해요.

 

낮에는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도 두렵지가 않아요.

그런데 밤에는 길을 가는데 인기척이 들리면 두려워요.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를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어둠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일평생 수고와 슬픔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날아가는 한 경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는 인생은 그 자체가 슬픔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역사를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창세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천지에 속하지 아니하는 천지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경은 이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이를 시간적인 의미로 부를 때는 태초라고 하고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은 창조 이전의 시간이고 창세후는 창조 이후의 시간을 말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창세후에 속한 나라입니다.

 

에스겔 28장에서 창세전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살아가는 그 나라를 창세전 태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태초라는 영적 존재들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계셨습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창세전 태초의 세계를 다른 말로 묵시라고도 합니다.

 

암튼 묵시에 계시던 하나님이 천지라는 만물을 창조 하신 후에 역사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역사 속에 왜 오셨을까요?

이는 창세전에 언약하신 일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죄 아래 가두어진 상태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모습이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혼돈하다는 말은 무질서하다는 말이고,

공허하다는 것은 텅 비어 있다는 말이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분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죽음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천지를 창조하실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치고는 좀 허술합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만들지 않고 무질서하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완전하고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것입니다.

 

왜 성경은 죄와 타락을 먼저 이야기 할까요?

이는 생명을 살리는 창조의 일은 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죽은 세상 속에서 창조의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지고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으로 죽여 놓은 자를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타락의 역사로 마감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6일동안 창조가 일어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십니다.

일곱째 날은 저녁이 없는 곳입니다.

이는 일곱째 날은 이 세상 바깥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둠이 없는 빛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죄(罪)의 영역이고,

빛은 의(義)에 영역이라고 합니다.

저녁을 죄(罪)의 세계라고 한다면,

아침은 의(義)에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罪)가 먼저이고 의(義)가 나중이 됩니다.

 

성경은 왜 이런 구도로 시작하고 있을까요?

이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흔히들 창세기 1장을 천지창조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만물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천지 창조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통하여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흑암이라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흑암 속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되”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고요하던 흑암 속에서 빛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흑암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서 자던 성도들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흑암이 품고 있던 빛이 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흑암이 빛을 삼켰다가 툭~하고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흑암 속에 빛이 가두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떨어지니 하나라고만 여겨지던 것이 둘로 쫙~ 나누어집니다.

빛이 있으라 라는 말은 빛을 불러낸 것입니다.

빛아 나오너라 하니까 흑암 속에서 빛이 나온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하시자 무덤이 갑자기 입을 쫙~ 벌리더니 삼켰던 나사로를 툭하고 토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우웩~ 하면서 요나를 토해낸 것과 같습니다.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어 놓아라 라고 하니까 바로가 꼼짝없이 언약의 후손들을 놓아준 것과 같습니다.

 

흑암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은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인 것 같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인 것입니다.

흑암 속에 빛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이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빛을 불러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성경은 죄인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이 가두어져 있는 무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날 빛이 있으라 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구분을 시키십니다.

이 둘 사이를 낮과 밤이라는 경계로 나누십니다.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흑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흑암 속에 예수라는 참 빛이 비추자 빛의 아들들이 깨어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무덤이 빛의 아들들을 내어 놓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다 살아난다고 합니다.

고요하던 이 세상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시자 난리가 난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바퀴벌레가 올림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 불을 밝히니까 바퀴벌레들이 혼비백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덤의 주인이 마귀입니다.

마귀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무덤 속에 가두었습니다.

무덤 속에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 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빛의 아들들이고 녹명이 되지 않은 자는 어둠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러자 마귀가 난리를 칩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왜 왔냐고 신경질을 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세상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건 마치 복음을 전하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으로 두 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기도 성경이니까 예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 이야기도 결국엔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고요하던 세상에 말씀이 활동을 합니다.

그러자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섞여 있던 것이 갈라집니다.

 

빛과 어둠만 섞여 있는게 아닙니다.

물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냅니다.

 

땅과 바다도 섞여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갈라냅니다.

셋째 날까지 혼돈된 것을 정리정돈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혼돈된 세상을 둘로 갈라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셔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셨습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어둠에서 기이한 빛으로 불러냈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자를 일컬어 너희는 이제 빛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당한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창조가 된 세상은 구원을 필요로 창조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하기 위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만물은 구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구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지 않고 영생을 위한 자로 창조하였습니다.

 

어떻게 영생 하게 하셨나요?

이는 생명과를 먹음으로서 영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영생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과를 안 먹으면 죽은 자에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과를 안 먹어서 죽은 것입니다.

아담이 먼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를 먹어도 안 죽어요.

왜냐하면! 생명과가 선악과를 이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예수님은 이미 영생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죽어도 죽음이 예수님을 가두지 못하고 토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이 예수님을 받아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품은 성도가 부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속에 영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산다고 걱정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가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생명과는 예수님을 예표해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란 말은 예수 믿으라는 말과 같아요.

아담도 예수 믿고 구원 받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 한다고 했어요.

이 말은 에덴동산에서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말과 같아요.

생명과와 예수님은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의 생명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에게 만 있어요.

예수님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그러니 구원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는 그 누구도 생명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가졌어요.

이를 예수 이외 구원 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구원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나는 것도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죄 아래서 태어나는 저녁이 먼저이고 구원받는 아침이 나중인 것입니다.

 

어둠 아래서 태어남이 먼저이고,

빛 안으로 불러냄을 당하는 것이 나중인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 되는 것이 우리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죄로 헝클어진 세상을 예수님을 보내서 정리정돈을 하게 하셨어요.

마치 재활용품 분리수거 하듯이 집어넣을 것은 넣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수거 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타작마당이에요.

세례요한이 이를 알고 예수님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냈어요.

지금도 갈라내고 있구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린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 진리인줄 모르고 살았어요.

 

내가 누구인줄 몰랐어요.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줄 몰랐어요.

그러니 “나” 라는 땅은 혼돈하고 흑암의 깊음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흑암의 깊음 속에 있기 때문에 사는게 두려운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장악하고 있으니 두려운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밤이에요.

어둠이에요.

그래서 일평생 두려움에 쫓기고 사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으로부터 와요.

인간이 쫓아 낼 수가 없어요.

어둠은 퍼낸다고 해서 퍼내 지지를 않아요.

 

어둠을 쫓아내는 것은 오직 하나 빛이 들어와야 해요.

빛만 들어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물러가요.

그 빛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밤이에요.

그 속에 죽음이라는 어둠이 지배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예수님을 만나면 사라져요.

 

이런 이야기가 바로 아가서의 술람미 이야기에요.

 

지난 시간 술람미는 꿈에 신랑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신랑이 없으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몽유병환자처럼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신랑을 만나자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신랑을 만나서 어미 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했어요.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꿉니다.

이번에는 신랑이 마차를 타고 자기를 데리러 오는 꿈을 꾼 것입니다.

 

꿈을 꿔 보셔서 알지만 꿈은 순서가 없어요.

지금 술람미의 꿈도 그래요.

아가서가 그래서 난해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건 뒤죽박죽이에요.

이 말했다! 저 말했다! 그래요.

이게 다 꿈이라서 그래요.

 

꿈은 신약적 의미에서 계시(啓示)에요.

계시는 묵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속의 내용은 묵시에 속한 일입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는 시간의 흐름이 없어요.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시간 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전이라는 묵시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묵시는 사건중심으로 말해요.

묵시적 사건은 역사 속에서는 꿈처럼 뒤죽박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묵시이야기에요.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로 기록하지 않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도 그래요.

그래서 앞 뒤 두서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는 만났다고 하고!

언제는 헤어졌다고 하고!

만났다 싶으면 헤어져 있고!

헤어져 있다 싶으면 만나고 있어요.

 

오늘 본문도 지난 시간과 모순이에요.

지난 시간엔 신랑을 잃어버렸다가 찾았다고 했어요.

이젠 다시는 안 잃어버린다고 했어요.

꼭 붙잡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붙잡고 있는 신랑은 누구이고,

지금 오는 신랑은 또 누구인가요?

 

신랑이 둘이란 말인가요?

아니에요.

신랑은 분명히 하나에요.

그런데 둘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게 묵시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신비에요.

영적으로만 이해가 되어요.

시간의 흐름이라는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오시자 천국이 왔다고 하지요.

그런데 장차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미 온 천국은 무엇이고 장차 가야 하는 천국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오셨어요.

그런데 다시 오세요.

이미 오신 예수는 누구이고,

장차 오실 예수는 누구신가요?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현재도 구원을 받고 있으며, 장차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오늘 날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성령이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지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와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훌쩍 먼 길을 떠났어요.

다시 오마 약속을 주고선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분명히 영원토록 우린 안에 계신다고 하면서 떠나셨어요.

이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요.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런데 다신 온다!

이게 어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난 같은 이야기가 성령을 받으면 다 이해가 되어요.

그래서 술람미가 신랑과 어미 집에서 들어가 사랑을 하면서도 저 멀리서 오는 신랑을 보고 있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모습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왕궁으로 입성하는 내용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신랑을 꼭 붙잡고 있으면서도 신랑이 자기를 데리러 오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아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서도 장차 나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재림하시는 그 예수님을 기다라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도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모순,

이게 신앙이에요.

이게 믿음 안에서만 이해가 되어요.

 

술람미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신랑과 사랑을 하면서 신랑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꽉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자신을 왕궁으로 데리러 오는 신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런 것이 이해가 되면 가슴이 설레이고 흥분이 되고 신이 나요.

 

신랑이 오는 모습을 봅시다.

 

아 3: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먼 들판에 연기 기둥을 휘날리면 한 무리가 달려옵니다.

아주 시끌벅적하게 오고 있어요.

향기로운 향 냄새를 풍기면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분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가만히 보니 신랑이 오는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왕의 행차 때에 각종 향료들을 태워 연기로 향기를 흩날렸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향료들을 피우면 연기가 마치 야자수처럼 기둥이 되어서 쭈욱~ 올라가다가 우산처럼 옆으로 확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왕이 행차하는 주변은 향긋한 향냄새로 진동을 했어요.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를 알렸어요.

 

그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아! 귀한 분이 오시는구나! 를 감지하고 영접할 준비를 했어요.

향냄새가 연기처럼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퍼져 나간 것은 왕의 강림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런 연기가 지성소에서도 피어났어요.

7월 10일 대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법궤 위에 피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흠향하셨다는 뜻으로 지성소에 연기로 가득하게 하였어요.

밖에서 보면 연기가 기둥처럼 하늘로 치솟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 해 주셨다는 말이에요.

그럼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야~ 죄 용서함 받았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제사를 지내가 온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였어요.

연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일을 하지 못하였어요.

 

솔로몬이 연기 기둥 가운데 오는 것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성막을 짓고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고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멀리서 구름 기둥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길 떠날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그 구름을 따라 갔어요.

구름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징표였어요.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어요.

 

지금 솔로몬이 그 연기 기둥으로 술람미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나, 지금 당신 데리러 가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곧 도착할게!

 

술람미는 연기 기둥을 보고선 환호하는 것입니다.

야호! 우리 신랑이 온다!

내 낭군이 나를 데리러 온다고 흥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기 기둥이 솟아난다는 것은 왕이 행차한다는 것이니까요.

 

술람미가 온 동네 여자들에게 나와 보라고 난리입니다.

봐라!

우리 신랑이 오고 있잖아!

내가 뭐라 그랬어!

우리 신랑은 반드시 날 데리러 온다고 했지!

 

너희들 내가 우리 신랑이 날 데리러 온다고 하니까 헛소리한다고 했지!

정신병자 취급을 하면서 날 놀렸지!

내 말에 콧방귀를 켰지!

그런데 사실이잖아!

 

저기 봐!

저기~ 저! 연기 기둥 보이지!저 연기 기둥이 우리 신랑이 온다는 소식이야!

곧 도착할거야!

 

술람미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좋아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 흥분 되지 않나요.

전 엄청 흥분이 되는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처음 만나 사랑을 할 때는 조용히 했어요.

솔로몬은 하룻밤을 자고 난 후에 다시 온다는 약속만 주고 떠나갔어요.

술람미는 그 약속 하나만 붙잡고 오매불망 기다렸어요.

그동안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숱한 핍박을 받았어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왕을 사랑하고 있다고 미친 여자로 취급 받았어요.

엄청만 조롱과 수모와 모멸감을 받으면서 살아왔어요.

그럼에도 술람미는 신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그 약속하나만 믿고 살았어요.

그 모진 세월을 견디어 낸 것입니다.

 

술람미는 숱한 날을 눈물로 밤을 지새웠어요.

신랑이 주고 간 그 약속 하나 부여잡고 북받쳐 오는 설움을 이겨냈어요.

그런데 그 신랑이 약속대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대로 허황된 꿈처럼 여겨졌던 그 약속이 이제 실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눈물이 나지 않나요.

 

술람미의 모습은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다시 온다는 그 약속 하나 달랑 붙잡고 살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부도수표가 될지도 모르는 그 약속 말이에요.

 

저도 이 약속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복음 전하고 있어요.

분명히 다시 온다고 하셨거든요.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다구요.

전 그 약속 하나만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달려라 하니 처럼!슬퍼도 달리고!

아파도 달리고!

괴로워도 달렸어요.

달려온 세월이 여기까지 왔어요.

 

우린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어요.

그런데 달랑 성경 하나만 받았어요.

그런데 그 성경이 나에게 주신 약속임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지기 때문에 술람미처럼 신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는 순간이에요.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나고 황홀합니까!

술람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인 것입니다.

술람미의 기쁨이 곧 우리 모두의 기쁨인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아가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가신 그대로 재림 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천지진동하면서 강림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행차는 곧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강림하는 것과 같아요.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어요.

이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초림으로 오신 초라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알아보았어요.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촌놈으로 오셨어요.

자기 백성만 나사렛 촌놈이 메시야임을 알아보았어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의 눈에는 그냥 나사렛 촌놈이었어요.

그래서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천지를 진동하시면서 오세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세요.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마 24:30-31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살전 4:16-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에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인다고 합니다.

마치 솔로몬이 연기 기둥 가운데서 오는 모습처럼 예수님도 구름타고 오실 것입니다.

 

천사장이 호령을 합니다.

에이~ 물렀거라!

만왕의 왕이 행차하신다!

그 앞엔 천사들이 하나님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을 울려 불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울려 퍼집니다.

온 백성들은 다 듣습니다.

 

천사들을 온 세계에 보내서 그 택하신 자들을 다 찾아내십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지면 자기 백성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듣고 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와우~

우리 왕이 드디어 오시는구나!

호산나 하면서 환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중에서 나팔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7대 절기가 있어요.

7대 절기는 모두가 예수님의 일생을 담고 있어요.

 

봄 절기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어요.

이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해요.

 

여름 절기엔 칠칠절이 있어요.

칠칠절은 성령 강림을 말해요.

이는 예수님이 현재 성령 안에서 일하시는 모습이에요.

 

칠칠절 후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어요.

 

그리고 가을 절기에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가을이 되면 농사를 다 짓고 수확하여 곡간에 들이고 긴 안식에 들어가요.

이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해요.

 

농사 절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봄 절기와 같아요.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유월절 날에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죽으셨어요.

 

그리고 무교절에 무덤 속에 계셨어요.

무덤 속에 들어 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 내셨어요.

그리고 초실절 날에 부활을 하셨어요.

 

그리곤 50일 후에 칠칠절이라고 하는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어요.

성령이 임하자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넉 달 동안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넉 달 농사 기간은 성령 강림으로 새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는 시기에요.

 

이제 넉 달 농사가 끝나면 가을 추수 절기가 되어요.

7월 1일 날이 되면 제사장이 성전 꼭대기에서 나팔을 울려 불어요.

 

빠~아~빠앙~ 빠~아~빠앙~

빠~아~빠앙~ 빠~아~빠앙~

 

그러면 넉 달 동안 각자 흩어져서 농사를 짓던 백성들이 곡식을 수확하여 곡간에 들이고 하나님께 드릴 헌물을 가지고 다 성전으로 다 모여요.

백성들은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들고 성전으로 모여요.

제사장은 그 헌물들을 가지고 큰 잔치를 벌여서 축제를 하는 것입니다.

 

나팔절은 주의 재림의 날이에요.

나팔절에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들이 불 것입니다.

우린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흥분이 되지요.

이 맛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럴 때 부르라고 168장 찬송이 있어요.

찬송은 이럴 때 부르라고 있는 것이니 한번 불러보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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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1절)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 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타시고

천사들을 세계만방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후렴)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2절) 무덤 속에 잠자던 자 그때 다시 일어나

영화로운 부활승리 얻으리

주의 택한 모든 성도 구름타고 올라가

공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3절)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우리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기도하고 있어서

기쁨으로 보좌 앞에 우리 나가서도록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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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지요.

그래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신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는 비밀히 오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오세요.

아주 영광중에 오신다구요.

이땐 신자도 보고 불신자도 보아요.

 

계 1:7절.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보세요.

각인의 눈이 그를 본다고 하지요.

예수를 찌른 자들도 본다고 하지요.

땅에 모든 백성이 애곡 한다고 하지요.

 

이 때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작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고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던 놈들은 그 땐 난리가 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할 것입니다.

그 위엄에 사로잡혀서 얼음처럼 굳어져 두려워 떨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울고불고 애통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시온의 여자들도 다 나와서 왕이 오는 것을 보게 되어요.

 

신자들은 야호~ 할렐루야!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지만!

우리더러 이단이라고 하던 자들은 그때 죽을 맛입니다.

 

마치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꺾고 온 나라가 난리를 치던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아서 환호성을 치르지만!

스페인 선수와 국민들은 머리를 감싸고 애통해 하는 모습과 흡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황홀하지 않나요.

이런 약속이 있기에 예수 믿는 재미가 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걸 보았기 때문에 환란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오늘 술람미를 데리러 오는 솔로몬의 왕림을 통해서 잠깐 맛이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역전의 용사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왕을 옹위하면서 옵니다.

 

아 3:7절.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하였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을 호위무사들이 대동하고 와요.

솔로몬을 호위하는 용사 육십 인은 최정예 멤버에요.

당시 솔로몬 궁궐에는 왕의 호위무사가 육백 명이 있었어요.

 

그중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자들만 엄선했어요.

왜 최고의 무사들만 대동하고 올까요.

이는 원수들을 때려 부수기 위함이에요.

자신의 신부인 술람미를 괴롭힌 자들을 징벌하기 위함입니다.

 

장차 예수님 재림 하실 때도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는 천사들이 호위하고 와요.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11-16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백마는 승리자가 타는 말이에요.

이제 만왕의 왕으로서 오세요.

 

그런데 그 뒤를 수많은 하늘에 군대들이 예수님처럼 백마를 타고 따라와요.

맹렬한 진노를 머금고 와요.

이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초림 때는 죄인을 구원 하러 왔지만,

재림 때는 의인을 구원하러 오세요.

초림은 씨를 뿌리러 오셨지만, 재림은 추수하러 오는 것입니다.

 

초림도 옛 언약은 종말을 고하게 하는 것이므로 심판의 성격이 있어요.

하지만 온 세계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입장에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재림 땐 바다에 처 놓았던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분리합니다.

 

초림 땐 긍휼의 주님으로 오셨지만!

재림 땐 무서운 심판의 주님으로 오세요.

그래서 호위무사들을 전부 날선 검으로 무장시켜서 대동하고 오는 것입니다.

밭에 곡식을 추수하듯이 낫으로 쭉정이는 쳐내고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들이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폄훼하고 핍박한 자들은 곡(哭) 소리 날 것입니다.

원수 갚는 날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때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던 놈들은 전부다 굴비 엮듯이 엮어서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신부들에게는 위로의 신랑으로 오세요.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재림을 하실 때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지요.

왜 피 뿌린 옷을 입고 옵니까?

이는 자기 신부를 자기희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화려한 복장으로 오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피 흘린 그 옷을 입고 오심으로서 긍휼과 사랑으로 신부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신부에겐 긍휼의 옷이지만,

자신을 찌른 자들에게는 분노의 옷이에요.

 

예수님의 신부들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모친이 씌워준 면류관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아 3:11절.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솔로몬이 쓴 왕관을 오늘 본문에서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이라고 합니다.

왜 솔로몬은 아버지가 준 왕관이 아니고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올까요?

그것은 솔로몬 왕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어요.

 

지난 시간 술람미가 잃어버렸던 신랑을 찾고선 어미의 집 자기가 잉태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였지요.

이는 곧 자신이 솔로몬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솔로몬을 잉태케 한 그 사랑이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나 술람미는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은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에요.

본처(本妻)에 자식이 아니고 첩(妾)의 자식이에요.

 

첩의 자식은 상속권이 없어요.

그런데 왕위를 계승했어요.

이건 모두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증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증거에요.

 

솔로몬의 본래 이름도 “여디디아” 라고 지었어요.

“여디디아” 란? “사랑을 입은 자” 또는 “긍휼을 입은 자” 란 뜻이에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에요.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본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밧세바의 소생에게 왕통을 물려준 것입니다.

솔로몬은 엄마 때문에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쓴 왕관은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긍휼로 왕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어미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술람미도 솔로몬처럼 긍휼을 입은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서자(庶子)가 왕이 되는 은혜를 입었듯이!

노예인 술람미를 왕의 신부로 맞이하는 것도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신부를 사랑했으면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을까요.

행여 술람미가 미안해 할까봐서!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오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라는 표시로 말이에요.

 

신부는 초라한데 신랑이 화려하게 오면 신부가 기가 죽잖아요.

그래서 신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신부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자신도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어미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동격이에요.

왕이신 신랑이 신부와 동격이 되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해요.

그래서 솔로몬은 왕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왕관을 쓰지 않고 어머니가 씌워준 긍휼의 왕관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업무를 볼 때는 왕권의 적법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아버지 다윗이 썼던 왕관을 썼어요.

신하들에게는 아비의 왕관을 쓰고 나타나요.

그러나 신부에게는 왕이 아니라 지아비로서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의 왕관을 쓰지 않고 어미의 왕관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왕이 아니라 지아비로서 오기 때문에 솔로몬이 직접 가마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비서를 보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와요.

왜냐하면! 그 옆 자리에 술람미를 앉히기 위해서 에요.

그래서 자기 자가용인 가마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재림을 하십니까?

그냥 천국에 앉아서 이리로 올라오너라!

그러지 않고 말이에요.

이는 자기 신부를 데리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요.

신부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그리곤 신랑 집으로 데리고 와요.

신부는 신랑을 따라 가면 영영 오지 못해요.

그래서 신부 집에선 떠나가는 딸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해 주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고 했지요.

예수를 찔렀다는 말은 복음을 핍박했다는 말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는 창세전 언약을 전하면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를 찌른 자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놈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하면서 핍박한 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예수님이 타고 있는 가마에 동승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마에 술람미가 앉으면 술람미를 핍박하던 예루살렘 여자들은 통곡을 하겠지요.

이를 두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이쿠~ 우리가 왕비를 핍박 했구나!

아! 이를 어쩌면 좋나!

이젠 우린 죽었구나!

통곡을 할 것입니다.

 

이제 그 날이 가까이 왔어요.

전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 한다고 믿어요.

물론 제 생각이에요.

그만큼 예수님을 사모하고 산단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주님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오늘 밤이라도 데리고 가시면 더 좋구요.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고 바울과 함께 커피 마시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천국엔 커피가 없겠지만 말이에요.

 

살기 좋아 보세요.

신랑을 기다리지 않아요.

천국도 사모하지 않아요.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천국은 그냥 립써비스로 전락해요.

세상이 천국인데 뭣 하러 천국을 기다려요.

세상이 지옥 같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에선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거기서 천국을 사모하라고!

신랑을 기다리라고!

 

복음 전하면서 고생을 해야지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을 사모하지!

왕처럼 행세 하면 예수님이 올까봐 걱정해요.

여기가 천국인데!

무슨 천국을 가고 싶겠어요!

어찌 하든지 오래 오래 살고자 불로초를 먹고 있잖아요.

 

복음 전하면서 개고생 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 오기를 소망해요.

빨리 죽기를 바래요.

주님 언제 제대 시켜 줄 건데요!

언제 데리러 올 겁니까!

날짜를 좀 앞 당겨서 오면 안 됩니까!

그런 다구요.

여러분은 어떤지 몰라도 전 그래요.

 

제가 제 아내나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 하면 난리를 합니다.

아빠는~ 무책임하게 죽는다는 말을 한다고 잡아먹을 듯이 난리에요.

이들이 어찌 복음 때문에 이단소리 들어가면서 목사 노릇하는 제 마음을 알겠어요!

몰라요.

영적인 일은 한 이불 덮고 살아도 몰라요.

 

무서워서 복음 못 전하겠어요.

그러니 빨리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죽을 날을 가디라는 것입니다.

주여! 언제 오시렵니까!

주님 언제 죽여주실 건데요!

 

술람미가 그 모진 세월을 솔로몬의 약속 하나 믿고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약속 하나 믿고 살고 있어요.

솔로몬이 약속대로 술람미를 데리러 왔으면!

예수님도 반드시 우리를 데리러 오십니다.

 

술람미가 지금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아 오시리니 인내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오늘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네요.

그냥 나팔 불면서 재림 하시는 그 주님을 생각하면서 황홀함의 그 여운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술람미가 받은 동일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그토록 사모하던 신랑이 왔습니다. 자기 안에 품고 살았던 그 신랑을 이제 실상으로 만났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실상으로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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