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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성경강해)47강. 귀신의 처소가 된 교회 (계 18:1-8)

by coroa 2021. 9. 1.

 

 

47강. 귀신의 처소가 된 교회 (계 18:1-8)

-.정낙원 목사

 

 

 

요한계시록 18장은 음녀의 멸망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멸망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감사하게도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빼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고모라가 멸망당할 당시에 천사들을 보내서 빼내 주셨듯이 종말에도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타락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세상의 타락과 교회의 타락은 같이 갑니다.

세상의 타락이 교회의 타락으로 나타나고 교회의 타락이 세상의 타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녀는 광의적인 면으로는 타락된 온 세상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말하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이야기입니다.

이게 창세기를 열면서 나타납니다.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속에 자기 백성 구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의인화 하면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멸망당하는 자가 있고 멸망 속에서 구원 받는 자가 있습니다.



이걸 마태복음 25장에서 종말의 심판 때 양과 염소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를 창세전에 이미 예비 된 자기의 곳으로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면 창세전에 양과 염소의 운명은 정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양과 염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에 의하여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 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당하는 음녀 속에서 구원 받는 백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아담의 집안에 가인과 아벨이 있고,

노아의 집안에 함과 셈(야벳)이 있고,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이삭의 집안에 에서와 야곱이 있고,

야곱의 집안에 라헬의 후손인 요셉과 레아와 몸종의 후손인 다른 형제가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나타납니다.

종말에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하늘에 거하는 자라고 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땅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음녀라고 합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한 형제입니다.

그러나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둘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민족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를 종이라 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하갈의 소생과 사라의 소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집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집안 속에 유업을 이를 아들이 있고 종이 있습니다.

약속으로 난 이삭은 아들이고, 육으로 난 이스마엘은 종입니다.



이삭은 죽은 여자인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자이고,

이스마엘은 산 여자인 하갈의 몸에서 인간의 힘으로 난 자입니다.

근데 인간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아들을 괴롭히는 인간의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도 야곱을 통해서 열두 방백을 주시고,

이스마엘의 후손도 열두 방백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는 영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 두 민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이 영을 이기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영은 하늘에 속하였고 육은 이 세상에 속하였습니다.

결국 영은 이 세상으로부터 축출 당하고 육이 이 세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아들들로부터 축출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하늘나라로 옮겨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는 나라라고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아들들이 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천국과 지옥이야기입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 이야기입니다.



천국 백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지옥 백성은 이 땅의 주인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천국 백성에게 하늘을 유업으로 주셨고,

지옥 백성에게는 땅을 유업으로 주었습니다.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는 가치관이 다릅니다.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고 육에 속한 자는 떡에 가치로 삽니다.

서로 살아가는 의미가 다릅니다.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의 먹거리가 다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땅에 속한 자는 떡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말씀을 들으면 행복하고, 땅에 속한 자는 떡을 먹어야 행복합니다.

이건 타고 나면서부터 가진 각자만의 속성입니다.



말씀이 좋은 사람은 말씀을 쫓아가고, 떡이 좋은 사람은 떡을 쫓아갑니다.

말씀이 양식인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세상의 떡 이야기를 하면 짜증이 나고,

떡이 양식인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하늘에 이야기를 하면 짜증을 냅니다.



말씀을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 하고,

떡을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의 떡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 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각종 짐승들에게 각자의 먹거리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고기를 먹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소가 고기를 먹으면 미쳐버리고, 사자가 풀을 먹어도 미쳐버립니다.

각자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이 둘을 한 집안에 두셨습니다.

한 집안에 속성이 다른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를 에서와 야곱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으로 떡을 샀고, 야곱은 떡으로 장자권을 샀습니다.



장자권으로 떡을 산 에서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떡으로 장자권을 산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에서는 땅에 속한 자를 예표하고, 야곱은 하늘에 속한 자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이 구조를 교회 안에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와 떡에 가치로 사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가치관과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녀 이야기는 세상이야기이면서 교회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는 교회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집안 이야기를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 저런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 속에는 격려의 말도 있고 책망의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려 가는 것은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부모의 심정을 통해서 헤아리도록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얼굴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간섭으로 나타납니다.

간섭은 사랑의 이면입니다.

간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이런 마음은 자식들은 모릅니다.

부모의 마음은 부모가 되어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자식은 아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이란?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정신 연령은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른이란?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를 말합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아도 부모의 심정을 아는 어른이 있습니다.

반면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워도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아이일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하여 희비 해요.

자식이 잘되면 기쁘고, 자식이 못되면 아픕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올 바른 길을 가도록 간섭하면서 어그러진 길을 가면 책망을 하고 때론 채찍질도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다툼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을 툭 하면 이방신을 섬깁니다.

그럼 하나님은 징계합니다.



사사기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타락 그리고 징계와 회개,,

이러한 악순환을 대략 400여 년 동안 반복합니다.

이건 광야 40년을 확대 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약 전체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더 확대하면 이 세상 역사 전체를 함축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교훈은 죄인들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하심으로 구원해 내는 것으로 구약을 마감하는 모습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약은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종말은 신약의 종말을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섬기는 민족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자체가 교회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온 이스라엘 지역에는 귀신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이스라엘을 다니시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구약 교회의 모습을 베데스다 못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보면 각색 병든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베데스다’ 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집에 병든 자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이 시대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그럼 교회에 각종 병든 자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시작이라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지막입니다.

그럼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인 종말의 교회상을 보여주고 있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종말 교회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럼 라오디게아 교회가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진단한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십시다.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음녀가 손에 금 잔을 들고 사치하고 연락하면서 스스로를 여황이라고 하면서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엇으로 부자라고 하고 부요하다고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까요?

예수님의 책망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것으로 인한 육적인 부요를 가지고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많고 먹고 살만 하고 아쉬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까 여기가 천국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은 냉엄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영적 진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그럼 교회의 부요는 당연히 하늘에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늘에 것은 없고 땅에 것으로만 가득합니다.

말씀은 없고 돈만 넘치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한데 영적으로는 피폐하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라는 건물들은 화려한데 그 속은 무덤과 같습니다.

마치 구약 교회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던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끌어 부었습니다.

독사 새끼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저주하였습니다.

이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1-7=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구약 교회의 모습이 어떤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저희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입술로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게을리 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저주를 퍼부은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아주 무섭지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책임이 따릅니다.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이 찾으십니다.

이는 부모가 많이 가르친 놈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잘하셔야 합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앞에서 냉수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자들을 보고서 “복음 안다고 하는 인간들이 어째 그 모양이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욕 들어 먹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자기 자유를 포기하는 것처럼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순교가 달리 순교가 아닙니다.

내 맘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순교인 것입니다.



복음을 알면 하나 둘씩 차압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질머리도 차압당하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도 차압당하고,

내 자유도 차압을 당해요.

그래서 고난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게 없었어요.

누릴 것 다 누렸어요.

신앙을 도리어 자기 영광을 챙기고, 유익을 챙기고, 배를 채우는데 이용하였어요.

이건 땅에 속한 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사는 저주 받은 뱀 새끼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일곱 가지 화(禍)를 살펴봅시다.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22,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3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모두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라고 하지요.

외식이란? 연기(演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 있는 척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속입니까?

사람들 눈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을 의식하고 살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을 사람들 입맛에 맞도록 풀이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많이 따르지요.

사람이 많이 따라야 돈이 되거든요.

결국 이 놈들의 관심사는 돈이에요.

세상 영광이에요.



그래서 뱀들의 근거지인 지옥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 흙이 바로 이 세상이고 지옥인 것입니다.



33-3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잘 보면 위선으로 가득한 뱀 새끼들이 누구를 죽였다고 합니까?

의인들을 죽였다고 하지요.

이건 음녀와 같아요.



음녀도 누구를 죽였나요?

성도들을 죽였어요.

음녀가 사는 큰 성 바벨론에 성도들과 예수 증인들의 피가 가득하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나 예수님의 재림 때 신약 교회는 영적으로는 똑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믿음으로 산 자들이 핍박을 받았고,

신약에도 믿음으로 산 자들이 핍박을 받아요.

그러니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로부터 마지막 순교자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가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갸” 라는 말은 “주의 복”이라는 뜻이에요.

이는 “주께로 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주께서 기억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책에 녹명하고 기억하는 자들은 모두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종말의 교회가 사단의 회가 되겠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의인들의 무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죽임 당한 자들을 데리러 오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약 교회에 보내서 죽임 당하게 하셨어요.

종말에도 두 증인들을 교회에 보내서 죽임 당하게 하십니다.



의인들이 어디서 죽느냐?

교회에요.

예수님도 구약 교회에게 죽임당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교회와 세상을 몽땅 멸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멸망시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음녀에게서 빼내세요.

마치 소돔고모라를 멸망하기 전에 롯을 빼내듯이 말이에요.

여리고를 멸망하기 전에 두 정탐꾼을 보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줄을 주어서 라합을 빼내듯이,

종말에도 타락한 교회 속에서 두 증인들을 보내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을 듣게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정의하시기를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외식으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교인 하나를 전도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면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저주대로 AD 70년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로마의 디도 장군을 보내서 성전을 불태우고 완전히 멸망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건 음녀의 멸망을 예표하고 있어요.

종말의 타락한 교회도 이렇게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성전의 지도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면서 호사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목사들이 돈에 환장을 하여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요.



예수님이 초림 때 저주한 구약의 마지막 때인 예루살렘 성전이나,

예수님의 재림 때 신약의 마지막 때인 음녀가 되어 버린 타락한 교회나 동일합니다.

영적으로 마귀의 수중에 떨어져서 다 죽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하늘에 물을 먹이지 않고 땅에 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게 하지 않고 멸망당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요.

하지만 먹을 생수가 없어요.



교회마다 뱀의 말로 뒤덮여 있어요.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말씀에 기근을 당하여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증거는 종말은 항상 교회의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흑암이 깊을 때 이 세상에 오십니다.

흑암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흑암의 깊음 중에서 빛을 불러내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창조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영적으로 동의어에요.

같은 의미에요.



예수님 초림도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재림도 동일합니다.

영적으로 흑암이 깊을 때 오십니다.



심판이 오기 전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들을 보내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노아 시대 죄악이 관영 할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서 멸망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미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초림 때도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종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증인들을 일으켜서 회개를 일으키고 타락한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교회인 음녀가 각종 더러운 영으로 가득한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흑암의 깊음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 것에 취하여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상고들도 음녀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치부하여서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으면 그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할까요.

하나님이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내 백성아 거기에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합니다.



교회가 귀신의 처소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마음이 무겁고 아픕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까요?

교회가 왜, 멸망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나요?



이 모두가 거짓 종들이 하늘에 말씀을 땅에 말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천국 복음을 세상 복음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에 가치로 복음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인 냥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들이 세속적인 가치로 교회를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이 왕 노릇하게 만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직분이 돈으로 거래가 된지가 오래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어요.



이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직분도 얻지 못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어도 돈만 많으면 장로 권사가 됩니다.

땅의 임금들처럼 사치하는 목사들에게는 돈 많은 장로와 권사는 자기 금고와 같습니다.

교회가 땅에 부요와 사치를 복이라고 가르치는데 어찌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있겠어요.

없어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가난은 죄악이에요.

교회가 작으면 조롱거리에요.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모든 걸 세상 가치인 물량주의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나는 무얼 힘으로 삼고 있나요?

돈인가요?

믿음인가요?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를 자기 배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란 뜻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항상 마귀는 인간에게 다가 올 때는 육신에 것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땅에 속한 자들은 환영을 합니다.

그래서 큰 음녀가 손에 금잔을 들고 사치와 연락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음녀들도 큰 음녀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이 땅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미혹 대상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밖은 마귀의 수중에 이미 떨어져 있어요.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교회 안에 땅에 속한 자들을 세상 것으로 추수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이 세상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늘에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천국의 복음을 들으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빈핍하더라도 하늘에 소망을 품고 살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하늘을 소망하고 몸뚱이는 땅을 지향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관념이에요.

참 신앙은 머리에도 하늘에 것을 소망하고 몸도 하늘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순애가 몸뚱이는 다이아몬드를 주는 김중배를 쫓아가면서 마음은 이수일을 사랑한다고요?

사기 치지 마세요.

그런 사랑은 없어요.

그건 사기에요.



몸이 가면 마음도 가고 마음이 가면 몸도 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천국이 믿어지는 사람은 천국을 위하여 살고,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것을 움켜쥐고 살아요.

이들은 땅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해요.

몸은 그릇이에요.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그림이 달라져요.

그 속에 하늘에 것을 담고 있으면 하늘을 향하여 살아가고,

그 속에 땅에 것을 담고 있으면 땅에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졌는지 하나님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지는 그의 몸뚱이가 무엇을 그려내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 지향하는 삶이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 가치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하늘에 영적 가치로 산다는 것은 고난 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은 땀 흘린 것과 비례하여서 주어져요.

물질을 얻으려면 물질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신앙은 물질을 얻고자 투자하는 것보다 말씀을 좇아가고자 하는 시간이 많아요.



그러므로 참 신앙은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늘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당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귀신의 믿음은 입술로는 천국을 말하지만 몸은 세상을 쫓아가요.

떡의 가치로 살아가요.

교회에 와서도 마음은 세상에 가 있어요.

말씀을 들어도 떡이 눈앞에 어른거려요.

이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땅에 속하였어요.

땅 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천국을 소망 삼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어요.



이것은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이 세상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육을 가지고 영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하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세상 것을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구약의 육적인 복을 가지고 신약의 영적인 복을 설명하고 있는데, 땅에 속한 거짓 종들은 신약의 영적 복을 가지고 구약의 복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걸 문자적 설교라고 합니다.



구약은 자녀도 많고 가축도 많아야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육적인 복이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어요.

이게 산상보훈의 팔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팔복은 물질적인 것이 없어요.

모두가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산상보훈의 팔복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7복은 “행함”과 같습니다.

이것은 팔복을 받은 자들은 7복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비교 하여 보세요.



산상수훈의 8가지 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를 받을 것임이요 (4)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6)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0~12)​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이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인하여 핍박 받고,

전부 마음에 관한 것이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오순절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천국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물질적인 복이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심령의 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가나안 땅이 신약에서는 심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요.

실제 천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신앙이 실제적인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에 우리 몸으로 이루어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심령의 복이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7가지 복​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3)​

2).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4:13)

​3).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4).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9:9)​

​5)​.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계 20:6)​

​6).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 22:7)​

7).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계 22;14)​



요한계시록의 복은 모두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처럼 목 베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복을 보세요.

모두가 실제로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으로 살면 실제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는 관념적 신앙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실상은 하늘나라에 있어요.

하나님은 애굽에 허상을 쫓아가는 자기 백성들을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켜서 애굽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라인 실상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어요.



모세는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겼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겨 주세요.

하늘나라가 우리가 가야 하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것을 주시지 않고 천국에 복음을 주시고 천국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인가요?

우상과 싸우는 자들이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겁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자꾸만 심어 놓는 일을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우상성이 자리 잡을 때입니다.

우상성은 이 땅에 것을 쫓아가게 해요.

그러므로 우리도 땅에 것을 쫓아가면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원수는 이 땅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섬기는 자라고 한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적용하면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들이에요.

모두가 예수를 이용해서 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잖아요.

교회와 교인들이 물질을 추구하는 땅에 가치관으로 엄몰 되었잖아요.



음녀란? 다른 게 아니라 땅에 가치로 살면 음녀에요.



교회 안에 땅에 가치가 자리 잡을 때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왔느냐 안 왔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아요.

왜 교회에 왔느냐가 중요해요.



마귀는 땅에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땅에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진리면에서는 교회 안에 뱀의 말을 하는 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요.



왜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까?

참 선지자의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 있고 거짓 선지자는 마귀 편에 서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빼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반대로 마귀는 이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그럼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참 선지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요?

이 땅에 복을 말할까요?

하늘에 복을 말할까요?

하늘에 복을 말하겠지요.



그럼 거짓 선지자는 무슨 일을 할까요?

땅에 복을 말하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을 땅에 붙잡아 두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땅에 서 올라온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이 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사명을 주었어요.

무슨 사명인가 하면 뱀의 후손들을 땅에 붙잡아 두라는 사명이에요.

반대로 하늘에 속한 자들은 땅에서 뽑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어디서 하는가 하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자들이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각종 더러운 영들을 보내서 귀신의 처소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귀신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하니까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생각하지 마세요.



말도 점잖게 하고,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윤리 도덕적이고,

지극히 온화 하고 자상해요.



외모적으로 풍기는 아우라도 부처님처럼 자애로워요.

바울은 거짓 종들을 광명의 천사라고 했어요.



예수님과 대 제사장과 비교하면 누가 더 인간미가 넘칠 것 같으세요?



예수님일까요?

대 제사장일까요?

대 제사장이에요.



예수님은 싸움꾼처럼 비춰졌어요.

성전에 들어가서 누구도 하지 않는 일들을 했어요.

상을 뒤집어엎고 양을 쫓아내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어요.

마치 드라마에 자주 보는 장면처럼 조폭들이 식당에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예수님도 성전을 다 뒤집어엎어 놓았잖아요.



우리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자비롭고 온화하고 따뜻하다고 믿는 것이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몰상식한 불량배에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다른 사람들 제사 지내는 것을 뒤집어엎는데 어찌 선량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거기다가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누구든지 자기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 한다고 하지를 않나?

완전히 또라이에요.



그 시대 신앙의 정서가 율법을 열심히 잘 지켜야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면으로 율법을 우롱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누가 정상으로 보겠어요.

오죽하면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미쳤다고 했겠어요.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라 하겠어요.

바울도 예수님처럼 싸움꾼이에요.

얼마나 독선적인가 하면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상종할 가치를 못 느낄 정도로 자기 아집에 갇혀 있었어요.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는 그렇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제일 상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줄 아세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에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 자에요.



세상은 융통성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우리는 서로 인정하고 받아 주는 사람을 대인배 라고 합니다.

성경을 닫으면 이러한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외고집인 분이 나옵니다.

이름하여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 이외 신은 없다”고 합니다.

“나 이외 신은 다 가짜”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게 얼마나 받아들일 수 없는 독선적인 말인 줄 아세요.

애굽은 모든 신을 인정했어요.

애굽에는 하나님 말고 수많은 신들이 있었어요.



열 가지 재앙을 일컬어 애굽에 신들을 혼을 냈다고 했지요.

이건 애굽에 신은 열 개라는 뜻이 아니에요.

수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10이라는 말은 충만수에요.



애굽은 세상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어요.

이걸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우주 만물 모두가 신이에요.



그래서 십계명에도 하늘에 것이나 땅에 것이나 땅 아래 것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은 하늘 위나 땅에나 땅 아래나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만 신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 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어찌 수용하겠습니까?

못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툭 하면 이방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 근성은 못 버려요.

안 버려져요.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시키고 난 후부터 광야 40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나 이외 신은 없으니 하나님만 섬겨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틈을 타고 거짓 선지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인간들 편에 서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하나님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도 그 신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그의 사상을 동조하는 개신교 안에 자유주의 진보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이외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타 종교도 인정하라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인정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 이외 다른 신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겠어요.

못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수용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이 종교 통합을 외치고 있어요.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통합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종교는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 같다고 하면서 종교간 교류를 하고 인류공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종국적으로는 모든 종교가 통합을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더러운 영들이에요.

이들이 교회를 귀신의 처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이들의 손 아귀에 장악을 당하였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같다고 하면서 종교간 대화를 하고 통합을 이루는 운동을 하자고 하는 WCC를 모든 기독교 방송들이 찬성을 하고 있어요.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귀의 세력처럼 매도하고 있어요.



이 시대 기독교 방송들은 돈에 미쳐서 뱀의 말을 하고 있어요.

뱀의 말을 하는 자들의 설교들을 시간 시간마다 쏟아내고 있어요.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고 하니까 사도 요한이 기이히 여기지요.

이게 지금은 기독교 방송이 마귀의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뱀의 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교회가 어떻게 뱀을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고 있나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는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뭘 그리 기이히 여기느냐고 하지요.

종말이니까 그런 겁니다.



종말이란? 타락을 말해요.



하늘에 말고 땅에 말이 혼합이 되어서 홍수를 이루고 있는 때를 말해요.

홍수가 나면 모든 기식하는 것들이 숨을 못 쉬고 죽어요.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요.



이게 사회현상론으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은 그 시대의 정신을 함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문화와 예술을 보면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는 그 시대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이 시대 문화를 한마디로 하면 음란 문화에요.

온 세계가 음란 문화로 뒤덮여 있어요.

과거에는 음지에서 행하여지던 성담론들이 이제는 양지로 나왔어요.



TV나 영화 모두가 음란과 폭력과 귀신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인간들이 음란에 젖어 있고 폭력적이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반증이에요.

이 시대 좀비들 영화가 난무하지요.



좀비가 뭔가요?

귀신이에요.

사단이 문화와 예술을 장악하여서 인간들로 하여금 귀신을 친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침투해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 안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어디가 교회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사라졌어요.



목사들을 돈 맛을 알고 돈에 노예가 되었어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성경의 말씀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교회 안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고 말았어요.

꿩 잡는 게 매라고 이 시대 교회들은 돈 많고 교회가 크면 진리의 집단으로 인정을 받아요.



돈이 방송국도 장악하고 있어요.

기독교 방송국이 왜 뱀의 말을 하는 자들의 나팔수가 되었는가 하면 땅에 가치를 추구하는 대형교회들의 돈 줄에 목이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복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내 세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 종교 방송들을 보세요.

불교 방송이나 기독교 방송이나 카톨릭 방송이나 용어만 다르지 그 지향성은 다 같아요.

내용을 들어 보면 대동소이해요.

그리고 모두 다 ‘이 방송은 신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이 되오니 선교를 위해서 후원을 많이 해 주세요’ 라고 해요.



결국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돈인 겁니다.

후원하면 선교를 하는가요?

안 해요.

생색내기로 쥐꼬리만큼 하고 새로운 건물 사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선교 명목으로 돈 갈취하고서는 학교다 병원이다 수련원이다 교육관이다 예식장이다 주차장이다 문화센터다 하면서 부동산 늘리는데 경쟁하고 있어요.



교회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주어지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사회사업 하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어요.



교회의 모임이 동호회 모임이 되고,

교회가 이익의 수단을 위한 비즈니스 장소가 되었고,

결국 교회가 장사하는 시장 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구원이란?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랬어요.

갈대아 우르가 우상의 도시인 귀신의 처소였어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에요.

아브람 역시 아버지를 따라 우상을 섬겼어요.



우상이란? 인간들이 배를 불려주는 신이에요.

떡을 주는 신이에요.

그래서 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 친근해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의미를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이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에요.

언약이 우리를 존재케 하였어요.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서 언약을 모르고 살았어요.

자기 몸을 신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게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 속에는 이중적인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살던 아브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어요.

반면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나안으로 빼내심을 입은 아브라함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가나안으로 빼내신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아브람이 살던 동네가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다른 말로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음녀가 사는 곳을 뭐라고 하는가요?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영적으로 아브람이 음녀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음녀가 누구라고 했나요?

타락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왜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나요?

이는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여야 하는데 이 세상 것으로 인간들의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이 땅에 기운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그럼 하늘에 것을 주어야 합니다.

돈에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살도록 하여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돈에 가치로 살게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세상 가치가 그대로 들어와서 세상의 지위가 그대로 통용이 되어서 세상의 재벌 회장님이 교회 안에서도 회장님으로 대우 받고 있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사(師)” 자가 들어가는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교수, 사장과 같은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믿음과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주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보면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합니다.



연예인에서부터 기업인과 정치인으로 두루 망라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 부분이 교회 직분자들이에요.

예전에 S 리스트 라는 것을 남겨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K 기업의 S 회장도 감리교회의 장로였어요.



엊그제 예전에 시장이 되어서 시(市)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던 분이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지고 난 후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신 분도 교회의 장로였어요.

며칠 전에 롯데 그룹의 2 인자라고 하는 이00 부회장도 교회의 장로에요.



신문 기사 속의 유서의 내용을 보면 영육 간에 피폐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교회의 장로님이 왜 영육 간에 피폐합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살지 않고 떡의 가치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떡에 가치로 사니까 떡에 문제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위하여 죽지 않고 돈을 위하여 죽습니까?

무엇이 그리 지킬 것이 많아서 자살을 합니까?

결국 그 속에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최후의 자기 방어 수단이에요.

자신이 중시 여기던 가치가 무너지면 죽음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의 가치로 살던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자살을 하고,

윤리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람이 그 가치가 무너지면 견디지 못해요.

청렴결백을 자신의 명예라고 여기던 사람이 그 가치가 무너지면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뭣이 그리 중 헌디!

뭣이 그리 중 허길래!

그 꼴랑 죄인의 명예와 자존심이 무엇이길래!

교인들이 하나님의 주신 목숨을 끊는단 말입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성도는 자살 할 수가 없어요.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면 자살 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맘대로 행사 할 수가 없어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아요.



성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세요.

성도는 사는 것도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죽는 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어요.

성도는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명예에 손상 가는 일을 당하여도 자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킬 명예도 지킬 자존심도 없어요.

지켜야 하는 것은 오직 복음이에요.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 때문에 이 땅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천국에서 영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온산에 어린 양과 더불어 서 있는 144000명은 모두가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에요.



이는 짐승에게 경배치 않고 믿음에 정절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아니고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자살 한 자들이 아니에요.



모두가 복음 때문에 타자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에요.

그래서 최초의 성도를 상징하는 아벨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성도를 상징하는 사가랴의 죽음을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처럼 땅의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은 갈 수가 없어요.



천국 자체가 지옥을 반대하고 있어요.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지옥으로 살던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은 이 땅에서 복음 때문에 아픔을 당하고 애통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을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우리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잖아요.

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합니까?

이는 그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살을 한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하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자 자살한 사람은 원수가 없어요.



가룟 유다는 누가 죽이지 않았어요.

괜히 자기가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지킨다고 목매달아 죽은 겁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악인들이 행하는 자기 의 지키기인 것입니다.



이 시대 자살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도의 생명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자살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하는 소리에요.



성도는 언약으로 낳고 언약을 위하여 살다가 언약 때문에 죽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세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용치 못하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때문에 순교는 할 수가 있어도 떡을 위하여 자살 할 수는 없어요.

자기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끊지를 못해요.

성도는 죄를 지어도 베드로처럼 수욕을 감당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가룟 유다처럼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요.



자살이란? 자기 의(義) 챙기기에요.



세상적인 의로 살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의가 붕괴되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 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의가 없으니까 죽음으로 자기 의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살로서 난 잘못이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수모를 당해도 사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어려워도 사는 것이에요.

욕을 먹고, 음해를 당하고, 조롱과 모욕을 당해도, 모든 판단은 주께 맡기고, 주께서 다 아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수욕을 당하면서 사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어려워요.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의 사도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욕인줄 아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겠어요.

그러나 그 수군거림을 이기고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바울도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에요.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에요.

그런 그가 예수를 전하는 사도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입니까?죽고 싶을 거예요.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님이 수욕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다윗 왕도 보세요.

충신의 아내를 빼앗고 급기야 충신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하였어요.

완전 범죄를 획책하다가 온 나라에 들통이 났어요.

왕의 직위를 유지 할 수 없는 상태에요.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았어요.



신하들이 뭐라고 수군 거렸겠어요.

얼마나 조롱하고 비웃었겠어요.

만고에 충신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은 악한 왕이라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았겠어요.

그럼에도 자살하지 않았어요.

평생 죄인의 멍에를 지고 살았어요.



살면서,,

맞습니다.

난 살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뻔뻔히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입니다.

이런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입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살았어요.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겁간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살았어요.



오빠가 여동생을 강간하고,

형제들끼리 싸우고,

도무지 왕의 가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음에도 살았어요.



거지가 돌을 던지면서 “당신이 왕이냐” 라고 조롱하였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믿고 수욕을 감내 하면서 살았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쪽 팔려도 수욕을 무릅쓰고 사는 게 신앙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삐까 번쩍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금수저 물고 사는 게 아니에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하심이 너무도 커서 내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내 자존심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경우에도 자살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끝까지 사세요.

자살은 악이에요.

그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에요.



수치스럽더라도 살고,

아프더라도 살고,

사업이 망해도 살고,

힘들더라도 사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사세요.



신앙으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은 말 할 수 없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증거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거지발싸개 같이 냄새나는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받았음에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잣대로 살게 하여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 소망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삼고 살게 하여야 해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는 세속적 가치로 엄몰 되었어요.



목사들이 하늘에 것을 주지 않고 땅에 것을 주고 있어요.

교인들로 하여금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기복주의 신비주의 신앙으로 세속화 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가 없고 귀신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니 땅에 가치에 흠이 나면 목사가 자살을 하고 장로가 자살을 하고 집사가 자살을 하고 신자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자는 떡에 사라지면 자살을 해요.

세상의 가치로 사는 자는 세상 가치가 상실이 되면 자살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지가의 언약의 가치로 사는 성도는 떡이 사라져도 세상의 명예와 힘이 사라져도 자살하지 않아요.



성도가 죽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일컬어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빼내심을 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종말에는 타락한 교회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로부터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의 죄가 뭔가요?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왕 노릇하였다고 합니다.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합니다.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고 합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돈을 가지면 뭣합니까?

그 속에 믿음이 없는데,,,

음녀처럼 세상 가치로 사는 사람 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수도 없어요.

무늬만 성도에요.



겉은 번드르르 하지만 속은 세상의 배설물로 가득해 악취를 풍기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탐욕으로 인한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교회 건물은 수백억을 들여서 예루살렘 성전처럼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지만 그 속에는 돈에 미친 강도들이 우굴 거리고 죽은 송장들만 가득합니다.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에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구약교회가 온갖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귀신의 처소였어요.

제사장들이 성전을 장터로 만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 시대 교회 역시 구약 교회와 똑 같아요.

교회가 비리의 온상이 되고 말았어요.

부패의 집단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기 전에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하십니다.

부디 이 음성이 들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대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만물이 소리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믿어지도록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말게 하시고 깨어서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옵소서. 복음이 지식으로 남게 하지 마시고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지 말고 실제화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속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설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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