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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성경강해)48강.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계 18:1-8)

by coroa 2021. 9. 6.

 

 

48강.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계 18:1-8)

-.정낙원 목사

 

 

 

요한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 세력을 음녀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들이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소리는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말씀 하신 내용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으면 하나님이 교회에서 나오라고 할까요?

교회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교회에 외치는 말씀입니다.

역사 속에서 마지막으로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 마지막의 외침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고 그들이 하는 일에 참예치 말고 그들이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나오라고 할까요?

이는 그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전에 롯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만 소돔 고모라가 아니고 구약 교회가 그러했어요.



이사야 선지지가 이스라엘을 행하여서도 똑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 백성들아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말의 교회가 또 다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받을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역사는 반복이 된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진리입니다.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그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왜 이스라엘을 소돔고모라라고 했나요?

이는 신앙이 외식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헛되게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초림 때는 외식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종말에는 교회의 세속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세상 것에 취하여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가득 채워서 부와 사치와 세상 일락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재물은 많은데 하나님에 대하여는 죽어있습니다.

하늘로 가야할 자들이 전부 땅 강아지같이 흙만 퍼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교회들에게 편지를 해서 땅에 것을 쫓아가지 말고 하늘에 것을 쫓아가라고 알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땅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출(出) 땅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로 시작을 합니다.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원인에 의하여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였으니까,

그럼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겠지요?

성경은 그 원인을 창조 이야기로 말 해주고 있습니다.



창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우리가 아는 창조란? 어떤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는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중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 1절에서는 분명하게 천지를 창조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천(天, 하늘)은 보이지 않고 땅만 나타납니다.

그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흑암 속에 빛이 가두어져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어둠이라는 땅에게 빛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흑암이 빛을 토해냅니다.

빛이 흑암을 찢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망이 나사로는 무덤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덤으로 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하십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을 열고 나옵니다.



성경은 나사로가 사망이라는 무덤에서 나온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낸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사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움” 이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나온 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를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합니다.



창조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구성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드라마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 주제는 드라마 전편의 모든 내용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어느 내용이든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요즘 방영되는 “임진왜란” 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이 왜놈들을 무찌르고 백성들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드라마의 중심 내용입니다.



드라마 속에는 민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민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그들의 삶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퇴하여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이방 나라가 등장하고, 적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타락과 구원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려면 반드시 타락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무덤에서 꺼내서 살려내려면 먼저 죽어서 무덤에 갇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 아래 놓여 있음이 먼저이고, 죽음에서 건져냄이 나중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 속에는 자기 백성들의 실체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자기 백성들이 죄에 가두어져 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 “예수” 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이순신 장군이 백성들을 전쟁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듯이,

성경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이미 400년 전에 아브람 언약으로 계획이 된 일입니다.

아브람 언약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400년의 갭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430년 만에 이스라엘이 나왔지만 1 대를 100년으로 쳐서 4대 만에 나온다고 언약을 하였으므로 통칭 400년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20=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1절을 보면 이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합니다.

이 후란? 아브람이 소돔 고모라 전쟁에서 조카 롯을 되찾아 오고 난 후라는 뜻입니다.

14장은 아브람이 조카 롯을 전쟁에서 이기고 되찾아 오다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떡과 포도주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 것은 성도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와 전쟁을 하여서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자들을 찾아 와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가 바로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나 초태생이나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초태생을 다른 말로 장자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이들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장자인 것입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는 모두가 장자로 인정을 받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 아브람 언약이 어떻게 체결이 되는지 성경의 구조를 먼저 살펴보고 갑시다.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복에 조상으로 삼아버립니다.

13장에서는 아브람과 조카 롯이 함께 살 수가 없어서 각자 좋은 곳으로 찾아서 떠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합니다.

즉 네가 이 땅에서 살겠다고 하면 내가 가나안을 떠나고 네가 이 땅이 싫다고 떠나면 내가 이 땅에서 살겠다고 합니다.



롯이 보니까 지금 살고 있는 땅 보다는 가나안 건너편에 있는 요단 들판이 물도 많고 풀도 좋아서 가축을 기르기에는 훨씬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아브람에게 “삼촌 나는 가나안 건너편에 있는 요단으로 가서 살겠다”고 하면서 식솔들을 데리고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롯이 보기에 좋다고 찾아간 그 땅이 장차 유황불로 멸망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 때는 아직까지 소돔 고모라가 타락하지 않은 때입니다.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어요.




14장은 앞에서 말했듯이 아브람이 전쟁을 하여서 포로로 잡혀 있던 조카 롯을 구출해 옵니다.

12장 아브람의 부르심에서부터 14장 롯을 구출해 오는 장면은 아브람 언약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람이 포로로 잡힌 조카 롯을 구원해 오는 것이 400년 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가 포로로 잡힌 조카 롯을 구출해 왔듯이 장차 내가 네 후손을 이방 나라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것을 언약 하신 것입니다.

그럼 아브람 언약을 어떻게 맺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와서 하신 언약의 내용은 후손과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때는 아브람에게는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이 후손을 준다고 해도 시큰둥하면서 여기 있는 종인 엘리에셀이나 잘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니다! 네 후사는 네 몸에서 날 자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 언약은 하나님이 지켜 내겠다는 뜻으로 쪼갠 고기사이로 하나님 홀로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지켜내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아브람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맺을 때는 우리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언약을 하신 후에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만물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언약을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창세전에 언약을 하실 때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이므로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언약을 위하여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언약하신 하나님이 만물 속에서 언약을 이루어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한 도구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7=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6절부터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미암았다” 는 말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으니 그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하며,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만물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것과 땅에 것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육(肉)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靈)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것은 영이고, 땅에 것은 육입니다.



그리고 보좌들과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력 또는 권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는데 국가적 모습으로 펼쳐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이스라엘과 애굽으로 나타났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잘 보시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이건 창세기 1장 2-3절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흑암에서 빛을 불러냈습니다.

빛을 흑암에서 빼내서 낮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고 합니다.

이 낮과 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낮과 밤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낮과 밤은 태양과 달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생긴 것입니다.

알다시피 태양과 달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이 말하는 낮과 밤은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가 어디인가요?

죄와 사망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은 것이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의와 생명의 세계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걸 아브람 언약에서는 400년 동안 이방나라에서 종노릇하던 아브라함 후손들을 사 대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빼내심을 입는 것은 모두가 아브람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이 이스라엘을 종살이하게 하다가 빼내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이 먼저이고 후손은 나중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에 이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언약에 의하여 애굽에서 종살이 하였고,

언약에 의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언약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도 하였고,

언약이 출애굽을 하게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언약의 후손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가지고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민족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는 비언약의 민족이 되겠지요.



이 세상에는 두 민족이 있어요.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이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을 천국 백성이라고 하고, 비언약의 백성을 지옥 백성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후손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고, 비언약에 속한 자들을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합니다.



세상속에는 이 두 민족이 섞여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입니다.

또한 애굽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섞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빛에 속한 자는 언약의 후손이고,

어둠에 속한 자는 비언약의 후손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속에서 빛에 속한 자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서 아브라함 후손들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치 말고 그가 받을 재앙에 참예치 말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나오라고 합니까?

음녀에게서 나오라고 하지요.

그럼 음녀가 비언약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식으로 말하면 음녀가 흑암으로 빛에 속한 성도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식으로 말하면 애굽이 이스라엘을 종살이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예수님 초림 때 언약의 후손들이 율법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는 타락한 교회인 음녀가 성도들을 죽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예표합니다.

그럼 신약의 성도들도 언약으로 다스려집니다.

언약의 의하여 종살이도 하고,

언약에 의하여 종에서 풀려나기도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국가 권력에 종살이 하다가 풀려났지만,

신약에서는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로부터 종살이 하다가 풀려났습니다.

이게 언약적으로는 율법이라는 옛 언약에서 은혜라는 새 언약으로 옮겨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이 되려면 먼저 가두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겠지요.

어둠이 빛을 가두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교회 식으로 말하면 타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교회가 극심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 하실 때에는 반드시 타락이 극심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한 사건이 창세기 1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곳을 방문 하여서 거기서 빛을 빼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 하나님이 방문하십니다.

이 때를 죄악이 관영하다도 합니다.



소돔 고모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곳에서 롯을 끄집어내십니다.



출애굽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초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으로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음녀인 타락한 교회가 성도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종말은 항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아브람 언약을 보면 이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16절을 보세요.



창 15:16절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네 자손이 사 대 만에 돌아온다고 하지요.

왜 사대 만에 돌아오느냐 하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는데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이 내가 쫓아낼 만큼 죄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르익으면 쫓아낼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네 후손들이 이방나라에 가서 셋방살이 좀 하라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아모리 족속에서 방을 빌려 주었어요.



근데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할 때는 아모리 족속들이 착하게 산 겁니다.

이 놈들을 쫓아내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명문은 다름 아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후손들이 사 대동안 이방나라에서 종노릇을 하는 동안 아모리 족속들은 죄악을 쌓는 시기인 것입니다.

점점 더 타락하여서 집 주인인 하나님이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고 “이제 방 빼” 라고 할 때까지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방 나라에서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으로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빼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직까지 이 세상의 죄악이 관영치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심판 하겠다는 기준에 조금 미달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관영이라는 말은 목구멍까지 꽉찬 상태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을 때를 말합니다.



인간 지음을 한탄할 정도로 인간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엄청난 타락을 할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처럼 모두가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때가 될 것입니다.

참 성도들은 7000명과 같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숨겨져 있다는 것은 미미하다는 말입니다.

힘이 없고 볼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와 같아져야 합니다.

성경은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나요?



출애굽기 1장을 봅시다.



출 1: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 13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14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다스린다고 하지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알다시피 요셉은 애굽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기근으로부터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시편 105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기근이 오기 전에 한 사람을 앞서서 애굽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구원자로 드러내고자 온 세상에 기근을 일으킨 것입니다.



온 세상이 기근으로 죽어 갈 때 하나님은 요셉을 구원자로 내 세워서 살려내십니다.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을 애굽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됩니다.

바로가 인장 반지를 요셉에게 주었다는 것은 통치권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요셉의 도움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고 부국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극을 한 것입니다.

그리곤 요셉의 형제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은혜를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배은망덕하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속한 백성들을 핍박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게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권념하셨다고 합니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 말은 아브람과 한 언약의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브람과 언약한 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이방나라에서 빼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아브람과 언약을 할 때 아모리 족속이 아직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으므로 네 자손이 사 대만에 이방나라에서 객으로 살다고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람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려면 죄악이 관영하여야 합니다.

그동안 애굽도 요셉을 알던 왕이 다스릴 때는 죄악이 관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한 때에 맞추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일으켜서 아브라함 후손들을 핍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해석을 하면 이러합니다.

요셉이 기근으로부터 애굽을 구원한 것은 마치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은 외식으로 가득했습니다.

신앙이 외식으로 가득하다는 말은 온전한 말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건 영적으로 기근이에요.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율법교회로부터 빼내셨습니다.

이게 12 제자로 나타났습니다.

12 제자는 구약의 12 지파를 대신 하는 자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12제자로 세워진 신약 교회는 2000년 동안 엄청난 부흥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가 가까워지자 교회가 급속하게 타락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예수 이외도 구원이 있다고 하면서 예수를 배도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 요셉의 족속들을 괴롭히는 배은망덕 하는 일을 자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인간의 피로 세우고 있어요.

인간의 피란 인간의 희생으로 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 예수의 의는 사라지고 인간들의 의만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적그리스도를 가지고 인간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만 남게 하여야 할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왜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남기고 있나요?

이는 인간들의 희생이 의롭다 하여야 인간들이 희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희생을 끄집어내서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여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희생도 의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 외에 다른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르쳤는데,

이 시대 목사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의외에 율법의 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인본주의 사고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 교회이지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로 세워진 교회를 교회라 하지 않고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에서 증거되는 말씀을 포도주라 하지 않고 음행의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낡은 사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다가 보니까 믿음보다 인간의 행함이 더 소중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말았어요.

목사들이 인간의 행함을 의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충성도를 가지고 성도들의 믿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인간들이 희생을 담보로 이 땅에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주겠다고 하는 것을 주고자 합니다.

이에 땅에 속한 자들은 음녀의 말을 듣고 이 땅에 가치인 떡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서 천국복음을 버리고 땅에 복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인본주의 신앙으로 교인들의 신앙을 땅 차원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세속화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하면서 물질의 가치를 쫓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안에서 세상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이 돈 많은 자는 믿음 좋은 자로 대접을 받고 가난한 자는 믿음 없는 자로 치부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게 돈의 가치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신앙이 돈으로 저울질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돈 많이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이 되어서 교회의 중직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돈이 없으면 장로나 권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직분이 돈으로 거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손에 금잔을 들고 포도주에 취하여 부와 사치와 쾌락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땅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다가 보니까 영생의 천국복음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치고 하늘에 가치를 외치는 자들은 인기가 없습니다.

급기야 혹여라도 부목사님들이 복음을 전하면 인본주의 세속적 가치로 목회하는 담임 목사의 목회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쫓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애굽이 되었어요.

거짓 목사들이 바로가 되어서 교인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영혼을 사고팔고 있으며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성도들을 죽이고 있느냐?

이게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언약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려면 죄악이 관영하여야 해요.

그래서 종말의 교회들이 예수님의 초림 때처럼 강도의 굴혈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또한 극도로 문란한 타락의 현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이 짐승이 되었어요.

자기 유익을 위하여서는 남을 서슴치 않고 죽여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서운 시대가 되었어요.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로 힘을 삼지 않고 돈을 힘으로 삼고 있어요.

재벌들이 문어발 경영으로 몸집 부풀리기 경쟁을 하듯이 교회들이 서로 세력 확장에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돈의 가치가 복음의 가치를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악세서리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복음은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는데 이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어요.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라는 땅에 이야기와 육신의 이야기로 가득해요.

그래서 “내 백성아 그들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니까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고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속에 가두어져 있는 빛을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어둠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나온 자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는 “빼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장소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이고,

신앙적으로는 율법 신앙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이고,

교회적으로는 타락한 교회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타락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마디로 하면 타락의 역사에요.

타락이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빼내 주신 하나님을 떠날까요?

또한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을 섬길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귀찮게 하고 우상은 편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소원을 빼앗아 가는데 우상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가요.



신을 찾아도 자기 몸을 행복하게 해 주는 신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온 인간은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곧 신이에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해요.

자기에게 유익하면 선이고 불이익을 주면 악이에요.

죄인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마귀가 주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인간들 곁에는 항상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들로 포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보기에 좋은 선악과가 생명과를 가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걷어 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을 빼앗고 인간의 눈을 가리는 것들을 치우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마귀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이란? 인간을 즐겁게 해 주면서 시작이 되어요.

인간을 긍정하면서 타락이 시작 되어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세속화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세상 놀이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신앙이 뭔가요?

나를 위하여 살던 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우르 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가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로 빼내십니다.

빼내 놓으시고 네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게 고난이에요.



아브라함의 인생은 인간적으로 보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가 훨씬 행복했습니다.

아브람은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 온 순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주변에는 자기 행복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포진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방인들처럼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살고자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여지없이 간섭하여서 아브라함의 뜻을 깨트려버리는 일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싫어요.



그러므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픔이고 눈물 흘리는 일인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말할 때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다고 하지요.

이것은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눈물 흘리는 일이고, 고통당하는 일이고, 아픔 당하는 일이고, 곡하는 일이고, 죽임 당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타락하느냐?

인간들에게 이 세상의 행복해 주겠다고 하면서 부터입니다.

인간의 몸은 이 땅에 것을 소유 할 때 행복함을 느껴요.



좋은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 하고,

좋은 집에서 살 때 행복해 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행복해 하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때 행복해 해요.



세상 것을 많이 가져야 행복해 해요.

그래서 마귀는 세상 것으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땅에 속한 자들은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 타락하는가요?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떨 때에 하나님과 가깝고 어떨 때에 멀어지는가?

확인해 보세요.



우리는 살기 좋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살기 어려우면 하나님과 가까워져요.

우리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몸뚱이의 평안함을 챙길 때 타락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인간들은 부요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그 증인들이에요.

우리 생각에는 부요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로 나타나요.



부요하면 하나님을 떠나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부요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부요하면 그 부요를 지키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요.

이러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부요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요.

하나님을 우상숭배식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 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외식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 신앙을 정의하기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에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마음에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기복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액땜 방지책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주일 날 놀러 가야 하는데 예배 안 드리고 가면 찝찝하니까 아침 일찍 출근 도장 찍듯이 하나님 앞에 얼굴 한번 내 밀고는 놀러 가는 것과 같아요.

교회들은 이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붙잡아 두어야 금전적으로 손해를 안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악이라고 하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떠나니까 거짓 목사들은 무당 굿 하듯이 액땜 방지용 예배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이걸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고 외식이라고 합니다.

몸뚱이가 편해지면 신앙은 반드시 편의주의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가난 할 때는 죽기 살기로 했는데 먹고 살만 하면 적당주의로 흐르게 되어요.

간절함이 사라지니까 적당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타락은 항상 부요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이 차고 넘칠 때 나타나요.



교회가 왜 음녀가 됩니까?

물질 때문이에요.

음녀는 쉬운 말로 몸 파는 여자인데 여자가 몸을 왜 팝니까?

돈 때문입니다.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돈을 쫓아간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소식을 전해야 할 교회가 땅에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천국을 사모하고 살게 하여야 하는데 이 땅에 것을 사모하게 한단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경주에 지진이 나서 온 나라가 난리입니다.

방송마다 지진을 이겨내는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각양의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이이야 그렇게 하여야 하겠지요.

그들에게는 땅이 전부이니까요.

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각성해야 합니다.



아 이 땅은 온전한 곳이 아니구나,

온전한 곳은 하늘에 있구나,

하나님이 우리가 땅만 바라보고 사니까

이 땅은 장차 멸망 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진을 피하는 대책을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재앙으로부터 피할 대책을 모색해야지요.

그러나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마음은 늘 하늘에 두어야 해요.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종말론적 징후들을 보면서 때를 가늠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후들을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을 봅시다.



마 24:1-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눅 21:5-28=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7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에서는 사회적인 종말의 징후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신앙적인 종말의 징후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공히 종말의 징조들을 말하지만 조금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척결하시고 나오시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가리키며 자랑을 합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는 성전을 미석과 헌물로 꾸몄다고 합니다.

이는 화려함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치 이 시대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더 크게 짓기 경쟁을 하고 있잖아요.

교회들이 왕국을 만들고 있어요.

어떤 교회는 집단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완전한 멸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디도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켰어요.

이 때 예루살렘 시내가 사람들의 피로 강물을 이루어서 장화를 신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화려하던 성전은 완전히 불에 타 버리고 무너져 내렸어요.

이건 구약 교회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멸망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조금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야기를 듣고 세상 종말의 징조를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성전의 멸망 이야기를 하니까 세상 종말은 언제 일어나고 그 때 어떤 징조들이 일어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 징조를 말하십니다.



첫째는, 신앙의 타락을 말합니다.



눅 21: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마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교인들을 미혹할 것이라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창궐하여서 교회를 타락케 하고 교인들을 미혹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단이 창궐하는 시대에요.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리면 세속화 되어요.

세속화가 되면 참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 가치가 자리 잡으면 교회는 이익 집단이 되고 말아요.

이걸 강도의 굴혈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떡을 위하여 모이는 강도의 굴혈이에요.



교회와 교인들이 마음속에 말씀의 가치는 사라지고 돈의 가치로 매몰되어 있어요.

이를 음녀라고 합니다.

교회가 음녀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어요.



둘째로, 사회의 타락입니다.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눅 21: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사회현상으로는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불법이 성해서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강포해져서 서로 죽고 죽이는 짐승이 되어 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민족 간에 내전(內戰)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극단적 이슬람 단체가 테러를 감행하여 무차별 살상(殺傷)을 하고 있으며 국가마다 정부와 반정부군 간으로 나누어져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남북 간의 대결로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고,

남한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서로 원수가 되어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어요.

한 교회 안에서도 이념이 다르면 원수시 해요.



사회가 발전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들이 물질의 종이 되면서 인간성을 포기하고 떡을 위하여 남을 서슴치 않고 죽이는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 간에 평화가 깨어진지는 이미 오래 되었어요.

돈을 위하여 부모도 죽이고 자식도 죽이고 형제도 죽이고 있어요.



셋째는, 천재지변입니다.



눅 21:11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지구는 몸살을 앓듯이 각양의 재앙들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바다와 파도가 우는 소리로 즉 쓰나미로 사람들이 기절을 할 것이라 합니다.

또한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고 하늘에 권능들이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처처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어요.

세계 각국에서 갖가지 재난들을 통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맨붕이 일어나고 있어요.

특히 울산 지역은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해 있어서 불안감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주와 울산의 지진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만약 지진으로 인하여 원전이 붕괴되면 다 죽게 되어 있다고 난리입니다.



이러한 때에 성도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러한 일이 일어나거든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하지요.



무슨 말입니까?

주님 앞에 서는 날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면 주 앞에 서게 되고,

우리가 이러한 재앙으로 죽어도 주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는 세상의 멸망으로 죽으나 지진으로 죽으나 주 앞에 서야 해요.

그럼 성도는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서 삶에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지진으로 흔드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이제 이 세상 끝이 다가오니까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는가 보다 생각해야합니다.



성도는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어요.

진동치 못할 나라란 천국을 말합니다.

진동치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지진으로 진동케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싸인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목표를 땅에 것을 쫓아 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것을 쫓아가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을 등지고 염세주의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말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신앙의 매너리즘이에요.

이걸 영적 잠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감각을 잃어버려요.

시대를 보는 눈이 사라져요.

말씀의 분별력이 상실이 되어요.

그럼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게 되어 있어요.



음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지요.

사람들의 영혼을 사고팔고 있지요.



무슨 말인가요?

교인들을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 목사들에게는 교인들은 밥이에요.

자기 배를 채워주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나라가 어떻게 망하던가요?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세요.

나라가 흥할 때는 애국자들로 흥하지만, 망할 때는 항상 변절자들로 망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흥왕 할 때는 참 선지자들로 인하여 흥왕하고,

복음이 변질 될 때는 항상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삯꾼이라고 하셨습니다.

매국노는 돈을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거짓선지자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타락케 합니다.



음녀는 삯군들로 가득해요.

그래서 소리치는 겁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합니다.

강도의 굴혈인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소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음녀의 사상에 동조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 사고가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세속적인 것이면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동일해요.

반대로 내 사고가 하나님 말씀을 쫓아가면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차별이 없어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어도 믿음을 지키고 살면 되어요.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건 마치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안 담그는 것과 같아요.

어리석음이에요.



이 사람들의 말은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어서 갈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요.

빈둥거리면서 논다는 것은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복음을 이용하는 악한 것입니다.

결국 복음으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하고 자기 육신 챙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마치 신앙이 머리로 복음을 교리적으로 깨닫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들은 말씀이 삶에 힘을 주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으로 건달 노릇을 하고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신앙생활이란? 교리를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삶이 없는 교리를 죽은 믿음이라고 하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교리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 교리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구원이란?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에요.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에요.

성경이 흑암에서 빼내는 것으로 시작하여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궁극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시작이에요.

새로운 출발이에요.

광야에서 말씀의 다스림으로 받으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요.

떡에 가치로 살던 사람이 죽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사람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정의하기를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침을 받은 기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살 궁리를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등따습고 배가 부르자 하나님을 차버렸습니다.



신명기 32장을 봅시다.



신 32:15-18=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여수룬이 살찌매 하나님을 발로 뻥 찼다고 하지요.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신을 쫓아갑니다.

그 신이 바로 마귀에요.



마귀는 이 땅에 떡을 주는 신이에요.

떡 맛을 보고 나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섬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결말은 하나님께서 노를 격발하여서 이방인에게 사로잡혀가는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는 교회와 같아요.

떡에 가치로 살던 사람이 죽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타락한 교회인 음녀는 교인들에게 말씀을 버리고 떡에 가치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세상에 부귀영화를 쫓아가게 하고 있어요.



땅에 가치관으로 살게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음행이라고 합니다.



음행이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그릇 팥죽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



어떤 이는 믿음으로 받고 경계하며 살 것이고,

어떤 이들은 농담으로 들을 것입니다.



지진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들아! 이 땅은 곧 갈라져서 너희를 삼킬 것이니까 빨리 떠나라고 합니다.

지진이 없는 그런 나라로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지진으로 진동치 않는 그 나라가 어디인가요?

천국입니다.



종말의 징조들이 일어나거든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지요.

그 산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입니다.

떡에 가치로 늘 흔들리는 신앙을 버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안으로 도망하세요.

십자가에 이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못 박으면 이 세상의 떡으로 인하여 신앙의 지진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지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 때 음녀의 사상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풍부도 자랑할 것이 아니고 비천도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는 언약의 가치로 살기 때문에 떡이 있든 없든 거기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언약의 가치로 살 때 세상을 이길 수가 있고 떡에 가치를 최고로 알고 있는 음녀로부터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울면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하였어요.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어요.

그들이 신은 자기 배라고 하였구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백성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니까 숨어버립니다.

그러다가 다시 만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왜 숨느냐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불러서라고 합니다.



너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서 메시야가 하는 일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떡을 먹은 기적만 보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내가 바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영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영생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떡을 원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군중들처럼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쫓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 복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일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 복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으면 그것이 바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음녀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에요.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인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 삶에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이 땅에서 잘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는가요?



교회에 와서도 떡에 가치로 살면 그 사람은 지금 애굽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마치 성전 미문에 앉아서 은과 금을 구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자에요.

예수를 못 만났기 때문에 성전에서 떡을 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을 주지 않았어요.

떡을 주지 않았어요.

나사렛 예수를 주었어요.



나사렛 예수를 만나자 앉은뱅이는 더 이상 성전에서 떡을 구하지 않았어요.

땅에서 일어나게 해 주심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였어요.

앉은뱅이에서 일어난 그는 더 이상 떡에 가치로 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게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떡을 구하는 음녀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이용하여서 땅에서 부와 사치와 연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장차 예수를 등쳐 먹은 자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의인화 하여서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셔야 해요.



주인이라 함은 내가 사는 이유를 말하는 거예요.

떡을 위하여 살면 그 사람의 주인은 떡이에요.

말씀을 위하여 살면 그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부디 떡의 가치관으로부터의 출애굽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고 기별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더 은혜를 주셔서 주님 만날 날을 사모하면서 살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안에 항상 생명의 말씀이 달음질하게 하여서 세상 것 좇지 말고 하늘에 신령한 것을 쫓아가도록 해 주옵소서. 우리 안에 음녀의 사상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음녀로부터 출애굽 할 수 있도록 하늘에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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