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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6강. 역설적인 자유 (요 8:31-36)

by coroa 2021. 7. 19.

 

 

 

56강. 역설적인 자유 (요 8:31-36)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아들이 준 자유에 대하여서 상고해 보았는데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은 자유에 의미를 보충하여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인간에게 접근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을 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종속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종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비교를 하였으면 만족을 하였을 겁니다.

만약에 마귀가 인간에게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짐승과 같이 된다고 하였다면 안 따 먹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서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다스리는 하나님과 비교 하였습니다.

이는 마귀도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전력이 있잖아요.

그러니 마귀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의 심리를 너무도 잘 알고 접근을 하였던 겁니다.

 

에스겔 28장을 봅시다.

 

겔 28:12-19=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에스겔은 두로 왕의 교만을 사단의 교만으로 보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어요.

그런데 따르는 무리가 많으니 결국엔 하나님 자리까지 넘보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인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命)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에 넘어가 버렸어요.

이는 결국 사단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피조물의 욕망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신들을 주종(主從)관계 또는 상하(上下) 개념으로 보게 만든 겁니다.

인간들도 마귀처럼 피조물 중에서 1인자인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같이 된다는 말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혹하고 넘어가고 만 겁니다.

 

인간은 뱀의 말대로 하나님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보건데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존(自存)자가 되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의 성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께 종속되어 매이기 싫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 자유가 속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유하고자 하는 죄성은 인간이 출생하면서부터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의 간섭을 받기 싫어합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지요.

여러분들의 자녀를 보면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순종이란? 지시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는 말입니다.

지시 받는 자 입장에선 억압이고 폭력이에요.

지시를 받는 사람 입장에선 지시하는 사람에게 종속되었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자아가 있는 존재들은 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상사에게 지시를 받으면 기분이 상해지지요.

멀쩡히 잘 하는 하는 일도 누가 시키면 괜히 싫어지잖아요.

분명히 지시를 받아야 함에도 속으론 에이~ 더러워서 내가 회사를 그만 두던지 아니면 빨리 승진해야지 라고 칼을 갈게 됩니다.

자기도 자기 부하 직원에게 그렇게 하면서도 말이에요.

이처럼 인간들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앉고자 해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집 안에서도 누가 시켜서 하면 짜증이 나요.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하려고 하는데 누가 청소하라고 하면 괜히 짜증이 나잖아요.

그래서 집안일도 시키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는 겁니다.

오죽 했으면 하던 일도 멍석 깔아 주면 안한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인간들은 누구에게 지시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교회에서도 목사가 성도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면 기분 나쁘지요.

당신이 목사면 목사이지! 왜? 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 라고 기분 나빠 하잖아요.

지시를 하고 지시를 받는다는 것은 상하(上下)나 또는 우열(優劣)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목사나 성도는 우열 개념이 없어요.

 

모두가 주 안에선 동등해요.

그러니 목사가 성도에게 지시할 입장에 있지 않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 안에 하나님과 자기백성의 모습을 담아 놓았어요.

머리 되신 주님과 자기 백성들의 모습을 주셨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각각의 직분 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8-14=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교회 안에 각양의 선물을 주셨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에요.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란? 교회 안에 각각의 직분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고 하지요.

 

이 말은 곧 모두가 목사이고 교사 일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같이 가르치는 자 입장에 설 때는 권면 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러 저러한 책망을 하고 권면하는 것도 주님의 자리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각각의 교회들에게 권면과 책망을 하는 겁니다.

지금은 사도는 없어요.

다만 목사가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로서 있어요.

 

하지만 목사라고 해서 성도 위에 있지 않아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로서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목사의 권면을 들어야 해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각양 은사를 말하고 있어요.

 

고전 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에베소서에서는 “직분적인 은사”를 말하고 있는데 비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사역적인 은사”를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 직분도 은사이지만, 사역도 은사인 겁니다.

 

많은 은사가 있지만 여기서 살펴 볼 것은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것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분명히 한 성령에게서 나온 은사임에도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동일하게 말씀 가르치고 증거하는 은사임에도 차이가 있다고 해요.

 

지혜(知慧)와 지식(知識)은 달라요.

지식은 사물의 이치나 어떤 도리를 깨닫는 머리를 말해요.

그러니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는 은사에요.

 

그러나 지혜는 이치나 도리를 깨달은 것을 잘 응용하고 사용하는 머리를 말해요.

흔히들 재주라고 합니다.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현실에 잘 적용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해가 쉽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지식의 말씀에 은사는 요리할 재료를 잘 선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의 말씀에 은사는 맛있게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동일한 재료를 가지고도 어떤 분은 맛이 없는데, 어떤 분은 맛이 있게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어떤 목사는 말씀에 깊이는 있는데 감동이 안 되고 마음에 스미지 않아요.

엄청 깨달은 것 같은데도 막상 듣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하지만 어떤 목사는 그렇게 깊이 있는 것은 아닌데 말씀을 들으면 스펀지에 물이 배이듯이 귀에 속속 들어와 이해가 쉬워요.

 

이게 다 은사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지식에 말씀에 은사를 주신 분과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주신 분들을 세워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신학자나 교수들이 많고,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목사들이 많은 겁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깨닫는 것은 탁월한데 적용하는 것은 미흡해요.

하지만 어떤 분들은 성경을 아주 쉽게 이해하도록 잘 풀어 주세요.

이는 모두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개 교회 안에서는 목사는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받은 자로 있고,

장로나 집사들은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받은 자로 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서로가 합력해서 성도들 간에 서로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돌보게 하는 일에 필요한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고린도교회가 바울 파다, 게바 파다, 아볼로 파다 라는 식의 계파 분쟁을 하고 있으니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책망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심었고, 다른 이는 물을 주었고, 다른 이는 돌보았다고 하잖아요.

이는 마치 씨를 뿌리는 사람과, 그 씨가 잘 자라도록 관리하는 사람의 능력이 다르다는 겁니다.

 

바울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잘 전하는 반면에, 아볼로 같은 목사는 성도들을 잘 관리하는 편이라고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베드로같이 다혈질인 사람도 있고, 요한처럼 따뜻한 사람도 있어야 해요.

베드로는 일을 벌리는 사람이지만, 요한은 수습하는 사람이에요.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고, 바나바와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해요.

 

마치 가정에 엄한 아빠와 자애로운 엄마가 있는 것과 같아야 해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가르치는 자로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러면 개구리들 집단이 되고 말아요.

여기서도 개굴 저기서도 개굴하면 교회가 난장판이 되어요.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지식 놀음이 아니에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것은 유익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잘난 척하면 사람을 죽이지만, 참아주고 용서하면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을 흔히들 사랑장이라고 하지요.

거기에 보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하지요.

천사의 말이란? 복음을 말해요.

사랑은 예수님을 말해요.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도 시끄러운 공해가 된다는 말이지요.

이로보건데 예수를 모르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누가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다 신자로 보지 말란 말입니다.

지식으로 교만해 져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그러니 바울이 말한 대로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을 흘러 듣지 마세요.

바울이 같은 고린도 교회에다가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앎으로 교회의 유익을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된다면 이는 악한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일로 시끄러우니 바울이 제발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고전 10:32-33=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신앙생활은 내가 많이 깨달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깨달음으로 남에 유익을 주어야 해요.

깨닫게 된 것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어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그 깨달음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 라고 남들 앞에서 가르치는 자 행세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요.

그러니 아는 것을 잘난 척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알수록 겸손해 져야지 나대면 안 되어요.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자가 많은 은혜를 받은 자에요.

 

제가 지나고 보니 그래요.

처음엔 조금 안다는 것을 가슴에 담아 두지 못하고 자랑하기에 바빴어요.

그러니 늘 못한 사람들을 보면 판단하고 정죄하였지요.

그런데 이젠 성도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해요.

행여 이런 말을 하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조심 또 조심하게 되는 겁니다.

 

모름지기 교회 안에서 안다고 하는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참아 줄줄 알아야 해요.

마치 내 팔이나 다리가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인내를 가지고 치료를 하여야 해요.

내 팔 다리가 부러지면 의사가 잘라 낸다고 하여도 못 자르게 할 겁니다.

비록 잘라내야 하는 일이 생겼을지라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치료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남에 팔 다리가 부러져서 문제가 생겨서 잘라내야 한다고 하면 그러라고 할 겁니다.

교회 안에 성도는 다 한 몸이에요.

그러니 지금 조금 부족하다고해서 잘라내면 안되어요.

온 교회가 그 사람을 보듬고 가야해요.

교회는 생산력을 높이고 능률을 내는 곳이 아니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 어떤 연약한 사람이 지금은 복음을 모른다고 하여도 복음을 아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대하여야 해요.

떠나면 어쩔 수 없지만 있는 한은 내 팔다리를 고친다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보듬고 보살펴 주어야 해요.

잘라내고 붙이고 하는 권능은 하나님께 있으니 교회에 남든지 떠나든지는 하나님께 맡겨 두세요.

괜히 우리가 설쳐서 가리지를 뽑는답시고 곡식까지 다치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어제 밤에 SBS 방송에서 긴급출동 SOS 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내용이 시어머니를 때리는 자식과 며느리라는 내용입니다.

어머니가 80세인데 56세된 아들과 50세된 며느리가 살고 있어요.

그런데 아들 며느리가 늘 팔순 노모를 구타를 하고 밥도 제대로 안 주고 빨리 죽으라고 악담을 해 대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 주민들이 신고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팔순 노모가 자식들은 두둔을 해요.

그 아이들 나무라자 말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들은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고, 며느리는 2급 장애인에요.

그러니 옳고 그름도 모르고 사리분별을 못하는 겁니다.

 

어머니는 그게 다 자기 잘못이라고 여기고 끝까지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저런 페륜아는 당장 감옥에 쳐 놓으라고 하지만 그 팔순 노모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해요.

 

우리와 팔순 노모 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요?

우리에겐 그들은 타인이지만 노모에겐 자기 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들 며느리는 법이라는 잣대로 대하지만 팔순 노모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이라고 하지만 노모는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절 여기까지 팔순 노모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여 오셨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길이 참으셨기 때문에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난 지금 우리 교회 성도들을 저런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어요.

어떤 성도가 속을 썩이고 있다면 나도 저 노모처럼 모든 허물을 자기 것으로 돌리고 용서하고 참아주며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전 아! 나도 역시 가짜이구나! 를 알게 되었어요.

저 역시도 입술로는 하나님 사랑을 외치지만 실상에선 마귀 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축복하라는 말이 우리가 지켜 낼 수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새삼 또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더러 휴머니스트가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자세로 타인을 대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사람들에게서나 교회에서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를 고발하는 말씀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우린 늘 교회 안에서 남에게 상처만 주고 있잖아요.

자기의 잘못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도 남의 잘못은 사정없이 정죄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악당들인 겁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까?

그건 남에게 유익을 주라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자기 지식으로 쌓아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보듬어 주세요.

남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남에게 들으려고 하세요.

 

남들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언하는 자의 영이 예언하는 자의 영에 제재를 받으라고 하였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교회는 인간들 자랑하는 곳이 아니니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이건 비단 말씀에 문제만이 아니에요.

모든 신앙생활의 자세가 이러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선 목사도 집사에게 배울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교회에는 누가 높고 누가 낮다는 개념이 없어요.

누구에게 종속 될 이유도 없구요.

 

중요한 것은 교회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를 잘 보여주어야 하는 곳이란 것은 잊지 마세요.

서로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 해요.

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자이지 죽이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 나의 앎이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있는지 해를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순종과 불순종을 말하다가 잠시 엇길로 나갔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지시하는 것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요.

 

창조주란? 주인이라는 말이고,

피조물은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은 주인과 종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위치가 있고 종은 종으로서 위치가 있어요.

 

성경은 이처럼 자기 위치에서 사는 것을 자유라고 해요.

자유(自由)라는 말은 “스스로 자(自)”에 “따를 유(由)” 를 써요.

한마디로 자기 주제를 알고 스스로 자기 위치를 지킨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하고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럼 자유의 반대는 자기 위치를 버리고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교만이라고 하고 악이라고 해요.

 

유다서를 볼까요.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보세요.

타락한 천사들을 일컬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창조 시엔 다 자기 지위와 처소를 정해 주셨어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서 창조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다 자기 지위와 처소가 있는 겁니다.

 

지위와 처소란? 각자 주어진 높고 낮음의 위치와 정해진 장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람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각각의 용도에 따라서 창조 하셨어요.

 

넌 여기 있고!

넌 저기 있어!

넌 이런 일을 하고!

넌 저린 일을 해! 라고 정해 주셨어요.

 

교회 안에도 마치 성막의 각종 기구들과 같이 다양한 직분들을 주셨어요.

목사도 주셨고, 장로도 주셨고, 집사도 주셨고, 일반 성도도 주셨어요.

직분은 높고 낮음이 아니고 용도에요.

 

천사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수종드는 자들이지요.

이걸 교회 식으로 말하면 모든 교인들은 천사들과 같이 수종드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천사 중 일부가 하나님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를 벗어나 반발을 하여 자기 위치를 떠나 버렸어요.

이를 흔히 마귀라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반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역행하는 것으로 일을 해요.

이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순종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에요.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자유라는 말은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주는 주인으로서 피조물에게 명령을 하고!

피조물은 그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러한 틀이 유지 될 때 평화가 되어요.

이 틀이 깨어지면 파열음이 생기게 되고 혼돈스러워 집니다.

 

지난 번 나로호 우주 발사가 실패 했지요.

실패한 이유가 뭡니까?

위성을 감싸고 있는 덮개 하나가 분리되지 않아서이지요.

 

과학자들이 만든 원칙대로 하면 덮개가 분리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지금쯤 지구 궤도를 돌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겁니다.

과학자들이 만들 때 모습처럼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평화로워요.

 

그런데 덮개가 분리되지 않아서 실패를 하였잖아요.

분리 되도록 하였는데 분리 되지 않으니 실패한 겁니다.

과학자 입장에선 덮개가 분리되는 것이 순종이고, 분리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에요.

 

세상의 피조물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지요.

그러면 만물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도록 되어 있지요.

만물의 창조 속에 이미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내포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지요.

빛이 생긴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의 결과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불순종하였다면 빛이 생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이 존재하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예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곧 실패이고 파멸이고 죽음이에요.

죄의 삯이 사망이라 함은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면 나로호 우주선처럼 폭발하고 자연히 죽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있는 곳엔 항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이는 하나님 말씀 속에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에요.

여러분 생명이 뭡니까?

생명(生命)이란? “날 생(生)”자에, “명할 명(命)”자를 쓰지요.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살라고 명령(命令)하신 것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살라고 명(命)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흙으로 돌아가라 고 하면 흙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어요.

생명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해요.

우리의 주권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들에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살으라고 명령 하셨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미물 같은 지렁이 한 마리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어요.

 

모든 만물은 다 그렇게 사는데 유독 인간만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의 과학으로 목숨을 연장하고자 애를 쓰는 겁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도 목숨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를 잘 증거해 주셨어요.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하지요.

지금 우주 만물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 존재하고 있어요.

그 어떤 것도 예외가 없어요.

바람도 나무도 사람도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외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니 즉시로 말라 죽은 겁니다.

무화과나무도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풍랑을 꾸짖으니 잠잠한 겁니다.

귀신조차도 순종했어요.

 

만물 속에 인간도 속하였지요.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상이라고 말하는 절간에 스님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등하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다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모를 뿐이에요.

 

만물을 살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곧 예수님이세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만물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말씀이신 예수님이 곧 만물을 창조하였듯이 살아가게 하는 것도 말씀의 능력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말씀으로 일어나라고 하셨을 때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셔서 나사로에게 말씀하셔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들도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러한 생명의 역사를 싫어해요.

아까 말했지요.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역행한다고 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죽이는 일을 하고 파괴하고 파멸하는 일을 해요.

마귀는 생명이 하나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요.

 

마귀는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원칙을 깨어 버리려고 해요.

말씀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라고 해요.

말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미혹을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지배하는 곳엔 하나님 말씀이 없는 겁니다.

 

피조물은 생명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죄가 역사하는 곳에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일컬어 살인하는 자 라고 하는 것도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해요.

 

전 신자와 불신자를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고 판단해요.

하나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면 일단은 신자로 보고 하나님 말씀을 무관심하면 불신자로 보아요.

교회 안에서도 어떤 분들은 말씀 듣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말씀 듣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사람들과 교제하고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놀러 간다고 하면 새벽같이 나와서 설쳐 대는데 성경공부를 하거나 설교를 듣는 시간엔 마치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그렇게 싫어해요.

 

그래서 전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두는 분들은 성도로 보고,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교제하고 노는 것에 관심을 두면 교인으로 보아요.

성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지만, 교인은 아무나 자기가 원하면 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생명이신 하나님 말씀과 떨어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마귀가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마귀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여서 생명을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이를 시편 기자는 귀머거리 독사가 달라붙어 있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시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58: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시 58:5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악인은 모태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고 하지요.

한 마디로 바른 길을 가지 않고 바른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요.

바른 말이란? 하나님 말씀이에요.

악인들은 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가 보니 귀머거리 독사가 귀를 막아서 못 듣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귀머거리 독사가 있대요.

참으로 기괴하고 놀랍고 무섭지요.

그 귀머거리 독사들이 사람들 귀때기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해요.

 

이를 바울은 세상 신(마귀)이 마음을 혼미케 하였다고 했어요.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못 듣게 한다고 하지요.

그러니 술사(목사)가 아무로 바른 말을 해도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마귀가 귀 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손가락을 귀 구멍에 대고 '에바다' 하니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의 혀가 풀린 겁니다.

 

막 7:32-35=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마귀가 귀머거리 독사가 되어서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여시고 계신 겁니다.

아무나 열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만 열어 주세요.

지금 우리도 예수님이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어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갔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던 겁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떠나자 예수님께서 너희도 떠날래! 라고 묻자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우리가 뉘게로 떠나오리까! 라는 기특한 소리를 한 겁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본 자들은 다 떠나갔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들은 다 남았어요.

그러니 자기 백성들은 영생의 말씀을 쫓아가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표적을 보고 따라요.

 

그래서 지금도 마귀는 선택 받지 못한 교인들의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작 밭이나, 가시 밭이나, 길가 밭이나 모두가 처음엔 자라는 것 같지만 결실치 못하는 것은 세상의 염려나 일락이 막아버리고 새가 와서 말씀을 다 먹어치운다고 하지요.

 

그래요.

마귀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찌 하든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려요.

다른 일들로 분주하게 만들어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요.

 

TV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 볼 시간은 없어요.

등산 가는 것은 쉬운데 성경공부 하기는 싫어요.

마르다 처럼 분주하게 일은 하는데, 마리아 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안 되어요.

 

이 시대 교회들은 교인들은 전부 마르다를 만들고 있어요.

자기 열심에 취해서 하나님 말씀이 어떠한가를 몰라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몰라요.

 

그러니 전부 인간의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면 믿음 있는 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귀가 귀를 틀어막는다는 것은 약속을 못 믿게 한다는 말이에요.

불순종하게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을 거부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최초의 인간은 마귀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자를 일컬어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말대로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세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인간은 이제 하나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어요.

뱀이 말한 대로 하나님 같이 독자적인 자가 된 겁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된 것입니다.

야! 나는 자유자다! 라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자유자가 된 것이 아니고 죄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죄라는 또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되었어요.

죄라는 놈이 인간을 종처럼 이리저리 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뱀의 말대로 하나님같이 자유자가 되었으면 죄도 거부 할 수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죄를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죄에 갇히고 만 겁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 되고 만 것이에요.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속박에 매인 것입니다.

결국 주인만 하나님에서 죄(마귀)로 바뀐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마귀에게 매이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에요.

마귀에게 매여 있다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자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으면 순종 할 수도 있고 듣고 싶지 않으면 불순종할 수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진정한 자유자이지요.

 

그런데 죄인이 되고 난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은 되는데, 순종이 안 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죄인의 한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살아지지가 않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인간의 한계에 대하여 실존적인 고백을 하였는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더라고 하지요.

몸이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더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육신이라는 놈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일컬어 마귀의 종이라고 하고 죄 아래 매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이란 말은 거역 할 수가 없는 상태란 말입니다.

 

죄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인데 죄인을 일컬어 죄의 종이라고 함으로서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자가 된 것이 아니고 주인만 하나님에게서 마귀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던 자에게서 죄를 짓고 나서는 마귀의 말을 듣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죄에 매인 것을 모르게 하였어요.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한 것입니다.

자기 육신이 이끄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였어요.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니 자유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죄가 이끄는 대로 살게 하여 인간들 스스로가 자유로운 자라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곧 마귀의 종으로 사는 것인데도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죄가 이끄는 대로 사는 자유는 곧 죽음이에요.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죽음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에요.

동물의 왕국을 보세요.

새끼들은 어미의 보호가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이처럼 마귀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한 것은 그 자유로움으로(실제는 자유가 아니고 죄의 종임)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잊게 만든 것입니다.

마귀의 미혹아래서 살아가는 죄인들의 특징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마귀의 입장에선 대 성공인 거지요.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는 자유로 자기 수하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마귀가 준 이 거짓 자유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니 우리가 언제 종이었냐? 라고 반문하고 있지요.

이는 자신들이 자유자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보니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렇게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자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니 우리가 종이 아닌데 무슨 자유를 준다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시큰둥해 하고 있지요.

 

31-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이는 자신들은 종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지금 죄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후손은 죄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방인들이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죽잖아!

죽는다는 것은 죄의 종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죽는 걸 보니 죄인이 맞잖아!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죽는다는 것은 곧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지금 죄 가운데 갇혀 있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해 주려고 왔다고 합니다.

죄에서 빠져 나와 내 안으로 들어오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생겨요.

예수님이 죄에서 자유케 해 주지요.

그러면 이젠 죄에선 자유케 되지만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밖에 없는 자로 바뀌게 되었어요.

전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젠 불순종하고 싶어도 불순종이 안 되는 쪽으로 갇히게 된 겁니다.

 

그러면 무엇에 순종하느냐를 알아야겠지요.

신약에선 순종이 믿음으로 바꿔요.

이제부터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이것만 살펴보고 마칠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웠지요.

옛 언약은 이스라엘과 세웠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과 세웠어요.

이렇게 되면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맞아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언약 대상자가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어요.

이게 새 언약의 특징입니다.

 

옛 언약 하에선 인간이 언약 대상의 주체였는데,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주체가 되었어요.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이 나설 자리가 없어요.

인간이 나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가치하게 본다는 겁니다.

 

옛 언약을 거쳐 오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수(數)에 칠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옛 언약에선 그래도 인간을 취급해 줬는데 상대를 해 보니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소는 임자는 아는데 인간들은 임자도 몰라보는 짐승만도 못한 종자들이라고 탄식을 한 겁니다.

 

이젠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무가치한 버러지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간들을 대신하여서 상대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대표로 서 있는 겁니다.

 

이처럼 새 언약 하에선 언약 대상이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이젠 바뀌어진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바뀌어진 언약은 내 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을 붙잡는 겁니다.

 

그런데 육은 자기 몸이 행한 것을 붙잡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요.

자기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라고 역사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죄 아래선 남이 한 것을 붙잡지 못해요.

왜냐하면! 죄가 자기 것만 남기고 남에 것을 다 밀어내기 때문이에요.

죄 아래선 남에 것을 붙잡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용납이 안 되어요.

인간은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살아요.

빚지고 있으면 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려요.

 

할머니들이 남의 집 칠순 잔치에 초대를 받아도 단 돈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봉투에 넣고 가야 당당하게 음식을 먹어요.

그렇지 않고 부조할 돈이 없으면 숫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안갑니다.

부조 없이 가면 두고 두고 남들에게 입 방아질 당하기 때문이에요.

저 인간은 남의 집 잔치에 오면서 체면도 없이 빈손으로 왔다고 이러쿵 저러쿵 입 방아질 당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엔 아니 형편이 되면 부조를 많이 하고 안 되면 못하지 뭘 그것 가지고 그러느냐 라고 말하지만 실상을 그렇지가 않아요.

이는 모두가 인간은 자기 것을 앞세우고자 하는 본성 때문이에요.

 

그래서 죄 아래선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다고 하여도 못 믿어요.

아니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설령 믿는다고 하여도 갚아야 할 부채로 남겨 두고자 해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러니 죄 아래선 아무리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 해 주셨다고 믿으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말로 믿으라는 말에 순종이 안 되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죄가 순종이 되지 않도록 주장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상태를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순종이 안 되는 죄로부터 빼내서 자유케 해 주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하는 것도 다 이 죄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는 죄에서 빼내 주신다고 한 겁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죄에서 빼내심을 입어 자유케 된 자는 이제는 역설적으로 안 믿어지는 것이 안 되어요.

죄 아래선 믿고 싶어도 못 믿었잖아요.

그런데 자유케 된 자들은 못 믿고 싶어도 못 믿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하심이 믿어져요.

과거 죄 아래 종으로 있을 땐 믿으라! 믿으라! 해도 못 믿었는데!

이젠 믿지 말라! 믿지 말라! 해도 믿어져요.

 

안 믿어져야 정상인데 이젠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는 권세 아래 갇히고 만 겁니다.

이걸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고 합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자는 이젠 믿음 안에 종으로 갇히고 만 겁니다.

 

죄 아래선 죄가 주인이었는데, 은혜 아래선 성령이 주인이에요.

죄 아래선 죄가 믿지 마!

그러면 꼼짝없이 못 믿었는데!

이젠 성령이 믿어!

그러면 꼼짝없이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은 누가 주인이냐에 따라서 주인이 하라는 대로 종으로 사는 겁니다.

새 언약 하에선 성령이 주인이에요.

성령이 성도 안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요.

 

그러니 성도는 새 언약이 믿어지는 자유자가 된 겁니다.

새 언약이 믿어 질 수 밖에 없는 종이 된 겁니다.

과거엔 믿고 싶어도 못 믿었는데!

이젠 안 믿고 싶어도 인 믿을 수가 없는 종이 되고 만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새 언약이 믿어지는 자유자로 종을 삼아 버린 겁니다.

그러니 역설적 자유자이지요.

은혜의 종이라는 자유자에요.

 

새 언약 하에선 모든 주권이 예수님에게 있어요.

예수님이 구원을 허락하시면 그 어떤 것으로도 취소시킬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에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면 반드시 복에 근원이 되고 만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 천국에 가!

그러면 우린 거부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법이란? 거역할 수가 없는 원리를 말해요.

 

그래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 밖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이젠 예수 안에 갇힌 종이에요.

이게 성도에게 확정 지워진 운명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한 겁니다.

너무도 신나는 말씀이니 한 번 찾아보고 마칩시다.

 

로마서 8장입니다.

 

롬 8:33-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 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보세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지요.

그 누구도 정죄 할 수가 없다고 하지요.

정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죄도 정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설령 성도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서 변호를 해 주세요.

내가 저 아이의 저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정죄 당할 죄가 없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죄 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넉넉히 이기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피는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넉넉히 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는 그 어떤 죄 가운데서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죄로 인하여 낙망하고 좌절한다면 그건 예수님을 믿도록 자유케 해 주신 종이 아닌 겁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당하는 그 어떤 환경도 성도가 천국 가는데 방해되지 않아요.

가난도 핍박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막지 못해요.

마귀조차도 성도를 지옥에 보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권세가 마귀보다 강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실이 성령이 오면 믿어져요.

성령이 성도의 주인이 되어서 믿어지게 하세요.

종은 주인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을 거역할 수가 없어요.

 

이걸 은혜의 종이라고 하며 자유라고 합니다.

종이면서 자유자!

모순처럼 보이지요.

이게 성도의 정체성이고 모습이에요.

종이면서도 자유자라고 하는 아주 역설적인 자유자인 겁니다.

 

그러니 자유를 우리가 마음대로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하지 말고, 누구의 종으로 사느냐의 차원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는 영역으로 인간을 판단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반드시 믿어지는 종으로서의 자유자이고,

아담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는 종으로서의 자유자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니 성도의 자유는 예수님에게 차압을 당하였지만 행복한 종인 겁니다.

비록 인생을 예수님에게 차압을 당한 종이지만 기어코 천국에 가야만 하는 차압이니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의 종이었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종에 자리로 빼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비록 인생은 종으로 차압당하였지만 천국으로 가는 행복한 종으로서의 차압이므로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이 확정된 구원의 기쁨을 늘 누리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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