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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4강.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1-30)

by coroa 2021. 7. 13.

 

 

 

54강.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1-30)

-.정낙원 목사

 

어린 아기들을 키워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오로지 자기 밖에 몰라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없어요.

기차를 타든지 버스를 타고 가노라면 어린 아기들을 볼 수가 있는데 아기들은 남이 어떻게 하는지는 의식하지 않고 저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어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전쟁 중에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안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다가 앞에 적군을 보면 어미는 숨어버립니다.

적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아기를 가슴에 폭 싸안습니다.

울지 말라고 싸안잖아요.

 

그런데 아기는 그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답답하면 앙~ 하고 울어요.

엄마가 적군에게 잡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요.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아기들은 자기 배가 고프면 시간과 장소와 엄마의 기분을 따지지 않고 젖 달라고 울어요.

아빠가 하루 종일 회사생활을 하고,

엄마가 하루 종일 가사 일에 시달려서 밤에 잠이라도 자고자 하여도,

어린 애기는 부모의 사정은 일절 고려치 않고 자기 배가 고프면 밤새도록 울어서 기어코 자기 소원을 이루어야 잠을 잡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젊었을 땐 처세술로 위장을 하다가 늙으면 그대로 또 나타납니다.

다시 본능대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린애기가 된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끝을 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무엇을 하여도 자신은 살아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듣기를 바랍니다.

혹여라도 누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망적인 말을 하면 적개심을 갖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능이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어요.

자아중심의 본성이 교회에 와서도 부드럽고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설교를 원하게 됩니다.

자기를 긍정해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설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인간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속에 숨겨두었던 죄가 지적당하니 기분이 나쁜 겁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데, 있는 바 족한 줄 알라고 하니 싫은 것입니다.

죽을 지경인데 사나 죽으나 주의 은혜 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욕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데!

잘 살고 싶은데!

자꾸만 김 빠지는 말을 하고 초를 치니 화가 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해요.

죄인들의 특징이 예수를 믿고 자기 탐욕을 채우고자 해요.

구원은 이미 받아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좀 재미있고 폼 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말을 해 달라는 겁니다.



교인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많아요. 

과거에는지옥에 갈까봐 찜찜했는데,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자신은 교회를 다니니까 당연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도 다니지요.

거기에다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교회에 오면 목사나 교인들이 믿음이 좋다고 하니 믿음이 좋은 줄 아는 겁니다.

이게 착각인줄 몰라요.

 

목사님은 직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고 하면서 집사나, 장로나, 권사나, 구역장이나, 주일학교 부장이나, 청년회 부장이라고 맡기고, 성가대를 하고, 남전도회, 여 전도회 회장이라도 맡으면 이건 천당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믿는 겁니다.

목사나 교인들이 서로 서로 믿음이 좋다고 보증을 해 주잖아요.

다른 교인들과 비교해 보아도 다 거기서 거기니 안심이 되는 겁니다.



안심이 되니 이제는 폼나게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 이만큼 했으니까 복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어디 만족이 되나요.

끝이 없어요.



끝없는 욕망을 하나님 영광으로 포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욕망을 숨기기 위해서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 영광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성공해서 하나님 영광 돌린다고 하잖아요.

성공하면 하나님깨 영광이고 실패하면 하나님 망신시킨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세상에서 출세라도 하면 당당하게 교회에 오는데 실패라도 하면 숨어버리짆아요.

 

언제 하나님이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해야 영광 받는다고 했나요?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어요.

이런 말은 다 목사들이 지어낸 말이에요. 

세상 상식으로 하는 말이에요.

 

목사님들이 그러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가난하게 살면 하나님 망신시킨다고 하지요.

예배당도 세상 건물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지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크게 짓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것을 육이라고 해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세상 영광이 없다는 것을 몰라요.

십자가는 세상 것을 차압하는 것인줄을 몰라요.

그러니 십자가를 운운하면서도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여야 한다고 사기를 치는 겁니다.

 

교인들은 목사들의 말이 자기 욕심과 맞아 떨어지니까 할렐루야 아멘으로 화답하는 겁니다.

기복 설교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유유상종이라고 합니다.

기복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가난하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성공하고 부자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부자 되기 위하여 하는 겁니다.

기도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도 모두가 복을 얻어 내기 위하여서입니다.

헌신은 수단이고 목적은 세상에서 성공해서 돈 많이 버는 것입니다.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교회 안에서 부자는 신앙이 좋고 가난하면 신앙이 나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계절마다 예수 믿고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간증하는 겁니다.

교회에 간증 하러 오는 사람들마다 예수 믿고 복 받아 팔자를 고쳤다는 사람들이잖아요.

전 아직까지 예수 믿고 망했다는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런 사람을 간증 시킨 목사도 보지 못하였어요.

예수를 몰랐을 땐 잘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난 후엔 하던 사업이 망해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못 보았어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에요.

사업이 망해서 죽으려고 마지막으로 기도나 한 번하고 죽겠다고 해서 기도원에 갔다가 거기서 은혜를 받고 신학교에 가서 주의 종이 되어서 이렇게 큰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간증들뿐이에요.

모두가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간증뿐이에요.



이러한 간증을 들으면 교인들은 나도 저 사람처럼 해서 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방법론을 찾게 되어요.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동일해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헌금 잘하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종을 잘 대접하였더니 이런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게 이 시대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입니다. 

오죽했으면 외국에선 한국교회를 일컬어 중세교회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분이 독일에 중세교회사를 배우러 유학을 갔더니 그곳의 교수가 하는 말이 지금 한국교회가 중세교회인데 뭘 여기까지 와서 배우려고 하느냐 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욕을 하고 비판하는 중세교회가 뭡니까?

중세교회 시대를 일컬어 중세 암흑시대라고 하잖아요.

교회에만 충성하면 천국은 자동으로 가는 시스템으로 움직인 때가 바로 중세교회 시대입니다.

중세시대 교인들은 교회 원으로 등록만 하면 구원을 받고, 교회에서 주는 면죄부만 받으면 천국은 무사통과한다고 믿었어요.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짓거리를 지금 한국교회들이 버젓이 하고 있어요.

교인들도 전혀 부담 없이 교회원이 되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천당에 간다고 믿고 있어요.

자기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뭐가 잘못이냐 에요.

 

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아무리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복도 인간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안들어요.

자기 교회 목사님이나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다 교회에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고 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나만 다른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제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은 수백, 수천, 수만명이나 모이는 초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고,

저는 몇 사람 안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수만명을 거느리고 목회를 하는 목사의 말이 맞지 저처럼 몇 명 되지도 않는 성도들을 붙잡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말이 맞을리가 있겠어요.



어느 시대나 세상에서의 진리는 사람의 수로 판단이 되어 왔으니까요. 

그러니 자기는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을 내서 복을 따 내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로서 세상에서 폼 나게 한 번 살아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조금만 있으면 대박이 터트려진다고 꿈에 부풀어 있어요.

그 때가 되면 교회 하나 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지금 그 분을 위해서 아주 열심히 기도하고 있답니다???

그것도 무시로 아주 정성을 다해서 말이에요???

하나님 제발 저 분에게 대박을 터트려주어서 울산목양교회를 하나 짓게 해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원님 덕에 나발을 분다고 하는데 제 친척이 충성해서 복 받아서 교회 하나 지어 주겠다고 하니 기도를 안 할 재간이 없잖아요???



이런 현실을 보고서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는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왠지 저의 마음에서도 저들을 보면 예수님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저들을 욕하기에 앞서서 목사들이 성경을 그렇게 가르치니 어찌합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있는 겁니다.

구덩이에 빠질 땐 빠지더라도 어찌 잔인하게 재미있게 꿈꾸고 있는 그 꿈을 깨게 하겠어요.

그냥 지켜보는 수 밖에 없지요.

 

목사가 성경을 펼쳐서 코앞에 디 밀면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 안할 장사가 어디 있겠어요.

삼십배 육십배 백배를 받는다고 하는데 누가 안 하겠어요.

대박도 이런 대박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약속이 되어져 있다는데서야 어찌 순종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목사가 시키는 대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해서 복을 받고 살겠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 겁니다.

 

거기다가 반듯한 삶을 살아서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 아닙니까?

교회에서도 알아주고 세상에서도 알아주는데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돈 많겠다.

인품 좋겠다.

보너스로 믿음까지 좋으니 어떻게 이런 유혹을 거절 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노라면 너무 너무 행복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 하나 지킬 때마다 짜릿 짜릿해요.

자기 자신이 아주 이뻐 죽겠어요.

이게 누구 이야기인가 하면 현재 이 시대 교인들 이야기이고, 예수님 당시엔 바리새인들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엔 추호도 의심이 없고 흔들림이 없었어요.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정보에 의하면 율법대로 살면 구원을 해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기고 그 지킴을 근거로 자신만만하게 희희 낙락하고 살았던 겁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인간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너무도 돋보이고 위대한 겁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보노라면 너무나 행복해요.

 

세리와 창기들을 비교하면 자신들은 너무도 거룩하고 흠이 없어요.

그래서 아! 위대한 나여! 라고 영적 나르시즘에 빠져 있어요.

누가 우리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라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

“너희는 마귀 새끼다”

“너희는 나 있는데 못 온다” 라는 말은 “너희는 지옥에 간다” 라는 말입니다.



이건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아주 아주 충격적인 말이에요.

이건 마치 아이들의 놀이터에서 잘 놀고 있는데 폭탄을 터트리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니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은 최고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요.

당연히 천국도 떼어 놓은 당상이에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 마음대로 너희가 천국에 가느냐! 라고 합니다.

아니 이건 무슨 망발입니까?

왠? 자다가 날 벼락 같은 말입니까?

한참 신나고 짜릿하고 재미있는 꿈을 꾸고 있는데 깨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경질이 나겠어요.

 

사람이란? 제 잘난 맛에 살고 남에게 칭찬 듣는 맛에 사는데 예수님께서 칭찬을 못할망정 아주 저주를 퍼 붓고 있는 겁니다.

무슨 심보가 이런 심보가 다 있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십니까?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유대인만 받아 들이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도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아니 이처럼 성화되어 가는 성도들을 보고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너희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되느냐 에요.

예수님이 실수한 겁니다?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을 천당에 안 데리고 가면 도대체 누굴 데려 간단 말입니까?

 

그래서 구원은 비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겐 눈을 까 뒤집어 보아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알려 주어도 들을 수가 없는 귀머거리이고, 보여 주어도 볼 수가 없는 소경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들에게 동의를 구하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서 강구하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냥 인간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을 통고해 주고 있는 겁니다.

요즘 말로 팩트가 이렇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빛이에요.

빛은 사실만 전달하면 되어요.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증거를 받고자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인정해 준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어둠에게 동의를 받을 의향이 없습니다.

 

나와 너희들은 빛과 어둠처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서 낫고 나는 위에서 낫다고 합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가 넘실대는 세상이고, 예수님이 속한 위에 세상은 죄가 없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예수를 믿는 자는 살고 안 믿는 자는 죽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러 오신 겁니다.

 

죽음 아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비록 중병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을 하고 있을지라도 산다고 해야지 좋아하지 죽겠다고 하면 봉변을 당합니다.

 

몇 년 전 이야기에요.

제가 잘 아는 집사님 어머니가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그 집사님은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데 저와 친분이 있어서 신앙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황달이 오고 몸져 눕게 된 겁니다.

병원에서 나온 진단이 간암 말기로서 사형선고였어요.

 

그래서 집사님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에게 심방을 좀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한 겁니다.

아마도 제가 능력 있는 목사라도 되는 줄 알았나 봐요.

그래서 병원에 가니 환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와 집사님 세 분이 계신 겁니다.

 

도착해서 잠간 기도하는데 아! 이분은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다짜고짜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죽을 준비가 되셨나고 물었어요.

사람은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데!

예수를 안 믿었으니 이제 죽으면 지옥에 갈 텐데 각오가 되셨냐고 물었어요.

 

그러니 곁에 서 있던 제 아내나 집사님이나 그 아버지가 당황하는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제가 불쑥하니까 서로 놀라는 겁니다.

특히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전에 자기 딸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와서 금방 나을 것이라고 안수기도 해주고 갔다는 겁니다.

목사가 안수 기도 했으니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똑 같은 목사가 전혀 다르게 말할 수 있느냐 에요.

 

참고로 어머니나 아버진 예수를 안 믿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연세가 거의 팔십이 다 되었어요.

이 분들이 어떤 분인가 하면 자기 집 담장을 큰 교회와 같이 하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철저한 불교 신자라서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아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불경을 크게 틀어 놓고 예배를 방해하던 그런 분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병이 들고 죽겠다는 생각이 드니 딸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니 좋아라 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좋아라 하는 것에 재를 뿌리고 만 겁니다.

제가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셨느냐! 란 말에 제 아내서부터 집사님과 아버님과 어머니 모두가 놀라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을 하신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제가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죽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면 목사가 아무리 나을 것이라고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했어요.

이런 말은 세상에서도 인명은 제천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조금 수그러들더라고요.

 

그러더니 잠시 후에 어머니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놓는 겁니다.

자기는 처녀 시절엔 교회를 다녔다고 해요.

시집을 오면서 워낙 불도가 센 집안 그것도 장손 집안에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는 바람에 교회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이 교회와 담장하나로 붙어 있어서 찬송도 따라 부르고 때론 울타리 너머로 들리는 목사님 설교도 듣곤 했대요.

 

교회엔 가지 않았지만 자기는 늘 나는 하나님 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 보고 지금 목사님이 솔직하게 말씀을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겁니다.

자기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안대요.

 

그래서 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어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지면 된다고 했어요.

이런 사실이 믿어지느냐 라고 물으니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재차 아니 예수님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여요.

 

그래서 제가 곁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는 예수님이 믿어져서 천국에 가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할거냐! 라고 물었어요.

두 분이 금술이 너무 좋아요.

제가 어머니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아버진 예수를 안 믿으니 지옥에 가는데 죽어서 못 만나면 되겠느냐! 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제부터 아버지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가겠다고 해야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고 하니 그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갈거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하다고 하면서 환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리곤 전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그 날 새벽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집사님이 전화가 와서 어머님이 운명을 하셨다고 하면서 저에게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그 후에 아버님도 교회에 나가고 아들 며느리도 나가고 온 집안이 다 교회에 다녀요.

아버진 그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찌나 예수를 좋아하는지 예수님 사진을 몸에 품고 다니면서 아들 이름을 부르고 며느리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님 믿게 해 달라고 어린아이같이 기도하곤 했어요.

 

나중에 아들이 그러더군요.

만약에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죽는다는 말을 할 때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크게 봉변당하였을 거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환자를 앞에 두고 죽는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저도 맞다! 내가 미쳤지, 어떻게 환자에게 죽을 준비가 되셨느냐고 말하는 목사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면서 당신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죽는다는 말을 싫어해요.

죽어가면서도 산다고 해야 좋아해요.

우리는 참 말을 듣을 수가 없어요.

우린 일평생 거짓말만 듣다가 가요.

마귀는 거짓의 아비에요.

그러니 죄 아래서 난 인간들은 일평생 마귀에게 속하서 거짓말을 참 말로 듣고 속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 고 하십니다.

그것도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고 계신 말씀입니다.

그 누구라도 이 말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도 항상 예수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 죽는다는 사실을 간과치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말씀 앞에선 이 세상에서의 어떠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부자냐! 가난하냐!

많이 배웠냐! 못 배웠냐!

교회가 크냐! 적으냐!

목사냐! 집사냐!

교회 일 년 다녔냐! 오십년 다녔냐!

어른이냐! 아이냐!

대통령이냐! 청소부이냐!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성도는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성경은 죄인들을 일컬어 영적 소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르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는지를 모르지요.

그러니 자기 방식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자기 방식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고 있어요.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구원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러면 유대인들로서는 더 참을 수가 없어요.

죽여야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소경된 것이 불편함을 느낄까요?

못 느낄까요?

못 느끼겠지요.

눈을 떠본 경험이 없으니까 모르지요.

 

이걸 십자가 복음으로 말해 봅시다.

자신이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으면 복음에 대한 답답함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겠지요.

복음이 뭔지를 모르는데 뭐가 답답하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저쪽에선 전혀 답답해하지 않아요.

도리어 너 왜? 그러는데! 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유대인들이 그래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義)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아무리 죄가 어떻고, 구원이 어떻고 하여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말이에요.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들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겁니다.

율법 아래서 나서 율법대로 잘 살고 있으니 전혀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한 소경입니까?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소경이지요.

 

지금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소경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답답하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여도 그건 예수 네 생각이고! 라고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건 말건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 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너희가 붙잡고 있는 율법 신앙은 죄 라는 말입니다.

율법에서 의가 안 나온다고 말해주고 계신 겁니다.

너희가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로 가지고 있지만 그게 바로 죄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믿지만 하나님 앞에 의는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별 웃기는 놈 다 보겠네!

우리 조상들도 다 이렇게 살다가 천당에 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 라고 비웃는 겁니다.

자신들도 조상들처럼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구원을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

예수 너야 말로 이상하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지금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성화주의 자들과 같아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무슨 문제냐?

뭐가 잘못 되었느냐! 라고 항변해요.

성화주의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죄인 줄 몰라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니고 말씀대로 산 것을 의라고 여기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에서 나오지 않아요.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피에서 나오지 인간이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나오지가 않아요.

그러니 새 언약에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죄사함은 예수님의 대속에 피로 주어지지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는 인간 쪽에서 만들지 못해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가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를 만들면 되니까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뭡니까?

옛 언약은 율법대로 사는 것이에요.

율법을 100%로 완벽하게 지켜도 그 속에서 의가 나오지 않아요.

물론 죄인은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지만 말이에요.

설령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그 중에 단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어요.

그럼 나로호 우주선이 하나가 잘못되어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떨어진 것과 같이 실패해요.

 

온 율법을 축약하면 십계명이에요.

십계명을 축소하면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거예요.

죄인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죄인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아까 어린 애기 비유를 통해서 말했잖아요.

인간은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고 이웃도 있어요.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이웃도 없어요.

 

그러니 모든 근저엔 내가 먼저이고 우선이에요.

하나님도 이웃도 나보다 앞설 순 없어요.

그러니 결국 이 말은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걸 알라고 율법을 주었어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되는 줄 알았어요.

 

다윗이 그러지요.

주께서는 제사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한다고 하지요.

제사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겁니다.

 

구약의 증거가 뭐냐?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운 겁니다.

옛 언약은 인간하고 세운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과 세운 겁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어서 죽어야 하는데,

그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담당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는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해 주셨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믿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초지일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았다고 말해요.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에는 자기 공로가 전혀 없고 오로지 예수님 공로뿐이라고 해요.

내 공로 없이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내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받음에 감사하고 살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선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 말씀이 없어요.

새 언약 하에선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죄가 되어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성화론 자들의 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 같이 되라고 하는 뱀의 말인 겁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의는 오로지 예수를 믿는 것에만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대속의 피 만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만이 내 죄를 이기는 능력이에요.

 

이건 이미 구약시대 제사제도 속에 담아 놓았어요.

이스라엘은 제사를 지내면서도 이걸 모른 겁니다.

자기들 대신 의로운 희생 제물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어요.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산 것이 아니고 희생 제물의 피 흘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제사를 지내면서도 제사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건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고 믿어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구원의 능력으로 남으려면 우린 늘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알아야 하잖아요.



말씀 앞에서 아!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하심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이 시대 교인들은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 지려고 하고 있어요.



성화주의 자들은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가 필요 없도록 하고 있어요.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인 줄을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죄인 줄 알고 회개 하여야 하는데 꺼꾸러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있어요.

 

회개가 뭔 줄을 몰라요.

회개하라고 하면 아이구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라고 해요.

기껏해야 자기 행동거지 뜯어 고치는 수준입니다.

 

회개란?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듯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 내가 죄를 지었으니 내 죄를 위해서 예수님의 피 좀 뿌려 주세요! 하는 게 회개에요.

내가 반듯한 행동을 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게 회개에요.

 

예수님의 피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한 자의 삶이에요.

내가 또 예수님의 피를 잊고 살았군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가 하는 회개는 감사와 찬송이 나오지 울고 불고 하는 것이 나오면 안 되어요.

물론 용서 받음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 나오면 고맙지요.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회개 하라고 하면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자책하고 반성해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어요.

이제 정신 똑 바로 차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해요.

 

도적질 한 사람은 도적질 안하고,

술 담배 먹던 사람은 술 담배를 끊고,

사기 치던 사람은 사기 안치고,

뇌물 받아 먹던 사람은 뇌물 안 받고,

룸싸롱 가서 아가씨들과 바람피우던 사람은 룸싸롱 안가고 퇴근 즉시 집으로 마누라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화목하게 살면 회개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기도 안 하던 사람은 기도하고,

성경 안 보던 사람은 성경을 보고,

헌금 안한 사람은 헌금을 하고,

교회에 봉사하지 않던 사람은 교회에 충성을 하면 회개 하였다고 생각을 해요.

결국 자기의 각오를 다지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자기 행위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이런 짓거리는 육신의 환경에 따라서 언제 또 그 짓을 하게 될 줄 몰라요.

 

죄란? 예수 안 믿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하심을 잊고 사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지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요.

 

술 담배를 끊고, 사기를 안치고, 뇌물을 안 받아 먹고, 세상 말로 나쁜짓 안하고,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요.

반대로 이런 일들을 하여도 주를 사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실과 상관없이 주어져요.

이미 우리 윗선에서 결정이 났어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아들의 피로 자기백성들이 죄를 용서한다고 약속을 했어요.

이 약속이 믿어지는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이게 안 믿어지니 자기 쪽에서 뭔가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신자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해요.

그럼 묻습니다.

신자답게 사는게 어떤 겁니까?

 

지난 시간 “~ 답다” 라는 말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지요.

“답다” 라는 말은 이미 정형화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신자 답다” 라는 말은 신자가 하여야 하는 것이 어떤 틀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에요.

 

신자다움이란? 자기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사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이게 믿어지면 술 먹으면서도 감사가 나와요.

유행가 부르면서도 감사가 나와요.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새겨서 들으세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시기 때문에 신자는 거침이 없어요.

바울이 그렇게 살았어요.

우상의 제물 까짓거 어때 배고픈데 먹지 뭐!

누가 그거 우상의 제물인데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아! 그러니 난 몰랐어! 미안!

그 사람이 돌아가고 아무도 없으면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고 맛있게 먹었어요.

 

저 사람 이방인인데요?

뭐 어때서!

저 사람 율법주의자인데요?

뭐 어때서!

이 사람들하고 사귀는 것하고 내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라고 했어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그 어떤 것으로도 능히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합리화 하고자 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이처럼 대단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어요.

그 어떤 죄로도 다 용서해 주세요.

이 사실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게 성도에요.

이게 신자다움이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사는게 신자다움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 가운데서 감사하며 사는게 신자다움입니다.

물론 비윤리적으로 살거나 비 도덕적으로 살면 세상 법에 따라서 감옥에도 가고 하겠지요.

하지만 감옥에 간다고 해서 성도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는 감옥에서도 유효하니까요.

잘 이해하세요.

 

그러나 이게 안 믿어지면 행동거지라도 반듯해야 안심이 되고 믿는 폼이 나야 안심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행함에 따라서 웃었다 울었다 하는 겁니다.

마치 미친 여자 널뛰듯이 조석지변으로 천당과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하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하심에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겁니다.

 

죄란? 인간이 윤리적으로 깨끗하냐! 못하냐! 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놓치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이 선하냐! 악하냐! 를 따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애당초 우리의 행실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구원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를 놓치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마귀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려고 해요.

어떻게 십자가를 가리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예수가 필요 없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가 도출 되는데 잘 보세요.

예수 안에서 회개한 결과와,

예수 밖에서 회개한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 아셔야 해요.



예수 안에서의 회개는 자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하게 하는 회개는 주님의 피뿌림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가 나와요.

그러니 성도가 하는 회개에는 예수님이 빛이 나요.

 

하지만 예수 밖에서 하는 회개는 자기 행실을 반성하고 늘 고치고 다듬는 겁니다.

아! 또 실수 했네!

아! 아깝다 잘 할 수 있었는데!

앞으론 조금만 더 갈고 닦아서 잘해야지! 라고 해요.

예수 밖에서 하는 회개는 한숨과 안타까움이 나와요.

그러니 예수 밖에서 반성하는 것은 자기가 빛이 나요.

 

예수 밖에 있으면 신자가 이래선 안 되지!

내가 이래서 되나! 다시 힘을 내야지! 라고 해요.

그러니까 예수 밖에서 하는 회개는 자기 행실을 뜯어 고치는 반성을 하고 더 나아진 인간이 되는 것이므로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가 나쁜 것은 늘 반성하게 해서 자기 자랑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에요.

성화주의에선 절대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기껏해야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장로가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집사가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자기 행실을 고치고 자기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해요.

 

사람이란 말이죠.

개과천선을 하고 나쁜 행실이 고쳐져 보세요.

얼마나 뿌듯한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그렇게 위대해 보여요.

짜식들!

앞으로 날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줄 알어!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라고 교만해지는 겁니다.

 

결국 성화주의 신앙은 반성하고 돌이키게 해서 자기 자랑거리를 축적하게 만들어요.

신앙이라는 수레에 예수님의 공로를 채워야 함에도 자기 착함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주여!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성화론 자들이 하는 말이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재수 없다고 해요.

꼭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보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어휴! 저 인간들 꼴도 보기 싫어!

저 인간들 때문에 우리 유대인들이 욕을 먹는단 말이야! 라고 힐난하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없어요.

죄를 안 짓고 사는데 어떻게 예수님 피가 필요하겠어요.

예수님의 피는 교회 창고에 보관해 두었어요.

 

신앙생활 속엔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나와야 하는데,

너무 착하게 살다가 보니까 자기 자랑거리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입만 열면 자기 자랑거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입혀준 예복이 없어요.

 

구약 시대 제사법에 보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어요.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소금은 변치 않는 언약을 상징해요.

이 시대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여기서 소제물이란? 성도의 삶을 말해요.

그렇다면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의 피가 묻어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봉사를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고,

헌금을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고,

기도를 해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여야 해요.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한다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란 말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공로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가 나오는 겁니다.

이를 일컬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친다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삽니다! 를 고백하고 사는 것이 소제 물에 소금을 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선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일컬어 영적예배라고 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그냥 웃으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귀신에게 하는 제사 음식엔 소금을 안 넣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 물엔 소금을 쳐요.

 

저는 이걸 예수님의 피로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 맞아!

귀신의 믿음엔 예수님의 피가 없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엔 예수의 피가 있어! 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풍습 속에도 이런 진리를 숨겨 놓았구나! 생각하고 감사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나 성화주의자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하였다고 나오니 소금이 없는 소제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이 없으니 귀신에게 하는 제사가 되는 겁니다.

암튼 마귀는 예수의 피를 가리게 만들어요.

 

죄란? 하나님의 의가 없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저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의가 없어서 에요.

바리새인들은 반성만 했지 회개하지 않았어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회개는 반성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의 회개도 반성이에요.

늘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서 잘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에게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한 겁니다.

물론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행한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냉정해요.

경계인을 허락하지 않아요.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둘 뿐이에요.

조상이 누구냐의 싸움이에요.

조상이 누구냐! 로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실은 판단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나를 이끄는 주체가 누구냐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니 마귀의 미혹에 빠지면 회개한다는 것이 맨 날 반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안 보이니 늘 울고불고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하는 겁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은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종교는 자기를 믿는 것이고,

신앙은 주 예수를 믿는 겁니다.

주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는 늘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아느냐! 모르느냐! 로 차이가 나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착하냐! 악하냐! 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의 피가 발라져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해요.

출애굽 때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별은  피로 했어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했어요.

지금도 예수님의 피로 신자와 불신자로 구별을 해요.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너무 완벽해서 피를 바르지 않았어요.

너무 잘난 겁니다.

얼마나 잘났으면 예수님이 준다는 의를 거절하였겠어요.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서야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라고 말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본인들이 전혀 아쉽지가 않은데! 

예수님이 아무리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여도 본인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서야 어쩔 도리가 없어요.

본인이 아파야 의사를 찾아 갈 텐데 너무 건강하다고 생각하니 의사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당한 자와 유기된 자를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느냐! 없느냐! 로 보아요.

비록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여도 선택을 입은 자는 늘 곤고합니다.

자기 행함이 옳다고 하여도 늘 그런 마음이 있어요.

딱히 뭔지를 모르겠지만 율법에 충실해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수십 년을 율법 아래서 종노릇했어요.

진짜 율법에 특심했어요.

물론 수십 년을 여일(如一)하게 하진 않았지만 한 동안은 정말 미친 듯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용을 썼습니다.

 

속된 말로 세상 속에서도 속세를 떠난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했어요.

오로지 말씀과 기도 교회 봉사 밖에 몰랐어요.

집에서 산 날보다 교회에서 산 날이 더 많아요.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면 죽도록 충성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한 동안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엔 평안이 없었어요.

늘 곤고했어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어! 이건 아닌데!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 허전한 겁니다.

그런데 그 뭔가를 찾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니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고 열심과 정성을 다해서 죽도록 충성을 해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 겁니다.

각양의 은사를 다 체험을 해도 그 때 뿐이지 하고 나면 뭔가 허전해요.

그래서 한 땐 너무 괴로워서 자살을 하고자 했어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나를 장악하니 미치겠더라고요.

 

제가 만약에 이런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다면 지금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감사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함과 은혜를 모르고 율법이 주는 재미에 푹 빠져서 제 딴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 않았겠느냔 말입니다.

 

하지만 제겐 감사하게도 율법지킴이 진리가 아니란 것이 깨달아지고 답답하니 기도하게 되었던 겁니다.

남들이 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전 아니란 생각이 드니 진리에 대하여 갈급해 한 겁니다.

누구 말대로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하듯이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기 때문에 진리를 찾고자 기도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진리를 알게 해 주시지 않으려면 날 데려 가라고 했어요.

이렇게 고민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한 겁니다.

죽이든지 진리를 알게 해 주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 달라고 무던히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때가 차매 절 율법 아래서 빼내 주셨어요.

감사하게도 어린아이 발걸음을 떼듯이 하나님께서 한 걸음 두 걸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지금의 이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에요.

암튼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날 불러 주셨어요.

 

제가 기도를 해서 복음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복음을 주시려고 기도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전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성도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주신다고 믿고 있어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만나도록 조치를 해 놓았다고 보아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일어나야 진리에 대하여 찾고 간구하게 되는 겁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진리를 찾은게 아니고 주께서 진리를 찾아 가도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신 겁니다.

다 준비 해 놓고 말이에요.

 

그래서 전 본인이 복음에 대하여 갈급해 하지 않는 사람에겐 굳이 말하지 않아요.

물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은 전하여야 해요.

하지만 만남의 역사는 주께서 알아서 이루어 주십니다.

사람마다 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때가 있어요.

그 때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사람이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깔보면 안 되어요.

 

내가 복음을 안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능력이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감사하여야 해요.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해요.

그게 복음을 아는 사람의 진정한 자세에요. 

오늘은 비록 아닐지라도 혹시 압니까?

내일이라도 주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여시고 복음이 깨닫고 믿어지도록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저께 밤 11시에 19세 된 고 3 학생에게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아들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제 블로그를 보게 되었고 블로그에 있는 제 설교를 읽다가 뭔가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고 해요.

 

말씀을 읽을 땐 선택을 입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기 자신을 보면 흔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상담을 한다고 전화를 한 겁니다.

약 한 시간을 통화 했어요.

제 설교를 읽다가 보니 자기 아버지는 복음을 모르는 목사라고 해요.

그래서 저에게 상담을 하겠다고 그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 겁니다.

 

고 3짜리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겁니다.

대견스럽지 않나요.

너무 신기하여서 칭찬을 많이 해 주었어요.

전 이 학생과 상담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열심히 자기 백성들을 찾고 계심을 다시 한 번 감사했어요.

 

눈을 가려 놓으신 분도 하나님이고 여신 분도 하나님이세요.

언제 여시고 닫을지 몰라요.

포도원 품꾼의 비유처럼 어떤 사람은 고 3 학생 같이 열게 하실 것이고,

어떤 사람은 30대에 열게 하실 것이고,

어떤 분은 60대에 열게 하실 것이고,

어떤 분은 죽음 직전에 열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 지금 예수 안 믿는다고 조롱하면 안 되어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을 몰라도 전혀 답답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 가시며 또한 인간들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어리석음이란? 한 치 앞날을 내다보지도 못하면서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시대엔 선지자들을 보내서 알려주게 하셨어요.

 

이사야를 봅시다.

 

사 40:6-9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서 이스라엘의 실존을 알려 주라고 합니다.

인간은 풀과 같이 말라 버리는 존재들이고 이러한 인간들의 영화는 꽃과 같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말해 주라고 했어요.

죄인을 풀과 같다! 라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영영히 남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뿐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러한 소식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이스라엘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라고 한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허상을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의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히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소금 언약을 붙잡고 있지 않고 풀과 같이 사라질 인간의 행함에 의를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지킴의 의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사야처럼 유대인들 앞에 서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붙잡고 있는 율법에 의는 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죄에서 죽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소경인 인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였는지를 가르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죄인들의 모습을 고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자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들 세계에서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짐승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짐승들 세계에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 세계에서는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짐승들 세계에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람들에겐 전혀 중요치 앉듯이 인간들 세계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하나님의 세계에선 전혀 중요치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고자한 것이 하나님 앞에선 쓰레기인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창하게 종교생활로 자신을 꾸며도 다 헛짓이란 말입니다.

목사이면 뭣하고, 집사이면 뭣합니까?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다 불 살라질 풀입니다.

 

또한 인간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세계에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죄인들에겐 먹고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일컬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함을 부탁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라면 예수님의 피를 모르는 자는 다 죄 가운데 죽는다고 알려 주어야 해요.

 

복음이란? 아름다운 소식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인생은 풀과 같이 망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복음은 영영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였지만!

지금 이 시대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만 남고 모두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불 태워질 것들입니다.

 

교회도 불타고,

우리의 행함도 불타고,

목사도 불타고 집사도 불탑니다.

영영히 남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만 영생의 능력이 나와요.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복음과 이 시대 교회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비교하여 보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피(언약)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죽기 싫다고 해서 죽음이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살고,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없는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 복음이고,

그 어떤 죄인도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산다는 것이 또한 복음 속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속에는 항상 심판과 구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사람들을 달콤한 말로 설득하고자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그 사실만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한번만 믿어달라는 식으로 사정해서도 안 되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어달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사정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 안 믿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끝장난 인생이라고 증거 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고 하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고들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로 판단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 또는 착함과 악함은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세상에서 착하게 살았다고 칭찬을 해서 천국으로 보내지 않고 세상에서 악하게 살았다고 해서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상관없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그 죄가 멸망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 가운데 죽는데 이 땅에서 내가 잘나고 못나고 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부자와 가난함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입니다.

그러니 잘살고 못사는 것으로 울고 웃을 필요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죄 문제를 해결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밖의 세상에서는 잘난 것과 못난 것의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많은 성도들은 아무리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여도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무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맞아요.

예수를 믿는 것도 현실이고 사는 것도 현실이에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어요.

 

삶과 신앙을 분리하지 마세요.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이어야 해요.

성도라고 해서 이슬 먹고 살지 않아요.

아무렇게 무책임하게 살란 말이 아니고 삶에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본분을 알고 사는 겁니다.

회사를 다녀도 아! 나는 천국 백성이지!

장차 하나님 앞에 서야할 사람이지! 라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사를 다니는 것도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왔다고 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 왔어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어디서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살면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정형화 시키지 마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면 훌륭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삶을 개선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살든 예수 안 믿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도 예수 안에 있으면 구원이고,

로마에서 해방을 하였다고 하여도 예수 밖에 있으면 저주라는 겁니다.

그러니 로마에서 해방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성도가 잘 사느냐 못사느냐 와도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생활이 어떠하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그건 지나가는 형적들이니 비중을 둘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다 감사할 것이라고 한 겁니다.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때문에 문제이지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것도 감사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건 듣지 않건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만 했어요.

예수님의 이러한 말 앞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변명도 필요가 없어요.

신앙에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믿느냐! 안 믿느냐! 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삐라를 뿌려서 잠시 후에 엄청난 재앙이 닥치니 피하라고 했어요.

이건 사실을 알려 주는 겁니다.

동의하건 하지 않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태풍이 밀려온다고 합시다.

이 태풍은 사람들의 사정을 봐 주면서 피해 가는 태풍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태풍이 오는 줄도 모르고 가족들과 사이좋게 오순도순 살 것이라고 초원에 아담하게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태풍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이 사람에게 알려 줍니다.

엄청난 태풍이 밀려오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그 사람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짓는 사람은 태풍이 오건 말건 그래도 나는 내 집을 지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심판의 태풍을 몰고 오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태풍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알려 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태풍에서 살아날 궁리를 강구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과거 노아 시대와 같은 상황으로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인간들의 삶에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해 주셨지요.

 

마 24:37-41=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노아의 때에 특징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살아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이에요.

 

이들이 엄청나게 타락하여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충실히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홍수로부터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방주 밖에 있어서입니다.

 

홍수에서 살아남는 것은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와는 상관이 없어요.

물이 엄몰치 못하는 배가 있느냐 없느냐 에요.

장치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살아 남을 것은 너 어떤 인간이냐는 소용이 없어요.

너 예수의 피가 있느냐 뿐이에요.

 

노아는 방주를 지었지만 지금은 예수를 믿는 겁니다.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방주를 타고 피했지만 장차 오는 불 심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피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서 살아난 것은 맛보기로 보여준 사건이에요. 

복음 속엔 이처럼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요소들이 담겨져 있어요.



예레미야를 봅시다.

 

렘 1:9-15=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만국 위에 세웠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주시면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알리라는 말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틀렸다고 말하란 겁니다.

 

그리고는 건설하고 심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죽였다 살린다는 말입니다.

심판하였다가 다시 회복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는 부활의 세상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살구나무를 보게 하셨고,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끓는 가마를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다시 회복할 것을 상징하는 계시였어요.

그러니 이는 종말론적인 의미에선 장차 하나님께서 기존의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하시는 계획이고 정해진 수순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끓는 가마와 같은 하나님의 유황불에 망할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서서 너희가 날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너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온 메시야임을 모르면 죄 가운데서 망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에 마음이 상한 바리새인들이 “네가 누구냐” 라고 따집니다.

“네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서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6절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지금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내가 십자가에 죽고 성령이 오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이 시대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깨달아 질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재 해석을 하십니다.

내가 왜? 죄인이며!

왜?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일을 해 나가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게 깨달아져야 오직 십자가만 말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를 간섭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 깨달아져요.

 

바울이 삼층 천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니 세상 속에 자신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신을 예수님이 감싸고 계신 거예요.

자신의 앉고 일어섬을 예수님 관리한다는 것이 보여진 겁니다.

자기 혼자 살아온 줄 알았는데 주님이 자신을 이리 저리 간섭해 온 겁니다.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도만 증거하며 살았던 겁니다.

 

우리도 동일해요.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온 세월이 내가 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러 저리 간섭해 오셨어요.

때로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어요.

우리 인생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는 간섭하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첫 사랑을 실패 했을 때 비관해서 자살해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학창시절 시험 점수 잘못 받아서 자살했을지 몰라요.

살아오면서 이러 저러한 사고를 당할 때 그 때 그 사고 때 이미 저승으로 갔을지 몰라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죽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 이었나요.

저도 수십 번 죽었다 살아났어요.

지금도 여전해요.

 

날마다 죽었다 살았다 해요.

에이 더러운 세상 살아서 뭣해 캭 죽어 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잖아요.

여러분은 믿음이 좋아서 안 그럴 줄은 몰라도 전 그래요.

하지만 마음뿐이지 결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마음만 먹었지 결행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주님이 나보다 강하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죽지를 못하고 사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전후로 두루고 계시지 않았으면 전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곧 주님이 나를 간섭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당하더라도 또 왔어! 라고 대범하게 여기세요.

제발 죽네! 사네! 하면서 자는 사람 심방오라고 하지 마시고 그냥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시고 안심하고 사세요.

 

그러니 앞으로 풍랑이 일더라도 죽지 말고 예수님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주무시듯이 주님과 같이 주무세요.

괜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지 마시고!

주님을 깨우시면 에이! 이 믿음이 없는 놈들아! 라고 말해요.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잖아요.

이건 우리보고 샘플로 보여주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우린 제자들처럼 또 주님을 깨우고 맙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린 제자들보다 낫지 않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복음을 아는 것하고 육신의 본능은 달라요.

복음을 알아도 본능은 본능대로 살아서 육신을 주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를 덮쳐서 용서 받고 살게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이 보여집니다.

우리가 너무 허상을 붙잡고 살았구나! 를 알게 됩니다.

진짜 복은 하늘에 있는데 우린 가짜 복인 땅에 것만 붙잡고자 목을 매고 살았구나 알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깨달아지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자세가 달라요.

 

예수님은 성도가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청지기 비유로 말씀해 주셨어요.

 

눅 16:1-9=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 비유를 보면 어떤 부자 집에 사무를 맡아 일하는 청지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주인은 자기 집에 청지기가 제멋대로 횡령하고 있는 불의한 도둑놈이라는 것을 알고 해고통지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그들의 채무를 자기가 알아서 탕감을 해주고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궁리를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주인의 돈을 횡령하고 있는 가중처벌을 받을 일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옥에 가두어야 할 짓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주인이 이렇게 꾀를 쓰는 청지기를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건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 경을 칠 일임에도 칭찬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를 지혜롭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일컬어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도 세상을 이렇게 살으라는 말입니다.

 

본 비유의 핵심은 그 청지기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날을 예비하려는 지혜로운 자세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일컬어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자칭 빛의 아들이라고 하며 자칭 천국백성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지혜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도 자기 앞날을 궁리하며 살아가는데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장래 일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도이고 천국백성이라면 적어도 청지기와 같이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망할 세상에서 망하지 않을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비록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 사람이 아닌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성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도 예수님과 같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라는 말이 아니고 장치 이 세상은 불탈 것임을 알리라는 겁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소리를 하면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다고 배척을 당하게 되고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 안 믿으면 망한다는 소리를 듣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30절 “예수님이 죄 가운데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모두가 안 믿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 얼마는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기정사실로 밝혀진 셈입니다.

이런 말씀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세상 속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는 말을 통해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갈라짐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 갈라지는 심판의 기능이 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의 심판은 지금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인간은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천국백성이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 백성인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지옥 백성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는 이 말씀은 믿는 자를 찾아내고자 하신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자기 백성들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는 각자의 신앙에 따라 판단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건 누구도 강요할 문제도 아니고 또한 강요되어져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노아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라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범사에 믿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 비유로 말씀해 주셨어요.

열 처녀 비유는 천국백성은 항상 깨어서 준비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열심히 준비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백성은 항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느 날 갑자가 몰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죄사함의 능력 안에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예수는 어느 한 날에 몰아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의 자람처럼 날마다 말씀을 먹고 자라가야 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마음이 더 깊어지고, 더 야물어지고, 더 여유로워지고, 더 넉넉해져 가야해요.

그래서 늘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주님의 사랑을 하루가 천년처럼 길게 느끼고 그 행복이 천년이 하루처럼 언제 갔는가 싶을 정도로 지루함 없이 아쉬워져야 해요.

마치 하루 종일 애인과 함께 있다가도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것처럼 여운이 길게 남아야 해요.

 

그러니 주 안에서 오늘 하루를 천년의 무게처럼 살고 살아온 세월을 하루처럼 가볍게 여기고 사세요.

예수 안에선 천년도 깃털처럼 가볍지만, 예수 밖에선 하루가 천년처럼 힘들고 괴롭고 무겁습니다. 

부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죄사함의 능력으로 천년을 하루처럼 가볍게 여기고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하락하옵소서. 우리 인생은 풀과 같이 다 불타 버릴 것임을 알게 하시고 불꽃이 사르지 못하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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