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3강. 신앙의 증거 (요 8:12-20)

by coroa 2021. 7. 12.

 

 

 

53강. 신앙의 증거 (요 8:12-20)

-.정낙원 목사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뜬금없이 묻는 질문에 당황스러워서, 집사님은 신앙생활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되물었어요.

 

그야! 예수 믿는 거지요.

그럼 예수를 믿음으로 사세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집사님이 예수를 믿는다면서요.

그럼 믿어지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그 분은 아마도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말라는 방법론을 가르쳐 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믿음으로 사는 것엔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이 분은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예수 믿는 것인 줄 알았나 봐요.

그러니 예수를 어떻게 믿는지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신앙은 방법론이 통용이 되지만 은혜로 사는 것은 방법론이 통용될 수가 없어요.

 

우린 은혜를 받고서도 늘 바리새인들처럼 법으로 살고 있어요.

덮어주는 삶을 사는게 아니라 까발리고 정죄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입술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반대로 살고 있어요.

나만 사랑하고 살아요.

우리의 육신은 나 밖에 몰라요.

다른 사랑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요.

 

성도는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하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죄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에요.

 

착한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에요.

자기에겐 의(義)가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기쁨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맞지 않아요.

 

예수 믿는 것에 무슨 방법이 필요합니까?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은 방법론을 구하지 않아요.

방법론을 구한다는 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지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 믿고자 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쪽에서 믿을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니까 믿는 것이지 우리가 깨닫고 인정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것하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믿고자 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지만, 믿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고자 하는 것은 내 행위이지만,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에요.

믿고자 하는 것의 바탕엔 인간의 가능성이 깔려 있지만,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란? 인간들이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이성으로 아무리 판단해도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최종 심판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의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하여서 예수를 분석하고 판단을 해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 할 수가 없어서 터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벌려 나가세요.

인간의 생각이 틀렸음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인간들이 아니라고 한 그 바탕에서 일을 해 가시니 사사건건 인간과 부닥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에 적용해 봅시다.

인간들은 믿어서 구원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고 도리어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바탕엔 인간의 가능성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에겐 너무도 쉬운데,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어렵고 힘이 들어요.

어렵고 힘들어도 도달만 할 수가 있다면 그것도 감수하겠는데,

아무리 오르고 또 올라도 도달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세요.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싶은데 예수가 안 믿어져요.

안 믿어지면 동원되는 게 인간 특유의 지극정성이라는 고집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종교성이에요.

자기 열심으로 믿어 보겠다고 경주하는 겁니다.

그러나 안 믿어지는 것은 매 일반이에요.

인간의 열심으로 믿음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제가 과거 율법 아래서 열심히 특심할 때는 예수를 믿고자 엄청 노력을 했어요.

그러나 끝내 믿지 못했어요.

믿어지지가 않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입술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을 수 없이 해도 안 믿어지는 것을 어찌 합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절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난 아니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어요.

겉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웃지만 속으론 지옥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인정치 않음이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만약 그 때 많은 사람들의 칭찬에 갈등을 느끼지 않고 믿음이 있고 좋은 줄 알았다면 그대로 쭉 율법으로 치달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태클을 걸어 주셨기 때문에 난 예수 안 믿는 사람이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재간으로는 예수 믿을 방법이 없구나! 를 알게 된 겁니다.

내 능력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가 약 40여년이 걸렸어요.

그래도 40여년 만에라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바울을 태클을 걸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나아갔을 것 아닙니까?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에겐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이 주님의 사랑인 겁니다.

 

암튼 전 한동안 율법 아래서 예수 안 믿으면서도 목사 노릇을 했어요.

아니지요.

믿고는 싶은데 안 믿어진 겁니다.

그래서 못 믿으면서도 설교 했어요.

복음을 알기 전 까지는 그랬다니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이 가짜라는 것이 보여져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나를 발가벗겨요. 

너 예수 안 믿어지잖아!

그러면서 믿는다고 큰소리치잖아!

넌 가짜야! 라고 발가벗겨요.

이게 엄청난 은혜예요.

 

전 제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엄청나게 울었어요.

너무 너무 기뻐서 울었어요.

이건 마치 부모 몰래 나쁜 짓 한 것을 감추고 불안 불안해 하다가 들통이 나서 매 맞고 난후 홀가분해 진 것과 같아요.

내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니 얼마나 시원한 줄 몰라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으니 편해요.

 

옛날 율법 아래선 죄인 안 되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 이젠 만사가 죄라는 것이 보여요.

내게선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과거엔 예수님의 피를 바를 일이 없게 하려고 했는데 이젠 피 없인 못 살아요.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가짜라는 것이 보여져요.

십자가 밖에선 진리라고 여긴 것이 십자가 안에서 보면 비 진리란 것이 드러나요.

 

전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란 말을 넌 항상 가짜임을 알라는 말로 들어요.

아무리 진짜이고 싶어도 진짜가 될 수가 없어요.

아담의 몸뚱이를 갖고 있는 한 불가능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하심이 고맙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 사랑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좋아해요.

이용하고자 해요.

 

뭔가 얻어낼 궁리만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죄가 육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육신은 자기 부인이 안 되어요.

항상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으로 출발해요.

 

육신이라는 놈은 나라는 존재의 바탕 위에 하나님을 두어요.

항상 내가 먼저에요.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있고 난 후에 하나님도 있어요.

 

그러니 육신은 항상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무슨 이익을 얻을까 궁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설교 잘하면 어떤 유익이 돌아올까 생각하는 게 육신이에요.

 

오늘 이 글을 올리면 어떤 반응을 할까?

좋은 반응이 일어나면 기분이 좋고 나쁜 반응이 일어나면 기분이 상해요.

내 가치를 인정받을 땐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해도,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요.

 

이런 사고가 우리 삶 속에서 그대로 녹아져 나와요.

우린 자기를 인정해 주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로 장막을 치고자 해요.

나와 다르면 좇아내요.

항상 나!

나! 뿐이에요.

눈만 뜨면 예수님이 아니고 나에요.

 

성경이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본능이 짐승처럼 자기 몸 위주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흔히들 짐승을 본능대로 산다고 하잖아요. 

우리 육신이 그래요.

본능대로 살고자 해요.

육신은 나라는 존재를 늘 인정해 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안주하고 싶어해요.

이처럼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늘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다니엘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세상의 본질을 알게 되었어요.

단 7:3-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큰 짐승 넷을 보여주시면서 이 짐승들은 장차 이 세상에서 일어날 네 왕이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사도요한도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세상의 역사를 다스려갈 왕들을 일컬어 일곱 머리 열 뿔 가진 짐승이라고 했어요.

왕이 짐승이란 말은 그 백성도 짐승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짐승의 나라 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날 왕을 짐승으로 표현한 것은 이 세상의 본질이 짐승과 같다는 말이에요.

인간들이 본성이 짐승과 같다는 말이며 곧 짐승의 법칙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짐승의 법칙이란?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져 가는 거예요.

힘으로 다스려지는 인간들 세상에선 힘이 곧 진리이고 법이에요.

 

세상의 역사를 말할 때 승자의 기록들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역사 자체가 힘의 논리로서 다스려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항상 힘의 논리로 다스려져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다스려져 갈 것입니다.

과거에는 총과 칼이 힘이었지만 지금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힘이란 곧 사람의 숫자에요.

 

세상은 모든 것이 사람의 수에 따라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사람의 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힘이고 권력이에요.

그래서 모든 집단들은 자기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많이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층을 모은 세력은 곧 옳음이 되고 정당한 집단이 되지만, 지지층을 얻지 못한 세력은 부패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아요.

 

엊그제 일본이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56년 동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던 자민당이 무너졌어요.

누가 56년의 권력을 무너뜨렸습니까?

민심(民心)입니다.

사람의 수 곧 표로 무너뜨린 겁니다.

 

사람의 수는 권력을 세우기도 하지만 권력을 무너지게도 해요.

그래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사람의 수를 얻고자 분골쇄신하는 겁니다.

교회들도 진리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수(數)에 올인해요.

목사들도 복음에 사활을 거는 것이 아니고 교인의 숫자에 사활을 거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에도 유대인들도 사람의 힘을 믿고 살았어요.

종교인들에겐 하나님은 허울이고 실제로 믿은 것은 사람의 수(數)였어요.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민족이기 때문에 정당은 없었지만 종교집단은 있었어요.

그러나 종교 집단이 정치적인 몫을 감당하고 있었으므로 본질적으로는 정치 집단과 같아요.

당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엣세네파나, 쿰란 공동체와 같은 것들이 모두가 종교적 집단이면서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는 집단들이었어요.

 

그러므로 자연히 각 종파마다 자기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많이 확보하려고 경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확보한 집단이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고 권력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세(勢) 부풀리기 싸움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새로운 집단이 생겨났는데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같은 종교 집단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겁니다.

그들에겐 사람의 수(數)가 곧 힘이니 예수님에게 사람이 쏠리니 막아야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좇아내든지 죽여야만 했어요.

 

요한복음 12장을 봅시다.

 

요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보세요.

당시 바리새인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으니 바리새인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는 것을 불안해 한 겁니다.

 

이건 바리새인들만 그런게 아니고 모든 종파들이 다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었지만 새로운 힘이 커가는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에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만히 두다가는 자기들은 망하고 예수님만 흥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적었을 것 같으면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수님께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고 이것이 미움 받는 빌미가 되어 바리새인들로부터 제거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내린 결론은 다만 자기들의 가치관으로 판단하여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상대방의 의중은 읽지 않고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을 하고 시행해요.

마치 조폭들처럼 난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는데 왜? 기분 나쁘게 보느냐! 라고 시비를 걸잖아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기분 나쁘게 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들겨 패잖아요.

 

예수님은 사람의 숫자에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수(數)가 힘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이 몰리니 자신들의 힘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어요.

 

지금도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생각을 해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면 기뻐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교회 키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열심과 충성으로 봉사하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 가서 살잖아요.

집안 일은 엉망진창인데도 교회에 가서 어깨에 전도띠를 띠고 마음에도 없는 전도를 한답시고 난리를 피우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좋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사 지내기에만 급급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전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좋아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어떤 집에 초대를 받고 가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차려 놓았어요.

초대 받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목사님도 좋아 할 거야! 라는 생각으로 차려놓는 겁니다.

정성이야 갸륵하고 고맙지만 젓가락 옮기기 운동만 하다가 와요.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어요.

 

그래서 전 심방을 가면 집에서 음식 한다고 수고하지 말고 짜장면 먹으로 가자고 해요.

그게 훨씬 경제적이고 시간도 수고도 덜어요.

굳이 집에서 음식을 장만 한다면 제 아내랑 상의해서 귀띔을 받으라고 해요.

 

지금 바리새인이 그래요.

자기들 생각으로 예수님도 사람의 숫자에 춤을 출 거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숫자를 힘이 된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힘을 삼지도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숫자를 힘으로 여겼다면 수많은 군중들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하였을 때 추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수를 힘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들을 떠났고 그들에 왕 되기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은 사람의 숫자를 무가치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수를 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이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짐승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했다면 그들을 책망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좋은 말만 골라서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인정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인간들 편을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고를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를 평가하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지요.

목숨을 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넣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지요.

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란 말입니다.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유일하게 하나 귀에 못이 박힌 말이 있어요.

“코람데오” 라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란 말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막상 목사가 되고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하면서 이게 얼마나 꿈같은 말인지 몰라요.

교회를 이끄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에요.

말로는 얼마든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해요.

그러나 실상은 교회 주인은 교인들이에요.

교인들만 보이지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기뻐할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교인들이 뭘 좋아하는가 궁리하게 되어요.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연구하여 목회하면 교회에 사람은 모여요.

그러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교회로 세워져 가는 겁니다.

 

제가 처음 십자가 복음을 접하자 제일 반대한 사람이 아내였어요.

아내의 주장은 아무리 십자가가 복음이라고 하지만 듣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 에요.

인간적으로 들으면 맞아요.

개뿔이나 들을 사람이 있어야 복음도 전할 것 아니냐!

이게 실용주의 사고거든요.

아내의 예상대로 십자가를 말하니 교인들이 다 떠났어요.

 

전 그 때 복음 전하면 교회 안 됩니다?

십자가는 목회에 도움이 안 됩니다! 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에이~ 설마! 그랬어요.

솔직히 목사로서 복음이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현실로 나타나니 당황스럽더라고요.

 

하지만 복음을 포기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율법 아래 지긋지긋하게 종노릇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분해서 복음을 포기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당시엔 복음이 주는 은혜와 감동이 교회보다 더 컸어요.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복음을 더 알아가는 것이 더 소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주님의 은혜였어요.

십자가가 주는 안식이 내겐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으니까요.

 

아내도 그땐 복음을 몰라서 반대 했지만 복음을 알고 난 지금은 큰 응원군입니다.

지금은 복음 전하지 않으려면 목회하지 말라고 해요.

당시 교인들에게 휘둘리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합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요.

 

저에겐 율법 아래서 목회를 할 때가 애굽의 종살이였습니다.

교인들 비위 맞춘다고 춤을 추었으니 종노릇 한 거지요.

설교를 하면서도 교인들 눈치를 살펴야 했으니 조마 조마 했지요.

 

복음을 알고 보니 죄인은 수(數)에 칠 가치가 없는 존재란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자연히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교인들 비위를 안 맞추어주다 보니 지금은 교회가 텅 비어 있습니다.

교인은 없어도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니 감사하지요.

복음으로 배부름을 얻으니 감사해요.

 

교인을 못 모았다고 하나님 천당에 오지 말라고 하지 않으니 염려 할 것이 없지요.

물론 교인이 적으니 돈이 없어서 조금은 고생스럽기는 해도 돈에 가치보단 복음이 더 귀하니 그것도 이겨 낼만 해요.

이러다가 교회가 영 운영이 안 되면 문 닫으면 되지요.

이런 배짱이 어디서 생겼는지 몰라요.

복음 속에 이런 배짱이 들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마세요.

누가 여러분의 신앙을 좋다고 하여도 기뻐하지 말고 믿음이 없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세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증거만 가지고 있다면 안심하고 사세요.

 

사람은 조석지변으로 변해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항상 변해요.

오늘 간(肝)이라도 빼 줄 것 같던 사람도 돌아서고 나면 비수를 꽂아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마치 짐승처럼 누구든지 자기 밥그릇을 빼앗으면 무는 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인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곧 살아가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재미가 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은 네가 빛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에요.

여기서 빛이란 진리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앞서서 간음한 여자를 바리새인들은 고소를 하는데 예수님은 정죄치 않는다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다가 자기들이 죄인임을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끝까지 간음한 여인을 고소치 못하고 중간에 돌아갔다는 것은 자기들이 떳떳치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예수님이 다시 성전의 연보궤 옆에서 설교를 하는 겁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요 8: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빛이다!

그러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도발적인 말씀이에요.

이는 곧 너희는 어둠이다! 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깔려 있는 말이에요.

 

빛이란? 진리를 말하고,

어둠이란? 비 진리를 말해요.

그렇다면 나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말입니다.

이건 독불장군(獨不將軍)식 발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진리를 전하는 자이고 빛에 속한 자라고 생각하고 선생 노릇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졸지에 어둠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비 진리를 전하는 자라는 것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기 친 것이 되고 말았어요.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면 큰일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야 예수님에게 기우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되돌릴 수가 있어지거든요.

그래서 율법으로 증거를 대 보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어째서 빛이고!

하나님이 어째서 네 아버지냐! 라는 것을 증인을 세워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빛이라 한 것은 예수님 혼자 이야기이지 그 누구한데도 증명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미친 놈 누가 너를 빛이라고 했는데!

누가 네 판단이 옳다고 증거를 해 주었느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율법을 근거로 말하는 겁니다.

율법에는 어떠한 것을 인정받으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증거로 인정이 되었어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누가 너를 빛이라고 하였는지 두 증인을 대 보라는 겁니다.

누가 네가 하는 말이 진리인지 증인을 대 보라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18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증인이라고 증거 할 수 있느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증인을 세우려면 다른 사람을 세워야지 어떻게 자기 자신이 증인이 될 수 있느냐! 라고 반박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에겐 말이 안 되지만 나에겐 된다는 겁니다.

이건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말이 안 통하는 무대뽀에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괴변이에요.

맞아요.

 

예수님의 대답은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막무가내에요.

어떻게 자기하고 하나님이 증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건 인간의 상식으론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증명해서 알아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에게 빛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둠의 지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빛으로서의 해석을 내어 놓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나 천국이나 영생과 같은 영적인 일은 육에게 이해시켜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무슨 수로 설명을 하겠어요.

설명할 재간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신 것은 진리는 사람들로부터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로 증거가 되는 것이지 인간에게 진리라고 증명 받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인정해 주건 주지 않건 상관없이 빛이란 겁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빛이 되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빛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들 세계관으로 빛과 어둠을 판단하는 근거를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인간들 손에서 하나님이냐! 아니냐! 로 판단이 되어져요.

인간들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해 주면 하나님이 되고!

인정 안 해 주면 아닌 것이 되고 말아요.

 

이게 죄에요.

실제로 인간들은 자기 기준으로 신(神)을 판단했어요.

선악과가 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참 신과 거짓 신을 판단했어요.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가짜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상선벌악 하는 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지만 유대인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율법으로 참소하는 겁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 상관치 않고 진리로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이 되지 인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겠다는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을 봅시다.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위에서 났고, 너희들은 아래서 났다고 합니다.

위란? 하늘나라를 말하고,

아래란? 땅을 말해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땅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창조주가 어떻게 피조물에게 인정을 받느냔 말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증거를 받아야 하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인정해 준다고 해서 기뻐하시지 않으세요.

 

예를 들어 사람이 강아지로부터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아요.

강아지가 사람에게 내가 너를 사람으로 인정하노라! 한다고 해서 사람이 기뻐하지 않잖아요.

왜 입니까?

사람들에게는 짐승의 평가가 무의미하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 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용한다면 사람은 하늘에서 낳고 강아지는 땅에서 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짐승 같은 땅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으로 인정하건 하지 않건 하나님이세요.

예수님 역시도 죄인들이 인정하건 하지 않건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바리새인들이 인정하건 하지 않건 예수님은 빛이고 진리예요.

 

이걸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런데 이걸 누가 믿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 주어서 믿어지게 만든 겁니다.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의 살아계셔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의 증거물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 같지 않은 말을 진리로 믿고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서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누가 미친 말 하지 말라고 해도 두렵지가 않지요.

이는 여러분을 성령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증거해 주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도 그랬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해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겁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서 증거를 해 주시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성도를 천국백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면 끝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소유한 것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해 주기 위해 성도에게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임하면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믿어져요.

난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이 믿어집니다.

그럼 세상이 두렵지 않고 사람의 평가가 두렵지 않아요.

 

성령은 성도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천국백성임을 증거해 주잖아요.

그래서 성경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술술 믿어지잖아요.

이상하게 담대함이 생기지요.

이게 믿음입니다.

 

전 이것을 화투판에 장땡이로 비유해요.

복음을 화투놀이에 비유해서 죄송하지만 이것만큼 좋은 비유가 떠오르지 않아요.

끗발 싸움하는 화투판에선 단풍 잎사귀 두 장만 있으면 그 어떤 회유나 협박도 두렵지 않아요.

느긋해져요.

단풍 잎 두 장만 들면 표정관리를 해요.

 

놀음판에선 단풍 잎사귀 두 장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 되어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애게 해 주는 능력인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단풍잎사귀 두 장을 받은 것과 같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겨싸지 못해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누구로부터 증거를 구하려고 하지 않아요.

 

사도요한은 이것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요일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고 하지요.

온전한 사랑이란? 성령의 증거라고 할 수 있어요.

성령이 예수의 피가 그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죄 가운데서 살면서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겁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겨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안 되어요.

그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환경에 따라서 요동을 쳐요.

 

이게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옥에도 가고 죽음으로 막아주겠다고 장담을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인간의 각오나 의지는 죽음 앞에서면 여지없이 무너져요.

죽음을 이길 인간은 없기 때문이에요.

 

베드로는 자기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신앙을 지켜 낼 수가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 된다고 합니다.

둘이서 내기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육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주께서 믿음을 관리 해 주시지 않으면 지켜내지 못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사단이 밀 까불듯이 한다고!

 

그럼에도 주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를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베드로의 구원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딤후 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보세요.

주께서 하신다고 하지요.

중요한 것이 “주께서” 에요.

 

주께서 전도도 하게 하시고!

주께서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시고!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시고!

주께서 천국에 무사히 넣어 주신다고 하잖아요.

 

바울이 이 말을 지금 디모데에게 하고 있어요.

또 우리 모두에게 하고 있는 말이에요.

얘들아!

예수 믿다가 보면 온갖 어려운 일들이 많이 닥칠 것이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은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실 테니!

너희는 주님의 약속만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난 것이니 안심하고 사세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책임질 것이 없지요.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마무리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 하였음에도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를 구원하는 일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가도 끝까지 찾아가서 용서해주고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살다가 주님을 베드로처럼 부인하고 저주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용서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마음 푹 놓고 사세요.

우리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아요.

우리의 구원은 그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 어떤 장애물도 다 너끈히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베드로는 주님의 용서가 자기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저주조차도 용서로 덮어 주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덤벙거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나의 모든 죄 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는 사실을 알고 담대히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성령이 임하면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그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와야 사라져요.

믿음이 오면 십자가의 용서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능력이 덮쳐 와요.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사니 이미 천국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교회나 사람들로부터도 증거를 구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맞다고 하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걱정 한다는 것은 수상해요.

그 안에 온전한 사랑이 없어서 그래요.

 

누가 이단이라고 하여도 신경 쓰지 마세요.

주께서 우리 곁에 서서 맞다고 증거해 주는데 왜?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성령을 보증금으로 주셨잖아요.

 

이제 하나만 더 살펴보고 마칩시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를 증인으로 내 세운 것은 아버지가 지금 예수님 안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사람의 증거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자기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는 일은 아버지가 자기 안에서 일하신다고 말하고 있지요.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36-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께서 증거를 삼는 것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갖가지 기적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행하신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는 예수님이 하신 일로서 두 증인이 선 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함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이 증명 되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증명이 된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지금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하니 참람되다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할 때 말씀하신 내용이에요.

너희들 말대로 내가 하나님인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예수님의 주장은 예수님은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하여서 아버지가 자기 안에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성령을 받고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후 예수님이 지금 자기들 안에서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봐라!

우리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라는 말이에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는 인간이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에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럼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성령이 내재해 계시다는 증거가 되잖아요.

아니 말은 확실히 합시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잖아요.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와 계시다는 증거지요.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와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나 성도나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적이라는 역사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증거해 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기적을 베풀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하나님이니 귀신도 굴복하고 풍랑도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이에요.

 

이를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만약 성도가 십자가 도를 전하면 그 십자가 도를 전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로 십자가 도를 전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십자가 도를 전하는 그 자체가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해 주는 셈인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자라면 자기의 신앙을 교회나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지요.

이유는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 곧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인정해 주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아니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데 왜? 외부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합니까?

외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그 집단으로부터 뭔가 얻고자 하는 속셈이 있어서 그래요.

같이 유유상종하고자 그러는 겁니다.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교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말라는 말은 교회도 얼마든지 타락 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가시적으로 말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즉 울산 목양교회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울산목양교회가 진리의 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진리의 터는 한 성령을 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회에요.

이런 교회는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여럿이 모이면 하나가 되고 흩어지면 독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요.

 

그렇기 때문에 유형적인 조직교회로부터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조직화 되면 조직을 위해서 교인들을 존재케 만들어요.

하나의 정치 집단이 되어요.

정치 집단이 되려면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생긴 것이 각종 신조들이에요.

 

기독교가 조직화 되면서 각종 신조들이 자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겨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신조에 동참하면 같은 편으로 인정하고 동참치 않으면 부정해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교회나 또는 자기가 속한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의 신앙을 검증하겠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활동을 제약하고 통제하겠다는 악마적 발상입니다.

교회의 증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중세 암흑시대 교회사가 역사적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중세 암흑시대에는 성도들의 신앙을 교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했어요.

교회가 정한 규범 안에 들어가야 성도로 인정이 되었어요.

당시엔 국가 자체가 거대한 교회였어요.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만약 교회가 정한 규범을 벗어나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살아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가 급기야는 천국의 티켓을 돈을 받고 팔아먹는 면죄부를 발행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분명히 잘못 되었음에도 그 당시에는 교회가 정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함으로 성도됨을 증명 받아야 했어요.

 

중세 암흑시대에는 성도들이 성경의 증거보다 교회로부터 증거를 받는 것이 우선시 되었어요.

아무리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하여도 교회의 증거가 없으면 불신자 취급을 받아야 했어요.

오죽했으면 교회가 정권을 잡고 좌지우지 하던 시대를 일컬어 암흑시대라고 하겠어요.

교회가 타락하면 가장 무서운 집단으로 변해요.

 

이건 지금도 동일해요.

지금도 이러한 사상들이 교회 안에 다른 모습으로 들어와 있어요.

비록 중세시대처럼 노골적으로는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만 그와 같은 의미의 일들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것은 교단이 정해 놓은 법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시키는 대로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일성수와 십일조입니다.

마치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 되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은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들이지 본질은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행하여지는 일체의 행위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내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의미를 둘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가 있어요.

이렇게 되면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속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바울이 그러지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성도 안엔 그리스도의 것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살게 해 주는 것으로 사는 자가 되어요.

 

예수님이 살게 해 주는 삶이란? 아주 쉽게 말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이고, 그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해 주는 것으로서의 삶이에요.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안 보이고 예수님의 피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예수님의 용서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께 용서 받고 사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증거하려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선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자기 행함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면 선한 것으로 이해하고 술 먹고 나쁜 짓을 하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선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떳떳치 못한 일들을 하면 아예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립니다.

 

이게 율법이 주는 죄관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이 뱉어낸 모든 것을 죄로 여겨요.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여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았어요.

스스로를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율법신앙에선 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까지 애지중지하던 율법신앙을 배설물처럼 버렸어요.

 

바울의 율법 신앙 속에는 자기 역사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베냐민 지파로부터 시작해서, 가말리엘 문하생하며, 바리새인까지 철저하게 율법대로 살아온 모든 역사가 담겨져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역사가 곧 하나님 앞에서 죄였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토록 자랑하던 율법신앙이 예수를 죽인 죄라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 몸은 자고 일어나면 자기 역사를 만들어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만들어가고자 해요.

바벨탑을 쌓듯이 자기 행함을 의로 하나 둘 쌓아가요.

 

그러면 성령께서 넌 왜? 예수의 생명으로 예수님의 것을 쌓아가지 않고 네 역사를 쌓고자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그게 바로 죄라고 책망을 하고 그럼에도 네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 때문임을 알게 해 주는 겁니다.

 

이럴 때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지나고 나면 또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우린 일평생 살면서 죄만 토해내고 예수님은 피로 감싸서 용서해 주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의 용서 받은 흔적으로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범죄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 하라고 하지요.

이는 계속 용서 해 주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의 실천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고 계세요.

우리가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받고 사는 자에요.

무한대로 용서 받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용서가 되려면 우린 계속하여서 죄가 터져 나와야 해요.

자기가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비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 크게 다가와요.

바울이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은 그만큼 죄를 많이 알았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더 크게 감사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어요.

바울은 죄를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했어요.

왜냐하면! 죄사함 받은 자는 주를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 죄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신앙의 증거는 어떤 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주를 사랑하십니까?

그럼 하나님의 증거를 받은 겁니다.

누구에게 증명 받고자 하지 마세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사랑하고 사는 건가요!

묻지 마세요.

여러분 속에 계신 그 분이 알아서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주님이 간섭하는 세미한 손길을 느끼세요.

바람이 임으로 불지만 그 바람이 불고 간 흔적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각양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나타나지는 것마다 주님의 은혜임을 아시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만유보다 크신데도 우린 자꾸만 주님은 바깥에서 찾고자 합니다. 이 어리석음을 꾸짖어 주시고 내가 지금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진다는 이 사실에 놀라고 또 놀라게 하옵소서. 큰 일에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 말고 세미한 일들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