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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5강. 아들이 주는 자유 (요 8:31-36)

by coroa 2021. 7. 17.

 

 

 

55강. 아들이 주는 자유 (요 8:31-36)

-.정낙원 목사

 

심심찮게 탈북자들 이야기가 메스컴으로 보도가 됩니다.

이들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을 하였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살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입니다.

북한에서의 삶이 너무도 힘들고 지쳐서 남한에 오면 그 지친 삶을 보상이라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죽음도 불사하고 탈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꿈꾸던 세상이 그들 앞에 펼쳐졌을까요?

아니라는 것이 각종 조사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탈북을 후회하여 다시 귀환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남한을 바라 볼 때는 살기 좋아 보이지만 그건 신기루일 뿐입니다.

물론 자유는 얻었겠지만 근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아요.

먹고 사는 일이 고달프면 자유라는 것도 허상에 불과해요.

 

얼마 전에 탈북자(새터민)들에게 남한의 생활이 행복하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땐 북한보다 남한의 환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바라는 행복지수는 자유라는 환경으로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선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시장경제로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있는 자는 한없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지만, 없는 자는 종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사회주의에서 살던 사람은 자유주의에서 살던 사람들을 따라 가기가 힘이 든 겁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서의 생활은 새로 배우는 단계이므로 남한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가 없어요.

자유를 찾아 왔지만 시장경제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밀려 또 다른 속박에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술 한 잔 하면 차라리 북한에서의 생활이 나았다고 탄식 어린 어조로 신세타령하면서 넋두리 한다고 합니다.

 

우린 여기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유(自由)입니까?

재물(財物)입니까?

사상(思想)입니까?

종교(宗敎)입니까?

 

과연 이러한 것들을 얻었다고 인간이 행복할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대통령도 자살을 하였습니다.

돈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재벌 총수도 자살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받던 유명 연예인도 자살을 합니다.

또한 천재라고 불리며 모든 학문에 통달한 것 같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자살을 합니다.

목사도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고 자살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린 학생도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을 합니다.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자살을 하고,

애인이 변심했다고 자살을 하고,

학교 공부가 힘들다고 자살을 하고,

실직했다고 자살하고,

이래 자살하고, 저래 자살하고,,,,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할까요?

속으로부터 엄습하는 공포 때문입니다.

  자살이란? 죽음의 공포를 죽음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극단의 방법입니다.

일종에 자기 방어입니다.



얼마나 사는게 힘들고 죽을 지경이었으면 죽겠습니까?

힘들고 죽을 지경이라는 환경을 벗어나고파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 인간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인간이란? 산다는 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지 않는 자가 복되다! 고 합니다.

아니!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찌 복되다고 합니까?

뭔가 모순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태어나서 살아보지도 않는 것이 어찌 복됩니까?

이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나면서부터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일평생 쫓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을 많이 꾸지요.

특히 가위눌림 당하는 꿈을 꿔 보셨지요.

깡패가 뒤에서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아무리 도망을 가려고 해도 발걸음이 떼어 지지 않아서 공포에 떨던 그런 꿈을 꾸어 보았지요.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앞에 사고가 날 일이 닥쳤서 브레이크를 밟아도 말은 듣지 않을 때 놀라는 때가 있지요.

아니면 불난 집에 갇혀 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도망 치지 못하여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공포에 질려서 식은땀을 흘리던 그런 꿈도 꾸어봤지요.

 

우리는 흔히들 죽음에 쫓기는 그런 꿈을 악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몽이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셨나요.

프로이드라는 정신분석학자는 꿈은 무의식 세계의 현현(顯顯)이라고 했습니다.

무의식 세계란? 분명하게 있는 세계인데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어떤 세계입니까?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럼에도 평상시엔 살기 바빠서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본능 속엔 죽음이라는 공포가 늘 엄습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쫓기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속이든 현실이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세력 안에 가두어져 살아갑니다.

세상은 비어 있지 않고 사망의 세력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렇게 사망의 권세 아래서 인간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에 쫓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데 꿈속에서 가위눌림과 같이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겁니다.

우리가 어찌 할 수가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이니 일평생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를 빌리면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사망을 우리가 어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곧 죄도 인간이 어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은 죽음에서 벗어나야만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죽으면 끝나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인 겁니다.

 

성경을 보면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마치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듯이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지옥으로 보내든지 천국으로 보내든지 하는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은 살아도 공포이고 죽어도 공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 아래서 나지 않는 자가 복 되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불신자에 관해서입니다.

신자에겐 엄청난 영광이지만 불신자에겐 엄청난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왜? 무서울까요?

흔히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동묘지나 폐교에는 밝은 대낮에 가면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밤에 가면 두렵지요.

왜? 낮은 안 두렵고, 밤은 두려울까요?

이는 낮에는 감지가 되는데 밤은 감지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겠지요.

천국이 실제로 믿어진다고 하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더 좋은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빛 안에선 안심을 얻고, 어둠 안에선 두려움을 얻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빛은 생명의 세계라고 하고, 어둠은 죽음의 세계라고 합니다.

빛은 생명이고, 어둠은 사망입니다.

예수 안은 생명이고 예수 바깥은 사망입니다.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두렵지가 않고,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살아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로 보건데 인간의 행복은 환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환경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환경을 바꾸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하여도 죽임이 주는 두려움은 그대로 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근본적인 것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인간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환경을 개선시키라고 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개선해 주시려고 오시지 않았어요.

환경을 바꿔 주고자 오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해서 어찌하든지 식민지라는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개선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린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환경을 개선시켜 주지 않아서입니다.



유대인들은 강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해결해 주고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되어 세계에서 으뜸이 되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어요.

이건 자기들이 조합해낸 메시야에요. 

하나님은 이런 나라를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유대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그런 나라를 꿈꾼 겁니다.

그래서 성경과 상관없는 메시야를 소망했어요.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인간들의 삶에 질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있어요.

천주교가 대표적인데!

여기에 동조하는 자유주의 교회들도 있어요.

 

이들은 인간의 불행이 마치 사회의 환경 때문인 줄 알고 정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난하고 약한 자들 편에 서서 가진 자들을 상대로 투쟁을 해서 빈부가 없이 모두가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만들자고 합니다.

 

이들이 주로 인용하는 성경입니다.

 

눅 4:18-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문자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주리시면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이기시고 난 후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라면 예수님이 사회 개혁을 부르짖고,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부자들의 곡간을 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민중 투쟁을 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난 한 자와 눈 먼 자와 억눌린 자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가난하고 눈 멀고 억눌린 자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육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영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눈멀고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들을 해방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고자 오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정의 구현을 외치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야 나라를 꿈꾸는 것과 같이 헛다리 짚은 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들이 만든 메시야이즘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이해합니다.

영적인 말씀을 육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들 세상에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눈멀고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시면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멀고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는 바로 죄인을 말합니다.



죄 아래서 일평생 사망에 종노릇하면서 신음하는 모든 인간들을 말합니다.

부자도 죄 아래서 죽음에서 신음하고,

정권을 잡은 대통령도 죄 아래서 죽음에 쫓기며 신음해요.

장애인들도 죄 아래서 죽음에 쫓기고, 정상인들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쫓기며 살아요.

이 모두가 병든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들을 하신 겁니다.

이 모두가 죄가 몰고 온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고쳐주신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일이 목적이었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병자를 고쳐 주었어야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 고쳐 주시지 않았어요.

이는 병을 고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흔히 천주교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메세야가 아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일을 하시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말하는 그런 나라를 몰고 오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민중을 해방한다거나, 가난을 극복한다거나, 질병을 퇴치 한다는 그런 나라가 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죄와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세상 가치로부터 자유하는 나라입니다.

돈으로부터 자유, 환경으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두려움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고 죽음이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해결 할 수가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신다고 합니다.

어디로부터 자유인가 하면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요 8:31-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뭔가요?

내가 너희 죄를 위하여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믿어지면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고 합니다.



자유란? 어디엔가 갇혀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지요.

그럼 예수님이 바라본 인간들은 어디에 갇혀 있는가요?

죄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지금 죄 아래 갇혔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말은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그 주인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과 아들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동일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진리 그 자체란 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도리가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진리이고,

십자가 피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자유함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종이 되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를 준다고 하느냐 라고 힐난합니다.

이러면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자유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하여도 죄 아래 갇혀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해서 죄 밖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후손도 죽고, 이방인도 죽어요.

인간의 혈통은 죽음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 후손들을 죄에서 건지러 오신 겁니다.

 

자 다시 봅시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 아래 있는 자라고 말씀 하시지요.

이렇게 되면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인이 되어서 종인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합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선 죄를 안 짓고자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인간은 죄인입니다.

고로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인간이 죄 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도리어 죄 안 짓는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아주 기분 좋고 속 시원한 말씀을 드릴게요.

오해하지 말고 잘 새겨들으셔야 해요.

여러분이 죄짓는 일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죄인은 죄 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책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상관없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괜찮다는 말이에요.

이건 여러분 마음대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란 말이 아니에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죄 지어도 괜찮다고 하니 백화점에 가서 도적질 하지 마세요.

세상이 금하는 죄를 지으면 세상 법이 가둡니다.

그러니 세상 옥에 가두어지지 않으려면 세상이 정한 착한 삶을 살아야지요.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잘잘못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요.

성도의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는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능력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말하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규정한 죄를 지으면 세상 옥에 가두어져요.

그러니 세상이 정한 죄를 짓지 마세요.



근데 중요한 것은 죄가 우리 육신을 근거로 발현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발현하는가 하면,

겉으로는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의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마치 사람이 강아지에게 의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자책한다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있었는데 이기지 못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어요.

누가 가두었는가요?

하나님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고 하지요.

어디에 가두었다고 합니까?

죄 아래이지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어요.

그러면 인간들 힘으로 죄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이렇게 되면 독자적으로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교만이고 악함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이 죄 안 짓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건방지고 교만한 악이란 말입니다.

의미를 이해하시겠지요.

 

로마서 11장을 다시 봅시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순종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지요.

 

만약에 순종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되겠지요.

아니, 하나님은 분명하게 순종치 못하게 가두어 두셨다고 하잖아요.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고 하잖아요.

 

죄가 뭔가요?

신앙적인 문제로 말합니다.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이지요.

 

에덴동산에선 먹으라고 하는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서 죽음에 가두어졌잖아요.

그래서 죄 아래 가두어졌잖아요.

맞아요.

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타나요.

 

구약에선 율법대로 살라고 했는데 율법대로 못 살았어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이젠 말씀대로 살겠다고 해요.

지키라고 하면 안 지키고!

지키지 말라고 하면 지키겠다고 해요.

완전히 청개구리에요.

이게 죄에요.

 

어느 시대이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는데 거짓 종들은 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서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고자 했어요.

너희 속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있고,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서 남을 미워하고 남에 것을 탐내고자 하는 것이 들어있다고 했어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위선을 떨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척하고 살아요.

누가? 바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말이에요.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그래요.

 

그래서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탄식소리들은 가득한데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상한 심령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어 두시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했지요.

왜? 죄 아래 가두어 두시고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셨을까요?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순종치 못하도록 가두어 두신 것은 긍휼을 베풀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자가 긍휼을 입을 자란 말입니다.

잘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를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해 볼까요.

바리새인들은 너무 잘나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길 틈이 없어요.

그러나 세리들은 어느 것 하나 잘난 것이 없어서 하나님이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되어요.

 

맏아들과 탕자를 비교해 봅시다.

맏아들은 너무너무 완벽해서 아버지가 도와줄게 없어요.

그러나 탕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어서 모든 것을 아버지가 도와주어야 해요.

 

야곱과 에서를 비교해 봅시다.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부모 도움 없이도 너무도 잘 살아요.

그런데 야곱은 못나서 엄마 치맛자락만 붙잡고 다녀서 모든 것을 부모가 도와주어야 해요.

 

자 봅시다.

바리새인이나, 맏아들이나, 에서는 너무도 잘나서 부모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자들이에요.

반면에 세리나, 탕자나, 야곱은 한시라도 부모의 보살핌이 없이는 못살아가요.

잘난 놈들에겐 긍휼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못난 놈들에겐 긍휼이 필요해요.

 

잘난 놈들에겐 부모의 것이 담겨 있을 곳이 없어요.

너무 잘나서 부모가 뭘 해줄 것이 없어요.

그러나 못난 놈들은 온통 부모의 것이 담겨져 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부모가 준 것으로 칭칭 감고 있어요.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기심을 입는 것이에요.

우린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문둥병자와 같고 중풍병자와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업고 가시는 겁니다.

 

이걸 갈라디아서에선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시킨다고 합니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시키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주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이걸 약속하셨다고 하잖아요.


약속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마치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줄게!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이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은 그 자체로 완성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말씀은 빛이 있으라!

그러면 즉시로 빛이 생겼지요.



풍랑을 보고 잠잠해라!

그러면 즉시로 잠잠했지요.



귀신에게 떠나라!

그러면 즉시로 떠났지요.

 

이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과정이 필요가 없고 즉시로 일어나요.

세상은 과정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엔 과정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창조의 능력이고 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선 병을 고치면 여러 날 동안 차도가 생겨서 고쳐지지만 예수님 앞에선 즉시로 고쳐져요.

 

이 시대 흔히들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성경적 병 고침이 아니에요.

불완전하거든요.

어떤 병은 되고 어떤 병은 안 되잖아요.

기적이니 병 고침이니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지극히 제한 적이잖아요.

그러니 성경적이지 않는 가짜들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하게 고치셨어요.

어느 병은 고치고, 어느 병은 못 고치고가 없어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그래요.

이 시대 무식한 자들처럼 목을 조르거나 두들겨 패지 않아요.

큰 소리 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종용히 말씀만 하면 귀신이 알아서 나가요.

 

이게 하나님 말씀이 갖는 창조의 능력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시켜 주신다고 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 믿게 하면 반드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확정적인 겁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런 약속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에게 주신다고 하지요.

그래서 구원이 은혜인 겁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유기하였다는 말이 필요가 없지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지요.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거짓말이 되지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에게 모두 구원해 준다는 약속을 하실 이유가 없지요.

그럼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에게 약속을 주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는 자신이 죄 아래 가두어진 자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는 누가 믿는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믿어요.

바리새인이나 맏아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죄인임을 몰라요.

반면에 세리나 탕자는 자기가 못났음을 알기 때문에 죄인임을 알아요.

 

이렇게 되면 약속은 누가 받았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받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약속을 주셨어요.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자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약속을 받은 자이고, 모르는 자는 약속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본문을 또 다시 봅시다.

 

요 8:31-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해 준다고 하지요.

진리를 알면 내 제자가 되고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아니 우리가 언제 누구 종이 되었더냐!

자신들은 종이 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케 될 이유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죄 아래서 죽는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이 죽는 것은 죄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죽는 것이야 말로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죄를 말할 때 인간의 행위로 말하지 않고 누구 아래 있느냐로 말합니다.

마치 적군과 아군은 사람의 됨됨이로 구별하지 않고 소속으로 구별하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너희 소속이 어디야!

아담이야!

예수야! 를 묻고 있는 거예요.

 

너희 영역이 어디야!

빛이냐!

어둠이야! 를 묻고 있는 겁니다.

 

죄인이다!

의인이다! 라는 것은 누구의 소속이냐 로 구분해요.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세상은 악하냐 착하냐로 죄다 아니다 판단을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로 판단해요.

 

마치 천국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느냐!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느냐! 예요.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열차가 목적지로 가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아요.

열차를 끌고 가는 기관차는 객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경 쓰지 않아요.

 

조용히 책을 보고 가든지!

고스톱을 치든지!

잠을 자든지!

성경을 보고 기도하든지!

때론 술 먹고 난리 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기차는 정한 목적지로 갑니다.

 

기관차는 객차 안에서 벌어지는 것엔 신경 쓰지 않아요.

만약에 객차 안에서 술 쳐 먹고 소란을 피우면 차장이 격리를 시켜서 짐칸에 가두겠지요.

그래도 그 짐칸도 가는 방향은 동일해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지 못 살든지와 상관없이 약속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좋다거나 행실이 반듯하다거나 라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아까 말했지요.

기차 안에서 소란을 피우면 잠시 감금시킨다고!

 

성도가 제 멋대로 살면 하나님이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라고 해서 조금 손을 볼 겁니다.

지금까지 괜찮다고요.

그래요.

그럼 아마 조만간에 검문 하실 겁니다.

이걸 징계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히 12:6-13=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마다 징계를 하신다고 하지요.

여러분은 자식들을 언제 징계하나요.

말 안 들으면 하지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어요?

못 살겠어요?

못 살겠지요.

그럼 우리는 당연히 징계를 받게 되어 있지요.

맞아요.

우린 비록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몸뚱이는 아담의 몸뚱이기 때문에 죄를 이기지 못해요.

그러니 자연히 징계를 받게 되어 있는 겁니다.

 

징계가 없으면 그 사람은 사생아라고 하지요.

그러니 성도는 반드시 징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징계하는 이유는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징계합니다.

갈라디아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면 틀렸다고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예수님의 몸으로 살지 않고 자기 몸으로 살면 징계당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음행하는 자가 있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은 쳐서 죽이고 영혼은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을 하셨다고 하잖아요.

이건 마치 시범케이스에요.

 

성도는 음행을 한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은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졌어요.

그러니 행함이 나쁘다고 구원을 취소시키는 일은 없어요.

 

그러면 꼭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야! 그러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그래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은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으로 다룰 겁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징계한다고!

어떻게 징계합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이니까요.



난 내 맘대로 살아도 아무런 징계가 없는데,,

그건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식이 말을 안듣데도 가만이 둡니까?

안그러지요.

혼을 내지요.



남의 새끼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만 두잖아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지어도 난 괜찮은데 라는 말이 자랑스러운 말이 아닌 겁니다.

징계가 복이고, 징계 없음이 저주인 것입니다.

잘 새겨 들으세요.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죄는 우리 몸을 우리 것으로 살라고 미혹을 해요.

그러면 성령은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필연적으로 징계를 당할 수 밖에 없어요.

그 징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니까 장형화 하진 마세요.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그건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성령이 그 때 그때 간섭하실 겁니다.

징계 당하면 조금 아플 겁니다.

 

사기 당할 수도 있고,

강도를 만나서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잘 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고,

큰 기대를 걸고 키웠던 자식이 자살을 할 수도 있고,

당신이 암에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주 귀찮고, 복잡하고, 골치 아프고, 힘든 일들이 생길수가 있을 겁니다.

창피하기도 할 것이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몸이 고생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조금!

아주 조금 혼 좀 날 겁니다.

말이 조금이지 이게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하다가 강도를 만나거든 하나님이 보낸 천사인줄 아세요.

사기꾼을 만나거든 하나님이 보낸 사자임을 아세요.

불치병에 걸리거든 하나님이 충을 보냈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일들을 만나고 나면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당한다고 해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사세요.

좀 힘이 들 뿐입니다.

언중유골이니 잘 새겨서 들으세요.

 

다시 진도 나갑시다.

하나님은 조상으로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조상이 누구냐! 로 판단한다고 했지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은 죄가 왕 노릇하고, 예수 안은 의가 왕 노릇해요.

그러니 아담 안은 부처님도 죄인이고, 예수 안은 강도 살인자도 의인이에요.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선함과 악함으로 판단치 않고 누구 아래 있느냐로 판단을 하십니다.

사람이 착하냐! 안 착하냐! 는 죄인이다! 의인이다! 의 기준이 되지 못해요.

세상적으로 보면 부처를 믿는 착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고, 예수를 믿어도 악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물론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악한 사람은 있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사람의 행실로 죄인이다 의인이다 판단하지 마세요. 



선악의 법 아래서는 선하냐! 악하냐! 로 판단을 합니다.

선악의 법이란? 율법이에요.

율법은 인간의 행실로 판단해요.

이걸 육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판단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예수 안에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인간의 행실을 보지 않아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보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피를 믿는 자는 결토 정죄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 약속이 믿어지도록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은 약속을 믿음으로 살겍 하세요.

너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잖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약속을 내어 놓아요.

자기 행함을 내어 놓으면 그 사람은 약속을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야곱이 에서보다 잘난 점이 없어요.

그런데도 야곱에겐 하나님 약속이 담겨져 있고 에서에겐 하나님 약속이 없어요. 

육적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잘나고 멋있어요.

인간이라면 에서를 원하지 야곱을 원하지 않아요.

 

솔직히 우리의 자식들이 잘난 자식이기를 바라지 못난 자식을 바라지 않잖아요.

전부 잘난 자식을 만들고자 그 많은 돈 들여가면서 과외 시키고 공부하게 하잖아요.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성공시키려고 주일에도 교회에 보내지 않고 학원에 보내잖아요.

 

전에는 고 3 때만 빠졌지만!

이제는 중학생만 되면 교회를 방학해요.

공부 안하고 학원 안 간다고는 잔소리를 해 대지만, 교회 안 간다고 싸우진 않잖아요.

그렇게 자란 자식이 세상 가치로 부모를 판단 할 때가 옵니다.

그러니 세상 가치로 키우려하지 말고 신앙으로 키우세요.

 

옛 말에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하고 모자란 자식이 효도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기대하고 잘나게 키운 그 자식에게 배신을 당할 때가 올 겁니다.

제 말을 흘러 듣지 마세요.

 

잘난 자식일수록 자아가 발달 되어 있어요.

똑똑하다는 것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겁니다.

좋은 말로는 주관이 뚜렷하다고 하고 나쁜 말로는 고집이 세다고 해요.

여러분들이 그토록 성공하라고 하나님도 잊고 키운 그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할 날이 올 겁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 새끼 다 소용없다고 하시던 그 소리를 할 때가 여러분 입에서 조만간에 틴식으로 터저 나올 겁니다.

우리 조상들이 바보라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 격어보고 한 말이에요.

그런데 그 누구도 우리 조상들이 한 그 말을 귀 기우리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여 악순환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제가 말한다고 들을 여러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저는 다만 하나님의 애가(哀歌)가 이렇다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발강가에 서서 과거를 추억하며 슬피 울던 그 시절들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란 것만 알려 드립니다.

지금 푸른 초장입니까?

곧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다를 것입니다.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입니까?

곧 푸른 초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푸른 초징이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든 하나님의 자녀 라는 것은 취소되는 일은 없으니까 염려는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셨어요.

죄인이 어떤 자들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시사적 역사에요.

아무리 하나님이 간섭해줘도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이 안 되더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순종이 안 되는 이유가 죄라는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인간이 얼마나 악질인가에 대한 답안지와 같아요.

인간이 단지 나쁘다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 빠져있어요.

마치 차동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나오고자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드는 것과 같아요.

견인차가 와서 빼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나올 수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죄인에게 아무리 은혜를 주어도 결국은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고 말해 주고 있어요.



죄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권세라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죄라는 늪 속에서 건져 내 주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성을 다 폭로해 주셨어요.

결국 구약을 통해서 죄인에게 메시야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희망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어요.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죄인에겐 왜? 구원자가 필요한지를 알게 해 주는 역사인 것입니다.

구원자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하고자 하는 것이 구약의 답안지에요.

 

누군가가 죄에서 건져 주지 않으면 안 되어요.

죄에서 건져 준다는 것은 곧 혈통을 바꿔 준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아담의 혈통을 바꿔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죄인이란? 아담의 혈통 아래서 태어난 자를 말하고,

의인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자들을 말해요.

태어난다는 것은 내 주권을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부모의 의지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죄인과 의인이 결정되지 않아요.

 

구원이란? 철저히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건져주면 구원이고 안 건져주면 저주에요.

건짐 받은 자는 대박 맞은 것이고 건짐 받지 못한 자는 그냥 그 자리에요.



구원이란? 구원케 하시는 분의 일방적인 은혜로운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구원이 공짜라는 말이에요.

공짜 속에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주신 분을 자랑하여야 하는 겁니다.

구원 속엔 하나님 자랑만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 자랑하라고 선물을 주셨어요.

내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원했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원하신 것이에요.

인간이 바라던 선물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달라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속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들어가 있어요.

 

인간은 인간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을 주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 속에는 세상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안 되어요.

죄인이 원하는 선물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영원한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생이 전부인줄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은 자연히 이생에 필요한 것을 바랍니다.

비록 몸이 병들고 아프더라도 잘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 몸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보아야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고 죄인을 죽이는 쪽으로 다가 오십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내 몸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아프고 병들고 죽을 몸을 죽지 않을 몸으로 바꿔주시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고자 하는 자에게 죽이고자 하시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살고자 하는 나의 영원성인데 하나님은 끝내겠다고 하시니 야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기절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내 소원이 폭격을 맞는 것입니다.

우린 늘 바벨탑을 쌓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하얀 거탑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십자가는 내 소원이 깡그리 부서지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곳입니다.

 

십자가란?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은 자리인 것을 알고 기절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자는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안되니까 놀라는 겁니다.



죄인이란? 하나님을 늘 이용하고자 해요.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삶에 보탬이 안 된다면 쓰레기처럼 버려요.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런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예수님의 힘으로 죄라는 권세로부터 벗어나와 자유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피로서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를 않아요.  

그러므로 자기를 갈고 닦아서 좋은 사람 되기 위해 애쓰려고 하지 마세요.

즉 예수 믿고 조금 변한 것을 가지고 자랑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들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 해 봅시다.

 

신앙생활이란?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소속이 바뀐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예전에 우리의 살던 방식이 바뀌지 않아요.

인간의 본성은 구원 전이나, 구원 후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육신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이 천사가 되지 않아요.

우리 자신들을 보세요.

여러분이 천사인가요.

아니지요.

 

인간은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요.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소속이 바뀐 것뿐입니다.

과거에는 마귀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겁니다.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믿고 사는 겁니다.

은혜 아래 있는 것을 꼭 종교생활 열심히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구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고 있느냐!

내가 누구의 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늘 확인하세요.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은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율법이 성도의 삶을 가지고 정죄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율법에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 천국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왜냐하면! 아들이 자유케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에게 소속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소속 된 자는 필히 예수님과 동일하게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경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사는 자가 아니요!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자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의 세상에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잘 사느냐 못사느냐 에 목숨을 걸고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어진 환경 아래서 받은 은혜로 불편하면 불편한데로 살아가고 편안하면 편안한 데로 살아갑니다.

구원받았으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유를 누가 주셨나요?

아들입니다.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자가 되어요.

 

그럼 아들이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까?

자신의 죽음으로 자유를 주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얻는 자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수 안에서 자유케 된 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살게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 때문에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세요. 

우리는 우리의 뜻을 위해서 구원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어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찬미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무엇을 찬송합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찬미 합니다.

한마디로 나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 라는 것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다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는 이유는 아들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는 자식 자랑해 주면 제일 기분이 좋아요.

하나님은 아들을 자랑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세요.

반대로 우리를 자랑하면 제일 싫어해요.

 

신앙생활은 내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자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아니에요.

성도는 철저히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해요.

 

성도가 자기 마음대로 살수가 없는 것은 자기가 자유를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쟁취하였다면 우리 마음대로 살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얻은 자유는 예수님이 주신 자유이거든요.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 안에선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유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창조를 했어요.

긍휼의 그릇은 예수님의 종으로 쓰임 받고, 진노의 그릇은 마귀의 종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종인 겁니다.

마귀의 종이든, 예수님의 종이든 종의 신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성도에게 있어 자유란? 마귀의 종에서 예수님의 종으로 넘어 온 것을 말해요.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니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께 소속이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소속된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구원을 우리가 받았어요.

복음이 믿어지면 어디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걱정이 안 되어요.

 

그러니 환경 탓하지 말고 감사하며 사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그 어떤 환경도 감사가 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에서 놓치는 순간 환경만 보이니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어요.

 

마귀는 환경을 보게 하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게 합니다.

환경이 크게 보이면 근심걱정이 앞서게 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면 환경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니 어떤 환경에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구원의 기쁨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아들만 자랑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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