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로마서 강해

43강. 절망 속에서 주어진 감사와 소망 (롬 7:19-25)

by coroa 2021. 5. 8.

 

[43강. 절망 속에서 주어진 감사와 소망 (롬 7:19-25)]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바울의 절망 섞인 탄식이 나옵니다.

바울은 왜? 탄식을 할까요?

그리고 바울의 탄식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하고는 무관한 것일까요?

 

바울은 지금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럼 바울의 이 탄식이 우리의 탄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하고 있나요?

 

바울이 절망을 하였다고 한다면 우리 또한 절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절망케 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탄식이 나의 탄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여야 하는 것은 바울의 탄식이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이어지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절망케 하신 것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소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망적인 탄식 속에서도 소망을 보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진리를 역설적(逆說的)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역설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절망 속에서 소망을 보아야 하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보아야 합니다.

 

예전에 청송 감호소에서 근무하시던 어떤 교도관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도소에 수감이 된 죄수들 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자기는 억울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다는 거예요.

나는 이래서 억울하고,

나는 저래서 억울하다는 식으로 다 변명을 한다는 겁니다.

마치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는 식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남에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설령 죄를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건 죄를 인정하고자 함이 아니고 남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은 죄가 없고 억울하다는 겁니다.

 

우린 이러한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고자 해요.

그들과 나를 따로 세우고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들을 통해서 나의 자화상을 볼 줄 알아야 해요.

성도라고 한다면 말이에요.

 

우린 그들을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드러냈고 우리는 죄를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행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우리 안에도 그들과 동일한 죄가 들어가 있어요.

이게 언제 튀어 나올지 몰라요.

흔한 말로 우리도 잠재적으로 죄를 짓고 교도소에 수감이 될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자식 키우는 부모는 남에 자식의 허물을 나무랄 수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남에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마치 내 자식은 그들과 다른 자식인줄 알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탄핵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장담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내 자식도 남에 자식 못지 않게 그러한 일들을 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거기서 거기에요.

그러니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그 손가락이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돌아와요.

 

우리 안에 죄가 그래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 나올지 몰라요.

지금 그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자만하고 자고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마치 나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행세 한단 말입니다.

 

이는 모두가 세상이 판단하는 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나타난 결과로 판단을 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속으로 죽이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실제로 죽이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아요.

속에 아무리 미움이나 악함이나 더러움들이 가득 차 있어도 드러나지 않으면 착한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의인이 되어서 겉으로 드러내 악행을 한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는 겁니다.

어쩜 저럴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자신과 그들을 다름으로 분류하여 자기는 의인이라고 하고 그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기준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펴면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고 합니다.

죄를 지은 놈이나 안 지은 놈이나 똑 같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절간에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동일하다고 합니다.

모두가 죄 아래서 출생을 한 죄인이라고 해요.

물론 우리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동의하건 하지 않건 모든 인간은 한 통속으로 보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한 아담 안에서 보아요.

아담이 죄인입니다.

그럼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다 죄인인 겁니다.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를 따지지 않고 넌 누구 후손이냐 로 따져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죄인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의 조건으로 판단을 해요.

그래서 드러나게 죄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을 하십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 한해서입니다.

 

지옥에 가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지요.

그리고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감사한다고 하잖아요.

왜? 지옥에서는 이를 갈고! 천국에서는 감사 할까요?

 

이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겁니다.

난 죄인이 아닌데!

왜? 날 지옥에 보냈느냐고 분해서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간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죄인이 천국에 왔을까 생각하고 감사하게 되어요.

이런 악당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왔다는 것은 놀랄 일이란 겁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감사합니다! 라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겠지요.

그래야 세세토록 감사하고 찬양할 것이 아닙니까.

 

알다시피 모든 인간들은 동등하게 죄 아래서 출생을 했어요.

그런데 마귀가 죄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동일한 죄인 속에서도 마귀의 자녀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섞여 있어요.

이건 마치 애굽이라는 나라 속에 이스라엘과 애굽인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는 마땅히 저주 받아 지옥에 가야 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왔다고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보냅니다.

왜? 보냈는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백성들을 죄인 만들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하시고자 오셨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인인줄을 몰라요.

자기가 죄인인줄을 모르니까 예수를 믿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 죄를 고발하는 일을 벌이십니다.

 

너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을 하세요.

죄인이 죄인 아닌 척 하고 살고 있으니까!

아니야!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고발을 하세요.

 

예수를 보내서 말이에요.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삼직을 가지고 계세요.

그 중에 선지자 직이 죄를 고발하는 직이에요.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그들의 손에 죽임 당하는 사역을 맡은 자들이에요.

이 일은 장차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로부터 당하실 일들이에요.

이렇게 되면 자기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역을 선취적으로 미리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선지자 직을 하다가 자기백성들 손에 죽임을 당하셨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말았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을 죄인 만드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죄인을 만든다는 말은 없는 죄를 만든다는 말이 아니고 있는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본질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 인줄을 모르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그게 바로 죄라고 알려 주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인간의 실존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나요?

예수님이 자꾸만 자기들을 죄인이라고 하니까 죽인 거에요.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데 자꾸만 죄인이라고 하니까 화딱지가 나서 확 죽여 버린 거에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것 봐라!

너희들이 죄인 맞잖아!

성령이 오고 나서 보니까 이 말이 맞는 겁니다.

그래서 어찌할꼬!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에요.

 

지금도 예수님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예수님 앞에 서면 모두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빛 앞에서 어둠이 드러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빛으로 어둠에 오셨어요.

빛은 어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요.

빛이 오심으로서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지요.

왜? 그냥 빛이라고 하지 않고 참 빛이라고 할까요.

참이란? 진짜란 말입니다.

거짓의 반대에요.

 

그렇다고 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빛은 빛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짓 빛이란 뜻입니다.

이는 빛이 아니라 실상은 어둠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하지요.

이는 너희 생명은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는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라고 하지요.

진리란? 참이란 말입니다.

이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은 비진리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진리 관은 죄가 주는 진리관이에요.

그러니 진리가 아닌 겁니다.

비진리에요.

 

예수님을 길이라고 하지요.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아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길인고 하니 율법 지킴이라는 길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 나아 갈 수가 있다고 믿었어요.

즉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을 바로 자기 자신 뿐이라고 합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자만이 하늘로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하지요.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이고 너희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이는 곧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참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인간들의 모든 것들이 가짜로 폭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모두가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가짜에요.

 

하나님도 가짜이고!

천국도 가짜이고!

복(福)도 가짜에요.

인간도 가짜에요.

 

가짜를 가지고 진짜 행세를 한단 말입니다.

가짜를 진짜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알려 주는가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역설(逆說)로서 알려 주세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소경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아니야!

우린 보고 있어!

그러므로 소경이 아니야!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 너희가 본다고 하는 그것이 너희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차라리 못 본다고 하면 소경이 아닐 텐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면서 안다고 하니 그저 소경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유대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말씀이에요.

생뚱맞은 이야기 같지요.

하지만 맞아요.

하나님은 역설을 가지고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역설로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이게 무진장 중요한 말이에요.

이 비밀을 모르면 성경을 곡해하게 되어요.

유대인들이 이 역설을 모르고 성경을 해석하다가 망했어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십계명(율법)을 보면 하라! 하지 말라! 로 되어 있지요.

이게 역설이에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하기 때문이에요.

즉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은 우상 숭배 하는 자라는 말이고!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죄 짓는 놈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금지법들은 모두가 우리가 그 금지를 어기고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인 거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지 말라는 소리로서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각성 시켜주는 겁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어요.

야! 이거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인데!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너 하나님 말씀을 지켜! 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는데 무엇 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까.

잘 지키는 자에게는 지키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아이가 평상시에 공부 잘하고 TV를 보지 않는 다고 한다면 구태여 그 아이에게 TV 보지 말고 공부해 라고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TV 보지 말고 공부해! 라는 말은 평상시에 공부는 하지 않고 TV만 보기 때문에 TV 보지 말고 공부해 라는 명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 말씀은 명령이에요.

명령은 법이에요.

 

법은 죄인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에요.

의인에겐 법이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법을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동일해요.

하나님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넌 죄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말을 안 듣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령이 주어졌다는 말은 넌 말을 안 듣는 인간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져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을 신앙 있음으로 나아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예수 믿음으로 나와야지!

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건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안 지킨 것이 되어서 저주를 받아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몰라요.

성화주의자들은 말씀대로 산 것을 신앙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 지킨 것을 신앙으로 붙잡아선 안 된다는 말이에요.

신앙은 예수 믿는 것이에요.

이걸 잘 이해 하셔야 해요.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역설로 이야기 할까요?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실상(實像)이 아니고 허상(虛像)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허상을 실상으로 둔갑시켜 놓았어요.

죄인들은 허상을 실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상의 세상에서 허상을 허상으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실상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허상 입장에서는 실상은 역설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역설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왜? 역설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살펴봅시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요.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실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요.

보이는 이 세상 속에는 실상이 없어요.

그런데 보이는 이 세상에서 실상은 허상으로 보이고 허상이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역사(歷史)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그러니 역사는 묵시로부터 나왔어요.

이렇게 되면 묵시가 진짜이고 역사는 가짜에요.

 

묵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영이라고 해요.

창조 세계에요.

이건 보이지 않는 세계에요.

 

반면에 역사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해요.

피조 세계에요.

육이라고 해요.

피조 세계는 보이는 세계에요.

 

그러니까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는 보이지 않아요.

피조물은 창조주를 볼 수가 없어요.

즉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가 없어요.

이는 존재하는 원리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를 알 수가 없을 뿐더러 창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피조 세계 바깥에서 피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은 지은 자를 알 수가 없어요.

지으신 분이 알려 줄 때만 알 수가 있어요.

즉 “하나님이 나는 이런 분이다!” 라고 알려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걸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이고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을 온전하게 계시해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거짓이고 가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해요.

물론 다른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을 알려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어떻게 오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거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걸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아들을 피조물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보냈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제 피조 세계는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에 속한 것들을 알 수가 있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피조 세계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창조주를 알려 주시려고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예수님은 창조에 속한 분이면서 피조물에 몸을 입었어요.

예수님이 피조의 몸을 입은 것은 피조물에게 창조주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에요.

쉬운 말로 창조주가 피조물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걸 중보자라고 해요.

 

중보자란? 하나님과 인간 중간에 서서 서로 연결을 시켜주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면서 100% 인간이에요.

인간에게 다가 올 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가오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는 인간을 대변하는 입장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어요.

또한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창조에 속한 영적인 일들을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서 하시는 창조에 속한 일들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알려 주는가 하면 기존에 자기 백성(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는 형식으로 알려 주세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 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고발자로 서 있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형식으로 접근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 그것이 바로 너희가 소경이란 증거야!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이고!

너희가 본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못 보고 있다는 증거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기가 찬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하여서 죽인 거에요.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이에요.

당연하지요.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모세가 알려준 하나님을 믿고 있어요.

모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온 사람이잖아요.

유대인에겐 모세는 하나님과 방불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어요.

모세가 하나님 얼굴을 좀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 보여 주셨어요.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보지 못했어요.

뒷모습만 보았어요.

 

뒷모습만 보았다는 말은 그림자만 보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증거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모세의 증거가 뭔가요?

바로 율법이에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해요.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등만 보았다는 것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날 터인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려 주실 분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모세가 증거한 그 선지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알려 준다고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안 믿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세가 지목한 그 선지자는 바로 예수님이 맞아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가 있어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조금 어려우니 생각을 하면서 잘 들으세요.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에요.

모세가 율법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율법은 모세로부터 주어졌다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역사를 보세요.

애굽이 세상이라고 한다면 가나안은 천국이에요.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장차 성도가 죄악된 세상에서 건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이에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지요.

그리곤 시내산에서 율법을 줍니다.

출애굽하지 말자 제일 먼저 받은 것이 율법이에요.

이 율법으로 가나안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이 천국 입구까지 인도한 셈이지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모세는 지금 예수님 앞까지 인도해 주고 죽은 거에요.

이게 세례 요한으로 나타나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지요.

저 분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알려 주잖아요.

세례요한은 율법을 상징해요.

그러니 율법이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고 백성들을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하고 자기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고 죽어 버려요.

모세 자신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요.

가나안은 모세가 지목한 선지자인 여호수아가 데리고 들어가요.

 

그러니 일차적으로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고 한 선지자는 그 당시에는 여호수아에요.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그림을 신약의 예수님 시대로 옮겨 보세요.

 

요한복음 3장을 봅시다.

 

요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유대인의 관원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란 말은 율법에 선생이란 말이에요.

즉 니고데모는 율법을 대표하여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그렇게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하는 말이 우리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압니다.

당신이 행하는 그 표적들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러한 표적들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생뚱맞게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니고데모야 네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니고데모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거듭 날 수가 있습니까?

그 방법을 좀 알려 주세요!

쉬운 말로 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 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그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두 가지 거듭남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거듭남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듭남이에요.

이건 거듭남이 둘이란 말이 아니에요. 

잘 이해하세요.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함께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 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였지요.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천국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지금 그것을 본 거에요.

 

이걸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봅시다.

 

로마서 1장입니다.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하지요.

이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복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이는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고 하지요.

그리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두 믿음이 나오지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믿음이 믿음으로 이끈단 말입니다.

앞에서 예수 앞으로 끌어주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어요.

 

그러니 앞에서 이끄는 믿음이 예수라는 복음 속에 있는 의를 믿게 하세요.

앞에 나오는 믿음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알아보게 하는 믿음이에요.

복음이 예수라고 했으니 믿음이 예수를 알아보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믿음은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믿음이에요.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해요.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을 하려고 예수님을 보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믿어야 하잖아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이것을 알아보고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이것을 베드로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으려고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어요.

거기에 베드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날 따라오라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뭔가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요.

어떻게 생면부지 처음 보는 사람을 메시야인줄 알고 가족과 직업을 포기하고 따라갑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랄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에요.

베드로는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하나님께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를 알아보고 주여 내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에서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니 성도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걸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가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날 알아 볼 수가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거듭 납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달라요.

 

이걸 구약의 모세와 여호수아로 이해해 보세요.

모세는 가나안 땅을 보기만 하였고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러나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요.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해요.

그러니 모세는 천국을 보게 하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에요.

 

이를 다시 신약 식으로 말해 봅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천국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세례요한이 천국을 알려 주지요.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라고 했어요.

그러니 지금 세례요한이 율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가나안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천국이고 천국이 예수님이에요.

그럼 누가 예수님을 보게 하나요.

누가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가요?

율법이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지요.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구약 식으로 말하면 가나안이에요.

그럼 가나안을 보게 하는 모세의 역할을 누가 하나요.

율법이지요.

 

율법은 예수를 만나게만 해 줄 수가 있어요.

모세처럼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해 주어요.

이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알려 주는 것과 같아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인도자는 따로 있어요.

여호수아에요.

그럼 신약에서 천국이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이에요.

 

두 예수를 아셔야 해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와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야 해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율법 아래서 나시고 율법 역할을 하여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 하세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부활을 하여서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서 천국으로 인도 하세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천국을 우리 안으로 몰고 오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데에는 두 인도자가 있어요.

마치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말이에요.

이런 인도자를 일컬어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무엇을 돕는가 하면 출애굽을 시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도우세요.

그러니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도 보혜사이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도 보혜사인 겁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세처럼 출애굽 시키는 보혜사이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여호수아처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보혜사인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보혜사는 예수이고!

성령으로 오신 보혜사는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구약 식으로 말하면 이 분이 바로 모세이고 여호수아란 말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세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출애굽을 시키셨고!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여호수아처럼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 하세요.

 

모세는 육신으로 예수의 역할을 하였고,

여호수아는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육신으로 오셔서 죽임 당한 예수를 표상하고,

여호수아는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아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지요.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말하고!

성령은 성령 세례를 말해요.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두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물 세례는 율법으로 옛 사람이 죽임 당하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로 새 새람으로 살아나는 것이에요.

 

그럼 성도에게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누가 행합니까?

예수님이 행하세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처럼 우리 죄를 고발하고 우리를 죽이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는 일을 하세요.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율법이에요.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죽음에 가두어 버리는 일을 해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선지자가 되어서 이 율법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율법처럼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하여서 죽이는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거듭남에 있어서 옛 사람이 죽는 것이 있고 새 사람으로 살아남이 있어요.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가 있단 말입니다.

새 사람으로 살리려면 먼저 옛 사람을 죽여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이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어야지요.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이러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시(啓示)를 해 주셔야 볼 수가 있는 분인데!

하나님이 아직 계시(啓示)도 해 주시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본다고 하느냐 입니다.

그건 가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계시가 되어요.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가 없었어요.

모세처럼 하나님 그림자만 보아요.

 

유대인들은 기껏해야 모세를 통해서 알아진 하나님뿐이에요.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어요.

하나님 등만 보았어요.

모세는 마치 수건으로 가려진 하나님을 본겁니다.

 

쉬운 말로 모세는 커튼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왔어요.

커튼 뒤에 계신 하나님의 그림자만 보고 온 거에요.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에게는 아직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모세의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는 겁니다.

모세는 다만 장차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 오실 것이라는 것만 알려 주었어요.

 

이걸 바울은 율법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어요.

율법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알게만 해요.

모세처럼 하나님 그림자만 보게 하는 거에요.

 

이제 그 모세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오셨어요.

모세가 말씀 하신 그 분이에요.

예수님이 모세를 상징하는 율법 앞에 선 겁니다.

그리고는 율법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뭐냐?

날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율법이 말하는 그 실체라고 합니다.

내가 이제부터 온전한 하나님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우리도 하나님을 알어!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 내가 하나님을 알려 주고자 왔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느냐!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안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아직 알려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다고 하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틀렸다는 증거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소경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 우린 하나님을 모릅니다! 라고 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다고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상을 말해주고 있어요.

 

내가 바로 빛이고!

내가 바로 길이고!

내가 바로 진리이고!

내가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으며!

하늘로서 내려온 자 외에는 하늘로 갈 자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안다고 하고!

아버지께 갈 수가 있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알아먹을 턱이 없지요.

예수님은 일부러 계속 소경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뿔따구가 나서 넌 뭐냐 하면서 죽여 버렸어요.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진짜가 가짜에게 축출을 당하고 만 것이에요.

이를 두고 건축자들에게 버린 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세상이에요.

세상에서 진리는 비 진리로 대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이 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수용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다 이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셨어요.

 

구원이 뭔가요?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지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자기 백성들이 죄를 모르고 있어요.

죄가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로운 것을 알려 주세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을 한다고 하지요.

지금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일을 장차 성령이 오시면 확연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눈을 뜬 유대인과 소경을 가지고서 본다고 하는 자를 소경을 만들고 못 본다고 하는 자들에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본다고 하는 자들에겐 예수를 숨기고 소경에겐 예수님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아요.

그러나 예수를 보고 안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을 몰라요.

그러니 본다고 하는 자들은 그져 소경이고 못 보는 소경은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죄가 뭐냐?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죄에요.

참 재미있지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의 어떤 행동을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에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한다고 하신 겁니다.

 

시편 2편을 봅시다.

 

시 2:1-1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보낸 자를 죽이고자 하느냐!

그가 너희의 왕인 줄을 어찌 모르느냐!

내가 세상에 영을 전한다!

잘 들어라!

내가 내 아들을 세상에 보냈으니 너희들은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어라!

 

즉 그의 말을 들으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다 살지만 그의 말을 안 듣는 자는 내가 진노를 쏟아 붓겠다고 합니다.

 

이건 폭력이에요.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일방적인 폭거에요.

어떻게 자기 아들에 말을 안 듣는다고 죽일 수가 있느냐 입니다.

 

그런데 어찌 합니까?하나님이 이렇게 선전포고 하셨어요.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폭력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거 할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 해요.

자기 꿈을 펼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이게 창조의 목적을 보면 얼마나 악인지를 알게 되어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우린 우리를 위하여 창조가 되지 않았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였는데!

왜? 창조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했어요.

 

그러니 예수를 안 믿으면 진노를 쏟아 붓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이 분명해요.

우리를 위한 삶이 없어요.

예수를 위한 삶만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살이가 우리의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차압당하는 식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걸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원론적인 것으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 인생들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원리로 살아가게 되어 있지요.

 

인간은 태어나면 늙게 되고, 늙으면 병이 들고, 병이 들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든 인간은 이러한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프로세스(순서)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창조가 뭔가요?

예수님을 위하여서이지요.

용도가 분명히 있지요.

그럼 그 용도가 다하면 폐기 되어요.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태초에 주께서 천지를 창조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멸망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남고 다 철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애초부터 멸망하기로 작정이 된 것이에요.

그래서 창조는 곧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태어남은 곧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이 가는 길인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잘 음미해 보세요.

 

소망에서 절망으로 나아가는 순서이지요.

태어남은 기쁜 일이지만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소망에서 절망으로 나아가는 수순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그래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인생은 풀이고 들에 꽃과 같다고 하였고!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라고 하였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소망보다 절망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사 역시 인생이 아무리 화려한들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절망으로 가는 인생을 허락하였을까요?

이는 인간의 창조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일생 속에도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히브리서 1장에서 만물은 멸망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만물은 옷과 같이 낡아질 것이라고 했어요.

오직 주(主)만 영존하신다고 했어요.

 

결국 주(主)만 남고 만물은 다 철거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 멸망할 것을 만들었느냐고 말입니다.

 

멸망시킬 것이라고 한다면 애당초 만들지나 말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나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주께서 창세전 언약을 말해주려고 만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세전 언약이 다 이루어지면 만물을 철거하십니다.

용도가 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일컬어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즉 창조가 있으면 멸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작은 곧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역사는 쭈욱 늘어진 시간처럼 시작과 끝이 있어요.

우린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 라고 합니다.

이는 곧 죽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이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해요.

 

인간들의 인식론으로 본다면 죽음은 곧 절망인 것입니다.

오래 살았다는 말은 그만큼 절망의 순간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절망이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의 일생은 절망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인식론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봅시다.

 

그럼 우리의 신앙도 절망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럼 묻습니다.

신앙에 절망이 어떤 건가요?

 

자기 가능성이 포기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야! 나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자기 의 없음을 알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자기 가능성을 차압당하고 불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많이 감사하게 되어 있어요.

나의 약함 속에서 주님의 강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일을 해 가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죄인 됨을 더 많이 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은 자기 절망의 선언입니다.

 

“난 희망이 없습니다” 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절망을 아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그래서 설교의 제목도 “절망 속에서 주어진 감사와 소망” 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망이면 절망이지 어떻게 절망 속에서 감사가 생기고 소망이 있느냐! 라고 반문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절망과 소망은 반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이것은 반대가 아니고 하나 라고 해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살아남은 하나에요.

마치 씨가 죽은 것과 그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이 하나이듯이 말이에요.

 

죄를 고발하는 것은 용서하시기 위함이에요.

그러니 자기 주제를 알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 뒤에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을 지옥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천국이에요.

절망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소망은 영생이에요.

그런데 이게 하나에요.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 때문에 탄식을 합니까?

돈이 없어서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실패해서 입니까?

아니에요.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기 꼬라지 때문이에요.

 

바울이 탄식하는 것은 하나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기 몸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자기 몸뚱이가 마음 먹은 대로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참 재미있는 것이 바울이 율법 아래 사울로 살았을 때는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였어요.

그땐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신 만만했어요.

그래서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탄핵을 하였어요.

 

그런데 은혜 아래 부르심을 입고 보니 정 반대 현상을 느꼈어요.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괴로운 겁니다.

바울의 생각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폼이 난다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야 하나님 백성이 아니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절망을 합니까?

 

자기 무능함을 깨달을 때잖아요.

언제 자기 무능함을 깨닫는가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깨닫게 되어요.

 

절망이란? 말은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자기로서는 도무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낼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포기 선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절망 속에 숨겨 놓은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깊어지고 풍성해져요.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고!

물이 깊으면 고기가 많다고 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절망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 진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더욱 더 강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귀함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절망 가운데로 몰아가세요.

죄인 됨을 고발 한단 말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얼굴도 못 쳐들고 주둥이를 닫게 하시려고 우리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이 저주스럽고 미워야 해요.

하나님이 싫어야 해요.

하나님과 내가 원수임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이 밉고 저주스럽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용서의 귀함을 몰라요.

우린 원망하고 불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은혜와 사랑을 알 수가 있어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절망 속에서 주어집니다.

 

신앙은 자기 주제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요.

 

신앙(信仰)이란 말은 믿고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믿고!

누굴 바라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누가 예수를 바라봅니까?

죄인이 바라보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어요.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지 않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하지 않아서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절망 시키는 일들을 벌리십니다.

즉 죄인 만드는 일을 하신단 말이에요.

죄인을 만든다는 말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원래 죄인인데 자기가 죄인인줄을 모르니까 하나님이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벌이세요.

 

이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사랑법이에요.

이 하나님의 사랑 법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다가 올 땐 아픔으로 다가와요.

실패로 다가와요.

믿음 없음으로 나타나요.

이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으로 몰아넣고 소망을 주세요.

 

올 봄에 야외 소풍을 가서 집사님들과 족구를 하게 되었어요.

얼마 하지 않아서 숨이 가뿐 겁니다.

족구를 하는데 몸이 마음 먹은 대로 말을 안 들어요.

예전에는 참 잘했거든요.

 

딸아이가 그럽니다.

아빠 왜? 그래!

전에는 잘 했잖아!

 

오래전 명절에 집안 식구들끼리 모여서 족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우리 딸아이가 제가 족구 하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해요.

아빠가 그렇게 족구를 잘하는지 몰랐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영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넋두리로 야! 예전 같지 않네! 라고 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야! 십년만 젊었으면 좋겠다!

몸이 말은 안 들어!

이젠 죽어야 할 때가 가까웠나 보네! 라고 합니다.

마음은 파릇파릇 봄이고 청춘인데, 몸은 늙어 고장나서 낙엽 되어 지는 가을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이러해요.

처음엔 산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 했는데 갈수록 믿음 없음이 들통이 나요.

처음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절감해요.

 

과거엔 주여 도와주소서!

그럼 제가 세계 복음화를 시키겠나이다!

아골 골짝 어디라도 간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세계복음화는 고사하고 내 믿음 하나 지키기 어렵습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 나를 박대 하시면 나 갈데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마치 젖은 낙엽처럼 주님께 착 달라붙어서 탄식하게 되어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음을 알게 되어요.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단 말입니다.

마음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만 몸은 그 짓을 하고 있어요.

갈수록 믿음 없음이 발각당해요.

 

본문을 보면 원하는바 선은 행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한다고 하지요.

원하는 바 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고!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거에요.

야! 미치겠네!

와!~ 돌아 버리겠네!

 

이건 마치 중풍병자가 마음속으로는 마음껏 운동을 하고 싶은 것과 같아요.

마음은 운동장을 뛰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럼 절망이 나오지요.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하고 성령은 불가능성으로 끌고 갑니다.

세상 신은 성공을 주고 하나님은 실패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확장을 원치 않아요.

그래서 죄인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인은 무엇을 하여도 자아 확장을 꿈꾸어요.

여기에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요.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댓가를 반드시 바라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우리의 행동이 자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본능에 속한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에 공을 들이면 포기를 못하게 되어요.

지난번에 안철수씨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자 어떤 청년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자살을 하겠다고 하였지요.

그건 그만큼 안철수에게 공을 들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이처럼 사람은 무엇이든지 기대하고 공을 들인 만큼 포기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남편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아내는 점점 위험스러운 아내가 되어요.

남편 또한 마찬가지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랑 할수록 상대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집착이 강할수록 상대를 감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지요.

제발 날 좀 가만 내 버려 달라고 하지요.

간섭 좀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럼 그럽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가만두느냐!

왜? 내 마음을 몰라!

그러잖아요.

 

간섭당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섭으로 느껴요.

사랑으로 느끼지 않아요.

그래서 도리어 가만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요.

하지만 간섭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간섭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이건 부부(夫婦)간에 똑 같아요.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자 해요.

왜? 간섭하느냐 하면 자기가 편하고자 그래요.

다 자기 사랑이에요.

 

사람은 사랑 할수록 상대를 감시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을 많이 할수록 감시망이 점점 더 좁혀지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들은 사랑하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지배하에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이것을 편집증이라고 합니다.

이게 부부 간에도 나타나고 부모 자식 간에도 나타나요.

그래서 지독한 자식 사랑은 자식을 망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편집증이란? 상대방을 자기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이 증상이 심하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되어요.

의처증(疑妻症)이나 의부증(疑夫症)은 상대방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은 왜곡된 이기주의 사랑이에요.

이기주의 사랑은 지독한 집착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지독한 사랑이 지독한 저주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이만큼 그 그림자도 길어져요.

사랑의 깊이만큼 미움이나 질투도 깊어요.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있어서 절대 사랑은 절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모든 인간은 지독한 이기주의에요.

그러므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 댓가를 바라게 되어 있어요.

내게서 나간 사랑을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요.

내가 이만큼 정성 드렸는데 어찌했든 넌 내 정성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사세요.

 

이게 우리 신앙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도 많아지게 되어 있어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장 미워하고 싫어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죽였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해요.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 귀에 맞고 자기 입에 맞도록 편집해서 들어요.

 

자기 식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죄가 주장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허구성을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란 것을 고발해요.

어떤 식으로 고발하는가 하면 우리의 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식으로 간섭을 하세요.

그리하여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생은 평생을 죄인으로 발각당하는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로 만들어요.

왜? 그런가요?

 

인간은 자기 가능성이 단 1%라도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는 자기 의를 포기 하지 못하는 자기 사랑이라는 본성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죄 앞에 절망하여야 구원자를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역설적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야!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감사하다고 하는 거에요.

이는 자신의 무능함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죄를 끄집어 낸 것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은 비록 죄의 법을 섬기고 있지만 이것이 나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므로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해요.

원망 할 수밖에 없는 광야 길로 인도 하여서 기어코 우리 안에 있는 원망을 끄집어서 불 뱀에 물리게 하시고는 놋 뱀으로 살려내시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복음을 알아도 그 복음조차도 자기 사욕으로 이용하는 자들이에요.

복음도 자기 면죄부로 삼는단 말입니다.

우린 복음 아는 것으로 몸에 사욕을 쫓아가고 있어요.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그 정신에 내가 함몰당하여야 하는데도 우리는 도리어 복음을 자기 유익을 취하는데 이용을 한단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죄성이에요.

 

예레미야 13장을 살펴보고 마칩시다.

 

렘 13:23?구스인(흑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흑인이 피부를 희게 할 수가 없고!

표범이 그 얼룩무늬를 없앨 수가 없듯이!

우리 죄인들도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린 살아가면서 이 사실을 배우게 되어요.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보게 되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으로 인하여 낙심 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맺은 그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세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이 말씀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여서 절망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아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쉼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