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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41강. 율법도 복음이다 (롬 7:7-14)

by coroa 2021. 4. 13.

 

♣ -.41강. 율법도 복음이다 (롬 7:7-14).-

-.정낙원 목사

 

사도 바울은 율법을 의인화 하여 남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와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말입니다.

어떻게 상대적인가 하면 정죄하는 것과 덮어주는 것의 상대적입니다.

 

정죄는 죽이는 것이고,

덮어줌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죄하는 율법이라는 남편은 우리를 죽이는 남편이지만,

덮어주는 예수라는 남편은 우리를 살리는 남편이 됩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나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서 지독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날마다 숨 죽이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말입니다.

잠시도 쉼을 얻지 못하고 일평생 종노릇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마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고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분을 삭일 수가 없습니다.

억울하기도 합니다.

생각만 하면 속은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심정적으로 따진다면 율법이라는 남편을 찢어죽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율법이라는 남편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색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너희가 잘못 생각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율법은 절대로 나쁜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없었으면 너희들이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갈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온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남편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예수라는 남편과 알콩달콩 사랑하며 재미있게 사는 것도 모두가 율법이라는 모진 옛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남편을 통해서 나의 추함과 더러움과 악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이런 죄인을 은혜로 감싸 안으시는 예수라는 남편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지독한 남편 아래서 시집살이를 해 보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남편이 너무도 자상하고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하려고 배고픔의 아픔을 겪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하려고 죽음에 가두어 둔 것과 같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하려고 종 노릇을 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안식은 고난 뒤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율법아래서 종 노릇하는 고난을 주신 겁니다.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지옥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환란 받는 자에게 안식으로 갚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남편을 욕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남편 때문에 예수라는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남편과 사는 사람은 절대로 율법이라는 남편을 죽일 놈 살릴 놈 그러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은 어째서 율법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남편이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볼까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럼 만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만물은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천지 만물 속에는 하늘에 것이나 땅에 것이 다 들어 있어요.

하늘에 것은 영(靈)에 속한 것이고, 땅에 것은 육(肉)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 속한 것이고, 천사나 마귀와 같은 것들은 영에 속한 것들입니다

 

여기서 영이란? 땅을 반대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천사나 마귀는 하늘에 속한 일을 땅에서 행하는데 있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이 세상에 구현을 하시는데 천사도 사용하고 마귀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잖아요.

이 일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에 가두어진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자신의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즉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해방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율법과 마귀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마귀조차도 만물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필요해서 창조한 겁니다. 

그럼 마귀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도 있어야 하고 마귀도 있어야 해요.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다 필요한 것들이에요.

 

지금 바울은 율법을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냐?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만물을 가지고 드라마를 찍습니다.

드라마 내용이 예수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나 마귀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와 같아요.

 

그래서 예수도 역사 속에 뛰어 들었고 마귀도 역사 속에 뛰어 들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 가두고 죽이면,

예수는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주인공의 그 상대역으로 마귀를 캐스팅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자로 캐스팅이 되었고,

마귀는 예수의 일을 방해하는 악당으로 캐스팅이 된 것입니다.

 

그럼 마귀는 악당 노릇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백성들을 법으로 죄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악당 노릇을 잘하면 잘 할수록 감독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잘했다고 해요.

악당은 악당다워야지 드라마가 살아요.

만약에 악당이 악당 짓을 못하고 착한 짓을 하면 재미가 없어요.

그럼 그 드라마는 흥행에 실패해요.

 

드라마는 반드시 선악의 구조로 전개가 되어져요.

그러므로 드라마 속에는 악한 자와 선한 자가 동시에 연기(演技)를 하게 되는 겁니다.

악한 자는 악한 역할을 해 주어야 해요.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세요.

그런데 그 영광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묵시에서 역사로 오셨어요.

하늘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셔야 하실 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 세우십니다.

어떻게 세우는가 하면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늘 위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주(主)라고 시인케 하십니다.

 

하늘 위에 있는 자란? 천국에 있는 자들을 말하고!

땅에 있는 자란?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을 말하고!

땅 아래 있는 자란? 지옥에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자들의 주(主)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지옥에 간 자들도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릅니다.

주(主)란? 왕이에요.

결국 모든 피조물 위에 예수그리스도가 왕으로 등극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가지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대하(大河)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에요.

 

여기에 예수에 속한 자도 있고, 예수의 반대편에 속한 자들도 있어요.

모두가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법이라는 동네도 만들어 놓고, 은혜라는 동네도 셋트로 만들어 놓았어요.

 

이처럼 예수가 만유의 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귀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마귀다운 짓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돋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도 시험하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욥기 1장을 봅시다.

 

욥 1:6-12=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상에서 회의를 합니다.

이 때 마귀도 참석을 합니다.

마귀가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동안 하였던 일을 보고합니다.

 

7절에 “다녀왔나이다” 라고 하지요.

 

이는 사명을 수행하고 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왔는가요?

욥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보고 온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욥을 사찰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욥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고합니다.

 

이는 마귀도 하나님이 부리는 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마귀가 대단 한 놈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종이에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단 말입니다.

 

마귀나 우리나 다 똑 같아요.

다만 마귀는 영에 속한 자이고, 우리는 육에 속한 것의 차이에요.

비록 마귀가 영에 속한 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몸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말입니다.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새도 기르시는 분이 하물며 너희를 지키지 않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움직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고 합니다.

 

지금 욥을 가지고 하나님과 마귀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세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욥에게 하실 일을 정해 주잖아요.

비록 욥의 재산을 거두어가고 자식이 죽고 마누라가 도망을 가고 욥에 몸이 병이 든다 할지라도 욥에 생명만큼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시잖아요.

마귀는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만큼만 해요.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다시금 세상에 내려가서 욥을 괴롭히는 일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욥의 신앙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욥의 사업을 망하게 하고 자식들을 죽이고 아내도 도망가게 만들고 급기야 욥의 몸에 병을 주어 괴롭히는 일을 합니다.

 

한마디로 욥의 가정을 풍비박산을 내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결제를 받은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마귀에게 욥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일들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삶이 평탄치가 않고 굴곡이 심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봅시다.

 

계 11:3-8=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하나님이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지요.

두 증인은 우리를 말해요.

성도가 두 증인들이에요.

 

두 증인들에게 무슨 권세를 줍니까?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는 권세를 주지요.

일천 이백 육십일이란?

70이레 중에 한 이레의 절반에 속한 것으로서 신약의 전체 기간을 상징해요.

 

어디서 예언하는가요?

성전에서 예언을 해요.

즉 율법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이 때는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터치 하지 못해요.

터치하는 놈은 죽어요.

하나님이 죽여 버려요.

 

그런데 그 증거를 마칠 때가 다 하면 어찌 되나요.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힘없이 죽임 당하지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같아요.

복음으로 말하면 복음이 비 진리로 가려지게 된다는 말이에요.

복음이 흥왕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람들로 외면당할 때가 있어요.

 

사도 바울을 보세요.

처음엔 복음이 얼마나 흥왕했습니까.

그런데 말년에는 그 누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자 하지 않았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귀를 열고 닫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사람들에게 잘 증거 되어 질 때가 있고 먹히지 않을 때가 있어요.

잘 증거 된다고 자고(自高)치 말고 안 된다고 기 죽지 마세요.

 

여기서 중요한 팁을 하나 제공하고 갑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고 전하는데 있어서 복음을 알고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고 그 복음에 대한 반응을 붙잡고자 하면 안 되어요.

 

반응을 살피면 실족해요.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나타나는 반응에 무심하여야지 이 무심이 사라지면 복음 전하고도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왜? 복음 아는 나를 몰라줄까?

섭섭함에 빠져요.

 

많은 분들이 복음 복음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에 목말라 하는 것은 복음 안에서 쉼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면서 나 좀 알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아주면 좋아하고 안 알아주면 삐져요.

 

복음 아는 것 자체로 감사하세요.

복음으로 자기 이름 내고자 하지 마세요.

행여 복음 전한다는 것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노림수를 가지지 마세요.

그럼 시험 들게 되어요.

이 말을 마음에 잘 새겨 두세요.

 

다시 욥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욥이 부유하고 평안하게 살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고난 속으로 밀려들잖아요.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그래요.

 

욥이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귀는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선 귀한 놈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착실하게 잘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연기(演技)로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을 죽였다 살리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귀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 하나님이 다 적절하게 사용하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장을 봅시다.

 

잠 16: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적당(합당)하게 지었다고 하지요.

악인이나 선인이나 하나님께서 다 적당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사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십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때로는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합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는 천국과 지옥처럼 극과 극이에요.

 

그런데 목자가 양을 천국과 지옥으로 병행하면서 인도하세요.

다 양에 유익을 위한 것이고 필요해서 그래요.

우린 양이고 하나님은 목자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였다 살렸다 하세요.

그러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 때도 기뻐하시고 죽을 때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할 때도 기뻐하시고 흥할 때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 질 때도 기뻐하시고 낮아 질 때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할 때도 기뻐하시고 병들었을 때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를 이길 때도 기뻐하시고 마귀에게 질 때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믿음에 진보를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로 율법을 보십시다.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어요.

 

뭔가 뜻이 있어서 주신 겁니다.

그러니 좋은 것이에요.

그 뜻만 잘 읽어낼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 되어요.

 

율법은 좋은 것이에요.

다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칼을 의사가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는 것과 같아요.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만들지만,

양이 물을 먹으면 젖을 생산해 내요.

동일한 것도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이와 같아요.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의 서기관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잘 사용하는 자라고 하신 겁니다.

옛 것은 율법이고,

새 것은 은혜(복음, 믿음)에요.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고 심판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종노릇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 신앙을 아주 나쁜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율법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나쁜 것이 되지만 율법 신앙이 지향하고자 하는 그 본 뜻을 붙잡으면 좋은 것이 되어요.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주어졌어요.

그럼 우리는 율법이 하고자 하는 역할을 따라 나아가면 되어요.

그럼 좋은 것이 되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은 좋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죄냐?

무슨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율법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죄를 알지 못하면 예수도 모릅니다.

예수를 모르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율법은 선민에게만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중 중요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만 주었어요.

그러니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었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좋은 것들입니다.

 

오늘은 율법이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율법이 복음이라뇨?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율법도 복음입니다.

율법을 복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복음으로 주셨어요.

다만 우리가 복음으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율법을 이해하여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두 과실이 있지요.

먹으면 죽는 선악과와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 입니다.

이 두 과실은 두 예수를 상징해요.

혹은 율법과 은혜를 상징하기도 해요.

육체로 오신 예수와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상징해요.

율법의 일을 하시러 오신 예수가 있고, 은혜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가 있어요.

 

우리를 죽이는 예수가 있고, 우리를 살리는 예수가 있어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죽이려고 오셨어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율법 역할을 하셨어요.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를 안고 십자가에 죽어버렸어요.

그러므로 육체로 오신 예수는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가 있어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살리는 예수에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은혜로 우리를 감싸세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생명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율법과 은혜로 비유할 수가 있어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율법이라는 남편처럼 우리 죄를 고발하고 죽이는 남편으로 있었어요.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은혜라는 남편처럼 우리를 보듬고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주고 살리는 남편으로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지 이해가 되시지요.

 

다시 율법이 왜? 복음인지를 살펴봅시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만히 계셔도 되실 분이 왜? 구태여 멸망당할 이 역사에 오셨습니까?

그것도 이름이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을까요?



이는 “예수” 라는 이름 속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 라는 말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시자면 자기 백성이 죄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겠지요.

누군가가 자기 백성을 죄에 가두어 놓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어서 구해 내시지요.

 

여기에 먼저 율법을 투입 하신 겁니다.

율법으로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가 죄인인지 모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를 일컬어 의인이라고 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를 일컬어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는 이런 것이다” 라고 인간의 행위 차원으로 규정해 놓았어요.

세상은 행위 차원에서 죄를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행실을 근거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 말로 착하게 살면 의인이라고 하고 악하게 살면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산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하고 악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해요.

 

얼마 전에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줄거리를 보면 강도라는 서른 살 먹은 청년이 사채놀이를 하는 고리 대금 업자의 하수인으로서 채무자들을 찾아가서 돈을 받아내는 일을 합니다.

 

악독하기가 소문이 났어요.

얼마나 악독한가 하면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신체 포기 각서를 쓰게 하여서 보험에 들게 한 후 손이나 발을 절단하여 그 보상금으로 채무를 받아내고야 말아요. 

채무자들 사이에서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지옥에 갈 악한 놈이라고 온갖 저주와 욕이란 욕은 다 끌어서 퍼 붓곤 했어요.

 

그럼 강도라는 청년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나쁜 사람이냐?

남에 돈을 빌려가서는 안 갚는 놈들이 나쁜 놈이냐!

아니면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는 자가 나쁜 놈인가! 라고 되 묻습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의 행동을 가지고 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러한 죄관을 가지고 있어요.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의 기준과 악의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으로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인간의 선악관은 자기 입장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해요.

이렇게 되면 인간은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선악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는 둘이에요.

선에 속한 나와 악에 속한 내가 있어요.

 

그러니 내 안에 두 내가 있는 겁니다.

어떨 땐 악한 내가 되고 어떨 땐 선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선한 내가 되고 무엇으로 악한 내가 되나요?

우리 행실이에요.

 

내 행실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나는 착한 사람 나는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요.

이게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의 죄관이에요.

우린 모두가 이러한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러한 선악적인 죄관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착한 행실을 한 사람은 의인이라고 하고 나쁜 행실을 한 사람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해요.

스스로 모순적인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절을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죄악 중에 출생을 한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 자체가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서 어느 것이 죄이냐 라는 말이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들이 착하다고 하는 것도 죄이고 악하다고 하는 것도 죄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죄에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의가 되지 않아요.

인간이 의라고 하는 것도 죄이고 죄라고 하는 것도 죄에요.

인간에게 유익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선 무가치하단 말입니다.

 

부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수류탄을 품에 안고 장렬히 산화한 강재구 소령도 죄인이고!

인도의 빈민가에서 평생 동안 가난한 이웃을 돌 본 테레사 수녀도 죄인이고!

박사학위 다섯 개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 병자를 돌본 슈바이쳐도 죄인이고!

도끼로 21명이나 잔인하게 살해한 김00도 죄인이고!

연약한 부녀자들을 납치하여 성 폭행하고 죽은 강00이도 죄인이에요.

 

착한 놈도 죄인이고 악한 놈도 죄인이에요.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인간이 없어요.

다 죄인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정의하는 인간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인간도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에 동의하는 자가 없어요.

인간들은 그 누구라도 나는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 선한 면이 있다고 해요.

그 누구도 자기는 나쁜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악한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라고 하면서 나는 저렇지 않다고 스스로 악인이 아님을 위안을 해요.

이는 곧 나는 저 인간하고 다르다는 거에요.

나는 저 정도는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죄를 경중으로 따집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질을 따져서 중범죄와 경범죄로 구분을 해서 당신은 징역 2년 또는 10년 또는 무기징역이라는 식으로 형량을 선고합니다.

이 모두가 인간 안에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다 라는 것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러한 선악의 법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너희가 너희 행실을 근거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인간이 알고 있던 죄관과 의관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을 봅시다.

 

요 16:7-11=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 실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떤 실상인가 하면 예수님과 성령이 임무 교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육신으로 오셔서 하실 일을 다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하실 일이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속량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에요.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여도 우리가 안 믿으면 소용이 없어요.

안 믿어지면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예수님에 저에게 야!~ 정낙원이 내가 너의 죄를 대신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니 넌 이제부터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

마귀가 너 더러 죄인이라고 하면 아니야 나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어!

그러므로 난 이제부터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야! 라고 알려 주어도 그것이 내 안에서 안 믿어지면 소용이 없어요.

 

내 안에서 예수가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육체로 죽고 나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준다고 합니다.

다른 보혜사로 온다고 하는 겁니다.

그가 오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상을 말해준다고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의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는 것은 기존에 죄관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죄관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죄관을 가지고 살라고 합니다.

그럼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선악의 법으로 알아진 죄관이 하나님 앞에서 틀렸다는 것으로 알게 되어요.

 

새로운 죄관이란? 인간 중심의 죄관에서 예수님 중심의 죄관으로 바뀌어요.

이제부터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죄다 아니다 로 판단이 되어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이 되어요.

새 언약을 믿으면 의이고 안 믿으면 죄에요.

 

성령은 이러한 예수님 중심의 새 언약적 죄관을 가지고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럼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해요.

예수를 믿으면 의인이라고 하고, 예수를 안 믿으면 죄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세상은 이런 성령의 죄관을 받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는 이 죄관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의 오심은 우리 죄를 폭로하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인인줄 모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 예수가 구원자로 오셨다 하여도 예수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럼 누군가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하고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잖아요.

 

이 사실을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죄에 대하여 알려준다는 것은 곧 성령이 율법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죄에 대하여 고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이 와서 죄를 고발하는 것을 구약의 율법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어떻게 죄를 고발하는가요?

바로 율법입니다.

 

구약에 자기 백성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 후손들이지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태어난 자들이에요.

이걸 약속에 자녀라고 합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아브라함의 언약을 모르면 아브라함 후손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거든요.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자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십니다.

찾아 가서 내가 너를 복에 조상이 되게 해 주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어요.

 

아브라함은 얼떨결에 복에 조상으로 부르심을 입고 말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언약을 심어 놓았어요.

이제 그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 심어 놓았으니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거에요.

이제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심어 놓은 그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아브라함을 다루어 갑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이 이루기까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요.

 

여러분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나오지요.

모든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어요.

주인공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가 되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주인공은 엄청난 고난을 받아요.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겨요.

저는 사극(史劇)을 즐겨 보아요.

사극에서 주인공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맞아도 죽지 않아요.

사극을 예로 듭니다.

 

SBS에서 하는 수, 목 드라마 중에서 ‘대풍수’ 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장차 조선을 개국하는데 일등으로 역할을 하는 풍수학자 '지상'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이 드라마에서는 '지상'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이에요.

이 아이가 장차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개국하게 되어요.

 

그런데 지난 회에 보면 지상이라는 아이를 악당들이 쏜 독 화살에 맞았어요.

악당들이 죽었다고 확인을 하고 무덤에 묻어 버렸어요.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지상이가 무덤에 흙을 헤치고 살아서 나와요.

왜? 죽었던 지상이가 살아서 나올까요.

그야 주인공이 죽으면 드라마가 전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감독은 주인공을 그 어떤 죽음도 다 헤치고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겁니다.

 

엑스트라는 그냥 화살이 빗겨가도 죽어요.

칼이 스치기만 해도 죽어요.

그러나 주인공은 안 죽어요.

 

독을 마셔도 살아나고!

칼로 베임을 당해도 살아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살아나고!

화살을 맞아도 살아나요.

그 어떤 것으로도 주인공을 죽일 수가 없어요.

 

주인공의 살고 죽는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감독이 결정을 해요.

그러니 주인공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드라마가 완성되기까지 감독이 주인공을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심겨진 언약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심어 놓은 언약이 이루기까지 아브라함이 그 어떤 짓을 하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살게 하세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브라함을 복에 조상으로 만들고 말아요.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복에 조상이 되려면 역설적으로 복을 받을 만한 위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복을 받을 수 없는 인간으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순종하는 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순종하는 자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분 순종 가운데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에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불순종의 산물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야 말로 아브라함은 복과 상관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에 사람들이에요.

역설적으로 복을 받을 인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복에 사람으로 선택을 입고서 이 세상으로 보내어졌어요.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야~ 너 예수 믿고 천국에 가! 라는 언약을 받고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제 안에 심겨진 언약의 내용이에요.

 

전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저에게 예수가 믿어지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어지는 것만큼 더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이 증거로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외부의 조건으로 흔들리지 않아요.

 

그러니 저는 제 행위와 상관없이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에 갈 때까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주께서 나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곁에서 지켜 주실 것을 믿어요.

아마도 제가 하여야 할 일을 다 하기 이전에 제가 죽어도 다시 살려 낼 것입니다.

다시 살려 놓고 그 일을 하게 하시고 난 후에 죽어도 죽게 하실 거에요.

 

그러니 우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팔자에요.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면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하고, 반대로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어도 살라고 하면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려도 다리만 부러지게 하고선 살게 하실 겁니다.

그러나 함부로 한강다리에서 뛰어 내리지 마세요

더 개 고생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 백성이에요.

우린 이 언약을 안고 태어났어요.

그 언약이 어떤 언약인고 하니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 죄가 사함을 받는 언약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는 언약이에요.

자기 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줄 몰라요.

 

이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와 같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자기가 소경인줄 몰라요.

어둠에 있으니 어둠을 모르는 겁니다.

 

빛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알려면 빛이 있어야 해요.

어둠은 빛을 통해서 어둠으로 드러나요.

그런데 태어나면서 된 소경은 빛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자기가 어둠에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죄도 이와 같아요.

죄(罪)를 알려면 의(義)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義)를 몰라요.

의(義)를 보아야 어~! 저것은 나와 다르네! 라고 하면서 자기가 틀린 죄인인줄 알지요.

 

이처럼 죄 아래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몰라요.

죄를 알려면 죄에 반대 되는 것이 있어야 해요.

죄에 반대 되는 것이 의에요.

의를 본 적이 없으니 죄를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의를 알게 해 주시는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세요.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 속에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 있어요.

이스라엘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어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애굽에서 태어납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이지만 애굽에서 태어났어요.

이건 마치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 죄 아래서 태어난 것과 같아요.

 

죄 아래서 태어났지만 그 속엔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비록 영생 받기로 작정된 언약을 안고 있다고 하여도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된 소경처럼 의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다른 말로 내가 죄인인줄 모른단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이와 같아요.

애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애굽은 죄를 상징해요.

애굽 자체가 죄의 동네에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죄라는 동네에서 태어나 죄 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어요.

자기가 죄인인줄도 모른채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이 바로 출애굽하여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애굽에서는 전혀 듣도 보지도 못한 것을 주신 거에요.

 

율법은 애굽에 없어요.

애굽 백성에겐 율법을 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자기 백성들만 받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어디서 구원을 받습니까?

죄에서 구원을 받지요.

그럼 자기 백성만 죄를 알 필요가 있는 겁니다.

 

애굽 사람들은 죄를 알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죄에서 구원 받을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자기 백성들에게만 죄를 알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세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도에게만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들만이 죄를 아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알게 해 주신 죄관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이 죄관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성도만이 알아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에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죄에 대하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롭다 함을 입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악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로 붙잡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에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주신 율법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무슨 일을 합니까?첫째로,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지요.

둘째로, 모든 입을 막는 일을 하지요.

셋째로,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하지요.

 

율법이 없을 때는 할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율법이 오고 나니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이는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니 구원자를 찾게 됩니다.

기다리게 됩니다.

결국 율법은 구원자를 만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선생이에요.

선생이 무슨 일을 합니까?

가르치는 일을 하지요.

 

그럼 율법이 우리에게 선생이 되어서 무엇을 가르칩니까?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아~! 나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구나! 를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가 나를 죄에서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죄인인 줄 안다고 해서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어요.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나를 더욱 더 저주 가운데로 밀어 넣는 것을 알게 되어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더 절감하게 되어요.

그러니 율법이 밝히 비추면 비출수록 우리는 더 지옥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알면 알수록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을 더욱 더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나는 내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율법이 주어지고 난 후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예수를 바라보게 하시니 우리에게 있어 율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율법도 좋은 것이지요.

죄인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어서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그들이 비록 애굽에서 태어났어도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아브라함 후손이란?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애굽이라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인인줄 몰라요.

죄 아래 사는 자는 죄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죄를 알려 주는 일을 하십니다.

 

죄를 알려 주는 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것은 자기들의 착함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알다시피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선악관을 가지고 있어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태어났으므로 애굽에 선악관이 있어요.

그것으로 죄인이다 아니다 를 판단했어요.

몽땅 죄인인 주제에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몽땅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기 꼬라지가 어떤 자인지를 알려 줍니다.

너희들이 과연 복 받을 인간인지!

아니면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인지! 알려 주십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이 담겨져 있어요.

율법은 두 가지 명령으로 되어 있어요.

하라! 하지 말라! 로 되어 있어요.

 

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인간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되어요.

 

자 보세요.

율법이 뭔가요?죄를 고발하는 거잖아요.

인간 속에 있는 죄를 고발하는 거잖아요.

 

죄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라는 식으로 발현을 하겠지요.

그럼 인간 속에서 죄를 싹 빼내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인간이 되겠지요.

그럼 죄 없는 자가 되겠지요.

죄 없는 자는 의인이에요.

 

예수님처럼 의인이 되어요.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에요.

율법의 표피적인 세목 하나 하나를 다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말이에요.

율법이 함유하고 있는 그 정신으로 사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과 달라요.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어요.

죄와 상관없는 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을 율법과 상관이 없어요.

죄라는 동네에서 나신 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하나님은 이걸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너희들이 죄 아래서 낳아진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자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율법으로 말이에요.

 

너희가 내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도 저주 받지 않고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너희들은 은혜로 대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고자 해서는 안 되어요.

 

도리어 율법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율법 지킴이 되어요.

율법 지킴은 역설적이게도 “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항복하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누가 날 좀 구해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구원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해요.

그게 말씀을 지키는 것이에요.

모든 말씀은 율법의 성격을 띠고 있어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4=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말씀이 우리를 해부한다고 하지요.

마치 MRI 처럼 말이에요.

말씀이 우리 안과 바깥 모두를 해부해요.

죄인으로 해부한단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세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치료를 받으라는 겁니다.

너의 죄를 치료하실 분은 오직 한분 예수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가 죄를 치료하는 의원이에요.

 

그러니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가요.

우리 속속들이 병든 것들을 다 찾아 내 주시니 말이에요.

그래서 율법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세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게 한단 말입니다.

율법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지난 시간 우리는 율법을 아주 나쁜 신랑이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이 나쁜 신랑이 된 것은 예수라는 좋은 신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율법이라는 나쁜 신랑 아래 살게 했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라는 좋은 신랑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아주 고약하고 인정머리가 없는 나쁜 신랑을 통해서 예수가 참으로 좋은 신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못된 율법이라는 신랑 때문에 좋은 예수라는 신랑이 돋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라는 신랑의 고마움을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율법이 살아서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하여 주어야 예수라는 신랑의 고마움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MRI 처럼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어 죄인으로 해부하는지 살펴봅시다.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예수라는 신랑이 최고의 일등 신랑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는지를 살펴봅시다.

 

본문 7절을 보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라고 합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율법이 없었으면 죄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분명히 죄가 있지만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라는 일등 신랑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율법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를 예수라는 일등 신랑에게 시집을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어떤 신랑입니까?

자비의 신랑이지요.

은혜의 신랑이지요.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는 신랑이잖아요.

이건 율법이라는 신랑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계속하여 일등 신랑으로 남으려면 율법이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우리는 율법에게 죄인으로 고발당하고 예수라는 신랑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덮어주는 신랑임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감사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율법이 우리의 죄를 낱낱이 다 까발려 주어야 합니다.

 

율법이 MRI 처럼 우리의 심령골수를 해부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율법이 어떻게 MRI 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지를 봅시다.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하면 미끼가 되어서 끄집어내어요.

 

율법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는 것으로 미끼가 되어서 우리 안에 죄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본성과 반(反)하는 것들로 되어 있어요.

즉 율법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곧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탐욕으로 살고 있어요.

탐심으로 가득해요.

그런데 이걸 숨기고 있어요.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끄집어내려고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탐내지 말라고 지적을 하니까 우리 안에 꼭꼭 숨어 있던 탐심이라는 죄가 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안에 탐심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없는 줄로만 알았던 탐심이 튀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아하! 내가 탐심을 품고 있는 죄인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율법이 계속하여 우리 안에 있는 놈들을 하나 둘씩 불러내요.

율법이 투입 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 폭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우상 숭배자라고 폭로되고!

내가 살인자라고 폭로되고!

내가 도적놈이라고 되고!

내가 간음하는 자라고 폭로가 되어집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을 자기 삶에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못된 놈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 안에 숨어 있던 도적놈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 안에 살인마가 튀어 나오는 거에요.

 

율법이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 안에 간음하는 놈이 뛰쳐나오는 것입니다.

 

전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제가 살던 동네는 바닷 게가 참 많았어요.

어른들의 엄지손톱 두 배 정도 되는 놈들인데 이 놈들을 잡아서 간장을 넣고 달달 볶으면 최고의 반찬이 되어요.

그래서 우린 학교에서 파하고 나면 바닷가에 가서 게를 잡곤 했어요.

어머니는 그것으로 반찬을 해 주었어요.

 

그런데 이놈들 사냥법이 마치 율법으로 우리 죄를 끄집어내는 것과 흡사해요.

이 놈들은 바위 틈에 숨어 있어요.

구멍에 숨어서 안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멸치를 실에다 묶어서 그 구멍 앞에서 살살 흔들어요.

 

그럼 숨어 있던 놈들이 나와서 그걸 확 물어 버려요.

물곤 안 놓아요.

그럼 우리는 실을 살살 끌어 올려서 잡는 겁니다.

이게 “게 사냥법”이에요.

 

율법이 이와 같아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사냥하는 겁니다.

우리 본성을 자극하여 튀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씩 주어질 때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죄들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놈들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죄를 모르면 자기가 괜찮은 의인인줄 알아요.

하나님 앞에서도 어깨 힘을 주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어깨에 힘을 빼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린 율법이 없을 땐 고상하게 생각했어요.

속에는 썩은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도 말이에요.

이걸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우리를 묵사발 내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썩은 것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내는 일을 합니다.

율법이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집니다.

 

야~! 내가 이렇게 망나니였는가!

야~! 내가 이처럼 더럽고 나쁜 인간이었나!

야~! 내가 이토록 추악하고 욕심이 많은 놈이었는가!

야~! 내가 이런 사악한 악당이었나! 를 알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율법이라는 미끼를 가지고서 게 사냥 하듯이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각양의 죄들을 끄집어내려고 그 죄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 앞에서 살살 흔들고 계세요.

그럼 우리 본성이 그걸 보고 확 물어버리는 겁니다.

 

우리 안에 살인을 끄집어내려고!

미운 사람을 보내서 살인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버려요.

 

우리 안에 탐욕을 끄집어내려고!

도적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간음을 끄집어내려고!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는 것을 끄집어내려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사건들을 발생시키시는 거에요.

 

이 모두가 영적인 거에요.

그렇다고 육적으로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우상숭배 하여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이 있은즉 영이 있고 영이 있은즉 육도 있는 거니까 동일한 무게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은 없지만 징계가 있어요.

그러니 이러한 짓을 하면 판단 받는 정죄는 없지만 어그러진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징계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 징계가 훨씬 아프고 복잡해요.

그래서 성도는 이러한 죄와 싸우고자 하는 지향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멀리하고 피하고자 하는 자이지 즐기는 자가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먼저 문자적으로 받고 교훈적인 해석을 하세요.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영적인 해석으로서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문자에 머물면 그건 육이고 죽이는 것이에요.

영으로 나아가야 새 언약 안에서 쉼을 얻어요.

 

성경은 미움을 살인이라고 하고!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고!

은혜를 모르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하고!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살인하는 자이고!

간음하는 자이고!

도적놈이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법이 없었으면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죄가 있음에도 법이 없으면 그것이 죄로 드러나지 않아요.

법이 주어짐으로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인이라고 실토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단 말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투입이 되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라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해진 것이라고 하지요.

더하여진 것이란? 없어도 되는 것인데 어떤 사건 때문에 보태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장차 천국에 가면 율법이 필요 없어요.

거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의 임무가 다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를 없애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럼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어요.

이걸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요.

예수 안은 은혜가 왕 노릇하는 곳입니다.

성도는 의에 종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제 의인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다 치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에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니까 율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필요가 없다는 말은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하고 심판하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인에게만 힘을 써요.

예수 안은 천국과 같아요.

천국엔 의인들만 있어요.

그래서 천국에는 율법은 없고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있는 자에요.

예수 안이 천국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더 이상 추궁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을 추궁한다고 했나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세운다고 하였지요.

쉬운 말로 율법이 하나님 앞에서 “이 놈은 죄인인데요!” 라고 고발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안에 있어요.

죄가 없는 동네에 살아요.

그러니 율법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고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참소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무 율법주의자로 살아서는 안 되어요.

 

바울은 지금 율법 없이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와 율법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율법의 역할을 이야기 해주고 있어요.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라고 하지요.

이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고발을 해 주는 것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법이 없으니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잖아요.

그러니 난 의인이라고 하면서 기고만장하고 산 거에요.

 

그런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고 하지요.

율법이 없을 때는 내가 죄를 모르니까 의인으로 살았는데, 율법이 오고 나서는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은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법이 없었을 때는 내가 죄인인줄 모르니까 산 자로 살았어요.

그런데 법이 들어오고 나니까 졸지에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고 죽은 자가 되고 말더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죄가 본래부터 있어서 우리는 본질상으로 죽은 자였어요.

그런데 산 자처럼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 투입이 되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지자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 동안 하나님의 계명에 관심이 없이 살던 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기 시작하였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줄을 몰랐어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자기가 죄인인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더란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계명으로 율법으로 주어지자 그동안 우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죄가 꿈틀거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더라는 거에요.

결국에는 죄를 안 짓는다는 자신감보다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더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기가 죽더란 말입니다.

내가 그 동안 천지 분간도 못하면서 깨춤 추고 살았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자기 주제를 알게 된 겁니다.

아! 나는 죄 아래 가두어진 자이구나를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욥처럼 하나님의 창조 앞에 서 보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가린 것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냥 거드름 피우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도 죽네 사네 입에 거품을 물고서 날 뛰는 거에요.

 

우리가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 일신상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잖아요.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스리는 자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잖아요.

이 얼마나 시건방진 일입니까.

 

이건 마치 철 모르는 새끼들이 부모에게 대 드는 것과 같아요.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는 그 은공을 모르면서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철없는 자식들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피조물이 건방지게 창조주가 하는 일을 옳으니 그르니 논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게 정말 일을 이렇게 하실 겁니까? 라고 대들고 있잖아요.

 

죄인들은 그러고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꼬라지를 좀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개구리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그 주둥이를 좀 닫게 하려고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으로 나를 죽이고자 주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9-20절에서 율법이 하는 일을 세 가지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로, 죄를 깨닫게 하고!

둘째로, 우리의 입을 막고!

셋째로,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 동안 죄인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잘난 척 꼴값을 떨고 있어서 하나님이 그 꼴값을 죽이고자 율법을 주어서 니 주제를 좀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입 다물라고 말이에요.

 

그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난 자를 죽이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죄인은 죽이고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려 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나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좋은 것이에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계명이 도리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고 가고 만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보니 죄라는 놈이 그 율법으로 나를 죽이는 일을 하고 있더란 거에요.

그렇다고 율법이 죄냐!

그럴 순 없다는 겁니다.

 

그 동안 율법이 없을 땐 내가 산 자인 줄 알고 살았는데,

율법이 와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살려주실 자를 찾게 되는 겁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자에게로 눈길을 돌리게 해 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율법도 신령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율법 앞에 감사해야 해요.

예수 믿으면 율법이 폐기 되는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안에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해요.

 

MRI 처럼 우리 속사정을 낱낱이 찍어서 어디가 병들고 어디가 썩었고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고발되어지는 것만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가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복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을 한다고 한 겁니다.

주야로 말씀으로 발가벗긴바 되어 주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가 더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복음을 아는 자는 더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을 감사케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말씀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늘 거울을 보고 살듯이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는 늘 말씀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MRI 앞에서 늘 해부(解剖)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자기 안에 죄를 늘 발각당하시고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찬미하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허물이 드러나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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