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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44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4)

by coroa 2021. 5. 13.

 

[44강.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4)]

-.정낙원 목사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생명)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어떤 부자에게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재물보다 생명이 더 귀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죽음에 쫓기는 인간에게 산다는 것 이상에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 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하고!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을 합니다.

 

어째서 인가요?

죽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으니까 인간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존재란 말이 됩니다.

 

죽음과 영생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에 쫓기고 있으므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반발 성향입니다.

 

살고 싶어하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쫓기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러한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모두가 영생(永生)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 중에 가장 인간적인 것을 담고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윤회로 봅니다.

윤회(輪廻)란? 또 다른 생명으로의 환생(還生)을 말합니다.

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교리입니다.

그리하여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운명론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이 들면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므로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운명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어 놓은 교리가 윤회 사상입니다.

윤회란?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끝이 아니고 다음 생애에서는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무엇으로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죄의 댓가 라고 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죄가 없으면 죽음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말고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면 자연히 죽음에 문제도 해결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이 말하는 것이지 인간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죽음에 문제만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불로초를 구하고 불치의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자 새로운 신약(新藥)을 만들고 과학으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성경이 무어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망이 죄로부터 왔다고 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면 죽음에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럼 죄인에게 있어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주인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죄가 우리를 사망 가운데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죄가 우리 인간들을 사망 가운데 가두어 버렸다고 한다면 죄와 상관이 없는 누군가가 외부에서 건져 주어야지만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건져 주려면 죄 바깥에 있는 분이라야만 합니다.

죄 아래서 나지 않은 분이라야만 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죄에 가두어져 있어요.

우리 스스로는 독자적으로 죄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어요.

누군가가 죄로부터 건져내 주지 않으면 우린 죄로부터 빠져 나올 길이 없습니다.

 

흔히 인간들이 성인이라고 하는 부처나 마호메트나 공자도 다 죽었습니다.

이들이 죽었다는 것은 곧 죄 아래 가두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죄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죽음을 해결할 그 어떤 희망도 없어요.

그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일 뿐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죽음 앞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일까요?

구원자가 온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겠지요.

죽지 않고 산다는 것 이상으로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죽음이 왜? 주어졌다고 했나요?

죄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죄가 없으면 죽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죄를 없애 준다는 소식이 날아듭니다.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소식을 세상에 알려 주십니다.

그 소식이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고 그 아들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시내 곳곳에 성탄절 분위기로 들썩입니다.

캐럴 송이 울려 퍼지고 길거리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현란하게 깜빡입니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편에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분리가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에 심판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은 두 쪽으로 분리가 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게 속한 너희들과 예수님에게 속하지 아니한 저희로 구분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동시에 유대나라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기준으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이상한 별 하나가 움직입니다.

어디로 움직이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움직입니다.

 

이름하여 그 별입니다.

그 별이란? 예언이 된 별이란 말입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의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그 예수의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별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별이 사라졌습니다.

 

별을 따라 간 동방박사들이 왕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별을 따라 왔는데 예루살렘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묻습니다.

왕이시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누구이신지 아십니까?!

 

이상하지 않나요?

헤롯이 유대 왕이에요.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낫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은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가짜 왕입니다” 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왕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당신도 그 왕을 맞이하여야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헤롯왕이 그러겠다고 하면서 도리어 그 왕이 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서 어린 아이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이는 왕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진짜 왕을 죽여야 자기가 왕 노릇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본질을 한마디로 잘 말해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진짜 행세를 합니다.

진짜가 오면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진짜를 죽임으로서 자기 자리를 보존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잘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이 세상은 허상입니다.

하늘나라가 진짜이고 세상은 가짜입니다.

하늘 예루살렘이 진짜이고 세상 예루살렘은 가짜입니다.

하늘나라 왕이 진짜이고 세상 나라 왕은 가짜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이 진짜 왕이고 세상 나라의 왕인 헤롯은 가짜 왕이란 말입니다.

헤롯은 진짜 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헤롯이 알았다고 한다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누구냐 라고 물을 때 나는 가짜 왕이고 그분이 진짜 왕이니 우리가 그 분을 찾아서 경배를 하자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헤롯은 도리어 진짜 왕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헤롯에게 국한 된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헤롯을 욕하면 안 되어요.

헤롯은 곧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헤롯처럼 나를 지키고자 예수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헤롯처럼 내가 내 주인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서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너는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우리는 헤롯처럼 반발을 합니다.

예수를 죽여 버립니다.

 

나의 주인 자리를 예수님에게 넘겨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나의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이러한 사고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인자”라고 하지요.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란 말입니다.

 

참 사람이라는 말은 가짜 사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럼 가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사람 행세 하는 우리들이에요.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 행세를 하고 살았어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곧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에게 너희는 사람이 아니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이 말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는 고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인간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서 이 세상은 가짜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만 참이고 모두가 가짜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심판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심판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 간에 어떻게 갈라내고 구원을 하는가요?

이는 기존으로부터 불러냄으로서 갈라지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이 곧 구원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기존에 남아 있음은 곧 심판받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 되지만 빼냄을 입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니 저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모세가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빼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구원이 되지만 애굽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은 저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모세처럼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기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되고 빼냄을 입지 못한 자들은 애굽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누구를 어디서 빼내고 있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은혜 아래로 빼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아래가 곧 애굽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곧 애굽의 바로에 무리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곧 출애굽을 당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곧 심판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이러한 맥락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이해해 보세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 들어갔다는 것은 곧 율법 신앙이 심판을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율법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전을 척결한 것입니다.

이는 율법 신앙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율법 신앙의 총화에요.

예수님이 성전을 척결했다는 것은 율법 신앙 전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 신앙은 가짜란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성전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제사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제사장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생명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왕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가짜이고!

율법 아래 있는 진리도 가짜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동안 진짜로 행세 하던 모든 것들이 가짜로 드러나게 되었어요.

이걸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는 것 그 자체가 곧 심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시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갈라지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심판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좌우편에 강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고 한 강도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동일한 강도이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판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서 심판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보느냐! 아니면 가짜로 보느냐! 로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느냐! 안 보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어집니다.

 

자 보세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셨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백성들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알겠지요.

자기가 죄인인줄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원주로 영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답은 나왔습니다.

누가 자기 백성이냐?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자입니다.

 

자기가 죄인 인줄 아는 사람에겐 예수님의 오심이 축하 할 일입니다.

성탄절 이야기로 한다면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탄절이 기쁜 날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축하 할 일이 아니고 도리어 저주스러운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지옥 백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기뻐한다는 것은 어둠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천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에 한해서입니다.

 

누가복음 2장을 봅시다.

 

눅 2:11-14=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가 그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어떤 징조를 말합니다.

무슨 징조인가 하면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어 심판하는 징조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말은 죄에서 구원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때문에 영광입니다.

이제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는 말입니다.

모두에게 평화가 아니고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평화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었다” 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만 예수님의 오심이 평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에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과 평화가 됩니다.

 

하나님은 죄인과는 상종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의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 죄 아래서 났어요.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중에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을 해 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죄에서 구원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과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할 자들이 바로 창세로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오심은 이들에 한해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이 구원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이 심판주이십니다.

 

복음을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복음 속에 담긴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의 반대는 슬픔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쁨이라고 한다면 그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의 모습은 슬픔 속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복음이라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은 슬픔 속에 잠겨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하잖아요.

그럼 이 세상은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이와 같아요.

예수님의 오심이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 이 세상은 절망 가운데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은 절망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복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복음은 절망 가운데서 주어져요.

쉬운 말로 죄인들이 살 길이 없었는데 살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에요.

마치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복음으로 남으려면 상대적으로 우린 절망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입니까?

죄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오심이 복음이 되게 하시려면 먼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먼저 하시겠지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와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실까요?

복음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절망을 알리는 일을 하시겠지요.

즉 기쁜 소식을 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나쁜 소식을 알려주는 사람이 먼저 오겠지요.

죄를 고발하는 사람이 먼저 와서 우리를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을 보낸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봅시다.

 

눅 1:76-80=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세례요한을 선지자라고 하지요.

어떤 선지자인가 하면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선지자에요.

어둠과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해가 떠 오른다는 것을 알려 주는 선지자에요.

이걸 다른 말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예수님 앞서서 먼저 보내어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셔서 해야 할 일을 준비케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죄인 만드는 일을 함으로서 준비를 해요.

 

그래서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율법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뭔가요?

죄를 고발하는 거잖아요.

지금 세례요한이 율법처럼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세례요한이 율법으로 죽여 놓은 자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한 조가 되어서 일을 하신 겁니다.

세례요한이 율법으로 백성들을 죄인으로 고발을 해 놓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죄에서 사함을 받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서 봅시다.

 

오늘 본문이 뭔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정죄 당하여야 하는데 정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죄 하지 않을 때는 어떤 근거가 있겠지요.

 

그 근거가 뭔가요?

바로 우리가 정죄 당하여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정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이 죄 값을 치룬 겁니다.

 

그럼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앞선 말씀이 뭔가요?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는 탄식이지요.

바울이 왜?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합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절망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깨달았어요.

하나님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바울로 절망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절망을 당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발당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먼저 기쁜 소식을 주시기 전에 먼저 나쁜 소식을 먼저 주시겠지요.

복음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 죄를 고발하여서 우리를 죄인 만드는 일을 먼저 하시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어서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가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어요.

우리 죄를 고발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일을 해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4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일)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심령골수를 해부하는 일을 하십니다.

심령골수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언행심사(言行心思)를 다 까발려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죄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 죄로 드러나게 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를 믿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케 하여서 예수님을 붙잡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을 하여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단 말입니다.

 

신앙이란? 날마다 절망당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의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죄를 많이 알아 갈수록 절망케 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자기 가능성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탄식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누가 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탄식케 하고 절망케 하였나요?

하나님의 말씀이고 은혜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자신은 율법에 특심한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특심하고 흠이 없다고 자랑하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자기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바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어요.

 

그러자 말씀이 법으로 보이지 않고 자기 실존을 비추는 거울로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법 아래서는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니까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옳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옳은 신앙이라고 했어요.

누구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심판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로는 역으로 깨닫게 되었어요.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지 그 진의(眞意)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이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데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義)는 말씀 지킴에서 주어지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니다.

 

갈 3:19-25=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잘 보세요.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하지요.

 

범법함이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죄를 지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자 주어졌음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자 율법을 주었어요.

너 율법 지켜! 가 아니고 네 꼬라지를 좀 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이 죄인이라고 고발하는 것도 그리스도가 오시면 끝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역할이 다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의 역할이 다하는가요?

이는 율법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죄 가운데 가두는 일을 해요.

율법은 마치 세례요한이 와서 너희들은 독사 새끼들이라고 고발하는 것과 같아요.

이렇게 고발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이란? 길잡이란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을 하여서 예수님 앞으로 안내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졸졸 따라가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율법 지킴이 무엇입니까? 라고 문제를 내었어요.

정답을 적어 보세요.

 

1번)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2번) 예수 믿는 것이다.

 

정답은 2번이에요.

 

율법 가지고 율법대로 삽시다! 그러면 안 되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역설적이게도 율법대로 사는 것이 율법을 어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율법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새끼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라는 구원자를 눈앞에 빤히 두고도 그 분이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을 해 주실 메시야 라는 것을 몰라보았어요.

 

어째서 그런가요?

자기들은 율법을 너무도 잘 지켰기 때문에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율법 지킴이 도리어 자기를 죽이는 독약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리새인들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신앙의 부류들이에요.

 

우린 그동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을 신앙의 근본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모습이에요.

지금도 수많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의 증거는 정 반대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불신앙이 된다고 하고 있어요.

 

다른 말로 율법 지킴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비밀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이해 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어요.

법에 속한 사람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율법 지킨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왔어요.

율법을 지키면 흠이 없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진의(眞意)를 알고서는 절망하고 말았어요.

아이쿠~ 내가 헛 다리를 짚었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 말씀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울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서 보니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 한 것은 교만이고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보았었는데 이제 눈에서 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진 것입니다.

 

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이 법으로 보이지 않고 은혜로 보이기 시작을 하였어요.

말씀이 자신을 하나님 은혜 아래로 인도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 말씀이 자신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는 절망케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더란 것입니다.

 

이제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절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절망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을 하였다고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러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깨달아 가게 되어 있어요.

내가 형편없는 쓰레기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의 마음을 엄청 설레게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롬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 있는 이야기를 접속하여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앞에 내용이 무엇인가요?

바울이 죄 아래 가두어진 자신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탄식하면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실 분이 없소!” 라고 절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죄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간과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간과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짜로 우리 죄를 용서 해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대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하여서 죽어준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아야 할 것은 예수님에게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바탕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어요.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거잖아요.

불순종이란? 쉬운 말로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죄에 가두어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에 가두어져 있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11장입니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죄가 하나님 뜻에 순종치 않는 것이니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은 곧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는 말입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순종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린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종 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이길 수 없도록 해 놓았어요.

이는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치 못하는 죄에서 빼내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도 안 되어요.

육신이라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뚱이는 죄 아래 팔린 아담의 몸뚱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만약에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죽지 말아야 해요.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육신은 죽어요.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도 육신으로는 죄를 온전하게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사도 바울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래도 삼층천을 보고 온 사람 아니냐!

야! 내가 그래도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가 아니냐!

성경을 기록한 사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면 말이 안 되지!

그러니 와! 미치겠다고 하면서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탄식이란? 뻔히 보고도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못 지켜내니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이 안 된다는 말은 완벽하게 지켜 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온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기면 다 어기는 것처럼 우린 율법을 다 지켜 낼 수가 없어요.

물론 간헐적으로 부분적으로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퍼펙트하게 100% 다 지켜내지 못해요.

 

하나님은 99% 지키고 1% 안 지켜도 다 안 지킨 것으로 간주해요.

우주로 날아가는 나로호가 다 고장 나서 추락한 것이 아니고 단 하나의 부속품이 고장 나서 실패한 것처럼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기면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탄식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에요.

성령의 충만함으로 산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탄식을 하고 있었어요.

바울이 열심이 부족하거나,

충성심이 모자라거나,

각오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은 본질적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탄식을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안 되느냐고 탄식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기 위해서 안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죄에 갇혀서 우리 힘으로 못 빠져 나와야 예수님이 와서 이끌어 내실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게 하려고 우리는 못하도록 해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여서 주라고 시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둔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긍휼로 받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못 사니까 불쌍히 여겨 주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 긍휼이 필요가 없어요.

긍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자들에게만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할 수 없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겁니다.

그리곤 불쌍히 여겨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구원 속에 예수님의 영광만 담아 놓기 위해서 에요.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만 담아 놓고자 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다는 것만 남아 있어요.

그러니 진짜 구원 받은 자는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에서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한 목적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들이 죄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겁니다.

율법으로 너희들은 내 말을 안 들어 쳐 먹는 종자들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너희는 내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알려주신 겁니다.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성경을 역설(逆說)로 보는 안목이 필요해요.

 

오늘 본문을 역설로 보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고 하지요.

정죄함이 없으려면 정죄할 것이 있어야겠지요.

정죄 할 것이 있어야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이 되려면 내가 정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복음이 되지요.

 

그것도 예수 안에 있으면서 말입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잘 생각하면서 들으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가 결코 정죄함이 없음이 되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될까요?

정죄당하는 모습으로 있겠지요.

 

누가 정죄 합니까?말씀이 하지요.

말씀이 살아서 너는 죄인이라고 정죄를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이 자기 피로 아버지 저 놈은 내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세요 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늘 정죄 당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서 탄식을 하잖아요.

바울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였는데 성령이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 당하지 않는 복을 누리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살아질까요?죄인으로서의 삶이 살아질까요?죄인으로서의 삶이겠지요.

이건 죄를 맘대로 막 짓고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요.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래서 말씀 앞에서 늘 상한 심령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스스로 정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해요.

그럴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절망 속에서 소망을 주신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 죄가 고발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 의(義)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기에겐 의(義)가 없음을 알고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낱낱이 고발당하는 것이에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스스로에게 절망 하여야 해요.

 

그리하여 자기 바깥에서 구원자로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해요.

주여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처럼 주여 물이 동하여도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는 어떻게 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물이 동하면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다 낫는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정답을 알면서 정답대로 행하지 못하면서 38년 동안 살았어요.

그러니 탄식이 나오지요.

 

이게 우리 죄인들이 모습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 몸이 38년 된 병자처럼 말을 안 들어요.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죄 앞에서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첫째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고!

둘째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하였다고 하지요.

그럼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가두고 있었다는 것이 되지요.

그래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법에 가두어져 있었어요.

죄와 사망의 법에 가두어져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해방을 시켜 주어야만 할 처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두 법을 에덴동산의 두 과실과 같아요.

에덴동산에 두 과실이 있었지요.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가 있고 먹으면 죽는 선악과가 있어요.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어요.

 

이게 법이에요.

생명과 속에는 먹으면 반드시 산다는 영생의 법이 있고!

선악과 속에는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망의 법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이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조상인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담 안은 모두가 죽어요.

이게 죄와 사망의 법이에요.

우린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 태어났고 그 법으로 살아가다가 그 법에 의하여 죽어요.

이게 모든 인간들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어서 의와 생명의 법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마치 사망이라는 항아리 속에 있던 우리를 생명이라는 항아리 속으로 옮겨 주신 겁니다.

 

사망이라는 항아리는 아담이고, 생명이라는 항아리는 예수님이에요.

우린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옮겨 주신 것입니다.

이걸 해방이라고 합니다.

 

해방(解放)이란? 외부의 도움으로 풀려 난 것을 말해요.

마치 죽은 나사로처럼 사망의 끈으로 꽁꽁 묶어 놓은 것을 예수님이 풀어 놓아서 다니게 한 것과 같아요.

 

어떻게 해방을 하셨느냐 하면 그 방법이 기상천외합니다.

 

3절입니다.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육신으로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죄를 정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을 보내서 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죄 아래서 났어요.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요.

죄가 우리의 주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지 않아요.

이게 우리 육신의 한계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담당 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 연약하다는 말은 감당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뜻을 감당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가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대신 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죄가 없는 그 아들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우리가 담당해야할 것을 대신 담당케 하셨어요.

예수님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은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고 있어요.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다 담당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질 할 것을 예수님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죽음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죄를 정(定)하게 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죄를 정(定)하셨다” 는 말씀입니다.

 

“죄를 정(定)하셨다” 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 는 뜻이에요.

둘째는 “죄를 없이 해 주셨다” 는 말이에요.

 

“죄를 정(定)한다” 는 말은 “죄를 없애 준다” 는 뜻입니다.

 

어떻게 정(定)하신다고 합니까?예수를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정(定)하신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져서 죄 값을 치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은 우리 육신이 받아야 할 죄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에요.

육신으로 안 와도 되실 분이 육신을 입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걸 자기를 비웠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낮아지심이라고 합니다.

 

왜? 육신을 입고 오셨는가요?

육신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고 와서 우리 대신 죄와 사망에게 값을 치루어 주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심으로서 우리가 죄로부터 받은 부채를 탕감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 값이라는 부채가 탕감을 받은 것이에요.

죄 값이 무엇이라고 했나요?죽음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예수님을 죽이신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또한 죄로부터 정죄함 없이 살게 된 것입니다.

비록 육신으로 죄를 지어도 정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우리 죄를 짊어지게 하셨어요.

즉 “의인에게 너 저기 있는 죄인을 대신 하여서 죄인이 되어서 죽어!”

그랬단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알았습니다! 하고선 죽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예수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으로 보여 주셨어요.

세례 할 때 안수 하지요.

안수는 전가시킴이에요.

 

구약에 보면 제사를 지내지요.

제사를 왜? 지냅니까?

죄 때문이에요.

 

누가 죄를 짓고 제사장에게 양을 끌고 옵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 죄인을 대신하여 그 양을 잡아요.

그 죄인은 양의 대신 죽음으로 인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죄인의 죄를 양에게 전가 시켜서 양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에요.

 

그러니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한 것은 세례요한의 죄를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죄를 뒤집어쓰고 물속에서 죽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은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죄가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성도가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어요.

“정한다” 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엿 볼 수가 있어요.

우리도 이 방식에 따라서 죄사함을 받았어요.

 

알다시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죄는 죽음으로서만 없앨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으라고 보낸 것입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다는 것은 원래는 육신이 아닌데 잠시 잠깐 육신을 입고 보내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요? 죄인들이 담당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해내기(구원)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의 죄를 정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성령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이 모든 것이 믿어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쫓아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육신의 원리가 아닌 영의 원리란 말입니다.

육신의 원리는 우리가 행하는 방법이고!

영에 원리는 예수님이 대신 하셨다는 것을 믿는 방법이에요.

 

육신을 좇는 것은 우리가 율법대로 사는 것을 말해요.

그러나 영을 좇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영의 원리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다고 하지요.

율법이 우리에게 너 죄인이지!

이리 와 죽어!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다 치루었다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걸 영을 좇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율법이 너 왜? 말씀대로 안 살어!

그러면 아이구~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 잘 할게요!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좇는 것이 되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에서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요.

육신을 좇지 말고 영을 좇아 살라고 하니까 자꾸만 육신으로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육신을 좇는 것이지 영을 좇는 것이 아니에요.

착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그건 믿음이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으로 사는 것은 글자 그대로 내가 믿을 분의 행함을 믿는 것이에요.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행함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영의 방법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을 좇는 것이에요.

영을 좇는 것은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신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자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이건 지켜야 할 말씀이에요.

 

예전에는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였어요.

이게 육신을 좇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말씀들을 지키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어요.

이걸 믿는 거에요.

이것을 영을 좇는다고 합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해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주어졌어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언약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옛 언약이 완성이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성도를 참소해요.

그럼 성도는 마귀의 참소를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이겨야 해요.

이게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에요.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기적을 행하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는 것은 육신을 좇는 것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주신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영을 좇는 것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적으로 사는 것이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을 좇도록 간섭을 하세요.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단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말씀 앞에 세워서 우리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고발을 당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영을 좇아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그리스도에게 돌리셔서 죄사함을 주셔셔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늘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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