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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45강. 육신을 쫓는 것과 영을 쫓는 것 (롬 8:1-8)

by coroa 2021. 5. 15.

 

[45강. 육신을 쫓는 것과 영을 쫓는 것 (롬 8:1-8)]

-.정낙원 목사

 

롬 8:1-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육(肉)”과 “영(靈)”에 대한 두 이야기가 나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고!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가 있습니다.

 

육과 영은 상대적입니다.

육신은 죽음이고, 영은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을 하면 생명에 속한 자는 영을 좇아가고,

죽음에 속한 자는 육신을 좇아간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영과 육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말로서 육이다! 영이다! 를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영을 좇는 것과 육을 좇는다고 하였으니 영을 좇는 자는 영으로 사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육을 좇는 자는 육으로 사는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것이 육을 좇는 것이고, 어떤 것이 영을 좇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영과 육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겠지요.

오늘은 영을 좇는 것과 육을 좇는 것이 무엇이며,

영의 생각은 어떤 것이면 육의 생명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이해하고자 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상식이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을 육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영이라고 합니다.

인간 세상을 육이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를 영이라고 해요.

영과 육은 각각의 영역을 말해요.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천지는 서로 상대적 영역에 속한 곳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쉬운 말로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하고 태평양 너머에 있는 나라를 미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아요.

대한민국이 있고 미국이 있듯이 이 세상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어요.

이 세상은 육이라 하고, 하늘나라는 영이라고 해요.

 

대한민국과 미국은 상대적인 나라에요.

이처럼 육과 영도 서로를 드러내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육이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를 영이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주어졌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려 주려고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는 세상은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실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만물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만한 신성이 담겨져 있다고 했어요.

만물은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만물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보이는 만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읽어내야 합니다.

이게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이 세상을 만드신 원래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 창조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해 주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시청각 교제로 만든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나라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요.

 

마치 욥처럼 말이에요.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땅에 원인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하늘에 원인으로 인하여 일어났어요.

한마디로 욥은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간들은 알 턱이 없어요.

그래서 욥이나 그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땅에서 찾고자 했어요.

욥에게서 찾고자 했어요.

욥이나 그 친구들도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늘에서 원인이 된 것인 줄을 꿈에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욥에 친구들이 욥에게 야~! 잘 생각해 보라!

네가 잘못 했으니 이런 벌을 받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고난을 당할 리가 없잖아

이에 욥이 아니야!

난 잘못한 적이 없어!

그러면서 지루하게 논쟁을 합니다.

이 때 엘리후가 나타나서 욥이 당하는 고난은 욥에게 원인이 있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일어난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인생사에서 우리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 역시 욥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갖가지 사건들을 우리의 주변에서 찾고자 합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들도 있어요.

성도에게는 징계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일평생 인생사 속에서는 우리가 원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원인 모를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사를 간섭하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사를 가만히 추억해 보세요.

돌이켜 보면 저와 여러분이 여기까지 등 떠밀려서 온 인생사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았음에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요.

여러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 그렇지 않아요.

 

제가 만약에 제 맘대로 제 인생을 살라고 하였다면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제 꿈이 이런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나를 간섭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끌려간다고 했잖아요.

이게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욥처럼 사건의 원인을 내게서 찾고자 합니다.

 

왜? 그런가요?

모두가 죄가 우리의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욥이나 그의 친구들에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원인을 찾지 못하고 땅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창조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욥이 당하는 고난을 이야기 해 줍니다.

욥은 결국 자신은 자기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만물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만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땅만 바로 보던 눈이 이젠 하늘을 바라보는 눈으로 떠진 것입니다.

자신만 바라보던 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간섭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는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과 같아요.

바울은 그동안 율법 아래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다 하셨다는 것을 보게 되는 눈을 뜬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처럼 이 세상은 이 세상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어요.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어요.

모두가 필연이에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죄가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모르니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게 만들어 버려서 그래요.

죄가 하나님 나라를 잊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소경된 자기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일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 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곧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신 거에요.

지금도 예수님은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에게 하늘이 있다고 알려주는 일을 하고 계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자에게 아니야! 네 인생은 예수님의 것이야!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이걸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해 볼게요.

 

아담과 하와는 원래 에덴동산에서 살았어요.

에덴동산에 살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죄가 그들을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쳐짐을 당하게 하였어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아냈어요.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죄 없는 의인들만이 살아가는 영의 나라에요.

이와 상대적으로 죄인인 아담과 하와가 살아가는 곳은 육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하늘나라와 같고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살아가는 곳은 보이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아담이 범죄하여서 쫓겨난 에덴동산 바깥 세상이에요.

우린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럼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에덴동산을 소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장차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너희를 죄로 인하여 영의 나라에서 육의 나라로 쫓겨나게 한 그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게 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너희들은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가 와서 뱀의 권세를 깨트리고 너희를 에덴동산으로 불러들인다고 약속 하셨어요.

 

그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는 바로 너희의 죄에 수치를 가려줄 흠 없는 희생 제물로 오실 것을 가죽 옷을 통해서 알려 주셨어요.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 주었듯이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도 흠 없는 제물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들의 수치를 가려 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셨어요.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통해서 장차 오실 구원자를 알았어요.

 

그리곤 하나님은 뱀과 함께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바깥세상으로 쫓아냅니다.

영의 나라에서 육의 나라로 쫓아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담이 살아가는 곳을 일컬어 세상이라고 하고 육이라고도 합니다.

우린 지금 육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해 버렸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모두가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육이라고 했으니 육(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육(세상)에서 나온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담 안에서는 의인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죄인만 생산이 되어요.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개에게서 나오는 것을 강아지라고 하듯이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인이에요.

 

죄인이 의인 되는 것은 의인 안에서만 의인이 되어요.

마치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이듯이 의인 안에서 모두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의인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갈 여자의 후손을 기다렸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소망은 오직 하나 여자의 후손의 오심이에요.

그가 와서 자신들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 주는 것입니다.

그가 육(세상)의 나라에서 영(하나님 나라)의 나라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그 날을 기약 하면서 말이에요.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삶에 의미란 오직 하나 자신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자신들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뱀의 머리란? 뱀의 권세를 말해요.

뱀의 권세는 죄를 말해요.

죄가 사망을 몰고 왔어요.

 

뱀은 죄로 인간들을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인간들은 일평생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죽음에 쫓기다 보니까 반발 성향으로 일평생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을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죽음에 문제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날 길을 오직 하나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권세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신앙이란?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오매불망 그 분을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에게 이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도록 당부합니다.

 

너희가 영원히 살아갈 곳은 에덴동산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땅은 잠시 머물다가 가야하는 정거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수한(壽限)이 다 되어서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살아야 했어요.

그런데 마귀가 인간들을 미혹해서 인간들 속에서 에덴동산을 잊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잊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신앙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들은 자연히 보이는 세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땅에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인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납니다.

아브람에게 알려 주십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살아 갈 곳은 보이는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속에는 “두 민족”으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입은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하나님의 선택을 입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언약 백성”이라고 하고 다른 백성을 “비 언약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는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들이 공존하면서 살아갑니다.

성경은 비 언약의 후손들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는 땅에서 하늘나라를 지향(指向)하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땅을 떠나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지향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소식을 전하는 민족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계시(啓示) 민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간섭하십니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계시의 민족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시는가 하면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하늘나라 가치관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 가치관으로서의 삶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뭔가요?

여자의 후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살아가는 의미는 자신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주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땅에서 빼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자신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서 하늘나라로 옮겨 주어야 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애굽은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바로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애굽에서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빼내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는 일을 합니다.

 

모세가 와서 죄와 사망의 권세와 같은 애굽의 바로의 권세로부터 빼냅니다.

어떻게 빼내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서 빼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합니다.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서 죽음으로서 이스라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숨과 어린 양의 목숨을 맞 바꿔치기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생명으로 사는 민족이 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에게는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생겨났습니다.

“피에 민족”입니다.

그들을 살려준 것은 피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케 하려고 “피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피를 잊지 말라고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서 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케 하려고 성막에서 일어나는 제사 제도를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막 중심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날마다 성막에서 아침저녁으로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드려지는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합니다.

 

이를 “상번제”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드려지는 “상번제의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이 살고 있음이 흠 없는 희생 제물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어린 양의 피로 살고 있음이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살게 하는 것이 어린 양의 희생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 내가 사는 것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고 있구나가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어린양의 피로 생겨난 진정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한 성도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걸 신약으로 당겨서 봅시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토설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바울의 이러한 곤고함을 일순간에 날려 버리는 사건을 목격하게 합니다.

 

어떤 사건인가 하면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죄 없는 그 아들을 우리와 동등한 육신으로 보내서 우리가 담당하여야 할 것을 대신 담당케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제사로 인하여 죄사함을 입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의 희생 제사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남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고 찬송을 하게 됩니다.

아!~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셨구나!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을 “영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영의 방법”이란? 우리 인간들이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이란 말이에요.

우리 인간들의 방법은 내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내가 치루어야 해요.

이걸 육에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에 방법이에요.

이걸 영에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방법과 영에 방법은 서로 충돌합니다.

“육의 방법”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인데!

“영의 방법”은 우리가 할 일이 없어요.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십니다.

 

육의 방법에는 내가 할 일이 있어요.

그러나 영의 방법은 내가 할 일이 전혀 없어요.

이게 인간들에게 좋게 들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반대에요.

기분 나빠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영의 방법 속에는 내가 배제되기 때문이에요.

내가 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랑거리와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반갑지가 않은 겁니다.

고마워야 하는데 고맙지가 않아요.

내가 흥이 나지 않아요.

예수님 혼자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 혼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단 말입니다.

나는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박수만 쳐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기분 나쁜 겁니다.

 

죄인에게 있어 제일 기분 나쁜 게 뭔 줄 아세요.

그건 죄인이 어떤 자인가를 알면 해답은 쉽게 찾을 수가 있어요.

죄가 죄인을 만들었잖아요.

그럼 죄를 알아야겠지요.

 

죄가 뭐냐?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7=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사 42: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고 하지요.

여기서 여호와란? 구원자를 말해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왜? 야곱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예수님에 것으로 구속하였다고 합니까?

43장 7절에 보면 “이는 내 영광을 위하여서” 라고 합니다.

영광이란? 빛을 드러내는 것을 말해요.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이에요.

 

내 영광이라고 했지요.

그럼 여기서 내 영광이란? 예수님의 영광이겠지요.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자랑하고 싶은 거에요.

구원이란? 예수님이 하셨어요.

우리에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라는 말이에요.

이걸 “찬송”이라고 해요.

혹은 “입술의 열매”라고도 합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그래서 “찬미의 제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에요.

즉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 한 목적이란 말입니다.

 

구약 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출애굽을 시킨 목적이란 말이에요.

어린 양을 찬양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피를 발라서 출애굽을 시킨 것이에요.

이게 창세전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에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1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먼저 찬송을 하고 시작을 하지요.

이는 창세전 언약 자체가 찬송을 위한 언약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합니다.

어떤 예정인가 하면 그 피로 죄사함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예정이에요.

 

그 피가 누구 피인가요?

그 아들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에요.

 

왜? 이렇게 하신다고 합니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심이라고 하지요.

그 은혜가 무엇인가요?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입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에요.

 

12절을 보면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지요.

 

잘 보세요.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송이 되게 한다고 하지요.

우리에게 있는 그의 영광이 뭡니까?

자기 피로 우리가 죄사함 받은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가 살아난 것을 보고 기뻐하는 거에요.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엄마는 산고(産苦)를 통해서 아이를 낳아요.

그럼 아이를 보면서 산고는 다 잊고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엄마에게 있어 아이는 엄마의 영광 그 자체에요.

아이 속에는 엄마의 수고와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있어 아이는 남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살점이에요.

타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에요.

나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미의 심정인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엄마가 아이를 낳는 출산으로 비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쏟고 교회를 낳은 것은 엄마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에게 있어 성도는 타자가 아니라 자기 몸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이고 찬송 그 자체에요.

 

엄마가 아이를 보고 흐뭇해하듯이 예수님이 교회를 보고 흐뭇해하세요.

성도를 보고 흐뭇해하세요.

어휴! 저 새끼들을 내가 낳았는데! 라고 하면서 기뻐하세요.

그러니 교회는 예수님에게 있어 찬송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래요.

예수님에게 있어 우리는 고슴도치 새끼에요.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에겐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어요.

예수님이 기뻐하는 찬송이란 말이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신앙생활이 뭐냐?

이러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영의 생각이에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이고 평안이라고 하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지요.

 

영의 생각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죄사함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꼬라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신앙이 뭐냐?

내 꼬라지 안 보는 거에요.

예수님만 믿는 거에요.

그럼 불신앙이 뭐겠어요?

내 꼬라지를 보고 신앙이 있네! 없네! 라고 희비하는 겁니다.

이건 예수 안 믿는 거에요.

 

“영의 생각은 내 꼬라지 안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고!”

“육의 생각은 자기 꼬라지를 보고 예수를 안 믿는 것이에요.”

이해가 되나요?

 

사실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럼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미혹 할까요?

자기 꼬라지를 보라고 하겠지요.

어떤 방식으로 자기 꼬라지를 보게 할까요?

이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적 나르시즘”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나르시즘이 뭔가 하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빠져서 황홀해 하는 거에요.

자기 영광에 빠져 있는 거에요.

이걸 자기 사랑이라고 해요.

 

예수님 초림 때 이런 신앙을 누가 가지고 있었나요?

율법주의자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도취되어 있었어요.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이 너무도 기특한 겁니다.

개 같은 이방인이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과 비교하면 자신들은 너무도 고결하고 귀한 겁니다.

 

너무너무 멋진 거에요.

자아도취에 푹 빠져 있었어요.

율법을 하나씩 지킬 때마다 선과 의라는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쌓여 가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어요.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상종한다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아요.

그들과 다름으로 있어야 했어요.

자기들의 행함이 너무도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상종 한다는 것은 마치 까마귀 나는 골에 백로가 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어요.

이방인들과도 상종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않았어요.

자기들이 고결한 인품에 부정이 탄다고 멀리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에라이!~ 이 독사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왜? 이들을 독사새끼라고 하고 지옥으로 가라고 했을까요?

그들 속에 예수님의 영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이잖아요.

어린양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산다는 것이 없었어요.

오로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 자랑만 있었어요.

어린 양의 영광은 없고 자기 영광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뱀 새끼들이 가는 지옥으로 보낸 겁니다.

 

마귀는 신앙을 인간의 행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말씀을 행함 차원으로 이해를 하게 한단 말입니다.

오늘 설교 초두에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였지요.

인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데 목적을 두게 합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신앙이 내가 뭔가 하여야 하는 식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그럼 “무엇을 믿을까” 는 사라지고 “무엇을 할까” 로 치닫게 되어요.

결국 예수를 믿지 않고 자기 행함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에 따라서 신앙이 춤을 추게 되어요.

뭔가 한 것이 있으면 보람을 느끼고 뿌듯한데 죄라도 지으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엄청 신앙이 좋아 보여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은 엄청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거룩하고 인품도 고매하고 점잖은 사람들이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위인전기에 등장할 인물들이었어요.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의 눈에나 그들의 모습이 외식하는 자로 보였지!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어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을 보세요.

얼마나 거룩합니까!?

열심과 정성도 대단하잖아요.

성품이나 인격도 대단하고 흠 잡을 때가 없어요.

 

교회 개혁을 외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잖아요.

한마디로 성자들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들을 일컬어 이 시대 참다운 교회라고 하면서 매스컴에서 추천하고 있어요.

일명 건전한 교회라고 TV에 곧잘 내 보내고 있어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칭찬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러한 신앙이 예수를 죽였어요.

율법주의가 예수를 죽였어요.

인간의 착함이 예수님에 의를 거부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께서 이걸 신앙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불의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신앙을 육신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뭐냐?

인간 쪽에서 의롭고자 하는 것이에요.

새 언약을 안 믿는 거에요.

새 언약을 안 믿으면 옛 언약으로 사는 것 밖에 없어요.

 

신앙엔 중간 지대가 없어요.

새 언약과 옛 언약 두 언약뿐이에요.

예수를 믿든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우리의 육신은 자신의 행함을 포기 하지 않아요.

무엇을 해도 자기 것으로 끌어 당겨서 자기 의를 쌓고자 해요.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자기 공로로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도 마치 자기 것으로 챙겨서 복음 아는 것으로 상좌에 앉고 선생노릇을 하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해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오해 하여서 인간의 행함으로 구분을 해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 고 하는 명령법들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영을 좇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육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고!

“육신에 거하는 자”와 “영에 거하는 자”가 있고!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가 있다고 하지요.

 

잘 보세요.

육신에 거하는 자와, 영에 거하는 자가 있지요.

육신에 거하면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럼 자연히 육신을 좇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영에 거하면 영에 생각을 하게 되고 자연히 영을 좇게 되어 있어요.

 

이건 영역의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의 행함에 문제가 아니고 어느 안에 있느냐의 문제에요.

육 안에 있느냐!

아니면 영 안에 있느냐 에요.

 

그럼 육과 영을 알아야지요.

무엇이 육 안이고 무엇이 영안인가요?

성경은 “아담을 육”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영”이라고 해요.

그러니 “아담 안은 육”이고, “예수 안은 영”이에요.

 

아담 안에 있으면 무조건 육이고 예수 안은 무조건 영이에요.

우리의 조건으로 육이다 영이다 를 따지지 않고 내가 지금 어느 권세 있느냐로 따져요.

즉 누구의 주권 아래 있느냐 에요.

네 주인이 누구냐!

 

아담이 주인이면 육이고, 예수가 주인이면 영이에요.

아담 안은 죄이고, 예수 안은 의에요.

아담 안은 법이 왕 노릇하고, 예수 안은 은혜가 왕 노릇해요.

 

하나님은 우리 개인을 보지 않고 아담과 예수라는 두 대표로 보아요.

아담 안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예수 안은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해요.

아담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죄이고 사망이고,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의이고 생명이에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나요?

너희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의와 생명의 법 아래 있다고 하지요.

너희는 의와 생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너는 이걸 믿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영으로 살고 있는 것이고, 안 믿으면 육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믿는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느냐!

당연히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 입니다.

영의 생각으로 산다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으니 이제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에서 해방 시켜 주었으니 다시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아버지 집에는 종과 아들이 있어요.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에요.

그런데 아들이 어려서 아버지가 종에게 잠시 맡겨서 훈육을 시키라고 하였어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하지요.

 

이건 마치 임금이 왕자가 어려서 신하에게 훈육을 맡긴 것과 같아요.

비록 신하에게 훈육을 받아도 왕자에요.

신하와는 신분이 달라요.

 

이제 왕자가 크게 되면 신하로부터 벗어나서 왕자 본연의 자리인 세자에 책봉을 하게 되어요.

세자가 되면 이제 나라를 경영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왕자처럼 다루고 계세요.

 

때가 찰 때까지 율법 아래 두게 하였다가 때가 차면 은혜 아래로 불러내세요.

이제 그 때가 되어서 하늘에 계시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율법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은혜 아래로 빼내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와 사망에게 종노릇을 했어요.

이렇게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는 것을 육신에 거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 있던 자들을 의와 생명으로 불러냈어요.

 

의와 생명을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아담 안)에 거하는 자를 영(예수 안)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이라는 천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초등학문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살았어요.

지킬 수도 없는 것을 지킨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이라는 천한 초등학문을 도말했어요.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셨단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율법을 지킬 것이 없어요.

율법에게 참소 당할 일이 없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정죄 당하지 않게 되었단 말이에요.

율법에 채무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에 요구를 다 완성 하셨기 때문이에요.

 

이젠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가 없어요.

이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은 확정이 되었고 완료 되었어요.

이러한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을 일컬어 오늘 본문에서는 영을 좇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마귀는 늘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게 미혹을 해요.

 

육신의 생각으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초대교회 안에서 난무 하였어요.

지금도 난무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영(예수 안)에 거하므로”

“영(예수)에 생각으로”

“영(예수)을 좇으며 살라” 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육신의 생각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에요.

이 시대 교회 안에 이런 사고가 팽배해 있어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영에 생각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명령법들을 지키는 것이 영의 생각이고 명령법들을 지키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영적인 삶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육적인 삶이라고 해요.

그래서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에 신앙의 포카스를 맞추고 있는 겁니다.

이건 틀린 거에요.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 앞에 중보자 없이 독자적으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을 만나 주지 않아요.

 

죄인은 하나님을 독자적으로 만날 수가 없어요.

반드시 거룩한 분을 통해서 만나야 해요.

거룩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중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해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지키는 것을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없는 분이 지켜야 해요.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오직 의로우신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창세전 언약을 누구랑 했나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하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셨어요.

언약은 누가 지키는가 하면 아들이 지켜요.

 

그래서 모든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이에요.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희들 이걸 믿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 말씀을 다 지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으로 보내서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이 믿음으로 살아요.

 

이걸 영에 생각이라고 하고 영을 좇는다고 해요.

이 정신으로 살라는 겁니다.

이 정신으로 살게 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으로 산다 영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의 어떤 행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즉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영에 삶이고 악하게 산다고 해서 육에 삶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만이에요.

예수 안에 거하면 의로워요.

왜냐하면! 예수 안이 의에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으로 산다 혹은 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사느냐로 판단해요.

비록 세상적인 관점에서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 하여도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영으로 사는 것이에요.

반대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착하게 살아도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그 사람은 육신으로 사는 거에요.

 

그러므로 영으로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착한 삶을 살고 육신으로 산다고 하여서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고 악하게 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영으로 살면서도 악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고 육신으로 살면서도 착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선하고 착하게 살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고 악하게 살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물론 성도는 착하게 살고자 하는 지향성으로 살아요.

성령이 그 안에서 주님의 소원을 두고서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것이 착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는 “다 착한 사람이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다 착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 착함”은 곧 “인간적인 착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착함과 악함은 다분히 인간들이 정해 놓은 규범으로 판단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정한 착함과 악함은 하나님 앞에서도 착함과 악함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요.

그건 어디까지나 죄인인 인간들이 정한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착함과 악함은 따로 있어요.

하나님의 착함은 예수 믿는 거에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착함이에요.

반대로 예수 안 믿는 것이 악함이에요.

예수 바깥은 악이에요.

 

하나님은 이 기준으로 판단해요.

너 예수 믿어! 안 믿어!

믿으면 착한 자로 인정하고 안 믿으면 악한 자로 판단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성경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속된 말로 윤리 도덕적으로 악하게 산다고 해서 육신으로 사는 나쁜 것이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영으로 사는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는 영으로 사는 것은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해요.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어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 속에는 나의 행함은 조건이 되지 않아요.

나의 착함이나 악함이나 판단 기준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의 착함도 하나님 앞에선 악이고 우리의 악함도 하나님 앞에선 악일뿐이에요.

 

신앙이란 이걸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해요.

나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요.

내게는 의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믿음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면 난 없는 자에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는 식으로의 신앙관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악인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말고 주 예수를 바라보게 하여야 해요.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든 못 살든 나는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를 알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다는 말이지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자들은 이걸 오해해서 막살아도 된다고 하고 있어요.

실제로 어떤 자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참고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은 그냥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것이 아니고 실제를 말해요. 실제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서 삶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해요. 이걸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인한 행함이 없는 것은 관념이고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으로서 가짜에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어디서 듣고 배워서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을 가지고 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말쟁이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성경은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라고 했어요.

무슨 말인가요?

막 살지도 말고 그렇다고 거룩하게 산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자랑치도 말라는 것입니다.

 

막살지 말라고 하니까 그럼 착하게 살면 되겠네 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막 사는 것을 악이라고 하니까 그럼 착하게 산 것을 의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착하게 산 것을 의라고 하는 이것도 불신앙이에요.

나의 어떠함에 의미를 두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란 말입니다.

의는 예수 믿음 속에서만 주어져요.

 

마귀는 이래나 저래나 예수만 안 믿게 하면 대성공이에요.

미혹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마귀는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아요.

물론 성령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쳐요.

 

그러나 마귀와 성령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 꼬라지를 알게 하세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를 못 믿게 하지만 성령을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워서 우리 실존을 알게 하고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예수 앞으로 인도 하세요.

성령은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붙잡게 한단 말입니다.

성령은 말씀 앞에서 우리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여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하지만 성령은 말씀으로 예수님의 피를 드러내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한 쪽은 예수 없이도 자기 의로 살게 하고 다른 한 쪽은 예수 없이는 못산다고 해요.

 

한 쪽은 말씀으로 당당해지고,

다른 한 쪽에서는 말씀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그러니 동일한 말씀 앞에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쪽은 말씀 지킨 것으로 의인으로 치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말씀 앞에서 해부당하여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마귀의 말이 훨씬 논리적으로 맞게 들려요.

그런데 이게 육신의 생각이에요.

인간들에게 그럴싸하게 들리는 그 말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란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이 시대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이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는 것이 마치 영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신앙이 있고 영적으로 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을 좇는 것인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육적으로 산다고 생각하여서 낙심하고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 세상 적으로 나쁜 짓을 하기라도 하면 믿음 없다고 생각하고 교회 오는 것도 포기하고 은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위에 따라서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인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살면 자기 행위를 초월하게 되어요.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꼬라지로 희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제가 지금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여야지요.

이건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성도는 자연적으로 이런 마음이 들게 되어 있어요.

 

자 보세요.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겨요.

그 사랑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고자 하는 성향으로 나타납니다.

이걸 삶에 지향성이라고 해요.

지향성이란? 하나의 본성과 같은 거에요.

마치 뜨거운 기운은 하늘로 올라가고 찬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아요.

 

성도는 성령이 임하면 하늘나라의 산 자가 되어요.

그래서 거듭남을 위로부터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늘나라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난 생명은 위를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여름철 에어컨을 켜면 냉기가 아래로 내려가고 겨울철 히터를 켜면 뜨거운 열기가 위로 올라가듯이 하늘로부터 난 성도도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성향이 생긴단 말입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땅을 지향하게 되듯이 하늘로부터 난 사람도 하늘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하늘로 지향하게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도록 역사를 해요.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하고 “금지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합니다.

 

시편 1편을 봅시다.

 

시 1:1-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자 보세요.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이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율법을 묵상하여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묵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어떤가 하면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복을 받은 사람의 성향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죄인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요.

마치 물가에 심기운 나무의 뿌리가 물 기운을 좇아가서 시절을 쫓아서 과실을 맺게 하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게 하는 것과 같아요.

물가에 심기어진 나무는 뿌리가 본성적으로 물을 찾아서 뻗쳐 나가기 때문에 늘 푸르고 과실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이러하단 말입니다.

마치 나무뿌리가 물 기운을 좇아가듯이 성도도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참 감람나무 되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했어요.

그럼 당연히 참 감람나무 과실을 맺게 되어요.

참 감람나무가 예수라고 했으니 예수의 과실을 맺게 됩니다.

예수의 과실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낸단 말입니다.

 

예수를 자랑한단 말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한단 말입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이들은 의로워지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의로워 진 자”로서 그 의에 합당한 모습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피로서 죄에서 구원해 주심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서 더욱 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고마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은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라고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쉼을 얻게 되어요.

말씀의 무게만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크게 와 닿아요.

 

그러니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구원 된 자로서 말씀을 보니까 자신이 얻은 구원이 더 놀랍고 감격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킴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로워진다고 하니까 의로워지고자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유대교에요.

 

의는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육신으로 사는 것이에요.

영으로 사는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어떤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에요.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그런데 지금은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종교적인 일을 하면 영으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육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 열심과 충성으로 봉사라도 하면 당연히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반면에 세상일에 몰두하여 교회라도 등한시 하면 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 영으로 사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기도 하고, 세상 일에 푹 빠져서 사는 것이 육신으로 사는 것의 한 부분이기도 해요.

단편적인 사고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신앙생활을 우리의 모든 삶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 에요.

 

교회 안이든지 교회 바깥이든지 예수 안에서 새 언약 정신으로 살면 영으로 사는 것이고 옛 언약식으로 살면 육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만 가지고 단편적으로 영으로 산다 혹은 육(肉)으로 산다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옛 언약 방식으로 살면 그게 육의 생각이고 육신을 좇는 것이고 교회 바깥에서도 새 언약 방식으로 살면 그것이 영의 생각이고 영을 좇는 것이에요.

영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 정죄함 없이 감사하며 사는 것이에요.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6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살라고 하지요.

왜?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으라고 합니까?

거기는 예수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지금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는 거에요.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에요.

우리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것이 곧 음란이고 부정이고 사욕이고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바깥이 곧 음란한 것이고 부정한 것이고 사욕을 좇는 것이고 우상 숭배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훨씬 뛰어 넘어 있는 말씀이에요.

예수 안 믿으면 음란이고 부정이고 타락이에요.

반대로 예수 믿으면 그것이 거룩이고 의에요.

 

그런데 마귀는 신앙을 우리의 어떤 행위 차원으로 가두어 버려요.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 행실을 가꾸는 것으로 신앙이 전락하고 말아요.

이게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의 신앙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자기 행실을 늘 뜯어 고치는 것에 두고 있어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아요.

자기가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주는 것이지 우리가 가리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말로 거룩이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행실로 인하여 영이 되고 육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살면 영으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육으로 사는 것이에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으로 사는 것이에요.

여기에 그 어떤 것도 첨가 되어서는 안 되어요.

여기에 다른 것을 첨가하는 것은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과 같아요.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2:1-16=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 ~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面責)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떤 것인가요?

새 언약이지요.

바울은 옛 언약 아래서 율법에 특심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심을 입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새 언약을 증거하였어요.

새 언약이 뭔가요?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에요.

율법에 행위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새 언약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에요.

즉 인간의 행위를 붙잡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를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유대교에서 나온 거짓 선생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복음인가 하면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되고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진다는 사상이에요.

예수 믿음에다 인간의 행함을 섞어 버린 겁니다.

“믿음 + 율법 지킴 = 온전한 믿음”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경고하는 겁니다.

그 누구라도 이러한 사상을 전하는 자는 그 놈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도 십자가 복음에서 이탈하면 저주의 대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예루살렘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어떤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들이 율법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 믿는 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에요.

바울이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가 바울의 일행을 자기들 수하에 두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 한 겁니다.

 

이건 마치 목사들이 성도들을 신앙적 행위로 신앙의 우열을 만들어서 서열화 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에 바울이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베드로도 하고 있었어요.

베드로가 율법주의자들의 눈을 의식하여서 신앙적인 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이방인과 안 어울리는 것처럼 행사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자가 어떻게 신앙을 인간의 행위에 두려고 하느냐!

우리가 언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느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당신은 복음을 아는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율법적 규례 지킴으로 자신의 신앙 있음을 드러내려는 반 복음적인 행동을 하느냐!

그건 외식하는 것이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으로 이방인과 식사하고 교제를 하였어요.

그런데 어떤 유대교인들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얼른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어요.

이는 율법에 유대인은 이방인은 부정하니까 그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베드로가 지금 그 율법의 규례를 의식하고 행동한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이 보았어요.

바울은 이걸 타협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도를 전하는 자가 십자가 도에 반하는 행동을 하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건 외식 신앙이라는 거에요.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을 의식하고 살았다는 증거에요.

아직도 율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본산이에요.

 

성전이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절대 대다수 유대인들이 율법신앙을 고수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도 그들의 눈을 의식하여서 외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율법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럼에도 율법의 규례를 지킨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었어요.

바울은 베드로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도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도 베드로의 이런 신앙에 유혹이 되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행동 하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주의 음성으로 받아 들였어요.

복음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죄사함이 주어지고 그 피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그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면 그것이 곧 다른 복음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이걸 다른 복음이라고 하고 타락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이러한 신앙으로 팽배 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베드로가 영에 생각을 하지 않고 육에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로잡아 준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외식 할 수가 있어요.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성화주의 사고로 살 수가 있어요.

이는 우리 몸이 성화주의 신앙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성화주의 신앙이 훨씬 매력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성화주의 신앙은 인간의 열심을 의로 인정을 해 주기 때문이에요.

이게 인간들에겐 매력인 겁니다.

 

성화주의 속에는 인간의 자랑거리들이 있어요.

자기 잘남과 뿌듯함과 칭찬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열심을 내고 착하게 살아 보세요.

당장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듣잖아요.

그리고 남 앞에서도 발언권이 생기고 교회 안에서 상좌에 앉고 선생 노릇을 할 수가 있잖아요.

 

우리 몸은 법으로 단련이 되어 있어요.

본능적으로 법에 지시를 따르고자 하는 관성의 법칙이 있어요.

법은 법을 지킨 자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어긴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에요.

즉 성화하는 자에게는 칭찬이 주어지고 성화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책망이 주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남에게 인정을 받고자 성화주의 신앙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이걸 좋아해요.

성화론을 가르쳐야 목사가 교인들 위에서 군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신앙을 갈라디안 식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신앙으로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종교적인 열심이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 목사가 최고로 신앙이 좋게 되어 있어요.

성경적 지식이 풍부하지요.

기도 많이 하고 성자처럼 살지요.

거기다가 맨 날 교회에서 살잖아요.

교회에서 세속과 담을 쌓은 것처럼 거룩한 폼을 잡고 살잖아요.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을 번다고 세상 방식으로 사는데 목사는 교회 안에서 세속과 담을 쌓고 사는 것처럼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종교적 열심을 신앙으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 입장에서는 목사는 천사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목사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되어 있어요.

목사의 말이 하나님 말씀처럼 들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목사를 추종하게 되고 떠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목사처럼 대접을 받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교적인 열심과 충성으로 신앙 있음을 드러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적인 신앙적 열심이 교회 안에서 힘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 힘이 곧 자기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을 위하여 성화가 하나의 틀이 되어서 성화주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성화와 성화주의는 달라요.

 

성화란? 성도가 거룩하게 사는 것을 말해요.

성경에는 성화라는 말이 없는데 굳이 말하자고 한다면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말해요.

새 언약 안에서 변화된 삶이란? 예수 안에서 사는 거에요.

우리의 의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의로 사는 거에요.

굳이 우리의 삶으로 말을 한다고 하면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나라 가치로 사는 것이에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건 좋은 신앙이에요.

저도 이 신앙을 권면합니다.

성도로서 마땅한 삶이에요.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서의 삶에 자세에요.

이러한 자세로서의 삶을 성화라고 한다면 구태여 반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화주의는 반대해요.

“주의”라는 말은 그것이 의가 된다는 말이에요.

“주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주인 주” 자에 “옳을 의”자를 써요.

해석하면 “주인이 옳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뭔가요?

앞에 나오는 말이에요.

주의 앞에 나오는 주어가 뭔가요?

성화 라는 말이잖아요.

그럼 성화가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주의가 되면 성화라는 주인이 말하는 옳음(의)이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성화가 곧 옳음이 되고 그 옳음이 곧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런데 성화주의는 성화도 의롭다고 한단 말이에요.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성화된 의가 예수님의 의를 가리는 것이 되고 말아요.


두 의는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의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의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성화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성화주의가 되면 성화가 곧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범대로 살면 의로운 것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신앙 좋음 또는 신앙 있음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영적으로 산다고 한단 말입니다.

결국 자기의 행함이 영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마귀의 미혹이고 악이에요.

 

영적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아요.

우리의 종교적인 행함을 가지고 영적이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영적이라 함은 나는 죄인이고 이러한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안에서 용서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영적을 인간의 행함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고 착하게 살면 영적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육적으로 산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그 따위로 살아서 되겠느냐”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 따위” 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우리의 행동을 말하잖아요.

그럼 목사가 그 따위로 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은 자기 행동 뜯어고치기에 바빠요.

신앙을 자기 행실 뜯어 고치는 것으로 전락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앙이 아니란 말이에요.

신앙은 예수 믿기이지 자기 행동 뜯어 고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발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저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교회에 열심을 내고 충성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저 역시도 성도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권면해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하지는 않아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삶에 지향성이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요하여서 만들어 내는 신앙은 아니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권면이지 주의 명령이 아니란 말입니다.

“권면”과 “명령”은 달라요.

권면은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여지가 있지만 명령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요.

명령은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지만 하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성도로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착하게 사세요” 라는 것은 권면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 의로 사십시오” 는 명령이에요.

주의 명령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느냐 입니다.

믿으면 신자이고 안 믿으면 불신자에요.

여기에 토를 달면 안 되어요.

 

이러면 성화주의자들이 예수도 믿고 착하게 살면 좋잖아요! 라고 말을 해요.

맞아요.

착하게 살면 좋지요.

그러나 착하게 사는 것을 의로 내어 놓지는 말란 말입니다.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에요.

 

의가 안 되는 것을 신앙이라고 내어 놓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가 내어 놓을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의에요.

그것 하나뿐이에요.

그 어떤 것도 내어 놓아서는 안 되어요.

 

심지어 내가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내어 놓으면 안 되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는 것이지 내가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는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신 그 믿음뿐이에요.

우린 그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이고 이런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영으로 사는 것이고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주의는 육으로 사는 것이지 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성화주의는 육신의 생각이지 영의 생각이 아니에요.

그러니 성화와 성화주의는 분별을 하세요.

성화는 하시되 성화주의가 되지 마세요.

제발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다른 문제에요.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여야 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해 보면 결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도리어 반대로 자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요.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그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내 의를 쌓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내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알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 알게 될 것입니다.

아! 내가 이런 죄인이구나! 를 알게 되고 말씀 앞에서 긍휼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어요.

 

우리 육신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무능함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된단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 말씀이 성도에게 하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지만 늘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발당할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의 은혜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확실성에 더욱 더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에 더욱 더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어요.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접근하는 자세가 달라요.

지켜서 의로워지고자 함이 아니고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요.

 

이렇게 사는 것이 “영에 거하는 것이고”

“영의 생각이고”

“영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부디 이 영(예수) 안에서 영에 생각으로 영(예수)을 좇으며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생명의 성령의 새로운 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영의 생각을 주어서 그 영을 좇아 살아가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오로지 성령 안에서 영의 생각을 품게 하시고 그 영을 좇아가도록 간섭하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그 은혜만 자랑하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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