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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13강. 잃어버린 님을 찾아서 (아가 3:1-5)

by coroa 2021. 4. 6.

 

♣ -.13강. 잃어버린 님을 찾아서 (아가 3:1-5).-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솔로몬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이 낫듯이 우리도 술람미와 같이 예수님을 향한 상사병이 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부

 

오늘은 할 말이 조금 많아서 1-2부로 나누어서 합시다.

그러지 않아도 길다고 하는데 더 길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설교하는 기준은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신 것 같이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서 미주알고주알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한편의 설교를 들어도 그 설교로 인하여 복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전 설교 시간에 하였던 이야기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것도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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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 해본 경험이 있지요?

 

사랑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어요.

이런 본능이 사랑을 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기 짝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짝짓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어요.

아담 속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냈어요.

 

이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남자이고 우리는 여자에요.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에서 나온 신부를 찾으러 오셨어요.

예수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허전해서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 신부 찾으러 다니세요.

 

갈릴리 바닷가로 가서 베드로를 찾듯이 찾으세요.

우리는 다행히 찾김을 받았어요.

이렇게 예수님에게 찾김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건져낸다는 말이에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듯이 외부에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바깥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끌려 나와요.

 

우리 스스로 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주로 오신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선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잃어버려진 양처럼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되어요.

그러면 참 목자이산 예수님이 다 하세요.

 

구원과 사랑은 동의어에요.

구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용하여 봅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사랑해요.

그러나 하늘에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예수님만 할 수가 있어요.

우린 못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세요.

우리는 에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면 되어요.

‘고맙습니다’ 라고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하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어요.

우리가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어요.

구원도 사랑도 하나님이 주체세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했지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술람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몬에 의하여 사랑 받고 있어요.

그러니 술람미의 솔로몬을 사랄하는 것은 술람미의 것이 아니고 솔로몬의 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에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불가능해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하지 않아요.

주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고서도 그 사랑을 자기가 하였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셔서 한 것이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노아 시대에 있었어요.

 

창 9:20-27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을 잤어요.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얼레리 꼴레리 라고 흉을 보았어요.

그런데 셈은 담요를 가지고 덮어줍니다.

함과 셈의 행동은 극과 극이에요.

 

노아가 잠을 깨고 보니 하체가 벌거벗긴 채 자고 있었음을 압니다.

그런데 담요가 덮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덮었느냐고 물으니 셈과 야벳이 덮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노아가 셈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셈이 아비의 수치를 가리게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에요.

 

우리 인간은 남의 수치를 가려줄 그런 위인이 못 되어요.

함처럼 까발리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데 셈은 인간의 본성과 다르게 행동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셈을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셈을 간섭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굴 용서한다고 하면 그 용서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을 대접하거나, 섬기거나, 봉사하고, 충성하는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죄인이 뱉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그러니 충성하고 봉사하고 대접하고 섬긴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능력으로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신앙생활에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고, 헌금을 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모든 것을 여러분들의 자랑거리로 두지 않고 그런 일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연보를 하여도 하나님이 성도님에게 연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질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알고 드리면서도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되면 그 어떤 것도 드릴 수가 없어요.

자기 것이라고 생각 되면 생색을 내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살아가는 빚진 자들이에요.

 

흔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 또한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빚진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는데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사랑의 근원을 찾아 가도록 되어 있어요.

 

이를 술람미를 통하여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먼저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받은 사랑이 술람미로 하여금 솔로몬을 찾도록 만든 것입니다.

 

솔로몬이 준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술람미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주었어요.

이게 참으로 중요해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준 사랑이 일방적인 것이었듯이 예수님도 성도에게 준 사랑도 일방적인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가는 곳이에요.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불러야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사랑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사랑하면 꼼짝없이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철저하게 하나님 쪽에서 결정해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믿어지는 성도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고 횡재인줄 몰라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몰라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취소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랑이 조건부적이고 쌍무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서 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는 그 사랑은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 유익을 따라서 조석으로 변해요.

인간들의 사랑은 카멜레온처럼 순간순간 변해요.

 

실제로 인간들의 사랑이 그렇잖아요.

금방 자기 없이는 못살아 그러다가도 뭔가 심사가 뒤 틀리면 헤어지자고 하잖아요.

왜 좋다고 결혼을 하고선 얼마 못가서 이혼을 합니까?

 

왜 이혼을 합니까?

자기에게 잘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신은 상대방에게 잘 해 주었을까요?

아니에요.

그 사람도 상대방에게 잘 해주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부부간에 다툼은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들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부부간에 한 이불 속에 잠을 자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요.

동상이몽이에요.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해요.

드라마는 그 시대 사회상을 대변해 주고 있어요.

이 시대 막장 드라마가 인기가 좋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의 생각이 막장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유동적인 것입니다.

쌍방 간에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요.

이기주의 아닌 인간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린 모두가 죄인이므로 죄가 우리를 자기중심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사는 것도 서로가 타협하고 절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저도 35년 동안 아내와 살고 있지만 수많은 타협과 절충 속에서 살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서로 밀고 당기면서 사는 게 부부에요.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아요.

다 계산하고 살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에요.

변하지 않고 고정이 되어 있어요.

그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아요.

 

야곱아 넌 내 것이다! 라고 하면 변함이 없어요.

하나님이 찍어 놓고선 실패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그러니 홍수 속에서도 건짐 받고 불 속에서도 건짐 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존심 때문에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꼬라지가 이래도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려 있어요.

그러니 자기 꼬라지 보고 한탄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우리가 싫다고 도망가고 돌아서도 예수님은 돌아서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조건과 상관없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 세계에는 없는 사랑을 주셨어요.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을 주셨어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주셨어요.

우리 조건으로 취소되지 않는 사랑을 주셨어요.

 

예수님은 우리가 싫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해요.

우리가 예수님이 싫다고 도망을 쳐도 끝까지 찾아가서 사랑을 해 주세요.

우리가 헤어지자고 해도 싫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놓고 중간에 포기하면 하나님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것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분이세요.

하나님께서 사랑했으면 그 사랑을 끝까지 찾아 가세요.

 

저는 이걸 깨닫고 얼마나 위로를 받고 기뻤는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이 내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붙잡고 있지 내가 하나님 손을 붙잡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제 구원은 내 조건에 의하여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되지 않아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성품이 일구이언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므로 식언치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옥에 보내진 않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살게 하세요.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달달 볶아 대는 것입니다.

그게 광야 40년 생활이에요.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지옥 생활을 하게 하시고는 가나안이라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이 넌 내꺼! 라고 찍었잖아요.

그러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달 볶아 대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선택했고 하나님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우리)의 뜻대로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자존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포기 할 수 없는 것도 왕의 자존심을 걸고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술람미 속에는 솔로몬의 자존심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사랑은 술람미가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솔로몬이 지켜주는 것입니다.

 

술람미를 우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우리 사랑도 예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지켜주세요.

 

이걸 아셔야 해요.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간파하셔야 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포기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에요.

 

사랑은 믿음이라는 접시 위에 담겨져 있어요.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믿게 하는 믿음도 함께 주어져요.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접시에 사랑을 담아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특징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정의 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나요.

그럼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세요.

내가 잘못하면 버려지면 어쩔까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주는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했어요.

죄인인줄 알고 사랑했다는 말이에요.

죄인인줄 알고 사랑했다는 것은 죄인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데 왜 우리가 우리에게 실망 합니까?

왜 자기 행함으로 자학하고 죽는다고 합니까?

 

나~ 죄 지어서 교회 안가!

난~ 하나님 앞에 미안해서 교회 못가!

죄 지었다고 한강 다리에 올라가서 자살한다고 지랄 떨지 마세요.

 

우린 하나님 앞에 미안한 마음을 가질 만큼 그리 괜찮은 인간들이 아니에요.

악당들이에요.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죄인이라구요.

 

복음은 인간을 철저히 부정해요.

 

복음 속에는 인간을 긍정해 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을 긍정해 주는 것은 다른 복음이에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못 들게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유구무언(有口無言) 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목사는 저주 받는다고 했어요.

교회에 여러분들이 긍정 받고자 오지 마세요.

오늘도 내 안에 감추인 죄를 끄집어냄을 당하자는 마음으로 오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를 입자고 오세요.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아요.

죄인 주제에 무슨 놈에 자존심이 있어요.

제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난 미안해서 하나님 못 만나!

난 이 모습으로 교회 갈 수 없어! 라고 꼴 깞 떨지 마세요.

 

죄인이니까 더 악착같이 나와야지요.

와서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해야지요.

그래야 죄인다운 것 아닌가요.

죄인이면 죄인다워야지 의인 행세하고자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뭘 죄 지었다고 안 오길 안와요.

아주 웃겨요.

 

죄인 주제에 뭘 죄 안 지어요.

안 짖기를!

인간 자체가 죄인인데!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고 바깥에 돌아다녀도 죄인이에요.

잠을 자도 죄이고 도적질해도 죄에요.

죄인에겐 죄 아닌 게 없어요.

그러니 그냥 난 죄인입니다! 하고 사세요.

이런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산다고 감사하고 사세요.

그게 가장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성막에 보면 뜰에 물을 받아 놓은 큰 물두멍이 있어요.

여기엔 항상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이는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으라고 항상 비치해 두었어요.

살면서 더러워 질 것을 미리 알고 손발에 묻은 더러움을 씻으라는 준비해 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죄를 못 이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 짓지 말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 행함으로 의로워진다고 했나요.

없어요.

자기 행함으로 나오면 저주 받는다고 했어요.

 

행함으로 의로워지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하잖아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잖아요.

죄를 못 이기기 때문에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죄를 짓고 살아도 예수 믿으세요.

 

뭐 이런 뻔뻔함이 있느냐고 비웃고 싶습니까?

어떻게 양심도 없느냐고 욕하고 싶습니까?

우린 하나님 앞에선 뻔뻔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양심도 없어야 해요.

그게 믿음이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양심도 지키고 겸손하세요.

세상에서는 세상이 금지하는 일들은 하지 말고 사세요.

세상이 금지하는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요.

그러니 세상에서는 양심을 지키고 사세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지 마세요.

자신을 속이거나 감추지 마세요.

발가벗으세요.

있는 그대로를 보이세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 하세요.

비관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이런 죄인이라는 것을 알란 말입니다.

당당하란 말이 아니고!

우리 실존이 이렇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제발 왜 예수가 죽었는지!

하나님이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지!

왜 우리 죄가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되는지 좀 알라고요.

하나님이 왜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구원 했는지를 아시라구요. 좀!

 

아까 TV를 보는데 어떤 스님이 나와서 노래를 불러요.

제목이 멍텅구리에요.

하도 재미있어서 들어보니 가사가 압권이에요.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천년 살 것을 고민한데요.

그래서 멍텅구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학식이 있는 척 하는 멍텅구리래요.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멍텅구리에요.

죄인이 성화한다고 깝죽대니 멍텅구리이지요.

 

제발 하나님이 왜 인간과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 하고만 상대를 하시는지를 아세요.

내가 이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 난 상대하지 않는구나 를 아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길 가다가 강아지가 전봇대에다 다리 들고 오줌을 싼다고 갈굽니까.

야! 임마~

넌 왜 아무데서나 오줌 싸!

그러지 않잖아요.

강아지를 갈구어서 무엇합니까?

똑같이 개가 되고 싶으세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강아지에요.

아무데서나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죄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에요.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죄가 풀풀 드러나요.

우리 속엔 죄가 가득 채워져 있어요.

누르면 죄가 줄줄 나와요.

죄인이라서 그래요.

 

우리가 죄 짓는다고 하나님이 갈구지 않아요.

아니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을 갈구어서 뭐하게요.

그런 놈인 줄 알고 예수님을 보내주셨잖아요.

 

하나님은 예수 안 믿는다고 갈궈요.

너~ 왜 예수 안 믿는데!

너~ 왜 내 아들의 피로 용서 받는다는 것을 안 믿는데 라고 갈궈요.

 

신앙이란? 이런 죄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인간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자기를 믿지 않는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하고 ‘주여 도와주소서!’ 그러는 것입니다.

 

성화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임을 깊이깊이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더 파고드는 거예요.

‘주여! 날 내치지 말아 주세요!’ 라고 주님 품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발 나아지려고 하지 말고 난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는 것을 알아 가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세요.

‘야~!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를 아세요.

 

제일 꼴불견이 죄인인 주제에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슨 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착한 것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의 종이라고요.

죄가 우리 몸의 주인이에요.

 

갓난아이들이 신경질 내는 것도 죄 때문이에요.

미워하는 것도 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욕을 하는 것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린 꼼짝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움이 먼저 나오는데 어떡합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이미 몸뚱아리는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데 어떡해요.

아무리 하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리 마음은 온통 먹고 마시고 입을 근심걱정으로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해요.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라는 말씀을 알겠는데,

맡기려고 하면 이미 염려가 어서 와라 그러고 있는데 어찌 하란 말입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앞서는데 어찌 합니까?

 

나도 염려 안하고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나도 폼 나게 용서하고!

원수가 주리면 펑펑 대접하고 싶어요.

그런데 원수를 보면 내 생각보다 앞서서 때려죽이고 싶은 미움이 먼저 생기는데 어찌합니까.

차 운전하고 가다가 앞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에이! 저 시방새! 하고 욕부터 먼저 튀어 나오고 주여! 그러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 놈들은 내가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안방마님처럼 떡하니 이미 우리 안을 차지하고 있어요.

누군 죄 짓고 싶어서 죄를 짓습니까?

죄가 죄를 짓게 하고 있는 걸 어찌하란 말입니까?

 

우리도 잘하고 싶어요.

진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싶다고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칭찬 받고 싶다고요.

 

하나님~ 보세요.

나 이런 놈입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요.

하지만 말이죠.

안 되는 걸 어찌합니까?

 

각오하는 것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달라요.

각오한다고 다 그렇게 살아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무리 각오를 해도 그렇게 안 되니 문제이지요.

 

여러분의 자녀들도 다 공부 잘하고 싶어요.

학교에서 일등하고 싶어 해요.

아니 전국에서 일등하고 싶어 해요.

 

전국에서 일등을 하고 엄마 나 난 일등 했어!

나 100점 받았어! 하면서 깡총 깡총 뛰어와 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뻐기고 싶어 해요.

일등해서 엄마 아버지 위신을 한껏 세워 드리고 싶어 해요.

여러분들이 일등을 바라는 마음보다 자식들이 일등하고픈 마음이 더 간절해요.

 

그런데 말이죠.

머리가 안 따라 주는데 어찌합니까?

여러분들의 머리를 닮아서 공부가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아이들도 공부가 안 되어서 죽고 싶어요.

그래서 공부시간만 되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아이쿠~ 이 돌 대가리아! 하면서 머리만 콱콱 쥐어박는 것입니다.

 

그 머리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다 여러분께 물려받아서 그런 걸!

부모 잘못 만나서 머리가 나쁜걸 아이가 그래도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티 내지 않고 앞으로 공부 잘 할게요!

그런다구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공부하기 싫은 것은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부모님에 자식 시절 때 다 경험하고 살았잖아요.

우리도 그때 지독히도 공부하지 않았잖아요.

말을 지독히도 안 들었잖아요.

그땐 잔소리하는 부모가 그렇게 싫어서 난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내 아이에겐 안 그럴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 했잖아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자식 낳아 키워보니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식들에게 분풀이라도 하듯이 하고 있잖아요.

 

제가 지난번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학원 차 운전을 한 적이 있어요.

유치부와 초등학생들이었어요.

그 때 7살짜리 조봉기라는 아이가 있어요.

이 녀석이 한번은 차에 타면서 “야~ 세상 살기 힘들다” 그래요.

“아저씨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말이에요.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7살짜리가 무슨 한(恨)이 그렇게 많이 쌓여서 살기 싫다고 합니까.

이런 말은 제가 해야지 7살짜리 아이가 할 말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봉기야 왜 그러는데!

누가 우리 봉기 화나게 했어!

그러니 학원을 7개를 다니느라 놀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요.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가 눈만 뜨면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니 어디 살만 하겠어요.

그러니 한숨을 내쉬면서 “야~ 왜? 이렇게 세상이 살기 힘드냐!” 고 저에게 푸념하지요.

이젠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인생사를 가르치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7살만 되면 인생을 논해요.

참 기가 막히지요.

 

봉기 엄마도 봉기만 할 때는 공부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자기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줄거야 라고 다짐했어요.

우린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컸어요.

그런데 막상 자식 낳고 키워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는 몇 곱절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 안 그럴 거야! 라고 했지만 그렇게 안 되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죄인이구요.

 

우리가 죄 앞에서 그래요.

늘 안 그런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지만 한 번도 그 다짐대로 살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죄가 소 고삐 끌듯이 우리를 끌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끌고 다니니 우린 늘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더러 죄짓지 말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걸 아시기 때문에 예수 믿으라고 하잖아요.

예수를 믿게 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죄 지었다고 교회에 안 옵니까?

 

제발 부탁 건데 죄 문제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생각하고 셈할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하고 궁구해도 해결이 안 되어요.

 

그러니 죄 문제는 그냥 예수님에게 맡기고 노세요.

그냥 죄 가운데서 사세요.

죄를 이기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악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겁이 나요.

야~ 저 사람 저러다 열 받아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꼭 머리 회전이 더딘 사람들이 그럼 죄 짓고 살란 말입니까? 라고 덤벼요.

아니 죄인이 어찌 죄를 안 짓고 산단 말입니까?

인간 자체가 죄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밥 먹고 똥 싸는 것과 똑 같아요.

어떻게 나오는 똥을 막을 수 가 있나요.

싸야지요.

똥을 참지 마세요.

 

똥 이야기 하니 더럽습니까?

우리 속에는 똥보다 더 더러운 죄성들이 들어가 있어요.

하나님이 똥을 싸면서 ‘너희들은 이런 냄새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이런 똥같이 더러운 것이 들어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경은 최선을 다했느냐 안 했느냐를 묻지 않아요.

큰 죄 작은 죄를 따지지 않아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아요.

다만 이러나 저러나 너희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죄인에게서 죄 아닌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미친놈입니다.

우린 테레사 수녀같이 살아도 죄인이고, 강도짓 하고 살아도 죄인이에요.

천국엔 예수 믿는 자가 가요.

테레사 수녀가 친국에 가고, 강도가 지옥에 가는게 아니에요.

예수 안 믿으면 테레사 수녀도 지옥에 가고, 강도도 지옥에 가요.

반대로 예수 믿으면 테레사 수녀도 천국에 가고, 강도도 천국에 가요.

천국에 문지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보아요.

 

극장이 가면 문을 지키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이 누구를 출입시킵니까?

 

키가 큰지 작은지를 봅니까.

아니면 몸무게를 봅니까.

얼굴 잘생긴 것을 봅니까.

어느 학교 출신인 걸 묻습니까.

어느 회사 다니느냐고 묻습니까.

당신 연봉이 얼마냐고 묻습니까.

교회 다니느냐,

절에 다니느냐를 묻습니까.

안 묻지요.

그냥 표만 보아요.

표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만 구분을 한다구요.

 

천국의 문지기들은 우리가 들고 온 표를 보아요.

우리 손에 들려진 예수님의 피를 보신다구요.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 묻지 않아요.

예수의 피 내놔!

그래요.

있으면 들어가서 편히 쉬세요!

그런다구요.

 

자기 백성들에겐 예수님 피를 주었어요.

예수님 피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아요.

자기 행함이 아니고 예수 믿음을 내어 놓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피만 요구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줄 알아요.

그러므로 죄 지어도 교회 와서 아버지 또 왔습니다.

그러시라고요.

제발 꼴값을 떨지 마세요.

죄인이 죄 지었다고 자책하는 꼬락서니는 교만이에요.

무슨 말인지 말 뜻을 좀 알아들으세요.

 

솔로몬이 술람미가 검둥인 줄 알고 사랑했어요.

그러니 검둥이를 흰둥이 만들려고 피부 이식하려고 성형수술 하지 마세요.

그냥 검둥이로 살면서 이런 검둥이를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라고요.

고마워하라고 검둥이를 사랑해 주었잖아요.

그러니 피부 이식하려고 하지 말고 고마워하세요.

 

어이쿠~ 우리 신랑은 취향이 참 독특하셔!

날 사랑해 줘서 땡큐! 그러시라구요!

까만 피부가 좋아서 사랑했는데 흰둥이로 만들면 우짭니까?

농담으로 솔로몬은 흰둥이 알러지가 있어요.

 

예수님은 의인 알러지가 있어요.

의인만 보면 구토해요.

예수님은 죄인만 받아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사랑한 것은 죄인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에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 있게 하세요.

하나님의 용서가 남아 있게 하세요.

 

용서받음을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용서 받음을 감추려는 것이 죄에요.

그냥 죄인답게 사세요.

죄인답게 살면서 이런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는구나! 하고 감사 하세요.

 

탕자가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고 살아야지,

아버지 열심히 해서 빚을 갚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 준 것은 빚을 받아 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자식 속에 아버지의 용서를 담아 놓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놈은 아버지의 용서를 없애려고 해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라고 합니다.

은혜를 법으로 바꾸라고 해요.

당당하게 서는 것은 법이에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독자적인 의(義)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된 의인을 싫어해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이 되고자 했어요.

스스로 의인이 되어 보세요.

하나님 앞에 모가지를 빳빳이 세우고 교만을 떨지요.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한데 시시비비를 따진다고 당돌하게 덤벼요.

맏아들이 아버지 앞에 고개를 쳐든 것이 아버지 명(命)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지켰다는 자기 의가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아버지 명(命)을 어기지 않고 지킨 것이 힘으로 작용하여서 아버지에게 덤비는 것입니다.

 

이건 꼭 잘난 놈들이 부모에게 덤비는 것과 같아요.

잘난 것을 가지고 부모와 셈을 하고자 해요.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잘난 새끼들이 부모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을 원하지 않았어요.

창세전 언약이 그래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아들에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인간을 만든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의를 뒤집어쓰고 오는 인간을 원했어요.

 

이게 언약이에요.

언약을 알면 하나님 말씀대로 삽시다! 가 나오지 않아요.

예수 믿으세요! 가 나온다구요.

 

언약을 모르면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요.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면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세요! 라고 해요.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의 법 아래 있으니 양심이 말씀대로 살아서 선해 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켜도 선이 아닌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의인을 원치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입은 의인을 원해요.

하나님 앞에서 독자적인 의를 내세우는 것은 저주의 대상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부류였어요.

율법을 지켰다는 것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경지에까지 이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더러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보여 보라는 뜻입니다.

우하나님은 자기가 준 사랑을 다시 회수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랑 받은 사람 누구냐!

내 사랑 받은 사람 앞으로 나와!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回歸)하듯이 사랑을 주신 분에게로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의 원천을 찾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가 바로 아가서의 술람미의 사랑이야기에요.

이건 커피 한잔 마시고 잠시 후 2부에서 봅시다.

 

 

2부

 

오늘 본문은 잃어버린 님을 찾아다니는 내용입니다.

 

아 3:1-2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술람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솔로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꿈이든 생시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님을 찾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꿈을 꿀 수가 있다면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은 우리의 능력으로 제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꿈은 잠재의식의 발현이라고 합니다.

이 학설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술람미의 꿈을 보면 일가견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술람미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노예이고 솔로몬은 왕입니다.

노예와 왕은 신분적으로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이는 하나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술람미와 솔로몬이 사랑을 합니다.

 

왕과 노예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상식을 가진 자들의 방해가 심하였습니다.

어떻게 왕이 노예와 사랑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방해를 한 것입니다.

 

그 방해꾼들을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 여우를 잡지 않으면 사랑의 포도원이 훼파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하는 데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육적 조건으로 보면 술람미는 도무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자기 자신을 보아도 그래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예루살렘 여자들과 비교하면 술람미는 아무 것도 없어요.

여자로서의 매력은 하나도 없어요.

자기가 솔로몬이라고 해도 아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술람미에게는 세상적 가치로 보았을 때 솔로몬으로부터 사랑 받을 조건이 없었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이 긍휼히 여겨서 사랑을 준 것입니다.

술람미가 받은 사랑은 오로지 솔로몬의 긍휼이에요.

솔로몬이 불쌍히 여겨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술람미는 자기의 조건으로 솔로몬의 사랑을 지켜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자신이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오로지 솔로몬의 일방적인 사랑이고 약속이에요.

솔로몬이 날 사랑한다고 했어! 라는 약속뿐이에요.

이 약속이 자기 안에서 믿어질 때만이 안심 할 수가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하고자 앞서 1부에서 죄인이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제발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라는 놈이 자꾸만 우리 행함을 가지고 참소를 해요.

마치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의 외모를 가지고 참소하듯이 말이에요.

이걸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이 왜 술람미를 사랑했는지 몰라요.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매력이 술람미에게 있는 줄 알고 찾고 또 찾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고 찾아도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 받을 구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훨씬 나아요.

그래서 술람미를 인신공격합니다.

검둥이 주제에 어딜 왕을 넘보느냐고 힐난 합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어디 왕을 사랑한다고 덤비느냐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가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힐난하는 것과 같아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으니 곁에 있던 바리새인이 그 여인을 보고 어딜 감히 죄인 주제에 예수님 발을 만지느냐고 책망을 한 것과 같아요.

 

지금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검둥이 노예 주제에 왕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느냐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술람미도 마음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비천한 노예가 왕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술람미의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격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공격을 하니까 더욱더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님이여~ 빨리 돌아와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자이고,

당신은 나의 남자이니까!

베데르 산에 뛰 노는 노루 사슴처럼 껑충 껑충 달려와서 자기를 왕궁으로 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하기 전에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여자들과 오빠들이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처럼 자기 마음을 님의 곁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음해와 모함을 하고 있으니까 빨리 와서 데려가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어요.

두려운 마음으로 잠이 들어서 그런지 그 두려움이 꿈으로 연장이 되어서 술람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신랑을 잃어버리는 사태로 발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몽유병 환자처럼 신랑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장면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님이시여~ 어디 있나요.

찾아도 없으니 이젠 길거리로 나섰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님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묻고 또 묻습니다.

몽유병 환자가 되어서 신랑을 찾으러 다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늘 함께 있고 싶어요.

떨어지기 싫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떨어지는 것은 고문이에요.

 

이걸 성도의 신앙으로 적용해 봅시다.

성도는 마음속에 항상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사단의 참소로부터 이길 수가 있어요.

 

세상을 살면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생겨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잖아요.

밀 까불듯이 한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어요.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했어요.

예수님도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어요.

예수를 믿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그럼 술람미가 신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편안한 신앙생활은 없어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데에도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들어오듯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여도 어렵고 힘든 일들은 닥쳐요.

제자들은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만 보였지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안 보이고 물만 보이면 그럼 물 퍼내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되고 말아요.

그럼 신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래요.

세상 것이 물밀 듯이 우리 마음을 엄습하는 것입니다.

세상 물을 퍼낸다고 난리에요.

 

무엇을 먹을까 난리이고,

무엇을 마실까 난리이고,

무엇을 입을까 난리에요.

 

교인들은 돈 없다고 난리이고,

목사들은 교회 부흥 안 된다고 난리이고,

학생들은 시험 점수 안 나온다고 난리이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안 된다고 난리이고,

이게 모두가 예수님이 안 보이기 때문이에요.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이 너희들 왜 그러는데 그럽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럼 화들짝 놀라지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입니다.

우리 정체성을 확인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난 하늘 백성이지,

하늘 백성이 잠깐 자기 본분을 잊고 땅 강아지 마냥 흙 퍼먹는다고 난리를 쳤네,

제 정신이 돌아오게 되면 잃어버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잃어버린 신랑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아 3:3-5절.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신랑을 찾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밤 거리를 순찰하는 야경꾼을 만납니다.

야경꾼의 도움으로 신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곤 얼른 신랑의 손을 잡아채고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들어갑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만나고 난 후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자기가 태어난 방으로 들어갔어요.

 

어미 집이란? 자기를 낳아준 곳을 말합니다.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해요.

조금 어려우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어미 집은 자기가 태어난 곳입니다.

자기가 잉태한 자의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 근원을 말합니다.

내가 왜 사랑 받을 수 있었던지 그 사랑의 근거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 그 원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솔로몬이 왜 나같이 천한 여자를 사랑했지,

왜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했는지 그 원인을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근거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 의미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 간의 사랑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솔로몬과 같은 왕이시고,

우리는 술람미와 같은 죄인이에요.

죄인이 왕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은 왕의 성은뿐이에요.

왕이 긍휼히 여겨서 사랑을 해 주어야만이 사랑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우린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의 성은(聖恩)을 입은 것입니다.

 

하늘에 임금이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죄인인 우리에게 성은을 주셨습니까?

이는 모두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세운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성은을 입는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어미의 태와 같인 것입니다.

 

태(胎)란? 근거란 말입니다.

원인(遠因)이라는 뜻입니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 사랑이에요.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원인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조나 구원이나 사랑이나 영적인 의미에서 동의어에요.

모두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솔로몬이 무엇 때문에 천하디 천한 술람미를 사랑하였을까요?

솔로몬이 우발적인 욕정으로 술람미를 사랑한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술람미를 사랑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구약 마당에서 솔로몬과 술람미를 가지고 연기(演技)를 시키신 것입니다.

 

마태복은 4장을 보면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목적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하신 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왜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게 하신 어미의 태와 같은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했어요.

이러면 창세전 언약이 우리를 구원하는 어미의 태와 같아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뭔가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림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미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미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는 것을 긍휼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어미의 자궁을 긍휼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쏟고 우리를 낳았어요.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부은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솔로몬이 지금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사랑 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는 술람미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걸 긍휼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긍휼을 술람미에게 부어준 것입니다.

 

술람미는 그냥 버려두면 들풀처럼 잠시 보이다가 사라질 이름 없는 여인이에요.

오빠들의 억압과 횡포로 뙤약볕 아래서 포도원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던 여자였어요.

솔로몬이 찾아 주지 않았으면 그냥 일하다가 죽어갈 그런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하디 천한 자에게 왕의 긍휼이 임한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술람미처럼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에요.

그냥 저주 속에서 살다가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질 죄인이라구요.

그런 죄인에게 주님의 사랑에 손길이 미친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거지 나사로 같은 죄인들이에요.

그냥 죄가 주는 각종 고통으로 자기 몸을 진물이 나도록 긁다가 죽으면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버려져 까마귀 밥이나 될 그런 무가치한 죄인들이라구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랑을 하셨어요.

우린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아무도 없어요.

근본적으로 말해서 태어날 이유도 없던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하신 언약으로 인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창세전 언약이 바로 성도가 존재하게 된 원인이고 근본인 것입니다.

그 언약이 바로 나로 있게 한 어미의 태와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도 원래 없던 자였어요.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에요.

만약 다윗과 밧세바가 간통하지 않았으면 솔로몬은 없는 자입니다.

 

간통이라는 죄가 솔로몬을 존재케 만든 것입니다.

솔로몬은 부모의 죄로 생겨난 자식인 것입니다.

죄인의 자식이 왕이 된 것입니다.

 

이건 죄인인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은 적자가 아니고 서자에요.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니고 첩의 자식이에요.

 

이런 서자가 왕이 되었어요.

이건 솔로몬에게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 솔로몬이 존재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입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술람미에게 준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하여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였어요.

그래서 눈물로 침상을 띄웁니다.

주여!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라고 탄원합니다.

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까?

이는 성신이 언약 안에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하여 충신 우리야를 죽였어요.

우리야는 다윗의 죄 때문에 애매히 죽임을 당하였어요.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나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야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죄 없는 우리야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신은 우리야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죽은 우리야의 죽음을 보아서라도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놈이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 날 죽여주시옵소서!

그래야지요.

양심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다윗은 양심에 철판을 깔고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야가 죽었잖아요.

그러니 난 살려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있어요.

세상에~

 

그러면서 다윗이 자신이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신이 모태로부터 죄악 중에 출생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 달라고 합니다.

 

우슬초란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릴 때 붓처럼 사용하는 풀이에요.

출애굽을 할 때 우슬초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발랐어요.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 달라는 것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서 죄인이 용서받는 것처럼 흠없는 희생제물처럼 죽임 당한 우리야의 피를 보시고 자신을 용서 해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제물의 피를 자기에게 뿌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난 신앙이에요.

다윗은 자신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는 곧 창세전 언약을 안 거에요.

다시 말해서 자기 죄를 인하여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우리야의 희생을 예수님의 죽음과 같이 보고 있어요.

신약에서 주께서 꺾으신 뼈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주께서 꺾으신 뼈”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꺾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꺾으셨어요.

이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이것을 이사야 5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을 시키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우리야를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죄 없는 자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예수님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알았어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은 곧 성신께서 알려준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신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말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신으로 하여금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자신의 허물을 사함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신이 떠나면 다윗의 마음은 율법이 자리 잡아서 참소를 해 댑니다.

밤낮으로 참소해 댑니다.

 

너~ 살인했지!

너~ 간음했지!

너~ 참 뻔뻔하다!

그러고도 왕 노릇하고 있냐!

 

이걸 이겨내는 것이 자신은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이런 죄인을 위하여 주께서 꺾으신 뼈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희생의 피를 뿌림 받음으로서 정결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참소해요.

우리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참소해서 우리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요.

그리하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주신 용서함을 잊게 만들어요.

이 사실을 놓치면 지옥이 되어요.

 

이런 지옥 같은 마음을 천국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붙잡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붙잡는 것이 어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질 때 마귀의 참소는 사라져요.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깃들어요.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지는 죄사함의 은총이 지옥 같은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어요.

 

술람미가 왜 두려워합니까?

신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신랑이 준 약속을 잊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랑은 약속을 주고 떠났어요.

그동안 술람미는 약속을 부여잡고 살았어요.

그런데 주변의 방해꾼들이 자꾸만 이상한 말들을 하니까 잠시 흔들린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두려움이 엄습하여 급기야 꿈속에서 신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랑의 약속을 놓쳐버린 거예요.

 

솔로몬은 떠나고 없어요.

술람미에게 솔로몬은 약속 속에 있어요.

술람미가 현실의 아픔을 이겨내는 것은 솔로몬의 약속뿐이에요.

그 약속을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의 이간질하는 참소 때문에 잊고 만 것입니다.

 

이건 마치가 우리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고 있는데,

성화주의자들이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자꾸만 참소를 하는 것입니다.

‘너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가 있느냐,’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자꾸만 참소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려러니 했는데 자꾸만 그러니까 살짝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자기 꼬라지를 살피게 됩니다.

자기 꼬라지를 살피면 이건 신앙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 거하면 천국이고 새 언약 밖은 지옥이에요.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항상 새 언약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새 언약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이 작은 여우처럼 자기 마음에 포도원을 허문다고 하여도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약속만 굳게 붙잡고 있다면 신랑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신랑은 한 번도 술람미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꾸만 술람미의 외모(행함)를 가지고 비판을 하니까 자기 외모를 보고 잠시 흔들린 것입니다.

 

술람미는 우리의 예표이니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먼 길을 떠나셨어요.

그 약속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 안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거짓 종들이 자꾸만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니 흔들린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흔들렸던 것과 같아요.

지금도 성화주의 개혁주의자들이 성도가 그 따위로 살아서 되느냐고 자꾸만 흔들어요.

 

이런 거짓 종들의 비 진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단의 참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뿌림에 약속뿐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그 약속을 믿을 때 사단의 참소를 이길 수 있어요.

성화하여야 한다는 거짓 종들의 회유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도 술람미처럼 신랑의 약속을 잊게 되면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언약을 잊게 되면 우리 마음은 율법이 자리 잡아요.

법이 자리 잡으면 자기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정죄하게 됩니다.

 

내가 이래서 되는가!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온통 하나님 뜻을 어긴 것만 보여요.

그러면 마음에 구원의 즐거움은 상실합니다.

 

술람미가 신랑을 잃어버린 것은 솔로몬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경꾼들에게 신랑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야경꾼들이 신랑이 있는 곳을 알려 줍니다.

 

야경꾼이란? 파숫꾼을 말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을 말해요.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언약인 새 언약을 증거하는 종들을 말해요.

실제 파수꾼은 성령이세요.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새 언약의 말씀을 전하는 종들도 보이는 파수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파수꾼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약속 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세요.

술람미가 파숫꾼의 도움으로 신랑을 만난 것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한다고 하셨잖아요.

성령이 예수님의 약속을 깨닫게 하세요.

그러니 지금은 성령이 성도를 예수님의 새 언약 안으로 인도하시는 파수꾼인 것입니다.

 

암튼 술람미는 파수꾼의 도움으로 신랑을 만나고 어미 집으로 자기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근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솔로몬의 약속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는 신랑을 놓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출생을 알 필요가 있어요.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으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있었어요.

솔로몬은 둘째에요.

하나님이 첫째 아이를 죽이고 솔로몬을 주었어요.

솔로몬은 우리야의 죽음을 제공한 아들이 죽고 난 후에 얻어진 아들이에요.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것은 간통으로 밧세바가 아이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밧세바가 잉태하지 않았으면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잉태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완전 범죄를 꾸미려고 충신인 우리야를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야를 죽게 만든 그 아들을 죽였어요.

이는 곧 다윗을 죽인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 아이 대신 솔로몬을 주었어요.

 

이렇게 되면 솔로몬을 존재케 한 근원은 우리야가 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야의 죽음을 몰고 온 간통사건으로 기인하여서 솔로몬이 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는 솔로몬을 우리야의 아들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이 아니고 우리야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마 1: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세요.

다윗은 이새가 낳았다고 하지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에요.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솔로몬은 다윗이 낳았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야의 아내가 낳았다고 합니다.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 대신 우리야를 밧세바의 남편으로 넣었어요.

이는 곧 밧세바가 나은 솔로몬의 아비는 우리야 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솔로몬은 우리야의 죽음을 바탕으로 주어진 자식이기 때문이에요.

이해되세요.

 

솔로몬이 잉태한 근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생한 것이나 술람미가 솔로몬의 은혜로 사랑을 받은 것이나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둘 다 출생의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솔로몬을 출생케 한 근원지인 어미 집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 것은 당신의 비움이라는 희생을 통하여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솔로몬 당신도 죄 없는 어떤 분의 희생으로 태어난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안에 들어가 보니 솔로몬이나 술람미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夫婦)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에서 나온 동격이라야 해요.

솔로몬과 술람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동격인 것입니다.

이게 어미의 집 자기가 잉태된 곳에 들어가니 알게 된 것입니다.

놀랍지요.

 

술람미가 신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엄청난 비밀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찾은 신랑을 자신이 있게 된 창조의 근원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어미 집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맺어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하늘이 맺어준 사랑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어미 집 자기가 잉태된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이 그런 의미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사랑이 시작된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지요.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자기 피 흘리심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도, 우리로 존재케 한 것도 모두가 언약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게 되었잖아요.

 

만약에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맺지 않았으면 만물을 만들 필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만물은 언약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창세전 언약이 없었으면 우리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잖아요.

그러니 우리를 잉태케 한 어미는 창세전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토록 창세전 언약! 창세전 언약! 그러는지 아세요.

창세전 언약이 우리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만남도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없었으면 우린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서로 창세전 언약 안에서 맺어진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이 지켜주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안에 머물러 있어야 마귀의 참소로부터 이겨 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창세전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새 언약이 곧 우리의 어미이고 우리가 잉태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으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 태와 같은 것이지요.

십자가가 우리가 존재케 된 근거인 것입니다.

뿌리란 말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곳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서 새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 언약 안에서 태어났잖아요.

그래서 성도의 고향은 예수님 안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을 붙잡으란 말은 곧 예수님 피를 믿으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그냥 한마디로 예수님의 피에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잊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난 것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신약의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 된 것은 예수님의 피로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말하려고 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적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도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경의 관심사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 피뿐이에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그 근원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시냐에 관심을 두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관심이 없어요.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께 영향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욥기서를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찾아봅시다.

 

욥 35:1-8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기서의 주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당한 것은 욥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하늘에서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내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예요.

 

마치 인간들이 소 싸움을 시킨 것과 같아요.

청도에 가면 소 싸움이 유명합니다.

그 소 싸움을 누가 주관합니까?

인간들이지요.

소는 가만히 있는데 인간들이 지랄을 떠는 바람에 괜히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소는 인간들의 장단에 맞추어서 노리개처럼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물이 그래요.

하나님의 노리개 감으로 만들어졌어요.

저와 여러분도 노리개에요.

그래서 욥이 졸지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몰라요.

사건의 발단을 자기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사건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존재에게서 온 것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라는 놈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하면서 염장을 질러 놓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자식들 다 죽고 마누라도 도망가고 몸도 아파서 심란해 죽겠는데 친구라는 놈들이 찾아 와서 한다는 소리가 ‘야!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다 원인이 있단다’

‘네가 지금 이런 고초를 당하는 것도 다 원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합니다.

‘잘 생각해 봐라’

‘너도 모르게 하나님 마음을 섭섭하게 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난 그런 일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잘 섬기고 살았다고 합니다.

욥과 친구들이 맞다! 아니다! 서로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쟁을 하다가 그만 욥도 친구들의 논리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때 아주 젊은 청년인 엘리후가 나타나서 질책합니다.

엘리후가 양쪽 다 그 입 다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보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당신들은 땅에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이고 당신들을 바퀴벌레요 라는 말과 같아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뭐가 답답해서 땅에 있는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으로 희비한단 말입니까?

당신들이 바퀴벌레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까?

그러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당신들은 욥에게 일어난 고난을 욥에 행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지 않느냐!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지 욥의 행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물은 언약으로 존재케 되었으니 욥의 고난도 언약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인간들을 사용하시지 인간들 행동에 따라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욥의 행동을 가지고 시비 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꼭 욥과 그 친구들처럼 그래요.

모든 일을 자기 행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 있잖아요.

언약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자기 존재적 차원에서 접근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잘 합시다’ 라고 자기 행동을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먼저 자기 행동부터 살펴요.

 

‘야~ 내가 주일 빼 먹었더니 집안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구나’

‘야~ 내가 십일조 떼어 먹어서 사업이 망했구나’

‘야~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병들었구나’

 

모든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있어요.

그러니 눈만 뜨면 자기 행동 뜯어 고친다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말이죠.

 

욥의 고난도 언약적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이런 우리 모습을 보시곤 뒤통수를 때리면서 야~ 이 등신아! 정신 차려 그래요.

니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를 쳐다봐 그래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갈라디아에 어떤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성화 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야~ 이 놈들아! 너희들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너희들 꼬라지를 보느냐’고 책망하잖아요.

 

‘너희들 눈에는 예수님의 피가 안 보이냐’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느냐’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거룩해 진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왜 죽겠느냐’고 합니다.

‘너희들이 거룩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죽었잖아’

런데 왜 또 말씀 지켜서 거룩하겠다고 지랄을 떠느냐‘ 라고 욕을 끌어 붓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약속만 붙잡았으면 이렇게 신랑을 잃어버리는 식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솔로몬의 약속을 붙잡지 않고 자기 꼬라지를 보니 신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언제 솔로몬이 술람미의 외모에 끌려서 사랑했나요.

아니잖아요.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했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 꼬라지를 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시험 드는 것이 자기 꼬라지 볼 때에요.

 

저도 제 꼬라지 보면 목사 못해요.

이런 설교 하지 못해요.

얼마나 더러운 놈인데요.

글은 이렇게 써도 얼마나 못되었는데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양심에 철판을 깔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제 양심에 찔려서 글 안 쓴다고 하면 성령이 귀싸대기 때려요.

야! 이 놈아! 네가 언제 잘난 적이 있느냐!

꼴값 떨지 말라고 해요.

까불고 있어! 그래요.

 

여러분~ 구약에 선지자들이나 12제자들이 인간 같은 놈들이 없어요.

다 형편없는 놈들이에요.

솔직히 복음 전하는 목사치고 인간다운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가짜 목사들은 모두가 부처님처럼 성화해서 괜찮은 인간들이 많아요.

그들은 성화한다고 다 부처님을 닮았거든요.

온화하고 부드럽고 자상해요.

얼굴부터 기름기가 좌르르르 흐르잖아요.

 

목소리부터 근엄하잖아요.

다 이미지 관리한다고 점잖은 말만 골라서 해요.

그들 눈엔 하나님은 안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사람을 의식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은 목사들이 복음 전하면 얼마나 잘 듣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보같이 그런 사람들에겐 복음을 주지 않고 꼭 싸움 닭 같은 꼴통들에게 복음을 주어서 전하게 만들어요.

그 이유는 복음이 인간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하나님께선 세상에 천하고 못난 놈들을 택해서 잘난 놈들을 깔아뭉갠다고,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분이에요.

마치 술람미 같이 예쁜 구석이 아무도 없었어요.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그는 마른 땅에 연한 순 같다고 하잖아요.

가뭄에 난 싹이 대단 하면 얼만 대단하겠어요.

마치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 같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를 귀히 보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출생 자체가 환영 받을 것이 없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애비 없는 사생아이지요.

거기다가 태어난 장소를 보면 짐승 밥통에서 낫지요.

직업도 목수이지요.

목수가 배웠으면 뭘 배웠겠어요.

아마도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안 다녔을 것 같아요.

뭐 볼 것이 있습니까?

어디 말이 점잖기나 합니까?

나오느니 육두문자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냈어요.

누가 이걸 받아들이겠어요.

하나님이 미쳤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깔보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올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천명해 주었잖아요.

세례요한이 이 분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럼 소문은 금방 퍼져요.

야!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래!

하나님이 하늘에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어!

 

그 좁은 동네에 강아지들도 소문을 들어서 금방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하나님이라면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복(福) 주지 않는 재수 없는 하나님은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쳤냐!

복도 안 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게!

아주 보란 듯이 개구신 짓을 해요.

 

에게게~ 저런 사람이 복음 전한다고!

무슨 복음 전한다는 교회가 교인도 없냐!

야!~ 저런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이라면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복음으로 목사를 판단하지 않고 세상 가치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면 세상의 판단에 두려워하지 않아요.

신랑하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요.

예수님을 알면 세상살이가 두렵지가 않아요.

인생이 가벼워요.

 

창세전 언약을 알면 어차피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어요.

나를 존재케 한 언약을 알면 쉬워요.

인생이 가벼워지지요.

 

언약을 모르면 앞으로 어떻게 살까!

온갖 염려와 근심과 걱정들이 엄습해서 마음을 무관지옥으로 만들어버려요.

마치 술람미가 신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 두려워져요.

 

제가 창세전 언약을 알고 나니 그렇게 편해요.

세상이 작아 보여요.

교회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전에는 교회 문 닫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에 마음 졸였는데!

이젠 교인들이 없으면 교회 문 닫으면 되고!

목사 안하면 되지!

이런 것 안 해도 구원 받는데 전혀 문제가 안 되니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소모품이에요.

예수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러니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안심하고 사세요.

물론 창세전 언약이 믿어져야 하겠지만!

 

잘 이해하세요.

읽고 또 읽고 이해하세요.

오늘 공부는 좀 어려워요.

 

암튼 술람미는 파수꾼의 도움으로 신랑을 만났어요.

이제 마음에 슬픔이 사라졌어요.

염려 근심 걱정이 사라졌어요.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방해꾼들에게 내가 신랑을 만났으니 다시는 날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신랑을 만나서 사랑하고 있으니 날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방해하지 말래요.

이젠 너희들의 공갈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시는 신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꽉 붙잡고 있겠다고 하잖아요.

놓치지 않겠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 눈앞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 율법으로 참소당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니 마귀의 참소에 결코 정죄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솔로몬은 내 남자야!

나~! 솔로몬의 여자야! 라고 하듯이

우리도 나~! 예수의 여자야! 라고 하세요.

 

이 시대 예루살렘 여자란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말해요.

그러니 성화하라고 외치는 목사들이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는데 라고 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시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느 놈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느냐 라고 하란 말입니다.

등신 같이 당하고 있지 말고!

거짓 목사들이 행함을 강조하거든 그건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세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있지 말고!

 

복음을 안다면 복음을 말하세요.

술람미처럼 솔로몬은 내 사랑하는 남자야!

까불지 말라고 하세요.

진짜를 가졌는데 왜 가짜를 두려워합니까.

진짜 신랑을 만났잖아요.

그럼 가짜 신랑에게 매이지 마세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분은 예수님이세요.

목사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만났으면 안심하세요.

 

우리의 인생살이라는 배에 물이 들어오거든 예수님하고 주무세요.

물 퍼낸다고 요란 떨지 말고 그냥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고 예수님 곁에서 주무세요.

이걸 알려 주시려고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건너면서 주무신 것입니다.

 

까짓거 천국을 얻었으니 고생 좀 하지!

그러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도 천국처럼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자 하니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좀 받지 그래야 하는데 고생하지 않으려고 하니 만사가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근심걱정 거리들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이 주렁주렁 걸려서 구원의 즐거움들을 다 빼앗고 있어요.

 

제발 말씀을 보세요.

그러면 파수꾼처럼 신랑을 만나게 해 줍니다.

언약을 붙잡으세요.

힘이 벌떡 생겨요.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지요.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지요.

 

편지를 누구에게 줍니까?

교회의 사자들에게 주지요.

사자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을 말해요.

하나님의 종들이에요.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입어 증거하고 있어요.

성령은 어디로 인도한다고 했나요?

새 언약 안으로 인도한다고 했잖아요.

 

콕 찍어서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는 말씀이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른 하늘에서 하나님이 애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음성이 들려지지 않아요.

그건 사기에요.

하나님 음성을 듣고자 하지 말고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으세요.

 

성경을 예수님의 새 언약 이야기로 풀어주는 목사나 성도가 곧 주의 사자(使者)에요.

주의 종이란 말입니다.

목사가 주의 종이 아니고 복음을 아는 여러분이 주의 종이에요.

예수의 피를 아는 여러분들이 증거하는 복음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욥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 때문에 화가 나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 엘리후가 찾아 와서 깨닫게 하잖아요.

깨닫고 나니 할 말이 없어서 주둥이를 닫아 버리잖아요.

엘리후가 욥에겐 주의 사자에요.

엘리후의 말이 성령의 음성이에요.

 

여러분이 야경꾼이 되셔서 신랑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신랑을 알려 주세요.

알려 주지 못하겠거든 이 블로그나 알려주세요.

남을 전도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신랑이나 간수 잘 하세요.

여러분이나 신랑을 술람미처럼 놓치지 말고 꽉 붙들고 사세요.

 

어이쿠~ 이 귀하신 주님의 종님들아!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나 하고 예수 믿으세요.

 

부디 잃어버린 신랑을 찾아 행복하시기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잃어버렸던 신랑을 다시 만났듯이 우리도 신랑을 만나게 하옵소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다시는 신랑을 잃어버리지 말게 하옵소서! 신랑과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안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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