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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0강.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12-17)

by coroa 2020. 8. 24.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10강.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12-17).-

 

 

 

오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계시록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만 편지를 한 것은 이 일곱 교회를 가지고 뭔가 이야기 해 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대표하지만 특별히 예언적인 의미로에서는 역사 속에 나타날 교회들을 시대별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에베소 교회 이외 나머지 교회들은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교회들이 대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서신서라고 한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에게 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참고한다면 로마교회를 시작하여서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서,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교회나 그도 아니면 성경 속에 언급이 된 마게도냐 교회나,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들 중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넣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요한계시록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생소한 교회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는 장차 역사 속에 나타날 교회들의 모습을 계시사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아의 일곱 교회는 그 자체가 묵시적인 것이면서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는 초대교회 시대로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지만 그 외에 교회들은 장차 이 땅에 일어날 교회들을 예언적인 의미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반복하여서 말씀드리는 것은 시중에 나와 있는 요한계시록 강해 집을 보면 예언적인 의미로 강해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총론적으로 말을 할 때는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이기 때문에 예언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각론에 들어가면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은 예언적으로 말하는데 일곱 교회는 예언적으로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처럼 일곱 교회를 연대기적으로 보면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어느 시대 모든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어느 시대이고 모든 교회들에게 들려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성경이므로 어느 시대이고 교회 안에서 들려져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언적인 의미에서 장차 이 역사 속에 나타날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자증하고 있어요.

 

성령께서 왜? 성경에는 한 번도 언급이 되지 않은 교회들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넣어서 편지를 하느냐 하면, 이는 장차 역사 속에 분명히 나타날 교회들이지만 사도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미래에 나타날 교회들이기 때문에 성경 속에 없는 교회들을 가지고 장차 될 일에 대한 예언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어느 특정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곱 교회를 가지고 교회가 역사 속에서 겪게 될 그 시대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는 교회마다 그 도시의 배경과 지역적인 특성과 당시의 상황과 같은 것들은 다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시마다 갖는 특성을 가지고 장차 역사 속에 일어날 교회들의 영적인 모습들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마다 예수님이 나타나는 모습이라든가 칭찬과 책망 그리고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향한 영적 메시지인 겁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두아디라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네 번째 교회입니다.

신약 성경 속에는 두아디라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자세한 언급이 없으므로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네 번째 교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연대기 순으로 구분을 한다면 장차 역사 속에 나타날 한 시대의 교회상을 담고 있겠지요.

 

복습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교회들을 교회사 적으로 연대기 순으로 조명해 봅니다.

 

에베소 교회는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초대교회를 상징하고!

서머나 교회는 교회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던 시대로서 순교 시대를 상징하고!

버가모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 하던 시기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두아디라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이후 극심한 타락으로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사 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대인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는 교회사적인 연대기적으로 구분을 하면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아디라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시기적으로 가장 긴 시기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책망을 많이 받는 교회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책망하는 내용이 가장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타락하였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일곱 교회 중에서 책망하는 내용이 가장 많아요.

무려 4절을 할애하면서 책망을 하였어요.

성경 구절도 제일 길구요.

 

이건 참고적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그냥 은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는 1-7절까지 7절을 썻고,

서머나 교회는 8-11절까지 4절을 썻고,

버가모 교회는 12-17절까지 6절을 썻고,

두아디라 교회는 18-29절까지 무려 12절을 썼어요.

사데 교회는 1-6절까지 6절을 썼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7-13절까지 7절을 썻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14-22절까지 10절을 썼어요.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계시사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부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발전시킨 문명이나 과학도 다 계시사적 의미가 있어요.

이러한 것을 사회현상론이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사회적인 현상이 노아의 대와 같은 모습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셋트를 노아의 때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해요.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먹고 마시고 쾌락을 좇아가는 짐승처럼 산다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상징하는 교회들이 장차 임할 심판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먹고 마시는 일에만 전념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모습을 보세요.

모두가 이 땅에 것을 좇아가고 있어요.

교회와 교인들이 육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어요.

사회현상이 노아의 때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이라는 셋트를 노아의 때와 같은 사회현상으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해 가는 세상을 보고 시대의 징조라고 합니다.

성도는 시대의 징조를 보고 때를 알아야 해요.

지금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가 임박한 때에요.

모든 성경적 예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온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그러므로 잘 때인지 아니면 깰 때인지 때를 분별하고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세요.

나는 지금 노아처럼 방주를 짓고 사는지 아니면, 세상에 취하여 사는지 스스로의 신앙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깨어나셔야 합니다.

이 부족한 사람의 말을 농담으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서 제발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이 요한계시록 강해가 여러분의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럼 두아디라의 도시적 의미를 사회현상론적으로 접근하여 계시사적인 의미로 살펴봅니다.

 

두아디라는 제조업이 발달한 공업 도시이면서 상업 도시입니다.

제조업이 발달하다가 보니까 무역업도 자연스럽게 발달을 하였어요.

복합 도시에요.

 

공업도시의 특징이 큰 공장을 중심으로 거기에 따른 중소기업들이 상생(相生)을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다양한 조합들이 생겨났습니다.

각 직업별로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조합을 만든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숙박업 협회, 음식업 협회, 미용업 협회, 부동산 중개인 협회, 야구협회, 축구협회,,, 라는 식으로 협회를 만들어서 그 협회에 가입한 사람들만 장사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서 도시가 운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합을 “길드”라고 합니다.

길드는 권력과 줄이 연결 되어 있었어요.

정치인들은 길드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고, 정치인은 그 길드를 보호해 주었어요.

 

지금도 이익단체들이 국회의원들에게 온갖 로비를 하잖아요.

이익단체와 정치인들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공생하는 관계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통칭 관피아니 정피아니 해피아,,, 라고 합니다.

지난번 세월호 사건이 나서 그 이면을 들추어보니 해경과 해양수산부 산하 기관들이 한 솥밥을 먹었던 것이 들통이 났잖아요.

 

그래서 해피아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관피아니 정피아니 해피아 라는 말들은 힘을 이용해서 약자의 돈을 뜯어 먹는 마피아 집단과 같다는 뜻에서 붙인 말들입니다.

 

당시 길드가 그랬어요.

조합의 힘을 이용하여서 자신들이 뜻을 관철 시켰어요.

그 당시에는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팔지를 못했어요.

그러므로 사회 자체가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어요.

 

로마 시대에는 모든 사회가 길드라는 조합 식으로 운영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 길드는 “가이사는 우리의 주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만 가입을 허용했어요.

또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가이사는 주이십니다” 라고 인사 했어요.

 

지금도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인터넷을 보세요.

모든 것이 회원 가입을 하여야 이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잖아요.

회원에 가입 하려면 그들의 가치에 동의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회원가입이 되어요.

 

가이사는 나의 주이십니다 라고 말만 하지 않을 뿐이지 그 내용적인 의미는 동일해요.

그러니까 로마 시대의 길드가 세월을 따라서 모양만 살짝 바꾸어서 지금도 인간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길드를 교회적 의미로 비유를 하면 이 시대 교단과 같아요.

교회를 하자면 교단에 가입을 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단 소리 들어요.

 

이 시대 대 부분의 교인들은 교단으로 교회를 판단해요.

그 교회가 무엇을 증거하는지를 가지고 교회됨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느냐로 가늠해요.

 

최소한도 한국교회 교인들의 정서가 그래요.

우리는 이걸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이건 마치 로마 시대에 길드에 가입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과 같아요.

의미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교단들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개 교회들을 관리하는 겁니다.

지금은 느슨해 졌지만 예전에는 자기 교단 목사들에게만 강단을 허락했어요.

교단이 다르면 말씀 증거 자체를 봉쇄했어요.

 

한국교회는 복음 중심의 교회가 아니에요.

교권 중심의 교회에요.

그래서 목사들은 교단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단의 순 기능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순 기능보다도 역 기능이 더 많아요.

교단이 교회 위에 군림하는 옥상옥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을 하자면 이 시대 교단이 로마 시대에 길드와 같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조직으로 굴러가요.

그러므로 세상이든 교회이든 조직을 만들고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조직이 결국엔 통제하고 다스리는 법이 되어요.

결국 법이 인간을 가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교라는 그 조직에 의하여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지금도 교단이라는 조직이 교회를 심판을 해요.

어떻게 심판 하는가 하면 유대교가 예수님을 심판 하듯이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파를 위시하여 엣세네파, 사두개인, 쿰란공동체, 열심당이라는 큰 교단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파이고 교단이에요.

유대인들은 이 중 어느 한 곳에 소속이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관리를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어디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호응을 하고 따르기 시작을 합니다.

교파를 초월하고 교단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따르는 겁니다.

 

그러자 평상시에는 서로 헐뜯으면서 자기들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하던 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일들에는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가만 두면 자기 교인들을 예수에게 다 빼앗기게 생겼어요.

그래서 예수를 이단 괴수로 몰아서 죽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세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누가 제일 핍박을 했는가?

유대인들이었어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조폭을 동원해서 핍박했어요.

왜? 유대인들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는가요?

이는 유대교 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개종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예수 믿으면 출교를 당했어요.

유대인들에게 출교란? 사형선고와 같아요.

사회생활 전반에 불이익을 당했어요.

심지어 가산을 적몰당하고 죽임당하기까지 하였어요.

 

이건 마치 로마 정부 하에서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웠던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도 모양만 다르지 갖가지 종파(宗派)라는 조직을 로마의 길드의 형태로 운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전하면 누가 핍박을 하는가 하면 기존에 교단이고 교회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복음 전한다고 핍박하지 않아요.

누가 핍박하느냐?

자칭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이 시비를 걸고 이단이라고 핍박을 해요.

 

왜? 교단과 교회와 교인들이 복음을 방해하는 가요?

이는 교인들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자기 조직에 해가 되면 이단이라 심판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길드라는 조합이 로마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요.

세상과 교회에서 쓰는 단어만 다르지 그 내용은 동일해요.

자기 조직에 해가 되는 자는 가차 없이 이단으로 정죄하여서 응징하고 있어요.

 

이게 이 시대 교회에요.

이렇게 매트릭스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짜여서 돌아가는 교회에서 그들과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버려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못해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항상 예수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기존의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복음은 궤변이고 복음 전하는 자들은 이단일 수밖에 없어요.

 

이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교로부터 버려진 돌이었어요.

지금도 예수님처럼 기존의 교회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이 버려진 돌들을 주워서 하늘 성전의 벽돌로 사용하세요.

 

그러므로 천국에는 모두가 예수 때문에 버려진 자들이 모인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 버려진 돌의 우두머리가 예수님이에요,

이를 모퉁이 돌이라고 합니다.

우린 그 모퉁이 돌에 연결이 되고 연합이 된 작은 벽돌 하나 하나들이에요.

 

그럼 이번에는 두아디라 지역의 특산품이 주는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아디라는 특히 옷감을 많이 생산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염색업이 엄청 발달을 하였어요.

그 당시는 두아디라에서는 질 좋은 자주색 염색을 하였다고 해요.

그래서 두아디라 자주색 옷감은 귀하고 고급스러워서 온 세계에 수출이 되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두아디라의 자주색 옷감으로 만든 옷들은 명품으로 취급하였어요.

 

사도행전 16장을 q보시다.

 

행 16:14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바울과 실라가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마게도냐 지역을 향하여 갑니다.

처음 도착한 곳이 빌립보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제일 먼저 전도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 였어요.

 

“루디아”는 사람 이름이 아니에요.

출신 지역을 말해요.

빌립보 사람들이 루디아 지역에서 자주빛 옷감을 팔려고 온 여인이라는 뜻에서 “루디아 여자” 라고 부른 겁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시집 온 새댁을 부를 때 친정 지역을 따서 순천댁, 안동댁, 강릉댁, 여주댁이라고 부른 것과 같아요.

 

자주 장사란? 붉은색 옷감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옷감 파는 여자 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에도 굳이 자주 장사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붉은색 옷감은 부(富)를 상징하고 최고의 사치품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는 조선시대 중국 상인인 비단 장수 왕서방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 시대 비단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니었어요.

고관대작 부자집 대감집 사람들만 있었어요.

얼마나 비단 옷이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면 평생 비단 옷 하나만 얻어 입어도 여자가 팔자를 고쳤다고 하였겠어요.

 

루디아가 팔던 붉은색 옷도 마찬가지요.

아무나 입던 옷이 아니에요.

상류층 사람들만 있었어요.

자주색 옷은 로마의 부귀와 권세를 상징하는 색과도 같이 사용을 하였어요.

 

붉은 빛은 권세를 상징해요.

그래서 권세자들이 즐겨 입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나 장군들의 복장을 붉은 색을 띤 것으로 해 입었어요.

그런데 이 붉은 색 옷을 교회를 상징하는 교황의 복장으로도 사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그 국교가 카토릭으로 발전합니다.

국가에 수장을 황제라고 불렀고, 교회의 수장을 카토릭에서는 교황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교황의 복장도 황제와 같은 붉은색으로 해 입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도 권세자들이라는 것을 복장을 통해서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카토릭 안에서는 교황은 황제에요.

 

이것이 유래가 되어서 각국의 왕들도 붉은 색으로 왕복을 해 입었던 것입니다.

사극을 보면 조선 시대 왕들이 붉은 색의 옷을 입지요.

특히 중국에서는 붉은 색을 복(福)은 불러오고 화(禍)를 막아준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 온 나라가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해 놓았어요.

 

붉은 색은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신앙적으로 좋은 의미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지만!

나쁜 의미로는 사치와 살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적 그리스도 세력들에게는 부귀영화와 사치를 의미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봅시다.

 

계 17:4절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8:16절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여자가 나오지요.

이 여자는 음녀에요.

음녀는 그 당시적인 의미로서 로마 교황과 그 집단을 의미해요.

 

그런데 그 음녀가 붉은 색 옷을 입고 있어요.

음녀를 상징하는 로마 카토릭의 교황과 신부들이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세상 권세에 취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시대적 의미로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그 잔 속에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금 은 보석으로 꾸몄다는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명품으로 걸쳤다는 말입니다.

 

명품으로 걸쳤다는 것은 세상에 푹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뼛속 깊이 세상 가치관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로마 카토릭처럼 되었어요.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는 교황이 되었어요.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사치를 쫓아가고 있어요.

교회의 정체성이 땅에 것으로 전락을 했어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음녀가 그 당시 로마 카토릭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 교회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 때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음녀에요.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마치 음녀가 붉은 색 옷을 입고 금 은 보석으로 꾸민 것과 같아요.

 

교회가 자랑해야 할 것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첫째도 복음이고,

둘째도 복음이고,

셋째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교회 크기를 자랑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우리 교회 몇 명 모인다!

우리 교회 얼마나 큰 줄 아느냐!

우리 교회 누구 누구 유명한 사람이 나온다! 라는 식으로 자랑하고 있어요.

 

이 모두는 배설물과 같고 껍데기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자랑하고 있어요.

얼마나 영적으로 피폐했으면 껍데기를 치장하고 자랑하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교회가 자랑 할 것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복음이 아니고 교회 크기에요.

교인들 숫자에요.

 

그러니 교황이 붉은색 옷을 입고 자랑하듯이 목사와 교인들이 교회 큰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해요.

그런데 이 한심한 것을 교인들이 좋아한다니까요.

부창부수(夫唱婦隨)에요.

 

교인들이 소경이니까 소경인 목사들을 목자라고 따르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가치가 세속적이니까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목사를 인도자로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중세 암흑시대와 같아요.

교인들이 소경이니까 거짓 목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가장 타락하였어요.

 

타락 정도가 아니라 교회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묻혀버렸어요.

전혀 다른 교회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국교 시대를 교회사 적으로 중세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처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고 만 것입니다.

이름은 교회인데 그 내용은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교회가 국교가 되었는데 교회가 어둠에 빠지고 말았잖아요.

상식적으로 본다면 교회가 국교가 되었으니 가장 빛을 밝히 발하여야 하는데도 실제적으로는 그 반대인 어둠이 되고 말았어요.

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교회가 국교가 되었으면 더 빛을 발해야 되잖아요.

박해가 사라지고 좋은 환경이 되었으니 더 잘해야 하잖아요.

성도들의 믿음이 더 좋아지고 교회도 세상에 복음을 더 잘 증거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성도들의 믿음이 사라지고 교회에서 복음이 사라지게 되었어요.

 

박해 속에서는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사수했어요.

그런데 고난이 사라지고 좋은 세상이 되니까 스스로 다 놓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신앙이 언제 가장 좋은가 하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돌아보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가?

어렵고 힘이 들 때에요.

힘이 드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좋아지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편하고 살기 좋으면 하나님을 떠나요.

그래서 성경은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1-32장을 봅시다.

그리고 호세아 10장을 함께 봅시다.

 

신 31:20절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신 32:15-18=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근래에 일어난 새 신,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호 10:1-3=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3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여수룬이 살찌매 하나님을 발로 찼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니까 다른 신을 섬기더라고 합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자기 배가 신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배 불리는데 이용하더라는 것이에요.

 

이건 이 시대도 마찬가지애요.

한국 교회가 언제 신앙이 가장 좋았는가 하면 과거 살기 어려웠을 때였어요.

그리고 가장 타락 한 때가 언제인가 하면 지금 이 시대에요.

 

교회에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세속화되기 시작했어요.

교인들도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뻥 차버렸어요.

이제 하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고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지요.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여호와는 더 이상 우리의 왕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교인들이 많이 모이니까 각양의 이름으로 건물들을 늘려간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간을 자꾸만 늘리고 새로 짓는 겁니다.

 

교회도 확장하고,

교육관도 짓고,

비젼센타도 짓고,,,

학교도 하고,

병원도 하고,

공원묘지도 사들이고,

이제는 교도소까지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돈 지랄을 하고 있어요.

 

호세아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왕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제 하나님을 힘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돈이 있잖아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이면 다 되어요.

 

그런데 교회에 돈이 모이기 시작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이제는 하나님보다 돈을 믿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힘으로 살지 않고 돈의 힘으로 살아요.

돈이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만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전에 돈이 없을 땐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그러나 이젠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돈이면 다 해결이 되니까요.

 

돈이 하나님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방해는 바로 배부름입니다.

육신의 평안함이에요.

이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명된 결과에요.

또한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사가 증명하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삶이 부요해지고 평안해지고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하였어요.

설령 교회에 왔다고 하여도 복음보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어요.

 

교회가 커지면서 목사들의 설교가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퍼니즘”에 빠지고 말았어요.

설교가 청중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만담(漫談)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목사들이 설교를 유머러스하게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목사들이 스타 목사로 불리워져요.

 

교인들이 그런 설교를 은혜롭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 아니고 마음을 달래주고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으로 변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젠 신앙에 싸울 것이 사라졌어요.

부담 없이 교회 다니면 되어요.

신앙이 취미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설교 시장이 형성이 되었어요.

이 시대 교회와 목사는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이 되고 말았어요.

목사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설교를 상품화 하여서 진열하기에 바쁩니다.

교인들이 설교를 백화점에서 진열된 물건 고르듯이 자기 취미에 맞는 교회와 목사를 고르기 시작을 했어요.

 

이젠 무교회주의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마치 교회 안 다니는 것이 믿음 좋은 것으로 회자 되고 있어요.

설령 교회에 왔어도 봉사니 충성이니 하는 말로 부담 주는 교회는 싫어요.

그래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담스러운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의 자화상이에요.

중세 암흑시대가 아니라 현대 암흑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아주 강력한 심판주의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살펴봅시다.

 

각 교회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모습이 다 다릅니다.

이는 그 시대를 교회상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 속에는 그 교회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순교 당하는 교회를 위로하고자 하심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황제의 말이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두아디라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요?

 

18절입니다.

 

계 2: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눈이 불 꽃 같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살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그 옳고 그름을 다 판단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밟아 버리고 심판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신앙을 달아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은 그 당시 어떤 놈들이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역마다 자기 지역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었어요.

 

에베소 지역에는 아데미 신이었고!

서머나 지역은 제우스 신이었고!

버가모 지역에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이었고!

두아디라 지역에는 아폴로를 주(主) 신으로 섬겼어요.

 

아폴로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에요.

그래서 아폴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두아디라 지역에서는 아폴로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지역을 지켜주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폴로의 은덕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어요.

 

당시 황제 역시 신의 아들로 회자 되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아폴로를 신의 아들로 여겼듯이 로마의 황제도 신의 아들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는 교황이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 교황은 황제와 동격으로 인정받았어요.

 

이에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셔서 아폴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교황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는 황제가 하나님 아들의 자리에 앉자 버렸어요.

또한 교황도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앉자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두아디라 교회에 예수님이 불 꽃 같은 눈과 빛난 주석으로 된 발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것은 황제가 통치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고 예수님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심판주라는 말입니다.

 

교황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나 예수가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로마 카토릭처럼 되었어요.

목사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었어요.

교황이 되었어요.

 

그 반증이 교인들이 성경보다 목사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경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목사가 해석해 주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 말이 정녕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여야 함에도 목사의 말에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느 목사의 말을 절대시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각자 은혜 받은 것들이 달라요.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목사만이 복음 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한 부분을 알 뿐이에요.

 

어느 분들은 제가 성경 박사인줄 알아요.

아니에요.

저도 일 부분만 알아요.

그래서 저도 다른 목사님들 설교를 듣는 겁니다.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은 반드시 경계하세요.

그 놈은 반드시 교주로 드러나게 되어요.

교주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자기가 전하는 것만이 복음이라고 해요.

이건 마치 교황 무오설과 같아요.

 

그리하여 따르는 무리들을 자기 수하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은 반드시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들이 주종(主從)의 관계로 형성이 되어 있어요.

자기는 항상 가르치는 선생이고 너희들은 항상 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고 해요.

 

어느 집단에서는 목사의 말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어요.

그 목사의 말이 진리가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경을 그 목사의 어록으로 재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면 그 목사 이외는 복음 전하는 자가 없다는 지경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그 목사 이외의 말은 절대로 듣고자 하지 않아요.

그 집단에서는 그 목사 이외 다른 목사의 말을 하면 미움을 받아요.

그 집단의 목사는 교황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것이 개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큰 교회의 목사는 교황과 같아요.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가 영적으로는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하나님 말씀이 목사(교황)들의 말에 가려진 암흑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의 칭찬과 책망을 보십니다.

 

먼저 칭찬을 봅니다.

 

계 2:19절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합니다.

이건 로마 천주교에서 벌린 사업들을 말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가 되면서 로마는 기독교를 철저하게 정치에 이용하기 시작을 합니다.

 

제국을 다스리자면 백성들의 마음을 사야 하잖아요.

백성들 마음을 사는 것은 종교만큼 좋은 것이 없어요.

그래서 정치인들은 종교를 정치화 하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 카토릭 안에서 인본주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요.

그래서 로마 천주교에서는 박애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도주의적인 사업들을 많이 벌렸어요.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병원과 학교와 같은 것들을 도시 곳곳에 세웠어요.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도 칭찬을 하십니다.

 

천주교는 교리적으로는 이단사상이에요.

이는 천주교의 교리가 인본주의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웃을 돌아보고 약자를 돌보는 그 가치는 칭찬하십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칭찬 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개독교 라고 욕을 먹는 것은 신앙이 극도의 이기주의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소외당하고 아픈 이웃들을 돌아보는 일을 많이 하는데,

기독교는 교회 키우기에만 급급하니까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서는 박애주의로 살면 의로 여겨 주어요.

그런 사람을 일컬어 성자(聖者)니 성녀(聖女)라고 칭송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테레사 수녀 같은 분은 성녀(聖女)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본 받자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치를 윤리와 도덕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테레사 수녀와 같이 박애정신으로 산 사람들을 성인(聖人)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성인들은 신과 같아요.

 

하지만 이건 영적으로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가리는 악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의 본질을 놓치게 만들었어요.

신앙을 인본주의로 전락시키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사업이 본질이 아니에요.

일이 우선이 아니에요.

교회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증거하여야 해요.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여야 해요.

 

왜? 인간의 열심과 행함 속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지 알려 주어야 해요.

그리고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하여 증거하여야 해요.

인간의 착한 삶이 왜? 의가 되지 않는지 가르쳐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카토릭에서는 인간의 착함을 선이고 의라고 가르쳤어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가리면 대 성공이에요.

 

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무엇으로 가리는가 하면 인간의 의로 가려요.

카토릭은 인간의 의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려요.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책망을 들어봅시다.

 

계 2:20-23=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자칭 선지라고 하는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하여서 행음케 하였다고 합니다.

 

이세벨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세벨이 누구이냐가 아니고 그 시대에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교훈들이 구약 시대 이세벨의 교훈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이란? 혼합주의를 말해요.

 

이세벨은 두로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왕과 혼인을 한 여자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의 적이에요.

그런 원수의 나라인 이방 여자가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혼인을 하고 왕비가 되었어요.

 

이건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서 비정상이에요.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아합이 이세벨과 혼인 한 것은 정치적인 정략결혼이에요.

정략적인 것이다 보니 신앙도 정략적으로 이용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세벨이 결혼을 하면서 자기가 섬기던 이방 나라 신들을 이스라엘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신들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신이에요.

바알은 남편이고!

아세라는 아내에요.

 

우리 상식으로는 하나님만 유일신(唯一神)으로 섬기던 이스라엘에게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는 정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백성들이 안 섬길 것이라고 여기잖아요.

 

이를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고 둔갑을 시킨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끼니까 껍데기를 하나님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니까 거부감 없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봅시다.

 

왕상 18: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 내용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여서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이 들어서 물이 말라서 생명들이 죽어갈 때입니다.

이 때 아합 왕이 엘리야를 만나고서는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놈이냐! 라고 하면서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이방 신을 데리고 와서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케 하여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가 내 말이 맞는지 당신 말이 맞는지 내기 하자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을 데리고 갈멜산으로 오라고 합니다.

갈멜산에서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걸고 누가 참 하나님인지 알아보자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구경차 갈멜산으로 몰려듭니다.

이 때 엘리야가 백성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양다리 걸치고 있겠느냐?

오늘 양단간에 너희의 신이 누구인지 결정 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엘리야가 바알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닌 것을 이세벨이 하나님이라고 둔갑을 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이세벨의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음행이라고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을까요?

이는 바알이 백성들이 바라는 것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백성들을 다스려 가고 있는데 반하여 바알은 백성들 편에 서서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풍요(豊饒)의 신이고,

아세라는 다산(多産)의 신이에요.

풍요와 다산은 복의 상징이에요.

인간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고 싶어해요.

자식들 많이 낳고 명문 가문이 되고 싶어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소원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당신의 언약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는 언약과 상관없이 백성들이 바라는 소원을 들어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바알을 하나님 섬기듯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모든 세대를 함축하고 있어요.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복 받고 잘 살기를 바래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일취월장 하여서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교인들은 듣고 싶어해요.

이를 목사들이 잘 알고 교인들 편에 서서 복 받고 잘 살 수 있는 비결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럼 교인들이 좋아라 해요.

이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예수를 이용하여서 자기 욕심을 이루고자 한단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권사님이 계세요.

이 분은 입만 열면 자기 딸들이 거부가 된다고 해요.

기도원을 쫓아다니는데 거기 오는 목사들이 안수기도하면서 그런대요.

권사님 딸은 사명자이고 엄청 부자가 되니까 기도 많이 하고 봉사와 충성을 많이 하라고 한다고 해요.

 

그래서 이 권사님은 틈만 나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목사가 그랬기 때문에 자기는 믿는다고 합니다.

 

그럼 제가 그럽니다.

권사님 성경에 그런 것 약속한 적이 없어요.

그건 목사들이 권사님 마음을 얻고자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면 얼굴이 붉으락 프르락 해요.

 

이게 바로 이세벨의 교훈이에요.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세벨의 교훈은 먼 나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요.

 

우리도 두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어요.

돈을 따를 것인가?

언약을 따를 것인가?

 

심순애처럼 이수일의 사랑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따를 것인가?

마음은 이수일에게 있지만 몸뚱이는 김중배를 따라가고 있어요.

이걸 음행이라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공업도시로서 제조업과 무역업이 발달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돈이 많다는 뜻입니다.

돈이 많으면 어떻게 될까요?

삶에 가치가 쾌락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 전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쾌락이다 보니까 음행이 난무했어요.

 

이러한 가치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증거 되었는데 이걸 이세벨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라고 가르쳐 지니까 그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자연히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가치를 좇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이세벨의 교훈이에요.

 

일반적인 음행과 영적 음행을 구분하세요.

세상에서는 남녀 간에 불륜을 음행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자기 삶에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해요.

 

쉬운 말로 예수를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복 받는 수단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에서 예수가 이용대상으로 전락을 했어요.

목사들이 예수 믿고 복 받으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세벨의 교훈을 듣는 자들은 침상에 던지고 사망으로 그 자녀들을 죽인다고 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이세벨의 아들들이 죽임 당한 것을 상기하여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난 후 그 시체는 개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그의 아들 70명이 하루아침에 도륙당하고 말아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두아디라 교회 안에도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는데 만약에 회개하지 않으면 이세벨의 아들들이 하루아침에 도륙을 당한 것같이 큰 환난에 던져서 이세벨의 자녀들을 죽이듯이 사망에 던져서 죽이게 한다고 합니다.

 

계 2:22-23=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침상에 던진다고 합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중한 병에 들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영적으로 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영이 죽으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였어요.

분명히 이단인데 그걸 분별하지 못해요.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어요.

분명한 이단인데도 분별력을 상실해서 인간을 교주로 따르는 자들이 있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침상에 던져서 그러해요.

이세벨의 교훈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시대를 교회사에서는 중세 암흑시대라고 합니까?

 

이는 기독교가 어둠에 완전히 장악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의 본질을 완전히 훼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상한 변질 종교인 로마 카토릭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 정략결혼이었어요.

그 결과 여호와 신앙이 바알 숭배 사상으로 완전히 변질이 되고 말았어요.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극심한 영적 암흑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한 것도 정략적인 것이었어요.

그 결과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혼합을 하고 로마 카토릭이라는 괴물 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을 비빔밥처럼 하나로 섞어서 만든 이상한 교회가 탄생을 하는데 이를 일컬어 로마 카토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카토릭이 교회를 지배하던 시기를 영적으로 중세 암흑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고서는 처음에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였어요.

그러다가 역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가 힘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정치를 삼켜버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교황이 황제 위에 군림하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교황이 세상의 왕을 임명하는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게 됩니다.

교황이 세상의 왕 중에 왕이 된 것입니다.

 

왕 중에 왕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만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걸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서 카토릭은 교회를 타락케 한 음녀가 되고 교황은 적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를 가리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7장 18장의 모습이에요.

 

이건 어쩌면 지금 이 시대와 같아요.

이 시대 교회는 세속화 되었어요.

세상과 경계를 허물어 버렸어요.

교회가 세상 가치로 판단이 되어지고 있어요.

 

누가 이렇게 하는가 하면 교인들이 그래요.

교인들이 세속적 가치로 교회를 판단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스스럼없이 큰 교회는 복 받은 교회 작은 교회는 복 받지 못한 교회 그러고 있잖아요.

 

언제부터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물량적 가치가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그 가치로 교회와 목사를 판단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영적으로는 두아디라 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치로 살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말씀 하시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키셔야 해요.

회개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입니다.

가던 길에서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를 좇아가던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좇는 것으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이란? 날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이건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알아도 우리 몸은 육신의 소욕을 좇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귀에는 이세벨의 교훈이 달콤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세벨이 주겠다고 하는 것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그만큼 세상 것들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흡인력이 강해요.

 

이를 아는 성도는 날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상 것을 얻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치로부터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권사님처럼 자기 딸이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 딸이 물질적인 가치로부터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린 날마다 떡에 가치로 살아가는 애굽적 가치를 죽이는 싸움을 하여야 해요.

영적인 출애굽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두아디라의 이름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아디라”는 헬라어로 “뒤아테이로이스” 라고 하는데,

이는 “바치다” 라는 “뒤오”와, “약화” 라는 “테이레스”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우상에게는 적극적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우상과는 점점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경은 간음이라고 합니다.

 

당시 도시별 신앙의 모습을 굳이 나눈다고 한다면

에베소 교회에서는 니골라당의 교훈이 교회를 어지럽혔다고 한다면,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이 활개를 쳤고,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교훈이 난무 하였어요.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교훈은 그 본질과 뿌리는 같아요.

모두가 음행을 행하게 하고 우상 숭배케 해요.

 

육신의 소욕을 좇아가게 하는 것들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나아오는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20=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0절부터 보세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거기엔 예수그리스도가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럼 마귀는 어떻게 미혹할까요?

땅을 바라보라고 하겠지요.

무엇으로 땅을 바라보게 합니까?

떡이에요.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자기 배를 섬긴다고 합니다.

땅에 일이라고 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애들아! 너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 마냥 땅에 일을 생각하느냐!

땅에 일을 생각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인 줄을 왜 모르느냐!

 

그래서 바울이 눈물 흘리면서 당부 겸 경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육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믿음을 세상에서 먹고 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을 쫓겨난 인간들은 공통된 관심사가 먹고 사는 일이었어요.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리고 먹고 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의 탐욕이 땀 흘리지 않고 먹고 사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상숭배에요.

인간들에겐 우상 숭배는 자연스러워요.

이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몸뚱이가 자동적으로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죄라고 계속하여서 고발하고 있어요.

너희는 떡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말씀)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정체성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지역의 화폐로 본 중세 암흑시대의 표징을 봅니다.

 

두아디라 지역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그림이 주문(呪文)으로 되어 있어요.

화폐 속에 그려진 주문(呪文)은 부적을 말해요.

이는 곧 교인들의 신앙이 부적 신앙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이 길흉화복을 점치는 식의 신앙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적(符籍)이 뭔가요?

복(福)은 불러오고, 화(禍)를 면하게 해 주는 상서롭게 여기는 신물(神物)이잖아요.

이방 종교에서는 부적으로 복은 불러오고 화는 막아준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복은 불러오고 화는 멀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이 두 가지에요.

복은 받고 화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걸 중세 암흑시대는 교회가 해 준다고 했어요.

인간들의 본성 속에 있는 종교심으로 신을 찾게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경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느 종교를 가지든 복은 불러오고 화는 멀리하게 해 주면 되어요.

그것이 예수이든 부처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어요.

결국 교회나 절간이나 무당이나 같아진 것입니다.

각자의 신에게 빌면 되니까요.

 

이게 결국 종교 통합을 이루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입니다.

아무 신이면 어떻느냐?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을 찾는 행위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하게 잘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잘 사는데 종교의 다름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그러니 굳이 종교를 가지고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생하면 좋지 않으냐?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은 다 구원 받고자 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죽어서 좋은데 가느냐?

이 땅에 삶으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착하게 살면 좋은데 간다고 믿어요. 

이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가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선행을 최고의 신앙에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는다는 상선벌악 하는 신앙을 가르쳐요.

그래서 모든 종교는 착하게 살라고 해요.

이걸 불교에서는 업을 쌓는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 만들고 좋은 세상 만드는 것이 종교의 목적인데 이걸 기독교다 불교다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불교가 좋은 사람은 절에 다니고, 기독교가 좋은 사람은 교회에 가면 되어요.

각자 신앙에 따라서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요.

그러므로 카토릭 정신에서는 얼마든지 종교 간에 교류가 이루어지고 상생이 되어요.

 

카토릭은 종교의 벽을 허물자고 해요.

이제는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타 종교도 존중해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말을 목사들이 서슴없이 말해요.

 

이걸 보편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이게 지금은 시대정신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종교의 경계를 나누는 것을 저급하게 생각해요.

예수 이외는 구원이 없다고 하면 무식한 꼴통이라고 말해요.

 

그러니 지금 이 시대가 중세 암흑시대의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일을 로마 카토릭에서 하고 있어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인간 사랑을 내 세워서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다 무너졌어요.

 

지금은 기독교나 카토릭이나 이방 종교나 다름이 없어요.

지향하는 가치관들이 같아졌어요.

전부 땅에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주님께서 권면하십니다.

 

이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주님의 권면을 봅시다.

 

계 2:24-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하나님은 암흑시대 속에서도 남은 자들을 두셨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신앙의 그루터기들을 두셨어요.

노아 시대에는 홍수 속에서도 노아의 식구들을 은혜로 남겨 두셨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들로부터 세상에 사람이 편만하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홍수 후에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은혜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악을 저지릅니다.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형국으로 인간 세상은 다시 하나님을 떠난 모습으로 전개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새로운 민족을 만드십니다.

온 세계 속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남은 자가 되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성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온 세계 속에 이스라엘은 남은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또 범죄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두가 바알을 좇아 갈 때에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이라는 남은 자들을 두십니다.

 

이러한 맥을 따라서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교회 속에서 12제자를 남은 자로 부르십니다.

12제자들을 통해서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다가 두아디라 교회가 말해주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서 중세 암흑시대를 맞아서 완전하게 타락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모두가 이세벨의 교훈을 따를 때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두십니다.

이들을 통하여 다음 시간에 살펴볼 종교 개혁 시대가 도래 하게 됩니다.

로마 카토릭에서 나온 자들이 반 카토릭적 교회를 주창하면서 생겨난 교회가 이름하여 개혁주의 개신교입니다.

 

개신교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혁주의인 개신교가 또 타락을 합니다.

맘몬주의에 빠져서 다시 카토릭화 됩니다.

 

이 때 또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일으켜서 마지막 회개 운동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고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있어왔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항상 그 시대의 풍조에 따르지 않고 역행하면서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들은 항상 그 시대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창세전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전하면 시대 정신에 맞지 않은 자로서 이단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남은 자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이긴 자들이 누리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십시다.

 

26-29=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긴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어떤 권세인가 하면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트리는 것과 같은 권세라고 합니다.

이 권세는 시편 2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주신 권세입니다.

 

시 2:6-9=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다가 그 아들을 보냈다고 영을 내리셨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인가 하면 시온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 시온의 왕이 철장으로 원수들을 질그릇 깨트리듯이 부수어 버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온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예수님에게 예물로 표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세상 왕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왕이 누구인가 하면 마귀입니다.

마귀가 죄인들을 사로잡아 죄에게 종 노릇하게 하였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몸을 볼모로 잡고서 인간들을 자기에게 종 노릇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이 사십일을 주리실 때 시험하였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떡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절을 하라고 합니다.

내게 절을 하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 그리고 떡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들은 마귀의 이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육신은 떡으로 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자기에게 절을 하면 떡을 주겠다고 미혹해 왔습니다.

 

이세벨의 교훈도 떡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가 떡을 주겠다고 하는 이세벨의 교훈을 깨트려버리십니다.

예수님은 떡을 주겠다고 하는 마귀에게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것은 떡을 먹고 몸 보신 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서 마귀를 이겼습니다.

마귀가 떡을 가지고 우리 몸을 볼모로 잡고서 유린하던 몸에 사욕을 깨트려버린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왜? 이세벨의 교훈에 무너졌습니까?

떡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아디라에 남은 자들에게는 떡에 권세를 깨트릴 철장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복음으로 이세벨의 교훈을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복음을 주어서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떡의 가치와 싸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권세로 질그릇 같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으로 마귀의 제안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 남은 자들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권세인 말씀에 가치로 사는 그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새벽별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마지막 때 흑암이 깊음 중에 있을 때 새벽별로 오셨습니다.

새로운 날을 알리는 별로 오셨습니다.

 

계 22: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이는 새 날을 여는 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 별이 안내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별이 안내하기를 이 분이 바로 새 날을 여시게 되는 새벽별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서 암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고 보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서 그 흑암의 권세들을 깨트리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과거 적인 사건으로는 사데 교회에서 이미 하셨고 미래적인 사건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이 광명한 새벽별과 같이 새 날을 밝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자들에게 새벽별을 주어서 예수님과 같은 권세를 가지고 흑암의 권세들을 질그릇 깨트리듯이 깨트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들이 다음 시간에 살펴볼 사데 교회의 역사를 여는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어둠이 이긴 것 같지만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이긴 것같이 두었을 뿐입니다.

중세 암흑시대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어둠이 짙을 때 분연히 하늘에 새벽별들을 일으켜서 새 날을 여셨고 앞으로도 여실 것입니다.

 

어제 포천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그럽니다.

포천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래요.

목사님! 왜? 복음 전하는 분들이 없습니까?

갈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저는 여러분이 두 증인이 되셔서 교회로 가라고 합니다.

교회 안 간다고 하지 말고 가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빛으로 어둠인 이 세상에 오셨듯이 여러분들이 광명한 새벽별로서 빛이 되어서 가라고 합니다.

가서 그냥 서 있으면 됩니다.

어둠에 둘러싸여서 있다는 것 자체가 순교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눈에는 한국 교회 모두가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고 나만 홀로 남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새 날을 밝힐 새벽별들을 두셨습니다.

 

그분들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다 숨겨져 있습니다.

때가 되면 이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복음의 빛을 발할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들처럼 항아리 속에 감추인 횃불을 높이 들 것입니다.

자기 몸이 깨어지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복음을 증거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아리의 깨어짐을 통해서 빛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빛을 두셨습니다.

그 빛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우리 몸이라는 항아리를 깨트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두 증인들이 되어서 이세벨의 교훈으로 세속화 된 교회에 가서 엘리야의 심정으로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 머뭇거릴 것이냐?

바알을 택하든지 여호와를 택하든지 하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그래도 외쳐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요만큼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아디라에 남은 자들에게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이 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잠시잠간 후면 진짜 광명한 새벽별 되신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참고 이겨내십시오.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계속하여 이긴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두아디라 교회 속에서도 남은 자를 두셨듯이 자기 백성은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견고하게 세움을 입고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이 우리 영혼의 든든한 닻이 되어서 이세벨의 교훈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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