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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9강.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12-17)

by coroa 2020. 8. 18.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9강.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12-17).-

 

 

 

오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버가모는 내륙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산 기슭 높은 구릉 위에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탑 위에 도시가 세워져 있어 왕관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버거모를 일컬어 “관을 쓴 도시”라고도 불렀습니다.

 

버가모에는 세상의 모든 신(神)들의 신전(神殿)을 세워 놓았어요.

도시 곳곳마다 신전들로 가득했어요.,

그래서 “신들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버가모는 헬라 정신으로 가득했어요.

헬라 철학은 신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여서 범신론(汎神論)사상을 낳았습니다.

이걸 신이라고 개념화라고 합니다.

신을 개념화 시켜 놓았다는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신은 이럴 것이다” 라고 이미지화 하여서 고정화 시켜 놓은 것을 말합니다.

 

어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는데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장면이 나오는걸 보았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것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인간들이 만들었어요.

인간들이 생각해 낸 것이 기우제를 지내면 신이 비를 내려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자기들이 고안해낸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게 신의 개념화에요.

 

인간들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 생각을 이미지화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해요.

이렇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섬기는 겁니다.

쉬운 말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돼지 머리 놓고 빌면 사고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돼지 머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안 지내보세요.

찝찝해요.

찝찝함을 두고서는 불안해요.

 

그래서 그 찝찝함을 달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곤 안심합니다.

이게 다 헬라 철학에서 나온 범신론적 사고입니다.

 

참 웃기지요.

이게 인간이에요.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실상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라요.

 

인간 세상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는 세상을 살다가 보면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안 한 겁니다.

이 불안감을 달래기 위하여 신이라는 존재를 개념화 시키게 된 것입니다.

 

바다에 가면 바다 신인 용왕에게 용왕제를 지내고!

산에 가면 산신령에게 산신제를 지내야 해요.

그래야 안심이 되는 겁니다.

 

심마니들을 보세요. 

산삼을 캐러 가기 전에 제일 먼저 명태 포와 막걸리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잖아요.

왜? 명태포와 막걸리로 제사를 지내는가요?

이건 인간들이 좋아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은 신도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신이 복을 주고 저렇게 하면 신이 화를 내고 저주 할 것이라는 개념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 세계에서는 신이 인간의 수만큼이나 많은 겁니다.

실제로 헬라 철학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아덴에서는 아덴의 시민에 숫자보다 신의 수가 더 많다는 말을 하였어요.

 

아덴은 지금 그리스 아테네를 말해요.

그리스를 신들의 도시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 그리스 올림픽을 할 때 그리스를 상징하는 것을 수 많은 신전들로 보여주었잖아요.

이건 그만큼 인간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헬라 철학은 신을 생산해 내는 공장과 같았어요.

신이 생산이 되었으면 그 신을 위한 신전을 지어야지요.

그래서 각양의 이름을 가진 신전들이 즐비했던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전이 많은 것도 다 이러한 연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 보면 각양의 이름을 딴 신들이 있었고 그 신전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 가 보니까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였어요.

이게 뭡니까?

혹시 인간들이 알지 못해서 섬기지 못하는 신이 있을까봐 그런 거에요.

혹시 그 신이 화를 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신을 달래려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을 하나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모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의 신전이 이곳에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의 도시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소 아시아 지역에서 신전이 가장 많은 도시였으니까 신들의 도시라는 말이 낯설지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버가모를 통해서 그 시대 영적 상태를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버가모에서 행하여지던 것들이 곧 그 시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버가모는 “로마 국교 시대”를 상징합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면서 교회의 정체성이 버가모의 신전 신앙처럼 변했어요.

세상의 신이란 신은 모두가 로마의 국교화가 된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말만 기독교가 국교이지 실상은 모든 종교를 혼합한 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가 극심한 변질을 하고 이방화가 되어가게 됩니다.

 

로마가 버가모를 점령하고 나서 보니 온 도시에 신전들이 즐비한 겁니다.

각양의 이름으로 신전들이 세워져 있는 거에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신전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서 로마는 황제 숭배 신앙을 고안해 냈어요.

아! 황제도 이런 식으로 섬기게 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전들 속에 황제의 신전도 건립하여서 황제도 신으로 숭배케 하면 자연적으로 식민지 백성들을 통치하기에 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황제 숭배 사상은 순전히 속국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로마의 원로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버가모의 신전들을 본 따서 지역마다 신전을 짓고 황제 숭배 사상을 꽃 피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서머나가 제일 먼저 신전을 짓고 황제 숭배 신앙을 시작을 하였다고 한다면,

버가모는 황제 숭배 사상이 꽃을 피우기 시작을 했어요.

로마가 버가모의 신전들의 형식을 빌려서 황제숭배 사상을 퍼뜨리기 시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가모는 로마의 사랑을 엄청 많이 받았어요.

왜냐하면! 황제 숭배 신앙을 정착 시켜 준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버가모를 벤치마킹하여서 도시마다 황제를 위한 신전 건립을 독려하였던 것입니다.

 

버가모는 황제 숭배 신앙을 꽃피운 공로를 인정받아서 로마로부터 독립된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되었어요.

자치권(自治權)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곧 독립 국가와 같다는 말입니다. 

버가모는 재판에서부터 집행하는 것까지 로마의 결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어요.

쉬운 말로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가모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한 자긍심으로 알고 버가모는 “정의의 칼”이라고 했어요.

 

자신들의 판단이 곧 정의란 말이에요.

그래서 버가모의 상징물을 칼로 만든 겁니다.

칼의 이름을 “정의의 칼”이라고 하면서 방문객들에게 기념품으로 만들어 팔았어요.

 

어린이 만화 영화 같은데 보면 주인공이 요술봉 같은 것을 가지고 야잇~!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버가모에서 유래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버가모 사람들은 자기들은 정의의 도시에 살고 있다고 자긍심이 대단했어요.

 

버가모는 자신들이 하는 재판은 신탁(神託)에 의한 것이라고 했어요.

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러한 것이 황제 숭배 사상에 이용이 되면서 황제의 판단은 곧 신의 판단이라고 하면서 절대 복종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같은데 보면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싸우지요.

그럴 때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숙이면 죽이라는 것이고 손가락을 치켜세우면 살리라는 것이에요.

결국 사람의 목숨이 황제의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황제는 신탁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는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한다고 명시해 놓았던 것입니다.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한다는 말은 황제는 인간들이 판단 할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곧 황제는 신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황제의 판단은 곧 정의이고 진리라고 백성들에게 강조했던 겁니다.

이게 모두가 버가모의 신탁을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나중에 교황이 왕들을 임명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교황은 옥상옥이 되어서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교황무오설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교황은 신이에요.

절대 권력이에요.

 

일곱 교회를 교회사적인 연대기로 말하면 신약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 한다고 하였어요.

그래서 일곱 교회 중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에베소 교회는 교회가 처음 세워지던 초대 교회 시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언급한 서머나 교회는 교회 시대사 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던 순교시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박해가 끝이 나고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가 되던 시대를 말해요.

 

“버가모” 라는 이름 속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어요.

 

“버가모” 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높은 탑” 또는 “망루”라고 하는데, 이는 “퓌르고스”와, “결혼”이라고 하는 “가모스”의 합성어입니다.

둘째는, “둘러싸여 있다” “에워싸고 있다” 라고 하는데, 이는 “페르”와, “결혼”이라고 하는 “가모스”의 합성어입니다.

 

종합하면 버가모 교회는 “높은 탑과 결혼한 여자” 라고 할 수가 있어요.

탑이란? 남성을 상징하고 권세를 말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 권세와 결혼을 한 꼴이 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가 로마 황제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둘러쌓이고 또한 세상 권세 위에 앉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버가모 라는 뜻이 담고 있는 내용을 영적 의미로 살펴보아도 버가모 교회는 연대기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던 시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국교이지 실제로는 기독교가 로마의 황제 품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황제가 기독교와 결혼을 하고 난 후 황제는 신의 자리에 앉아 버린 것입니다.

황제의 판단이 곧 정의가 되고 황제의 말은 곧 신의 말이 되고 말았어요.

결국 황제의 말이 정의의 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과연 황제의 말이 진리이고 정의인가요?

예수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칼을 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 속에는 그 시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12절입니다.

 

계 2: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왜? 날선 검으로 나타나셨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정의의 칼이란 뜻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 안에서도 황제의 입김이 커지기 시작을 하였어요.

교회가 황제의 칙령을 따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서서히 황제의 말이 먹히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걸 쉽게 설명하면 북한의 교회들과 같아요.

북한의 교회들은 어용(御用)이에요.

교회 안에 김일성 사상이 지배해요.

김일성의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려지고 있단 말입니다.

로마 국교 시대의 기독교가 그랬어요.

교회가 황제의 곡두각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나타나셨어요.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말이 정의의 칼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정의의 칼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 황제의 말을 듣지 말라는 싸인이에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황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판단을 따르지 말고 나 예수의 판단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야!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고 세상은 땅에 속하였어요.

교회가 세상을 판단하지 세상이 교회를 판단 할 수가 없어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판단 받는 곳이에요.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만 진리로 신봉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봅시다.

 

딤후 4:1-4=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산 자와 죽은 자를 누가 심판 하신다고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옳고 그름을 예수님이 판단하세요.

 

황제가 판단하지 않아요.

세상이 판단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교회는 황제의 말과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는 자는 천국으로 가고,

예수님께서 틀렸다고 하는 자들은 지옥으로 가요.

 

예수님이 누구를 옳다고 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3절을 보면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고 합니다.

진리에서 돌이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는 것은 세상의 판단을 따른다는 말이에요.

즉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세상의 판단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 말자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 않는가요?

이는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 맞게 하면 되어요.

 

세상의 기준이 뭔가요?

윤리 도덕이에요.

그러다보니까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설교들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 차원으로 설교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이 있듯이 교회는 교회의 기준이 있어요.

교회는 하나님이 판단하세요.

그럼 교회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를 교인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요.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그리스도만 의이고 그 이외는 모두가 불의에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의 판단 기준은 의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인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의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의가 되지 않는 것을 마치 의로운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 되어요.

그런데 이 시대는 이게 의가 된다고 가르쳐지고 있어요.

 

차라리 교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인 잣대로 우리를 개독교라고 욕을 하니까 저 놈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좀 착하게 사세요! 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어요.

그러나 착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처럼 말하는 것에는 동의 할 수가 없어요.

주객을 전도시키지 마세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은 어깨 띠를 띠고 나가서 전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이다!

황제의 말이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시대에 로마 황제의 판단이 이 시대는 세상의 판단이 되었어요.

그래서 교회들이 세상의 눈치를 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우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교회 안에 세상 가치가 지배하게 되고 급기야 교회가 세상 놀이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한 문화 공간이 되고 교회의 일이 지역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으로는 칭찬을 들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교회의 본분은 아니에요.

 

아무리 문화공간을 만들고 지역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고 하여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가 증거 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건 문화단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교회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교회들아!

너희들이 지금 누구 판단을 두려워하고 있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를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까?

세상 권세입니까?아니면 예수님입니까?당연히 예수님이지요.

 

버가모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된 시대를 상징한다고 하였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가 로마를 이긴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게 먹힘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고 황제의 말이 선포되기 시작을 하였어요.

 

서머나 교회인 순교 시대에는 로마가 교회를 박해하자 교회가 지하로 숨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 때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박해가 사라지자 그동안 지하에 숨었던 교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젠 숨을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의 전조 현상을 띠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그 이유는 말만 기독교가 국교이지 실제로는 로마가 이교 사상을 그대로 기독교 안에 받아들이기 시작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늬만 기독교이지 그 내용은 이방 종교 그대로에요.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다양한 이방 종교의 제의(祭衣)식들이 기독교 안에 정착을 하기 시작을 했어요. 

이 시대 천주교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이 다 그 때 생겨난 것들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든가!

성호를 그리는 것이라든가!

연옥 개념이 도입이 되고!

순교자를 성인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도 이 때에 생겨났어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숭배 사상도 생겨났고!

사제들과 일반인들을 구별하고자 화려한 사제복이 등장을 하고!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된 성경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을 하였고!

또한 일주일의 첫 날을 일요일이라고 하면서 그 날은 휴일로 정하여서 지키도록 하였어요.

 

일요일은 기독교가 말하는 주일이 아니에요.

이 날은 태양 숭배일입니다.

일요일을 태양 숭배일로 정한 이유가 있어요.

 

콘스탄틴 대제가 전쟁을 할 때 정오쯤 하늘에서 십자가 문양이 나타나서 이것으로 싸우라고 하여서 군사들의 깃발을 십자가로 바꾸어서 대승을 거두었어요.

그 문양이 지금 로마 카토릭에서 쓰는 십자가 모양이에요.

콘스탄틴 대제가 전쟁을 마치고 난 후 태양 속에서 보여준 것을 기념코자 일요일 날을 한 주간의 첫 날로 삼고 그 날은 태양 숭배일로 정하고 쉬는 날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일요일이 되었어요.

일요일을 Sun Day 라고 하지요.

이는 태양 신의 날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일요일 즉 태양 신의 날이라고 하지 주일이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요일을 주님께서 부활 하신 날을 기념하여서 주의 날로 지키지만 이방인들은 일요일로 지켜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삼기 시작한 것도 이 때에 일어났습니다.

12월 25일은 태양신 탄생일이에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를 말해주고 있지 않아요.

이는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묵시가 역사를 삼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날과 달과 절기의 의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아우르기 위하여 이방 종교에서 12월 25일을 태양신 탄생일로 지키던 것을 예수님 탄생일로 정하여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예수와 태양신을 혼합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도 하나의 신으로 전락을 하고 말아요.

범신론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범신론으로서 로마 카토릭에서 자리 잡고 만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을 말하고,

“하느님”은 범신론적으로 “하늘에 있는 신”이란 뜻입니다.

 

하늘에 신이 있으면 자연히 땅에도 신이 있어야 하잖아요.

땅에만 신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바다에도 신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게 헬라 철학에서 나온 신의 개념이입니다.

 

헬라 철학은 신을 개념화 시켜 놓았어요.

그냥 신이 있다고 하자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 신화에 잘 나타나고 있어요.

그리스 신화를 보면 갖가지 이름의 신들이 있지요.

 

비를 내리는 신!

폭풍을 일으키는 신!

병을 고치는 신!

쾌락의 신!

심지어 술 신도 있어요.

 

그런데 이 시대 진보적인 목사들이 천주교에서 쓰는 용어를 쓰고 있어요.

자칭 먹물을 좀 먹었다고 하는 자들이 유식한척 하느님이라고 해요.

진보적인 목사들은 스스럼없이 하느님이라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종교 통합 운동을 일으키고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보편구원론을 외치고 있어요.

 

결국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로마 카토릭에서 주장하는 것들인데 이제는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영적으로 보면 이 시대는 버가모 시대와 같아요.

기독교가 로마 카토릭과 연합이 되어서 종속되고 말았어요.

 

로마 카토릭은 기독교가 아니에요.

혼합 종교에요.

카토릭 속에는 이방 종교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로마 카토릭은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요.

그러니까 대사들을 국가마다 파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로마 교황이 왔을 때 한국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다 초청해서 우리는 이렇게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거기에 개신교 목사도 들어가 있어요.

 

그 자리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성은(聖恩)을 입었다고 생각해요.

교황의 손을 한번 잡아도 성은을 입었다고 감격하고 울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부산에서 치러진 WCC 총회도 마찬가지에요.

그 행사를 한국 기독교 연합회에서 했어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대회장을 맡았구요.

WCC를 누가 조정하는가 하면 로마 카토릭이에요.

 

WCC가 뭔가요?

세계기독교연합회에요.

1700년 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여서 모든 종교를 그 품에 안았듯이 지금은 로마 카토릭이 모든 종교를 품고 있어요.

 

초대교회부터 교회를 혼합주의로 변질시키고자 하는 마귀의 궤계는 잠시도 쉰 적이 없어요.

 

지금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어요.

지금은 혼합주의가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어요.

목사들이 보편 구원론을 말하고 있어요.

이게 이 시대 풍조에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였음에도 이방 종교들이 행하는 모든 제의(祭儀)식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철저히 종교를 정치에 이용을 하고자 나타난 현상들이에요.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에게는 국가 경영이 우선이지 신앙은 도구일 뿐입니다.

나라를 경영하자만 모든 민족을 아우르고 보듬어 안아야 해요.

그러자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적은 누룩과 같이 기독교를 변질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순수성이 사라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방화 되기 시작을 하였어요.

결국 버가모 교회는 버가모의 이름처럼 교회사적으로 교회가 세상 권세와 결혼을 하여서 세상으로부터 둘러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너희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 실상을 알려 주십니다.

 

네가 지금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13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사는 곳이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고 합니다.

위(位)란? 보좌를 말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지금 사단의 등에 업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이를 알려주시기라도 하듯이 버가모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도안(圖案)이 “사단의 보좌”가 그려져 있었어요.

이는 제우스 신전의 보좌에요.

제우스 신은 신들 중에서 가장 으뜸 신이에요.

그래서 제우스 신이 앉아 있는 보좌는 다른 신들이 떠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어요.

 

알다시피 버가모는 신들이 도시입니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버가모에서는 자기들은 신들이 앉아 있는 도시라는 뜻으로 사단의 보좌를 화폐의 도안(圖案)으로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가모의 사회현상 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교회사적으로 로마 국교 시대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가 사단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스스로를 “교회의 수호자” 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가 교회를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키는 자라는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 화상(畵像)을 넣은 동전을 주조해서 사용하도록 하였어요.

버가모 지역의 화폐에 사단의 보좌가 도안이 된 것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가 되고서는 황제의 얼굴을 화폐에 새겨 넣음으로서 결국 황제가 사단의 자리에 앉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이 때 “안디바” 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황제는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황제의 말이 진리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라고 외칩니다.

그러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13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에는 “안디바” 가 누구인지 나타나지 않아요.

안디바 라는 이름은 여기에서만 언급이 되어 있어요.

이는 곧 감추어진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 부분의 학자들은 안디바를 이름 없는 성도라고 합니다.

 

이게 시사하는 바가 커요.

어느 시대이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이름 없는 성도들이었어요.

누가 타락에 앞장섰는가 하면 잘난 자들이었습니다.

대 부분 목사들이 앞장을 섰어요.

 

지금도 목사들은 복음에는 관심이 없어요.

도리어 성도들이 복음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대 부분의 목사들은 교회 운영에만 관심이 있어요.

복음도 교회 운영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분들이 안디바 처럼 드러나지 않고 귀한 겁니다.

다 연약한 모습으로 있어요.

 

이건 교회사가 증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아요.

동일한 역사의 지평에 서 있어요.

그러므로 교회사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이름 없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켰듯이 지금도 이름 없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어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세요.

우린 늘 우리 신앙을 확인하여야 해요.

 

우리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다고 장담하지 마세요.

한 방에 훅~ 하고 가는 수가 있어요.

그만큼 그 시대의 사조에 합류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로마 국교화가 되면서 서서히 권력의 맛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음녀 노릇을 했어요.

그런 중에서도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믿는 자들이 있었고 있어 왔고 지금도 있어요.

이들이 바로 안디바 에요.

 

안디바는 “안티 파스”라는 말입니다.

“안티” 라는 말은 “반대 한다”는 뜻이고, “파스”는 “동의하다” 라는 뜻이에요. 

안티와 파스는 역설적이에요.

안티는 부정이고, 파스는 긍정이에요.

 

그럼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긍정하는가요? 

이는 로마 황제가 주라는 것은 부정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말이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 안에 적은 무리들이 안디바가 죽는 것을 보고도 예수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고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께서 버가모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무리들을 붙잡아 주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황제를 주라고 하는 때에 시대의 흐름을 거스리고 일어나는 자들이 있었어요.,

비록 작은 무리이지만 “예수님만이 주이시다” 라고 고백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그들을 붙잡아 주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두어 가지 책망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책망을 들어봅시다.

 

14절입니다.

 

계 2: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버가모 교회 안에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난무했어요.

발람은 어원적으로 “백성을 파멸하다” 또는 “백성을 정복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떠나게 한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인본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발람을 헬라어로 하면 니골라에요.

니골라를 히브리어로 하면 발람이구요.

이는 두 사상의 근본이 같다는 말입니다.

 

먼저 발람의 교훈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타락케 한 내용은 민수기 22장에서 25장까지 나옵니다.

긴 내용인데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을 하는데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됩니다.

이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숫자를 보고 두려워서 장로들을 모아서 의논을 합니다.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 복술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에 발락 왕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서 선지자(무당)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발람에게 보냅니다.

 

장로들이 발람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합니다.

발람이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에게 물어 볼 테니 기다리라고 합니다.

발람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들은 복을 받은 민족이므로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들을 따라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모의(謀議)에 동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발람이 장로들을 불러서 자기는 못 가니까 당신들만 가라고 합니다.

장로들이 이 사실을 발락 왕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발람 왕이 회유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발람에게 금, 은, 보화와 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이에 발람이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한 번 아니라고 하면 끝내야 하는데 또 묻는 것은 자기 뜻을 포기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을 따라 가라고 합니다.

따라 가되 하나님이 주신 말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 도중에 나귀가 포도원 샛길에서 칼을 들고 선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 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를 때리면서 빨리 가자고 하니까 나귀가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당신을 죽이고자 칼을 들고 서 있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람을 나무랍니다.

 

이에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그럼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돌아가지 말고 발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전하라고 합니다.

 

발람이 가자 발락 왕을 비롯해서 모든 귀족들이 나와서 맞이합니다.

그리곤 바알 신당에 가서 신탁을 받고자 제사를 드립니다.

무당 굿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의 입에서 예상외의 말이 나옵니다.

발락 왕을 나무라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은 복술로는 저주 할 수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 때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게 우상 숭배하고 춤추던 여자들과 음행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24.000명이 죽게 합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버가모 교회가 행하는 것이 발람이 행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버가모 교회에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음행을 행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걸 발람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이는 버가모 지역으로 말하면 실제로 이교도들이 행하는 종교 의식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교도들은 음행을 종교 의식화 하였어요.

신전에 남자 사제와 여자 사제들을 두고서 합법적으로 음행케 하였어요.

 

이들은 음행이라고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종교 의식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제사를 지내려고 온 사람이 신전에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 관계를 맺으면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는 교리를 만들어 놓았어요.

 

신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은 신을 대리하는 자로 여겼어요.

그러니 신전의 사제와 성 관계를 맺는 것은 신성한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남자들은 여 사제와 관계를 맺고 여자들은 남 사제들과 관계를 맺었어요.

그러니 신전마다 문전성시를 이룬 것입니다.

 

특히 버가모 지역은 신들이 도시답게 모든 신전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 도시 자체가 음행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버가모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일곱 교회 모든 지역이 다 그랬어요.

기독교 입장에서 음행이지 그들의 입장에서는 거룩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도시마다 세워진 신전에서 행하여지는 의식은 대부분 에로티시즘적인 것이었어요.

그만큼 음행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음행의 역사는 인류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어요.

 

지금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 되었어요.

이 시대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입니다.

인간들 세상은 잘 살면 잘 살수록 음행은 더해가요.

이는 죄가 인간의 몸에 쾌락을 주는 것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어요.

그러니 교회 안에 자연히 이방종교 풍습들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짓 종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미혹을 하였으니 자연히 기독교와 이방 종교가 혼합이 되는 종교적인 타협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걸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이 왜? 매력적인가 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해요.

쾌락을 추구해요.

이건 본능입니다.

이 본능을 종교가 채워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싫어하겠어요.

 

발람이 우상 숭배케 하고 음행케 하였다고 하지요.

신약적으로 우상숭배란? 탐심이에요.

그리고 음행이란?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음행의 성경적인 정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복 받고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여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이걸 주겠다고 하잖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사업도 잘 되고, 자식도 잘되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잖아요.

 

목사들이 기복 사상을 부추기고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에요.

쉬운 말로 돈 많으면 복 받은 자이고 가난하면 저주 받은 자로 통하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어렵고 힘든 일은 숨기고 잘되고 흥왕 된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가난을 창피하게 생각해요.

 

이게 모두가 기복 사상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어요.

 

탐심과 음행은 동전의 앞 뒤와 같습니다.

둘은 항상 같이 나타나요.

인간은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 교회이든 교인이든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교회의 타락은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일어나요.

속된 말로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도 잡아먹는다고 하듯이 교회가 돈 맛을 알고 나니까 이젠 절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목사들이 무당 짓을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돈을 주겠다고 하잖아요.

축복 받는 비결을 알려 주겠다고 하잖아요.

이게 발람의 교훈이에요.

 

발람을 일컬어 브올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브올”이란? “등불”이란 뜻입니다.

“발람”이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 라는 뜻이 있어요.

조합하면 등불은 등불인데 백성을 파멸시키는 등불이란 뜻입니다.

 

교회식으로 말하면 말씀은 말씀인데 타락케 하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복음인데 쾌락을 좇아가게 하는 복음이에요.

이런 말씀은 뱀의 독처럼 들으면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빛이라고 여겼어요.

자기들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게 뱀의 독이었는데 말이죠.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빛의 아들이라고 자부하면서 백성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의 신앙은 외식으로 흐르고 급기야 파멸에 이르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면서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사람 하나 얻고자 다녀서 얻으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칭 빛이라고 하던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거짓 말씀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을 교회 크기로 판단해요.

교인들이 의식 속에는 큰 교회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축복 받지 못한 교회라는 등식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큰 교회는 안심을 하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세상적 가치의 물량주의를 복에 개념을 가르치면 발람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증거라고 가르치면 발람이에요.

성경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을 복 받은 증거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이건 목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자 공교하게 지어낸 말들입니다.

 

이제 니골라당의 교훈을 살펴봅시다.

 

계 2: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는 “니콜”과 “라오스” 라는 합성어에요.

“니콜”은 “승리” 라는 뜻이고, “라오스”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백성이 이겼다” 라는 말이 됩니다.

 

이는 곧 교회 안에 백성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설교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한다는 뜻이에요.

성경을 철학으로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득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성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주의로 빠지면 사변(思辨) 신앙이 되어요.

쉬운 말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된단 말입니다.

 

니골라는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봅시다.

 

행 6:3-6=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일곱 집사는 모두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니골라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어요.

이건 마치 가룟 유다도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도 한 명이 사단의 종이었듯이 일곱 집사 중에서 니골라도 사단의 종이었어요.

 

하나님은 꼭 양들 틈에 염소를 끼워 놓아요.

이는 양을 치는데 염소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 안에도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니골라는 유대교에서 입교한 안디옥 사람이라고 하지요.

다른 집사들에게는 이런 저런 수식이 없는데 유독 니골라에게만 있지요.

이것은 니골라는 다른 집사들과는 다른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니골라를 구체적으로 이런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니골라의 신앙의 뿌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거에요.

어디 사람이라고 합니까?

안디옥이지요.

 

안디옥은 로마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정신이 팽배한 도시였어요.

로마의 정신은 헬라 철학에서 나왔어요.

그리스(헬라)가 철학의 뿌리라고 한다면 로마는 헬라(그리스) 철학을 꽃을 피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지배하는 나라마다 철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취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안디옥이 로마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였으므로 헬라 철학으로 유명했어요.

알다시피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찰학자들 중에서 말쟁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먹물 많이 먹은 자들이 말을 잘 한다고 하지요.

이는 그들의 말이 논리정연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들으면 반박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들으면 그럴듯하기 때문에 어느 시대고 말 잘하는 자들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따랐어요.

니골라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니골라는 안디옥 사람으로서 철학으로 무장이 된 자였어요.

달변가였어요.

그런 그가 유대교에 입문하여서 유대교 사상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니골라는 요즘 말로 삼박자를 다 갖춘 자였어요.

헬라 철학을 했지요.

유대교 신앙도 가졌어요.

거기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복음까지 알아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 입김이 얼마나 강하였겠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겁니다.

이게 결국에는 교회 안에서 당(當)을 짓고 복음에 반하는 영지주의 사상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을 통칭적으로 말할 때 니골라 당이라고 했어요.

 

영지주의는 영(靈)은 고급한 것이고, 육(肉)은 저급한 것이라고 여겼어요.

이게 어떤 사상을 낳게 되는가 하면 육은 하급이고 영은 고급이기 때문에 고급인 영은 하급인 육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어떤 죄를 짓는다 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육체의 쾌락을 좇아갔어요.

 

결국 무 율법주의로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철학으로 이해되면 무 율법주의를 낳아요.

막 살게 된단 말입니다.

 

결국 신앙이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 이원론으로 나타나서 방탕과 방종으로 흘러요.

이게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 복음을 훼손하는 가장 큰 이단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복음을 훼손하고 있어요.

 

이들은 구원은 영적인 것을 깨닫는 것으로 여겼어요.

그래서 신앙을 영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두었어요.

결국 신앙이 복음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사변(思辨)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는데 육체로는 복음과 반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디도서 1장과 디모데후서 3장을 봅시다.

 

딛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딤후 3:5-7=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디도와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들이에요.

디도는 그레데 교회의 감독이었고,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어요.

그레데나 에베소나 그 당시에는 지역을 망라하고 로마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가치가 도시를 떠나서 모두가 대동소이했어요.

 

자연히 그레데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영지주의자들이 창궐을 했어요.

이들의 특징을 바울은 저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한다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견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예수를 믿으면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깨달으면 되는 것이고 삶과는 상관이 없구나!

그러니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것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 알면 막 살아도 된다는 자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니골라는 먼저 유대교의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어요.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헬라 철학으로 이해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 율법주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무 율법주의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영지주의 사상은 어느 시대이고 있었어요.

지금도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서 누룩처럼 구석구석에 퍼져 있어요.

특히 복음을 육으로 이해하는 자들 속에 암덩어리처럼 퍼져 있어요.

우리 주변에 보면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어요.

이들이 바로 니골라당이고 영지주의자들이에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가장 간교했어요.

이는 마귀가 인간을 가장 잘 안다는 말이에요.

마귀는 인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게 돈이고 쾌락이에요.

 

발람의 교훈이 돈을 좋아하는 기복주의를 낳았고,

니골라당의 교훈이 막 살아도 된다는 쾌락주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기복주의와 쾌락주의는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기생했어요.

 

이들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게 만들어요.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어요.

이 싸움을 포기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요.

화인 맞은 심령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사라져요.

복음을 자기 죄를 합리화 하여서 뻔뻔스러워져요.

죄에 대한 아픔이 없어요.

이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떠난 감각 없는 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에다 편지하고 있어요.

이는 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을 행함같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무지하여서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생명에서 떠나 있으니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 없는 자가 되어서 죄에 대한 자각을 상실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각을 상실하니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의 삶에 모습이 바로 방탕과 방종과 방임이에요.

이 시대 어떤 자들은 복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하여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해요.

복음을 철학적으로 공교하게 그럴 듯한 논리를 펴서 성도의 삶 자체를 무가치 하게 만들어 버려요.

마치 막 사는 것이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요.

그래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가르쳐요.

결국 그레데 인들처럼 되는 겁니다.

이건 영지주의에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열매를 말하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자기 맘대로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반드시 나무가 생산해 내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나무가 가지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는 예수의 생명에 붙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방인들과 같이 죄에 대하여 감각 없는 자가 되어서 방탕과 방종과 방임하지 말라고 경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그리스도께 속한 신자가 아니냐!

그러니까 유혹에 욕심에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이고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은 죄가 주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새 사람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방탕과 방종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너희 안에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신다는 말이에요.

성도는 죄를 안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싸우고 산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아요.

막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어요.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당시에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칭 사도들이라 하고 자칭 유대인들이라고 해요.

 

산상보훈을 보면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저는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합니다.

 

속은 이리인데 겉은 양인 거에요.

겉으로는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알아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열매란? 삶을 말해요.

성경은 삶을 열매로 비유하는 것은 죄가 몸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몸을 근거로 발호를 해요.

 

그러므로 사단의 역사로 나타나는 이단은 항상 몸을 근거로 하는 쾌락주의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그 반대인 자기 가치를 챙기는 금욕주의로 나타나든지 해요.

그러므로 성경은 이단을 분별 할 때 항상 그들의 삶에 자세를 예의주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을 봅시다.

 

히 13: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지도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하지요.

이는 그가 어떤 가치관으로 사는지를 보라는 거에요.

입으로는 복음을 말해도 그 지향성이 세상 가치인 돈을 좇아가고 육체를 좇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지도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경계석으로 삼아야 할 말씀이에요.

 

이단들은 삶을 간과해요.

신앙과 삶을 분리해서 나타나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복음이 니골라당처럼 지식이기 때문에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를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금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구원파 교주 유병언이를 보세요.

그의 삶을 보세요.

돈을 밝히고 쾌락을 좇아가는 것으로 나타났잖아요.

이건 한국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의 빙산의 일각이에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유병언 사건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 시대 한국교회에 경고하려고 보여주신 반면교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 시대 많은 목사나 교인들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해요.

저 역시도 자유롭지 못해요.

 

몸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그 누구도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우리 몸뚱이는 하나님 보다 돈을 힘 삼고자 하고 천국 보다 세상을 더 집착하고 복음조차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고자 해요.

그러므로 우린 모두가 말씀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발가 벗겨서 우리의 악함을 고발당하고 주의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빙자해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을 복음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이 말 뜻을 잘 이해 하세요.

우리가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하고 복음 알았으니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은 달라요.

 

다시 말합니다.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지 마세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성경 어디에 복음 받고서 그렇게 막 산 사람들이 있는가?

성경 어디에 복음 알았으니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가?

없어요.

 

그건 모두가 거짓 종들이 인간의 마음을 훔치고자 지어낸 공교한 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누구의 말을 참고하지 말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 목사가 검증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검증을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성경을 상고하세요.

 

그 누가 어떤 말을 하여도 성도의 삶을 간과하는 자들은 조심하세요.

특히 복음을 빙자해서 믿는 것과 사는 것을 이원화 시키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를 편다고 할지라도 신앙의 삶을 무가치 하게 여기는 자들은 경계하세요.

비 진리는 항상 몸에 사욕을 좇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 몸을 근거로 역사해요.

우리 몸은 죄를 그려내는 도화지에요.

비 진리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면 우리 몸도 반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신약 성경의 서신서마다 너희가 성도라고 한다면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에요.

그러므로 철학으로 복음을 포장하면 그럴듯하게 들려요.

매력적이에요.

이성적으로 들으면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 가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맞으니까 속아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엡 4:14-15=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이란? 복음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거에요.

죄인인 인간들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에요.

알다시피 죄인들의 이성은 죄가 주는 이성이므로 이미 틀린 이성이에요.

그럼에도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이미 틀린 죄인의 이성을 동반하여서 수용을 해요.

그러니까 철학적 설교가 마음에 와 닿는 것입니다.

 

철학적 설교는 믿음이 없어도 이해가 되어요.

이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럴듯하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진리라도 되는 줄 알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서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합리화를 시켜요.

죄인이 무얼 해도 죄인데!

죄인에게 발생되는 것 중에 죄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막 사세요 라고 해요.

 

논리적으로 들으면 그럴 듯해요.

마치 죄 짓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들려요.

그러나 아니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 폼으로 와 계시지 않았어요.

그러한 사고가 바로 죄라는 것을 고발하고 억제시키고자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오셨어요.

성령은 우리 몸을 필요로 해요.

 

영지주의자들은 뱀의 혀처럼 두 말을 해요.

복음을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복음을 심리학이나 철학적인 논리로 해석하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독(毒)을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마치 죄 씻어 주는 하이타이로 이해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마치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책 특권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한단 말이에요.

 

이러한 말씀을 오래 들으면 서서히 죄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리고 급기야는 삶이 신자인지 이방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가요.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감각이 없는 이방인과 같이 자기를 방탕과 방종에 내어 맡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이라고 했어요.

 

이건 지금도 그대로 교회 안에 나타나고 있어요.

니골라 당(黨)처럼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 버려요.

결국 사사기처럼 백성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을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말씀에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를 둘러보세요.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어요.

인간의 상식과 이성이 교회 안에서 진리가 되어서 통용이 되어요.

결국 처음 사랑인 십자가 복음의 순수성은 온데 간데 없고 인간들의 집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 교회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에요.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싸우신다고 합니다.

 

16절을 봅시다.

 

계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회개하라고 합니다.

책망은 자기 백성들을 돌이키게 하려는 사랑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책망을 들으면 돌이키게 되어 있어요.

 

우린 늘 엇 길을 가다가 돌이키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돌이킵니까?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해부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까지 해부하세요.

 

내가 지금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지는 살펴보셔야 해요.

말씀 앞에서 나의 모든 속속들이 살핌을 당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지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해부를 하세요.

 

살아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늘 자기 죄를 고발당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그리하여 죄로부터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영지주의를 좇아가고자 하는 성질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영지주의 사고가 우리 육신에겐 딱 맞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는 항상 뱀의 말이 달콤하게 들려요.

 

뱀의 말은 우리를 합리화 시켜 주어요.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이게 합리화에요.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틀렸어요.

왜냐하면! 우리 죄를 고발하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씀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기능이 담겨져 있어요.

 

쉬운 예로 듭니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공부할 시기에 논다는 것은 악이에요.

 

그럼 이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을 해 주어야 해요.

부모님이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이 말씀이 곧 그 아이에게는 자기의 잘못을 고발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어요.

그 잔소리가 곧 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말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해요.

이게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에요.

 

만약에 부모가 공부하지 말고 놀아라!

그러면 이 아이는 공부 안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 줄을 몰라요.

왜냐하면! 부모가 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고 했기 때문에 놀아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 안 해도 그것이 나쁜 것인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막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이 말이 계속하여 여러분의 악함을 고발하는 기능을 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저 역시도 제 말에 고발을 당하고 있어요.

 

저는 설교를 하면서 얼굴이 화끈 거려요.

모두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내 자신을 보면 걸레도 이런 걸레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수없이 참소를 해요.

야! 너 그러고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설교를 하느냐?

사단이 비아냥거려요.

 

그럼 전 그럽니다.

그래 마귀야 네 말대로 내가 설교 안 하면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데!

내 꼬라지를 보고 설교 안하면 누가 기뻐하겠느냐!

네 놈이 아니냐!

내가 왜? 네 놈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저는 그래 사단아 네 말대로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 맞아!

그런 내가 사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 흘려 주심 때문이야!

난 이 사실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어!

나는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지키면서 살 수가 없어!

그러므로 나는 평생 동안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은 자로 살아 갈거야!

이게 제 신앙고백이에요.

 

우린 생래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 할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늘 잊지 말고 이런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셨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어요” 로 나오면 안 되어요.

도리어 “주여 오늘도 주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나와야 해요.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은 그 입의 검으로 우리와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회개케 하시는 일을 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검이 되어서 우리의 심령 골수를 쪼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마칩시다.

 

17절을 봅시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버가모 교회에만 국한 된 말씀이 아니에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교회들에게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교회가 누구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들이 바로 이긴 자들이에요.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귀를 열어주세요.

하나님 말씀은 들려지는 것이지 우리가 듣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들려지게 해 주셔서 듣는 것이지 우리가 애를 써서 듣는 것이 아니에요.

먼저 귀를 주시고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자들은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긴 자들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합니다.

 

만나가 뭡니까?

광야에서 먹던 양식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린 만나를 먹였어요.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본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떡에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가치로 사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못 알아먹었지만,,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이에요.

그들은 애굽 밖에 몰라요.

애굽은 떡으로 사는 곳이에요.

이는 이 세상 가치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후손이에요.

언약의 후손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이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언약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맞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에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구원을 하셨어요.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엡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하셨어요.

그런데 그들은 만나를 애굽의 떡에 가치로 판단했어요.

육신의 배부름을 얻고자 하였어요.

 

이게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신앙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땅에 복을 추구했어요.

결국 만나가 감추어져 버린 것입니다.

만나의 목적이 상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지고 구약의 만나를 설명하십니다.

만나는 배부름을 얻기 위하여 준 양식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찢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의 떡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한다고 하십니다.

이제 만나의 정의가 내려졌습니다.

예수님은 만나가 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전하기 시작을 합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에 떡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영생을 주고자 오셨다는 것이 증거가 되어졌습니다.

이에 초대교회는 날마다 교회로 모여서 떡을 떼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어요.

 

함께 떡을 떼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자들이라고 고백을 하였어요.

핍박 속에서도 천국에 소망를 가지고 살았어요.

믿음을 지켜 왔어요.

 

그런데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정체성이 상실되기 시작을 하였어요.

기독교가 로마와 하나가 되면서 예수가 감추어지기 시작을 하였어요.

세상의 떡 주는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고난이 사라지고 육신이 편해지자 교회의 정체성이 하늘에서 땅으로 급락하고 말았어요.

 

서머나 시대인 순교 시대 때에는 핍박 가운데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그 모진 궁핍과 고난과 환난을 견디고 이겨내었습니다.

그런데 핍박이 사라지고 평안함이 도래하자 신앙의 싸움이 사라졌어요.

결국 기독교가 정치와 하나가 되자 땅에 복을 추구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가 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말았어요.

 

결국 만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감추어지고 만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인하여 십자가 도는 인본주의에 가려지고 말았어요.

자연히 교인들이 신앙의 가치가 육신을 좇아가는 세속주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걸 만나가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긴 자들에게 감추어진 그 만나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에 회복을 일으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안디바가 누구인가요?

모두가 로마의 혼합주의에 빠져 있을 때 시대의 풍조를 역류하고 서머나 교회의 순교정신으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산 성도들을 말해요.

 

안디바는 어느 시대이고 있어요.

지금도 적은 무리이지만 있어요.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히 있어요.

하나님은 이러한 안디바 같이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흰 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럼 흰 돌과 새 이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계 2:17절 “내가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흰 돌이란? 그 당시 재판을 할 때 승소한 자들에게 주었어요.

당시 배심원들은 재판 과정을 보고서 유죄(有罪)가 인정 할 때는 검은 돌을 던졌고 무죄(無罪)가 인정 될 때는 흰 돌을 던졌어요.

 

예수님으로부터 흰 돌을 받았다는 것은 장자 이루어질 심판에서 너희가 이긴 자로 드러나게 해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비록 신앙을 지키다가 인생에 있어서 세상적으로 실패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 하여도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이긴 것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고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랐어요.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호의호식하면서 이긴 자처럼 살았어요.

그러나 안디바와 같은 작은 무리들은 그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았어요.

자연히 핍절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요.

하지만 주께서 너희가 바로 이긴 자들이라고 말씀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흰 돌에 새 이름을 새겨 준다고 하지요.

 

이는 그 당시 권세가 높은 집안을 드나드는 표식으로도 사용 되었어요.

어떤 고관대작 집에 혼인 잔치가 있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실 분들에게는 초청장과 함께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었어요.

초청을 당한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그 집을 출입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이름으로 출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버가모 교회 안에 초청장을 보낸 자들이 있어요.

이는 받은 자들만이 알아요.

이들이 바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자들이에요.

이들이 이긴 자들이에요.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이는 곧 이들은 어린 양의 소유란 말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예수 이름으로 가요.

그러므로 흰 돌에 새 이름을 새겨준다는 것은 천국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이긴 자들이라고 해요.

 

새 이름이란 무슨 뜻인가요?

 

여자가 시집을 오기 전에는 친정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았어요.

그러다가 시집을 오면서 자기 이름은 사라지고 남편의 이름을 따르게 되어요.

이게 새 이름이에요.

당신은 이제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이름으로 천국에 가요.

주인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이마에 “너는 내꺼!” 라고 도장을 찍어 놓았어요.

이건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다 바른 것과 같아요.

 

우수갯 소리로 천사들이 천국 문 앞에서 이마에 새 이름이 새겨진 자들만 출입을 시켜요.

천국에 가면 마치 공항의 검색대와 같이 우리 이마에 새겨진 이름을 스캔할 것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666이 새겨져 있을 것이고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그 때 예수라는 새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무사히 통과하지만 예수라는 새 이름이 새겨지지 않고 짐승의 표인 666이 새겨진 자들은 삐빅~ 삐빅~ 하고 경고음을 들리고 결국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날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리로 갈 것입니다.

조금만 인내하고 사세요.

 

금방 시간이 지나가요.

인생 잠간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이긴 자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도 혼탁한 시대입니다. 말씀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때입니다. 너도 나도 다 진리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진리로 포장 되어서 가르쳐 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분별 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주의 은혜가 아니면 믿음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은혜와 긍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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