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30강.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요 5:8-18)

by coroa 2022. 12. 29.

 

 

30강.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요 5:8-18)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0강.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요 5:8-18)

요 5:8-1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정낙원 목사

 

우리 속담에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고발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 하는 것은 타인을 통하여서 행, 불행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탐욕으로 가득차 있어서 남보다 많이 가지면 기분이 좋고 적게 가지면 속상해 합니다.

그러니 남이 잘되는 일을 보면 은근히 시기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말이 실감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8년 동안이나 반신불수의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마음으로 빨리 고침 받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빈 말이라도 아이고 빨리 완쾌되어야 할 텐데!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여 38년 된 병이 완전히 고쳐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 나 할 것이 없이 참 잘 되었다!

이제 고생하지 않게 되었구나!

축하한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자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램이고 마음입니다.

 

그런데 축하 해 주기는커녕 나음을 입은 사람은 기쁨도 잠시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죄목으로 정죄를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가 날을 받아서 고치는 병일 것 같으면 법을 지킬 수가 있지만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 안식일에 고쳐 주셨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아니 아무리 법이 그렇다 손 치더라도 어떻게 38년 동안 병으로 인하여 고생한 사람이 나음을 입었는데 그걸 어찌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법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법의 무서움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법이란 융통성이 없어요.

죄인이 죽는 것은 이 융통성 없는 법 때문에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융통성 없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건 아주 죽이려고 작정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융통성 없는 법을 주셨지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지요.

그럼 죄는 누가 지적을 합니까?

법이지요.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 되지 않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교회 담장 옆에 아무 자동차나 주차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구청에서 나와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이라고 하면서 선을 하나 그어 놓았어요.

이젠 아무나 그 곳에 주차하면 안돼요.

사용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주차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달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그 선이 이젠 법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법은 죄를 지적하고 어기면 옥에 갇히고 죽이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법에 걸려들면 죽임 당합니다.

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은 너희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에 갇혔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법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법으로 완전히 포위가 되었습니다.

옴짝 달싹을 못하도록 법이 유대인을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법에 의해서 38년이나 되는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 안식일이라는 그 잘난 법 때문에 정죄를 당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면 어디 안식일이 무서워서 기다려지겠어요.

도리어 겁이 나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이라면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쉬는 날입니다.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말입니다.

몸과 마음 모두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편안하게 쉬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실상은 안식일은 아주 고통스러운 날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온갖 구실로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밥을 해 먹기 위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고 땔감을 옮기는 것도 노동으로 간주하여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정죄를 당합니다.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바지가 뜯어져서 꿰매는 것도 노동이라고 금합니다.

정해진 거리 이상을 가면 여행으로 간주하여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됩니다.

지금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깔고 있던 거적대기를 들고 갔다고 정죄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하는지 안식일이 아니라 꼼짝 못하게 족쇄를 채우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대로 쉴 수도 없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지키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그런 개 같은 법이 다 있느냐고 항변하겠지요?

그런데 이게 인간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죄인은 법 아래서 태어나서 법으로 판단 받다가 법에 의하여 죽습니다.

법 아래선 쉼이 없습니다.

항상 법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안식일도 법 때문에 마음대로 쉴 수가 없는 이상한 안식일을 유대인들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법을 깨는 작업을 하십니다.

아주 도발적으로 성전을 쓸어버리고 율법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친구가 되어 놉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재수 없게 여기는 사마리아도 가고 개 같은 이방인도 만나고 정면으로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일도 그러합니다.

얼마든지 다른 날에 고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꼼짝없이 법에 의하여 죽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율법을 배우고 율법이 말하는 규례들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의도적으로 율법을 깨트리는 일을 자행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자를 고쳤다는 죄목으로 법으로부터 서서히 감금당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서 심판 당하고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죽을지 뻔히 알고서도 이런 일을 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온 몸으로 법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법을 깨트리기 위해서 법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처한 그 고통을 몸소 짊어지시기 위해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체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쓰디쓴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음의 길로 뛰어든 것입니다.

죽음 속에 갇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 내기 위해서입니다.

법에 매여 옴짝 달싹 못하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법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골 2:14-1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에 의해서입니다.

온 율법을 자기 몸에 다 짊어지고 죽은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다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형이라고 해서 사형 당하신 그 분이 사흘 만에 보란 듯이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젠 율법으로 가둘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 천하에 공포 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들이 당할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내 백성들은 이제부터 율법의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그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다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그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성령을 자기백성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같은 것을 요구하는 율법에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누가! 너 왜? 율법을 안 지켜! 라고 묻거들랑 우리 주님께서 다 완성해 주셨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법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율법이 금하는 안식일에 자기 백성을 법으로부터 구출해 해고, 자신은 법에 의한 심판을 받는 자리로 한 걸음 두 걸음 내 딛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안식일을 완성해 주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입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철두철미하게 지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기면 사정없이 법대로 집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집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누구든지 이 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는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인간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신 것입니다.

죽이기로 작정 한 것입니다.

애시당초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지켜내지도 못할 법을 주시곤 지키라고 한 것은 죽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는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살고자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 앞에서 하나님 죽이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이 무지한 인사들이 율법을 지켜서 살겠다고 설쳐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지키겠다고 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한 것이 지금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38년 동안 그 지긋지긋하게 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형제가 나음을 입어도 축하하지 못하고 법이라는 잣대로 옭아매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곤 너무도 애통해 하십니다.

죄가 몰고 온 그 법으로 인하여 죽어가며 신음하는 자기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몸소 팔 걷어붙이고 나서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줄게!

내가 너희들을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게! 라고 나서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내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또한 예수님과 안식일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럼 안식일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부터 알아야겠지요.

최초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2-3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모두 완성하고 쉬는 날인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안식일이란? 창조가 완성되고 난후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쉬는 날을 말합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아침과 저녁이 있는데 일곱째 날엔 아침과 저녁이 없습니다.

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완성된 날이란 말입니다.

 

그럼 일곱째 날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와는 다른 날이란 뜻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 있는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이 필요가 없는 날이란 말입니다.

 

이는 다른 세계란 말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세계를 말하고,

일곱째 날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이 필요가 없는 묵시 세계란 말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有限)한 세계이고,

일곱째 날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이 필요가 없는 영원(永遠)한 세계란 뜻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세상을 말하고,

일곱째 날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이 필요가 없는 하늘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앞서 묵시와 역사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시지요.

묵시는 시간이 없는 세계이고, 역사는 시간이 있는 세계라고 했지요.

묵시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역사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했지요.

 

시간이 없다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말합니다.

영원한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는 인간들 세계입니다.

 

안식일은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날입니다.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은 역사에 있지 않고 묵시에 속한 날인 것입니다.

인간의 안식일이 아니고 여호와의 안식일인 것입니다.

인간은 시작과 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안식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더 이상 수고와 슬픔이 없는 세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어떻게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남게 되지요.

여러분 안식하고 싶지요?

그런데 안식이 안 되지요?

 

교회에서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지키라고 하지요.

주일을 지키라는 말이 쉬라는 말입니까?

뭔가 하라는 말입니까?

뭔가 하라는 말이지요.

뭔가 가 무엇입니까?

흔히들 하나님 일 하라고 하잖아요.

 

주일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쉬는 날이 아니고 일하는 날이지요.

말만 안식일이고 실제로는 일하는 날입니다.

 

정의하면 엿새 동안은 세상 일을 하고 이레째는 하나님 일하는 것이 되지요.

아니 주일날 새벽부터 교회 와서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잖아요.

여러분 말고 기성 교회 교인들은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안식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는 마치 안식일 날 병 고침 받고 법에 옭아 매인 38년 된 병자와 같아요.

분명히 예수님은 그동안 병에서 고생했으니 이젠 쉬라고 고쳐 주었는데

법이 그 쉼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안식을 주셨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죽도록 일만 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문제를 오늘 안식일 공부를 통해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이게 정리가 안 되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또 법에 갇히게 되요.

그러니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해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복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지겹지만!

 

자!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저녁과 아침이라는 시간 속에 있는 날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날이 되고, 일곱째 날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란 뜻이 되겠지요.

자 보세요.

 

첫째 날부터 시작하여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까지는 아침과 저녁으로 쭉 일렬로 진행되어 오다가 일곱째 날이 되자 시간이 멈춰선 것이지요.

더 이상 진행이 없어요.

일곱째 날 속에 들어가면 이젠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일곱째 날인 겁니다.

 

시간이 멈춰선 일곱째 날은 무슨 날이라고요?

안식일입니다.

쉬는 날이란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그런 날이란 말입니다.

 

일곱째 날이 누구 날이라고요?

하나님 날이지요.

하나님 날에 들어가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그럼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이 되겠지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이 일곱째 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역사가 묵시 속으로 잠식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이 창조주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우리로 비유하면 우리가 예수님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 안이 뭐가 됩니까?

일곱째 날이고 안식일이지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예수님이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담당해주셨잖아요.

 

그럼 이 사실을 믿는다면 율법에 채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우리더러 야! 너 왜? 하나님 말씀 안 지켜!

그러면 야! 이 놈아!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해 줬잖아! 라고 해야 해요.

마귀에게는 욕해도 되요. 

그러지 않고 다음부터 잘할게요! 라고 하면 그 광경을 지켜 보던 예수님이 속 터져 하십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는 역사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묵시에 속하였잖아요.

역사는 일하는 곳이고 묵시는 쉬는 곳입니다.

성령이 역사 속에 있는 우리를 묵시 속으로 집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안으로 밀어 넣어 주세요.

 

마치 노아를 방주 안으로 밀어 넣듯이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십니다.

믿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믿어지면 비록 몸은 곤하여도 마음은 쉼을 얻을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몸이 쉼을 얻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몸은 나중에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때 가서 쉼을 얻어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수고를 쉬게 해 주시는지 말씀해 주셨는데 살펴봅시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지요.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뭡니까?

가난입니까?

병입니까?

속 썩이는 자식입니까?

바람피우는 남편입니까?

돈 물 쓰듯이 쓰고 사치하는 아내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것 가지고 오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맞아요.

예수님은 이런 것 해결해 주려고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고 율법입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가난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죄입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멍에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내 멍에라고 합니다.

우리가 질 멍에가 아니고, 예수님이 지신 멍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멍에를 매고 배운다는 것은 내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다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율법적 요구를 예수님이 대신 다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앞세우고 나가면 됩니다.

 

마귀가 법을 들고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미십시오.

너 왜? 기도 안 해! 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지금도 기도하고 있어!

너 왜? 형제 사랑 안 해 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사랑하고 있어!

너 왜? 전도 안 해 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다 하고 있어!

 

마귀가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여도 주님만 내 세우세요.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중요한 것은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지 육신이 쉼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쉼을 얻으려면 육신은 열심히 말씀을 들어야 해요.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진리로 무장하라고 한 것입니다.

 

엡 6:10-17=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마귀를 이기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했지요.

즉 예수님의 새 언약을 듣고 또 듣고 마음에 새겨서 마귀의 참소를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에 쉼을 얻을 수가 있어집니다.

결국 성도의 안식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안식을 몰고 오지 행함이 안식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 안이 일곱째 날이고 안식일이란 것입니다.

안식일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것은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란 뜻입니다.

인간의 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에겐 안식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일컬어 “여호와의 안식일”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출 20: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안식일이 누구의 날이라고요?

여호와의 날입니다.

잘 기억하세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온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날입니까?

인간을 위한 날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날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날이지요.

 

그럼 인간들에겐 안식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들이 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날에 동참해서 끼워주어서 쉬는 것이지요.

엿새 동안 열심히 수고하다가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 안에서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에겐 독자적으로 쉬는 날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만 쉼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안식을 할 수가 없어요.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 할 수가 있어요.

이 말은 곧 피조물은 하나님이 안식 할 때만 안식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장소적으로 말하면 천국이 되고, 인격으로 말하면 하나님 안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안식이고, 예수 밖은 수고하고 노동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역사에 속한 인간들에겐 예수라는 분이 그렇게 중요한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예수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얼 하러 오신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하지만,

예수를 인간으로 보면 안식 할 수가 없지요.

 

여러분 예수님! 이러면 흥분이 되어야 해요.

가슴이 설레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고 엔돌핀이 돌아서 기분이 좋아져야 해요.

무덤덤하면 안 돼요.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기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죄로 인한 질고를 다 떨쳐 버렸지요.

해방이 되었지요.

비로서 안식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면서 자기 계시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시란? 스스로 난 이런 사람이다! 라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네 질고를 다 짊어지러 왔다! 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병을 고침 받은 것은 하나의 표상적 사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통하여서 병을 몰고 온 죄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신 겁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또 병들고 죽게 됩니다.

그러니 나 병 고쳤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는 지금 예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일곱째 날 속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영적 존재라고 하고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아까 일곱째 날이란? 완전하고 완성된 상태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TV 선전을 보면 아주머니가 두 손 번쩍 들고 이제 빨래 끝! 그러지요.

그리곤 커피를 마십니다.

주부에게 빨래 끝이란 이젠 쉰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커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커피 마시면 안 되어요.

커피는 일을 다 하고 나서 마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는 것은 빨래 끝 처럼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야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안식하시려면 처음 창조하실 때처럼 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창조 때의 모습이란? 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지금 세상은 처음 창조 때 세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서 같이 망가져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짓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곤 인간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이 처음 만든 그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면 이 시대 자유주의자들이 생태 신학이니 환경 신학이니 하면서 환경을 보호하자고 하는 짓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은 저주가 없는 땅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후 저주 받은 땅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나면 자기 백성들은 저주가 없는 하늘로 빼내시고 저주 받은 이 땅은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잇는 저주 받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없어졌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불 살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온다고 하지요.

 

이는 곧 에덴동산과 같이 완전한 땅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곳을 일컬어 낙원 또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내려온다! 라는 말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역사 세계가 아니고 묵시세계입니다.

일곱째 날로서 수고와 슬픔을 그친 자들이 안식하는 세계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만 들어도 황홀하지요.

빨리 가고 싶지요.

그래요.

신자라면 빨리 가고 싶어야 해요.

바울은 삼층천을 보고 난 후 빨리 죽는게 소원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믿음으로 본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무덤덤합니까?

그럼 여러분은 무슨 말을 들어야 황홀합니까?

돈 다발을 준다고 해야 황홀합니까?

예수님 재림을 말해도 기쁘지 않고 천국을 말해도 기쁘지 않으면 뭔가 수상해요.

 

그럼 질문을 합시다.

하나님께서 지금 안식 하십니까?

못하십니까?

못하시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자 땅을 저주 하셨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 땅은 완전한 땅이 아니고 망가진 땅이잖아요.

망가진 땅을 두고서 하나님은 안식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여섯째 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대신 하시려고 오셨어요.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지요.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인간 만드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인간을 만들어야 하나님이 안식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처음 창조된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죄가 없었는데 지금 인간들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 없는 인간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안식하셔야 하니까요. 

그래서 일곱째 날 속에 계신 예수님이 여섯째 날에 속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묵시 속에 계신 분이 역사 속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일곱째 날에 계실 때는 완전한 하나님이셨는데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 오실 때는 시작과 끝이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이 있는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작과 끝이 있는 어린애기로부터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임 당한 것입니다.

그럼 지금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완전한 모습이지요.

 

여러분은 천국에 가면 어린아이일까요?

어른일까요?

아담을 생각하면 답이 나와요.

아담이 어린아이로 창조가 되었나요?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나요?

어른이지요.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것 밖에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란? 완전한 자란 뜻입니다.

완전하다는 의미에서 어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선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있다가 태어나고 자라고 하는 출생 과정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람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자라고 변화되는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섯째 날에 누가 창조가 되었어요.

인간이지요.

맞아요.

지금도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인간은 원래 창조한 인간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 형상이 깨어진 고물들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시려면 처음 창조된 인간들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38년 동안 죄로 인하여 고물로 살았던 병자를 예수님이 고쳐 주심으로서 죄로부터 벗어나 죄와 상관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시청각 자료로서 고침 받아진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린 것을 예수님이 정상으로 돌려놓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이 안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린 원흉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서 안식하지 못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여섯째 날로서 인간을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다 만들어지면 그때 다시 일곱째 날이 되어 안식하게 되십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로 담고 있는 이유도 모두가 다 이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죄 문제로 풀어가지 않는 것은 전부가 다 가짜들입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의 안식을 아들을 보내서 회복하는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가 안식을 깨트렸으니 하나님께서 그 죄를 없애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죄가 모두 없애질 때 비로서 하나님은 안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실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라고 보낸 것입니다.

어디서 구원하라고 했나요?

죄입니다.

죄!

 

죄는 죄인이 해결 할 수가 없어요.

죄는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라야만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밖에서 오신 예수님이 죄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냥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백성을 잡고 있는 죄의 권세자에게 자기 피라는 값을 주고 끄집어냅니다.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공짜가 아니고 예수님이 죄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이러한 일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시대 때 율법 안에 제사 제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은 예수라는 죄 문제 처리 전문가가 오시기 위한 길을 닦아 놓기 위해서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시청각 교제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보여주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기능적으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백성으로 선택을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선택 된 자이고 반발하는 자들은 선택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율법을 줘 보면 두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겐 없는 안식일을 율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율법 속에 안식일을 담아 놓음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린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죄인이 안식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 할 때만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수고하는 자들에게 한 날을 여호와의 안식일로 정해 놓고선 자기 백성들을 쉬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최고의 의미는 죄인은 여호와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를 모르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어떤 처지에 있다가 누구의 손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는지를 기억케 하라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는 애굽 땅에서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종이란? 일평생 수고와 슬픔으로 살다가 죽는 가엾은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종에겐 안식이란 영원한 소망이고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과 같던 종에서 해방되어 쉼을 얻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곤 율법 속에 안식일을 담아서 기억하고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 아래로 불러 모으고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그 율법 속에 안식일 규례를 정해 주셨습니다.

 

출 20:8-11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너희는 이젠 종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 여호와의 안식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일주일이라는 싸이클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눈만 뜨면 종 노릇하며 사는게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한 후에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일곱째 날이 생긴 것입니다.

비록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하지만 안식 할 수 있는 일곱째 날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일곱 째 날을 소망하며 사는 날입니다.

 

야! 사흘만 있으면 안식한다!

아니면 이틀만 있으면 안식한다!

아니 하루만 더 있으면 여호와의 안식일이구나!

아! 그날은 여호와 안에서 쉼을 얻는 날이지! 라고 기다려졌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설 날을 기다리고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듯이 기다려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레 만에 돌아오는 안식일을 지키면서 영원한 안식의 날을 소망하여야 했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쉬는 그런 안식일이 아니라 엿새가 없는 그런 안식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소망하여야 합니다.

이게 안식일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엿새가 차기까지 일을 하셨던 겁니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영원한 일곱째 날과 같은 안식일을 소망하지 않고,

이레 만에 지키는 안식일만 기다린다면 그 안식일은 허상이 되고 맙니다.

율법으로 주신 안식일은 장차 주어질 안식일의 예표이지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율법이 정한 안식일은 진정한 안식일이 되지를 못합니다.

기껏해야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공휴일 밖에 안 됩니다.

안식이란 단순히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에 함께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란 제 자리에 찾아 넣는 일입니다.

 

하늘에 것은 하늘로 땅에 것은 땅으로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들로 종은 종으로 제 자리로 찾아 준다는 말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창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노릇 하던 자기 백성들을 아들이 자리로 되돌려 놓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의 종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니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자식이 남의 집 종으로 팔려 가서 아비의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이제 찾아왔으니 아버지도 아들도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건져냈다는 말은 죄로부터 건짐 받았다는 말입니다.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넌 이제부터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뜻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법속에 가두고자 함이 아니고 아버지 안에 쉼을 누리라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난 안식일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너희는 이제 바로의 종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식일이라는 날에 의미는 사라지고 어떤 영역 안에서 사느냐 가 중요해집니다.

죄(罪) 안이냐?

의(義) 안이냐? 라는 영역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의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은 쉼이고, 예수 밖은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 있느냐? 가 됩니다.

법 아랜 무조건 정죄이고, 은혜 아랜 무조건 용서입니다.

법은 일이고 은혜는 쉼입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는 주일성수를 강조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자다운 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주일성수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인지를 모릅니다.

주일이란? 원래 주의 날이란 뜻입니다.

주일이 주님이 부활한 날에서 유래가 되었거든요.

 

주의 날이란? 예수님의 날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일곱째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으면 항상 일곱째 날입니다.

즉 날마다 주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들은 한 날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서 수차 강조하였듯이 여러 날 중에 한 날을 지키는 것은 역사 속에 있는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여섯째 날에 속한 미완성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은 묵시 속에 속한 날일 때만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만 주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지키는 주일이 없습니다.

항상 주의 날만 있을 뿐입니다.

월요일도 주일이고, 화요일도 주일이고, 수요일도 주일이고, 목요일도 주일이고, 금요일도 주일이고, 토요일도 주일이고, 일요일도 주일입니다.

 

왜? 그런가요?

성도는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역사라는 영역에 속해 잇지 않고 묵시라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과 달과 시간과 장소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시간과 공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날이나 시간이나 장소에 매인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법이 지배하지 않고 은혜가 지배합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가두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라는 날을 지켰다는 것과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본다면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한 번도 안식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병을 고치는 그 날도 안식일임에도 38년 된 병자는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안식일이라는 날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38년이나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안식하는 것은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안식일이라는 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는 모든 죄인들의 모형입니다.

38년 동안 병에 시달렸다는 말은 일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날에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이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왜요?

법에 매여서 옴짝 달싹 못하는 자기백성들을 법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아래선 항상 무엇인가를 지킬 것을 요구받습니다.

안식일에도 안식일에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아니 쉬어야 할 사람에게 쉴 수 있는 법이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진정한 안식이 되려면 자기 마음대로 쉴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하여야 안식이 되는 겁니다.

 

말로는 안식하라고 하면서 이것해라! 저것해라! 요구한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니라 안식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선 진정한 안식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법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법으로 정한 안식일에 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식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은 표징적인 사건입니다.

안식이란?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은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죽음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종에서 해방되었음을 기억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 날 안식을 하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안식 할 수가 있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면서 안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면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너희들이 공짜로 나온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지금 안식을 누리는 것은 너희 대신 죽어준 어린 양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장차 죄인을 대신해서 희생당하실 분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에 증거한 것입니다.

 

봐라!

이 분이야 말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라고 율법 아래 매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옥죄고 있는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법이란? 하나님의 명령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수많은 명령들이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죽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엄중하게 율법을 집행하셨습니다.

예외 조항 없이 정상 참작도 없이 냉정하게 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 속에 살 길도 아울러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을 죄값을 어린양에게 대신 묻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든지 범죄하면 희생 제물을 하나님 앞에 끌고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너 대신 죄 없는 어린 양이 죽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누리는 것은 자기 대신 죽어준 희생 제물 안에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날이 아니라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이 안식일의 실체입니다.

그럼 신약의 안식일에 실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의 실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신 맨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추상같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떨어진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대신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예수님이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다 받아 주셨습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모두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기 위함입니다.

자기백성들에게 죄를 그대로 두고선 안식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서 자기백성들이 죄를 대신 담당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뻐서 죄를 도말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도말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지금 여섯째 날에 열심히 자기 백성들이 죄를 씻겨내서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자들은 여섯째 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이젠 일곱째 날에 속한 자가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여호와의 안식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자란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은 예수 안에서 용서 받았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죄를 자기가 처리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처리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항상 예수를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항상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이라는 날은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없애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영혼에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서 항상 날마다 안식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은 엿새가 차기까지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안식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완성하는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복 받은 자이고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만 안식이 주어지는 일곱째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만 하나님께서 복 주는 날이고,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하였으면 바울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겠습니까?

바울에겐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의 피가 더 중요했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예수님 피 보다는 더 값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힘주어 말한 것입니다.

 

누가 성도냐?

바울처럼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의 피만 지키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일곱째 날에 속한 사람이고 복 받은 성도입니다.

 

바울이 너희 눈앞에 예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말한 것은 어느 놈이 주일성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느냐 라는 말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고 하며 신앙생활을 무엇을 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자는 마귀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누리고 감사하는 자이지 예수님의 공로에다 뭘 보태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안식하는 자이지 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안식하며 감사하면서 누리는 그 누림이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나타나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항상 이 힘이 강건한 자들로 세워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너무도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하여서 내 말로 가름할 수가 없어서 사도바울의 기도로 대신 가름합니다.

 

엡 3:14-21=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부디 바울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영원히 슬픔과 고통의 저주 속에서 살아가야할 저희들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다 도말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일평생 이 놀라운 예수님의 피 뿌림 속에서 얻어진 안식을 빼앗기지 않고 감사 또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고 증거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coroa.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