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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 (요한복음 강해) 29강. 자비의 집에 찾아온 자비 <요 5:1-13>

by coroa 2022. 12. 28.

 

 

29강. 자비의 집에 찾아온 자비 <요 5:1-13>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9강. 자비의 집에 찾아온 자비 <요 5:1-13>

요 5:1-13=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정낙원 목사

 

이제 며칠만 지나면 2008년도는 과거로 영영 사라지고 맙니다.

역사라는 것은 하나 하나가 단절이 되면서 흘러갑니다.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되고,

내일은 또 오늘로 있다가 내일로 지나갑니다.

이게 역사이고 시간이라는 겁니다.

 

종말이 있는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지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종말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시작과는 멀어지고 종말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늙어가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아쉬워하는 겁니다.

 

사람이란? 늙으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젊으면 미래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5살짜리 10살짜리 아이에게 지나간 시간을 물어 보세요.

지나간 과거를 전혀 아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겐 과거란 무의미하고, 오직 미래만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난 커서 뭐가 되겠다?

무슨 일을 하겠다? 라고 해요.

그걸 꿈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세상 교육은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인간이란? 늙어가면서 과거 집착형 인간이 되고, 젊을수록 미래 지향형 인간이 됩니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소망이고 꿈입니다.

그러나 나이 들고 늙으면 미래를 소망하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늙은이에겐 젊은 생각을 가지라고 합니다.

몸은 비록 늙었지만 마음은 청춘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늙으면 회춘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아! 10년만 젊어서도 뭐든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아쉬워합니다.

 

늙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처럼 멋을 부리고 옷을 입는 것은 그 시절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늙은이가 젊은이 행세를 하면 꼴불견입니다.

여러분 할머니가 청바지 입고 레게 머리하고 랩을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걸 부러워하겠습니까?

그건 멋도 아니고 주책입니다.

 

사람은 나이에 맞게 설 자리가 있는 겁니다.

20 대가 설 자리가 있고,

40 대가 설 자리가 있고,

60 대가 설 자리가 있는 겁니다.

 

설 자리란? 나이에 맞는 언행심사입니다.

살아온 길이만큼 인생을 알아가는 길이와 깊이가 깊어져 가야하는 것입니다.

20 대에 깨닫는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있고,

40 대에 깨닫는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있고,

60 대에 깨닫는 무게와 깊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20 대를 왜? 60 대처럼 살지 못하느냐? 탓하지 않습니다.

60 대처럼 사는 것은 60 대만 할 수 있는 것이지, 20 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0 대가 20 대의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건 비정상입니다.

그래서 늙은이가 젊은이 행세를 하면 빈축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게 그리 녹록하지 않아요.

나이가 들고 살아갈수록 인생 헛산다는 것이 느껴져요.

잘 살았다 싶어도 돌아서면 아쉬워요.

왜? 그 땐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 땐 좀 살갑게 대해 줄 걸 왜? 그렇게 못했을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아등바등 했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란 걸 느끼게 되어요..

하지만 그 때는 몰랐어요.

그게 제일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인생은 아쉬움이라는 후회의 연속인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자기가 깨들은 것이 최고인줄 알고 설치고 다녔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면 철없음을 알고 입을 닫게 되는 겁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할 말이 적어지게 만들어요.

하나님 앞에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태산처럼 느껴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그져 감사하다는 말 밖에 없어요.

 

신앙이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로 강건해져 가야 정상인 것입니다.

겉 사람은 옛사람 즉 육을 말하고, 속사람은 새 사람 즉 영을 말합니다.

옛사람은 땅을 지향하고, 새사람은 하늘을 지향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한다는 것은 땅에 소망이 엷어진다는 뜻이고,

속사람은 새로워진다는 것은 하늘에 대한 소망이 점점 더 강렬해 진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살아갈수록 세상에 대한 소망보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커져가야 합니다.

땅에 가치는 쇠하여져야 하고 하늘에 가치가 흥하여야 합니다.

희미하던 믿음이 실상으로 점점 영롱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내 안에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내 속에서 지경을 더 넓혀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세상에 대한 것보다 하늘에 대한 것이 많아져야 하고, 육신의 일보다 영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보다 집사가 땅에 대한 소망이 엷어져야 하고,

집사보다 장로가 땅에 대한 소망이 엷어져야 하고,

장로보다 목사가 땅에 대한 미련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실상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목사가 장로보다 세상 것을 더 집착하고,

장로가 집사보다 세상 것을 더 집착하고,

집사가 평신도보다 세상 것을 더 집착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믿음에 가치관이 자리 잡지 않고 세상 가치관이 자리 잡아서 그래요.

믿음을 지식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름하여 죽은 믿음인 겁니다.

 

그러니 장로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어서 가난하게 되면 그 없는 것을 부끄럽다고 여기기 때문에 교회에서 직분이 높아질수록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장로가 되어서 가난하면 교인들에게 권위가 안서니 어떻게 하든지 부자가 되려고 해요.

집사들은 가난한 사람은 장로로 뽑지 않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더 집착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목사들이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세상 상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하늘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고, 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 상반된 모습들입니다.

이상하게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일수록 때가 덜 묻어 있어요.

 

성경적으로 본다면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자기에게 미련을 갖기보다 주님의 일하심에 더욱 더 소망이 가고 믿어지고 감사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날이 갈수록 주님이 일하심에는 관심사가 점점 멀어지고 자기가 한 일을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기를 벗어 던져야 정상인데 죽을 때가 가까워질수록 자기를 포기하지 못해요.

늙어 갈수록 자기에 대한 집착이 더해가요.

예수를 믿을수록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예수님만 더 나타나야 함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믿을수록 예수님은 사라지고 자기만 남습니다.

이걸 과연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 신앙적 마음으로 부러운 사람이 있는데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의 정의는 상식을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람의 특징은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같이 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걱정이 없다는 것은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은 항상 싱글벙글하는 겁니다.

한 겨울에 반소매 옷을 입고도 히~ 히~ 하고!

한 여름에 오리털 파카를 입고도 헤~ 헤~ 거립니다.

누가 이 행복을 뺏을 수가 있겠습니다.

 

가장 나쁜 인간이 누군 줄 아세요.

미친 사람을 제 정신으로 돌려놓는 사람이에요.

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사는데, 지옥으로 집어넣느냔 말입니다.

왜? 남의 행복을 불행으로 만드느냐 이겁니다.

 

그럼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없지요.

맞아요.

저 역시도 싫어요.

 

그래서 제가 신앙적 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적 마음이란? 소망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고 바울처럼 살고 싶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삶이 살아질까봐 걱정을 해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찬송가 355장을 엄청 불렀어요.

입에 배여서 그냥 입만 열면 나왔어요.

 

한번 불러 볼래요.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가사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멋집니까?

가사 내용처럼만 된다면 바울보다도 더 위대한 신앙이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난 예수님 때문이라면 망해도 좋습니다.

난 거지 되어도 좋습니다.

난 죽어도 좋습니다! 입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마음은 이런 마음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이렇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닥치면 달라져요.

 

노래 부르는 것하고 사는 것은 달라요.

노래는 아픔이 없지만 삶은 아파요.

힘들어요.

신앙생활이 아픔인 것은 아는 것을 삶으로 풀어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글을 썼는데 “주님을 사랑하면 다친다” 고 했어요.

전 그 말을 보고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너무도 공감 가는 말이라서 한참을 멍하니 그 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주님을 사랑하면 다칩니다.

몸도 다치고 마음도 다쳐요.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면 그 분이 아파해요.

그래서 그 분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면 이젠 내가 아파요.

사랑은 아픈 겁니다.

그것도 아주 쓰디쓴 보약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대로 우리의 노래대로 이루어주겠다고 다가오시면 도망을 칩니다.

 

우린,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 따라가지 못해요.

우린,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지 못해요.

우린, 우리 몸에 지닌 것을 아낌없이 드리지 못해요.

우린, 존귀영광 주님께 다 돌려 드리지 못해요.

우린, 모든 권세 내가 차지하고 싶고 주님께 드리고 싶어하지 않아요

우린, 영웅이 되어 대접받고 싶지 멸시천대 받는 십자가는 지고 가기 싫어요.

우린, 이름 날리고 싶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져 노래의 가시일 뿐이지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기겁을 합니다.

우린 그렇고 그런 인간이에요.

말과 행동이 이율배반적인 아주 교활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노래 부른대로 해 주겠다고 주님이 찾아오시면 손 사래질 하는 겁니다.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주님 지금 제 정신입니까? 라고 합니다.

 

너 그러겠다고 늘 노래 불렀잖아!

에이! 주님도 그건 노래이지요.

노래는 노래일 뿐!

오해하지 말자!

우린 고작 하여서 립 서비스만 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만 뜨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고 사기 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따로 삶 따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늘 허구이고 허상인 것입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게 우리 실존입니다.

죄인이 미안해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죄인은 상한 마음으로 사는 자이지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미안 한 마음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할 때 생기는 마음이지만 상한 마음은 할 수 없어서 생기는 마음이에요.

우린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죄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뭐라고 합니까?

순종치 못하도록 가두어 놓았다고 하지요.

그리곤 롬 12장에 넘어가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여기 저기에 순종하라고 해요.

 

아주 모순적으로 말입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것해라!

저것 하지 말라! 라는 말씀들이예요.

 

원수를 사랑해라!

미워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해라!

먹든지 마시든지 족한 줄 알아라!,,,,

전부가 우리 본성과 반(反)하는 말씀들이에요.

 

아니 순종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고선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순종 할 수 없도록 해 놓고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순종을 받아 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봐라!

내가 바라는 인간과 너희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산다는 것이 내 은혜인 줄 알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순종치 못하게 가두어 두셨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잖아요?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가엾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측은하게 여겨서 보듬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불쌍히 여겨서 구원 하시는가요?

이는 천국에 가서 입 다물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원받은 것을 자기가 한 것이라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게 무엇인줄 아세요?

죄인이 자랑하는 겁니다.

탕자가 잘못을 다 지워내고 맏아들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의인이 될 수 있다면 뭐라고 죄인이라고 하겠어요.

노력해도 안 되기 때문에 죄인이라 하고 긍휼히 여겨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하지요.

 

천국은 뭐하는 곳이냐?

한마디로 영원토록 하나님(예수님)만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럼 지옥은 어떤 곳이냐?

인간들 자랑하는 곳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놈들을 몽땅 한 구덩이에 넣어 놓았으니 얼마나 시끄럽겠어요?

 

여기도 잘났다!

저기도 잘났다!

온통 잘난 놈들끼리 모였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열통이 터지겠어요.

서로가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면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신경질 나겠어요.

 

지금 지옥이 어딘 줄 아세요.

인간의 행함이 난무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서로 저 잘났다고 난리예요.

서로가 자기를 알아달라고 앙앙대요.

마치 갓난아기들만 모여 있는 산부인과 같아요.

한 놈이 울기 시작하면 여기서도 울고 저기서도 울고 난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목사가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안 알아주면 교회 옮긴다고 난리 치지요.

목사들이 지금쯤 제일 골치 아픈 시절입니다.

연말연시만 되면 자기를 알아주는 교회와 목사를 찾아서 교인들이 이리저리 옮기기 때문입니다.

무슨 인간들이 교회 옮기는 것도 연말 정산하는 것처럼 해요.

 

이런 걸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게 무슨 믿음이고 신앙이고 교회입니까?

자기 알아주는 인간들 끼리 끼리 모이는 것은 계모임이고 동호회 모임입니다.

 

암튼 뭘 할 수 있다고 꼴값 떠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는 맹세를 지켜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한 말을 책임 질수가 없어요.

 

이처럼 죄인은 일평생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살아가는 악당들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따로 살아가고 있어요.

육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장 몸 아파 보세요.

마음은 교회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몸은 자리 깔고 누우라고 합니다.

육신이라는 놈은 하나님도 자기 종으로 부리고 싶어 해요.

육신이라는 놈은 항상 자기 몸 편한 쪽으로 행동하여야 행복하다고 해요.

그래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순간 순간 간섭하시면 육신을 쳐서 복종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순간이지 완벽하게 살아내지는 못합니다.

또 다시 자기 몸 편한 쪽으로 복원 되어요.

이게 몸의 원리예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완벽한 순종이지 부분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순종을 바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순종하길 바란단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모든 계명을 지키다가 그 중에 하나만 여겨도 모두를 못 지킨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약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말씀은 완전하게 지켜야지만 지킨 것이 된다고 합니다.

어느 것은 지키고 어느 것은 못 지키고 하는 것은 반칙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킬 수 있는 것만 지켜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최선을 다해서 지키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을 해요.

그건 자기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다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서 사랑하라고 했어요.

여러분 이걸 과연 어느 인간이 지켜 내겠어요.

어느 인간이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이건 차라리 돼지보고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안 되는 일이예요.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원하지 않고 완벽한 인간을 원해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인간 중엔 완벽한 인간은 없어요.

그러니 불가능한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완벽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순종은 예수님처럼 죄와 상관없는 몸이라야만 가능해 집니다.

그러니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가지고 난 순종하였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는 것입니다.

 

온전이란? 완벽함을 말합니다.

누구처럼 완벽 하라고요?

하나님처럼 완벽하라고 합니다.

이는 피조물에겐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죄인이지!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최선을 다 할께요! 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처럼 완전한 인간을 원해요.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온전 할 수 있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말씀 지키라고 하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잖아요.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이는 주 예수님만이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완벽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요?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완벽합니까?

이는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말은 인간더러 거룩해 지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거룩하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리에요.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하다가 망한 놈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지켰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독사 새끼라고 하였어요.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신앙은 인간을 1등급, 2등급, 3등급,,,,,,이런 식으로 나누어요.

말씀을 지킨 것에 따라서 등급이 달라져요.

평신도, 권찰, 서리집사, 안수 집사, 장로, 부목사, 당회장으로 등급이 매겨져요.

등급도 조폭 세계와 같이 충성도에 따라서 넘버원, 넘버투, 넘버쓰리,,,서열이 정해져요.

안수 집사도 수석 안수집사, 차석 안수집사, 수석장로, 차석장로, 수석부목사, 부목사,,,,

급수로 따지면 당회장이 최고 고수지요.

 

그런데 그 당회장이 온전합니까?

이 놈은 마귀하고 가장 가까운 형님 동생하며 트고 지내는 “큰 무당” 인데,,,

어느 놈이 온전한 놈입니까?

없어요.

완전한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면서 완전해 지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제발 신앙생활을 갈고 닦고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막 살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신앙은 갈고 닦아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내 허물진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임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책임 질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셔야지만 돼요.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책임져 준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밖은 무조건 정죄 당한 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란?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로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행위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 운운하면서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뜻은 가상하지만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죄의 몸으로는 생각하는 대로 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여러분의 열심과 충성을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것은 환상이고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뜻이 가상하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옳음과 뜻은 달라요.

마음으로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요.

성도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사세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끝에 피 흘리신 주님이 보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고 설교하는 것은 성령의 오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만용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자기 한계를 분명하게 알고 말씀 앞에 항복하는 겁니다.

난 죄인입니다.

난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책임져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를 아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을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 없이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일 나쁜 신앙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 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해 지면 은혜가 날아가 버려요.

하나님이 고맙지가 않아져요.

 

그러니 여러분 최선을 다하여서 말씀을 지키세요! 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왜? 서두에 이런 말을 길게 하는가 하면 오늘 살펴 볼 내용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38 년을 한탄 속에서 살아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상한 연못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연못 이름은 “베데스다” 라고 합니다.

“베데스다” 라는 말은 “자비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연못의 특징은 가끔 천사가 찾아와서 물결을 일으키는데 이 때 어떤 병자이든지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고침을 받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져 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는 불철주야로 수많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병자들이 모여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천사가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병 고침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자비가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냥 동네 목욕탕 같이 누구든지 가리지 말고 아무 때가 들어가면 나음을 입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물결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자비를 맛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데스다 연못의 자비는 특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제한적인 자비”인 셈입니다.

설령 물이 동하는 것을 보아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면 자비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베데스다 연못의 자비를 맛보려면 최소한도 남보다 먼저 들어 갈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이 부족하면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반쯤은 노력해야 얻을 수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도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자비를 입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비란? 거져 베풀어주는 은혜를 말하는데 베데스다의 자비는 모순이 되지요.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 사함의 은총을 주셨지만 우리가 믿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안 믿어 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죄사함의 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를 믿고 안 믿고는 순전히 인간의 책임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싶으면 믿어주고 구원 받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제발 예수 좀 믿어달라고 애원하여야 해요.

인간들이 안 믿어 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공연히 죽인 것이 되고 말잖아요.

이렇게 되면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됩니다.

완전히 하나님과 인간의 주권이 두 바꿔져버렸지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에요.

그런데 이런 교리가 버젓이 진리인 냥 교회에서 선포가 되어 지고 있어요.

실제로 많은 교단을의 신학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거부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마음 문 열고 예수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으니 내가 문을 열어 주어야 들어온대요.

 

그래서 시간 시간마다 마음 문 열라고 소리쳐요.

이게 얼마나 비 성경적인가 하면 하나님도 인간이 동의하지 않으면 일도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겁니다.

얼마나 우스워요.

아니 마음을 내가 열고 닫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 마음대로 열고 닫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우리가 다스리지 못해요.

마음을 지으신 분이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관리하시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불쑥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마음을 다스리시면 예수님이 믿어지고 약속이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동의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은혜 주실 자에겐 은혜를 주시고 강퍅케 하실 자에겐 강퍅케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신학이 한국교회에서는 모두가 보편화 되어 각 신학교마다 가르쳐지고 있어요.

그 이유는 첫째로는 인간의 이성과 맞아 떨어지고,

둘째로는 그래야 인간들의 열심과 충성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젠 이런 사상이 한국교회 전반에 다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단을 초월해서 모두가 신앙을 인간의 열심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어도 인간이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겁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마음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부흥사들이 예배 마치고 결단의 시간을 갖는다고 일어서서 예수를 영접하라고 하지요.

 

이게 다 베데스다 식 구원론입니다.

주로 대학교에서 전도하는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전도를 합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교회들이 이런 식의 전도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거엔 교단마다 신학의 차이가 조금씩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졌어요.

꽁 잡는게 매라고 교회만 부흥된다면 무당의 기법도 동원하여 기독교식으로 채색을 하여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과거엔 장로교회에선 순복음교나 침례교 같은 것은 이단시 하여서 강단교류도 못하게 법으로 막았습니다.

 

하지만 은사 운동한다고 무당 푸닥거리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단들이 부흥을 하니 이젠 법이고, 교리고 개의치 않고 교회만 부흥 된다면 아무 사람이나 세웁니다.

애초부터 진리엔 관심이 없고 교회성장에만 관심을 가지고 했으니, 좀 고상하게 하면 교회가 성장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당 굿거리를 하니 교회가 부흥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젠 아예 본색을 드러내고 따라하는 겁니다.

원래 교회가 아니었던 것을 이제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어제 아는 집사님을 만났어요.

이 분은 예수를 안 믿고 자기 열심을 믿는 사람이에요.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믿음이 엄청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 속에 예수가 없어요.

그러니 입만 열면 열심과 충성을 자랑해요.

 

입만 열면 방언 기도 몇 시간 했다!

불 받았다!

보았다!

체험했다!

자기 경험을 자랑합니다.

 

마치 마 7장 21-23절에 나오는 사람 같아요.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선지자 노릇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온통 자기가 한 것을 자랑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랑하는 것이 불법인줄 몰라요.

 

그 분의 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내가 왜? 죄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아야 하는 자인 줄 몰라요.

그 머릿속에는 그런게 없어요.

이런 사람의 특징은 성경이 말하는 죄를 모른 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관이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수준입니다.

조금 다르다고 한다면 종교성이 부족하고 나태하다는 것 정도들입니다.

이를테면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고,

헌금 안하고,

봉사 안하고,,,,,

그러니 맨 날 반성하고 분발하고 반성하고 분발하는 일들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이야기 하면서도 엉터리 짓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입만 열면 하나님 은혜를 말한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너무도 좋은 일들이 생기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증거라는 겁니다.

생각지도 않은 도움을 받거나 아이들에게 좋은 일들이 생기면 모두가 하나님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곧 자기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겁니다.

 

모두가 자기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다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처럼 밤새도록 기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반드시 좋은 것으로 채워 준다는 겁니다.

이 분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복을 따내고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하면 복을 준다고 하는 겁니다.

 

영락없이 베데스다 못가에 모인 사람들과 같은 겁니다.

물만 동하면 자기 힘으로 달려가 은혜를 따 내겠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모인 병자들을 지금의 성도들로 본다면 예수님이 구원받으라고 해도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이상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 구원을 얻으려면 내가 믿는 노력은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이라고 하면서도 복을 노력으로 따내고자 하는 겁니다.

복을 인간의 정성과 열심히 따 낸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따내는 것은 댓가이지!

어떻게 복입니까?

복이란? 내 조건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럼에도 베데스다 식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입만 열면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선생이나 선지자 라고 보았듯이 이 사람들도 예수님을 본받고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행실에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베데스다 식 구원은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행함의 결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지요.

 

롬 4:2-5=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하고 받는 것은 삯이지 은혜가 아니라고 하지요.

일한 것이 없는데도 월급을 받은 것이라야 은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그게 어떻게 은혜가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은혜가 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퀴즈 하나 내 볼께요?

아브라함이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1번) 하나님이 부르실 때입니까?

2번) 나중에 이삭을 바칠만한 믿음이 생기고 나서입니까?

 

정답은 부르실 때이지요.

 

여러분은 자식을 낳으면 바로 호적에 올립니까?

나중에 키우다가 잘하면 올리고 못하면 안 올립니까?

낳자 말자 올리잖아요.

그리고 키우다가 말 안 듣는다고 호적에서 파 냅니까?

아니지요.

 

부모와 자식 관계는 행위로 영향 받지 않아요.

이는 부모나 자식이나 똑같은 마음이에요.

부모도 자식이 말 안 듣는다고 호적에서 파내지 않지만, 자식 또한 말 안 들었다고 호적에서 파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마치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은 겁니다.

그 어떤 행위로도 끊어지지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믿게 해주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자기 열심이나 행위로 신앙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자기 행위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베데스다 식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 믿음 하면서도 자기 행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어요.

이들은 믿음이니 은혜니 말을 하면서도 그 말뜻이 무엇인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행함이고,

은혜의 반대는 수고잖아요.

열심히 일해서 복을 따내고, 열심히 행해서 구원을 받고 이게 무슨 코메디입니까?

 

이건 마치 율법을 받고도 자기가 죄인인줄 몰랐던 유대인과 같아요.

율법으로 넌 죄인이야! 라고 하는데도!

아! 어떻게 하면 율법 지켜서 의인 되지! 이러고 있어요.

그러니 율법과 자기 신앙은 겉 도는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도 자기 얼굴에 흠을 발견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란 말이 딱 맞아요.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자기중심으로 이해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예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합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자기가 책임을 지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을 믿어요.

 

그러니 믿음이라는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라고 했어요.

지금 식으로 하나 덧 붙이면 다른 믿음인 것입니다.

 

지금 베데스다 못가에 모인 사람들은 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못 가에 모인 사람들의 신앙은 구약의 율법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다 인간의 행함이 보태져서 구원이 된다는 사상이잖아요.

유대인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구원받는데 자기가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어요.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열심과 충성을 신앙의 근본에 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어요.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완전히 달라졌어요.

율법 신앙이 은혜를 가리는 원수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율법이 아니라고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지금도 율법 신앙과 은혜 신앙이 부딪치는 겁니다.

율법 신앙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 신앙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을 좋아해요.

자기 것을 남이 책임져 주는 것은 창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옛 언약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면 좋겠어요?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좋지요.

내 인생을 누가 좌지우지 한다면 기분 나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새 언약을 싫어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옛 언약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식 옛 언약 신앙은 이 시대 성도들의 신앙관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똑 같아요.

“하나님 은혜 + 인간의 행함” 을 요구하잖아요.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 열심과 충성 아닙니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인간들 생각에 맞는 말이거든요.

아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하거든요.

성경이 이래라! 저래라!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고 가르치는게 뭐가 잘못이냐 예요.

여러분 대답해 보세요.

누가 이렇게 물으면 대답해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자 보세요.

예수님이 베데스다 를 찾아가지 않았으면 이 방법은 계속 유효하겠지요.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기 전 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 이 법칙이 깨어져 버렸어요.

예수님이 안 오셨으면 베데스다 방법이 그대로 유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반칙이 되요.

이걸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이 주어졌는데도 옛 언약을 고집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베데스다 못 가엔 38년 된 병자나 다른 병자나 다 물이 동하면 먼저 뛰어 들어가겠다고 눈 빠지게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웃기는 것은 38년 된 병자예요.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움직입니까?

못 움직입니까?

못 움직이지요.

 

그럼 38년 된 병자가 물이 설령 동하는 것을 가장 먼저 보았다고 하여도 누군가가 넣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38년 된 병자 옆에는 건강한 사람이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해요.

그래야 물이 동하면 잽싸게 옮겨 주지요.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가 병 고침을 받으려면 두 가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로는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해 주어야 하고,

둘째로는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들어다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보고 물으니 날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못에 넣어줄 사람도 없이 못가에 있으면 뭡 합니까?

속만 상하지,,

38년 된 병자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식으로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38년 된 병자가 기다리는 것은 일단은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부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묻습니다.

왜? 이렇게 있느냐고,,,

그러자 물이 동 해도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느닷없이 물에 들어가지 말고 그냥 자리 들고 가라고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건 아닌데!

지금까지 이런 방법은 없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이제 방법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젠 이런 방식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곁에 있던 병지들이 아니 이건 반칙이야! 반칙,,,

이러면 여기 이렇게 밤새도록 기다린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예수님이 고맙지가 않고 화가 나는 겁니다.

아니 고쳐 주려면 다 고쳐 주던가?

다 고쳐 주었으면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 고쳐주지 않고 38년 된 병자 한 사람만 달랑 고쳐 주고 떠나갔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 받은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지 않고 한 사람만 고쳐 주었을까요?

이는 구원이 인간의 원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나 구원 받고 싶어요! 라고 해도 예수님이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하고 안 하고는 예수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을 주십니다.

그래서 온 유대인을 제자 삼지 않고 그 중에서 12제자만 선택해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인간이 낄 공간이 없지요.

인간은 단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해요.

마치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바라만 보고 있는 개처럼 말입니다.

주인이 옜다 하고 한 줌 던져 주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식 구원입니다.

 

자 이제 정리해 봅시다.

 

베데스다 못가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병에서 고침 받고자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고침 받는 방법에선 다른 모습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물이 동하면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38년 된 병자와 같이 누군가가 넣어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베데스다 못을 지금의 교회로 봅시다.

그럼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신자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줄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보겠다고 사람입니다.

병 고침을 구원이라고 합시다.

 

38년 된 병자는 누군가가 구원을 해주어야 되는 자이고, 다른 병자들은 스스로가 구원해 보겠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베데스다(교회)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곤 지금까지 행하지 않던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베데스다는 반쪽 자비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자비인 셈입니다.

베데스다는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하여야 맛보는 자비이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홀로 하시는 자비입니다.

 

오로지 은혜(말씀) 로만 주어지는 방법입니다.

지금까진 물이 동해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자비가 물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는 일에 중간에 끼인 것이 달라졌어요.

베데스다의 자비는 하나님과 병고침(구원, 죄사함) 사이에 내가 끼었었는데, 예수님의 자비는 하나님과 병고침(구원, 죄사함) 사이에 예수님이 끼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자비는 인간이 낄 자리에 예수님이 끼인 것입니다.

인간의 자리에 예수님이 차지한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내가 해야 할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신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새 언약에선 내가 지켜야 하는데,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대신 지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전혀 손해가 아니지요.

인간에게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에게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더러 뭘 하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주 예수님이 내 대신 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는 자기 노력 하나 없이 예수님 덕에 그 지긋 지긋하던 병(죄)에서 놓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38년 동안 그림의 떡처럼만 여겨졌던 자비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38년 된 병자는 영영 병에서 고침 받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러분이 38년 된 병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찌 살아야 되겠는가?

예수님을 어찌 생각하고 살아가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수가성 여인처럼 나 예수 만났다! 라고 자랑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중요한 것이니,,,

 

새 언약에선 난 없고 예수님이 대신 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새 언약에선 하나님이 예수님 하고만 상대를 하십니다.

그러니 새 언약에선 자기를 내 세우는 것은 반칙입니다.

 

율법신앙은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신앙이고, 은혜신앙은 예수님이 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걸 무엇을 한다는 행함의 자리에 믿음을 집어넣고 이해 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을 내가 믿을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실 것인가? 가 되지요.

맞습니다.

 

내가 믿을 것인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실 것인가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면 베데스다 식이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다고 하면 예수님 식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하면 믿음의 주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선 말씀을 지킬 주체나 “나” 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선 말씀을 지킬 주체가 “예수님” 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마귀라고 한다면 교인들에게 어떤 방식을 고집하라고 하겠습니까?

옛 언약 방식입니까?

새 언약 방식입니까?

당연히 옛 언약 방식이지요.

왜? 그럴까요?

왜? 마귀가 옛 언약 방식을 고집하라고 할까요?

 

그래야 마귀가 설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죄인을 다스리라는 주권을 잠시 동안 이양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죄인들 세계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인을 저주받게 하는 소임을 받고 일합니다.

즉 지옥으로 갈 자들을 추수하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지요.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지요.

죄인이라 함은 죄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고 할지라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지킴 속에 죄인의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식의 구원으로 말하면 죄인의 것이란 무엇이겠어요?

자기 행함이겠지요.

백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된 것이 아니고 50퍼센트는 자기 것이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물이 동하여도 자기가 자진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병 고침 속에 자기 공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병 고침이 순수하게 하나님 것으로 남지 않게 되지요.

 

이런 인간을 천국에 넣어 주면 뭐라고 하겠어요.

자기 공로도 좀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어린양만 찬양 되어질 천국이 어떻게 되겠어요?

개판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 천국은 예수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 나라가 되는 겁니다.

왜요? 인간도 50퍼센트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사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을 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이 섞이면 변질이 되요.

마치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포도주를 부패시키는 자입니다.

인간의 공로를 섞음으로서 변질 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못하도록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신앙관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38년 된 병자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로 있는가?

아니면 다른 병자들 같이 열심히 자비를 쟁취하려는 자로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38년 된 병자와 같은 심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은 자들은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은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혜만을 사모합니다.

신앙생활은 열심과 충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은혜를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에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내 삶의 전반에 하나님의 은혜에 흔적을 가지고 거져 받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삶으로 토해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은혜만 사모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자들을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냥하며 살아가는 들사람인 에서는 미워하였고, 부모의 도움만 바라고 살아가는 장막사람인 야곱을 사랑하셨어요.

하나님은 찌질이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찌질이라는 것을 아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찌질이란? 나는 못난 놈이고 나쁜 놈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미워하였고, 스스로는 거룩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고 절망가운데 살아가던 세리와 창기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믿는 바리새인을 고발하기 위하여서 상대적으로 의라고는 파리똥만큼도 없는 자들을 가지고 대비시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를 사랑했다고 하니 우리도 세리와 창기가 되자 그러면 안돼요.

우리는 아무 짓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도적질을 하고 사기를 치고 살인을 하여야 나쁜 놈이 아니고 그런 짓을 안 해도 충분히 나쁜 놈입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했다 안 했다 를 가지고 나쁜 놈, 좋은 놈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우린 충분히 나쁜 놈들이고 다 나쁜 놈입니다.

다만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아는 놈은 하나님 앞에서 좋은 놈이 되는 겁니다.

좋은 놈이라서 좋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좋은 놈이라고 여겨 주는 것입니다.

말이 헷갈리지요.

 

천국은 누가 가느냐?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갑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무엇을 증거하여야 하겠습니까?

베데스다 식 구원관을 전하면 안 되겠지요.

베데스다 식 구원관이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럼 이 시대 목사들이 전하는 설교는 베데스다 식의 설교입니까?

예수님 식 설교 입니까?

거의가 베데스다 식 설교이지요.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이 봉사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고 낙심을 하지요.

이런 일들이 없으면 목사는 믿음이 없다고 호통을 치잖아요.

 

성경적인 냥 야고보서를 운운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은 야고보서 성경을 펼치고 말하니 문자적으로 보면 꼼짝을 못해요.

문자적으로 보면 전혀 틀리지 않으니까?

 

그러면 교인들은 행함을 만들어 낸다고 난리를 치지요.

주일날이면 없는 열심을 만든다고 입에 단내를 품으면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종노릇하잖아요.

그리곤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와서 한숨을 쉬지요.

이렇게 되면 주일이 돌아오는 것이 겁납니다.

교회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져요.

 

앞서 말했던 미장원 집사님도 이런 부류입니다.

주일이면 새벽에 교회 가서 밤늦게 오는 사람입니다.

아이들도 스파르타식으로 바리새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요.

그리곤 밤마다 기도하러 갑니다.

 

자기가 다니는 기도원 원장이 그러더래요.

지난주에 서울에 어떤 교회에 간증하러 갔다 왔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 이야기를 하는데 그 교회는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기도한다는 겁니다.

놀랐다는 겁니다.

 

자기 기도원에서도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였는데 가서 그 모습을 보고선 기가 죽더라는 겁니다.

자기는 명함도 못 내 밀겠더래요.

그래서 아 우리 기도원도 더 세게 해야겠다고 광고 하더랍니다.

자기 기도원에선 매일 저녁 9시부터 1시까지 하는데 이것 가지고서는 안 된다고 하더래요.

 

이래 가지고서는 어떻게 은혜를 받느냐고 교인들에게 새해부턴 각오를 새롭게 하라고 하더래요.

그러니 교인들마다 누가 누가 잘했나 경쟁심만 난무하고 자기보다 기도를 더 많이하고 열심인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미워지는 겁니다.

저 인간만 우리 교회 없으면 내가 1등인데 저 인간 때문에 내가 2등을 하니 속상해하는 겁니다.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그래야 목사 말 잘 듣고 교인들끼리 충성경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충성 경쟁하면 돈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미장원에 갈 때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되어요.

 

지난번엔 하도 자랑을 하길래 그런 신앙은 무당들이 하는 것이라고 하니 속으로 방언을 한다고 시불렁 거려요.

그 사람의 믿음 체계 속엔 목사에게 함부로 덤볐다가 하나님한데 저주 받을까봐서 대 놓고는 하지 못하고 머리 다듬는 시간 내내 입속으로 방언 한다고 자빠졌어요.

이걸 우째 말리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한 두 번도 아니고 늘 그러니 이제는 말하지 않고 머리만 다듬고 와야겠다고 다짐하고 가면 또 자기 자랑을 나불거려요.

그러면 속에 열이 채여서 또 바른 소리 하다가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돌아오곤 해요.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가 대동소이합니다.

진짜 예수님만 바라보는 성도가 없어요.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남들이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믿음을 붙잡고 있으니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게 기적이 아니고 내가 지금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난~ 예수가 믿어졌을 뿐이고,,,

그래서 난~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뿐이고,,,,

이 시대 성도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은혜 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잘 대변해 주는 신앙이 간증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마치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자랑하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간증을 하는데 그 간증 속에는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했더니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치료 받은 사람보고 간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이 사람은 물을 동하게 해 주신 하나님이 자랑이 아니고, 동한 물에 먼저 뛰어 들어간 자신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할 때 뛰어들어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은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자비의 못에 뛰어 들었는가를 간증하며 좋아할 거예요.

이런 간증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의 간증을 듣고 그 방법을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 교회들이 은혜 받는 비결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간증하는 자들은 자신은 이렇게 하여 은혜를 받았으니 당신들도 한 번 해 보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열심과 충성이 부족해서 라고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우리교회는 이렇게 열심히 하여서 부흥되었으니 너희 교회도 나 같은 방법으로 부흥해 보라고 교회성장 세미나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도 공짜로 해 주지 않고 돈 받고 노하우 배워가라고 하잖아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는 어떤 방법론이 있는 줄 착각하는 무지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고백처럼 지금도 이 백성이 무지하여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자들은 자신의 실존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이 따 내는 것으로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연못의 물이 동하여도 스스로 들어 갈 수 없는 38년 된 병자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죄라는 중병 앞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라는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서 안 도와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마음은 원하지만 할 수 없는 자신을 알아야 도와줄 자만 간절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신앙(信仰)이라는 말 뜻은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신앙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모함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감사함이 없는 신앙도 신앙이 아닙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받아야 할 은혜를 사모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38년 된 병자들입니다. 아무리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도 그 길을 갈 수 없는 무기력하고 힘없고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책임져 주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모두 책임져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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