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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으 강해)28강. 병고침 표적에 의미 <요 4:43-54>

by coroa 2022. 12. 5.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8강. 병고침 표적에 의미 <요 4:43-54>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정낙원 목사

 

요 4:43-5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들에게 있어 생노병사(生老病死)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병들고 죽음이 없는 세상을 동경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더 살고 싶다고 해서 더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인간 뜻대로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고 인간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면 이 같은 저주는 없을 것입니다.

죄인이 천지를 뒤 덮을 터인데 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때처럼 인간들이 900년씩 살지 않고 칠십 또는 팔십에 죽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환자실에 가보세요.

코에 호흡기를 꽂고 근근히 호흡을 연명하는 그 모습을 부러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900년을 산다고 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렇게 산다고 가정해 보세요.

끔찍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막상 죽는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이 죽는다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주어지는 말입니다.

살아야겠다는 것은 죽음이 쫓아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죽는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음을 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죽음을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죽음을 기피하고 죽음을 서러워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죽음 너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끝이라고 보는 죄인이 죽어야 할 몸으로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루 하루를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다고 하여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불안한 것입니다.

 

이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삶은 불행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죄인의 삶을 하나님의 분노 중에 사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90편을 봅시다.

 

시 90:6-10절에서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간은 주의 분노에 소멸된다고 합니다.

분노 중에 사는 삶이란 결국 삶 자체가 저주란 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의 수명이 엄청 길었습니다.

 

보통 500년 600년 800년 900년 여하튼 지금 이 시대 인간들의 수명과 비교하면 거의 열배나 긴 수명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국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래 살았다는 것이 축복이고 자랑 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생명은 끝이 있는 생명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제한된 삶을 살다가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수(天壽)를 다하였다고 하는 것은 하늘이 준 명(命)을 다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준 생명의 길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길이가 다해서 죽고,

어떤 사람은 어린 나이에 죽고,

어떤 사람은 군대 가서 죽고,

어떤 사람은 차 사고로 죽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다 정해진 길이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어저께 신문 기사를 보니 인간적으로 더럽게 재수 없는 사람이야기를 보았습니다.

2차선 도로변에 차를 세워 놓고 대형트럭 기사와 버스 기사가 실랑이가 붙었는데 뒤 따라오던 승용차 운전사가 출근길이 바쁠 터임에도 내려서 버스와 트럭 사이에서 싸움을 말린다고 하다가 때마침 뒤에서 오던 트레일러가 세워진 차를 보지 못하고 버스를 들이받았는데 그만 싸움을 말리던 그 사람이 그 사이에 끼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왜? 남의 일에 끼어들다가 죽었느냐고 얼마나 원통해 하겠습니까?

그 사람의 죽음을 하나님의 섭리 입장에서 보면 꼭 그 길이만큼 살았기 때문에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남들은 멀쩡한데 자기만 죽고 만 것입니다.

 

속된 말로 죽을 자리를 찾아서 들어간 것입니다.

왜요? 자기가 살아야 할 길이가 거기까지 이기 때문입니다.

괴변으로 들리지요.

인간적으로 재수 없다고 하겠지만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 자기 명대로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자살해서 죽으나 여행가서 죽으나 잠자다 심장마비로 죽으나 다 주님의 뜻에 의해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라고 한다면 참새 한 마리 죽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로 보란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하여 울고불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찍이 한나는 이 사실을 알고 찬양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장입니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보세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 다잖아요.

 

지금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라고 해서 사는 겁니다.

 

지금 누가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또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 다잖아요.

 

사업이 망했습니까?

하나님이 망하게 한 것입니다.

 

실직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실직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식 산 것이 대박 났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지금 승진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에이 설마 하나님이 직장에서 승진하고 실직하는 것까지 일일이 다 간섭 하실까 라고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는 여러분 마음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간섭하신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시편 139편입니다.

 

시 139:1-5=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시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보세요.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 생각을 통촉하시고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하잖아요.

인간의 전후를 두르시고 안수하셨다고 하잖아요.

안수한다는 말은 감싸고 있다는 말입니다.

속된 말로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입니다.

 

신자란? 이런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자입니다.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헤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명줄을 잡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출생과 동시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시계는 죽음을 향해 짹각 짹각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만큼 생명의 기운이 소진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치 휴대폰의 밧데리의 양이 줄어가듯이 사람의 생명에 기운도 세월의 흐름과 동시에 줄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얻은 만큼의 생명의 기운으로 살다가 기운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죽음이란? 생명의 기운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말입니다.

밧데리가 방전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는 것은 생명의 기운을 연장해 보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도 다 헛짓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어도 결국에는 죽고 마는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옛날 진 나라의 시 황제가 불노장생 할 것이라고 불로초를 구해 먹었지만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사우나 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해결 못하고 죽어서 진시황제와 사우나 하고 있어요.

 

인간이 죽음을 막으려면 빠져나가는 생명의 기운을 막아야 하는데 그 기운을 죄인의 몸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인간도 죽음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죽음이란? 죄인이 저항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면 죽음을 이기려 하지 말고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일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을 건져주기 위함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입니다.

 

히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의 죽음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소망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몰라봐요.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분 인줄 몰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주실 대속제물이고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기껏 안다고 하는 것이 사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죽었다 함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죄입니다.

 

이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는 부모를 모르는 패역한 자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일들을 하십니다.

바울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입니다.

 

롬 1:20-23=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리지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아들을 통하여서 나타나시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은 죄인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들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만물을 가지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풍랑을 잠잠케도 하고!

때로는 멀쩡한 나무를 죽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병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때로는 바다 위를 걷기도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도 하시고!

여하튼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갖가지 기적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갖가지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와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고물에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 이상한 짓을 합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얘들아! 내가 잠을 잤구나! 미안하다!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배에 물 퍼낸다고 고생을 하였구나!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에이! 이 믿음이 없는 놈들아! 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리곤 허공에다 소리치면서 바람을 꾸짖습니다.

야! 이놈! 바람아! 파도야!

이제 그만 잠잠하지 못하겠느냐?

이건 무슨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제자들은 일순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 양반이 태풍을 보고 죽을까봐서 실성을 했구나? 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은 정상적인 인간이 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금방이라도 배를 삼키고 제자들을 수장 시킬 것만 같던 파도가 갑자기 잔잔해 집니다.

바람도 그쳤습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도대체 이 양반이 누구길래 바람도 순종하는가? 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 양반이 도대체 누구시길래?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냐?

온갖 의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제자들도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는냐? 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이건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군 줄 도 모르고 따라다니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누군 줄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도 모르면서 주여 주여 하고 따라다니는 제자들의 이 모습은 이 시대 교인들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예수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내어 놓는 예수가 다 다릅니다.

교단마다 다르고!

교회마다 다르고!

교인들마다 다 다릅니다.

 

사업 잘 되게 해 주는 예수!

병 고쳐 주는 예수!

귀신 좋아내는 예수!

아들 대학 붙여 주는 예수!

고부간에 갈등을 해결 해 주는 예수!

주식 대박 나게 해 주는 예수!

교회 부흥시켜주는 예수!

사회를 평등케 해 주는 예수,,,,,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 예수그리스도” 라고 플랜카트를 붙여 놓고선 호객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문제라도 예수 앞에 가지고 나오면 다 해결해 주신답니다.

그러니 와서 한번 점을 쳐 보라는 것입니다.

 

왜? 주저 하십니까?

기도해 보세요.

주님이 다 응답해 주신다! 고 가르칩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실상이고, 교인들의 신앙에 현 주소입니다.

한국교회에 한하여서는 예수는 무당입니다.

그것도 아주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족집게 무당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점치러 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급하지 않는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씩 오고,

조금 급한 사람은 주일날만 오고,

아주 급한 사람은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금요일이고,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찾아옵니다.

와서 빕니다.

그져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빕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절간에 주지스님인 목사는 정성이 부족하다고 더 정성을 쏟으라고 합니다.

성경이라는 죽비(竹篦)를 들고 설쳐 댑니다.

돈으로 정성을 보이라고 자극합니다.

 

아침에도 바치고,

저녁에도 바치고,

시간 시간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씨앗을 심는 것이니 많이 심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조만 간에 대박이 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받지 못하면 자식이 받는다고 합니다.

우매한 중생들은 서로 많이 받아 내려고 앞 다투어 심는다고 경쟁입니다.

 

여기서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저기서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새벽에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낮에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밤에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른도 비나이다!

아이도 비나이다!

 

좌우지간 인간이 바라는 것 앞에다 예수라는 이름만 붙이면 됩니다.

장로교면 어떻고 침례교면 어떻습니까?

순복음이면 어떻고 감리교면 어떻습니까?

만사형통케 해 주는 예수는 동일한데,,,,

 

이 시대 교인들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줄 모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예수가 누구인줄 모르는 이 현실을 어찌 이해를 하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를 모르는 이 현실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아무도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다를 게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면전에 두고서도 도대체 저가 뉘기에 풍랑도 잠잠하는가?

도대체 저 사람이 사람이야? 귀신이야!

정체가 뭐야!

수군거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신앙도 제자들처럼 허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저가 뉘길래? 라는 그 물음에 답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말을 알아듣습니까?

여러분이 바람 보고 야! 조용히 해! 라고 한 번 소리쳐 보세요.

그럼 바람이 뭐라고 하는가?

아마도 바람이 지나가면서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예수님의 말에는 순종을 하였어요.

 

우리는 바람보고 야! 너 조용히 해! 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은 사람의 말을 알아먹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바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바람이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것은 바람이 예수님을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단 말입니까?

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단 한마디에 순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람이 예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의 주인입니다.

바람은 주인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바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은 곧 바람이 제자들에게 이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지금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야! 이놈들아!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말이야!

창조주란 말이야! 창조주!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바람의 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요.

귀머거리고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순종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서도 알아먹지를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죽으라고 하니 예! 하고 죽었어요.

물고기 보고도 돈 내놔 하니 입 벌려서 돈을 내어 놓았어요.

 

아니 천지 만물이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데 유독 인간만이 모릅니다.

그러니 만물 중에 제일 못난 것이 인간입니다.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꼴통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 가려고 그래요.

 

그러니 만물이 반란을 일으켜서 인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으로 죽이고, 사고로 죽이고,,,

자기가 만든 것에 의해서 타살당해 가고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전기를 만들어 놓고 전기에 감전되어 죽고!

자동차를 만들어 놓고 자동차에 치어 죽고!

피자를 만들어 놓고 피자 먹고 비만으로 죽고!

기계에게 죽임당하고,

먹는 것으로 죽임당하고,,,,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고,

온통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등신 같은 인간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러면서 잘난 척은 혼자 다해요.

바람만도 못하고 물고기만도 못하고 나무만도 못한 것들이,,,,

만물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어이구! 저 등신들아!

오죽 했으면 소만도 못하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 했을까요?

소도 제 밥 먹여주는 주인은 아는데 인간들은 모른다고 일갈 했잖아요.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바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알아보는데, 인간들은 몰라볼까요?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바람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는데 인간은 모르냐 말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단절 시킨 “죄(罪)” 라는 놈입니다.

“죄(罪)”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있으라! 하시니 없는데서 갑자기 생겨났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만나는 통로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매 없던 것이 생겨났으니까요.

그래서 피조물들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먹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으라고 하니 죽은 것입니다.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떠나라고 하면 떠나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먹는데 유독 인간만이 몰라보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는 시청각교제로 사용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습은 인간들 눈에는 기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적이 일어 낫다고 하여도 그 기적에 관심을 두면 안 되고, 그 기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추적하여야 합니다.

기적만 보고 그 기적이 인도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헛다리짚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적 자체만 보았지, 그 기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뜻을 온전히 이루려고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기적을 신기해 할 뿐이지 그 기적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라고 기적을 일으켰는데, 기적만 달랑 보고 정작 보아야 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경들이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큰 소리 칩니다.

지금도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악다구니를 씁니다.

일으켜 주면 무엇 합니까?

기적만 보고 예수님을 몰라보는데,,,

 

그러니 기적을 홀라당 따먹고 나면 또 다시 와서 기적을 주세요 합니다.

악다구니를 쓰는 그 인간에게 바람이 스치면서 말합니다.

야! 이 임마!

정신 차려!

 

그렇다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라고 하는 우리는 바람에게 욕을 먹지 않으려면 기적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기적을 일어나게 하셨을까? 를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살펴봅시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가나를 지나가는데 그 옆 동네에 왕의 신하가 살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라고 하는 것을 보니 권세 있는 집안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때 마침 그 집에 아들이 병이 들어서 거반 죽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알다시피 가나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께서 출행을 하셨으니 온 동네가 시끌벅적 했겠지요.

금새 소문이 이웃에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동네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갈릴리에서 가버나움까지 걸어서 약 4시간 거리라고 하니 아마도 장사꾼들이 알려 주었던 모양입니다.

 

왕의 신하는 출근도 하지 않은 채 휴가를 내고 예수님을 찾아 갔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은 일전에 잔치 집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이 양반이면 자기 아들 병 정도는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 떠나 어찌하여 오후 1시쯤에야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곤 자신은 왕의 신하라고 신분을 밝힙니다.

왕의 신하라면 지금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을 측근에서 모시는 청와대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예수님도 거절하지 못하겠지! 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리곤 예수님에게 간청을 합니다.

우리 아이가 지금 고열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빨리 가셔서 좀 고쳐 달라고 합니다..

너무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제가 직접 오늘 출근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달려 왔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알아서 기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청을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너희들은 도무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날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안 믿었다는 말인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겠습니다.

 

암튼 예수님은 따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아들이 나았으니 그냥 가라고 합니다.

아니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경거망동한 말입니까?

못 가시면 정중하게 거절을 하시던가 하시지 않고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다 나았으니 가라고 합니다.

 

이걸 왕의 신하보고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신하는 믿고 갔더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가다가 종들을 만나서 아들이 낫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종들이 밤새도록 기다려도 주인이 오지 않으니 아들이 나은 것을 기별하려고 올라 온 모양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신하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 믿었다고 합니다.

그 증거가 신하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이튿날에 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올라와 놓고선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으면 당장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후 1시에 예수님을 만났으니 충분히 그날 집으로 돌아 갈 수가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고 그 이튿날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가 주시지 않으니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상심하여 술 퍼먹고 그 이튿날 간 것이라고 주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종들을 만나서 아들이 나았다고 하니 언제 나았는지 그 나은 시간을 물어보고 믿었더라고 하는 것을 보니 믿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믿었기 때문에 볼일을 다 보고 그 이튿날 느긋하게 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다 핵심을 비켜가고 변죽만 울리는 것들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왕의 신하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도 아니고,

언제 고쳐졌느냐! 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오직 단 하나 예수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냐? 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병 고침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입니다.

병 고침하고 예수님 하고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복을 주는 분으로 알면 그 사람은 일평생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복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는 분으로 알면 병을 고쳐 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신앙의 모습들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같은데 그 뚜껑을 열어보면 다 다릅니다.

다 다른 예수입니다.

이는 각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다르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은데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건 교회에 충성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영생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즉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모든 저주를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드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땀 흘려 고생하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일에 고생하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천국을 보았는데 천국은 한마디로 고생이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입니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이 없고 애통이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사망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그렇게도 꿈꾸며 소망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원래 인간이 이런 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름하여 에덴동산입니다.

파라다이스입니다.

낙원입니다.

낙원이라 참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죄가 송두리째 다 빼앗아갔습니다.

죄가 이런 복된 삶을 다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겐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시급한 일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다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고 부자가 되고 성공해도 병들고 죽으면 끝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은 무로 돌려 버립니다.

인간에겐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야 말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죄는 병을 고침 받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만 사해집니다.

하나님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223=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 죄인의 죄는 죽음으로서만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죽어야 사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고 나서 죄가 사해진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죽지 않고 죄가 사해져야 죄를 사한 의미가 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죽이지 않고도 죄를 사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 자기백성들 대신하여 누가 죽어 주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입니다.

 

이를 대속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생명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자기백성들보다 더 나은 생명을 가진 자로 대속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죄인의 목숨을 원치 않습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죄인을 죽이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장사입니다.

그런 장사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 제품과 헌 제품을 바꾸어 보아야 그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제품으로 헌 것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생명을 취하고 죄인의 생명을 내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손해를 안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있는 것은 더 좋은 제물로 속죄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율법 아래선 죄인을 위하여 흠 없는 짐승을 죽이곤 하였는데 이런 것은 다 하늘에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형 말고 실상은 더 좋은 제물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보다 더 나은 인간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 보다 더 나은 인간이란 이 땅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라야 합니다.

결국 하늘로부터 와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늘로부터 더 나은 분이 오셔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셔야만 죄가 사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을 입혀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 주라고 말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명을 받고 오신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자기 죄는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다는 것은 인간은 예수님에게 늘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빚을 졌다는 말을 용서받고 은혜를 입고 산다는 말입니다.

용서받고 사니 늘 고마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성도는 예수님께 늘 고마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고맙지가 않은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죄인을 일컬어 교만한 자라고 합니다.

교만이란?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못난 놈이 잘난 척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재벌 회장이 하루에 수백만 원씩 하는 특급 호텔에 묵는 것은 사치가 아니고 경제 활동입니다.

그러나 한 달에 300만원 받는 월급쟁이가 하루에 백만 원 하는 호텔에 묵는 것은 사치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백화점이고 가구점이고 시장에서 목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갑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을 안 쓰면 돈에 흐름이 막히고 맙니다.

 

저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흐름은 압니다.

큰 강물이 흘러야 샛강에 물도 넘치고 물고기가 삽니다.

큰 강이 마르면 샛강은 금새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죽게 되어 있어요.

 

사람 사는 이치가 다 그래요.

노무현 정부 때 한국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평등을 주장하면서 부자들이 큰 돈 쓰는 것을 사치라고 매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만 부자들을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한 것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사람이란 늘 하는 버릇이 있는데 부자들은 돈 쓰는 재미로 사는데 돈 쓰는 것을 나쁘다고 하니 전부 외국으로 나가 그 돈을 쓰니 국내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유흥업소를 단속하니 전부 중국으로 태국으로 동남아로 나가서 그 짓을 하고 돌아오는 겁니다.

한국에서 써야 할 돈을 외국에 나가 쓰니 경제가 좋을 리가 있겠어요.

 

골프를 쳐도 한국에서 치고,

술을 먹어도 한국에서 먹고,

팁을 주어도 한국 아가씨들에게 주어야지,

왜? 외국에 나가서 외국여자들에게 주게 하느냐 말입니다.

정권을 잡은 놈들이 아마추어다 보니 깨끗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전부 단속해서 쫓아내니 그들이 어디로 가겠어요.

 

유흥업소도 그대로 두었으면 지금같이 주택가로 파고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성매매를 단속한다고 지랄을 떨어서 이젠 멀쩡한 사람들이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집장 촌을 없앤다고 난리를 치니 전부 골목으로 기어들어가 이젠 가정주부들이 거리로 나서고 만 것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유흥업소를 없애면 멋있지요.

성매매가 없는 나라,

술집이 없는 나라 멋있지요.

 

그러나 인간이 멋있지를 못해요.

인간이 개차반이예요.

음탕한 인간이 사는 곳엔 음탕한 곳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음탕한 곳에서만 놀지 음탕한 곳을 없애면 그 속에 음탕한 피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음탕한 곳을 찾고 만들게 되요.

그냥 룸살롱은 그대로 룸살롱으로 일하게 하면 되는데 이 아마추어들이 정권을 잡고선 깨끗하게 한다고 다 들쑤셔 놓아서 이젠 룸살롱이 가정 속에 파고들고 말았어요.

더러운 인간들을 그대로 더럽게 살도록 해야 하는데 더러운 놈들을 전부 깨끗해지라고 하니 난리를 치는 겁니다.

 

교만이란? 못난 놈이 잘난 척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즉 죄인이 의인인척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해요.

이 건방을 떤 놈들이 유대인들이예요.

 

특히 바리새인들 말입니다.

죄인이면 죄인답게 사는 게 솔직한 겁니다.

괜히 속은 시커면 놈이 겉으로 하얀 척 하면 남이 속아요.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아야 하는데 괜히 의인처럼 산다고 꼴값을 떨다가 예수를 죽인 겁니다.

 

이 놈들은 예수 없어도 스스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자신들도 얼마든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개 같은 이방인들이나 믿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도 당당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마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온통 자기가 하였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자기가 행하는 것이지 누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무지는 구약을 보고도 구약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하여서 계시 해 놓으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의 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보고도 예수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제사였습니다.

제사란? 구약 이스라엘에겐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상번제라고 합니다.

 

제사란? 흠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 죽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제사로 바쳐지는 제물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하루종일 늘 죄만 짓는 자란 뜻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죄를 스스로 해결 할 수가 있었다면 제사 제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해결하면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제사 제도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선 내 죄를 흠 없는 양에게 대신 전가시켜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이거 놓치면 헛 제사 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대신 죽어주는 것은 인간이 제안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던져준 죄를 없애는 해결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이렇게 처리 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했어요.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이 자기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스스로 죄를 없앤다고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죄가 된단 말입니다.

스스로 의로워 질수 있다면 하나님은 공연히 제사 제도를 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우리가 죄 용서 받는 것은 내 대신 희생당한 제물 때문이구나! 를 알아야 했습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이 죄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아! 내가 죽어야 하는데 또 죄 없는 희생 제물이 죽었구나!

희생제물이 없었다면 난 영영히 죄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을 터인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내 대신 죽어줄 희생제물을 준비해 주셔서 산다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제사 속에 담긴 의미를 안다면 제사를 지낼 때마다 감사가 철철 흘러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난 제사 지냈다 생색내지 않고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올바로 제사를 지낸 것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난 이렇게 살았다 자랑하는 것은 바보짓이고 죽임당하여야 할 죄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 이렇게 살았다고 자랑하러 나오지 않고,

주님 은혜로 삽니다! 라고 감사하며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제사 제도를 주셨고 장차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 제사와 같은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시려고 오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봅시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병을 대신 짊어지셨다고 하잖아요.

대신 짊어 졌다는 것은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지고 있던 죄라는 짐을 예수님에게로 옮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죄가 없어지고 대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 되었고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죽은 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왕의 신하에 아들에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께서 가져 가신 것입니다.

병이 아들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이동이 된 것입니다.

그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난 병 고쳐졌다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아! 내 병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구나! 를 알아야 해요.

이걸 아는 게 신앙입니다.

 

왕에 신하의 병든 아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 받은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으로 보았고 증거하였던 약속되었던 바로 그분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선 아!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던 그 분이구나! 를 알아야 했습니다.

아! 이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 아들의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들은 모두가 표징적인 것들로서 본질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준다고 해서 고침 받은 그 병자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몸을 고쳐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병의 근원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육신에 몸을 고쳐달라고 나와서는 안 됩니다.

죄 문제로 나와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또 다시 병들어 죽게 됩니다.

육신의 몸은 지금 고침 받았지만 또 다시 병들어 죽게 된다면 지금 고침 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고쳐달라고 기도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15년 연장하였어도 결국엔 죽었습니다.

다시 죽어야 할 몸으로 15년을 더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도 내가 너희들 병을 짊어지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너희들이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서는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문제는 구약시대부터 의로운 제물의 희생으로 사해진다는 것을 가르쳐 왔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자들이 매일 제사를 지내면서도 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도들의 죄 문제는 죄 없는 분이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해결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해도 계속하여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설교 시간 시간 마다 증거가 되어야 해요.

설교란?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 것은 설교가 아니고 교양 강연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목사는 목사로 안봐요.

다 교회를 가지고 밥 빌어먹는 놈들이에요.

나쁜 말로 사기꾼들입니다.

 

그러나 남녀노소를 떠나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형제로 여깁니다.

실제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우리 블로그의 글을 보고 전화나 메일이나 문자를 보내시는 분들을 보면 그렇게 보고 싶어요.

만나고 싶고 사랑이 가요.

 

그런데 제 자식이라 할지라도 십자가 이야기를 시큰둥하면 화가 나요.

저는 제가 과거 율법으로 목회를 하다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신앙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다 보니 제일 먼저 제 아내가 반발을 하였어요.

제 아내 논리가 뭐냐하면!

 

복음을 전하니 교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한 사람 두 사람 다른 교회로 옮기니 교회만 바라보고 있는데 위기감이 오잖아요.

그래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복음이고 뭐고 사람이 있어야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복음이냐고 짜증을 내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다른 교회로 가라고 했어요.

밥만 해주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 가서 말씀 들으라고 했어요.

난 이 복음을 포기 할 수 없으니 이혼 하던가 아니면 다른 교회 가든가 하라고 했어요.

그땐 복음을 모르는 아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어요.

화가 나요.

 

지금은 복음을 깨닫는지 설교시간에 혹간 다른 말을 하면 십자가 이야기만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한다고 화를 내요.

이젠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겠지만 감시자가 되었어요.

본인만 아는 일이니까?

제가 맞다 틀리다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복음을 감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할 일이지요.

 

어제는 수변 공원을 산책하면서 하는 말이 지금까지 자기에게 뭐가 문제였는지를 알게 되고 치료를 받는 기분이 든다고 좋아 하는 것을 보면 복음이 뭔지 아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이제 당신 죽을 때가 다 되었는가 보다 라고 하니 눈을 홀기더라고요.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 평안하고 고맙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죄인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는 것은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자기백성 대신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이 죄를 해결하는 일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에 의해서 하십니다.

마치 창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분이서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을 거듭남이라든가 또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와 같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 없어요.

이런 창조가 지상에는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백성들의 죄를 처리하겠다는 하나님 스스로의 약속입니다.

 

죄인의 죄를 처리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치 왕의 신하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예수님 방법대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데 있어 인간은 그져 구경꾼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져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박수만 칠뿐입니다.

참 대단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만 하면 돼요.

 

복음을 받으면 사람이 단순해져요.

계산이 없어져요.

아! 그렇구나!

그래 맞아!

참 감사하고 고맙구나!

복음을 받은 사람 입에서 가장 많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육신이 때때로 반기를 들 때가 많아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뜻대로 안되면 실망을 하고 짜증이 나요.

짜증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당신 고집대로 밀어부칩니다.

하나님은 짜증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자기가 만든 그 틀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틀 속에서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틀을 벗어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병든 자기 오빠가 고쳐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기별하여 죽기 전에 와서 오빠 병을 고쳐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마르다가 정한 그 틀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일 하십니다.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지 않고 죽이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리곤 죽었다고 방성대곡 할 때 다시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요구하는 대로 일하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그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사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 어떤 삶을 살아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거지 나사로 같이 살아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거지 나사로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성공이라고 정해 놓은 틀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성공이라고 정해 놓은 틀은 나사로가 아니고 부자였습니다.

부자처럼 되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는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부자는 실패한 인생이고 나사로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적 판단으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다면 그 어떤 모습으로 산다 하여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성공한 삶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나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과 끈을 매고 나의 나 된 것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정형화하지 마세요.

교회가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들로 정형화 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없습니다.

 

삶이란?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보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어디서 어디까지 이렇게 살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니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병든 것도 주의 뜻이고 낫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죽는 것도 주의 뜻이고 사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산다 죽는다 라는데 신앙의 초점을 두지 말고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은혜라는 것에 초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상관치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그 일을 해 내시고야 맙니다.

창조가 그랬고 죽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은 내가 원하여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게 하셔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죽기 싫다고 하여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살고 죽는 것은 우리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하나님 뜻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나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약속 했는가? 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믿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천국을 일컬어 어린 양만 찬양하는 곳으로 표현하는 것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정신으로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약속이 믿어지면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믿어지시면 범사에 주님의 뜻으로 알고 살면 그 어디든 천국이 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찬양하면 천국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 진정으로 믿어진다면 세상을 아둥바둥하며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아둥바둥하며 사는 것은 모두가 자기 뜻대로 한번 살아보고자 하는 탐욕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에 감사가 나오지 않고 불평만 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약속을 앞세우고 나아갑니다.

그 약속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시냐? 라는 질문에 정답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실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이십니다.

 

내가 사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나 죽으나 이미 영생하였기 때문에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몸이 몹쓸 병에 들었다 할지라도 죄 사함만 받으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슬퍼 할 것이 없습니다.

 

병들고 죽게 되었다고 몸을 연장해 달라고 떼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아는 것대로 살아지지가 않지만 말입니다.

아는 것대로 살아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산다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아는 것대로 살아진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은 아는 것대로 살아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낙심은 하지 마세요.

성도는 이미 약속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대로 살든, 아는 것대로 살지 않튼 이미 약속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에 몸을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증거로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몸은 부활의 몸으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입게 되는 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입니다.

 

살전 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지금 비록 병들고 아픈 몸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소망이 있으니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 안에서 만난 형제들끼리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머물러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감당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심으로 감당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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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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