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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룻기 강해

2강. 죄인을 치는 하나님 (룻 1:6-13)

by coroa 2020. 8. 14.

-.2강. 죄인을 치는 하나님 (룻 1:6-13).-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 속에 예수님의 구속사에 대한 밑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인 겁니다.

 

지난 시간 남편 잡아먹은 여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 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예루살렘에 살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로 떠납니다.

이방나라에 가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이 그림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늘나라를 상징하고 여리고는 세상나라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곳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이 세상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에덴동산을 말하고 여리고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여리고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곤 누구든지 여리고를 건설하면 저주 받는 다고 했습니다.

 

수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리고를 쌓는다는 말은 세상과 짝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곧 세상과 짝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실 때에도 이 바탕을 깔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타락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예루살렘에서 모압으로 간 것도 신앙의 타락을 상징합니다.

이건 탕자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갔다가 빈 털털이가 된 것과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것이나!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망한 것이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강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강도들이 사는 곳입니다.

마귀라는 강도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간음이란?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떠납니까?

이는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마치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도 예루살렘보다 모압이 더 좋아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식솔들을 이끌고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오미를 징계합니다.

나오미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하나 둘 빼앗아 가는 방식으로 징계하십니다.

종국엔 그곳에 발붙일 틈을 주지 않고 의지할 것이 없게 하여 떠나게 하십니다.

이걸 성경에선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는 사랑의 반대입니다.

사랑과 질투는 한 쌍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질투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합니다.

다른 것을 사랑하면 질투합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세상이든 그 무엇이든지 빼앗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성도를 남편과 아내로 묘사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거룩으로 말하는 것도 사랑 속엔 불순물이 섞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음식을 못해도 이해하고 삽니다.

남편은 아내가 살림살이를 못해도 이해하고 삽니다.

남편은 아내가 돈 씀씀이가 헤퍼도 삽니다.

남편은 아내가 친구들과 놀다가 술 먹고 늦게 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사내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약 4:4-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성도를 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남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짝하고자 예루살렘에서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야고보서의 증거로 말하면 나오미는 지금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이라는 남자에게 바람을 피우러 간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질투심이 발동합니다.

나오미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시는 방법으로 질투를 하십니다.

지금 나오미가 하나님의 질투에 걸려 든 겁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내려간 동네에서 도리어 살 수 없는 조건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자가 낯선 곳에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다 잃었다는 것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걸려들면 다 빼앗깁니다.

남편도 빼앗기고, 자식도 빼앗기고, 물질도 빼앗기고, 건강도 빼앗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물질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가족도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종내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만듭니다.

지옥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곤 그 지옥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고멜이 틈만 나면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니 하나님이 가시와 담으로 막고 가진 것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자 고멜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멜이나 나오미나 탕자나 다 빼앗기고 난 후에 돌아가는 것은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집을 떠날 때는 당당하게 떠났지만 돌아 올 때는 수치를 안고 돌아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는 아들로 나갔지만 돌아 올 때는 종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기쁨으로 떠났지만 다시 돌아 올 때는 슬픔으로 돌아옵니다.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살고자 하면 죽이고 죽고자 하면 살리십니다.

다른 말로 내가 꾀를 부려서 살고자 하나님을 떠나면 망하게 하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내 인생을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맡기면 살게 하십니다.

 

나오미는 이방 나라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난 후 비로서 자신이 살던 예루살렘을 기억합니다. 이건 마치 탕자가 재산을 다 털어 먹고 난 후에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가 탕자처럼 다 잃고 나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을 합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귀향케 하려고 남편을 죽인 것입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나오미의 죄 때문에 죽은 겁니다.

이건 마치 다윗의 죄 때문에 우리야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죄를 대신하여 남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다윗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야의 목숨을 거두어 간 것과 방불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범죄하면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방식입니다.

우린 나오미처럼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자들입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 신랑을 죽입니다.

왜? 죄 없는 신랑을 죽입니까?

우리가 산다는 것에 신랑의 죽음으로 산다는 것을 깔아 놓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대신 죽은 예수님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경의 중심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을 죽이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우리 성도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게 되는 것의 모형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에덴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예수라는 남편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남편의 죽음으로 에덴동산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야기를 창세전 구원 이야기로 풀어 보면 이러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역사라는 이 세상 나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는 나라입니다.

죄가 없으니 당연히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배고픔이나 아픔이나 사망도 없습니다.

평화의 나라이고 기쁨의 나라입니다.

즐거워하는 나라입니다.

 

마치 “나오미” 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나오미 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 “만족함”이라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의 여자입니다.

즐거움의 여자입니다.

만족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예루살렘에 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평화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에서는 남편과 아들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눈물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압이라는 이방나라로 가면서 고난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압에서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다는 것은 모압은 죽음의 나라란 뜻입니다.

남편 잡아먹는 나라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영생의 나라에서 죽음의 나라로 내려간 것입니다.

 

나오미는 곧 창세전에 하늘 예루살렘에서 살던 성도들이 이 세상으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도시입니다.

어쩌면 묵시의 나라에서 역사의 나라로 나온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형벌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린 역사의 나라에서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원래 창세전에는 영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죽음의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자기백성들이 죽음 속에 가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럼 아들이 와서 자기 피로 자기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냅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시하여야 하는 말은 자기백성입니다.

자기백성은 창세전에 죽음이 없는 곳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죽음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가 다시 죽음이 없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묵시의 나라를 본(本) 떠서 역사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곳은 묵시입니다.

 

묵시 속에서도 이미 두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각자 소임을 맡고 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곤 다시 각자가 맡은 소임대로 살다가 자기가 있던 원래의 곳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피조물들의 운명입니다.

운명(運命)이란? “돌아갈” 운(運)에 “목숨” 명(命) 자를 씁니다.

종합하면 목숨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목숨은 돌아갑니다.

창세전에 있던 목숨이 창세후에 나왔다가 다시 창세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운명입니다.

 

창세전에 천국에서 살던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다가 다시 천국으로 돌아갑니다.

창세전에 지옥에 있던 자들은 이 땅에서 지옥 백성으로 살다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갑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심판합니다.

양과 영소로 비유합니다.

 

양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합니다.

 

염소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저주 받은 자들아!

창세로부터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예비되었다는 말입니다.

상속한다는 말입니다.

예비되었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창세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역사는 묵시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묵시는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했고 역사는 보이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역사는 보이지 않는 묵시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도 천국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이 있고 지옥을 상징하는 에덴동산 밖의 이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땅입니다.

즐거움의 땅이었습니다.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럼 에덴동산은 하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에덴동산 밖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 이 세상에 온 것은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간 것이나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압과 같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나오미처럼 모압에서 다 잃어버립니다.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곤 떠나온 하늘에 있는 본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럼 아담이 어떻게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백성인 나오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곤 에덴동산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천사들로 하여금 죄인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 때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단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은 죄인에겐 감추어진 분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밖에서 자식을 생산합니다.

인류의 시작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에덴동산 밖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죄인에겐 하나님은 감추어진 분입니다.

 

하나님은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 주셔야지 만 가능해 집니다.

그런데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죄가 인간들에게 왜곡된 하나님 관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나를 위한 신(神)을 말합니다.

죄가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왜곡시켜 놓은 것입니다.

 

죄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위배 되는 겁니다.

알다시피 만물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찬미코자 함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걸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자기 인생을 살도록 했습니다.

죄가 종을 주인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왕입니다.

인간들은 누구나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왕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기중심의 선악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익을 주면 선(善)이고 해(害)를 가하면 악(惡)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건 신(神)이라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신이라야 참 신으로 인정합니다.

 

우린 모두가 이런 신관을 가지고 예수를 믿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상의 예수를 믿고자 합니다.

이런 우상을 애굽에 신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신이란? 애굽에서 잘 살게 해 주는 신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채워주는 신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에 찾아온 마귀입니다.

 

마귀를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를 해결해 주는 신입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인간에겐 세상 것을 주는 마귀는 참 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마귀를 친근히 생각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귀는 낯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자기 소원을 비는 것도 낯설지 않습니다.

아주 익숙합니다.

 

이는 모두가 이러한 토양아래서 인간이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신에게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우린 눈만 뜨면 이런 것을 구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우린 눈만 뜨면 자기를 위한 우상을 섬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실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상을 숭배 할 수 밖에 없는 자라고 합니다.

우상숭배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저주 받아야 할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인간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죽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죽임 당하는 삶으로 초대를 받게 됩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에겐 광야 길입니다.

광야 길이란? 애굽에 사람이 죽는 길입니다.

가나안엔 애굽에서 난 자들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교회라는 광야로 빼냈습니다.

광야라는 교회는 애굽에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만나를 주는 곳입니다.

 

교회가 곧 광야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나온 광야를 광야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럼 교회는 광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애굽에 사람이 죽었듯이 교회는 옛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일평생 죽임 당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을 위하여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공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사는 줄 모릅니다.

자기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애굽식 사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 빼내서 너희는 너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알게 하려고 만나를 하루치씩만 주십니다.

만나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농사를 지어서 밥을 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자기들 힘으로 양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공짜로 주는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감사치 않았습니다.

매사에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죄란? 배은망덕 하는 겁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뭔가요?

은혜를 등 뒤로 던지고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매일 만나를 얻어먹으면서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은혜를 등 뒤로 던지는 행위입니다.

이게 악이고 죄입니다.

그런데 이걸 지금 우리가 그대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가짜인 겁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는 나를 위한 예수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 줬으니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어주었으니 고난이 없게 해 달라고 합니다.

 

내가 십자가 알고!

내가 예수 알고!

내가 복음 아니까!

내 인생에 어려움이 없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좋아서 안 그러시는 줄은 몰라도 전 그래요.

복음 전하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게 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구요.

물론 겉으론 안 그러지만 실상은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리고 싶어도 안 버려져요.

말이야 뻔지르르 하지요.

 

에이~ 복음 전하다 죽으면 되지!

그런데 어디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어지는가요.

죽여주면 좋지요.

죽지 않고 사니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르게 이율배반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죄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이 한 올 한 올 다 뽑아냅니다.

욥은 침 삼킬 틈도 주지 않고 들들 볶는다고 했어요.

그러니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워서 죽을 지경인 겁니다.

 

우린 모두가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입니다.

가나안의 노정(路程)에 있는 광야 길을 가면서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인 겁니다.

어떻게 원망하는지 한번 보고 갑시다.

 

출애굽기 17장입니다.

 

출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노정(路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노정(路程)대로란? 이미 정해진 길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그 노정(路程)”입니다.

“그 노정(路程)”이란? 이미 가기로 정해진 길이란 말입니다.

 

이걸 신약에선 그가 걸어간 발자취라고 합니다.

그란? 예수님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간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노정”입니다.

 

“그 노정”이란? 기차 레일처럼 확정된 길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구름 기둥이 서면 거기에 정착하였고,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따라 움직였습니다.

 

구름 기둥이 마치 소 고삐처럼 이스라엘을 끌고 다녔습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으로” 라고 합니다.

믿음이 소 고삐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겁니다.

이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는가 하면 원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 인도합니다.

마실 물이 없는 길로 인도합니다.

꼭 불평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선 물통을 옆에 끼고 살았습니다.

목이 마르면 아무 때나 마셨어요.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 마실 물이 없습니다.

이건 죽으라는 겁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광야 길을 가고 있어요.

그런데 물이 없는 겁니다.

목이 타 들어가는데 물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을 원망하겠지요.

왜? 이런 길로 인도하느냐!

이런 길로 인도 하려면 물이라도 좀 주고 인도하여야 할 것 아니냐!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망이 안 나오면 인간이 아니고 로봇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돌을 던집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합니다.

모세가 반석을 깨트리자 그 속에서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을 했어요.

 

고전 10:1-5=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깨어진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백성이 원망하자 반석이 깨어졌어요.

이건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우리가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매일 예수님을 죽이고 산 겁니다.

물은 매일 마시잖아요.

그럼 매일 반석은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매일 죽은 겁니다.

우리가 죽이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살겠다고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겁니다.

마치 나오미가 살겠다고 하다가 남편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석이 깨어져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살게 하셨듯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 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날마다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용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에요.

 

이런 그림은 노아 시대에 그려주셨어요.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 덕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정결한 희생제물을 흠향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지 않고 계신 겁니다.

정결한 제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걸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입니다.

 

자 보세요.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나지요.

무엇으로 살아났습니까?

방주잖아요.

 

하나님이 이 땅에 저주의 비를 뿌립니다.

심판의 비를 뿌렸어요.

그런데 그 저주와 심판의 비를 누가 맞습니까?

방주가 다 맞았습니다.

 

노아에게 쏟아지는 저주의 비를 방주가 대신 맞았어요.

노아는 그 방주 속에서 구원을 받은 겁니다.

방주가 노아 대신 저주를 받은 겁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그가 찔림을 받은 겁니다.

 

홍수가 그치자 하나님은 방주를 정결한 희생 제물 속으로 함유시켜 버립니다.

이제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정결한 제물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결한 제물의 실상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인 겁니다.

이걸 광야에선 반석이 깨어지는 것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죄인이 살고 있는 바탕엔 항상 의로운 분의 희생이 깔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광야에서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그 노정(路程)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노정(路程)이란? 정해진 코스란 말입니다.

반드시 이런 코스를 밟고 가나안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오미가 예루살렘에서 모압으로 내려가서 남편을 잡아먹고 그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도 다 정해진 코스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반드시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죽음으로 저주 받은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반드시 예수를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로 갑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용서 받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은혜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살아가는 나라란 말입니다.

나는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도란? 예수의 피를 옴팡 뒤집어쓴 사람들입니다.

마치 법궤 속에 갇힌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시은(施恩)좌에 피가 뿌려져서 하나님의 용서에 영광이 임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신랑 잡아먹고 사는 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 앞에도 광야 길이라는 정해진 코스가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린 지금 광야 길에 들어서 있습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했나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잖아요.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른 말로 죄가 터져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자기백성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벌이시겠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벌이고 계세요.

 

광야 길은 하나님의 예정된 노정입니다.

무슨 노정(路程)인가 하면 애굽에 죄를 끄집어내는 노정입니다.

광야는 애굽에 죄가 발각당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길은 우리 성도가 일평생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럼 우리의 일평생은 우리 안에 애굽의 죄를 고발당하는 날들이란 말입니다.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 하면 그 아들에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가?

어린양을 찬미하는 곳입니다.

 

현재의 천국이란? 장소적인 의미보다 상태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곳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을 하였다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비록 옥에 가두어져 있었어도 마음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나오미의 귀향도 이러한 맥(脈)을 담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으로 내려간 것은 다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챙기고자 내려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언약백성이 먹고 살고자 갔습니다.

 

이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가만 둘 리가 없지요.

풍랑이 일게 만든 겁니다.

나오미에게 불어 닥친 풍랑은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이 죽자 아~ 이건 하나님이 자기를 손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는 모압에서 자신의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친다는 말은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남편과 두 아들을 하나님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죄 때문에 남편과 아들이 죽은 것을 안 겁니다.

 

나오미는 남편 잡아먹은 여자이고 아들 잡아먹은 여자입니다.

성경에선 남편이나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나오미는 예수를 잡아먹은 죄인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는 남편 잡아먹은 여자의 신분으로 올라갑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신분으로 올라간단 말입니다.

용서 받은 자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곧 우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잡아먹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도 천국에 예수 잡아먹은 자들로 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오미가 왜? 남편을 죽였습니까?

자기 목숨을 자기가 지키고자 하다가 죽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나님의 언약을 떠났다가 죽였습니다.

 

언약 백성이 언약의 땅인 예루살렘을 떠난다는 것은 언약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왜? 언약을 떠나느냐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고자 하니 죽인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삽니다.

그런데 우린 죽고자 하지 않고 살고자 하다가 죽습니다.

우리가 안 죽고자 하니 하나님이 강제로 죽이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헝클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는 일들을 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도들을 만물의 찌기 같이 두었다고 했습니다.

아니 높이 세워도 시원치 않은데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찌 사랑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 못해요.

 

그래서 우린 베드로처럼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망가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 갑니다.

그리곤 기차 레일과 같은 베드로가 가야할 정해진 코스에 올려놓고 그 노정대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하거나 저주하여도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구원해 내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피를 뿌린 것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피값 때문에 베드로가 싫다고 도망을 쳐도 찾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의 자존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도망가도 기어코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찍히면 끝장입니다.

예수님이 넌 내꺼! 라고 찍으면 그것으로 종결입니다.

넌 내 꺼! 라는 동시에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에게 넌 내 것이라고 찍히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찍히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너희가 별과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거기서 끌어 내리고 바다 깊은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기어코 찾아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을 봅시다.

 

시 139:1-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한다고 합니다.

감찰이란? 늘 감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면전을 피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가도 주님이 거기 계시고 바다에 가도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음부에 가도 거기서 찾아 올리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입니까?

우린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체면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가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하게 되어요.

그래서 실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패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고통이고 고난인 겁니다.

차라리 도망가면 그래 가서 잘 살으라고 버려두면 편한데 끝까지 찾아 와서 기어코 밀린 방학 숙제 시키듯이 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더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난 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예루살렘은 예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교인들이 왜? 교회를 떠납니까?

살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살아집니까?

아니에요.

잠시 흥왕하는 것 같다가도 종국엔 다 망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하고 두 손 들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성도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어요.

교회 떠나면 이상힌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회 생활 우습게 여기는 사람치고 온전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어요.

 

교회가 타락했다 개판이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 속에서 자기백성들을 다스려요.

교회가 타락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개판이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마치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과 같아요.

성도는 교회 떠나면 망해요.

지금 저는 원리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라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보이는 교회를 껍데기라고 보세요.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어요.

껍데기는 알맹이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합니다.

알맹이는 껍데기를 통해서 자라요.

이 비밀을 안다면 껍데기를 경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껍데기 같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표면적 이스라엘 속에 이면적 이스라엘을 심어 놓았습니다.

표면적 교회 속에 이면적 교회인 성도를 심어 놓았습니다.

표면적 교회는 허상이고 이면적 교회인 성도가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교회는 항상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섞게 되어 있어요.

아니 하나님이 섞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표면이 썩지 않으면 표면을 이면으로 붙잡기 때문입니다.

허상이 실상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역사 속에 나타난 가시적인 교회는 타락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항상 진짜 교회인 성도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실상인 성도들은 허상인 교회를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을 충실히 해요.

왜냐하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실상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니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자 보세요.

아들과 종이 있습니다.

원래 아들입니다.

아들은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잠시 종의 수하에 두셨습니다.

 

종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서 율법 아래 종노릇하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러니 자기백성들이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곧 표면적인 교회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빼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울도 율법 아래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율법이 곧 표면적인 교회와 같고 그 속에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을 자기백성이 곧 이면적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껍데기 같은 표면적인 교회에다가 이면적인 알맹이 같이 진짜 교회인 성도들을 잠시 보호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교회는 알맹이인 성도를 보호하는 엄마의 자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어느 시대이고 교회를 경시하고 멀리하는 자들을 징치하였던 것입니다.

 

이걸 종교꾼들이 악용하여서 문제이지 교회라는 그 내면에 담겨져 있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생활을 등한시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를 알고 교회를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밖은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겁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걸 교권주의자들이 악용하여서 교회를 신성시 해 놓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주의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달라요.

교권주의자들은 교회주의를 주장합니다.

이는 거시적인 교회를 통하여서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권주의자들에겐 교회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수단이 되지만 성도에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잠시 양육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교회를 가까이하고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그래 교회가 썩었고 어둠이라고 합시다.

그럼 살았고 빛이라고 하는 복음을 아는 자들이 더 들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생명으로 죽은 세상에 와서 생명을 주셨듯이 생명을 가진 우리가 죽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빛으로 어둠 속에 와서 밝혀주었듯이 빛에 속한 우리가 어둠인 교회에 들어가 밝혀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린 그러지 않아요.

나 빛이다 난 생명이다 라고 하면서 거드름만 피울 줄 알았지 수고하고 희생하고 섬겨주는 것이 없어요.

 

내가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면!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교회가 타락했든 안 했든 상관치 말고 그 안에서 주님 한 분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사람 보면 시험 들지만 예수님 바라보면 시험들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니 교회생활을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누가 나를 이단이라고 하든 말든 자기가 받은 은혜로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어요.

싸울 필요도 없고 억울하면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토설하면 됩니다.

그러니 내가 복음을 알면 어떤 곳에 있느냐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아요.

즉 무슨 말을 들어도 미혹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 교회에 있어도 주님 사랑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교회 안 다닐 필요가 없는 겁니다.

더 열심히 다니면서 받은 은혜를 증거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린 그러지 않고 있어요.

모두 복음이 증거 되지 않는다는 핑계 되고 교회를 떠납니다.

이는 섬기기 싫고 봉사하기 싫으니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떠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떠나는 겁니다.

복음 안다는 것으로 상전 노릇하고 싶은데 도리어 사람들에게 부딪치고 사람들이 싫어하니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하면서 떠나는 것입니다.

 

어쭙잖게 복음을 아는 자들이 항상 문제에요.

무슨 대단한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꼴값을 떨어요.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고 입만 살아 있어요.

그러니 교회에서나 사람들에게 항상 거치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대로 살다가 핍박 받으면 감사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자랑은 하고 싶고 복음대로 살고 싶지 않으니 교회생활을 등한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항상 이런 자들로부터 모독을 당하였어요.

 

진짜 복음 아는 성도는 복음 안다고 나대지 않아요.

꼭 태권도 한 달 배운 것들이 사람 두들겨 패고 다는 것처럼 그냥 복음을 조금 맛본 자들이 다 아는 척 교만을 떨어요.

 

인터넷에서 온 사방으로 나대는 사람들치고 복음 제대로 아는 분들이 드물어요.

진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종용해요.

꼭 여우비에 옷 젓은 사람들처럼 쬐끔 아는 자들이 나댑니다.

쬐금 아는 것으로 자랑하고 싶어서 자중하지 못하고 나대는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 댓글을 없앤 것도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쬐끔 아는 것으로 다 아는 척 하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댓글이 유익되기 보다는 해악이 된다고 하여서 없앴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에 무릎이 차이고 허리가 차이고 온 몸이 차여가야 할 텐데 발목 정도 채인 것 가지고 다 차인 줄 알고 나대는 것입니다.

온 몸이 잠긴 성도는 묵묵히 헌신해요.

이런 성도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개의치 않아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빚진 자세로 섬기고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아는 척 교만하여 시건방떨다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니 핑계대고 떠나는 겁니다.

으뜸 노릇하고 싶어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 복음이 있네 없네 하면서 떠나는 겁니다.

이 모두가 복음에 푹 잠기지 못해서 그래요.

 

지금은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진짜 믿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입으로만 믿어요.

 

모두가 연기만 피우는 생나무 같아요.

겨울철 젖은 장작같이 타지 않고 연기만 피우고 있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만 주는 겁니다.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모두가 말씀이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골치 아픈 사람들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잘 알면 그 아는 것으로 섬기면 되잖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면 야~! 어쩌자고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을까!

이 은혜가 너무도 커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섬기고 봉사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마귀처럼 남을 비판이나 하고 정죄만 할 줄 알았지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워 종노릇하는 것이 없는 겁니다.

이게 싫으니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노는 겁니다.

 

예배는 모임이에요.

사귐이에요.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성도와 성도간의 사귐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입니다.

자기 몸으로 막힌 담을 허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사이에 막힌 담이 예수님의 피로 허물어져 화목이 되어서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신분의 막힌 담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허물어져서 화목이 되었습니다.

 

이 사귐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형제와 형제간에 불화 합니까?

부부간에 불화 합니까?

부모 자식 간에 불화 합니까?

고부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이웃 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십자가 앞에선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입니다.

누가 잘나고 못 나고가 없이 모두가 동일한 죄인입니다.

그럼 차별이 사라지고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를 가운데 두면 화목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반드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을 일컬어 화목의 사신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의 고백처럼 성도는 평화의 도구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자는 화목케 하는 자이지 분열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께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에요.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고 사람과 사람을 화목케 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차별이 허물어 졌기 때문에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한 성령을 마신 성도들은 모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한 성령 안에 있는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이 땅에서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천국엔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자와 어린양이 노닐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을 당하지 않는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차별합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 당하던 세상에서 차별 없는 교회에 와서 찬국의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차별 없는 천국에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 소식을 전해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 백성은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모여서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천국백성이 하늘나라 소식을 듣고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교회이고 그 모임을 예배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어요.

서로 교제하였어요.

고난이 심할수록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마라나타” 하면서 말이에요.

 

복음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복음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가짜에요.

삶으로 증거되지 않는 생명은 죽은 생명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까?

이는 믿음이 살아 운동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예수님의 생명이 가현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믿음이 생깁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도 함께 오십니다.

믿음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 안에 와 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같은 길을 걷게 되어 있어요.

이 길을 걷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 가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싫다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갑니다.

찾아가서 네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끄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예수님과 한 몸으로서 띠 띠고 가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면 어떻게 살게 할까요?

우리가 부인되고 죽이는 쪽으로 끌고 갑니다.

 

누가 핍박하면 용서하고!

누가 욕하면 축복하고!

누가 빼앗으면 나눠주고!

이건 우리가 살아 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본성과 반하는 삶이에요.

 

그런데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이들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나요?

모두가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그들의 주인으로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난 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주(主)”이시고!

예수님은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주(主)란? “주인(主人)”이란 말이고!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라는 것은 다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은 간과해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지 않고 성령이 오실 때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주셨어요.

그리곤 성도의 주인(主人)이 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성도의 주인이 되어서 간섭하십니다.

이 간섭 당함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다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죄에서 건짐 받은 것은 알아요.

그러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요.

옛 모습 그대로 산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라는 주인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니 옛 사람 그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데요.

 

이건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내 주인이라는 사실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와 계신 사람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삶으로 미끄러져가요.

 

산상보훈이 그냥 립서비스가 아니에요.

성경이 교장 선생님 훈시가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다 이루십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이 다 지키셨어요.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만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한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세요.

주인으로 와 계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자기 이름 때문에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을 봅시다.

 

겔 20:9-14=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하여 행하였음이로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목도한 열국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은 하나님 이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이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대통령 아들이 감옥에 가두어져 있는 것과 같아요.

대통령 체면이 뭐가 됩니까?

그래서 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으니 하나님 이름이 먹칠 당하는 겁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가 그러는데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바로가 비웃지요.

흥~ 여호와!

그가 누군데!

여호와가 어떤 놈인데! 감히 나에게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 마라 하느냐고 조롱했어요.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 이름을 먹칠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이 마귀에게 붙잡혀 그 집 머슴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 바로를 작살을 내고 자기 백성을 빼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킨 겁니다.

애굽과 전혀 다른 동네로 빼냅니다.

광야로 끄집어냅니다.

 

그리곤 닦달을 합니다.

어떻게 닦달을 하는가 하면 안식일이라는 법을 주어서 채근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고 안식일을 주어 표징을 삼습니다.

 

광야란? 애굽에 반대입니다.

출애굽이란? 불러내심입니다.

언약과 비언약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부정한 곳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거룩한 곳입니다.

광야는 애굽과 다른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거룩의 세계입니다.

 

이 사실을 안식일에 담아 두었습니다.

여러 날 중에 한 날을 안식일이라 명명한 것은 분리 즉 거룩을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묵시입니다.

묵시는 영생의 세계입니다.

 

영생이란? 오늘이나 내일이라는 날에 의미가 없습니다.

항상 오늘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선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겁니다.

항상 오늘로 살라는 뜻입니다.

 

광야에 나오자 애굽에서는 없던 안식일을 구별하여 준 것은 너희는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의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표징이라고 하는 것은 안식일이 담고 있는 정신 때문입니다.

안식일이란? 하나님의 다 이루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참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동참합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주지 않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애굽에선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애굽과 다른 동네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동네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광야에선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먹여 살려요.

그러니 광야에선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이걸 안식일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긴 것을 더렵혔다고 하지요.

왜? 더렵혔다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어요.

 

이걸 하나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먹고 살게 해 주는데 왜? 애굽에서처럼 자기 힘으로 먹고 살고자 하느냐 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선 분노하지 않았어요.

거기선 사랑으로 다스렸어요.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에도 애굽 전역에는 재앙이 내려도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엔 평온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은혜와 사랑으로 보호하고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선 돌변합니다.

왜? 말 안 듣느냐고 두들겨 팹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바깥에서 말을 안 들으면 좋게 타이르고 웃어 줍니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왜? 말을 안 듣느냐고 혼쭐을 내는 것과 같아요.

 

집에 와서 왜? 남들 앞에서 부모 얼굴에 먹칠하느냐고 아이를 두들겨 패잖아요.

왜? 엄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아이는 부모의 얼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저 하고 싶은대로 내 벼려두지 않고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해요.

바깥에선 그렇게 온유하고 자상한 엄마인데 집에만 오면 마귀할멈으로 변신하잖아요.

이 모두가 부모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도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맺은 겁니다.

 

겔 36:22-3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옛 언약을 주어서 자존심 한번 세우고자 했는데 개판을 쳐 버린 겁니다.

아무리 곁에서 가르치고 도와주어도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당하였어요.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운 겁니다.

이젠 하나님이 직접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율례와 법도를 지키겠다고 합니다.

그리곤 죄를 미워하도록 하겠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과거처럼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옛날처럼 살기가 싫어져요.

이는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자꾸만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죄 지어도 감각이 없었는데 이젠 감각이 있어요.

그러니 옛날처럼 살면 찜찜한 겁니다.

이건 죄다 아니다 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가치관으로 인하여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옛날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듭나면 마치 엄마가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같은 입덧이 옵니다.

엄마가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바뀌어져요.

먹는 것도 아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을 먹게 됩니다.

그게 입덧이에요.

 

입덧은 아이가 엄마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의 주장에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그럼 우리에게 입덧이 생깁니다.

예전에 좋아 하던 것들은 싫어지고 전혀 낯선 것들을 하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엔 내 중심으로 살았는데 예수 믿고 난 후로는 이상하게 남을 배려하게 되어요.

이해하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입덧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 옛날에 안하던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입덧하는 엄마가 생전에 먹지 않던 것을 먹는 것과 같아요.

 

그 안에 예수를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입덧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이 입덧이 없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예수가 없으니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입덧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나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님이 주장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전에 안하던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사람들은 예수 믿고 사람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삶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늘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증상이 있단 말입니다.

안 나타난다면 그건 관념이고 죽은 믿음인 겁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아요.

 

성도에겐 예수님의 자존심이 담겨져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부모의 얼굴과 같은 겁니다.

자식의 잘못은 곧 부모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초달하고 책망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모두가 부모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 밑에 자라는 아이일수록 많은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간섭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망하고 난 후에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구나! 를 알았습니다.

내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이걸 깨달을 즈음엔 아마도 다 망하고 난 다음일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한마디 하면 척 알아먹는 종자가 아니에요.

다 망하고 난 후에야 깨닫습니다.

그리곤 후회하지요.

 

나오미는 지금까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하여 모압으로 내려간 겁니다.

이건 애굽식 신관(神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에서 나오미의 신관(神觀)을 바꿔주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바꿔 주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신이 아니란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빼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가 만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는 하나님입니다.

 

왜? 괴롭히고 치는가 하면 인간이 본성적으로 우상성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우상성을 타파하지 않으면 계속하여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 코를 박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싸움을 거시는 겁니다.

우리의 땅에 소원을 거두어가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실족하기 딱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다름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자기백성들에게 알려 줍니다.

 

인간은 스스로 땅을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도리어 육신의 소욕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인간은 땅 밖에 모르기 때문에 가만 놔두면 땅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성공 할수록 세상 속에 푹 파묻혀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을 간섭하십니다.

땅에서 잘 되는 쪽으로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망하는 쪽으로 간섭하십니다.

인생살이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손이 나를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아무 탈 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은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 나오미에게 있어 하나님은 마치 이 시대 명절 때 한 번씩 찾아뵙는 그런 부모님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절날 한 번씩 찾아뵙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늘 함께 모시고 살아야 하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고난이 복이라는 것은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올 즈음엔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성도가 세상에서 뿌리내리고자 하는 존재의 기반을 허물고 의지하는 것들을 빼앗아 가시고 계십니다.

돈이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의지 할 것이 없게 하십니다.

성도가 망한 그 자리에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십니다.

 

실패한 그 자리에서 비로서 성경의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서 비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의 인물을 자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성경 속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오미가 당한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나오미처럼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망함 속에는 택한 자를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택한 자는 망하게 해서라도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그 분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과 같은 신앙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성경 속에 앞선 믿음에 사람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야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스리듯이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을 보고 오늘 말씀을 가름합시다.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도다”

20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는 망하고 난 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에게 참 하나님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시고 나오미의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원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그 뜻을 잘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환란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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