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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창세기 강해)6강. 셋째 날, 물속에서 땅을 끄집어내심 (창 1:9-13)

by coroa 2022. 7. 1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강. 셋째 날, 물속에서 땅을 끄집어내심 (창 1:9-13)

창 1:9-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정낙원 목사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이 뭡니까?

죄인이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냥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치르고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나 대신 누군가가 죽는 것입니다.

 

그냥 매를 몇 대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야 의리로 대신 담당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버리는 일입니다.

내 목숨을 버리고 대신 남을 살려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도 마땅히 저주 받아서 죽어야 하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건 인간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어디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의 이야기는 인간들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오셔서 일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시작하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천지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창조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창세전 언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펼치는 일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창조와 구원은 같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보면 창조와 구원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속에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창조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으므로 창조 이야기도 구속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이제는, 현재이고,

전에는, 과거이고,

장차는, 미래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계시는 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역사의 시간 속에 계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을까요?

 

이는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하셨던 언약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도 과거 현재 미래 3 시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과거 시제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는 것과 같습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요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엡 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골 1: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구원을 얻었나니,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아들이 나라로 옮겨졌으니,

이것은 과거 시제로서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현재 시제로는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합니다.

이는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빌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현재 시제로서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미래 세제로는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광야를 거처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구원을 말합니다.

 

마 24: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막 13: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5:9-10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을 것이니,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은 장차 이루어지는 미래 시제로서의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이 된 것입니다.

확정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끝이 난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는 “이미와 아직”에 있습니다.

이미 주어졌지만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미리 정하심은 과거이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미래입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것은 단회적인 사건으로 과거이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어지는 미래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토막으로 단절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구원이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시면 끝까지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미리 정하셨으면 중간에 취소나 실패 되지 않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모습을 보면 세 구분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갈라짐을 당하는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채워지는 것이고,

세 번째 부분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갈라짐과 채우심 그리고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도 3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 뱃속이라는 과거 세계가 있고,

태어나서 살아가는 현재 세계가 있고,

죽음 후에 살아가는 미래 세계가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단회적인 것으로 과거이고,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서 장성해가는 것은 현재이고,

죽고 난 후 천국에 가는 것은 미래입니다.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면 세 구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단계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가, 광야 40년 동안 성막을 앞세우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3 시제 속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세 가지 사역이 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입니다.

 

선지자 사역은,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이것은 과거 사역으로 단회적인 것입니다.

 

제사장 사역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감당을 하십니다.

이것은 현재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사역입니다.

 

왕의 사역은, 천년왕국에서 만왕의 왕으로서 다스릴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사역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 7일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선지자 사역을 말하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제사장 사역을 말하고,

일곱째 날은 왕의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조 7일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창조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된 세상이 죽은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죽은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이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첫째 날 ‘빛이 있으라’로 나타났습니다.

빛이 오심으로 창조의 역사는 시작이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에 오심으로 역사가 시작이 되었듯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일컬어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는 빛이 흑암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은 오셔서 12 제자를 부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흑암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심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구약 이스라엘의 율법교회에서 12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십자가상의 두 강도를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고,

한 강도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서 영생과 영벌이라는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는 하늘로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땅에 버려짐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을 둘째 날 궁창으로 아랫물과 윗물로 구분하는 것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날이, 예수님의 오심의 날이라고 한다면,

둘째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입니다.

셋째 날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요?

성도들을 무덤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셋째 날의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창 1:9-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온 천하가 물에 잠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속에서 뭍을 끄집어내십니다.

물속에서 끄집어낸 뭍을 땅이라고 합니다.

셋째 날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하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덤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보면 셋째 날 물속에서 땅을 끄집어낸 일의 영적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깨어납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갑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는 땅을 말하고 지성소는 하늘을 상징합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몸을 휘장이라고 하였습니다.

 

히 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늘로 가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새롭고 산 길을 만드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린 것은 사망 권세가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뱀의 머리를 깨트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던 성도들이 깨어난 것은 구약의 성도들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구약의 성도들을 무덤에서 빼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이 죽으면 스올에 갑니다.

스올이란? 지옥이라는 개념보다 그냥 옥을 말합니다.

구약에는 신자나 불신자나 죽으면 다 함께 스올(무덤)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덤 문은 예수님만이 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야지만 하늘 백성과 땅의 백성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약의 심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무덤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문은 예수님에 의해서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무덤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덤 문은 예수님이 죽어야 열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 라고 합니다.

율법으로는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참을 보여주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참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한 몸이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창세전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짐승의 제사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성도들은 온전한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제사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참 제사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무덤이 열리고 구약의 성도들이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셋째 날 물 속에서 땅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로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바다에서 올라오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홍해 바다에서 올라온 것은 죽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됩니다.

무덤에서 나온 것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모두가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서 사명을 받고 애굽에 내려 간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조의 첫째 날과 같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조의 둘째 날 궁창을 중심으로 궁창 위의 하늘과 궁창 아래의 땅으로 갈라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이 홍해 바다 속에서 올라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창조의 셋째 날 물 속에서 땅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바다는 죽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에 있는 땅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고 합니다.

 

수면이란? 물 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흑암의 땅은 죽음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곳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다니엘 7장을 봅시다.

 

단 7:1-8절.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다니엘이 이상 중에 하늘의 큰 바람이 바다로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다에서 네 짐승이 나오는 것입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곰 같고,

셋째 짐승은, 표범 같고,

넷째 짐승은, 열 뿔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나타날 네 제국을 말합니다.

 

첫째 짐승은, 바벨론을 뜻하고,

둘째 짐승은, 메데 바사를 말하고,

셋째 짐승은, 헬라는 말하고,

넷째 짐승은, 로마를 말합니다.

 

네 짐승은 모두가 적그리스도 국가들입니다.

적그리스도 국가들이 출현하는 곳은 이 세상입니다.

적그리스도 국가들이 바다에서 나온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자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을 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하셨습니다.

이 땅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죽음의 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죽음이라는 물속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창조의 셋째 날인 물속에서 뭍을 불러내신 것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의 물을 모으고 그것을 바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끄집어낸 뭍을 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다와 땅으로 분리가 된 것입니다.

바다는 죽음의 나라이고, 땅은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를 시편 24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자기 집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시 24:2절 “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을 두신 곳이 어디인가요?‘

그건 교회입니다.

터를 바다 위에 세우셨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에서 나온 땅에게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라고 합니다.

 

창 1:11-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씨란? 생명을 말합니다.

이는 생명을 번성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서 올라온 땅은 각종 생명을 낳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애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예수라는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죽음의 바다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온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물속에서 빼내심을 입은 땅인 것입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야” 라고 합니다.

이는 빼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교회로 불러냄을 입었습니다.

둘째는,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사람이 아니고 땅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속은 옛 사람이고, 땅은 새 사람입니다.

 

땅은 새 생명을 낳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속에서 끄집어낸 땅에게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각종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육신의 소욕은 제하고 성령의 소욕은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뭍이란? 마른 땅을 의미합니다.

이는 물에 잠기지 않는 땅을 말합니다.

마치 기름처럼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과 기름은 하나로 섞일 수가 없듯이 물속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속은 죽음의 세계이고, 땅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물속은 지옥을 상징하고,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물속에서는 사망을 낳았지만, 땅에서는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우리는 물속에 있을 때는 사망의 일을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하여서 세상의 가치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 가치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들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를 불러내서 걸어 다니게 하였습니다.

나사로는 무덤 속에서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꽁꽁 묶여 있는 것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로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물에서 나온 백성들은 예전처럼 물(죄와 사망) 속에서의 법칙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른 땅(생명의 세계)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속의 법은 죽은 자들의 법으로서 선악의 법입니다.

이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마른 땅의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십자가로 끄집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물속에서 나온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율법의 의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 의를 쌓는 일에 분주하였습니다.

그것이 율법 아래서는 참 신앙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드러내고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오해하여서 명령대로 사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이 전부 이러하였습니다.

율법을 자기들 식으로 이해하여서 지켰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율법 지킴이 예수를 죽이는 데로 발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일에 앞장을 선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근거로 예수 믿는 자들은 이단이라고 판단하고 죽이려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바울을 부르십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율법을 지켜서 쌓은 의가 배설물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땅의 가치로 살아가는 자와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는 두 부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땅의 가치는 인간의 의이고, 하늘의 가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본받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본받는 자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서도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하늘에 속한 성도는 율법을 구원의 이야기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 도덕적 차원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지만,

땅에 속한 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따르게 됩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은 땅(육)에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 지킴으로 자기 의를 쌓고 그 의를 힘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율법 지킴의 힘이 곧 예수를 죽이는데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하늘(영)에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하늘에 눈으로 성경을 보니까 율법 지킴으로 의를 삼고 힘으로 행사하던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 사고로 성경을 보면 다메섹 이전의 바울처럼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되고,

은혜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다메섹 이후의 바울처럼 눈에 비늘이 떨어져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적 사관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인간들에게는 선악과처럼 보임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이 선호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 자녀다움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겉으로 들으면 그럴싸하여도 이것이 마귀의 말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믿음을 행위로 대체하여서 미혹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고발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의가 있다고 알려 주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율법적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일을 합니까?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서 살아서 해부하는 일을 합니다.

움직이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찔러 쪼개는 일을 합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발가벗기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고발하는 이유는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굳게 붙잡게 하기 위함입니다.

믿는 도리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언약은 행위 언약이지만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인 은혜 언약 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나요?

우리더러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거룩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하게 살아 갈 수가 없으므로 그 죄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여서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서 내가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합니다.

이게 마귀의 달콤한 미혹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과천선하여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흔적들을 남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우리의 허물을 고발하여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것은 우리 몸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는데 우리의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 몸을 산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의 몸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의의 병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착하게 되는 것은 옛 언약식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킨 것을 의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불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자기들이 행한 것을 의지하고 나오는 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의는 예수를 믿는 것이고,

불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나아와서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 이렇게 살았으니 착하지요 나 칭찬해 주세요 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마귀는 항상 신앙의 본질을 가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행위로 바꾸고,

은혜를 법으로 바꾸고,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듯이 인간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는 선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빛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어둠이라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물속에서 나온 땅이 맺어야 하는 과실들인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행위를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행위를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겨 주심을 입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구원에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들은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산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의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것이 불의가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양심으로 살게 하고, 성령은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양심은 내 행위를 보게 하지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양심의 법이 나를 지배하면 마귀로부터 참소를 당하지만,

믿음의 법으로 살아가면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 합니다.

양심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고, 믿음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도말 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데에는 방해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독자적으로 만나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상대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1-17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두 법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인간의 행위로 살아가는 것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옛 언약인 구약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 언약인 신약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시켜주었습니다.

해방을 시켜주었다는 것은 그 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속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

물속에서 끄집어냄을 입은 땅(뭍)에 속한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땅 위에 사는 자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는 사는 동네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을 폐기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물속에 있는 자와 땅 위에 있는 자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물속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 굴복하고 살아가지만 물속에서 건짐을 받은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율법을 던져보면 누가 물속에 있는 자인지 누가 땅 위에 있는 자인지 구분이 됩니다.

율법을 던져보면 물속에 있는 자와 땅 위에 있는 자는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물속에 있는 자는 율법을 산 것으로 받고, 땅 위에 있는 자는 율법을 죽은 것으로 받습니다.

결국 율법이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를 구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산 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지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천지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죄 아래 있는 자들을 계속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죽은 것이 아니고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힘을 쓰지 못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살아서 힘을 쓰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죽은 것으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건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식민지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해서 일본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을 맞은 우리는 더 이상 일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패전하여서 항복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 자는 이긴 자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일본은 우리나라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것을 알고 실제로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일본을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본을 의식하고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심판 당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일컬어 영을 쫓아 산다고 합니다.

영을 쫓아서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인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비록 육신적으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구원에서 잘려나가는 정죄는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지 않고 의와 생명의 법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결코 정죄 당함이 없이 안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자기 꼬라지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법 아래서 자기 행위를 보면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뚱이는 죄 아래서 태어나서 밤낮으로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치러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내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환경에서도 안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영의 법으로 살아갑니다.

 

9-10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비록 몸이 죄를 짓더라도 율법이 그 사람을 참소 할 수가 없으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정죄당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은혜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내 형편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산다는 뜻입니다.

죄와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죄는 분명히 죄인데 그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을 해 주었기 때문에 추궁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아니까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복음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의미를 안다고 한다면 죄를 멀리하고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고생해서 학자금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이라면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부모가 학자금을 보내주니까 흥청망청 논다고 하면 그건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자를 자식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를 모르는 자는 성도라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 알았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성도라 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멀리하되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 의미를 잘 새기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나요?

자기 백성들이 받아야 할 죄값을 치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아야 할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받았으니 더 이상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죄값을 청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법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신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법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법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육신의 법으로 사는 자에게는 살아서 추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의 법으로 사는 자는 추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의 법으로 살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성도는 자신의 잘잘못으로 인하여 죽네 사네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참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율법으로부터 참소당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은혜 아래서는 법은 죽은 것입니다.

법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조차도 은혜 아래 있는 성도에게는 법으로 처리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한다는 새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율법으로 죄를 추궁 할 수 없다는 계약입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 때에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 속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들어 갈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집안에 살인자가 살고 있다고 하여도 죽음의 사자는 그 집에 들어가서 살인자를 처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구원에서 잘려나가는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막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막 살아도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막 살수가 없습니다.

설령 막산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징계의 몽둥이가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이걸 참 아들에게 행하는 징계라고 합니다.

 

성도 안에는 성령(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 살고 싶어도 막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는 막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은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막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은 간섭하는 주인이 없고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막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주인으로 와 계신 성도는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고 성령(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주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몸을 샀느냐?

우리 몸으로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있는 성도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장차 천국에서 해야 하는 일을 이 세상 속에서 맛보기로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성도는 심령에 천국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물질적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영적 가치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일들을 이 세상의 교회 안에서 미리 맛보기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천국이 침노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자기 백성들 속으로 몰고 오신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속에서 끄집어냄을 입은 땅입니다.

 

물속에서 끄집어냄을 입었습니까?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들을 맺으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땅이 맺어야 하는 하늘나라 생명의 산물들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의 산물들을 풍성하게 맺으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셋째 날을 맞이한 자들입니다.

부디 셋째 날이 주는 그 영광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함에도 저주의 물속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저주의 물속에서 검짐 받은 것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 때문이라는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은혜 받은 자로서 은혜를 토해내게 하시고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를 토해내게 하시고 우리의 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만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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