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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창세기 강해)창 5강. 둘째 날, 궁창으로 갈라지는 두 세상 (창 1:6-8)

by coroa 2022. 7. 1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5강. 둘째 날, 궁창으로 갈라지는 두 세상 (창 1:6-8)

창 1:6-8절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정낙원 목사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의 뜻에 의하여 만물의 창조가 되었고 주를 위하여 존재하다가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가 왜 만물을 창조하셨나요?

이는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컬어 언약의 책이라고 합니다.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이를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로 기록하고 있고,

신약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만물의 창조가 나중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이 너를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복의 조상 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의 조건과 상관없이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창세기 15장에 보면 구체적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납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와서 언약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 15:13-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언약의 내용은 땅과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 준다는 것과 아브람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으로 살다가 사대 만에 언약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으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만 지나갑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언약을 지켜 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30년 후에 하나님이 애굽에 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출 2:23-25절.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권념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았습니다.

이 때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브람과 언약을 할 때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도 같습니다.

 

선(先) 언약,

후(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보다 언약이 앞섭니다.

그러므로 언약에 의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뭡니까?

언약의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서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됩니다.

 

이 일을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이 나는 이렇게 일을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요한복음 1장 1절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 두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약속하신 것이 다 이루심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여기에 동원된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속에서 언약을 이루고자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첫째 날 빛의 오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빛은 생명을 말합니다.

빛이 오자 이 세상의 본질이 죽음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어둠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어둠입니다.

세상이 죽음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를 첫째 날 빛이 있으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이 어둠으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 보면 세상이 말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세상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비진리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서 보면 인간의 의는 의가 아니고 불의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인간은 죽은 자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고,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의이고,

예수님만이 산 자입니다.

예수님만이 빛이고 인간은 어둠인 것입니다.

 

어둠이란?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3-5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물이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빛이 어둠에 비취어도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이는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요?

빛에 대하여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낮이라 하고,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밤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어둠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린 모두가 어둠에 속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는 자들이 다 애굽 사람이 아니고 그 속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있었듯이, 어둠 속에 빛의 아들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로 분리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빛에 속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낮이라 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밤이라고 합니다.

빛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낮을 하늘이라고 하고,

어둠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밤을 땅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을 창조 7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7일은 구원의 서정과도 같습니다.

 

구원의 첫 단계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첫째 날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는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서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불러내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구약 교회 속에서 12 제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심으로 세상은 둘로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와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로 구분이 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를 너희와 저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율법으로 빼내십니다.

이를 십자가로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늘 백성과 땅 백성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날 궁창으로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이 뭐냐?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갈라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입습니까?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예정에 의해서입니다.

예정된 자들을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부르십니다.

 

어떻게 빼내심을 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심으로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주셨습니다.

 

어디로 갈라짐을 당합니까?

땅에서 하늘로 갈라짐을 당합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영생과 영벌로 영원한 갈라짐을 당하게 됩니다.

 

부르심을 입는 것은 창세전이고,

빼내심을 얻는 것은 현재이고,

갈라짐을 당하는 것은 장차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천(天)은, 하늘나라이고,

지(地)는, 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늘나라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영의 세계는 영물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영물(靈物)들을 천사라고 합니다.

이들이 살아가던 동네를 에스겔 28장에서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로부터 찬송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 중 일부가 하나님께 돌아갈 찬송을 가로채는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아내서 땅이라는 흑암에 가두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14장 12절에서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라고 합니다.

땅에 찍혔다고 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난 땅을 일컬어 음부라고도 하고 흑암이라고도 하고 땅이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합니다.

음부나 흑암이나 지옥이나 땅이나 다 같은 말입니다.

 

그 땅이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한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한 흑암의 땅에 그 아들을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흑암의 동네에 빛이 옴으로서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참 빛으로 흑암의 땅에 오신 것은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서 하늘에 있는 빛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고자 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로 나아갈 자들과 땅 아래 있을 자들로 구분이 됩니다.

이를 하나님은 창조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셔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물이란? 열국 또는 백성을 말합니다.

 

계 17:1절,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15절,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궁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온 천하의 물이 하나로 있었습니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로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땅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애굽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고 있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이 모습을 깊음이라는 물 속에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합니다.

수면이란? 물 위 라는 뜻입니다.

 

물 속에 두 민족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십니다.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자면 그들을 붙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인 마귀에게 값을 지불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흑암의 나라 왕이 그들을 죄로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값을 지불하여야지만 빼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빛의 아들들의 속전으로 대신 주셨습니다.

죄값을 대신 치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두 민족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나라를 갈라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궁창을 중심으로 해서 궁창 위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진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궁창이라는 말을 “라키아”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두들겨서 넓게 펼친 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공업자가 두꺼운 판을 두들겨 패서 얇은 판을 만들어서 물속에 집어넣고서 이쪽과 저쪽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물 가운데를 판으로 벽을 쳐서 이쪽과 저쪽으로 분리시킨 것입니다.

 

이게 궁창입니다.

하나님이 두 민족을 갈라내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궁창을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과 땅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십니다.

이 말은 “라키아 솨마임” 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 궁창이 바로 하늘이다” 라는 뜻입니다.

의인화 하여서 의역을 하면 “이 궁창이 바로 하늘에서 오신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두들겨 패서 하늘 백성과 땅 백성을 분리시키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강도가 하나는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로 나아가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간 것으로 타나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두들겨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를 대신 맞아 주어서 속함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종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줄 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6절을 보면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두들겨 팬 것입니다.

이것은 궁창이라는 “라키아” 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당하신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았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에게 두들겨 맞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짐승의 제사를 완성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짐승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짐승의 제사는 죄를 없이 하는 제사가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를 사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구약에서는 짐승의 제사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짐승의 제사를 드리면서 이 제사는 실제가 아니고 예표적인 것이야,

장차 이 짐승의 실체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한 사람이 오실 것이야, 라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의 의미였습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7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고합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아버지와 약속하신 것을 이루고자 이렇게 몸을 입고 왔습니다.

이제는 짐승의 제사를 끝내고 창세전에 약속하신 대로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내 한 몸을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비로소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고 거룩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하나님은 애초부터 한 몸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 할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한 한 몸인 것입니다.

이를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 제물이란?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제물에게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묻겠다고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 제물이 바로 예수라는 한 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하나님께서 퍼부은 진노를 고스란히 다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라키아” 즉 두 물을 나누기 위하여 두들겨 패서 만든 판이라는 궁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죽음입니다.

이로 인하여 두 민족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를 속량 받는 백성과 속량 받지 못한 백성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죄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않는 자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죄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자를 하늘 백성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자를 땅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늘에 속한 백성과 땅에 속한 백성들이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가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갈보리 산에 3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강도가 있습니다.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고 한 강도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 † † 3 개의 십자가를 수직으로 세우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분리가 됩니다.

 

† 윗 강도

† 예수님

† 아랫 강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강도는 하늘 위로 올라갔고 한 강도는 땅 아래로 내려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땅에 있는 것입니다.

 

† 하늘, 궁창 윗물

† 궁창, 예수님

† 땅, 궁창 아랫물

 

예수님이 궁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위에 있는 강도를 궁창 윗물이라고 하고,

예수님 아래 있는 강도를 궁창 아랫물이라고 합니다.

 

물은 두 민족이라고 하였으니까

예수님 위에 있는 물은 하늘나라 백성이고,

예수님 아래 있는 물은 땅 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늘 백성이고 저희는 땅 백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셨고, 저희에게는 감추어버린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속량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하신 언약이고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구원은 궁창으로 물이 분리가 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불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셨습니다.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불러내셨습니다.

 

빼내심을 입을 때 모두가 물을 건너오는 경험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왔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왔고,

성도들은 물세례를 건너왔습니다.

 

강을 건넌 것은 모두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죽음을 지나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세요.

 

† 강도

† 예수님

† 강도

 

강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서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린 모두가 아랫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위 강도가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간 강도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위로 올라 갈 때 십자가라는 피의 터널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기가 깜깜한 엄마 뱃속에서 바깥 밝은 세상으로 나올 때 엄마의 피를 묻히고 나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뱃속에서 나온 아기의 몸에는 엄마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 피는 엄마의 죽음과 같습니다.

아이가 어두운 뱃속에서 바깥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0장과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서 찢어졌습니다.

이를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예수님의 몸을 성소의 휘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은 3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뜰과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이것을 수직으로 세우면 지성소 성소 뜰이 됩니다.

 

지성소

성소(휘장)



 

지성소는 하늘을 상징하고,

성소는 궁창을 상징하고,

뜰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3 개의 십자가로 말하면,

 

뜰은, 아래 강도가 있는 땅을 말하고,

성소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지성소는, 윗 강도가 있는 하늘을 말합니다.

 

“뜰”에 있는 아래 강도가 “지성소” 라는 위 하늘나라로 가려면 중간에 가로막힌 “성소” 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야지만 합니다.

예수님이 길을 내 주지 않으면 하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어서 길을 내 주신 것입니다.

 

궁창 위로 갈려면 궁창이 찢어져야 합니다.

궁창이 바로 성소의 휘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궁창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궁창이 찢어짐으로 하늘가는 길이 생기고 땅에 사람이 하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한 분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한해서입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어린 양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갑니다.

 

피를 앞세운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피는 바로 대 제사장 자신의 피를 상징합니다.

곧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짖지 아니한 장막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 장막은 창조에 속한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창조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가셨는가 하면 자기 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죽음으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예수님 자신의 구원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려면 이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명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도 되지만 예수님 자신의 구원도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피조에 속한 이 세상에 있는 자들이 창조에 속한 저 세상인 하늘나라로 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가실 때에 자기 피를 앞세우고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로 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되어서 첫 열매로 가신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도 예수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가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이미 보여주신 그림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는 그림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올 때 어린 양의 피로 나왔습니다.

신약의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떠나게 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무얼 하고 살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제사 지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확대하면 율법이고 율법을 확대하면 모든 성경입니다.

이를 역순으로 말하면 모든 성경이 율법이고 율법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에 죽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백성들은 십계명으로 죄를 고발당하고,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두면 하나님의 거룩 성에 손상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 아래서 태어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거룩케 할까요?

그것이 죄인을 대신하여서 흠 없는 제물이 죽는 것입니다.

제물도 하나님이 정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제물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흠 없는 제물에게 전가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에서의 신앙생활입니다.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어린 양의 정신을 그들 몸에 새기고자 하심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흠 없는 제물을 대신 죽이셨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사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때문임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예배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을 듣고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몸에 흠 없는 제물의 흔적을 새기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마치 수를 놓듯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백성들 몸에다가 어린 양을 새겨 넣는 것입니다.

 

이건 신약이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옷을 입고 갑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경험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반드시 본인이 경험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직접 보고 들어야 합니다.

 

직접 보고 들으려면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르신 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를 최후의 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경험토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먹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론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빼내심을 입은 경험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관념이 아니고 실제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자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나라는 하늘나라이고, 그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가 왜 그리 중요합니까?

 

이는 구원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자라야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을 옳은 자로 인정을 하십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난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나라로서 죄인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의는 인간들 쪽에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하늘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고자 함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대신 담당해 준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찾으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일이라고는 제사뿐입니다.

이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입는 것입니다.

성막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은 흠 없는 제물의 의를 힘입고 나아간 것입니다.

가나안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이는 천국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성막을 앞세우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듯이,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앞세우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은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초대교회가 생겨납니다.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나온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나온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나온 자들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란?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지닌 자들입니다.

 

그 흔적이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영적 예배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자랑하였습니다.

흔적이란 다름 아닌 바울이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의는 율법으로 난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자랑하는 십자가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다가 고난당한 것을 자기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다가 얻은 것들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때로는 동족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감옥에도 갇히기도 하였고,

때로는 원수들로 우겨쌈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려짐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매를 맞아도 예수를 품었기 때문에 당하는 매라 감사하였고,

욕을 먹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가졌기 때문에 감사하였고,

감옥에 갇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갇혔기 때문에 감사하였고,

우겨쌈을 당하여도 자기 안에 예수 때문임을 알았기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당한 아픔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싫어할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에는 인간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을 죄인으로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완전히 뭉개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기 잘남을 자랑거리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자랑거리는 인간들이 정한 규범에서 나옵니다.

이를 인간의 의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는 행함에서 나옵니다.

이 행함을 윤리 도덕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윤리 도덕을 잘 지킨 자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윤리 도덕은 인간들로 하여금 힘을 주고 자랑거리를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인간의 윤리 도덕을 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설물로 여깁니다.

십자가 도는 윤리 도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동등하게 봅니다,

이는 둘 다 죄 아래서 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을 동등하게 죄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 지킴을 의라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왜 자기들과 세리와 창기들을 동등하게 취급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 지킴을 의로 삼았습니다.

그 의가 힘이 되어서 백성들로부터 선생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의 의로 선생 노릇하고 대접받고 산 것을 그것은 강도짓을 한 것이라고 고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죽여야지요.

 

지금도 십자가는 인간들을 화나게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뭉개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몇 자락 지킨 것을 가지고 성화 하였다고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의를 부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는 치워버리고 싶은 걸림돌인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근본으로 하는 율법의 의는 서열을 주고 우열을 줍니다.

많이 지킨 자와 적게 지킨 자 간에는 서열이 정해집니다.

많이 지킨 자는 상석에 앉고 적게 지킨 자는 말석에 앉습니다.

 

인간은 두 사람만 모여도 서열을 짓습니다.

이는 선악의 법이 그 안에서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은 인간의 행함을 기초로 작동을 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행함으로 의와 불의로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러한 법 질서를 완전히 깨트려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동안 율법 지킴을 힘으로 사용 하던 자들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영광이 사리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용납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까지만 해도 율법에 열심하고 특심하던 자였습니다.

그 열심과 특심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면 바리새인 중에서도 상위 계층에 속하였습니다.

자기 행함으로 상석에 앉아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그 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율법의 의는 하나님 앞에 의가 아니라 도리어 배설물과 같은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들에게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것은 핍박이고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다가 당한 아픔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동일한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 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자랑 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늘 위로 올라간 궁창 위에 거하는 자들은 차별 없는 은혜의 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인 궁창 아래에 거하는 자들은 율법아래서 인간의 행함으로 차별하면서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확인해 보세요.

 

은혜로 삽니까?

법으로 삽니까?

 

나는 어디에 있나요?

 

궁창 위에 있는가요?

궁창 아래 있는가요?

 

궁창 위는 은혜의 세계이고,

궁창 아래는 법의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차별 없이 은혜로 살면 궁창 위에 있는 자이고,

인간의 행위를 사람을 차별하고 법으로 살면 궁창 아래 있는 자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은혜에 속한 자는 은혜를 토하고 살고,

법에 속한 자는 법을 토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지금 법을 토하고 있다고 해서 정죄하거나 판단하진 마세요.

우리 모두가 법 아래 있다가 때가 차매 은혜로 옮겨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법을 토하고 살지만 때가 되면 은혜 아래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부정적으로 보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보세요.

우리도 과거에는 바울처럼 법으로 살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짐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옮겨진 자로서 늦게 옮겨지는 자들에게는 먼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 누구라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판단 받을 자들이지 누구를 판단 할 자가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궁창 아래서 궁창 위로 옮겨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진 자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궁창 위에 있는 성도들이 토하여 내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우리를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을 붙여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범사 속에서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1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 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궁창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럼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처럼 살라고 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었으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긴 자로서 넉넉함으로 사세요.

 

조급해 하지도 마시고,

여유 있게 사세요.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7:29-31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부함도 지나가고

가난도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흥함도 지나가고,

패함도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지금 있다고 자랑치도 말고,

지금 없다고 낙심치도 마세요.

 

가진 자는 없는 자처럼 살고,

없는 자는 가진 자처럼 사십시오.

 

궁창 위에서 궁창 아래를 바라보면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궁창 위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그 소망으로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궁창 아래 있던 자를 궁창 위로 옮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힘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만 자랑하고 살게 하옵소서. 또한 궁창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 것으로부터 이긴 자로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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