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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7강. 외국인과 나그네 (히 11:13-16)

by coroa 2022. 3. 2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강. 외국인과 나그네 (히 11:13-16)

-.정낙원 목사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민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본성과 거스리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본성을 거스리게 되면 본능적으로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은 항상 편하게 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 몸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는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공격을 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라는 놈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이는 죄가 육신을 볼모로 잡고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육신의 소욕을 죄라고 지적하면서 일을 합니다.

믿음이 육신의 소욕과 싸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 거하게 합니다.

만약 육신이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뭡니까?

하나님 뜻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려고 합니다.

완전히 청개구리 심보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중풍병자가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믿음은 갖고자 소망하는데 바울처럼 살기는 싫어합니다.

입술로는 주여! 아골 골짜기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몸은 천국(편안함)을 쫓아갑니다.

마음은 좁은 길로 가야지! 라고 하지만 몸은 넓은 길로 갑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고도 멉니다.

머리로는 예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은데 몸은 한 뼘 만큼이라도 자기 사랑의 영역을 빼앗기기를 싫어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러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몸은 마귀와 어깨동무하며 놀면서 마음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가히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만이 해 낼 수 있는 이중적 사랑 놀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겉으론 평화를 외치면서 속으론 전쟁을 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히브리서 11장에 거론된 인물들을 보면 기(氣)가 질립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는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합니다.

지나간 해에는 게을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였지만 새해엔 정신 바짝 차리고 하겠다고 각오를 다집니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새 학기가 되면 낙서투성이인 낡은 공책을 버리고 새 공책에다 이젠 깨끗하게 써야지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각오도 사흘을 못 넘깁니다.

성경을 대하면 여지없이 우리의 각오는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각오도 다짐도 다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봐도 성경대로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호랑이 털은 탐나는데 도저히 호랑이가 무서워서 잡을 재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탐나는데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라고 하니 이걸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지옥에 가면 영원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고생한다고 하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천국에 가려고 하니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 따라오라고 하니 이건 도저히 불가능하니 한 마디로 울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안 믿자니 뭔가 찜찜하고 불안하고,

믿자니 힘들고 이걸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급기야 한숨만 나오고 이게 과연 신앙인가 회의가 듭니다.

 

그래도 뭔가 하나님께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거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여지없이 허구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히 11장에 나타난 사람들의 발뒤꿈치도 못 좇아갈 형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았을까?

여보시오.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소?

그 비결을 좀 알려 주이소.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기 위해서 그 비밀을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어느 시대이고 동일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시대나 민족이나 인종을 초월하여서 모두가 항상 동일합니다.

 

알다시피 히 11장에 기록된 믿음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 이 시대는 환경은 다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 삶에 지향성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증거대로라면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몰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히브리서가 지금 우리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을 한마디로 축약해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을 찾아 떠나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삭 속에는 분명하게 하늘에 있는 본향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안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약속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이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 속엔 이 땅에 것이 없고 하늘에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면서 세상사람 아닌 것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이는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믿음에 사람들은 이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관이란?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에 본능은 자기 사랑으로 움직입니다.

내 몸 편하면 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나” 만 살면 됩니다.

 

죄의 끝자락엔 “나” 만 있습니다.

오로지 “나” 뿐입니다.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습니다.

내가 곧 신(神)입니다.

 

목사님 전 안 그런데요?

난 그래도 남을 생각하고 사는데요? 라고 하지 마세요?

남 속에 자기를 담아 놓고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속엔 이미 아내가 바라는 남편 상(像)이 있습니다.

이걸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남편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대에 부응 할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침에 출근 하는 남편에게 일찍 오세요 라고 합니다.

이는 퇴근 즉시 집으로 돌아와야 된다는 자기 생각을 남편에게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자기가 담아 놓은 기대처럼 회사가 끝나자 말자 곧장 퇴근을 하면 좋아 합니다.

자기가 기대한대로 남편이 움직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늦게 술 먹고 들어오면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입력시켜 놓은 남편은 퇴근과 동시에 집에 들어와서 자기와 놀아주는 것이거든요.

그 속엔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게 없어요.

이렇게 되면 자기가 남편에게 심어 놓은 이미지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겁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바라는 이미지가(像)이 있습니다.

예쁘게 치장을 한다거나 애교를 떤다거나 하는 바램들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이 바라는 것처럼 가꾸지 못할 땐 화가 납니다.

자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내나 남편이나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전부 허구임이 드러납니다.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미지를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허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상대의 허물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상대가 내게 잘 해주는 것만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사랑이 아니고 좋아하는 것이지요.

이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에게 딸이 하나 있습니다.

집사님은 딸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땐 영 아닌데 엄마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가 봅니다.

 

그래서 딸에게 자기 꿈 소망을 가득 담고 대학을 보냈습니다.

집사님 마음엔 좋은 사위를 맞이해서 남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좋은 사위란? 의사나 판 검사나 재벌 아들이나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 딸이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고 출신의 한 남자를 알았습니다.

그 집안도 형편없습니다.

엄마 입장에선 학벌도 모자라고 집안도 모자라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그 남자 없으면 못 살겠다고 합니다.

덜컹 임신까지 했습니다.

결국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집사님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넌 내 얼굴에 먹칠한 년이라고 화를 냅니다.

딸에게 심어 놓은 이미지가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딸을 보고 사위를 보면 화가 난답니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사위 자랑한답니다.

그러면 자기는 쪽 팔려서 말도 못한대요.

자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고 해요.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자기 꿈을 깨트리니 원수처럼 보인 답니다.

이런 내용은 드라마 단골 소재들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타인에게 자기 이미지를 심어 놓고 그 이미지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랍니다.

친구 관계도 그렇고 이웃 관계도 그렇고 모든 인간이 다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타인 속에 자기가 심어 놓은 이미지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 속에 심어 놓은 자기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하지 마세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목사도 자기를 사랑하고 교인들도 자기를 사랑합니다.

목사도 교인에게 바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저 교인이 이정도 해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빠지지 말고, 헌금도 잘하고, 목사 대접도 잘하고, 목사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순종 잘하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에 충족이 될 때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반대로 교인도 목사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요.

자기만 예뻐해 준다거나,

자기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준다거나,

자기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님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도 싫고 교회도 싫고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서 떠납니다.

바울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바른 소리보다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고 했어요.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하지요.

이 말은 자기 귀를 즐겁게 해주는 목사를 쫓아다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칭찬 해 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칭찬해 주면 사랑이 많고 은혜롭다고 해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설교를 들으면 행복해져요.

 

이 시대 목사나 교인이나 모두가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아우성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서로가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라도 나에게 섭섭하게 하면 밉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교회이든지 목사이든지 그 누구에게라도 바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그 뒷면엔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지는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에요.

이미지는 수시로 타협하면서 변해요.

최선이 아니면 차선으로 이미지를 변경합니다.

 

복음도 내 이미지에 합당 할 때 수용합니다.

내가 지켜내고 내가 감당 할 만할 때 받아 들여요.

결국 복음이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복음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죄인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없어요.

머리로는 복음대로 살라고 하는데 몸은 복음에 반(反)하는 쪽으로 움직여요.

몸 따로 마음 따로 입니다.

 

성경은 이런 죄인의 모습을 중풍병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모두가 중풍 병자들입니다.

자기 마음 먹은 대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마음은 분명히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그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고 싶지요.

다 잘 믿고 싶어요.

이건 저와 여러분의 본심이에요

진짜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요.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인간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안돼요.

머리로만 믿으라고 하면 예수님처럼 살 것 같은데 몸으로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머리로 아는 것대로 안 살아져요.

그래서 고민인 겁니다.

아! 왜? 안 될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이런 고민을 하였어요.

 

롬 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은 하나님 법을 사랑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살펴보니 자기 마음에 또 다른 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놈이 더 강한 놈인 겁니다.

이 놈은 하나님 뜻을 싫어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놈입니다.

 

이 놈 안중엔 하나님이 없어요.

오직 자기 밖에 없어요.

가만히 보니 이 놈이 몸뚱아리의 주인인 겁니다.

우리 몸 뚱아리를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으로 내 모는 겁니다.

그래서 속에 있는 놈이 죽겠다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예수남과 같이 방불할 정도로 살았던 그 유명한 바울이 탄식하고 있어요.

 

우리 생각엔 바울은 마음먹은 대로 살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바울도 자기 몸 때문에 고민하고 속상해 했어요.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살아지니 애가 탔어요.

이 정도 되면 우리도 안심이 조금 되지요.

 

바울 같이 위대한 사도도 마음 따로 몸 따로 살았는데 우리 같은 얼치기들이야 오죽 하겠어요?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이 들지요?

 

이것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흠 없이 지킬 땐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 믿고 나서 보니 알게 된 겁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음은 하나님께로 달려가는데 몸뚱이는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놈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놈 한데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놈을 새 사람이라 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놈을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고 해요.

그러니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싸우면 속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겉 사람이 이겨요.

맨 날 새 사람이 얻어터져요.

 

우리 생각엔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성령이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실상은 정 반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바울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예수를 믿고 나서 하는 고백입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고백이 아니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고백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마세요.

의아하지 않습니까?

바울 같은 사람이 겉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누구입니까?

죽은 사람도 살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는데도 겉 사람은 속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아 내지를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상태로 본다면 성령이 바울의 생각대로 도와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마음먹은 대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여기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중요한 원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인간으로 비교하면 예수님이 인간에게 얻어터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런 것을 역리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건 구약 요셉의 시대 때 바로의 꿈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바로가 한 날은 꿈을 꾸었는데 살찐 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쩍 마른 소 일곱 마리가 또 나타난 겁니다.

그러더니 비쩍 마른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 겁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최홍만이를 때려눕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 손에 죽임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무지 일어 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들 손에 죽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 손에 죽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 손에 죽임당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 바울 속에선 날마다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이 자가 몸을 마음대로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만약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았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의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있다면 예수의 피는 필요가 없고 성령의 능력만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구원 할 때 필요한 일회용이 되어 버립니다.

구원 후엔 예수님의 피는 소용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많은 목사들이 구원 후의 삶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구원 얻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만든 교리가 “성화(聖化)론” 입니다.

성화(聖化)란 말의 뜻을 직역하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구원이 완성 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남겨 두었어요.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해요.

이미 구원은 완성 되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구원 후에 삶이 있다고 합니다.

 

구원 후의 삶이 바로 예수님처럼 되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온전하니 성도도 온전해져 가야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거룩하니 성도도 거룩해져 가여 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거룩한 사람이 되어져 가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거룩해지는 것입니까?

성도가 어느 정도까지 거룩해져야 완전히 성화가 되는 겁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답하기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성경의 명령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 정신대로 살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예배참석 잘하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산상보훈대로 살고, 성경의 명령법들을 지키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강조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라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날마다 자기를 갈고 닦기에 분주해 집니다.

오늘 보다 내일은 더 잘 할 것이야 라고,,,

오늘 보다 내일은 더 거룩해져야 한다고 나름대로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몸이 피곤하여서 기도도 못하고 성경도 못 보면 낙심이 되어 기가 죽어 버립니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을 당하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거룩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면 다시 분발하여 처음부터 다시 무너진 탑을 쌓아갑니다.

일평생 쌓았다 허물었다 합니다.

 

아침에 새벽기도라도 하면 의기앙양한데 그렇지 못하면 의기소침합니다.

아침엔 용기백배인데 저녁엔 낙심천근입니다.

자기 행위에 따라 천국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고 마치 미친년 널뛰듯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믿음이 주는 행복과 감사는 없고, 오로지 어떻게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는 걱정만 앞섭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앞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천근입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 아니라 수고와 슬픔과 무거운 짐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이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가?

바울이 그렇게 살았는가?

살펴보세요.

 

바울이 다메섹 이전 상태를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즉 구원 받지 못한 상태란 말입니다.

그 당시를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 때를 예수 밖의 저주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살았는데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엔 그렇게 자랑하고 자랑하였던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신앙을 배설물(똥 덩어리)이라고 했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대로라면 이 시대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똥 덩어리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누가 누가 똥 덩어리를 많이 모았는가 내기하고 있습니다.

최소한도 이 시대 한국교회에선 똥 덩어리를 많이 모은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똥 덩어리를 가지고 주여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를 문 닫은 것도 똥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말라기를 봅시다.

 

말 1:7-8=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열심히 바쳤습니다.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잘난 절기를 지킨 정성을 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똥을 이스라엘의 얼굴에 쳐 발라버린다고 합니다.

왜? 절기를 지킨 것을 똥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절기 지킴을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절기 지킨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이미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은 언약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모세에게 시내산에 올라 오게 해서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산 아래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박성들이 지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짐승의 피를 양푼이에 담아서 약속이 체결되었음을 공포하면서 피를 이스라엘의 머리에 뿌려 버립니다.

이는 누구든지 약속을 어기면 이 피처럼 죽임 당한다는 의미의 계약 체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다고 하여서 피로 언약을 맺고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킬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겨 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늦게 온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금송아지가 바로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출해낸 여호와라고 하며 제사를 지냅니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 아래로 내려 보내서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라고 합니다.

그 증거로 모세에게 주었던 두 돌 판을 깨트려 버립니다.

이제 약속이 파기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곤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기 시작 합니다.

이 때 모세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과 흥정합니다.

내 생명을 줄 테니 이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삼천 명만 죽이고 모세의 청을 들어 줍니다.

그리곤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십계명을 두 돌 판에 새겨 줍니다.

그리곤 그 돌 판을 법궤 속에 담아 보관하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이 사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한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모세 언약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말라기 선지자의 말대로 보면 그들은 절기를 지킨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으로 들고 나온 것입니다.

 

모세 언약 때문에 산다는 것을 잊고 자기들이 제사를 지내서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지킨 절기를 더러운 떡이고 눈먼 희생이라고 하시면서 절기의 똥 덩어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을 신앙이라고 자랑한 것은 말라기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비로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그렇게 자랑하였던 율법지킴에 신앙을 똥 덩어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똥이 뭡니까?

양분이 다 빠져 버린 쓰레기 아닙니까?

밥을 먹으면 밥 속에 있는 영양분은 몸 속에서 다 분해가 되어 몸에 주고 난 후 찌꺼기가 되어서 몸 밖으로 배출 되는 것이 똥이잖아요.

똥이 몸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으면 똥독이 올라 죽습니다.

그러니 양분이 없는 찌꺼기는 빨리 몸 밖으로 배출이 되어 버려져야 합니다.

이거 붙잡고 있으면 죽어요.

 

그러니 바울이 똥이라고 한 율법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죽어요.

빨리 버려야 해요.

바울이 율법 신앙을 똥이라고 한 것은 아쉬워하지 말고 멀리 버리라는 말입니다.

가까이 두지 말라는 겁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성화주의 신앙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화주의는 인간의 행함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엔 양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냄새나는 똥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을 보세요.

무슨 조폭세계와 같이 등급이 매겨져 있어요.

성화가 많이 된 자와 적게 된 자간에 서열이 정해져 있어요.

헌금 한 놈 하고, 안 한 놈은 목사가 대하는 격이 다릅니다.

주일 성수하는 놈하고, 예배 빠진 놈 하고는 급수가 달라요.

새벽기도 나온 놈하고, 안 나온 놈하고 영발이 달라요.

 

급수가 낮은 놈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해요.

그래야 앞선 놈들을 따라가요.

그러면 앞선 놈들은 선두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달려가요.

선두에 있어야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을 붙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서로 경쟁이 되어서 돈도 뭉텅이로 바치고 전세금 빼내서도 바치고 안 되면 빚을 내서라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들은 설교시간에 저런 정성을 본받으라고 방방 띄워 줍니다.

수백 명 수천 명 모이는 자리에게 이름이라도 불러주고 박수라도 쳐 줘보세요.

그러면 목사님 고마워요 하면서 뼈 마다마디가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져 버립니다.

 

그 황홀함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제는 강도를 더 높입니다.

집구석은 뒷전이고 교회 일이라면 밤잠 자다가도 나갑니다.

이 칭찬 듣고 박수 받는 재미로 교회 다니고 돈 갖다 바치고 충성 경쟁 하는 겁니다.

칭찬은 마약과 같아요.

한 번 들으면 또 듣고 싶어요.

중독성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칭찬 듣는 일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제일 약한 게 칭찬이에요.

칭찬을 싫어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칭찬을 이겨내지 못해요.

누구라도 목사님 설교 참 잘 합니다 라고 하면 기분이 좋고 신이 나요.

칭찬해주면 그 사람이 좋아요.

가까이 하고 싶어져요.

복음 아는 것하고 인간의 본성은 상관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한다고 하는 겁니다.

 

잠 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시련한다는 말은 시험한다는 뜻이에요.

이는 칭찬 듣고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서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화가 있다고 했어요.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구원하심에 감사하여 열심히 하는 것하고 칭찬듣기 위해 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감사함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헌신이 되지만, 칭찬을 바라고 하는 것은 뇌물입니다.

뇌물이란? 반대급부를 바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 거짓 선지자들은 재물을 받고자 칭찬을 하였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로 하지 않고, 교회에서 칭찬 듣고 사람들 속에서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는 열심을 끄집어내고자 하면 안 됩니다.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그 복음에 감사가 되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옥합을 깹니다.

억지로 깨게 하면 안 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고 나선 반드시 시험에 듭니다.

왜? 시험에 듭니까?

그 약발이 오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뿐입니다.

 

전세금 빼서 바쳤다고 날마다 박수쳐주지 않아요.

목사들은 하이에나처럼 더 열심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른 박수거리를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 집 팔아서 헌금 했다고 해서 평생 울궈먹고자 하면 큰 오산입니다.

길면 일 년 가고 짧으면 한 달 갑니다.

 

제발 마음에도 없는 열심을 내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에 주님 사랑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세요.

그래서 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를 알아야 해요.

괜히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한다고 했다간 다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한다고 기뻐하지도 않아요.

아니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믿겠다고 하면 우째자는 겁니까?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처럼 자기 몸을 학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보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엘리야처럼 하나님 약속 붙잡고 종용히 해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만 내 밀면 꼼짝하지 못해요.

 

그러니 약속 들고 나오세요.

그 약속이 바로 예수님 피 잖아요.

예수님의 희생에 피를 들고 나오란 말입니다.

 

멋있는 것하고, 멋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멋있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고, 멋으로 사는 것은 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댓가가 필요 없지만, 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댓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고 싶어요.

그러나 살고 싶다는 것하고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이 믿음에 행적들이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동경하는 것하고 그들과 같은 자세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의 삶이란? 최소한의 생명에 필요한 것만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마실 것 다 마시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마실 것 다 마시며 삽니다.

머리로는 이들과 같이 살아야 하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들과 정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탄식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멋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멋을 부릴 줄 몰라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의지가 약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주후 35년경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67년경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산술적으로 보면 바울이 예수를 약 33년 정도 믿다가 죽은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주후 57년경에 기록했어요.

로마서는 바울이 예수 믿은지 약 23년 정도 지나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난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는 건져 내랴” 라고 고백한 시점은 가장 신앙생활을 활발하게 할 때입니다.

가장 성령 충만할 때 토해내는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이 곤고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뚱이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재간이 없기 때문에 토해내는 탄식인 것입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죄의 몸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탄식하는 겁니다.

 

성화가 못 되어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성화 할 수 없기 때문에 토해 내는 것입니다.

죄인의 몸은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자연히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으면 예수님은 헛 죽은 것이 되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으라는 말은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말씀대로 살 수 있으면 순종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을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회성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을 때 까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거잖아요.

 

믿음은 새 언약을 믿는 겁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까?

우리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율법의 요구 때문이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를 누가 고발 합니까?

율법이지요.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거잖아요.

 

믿음이 뭡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거잖아요.

내 대신에 누가 죽었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셨어요.

가서 자기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 대신 죄 값을 치루었다고 알려 주라고 보내셨어요.

그럼 성령은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너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믿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은 성화주의자들의 말과 같이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내라고 하는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들이 밉니다.

너 하나님 뜻대로 살았어! 못 살았어?

하나님이 뭐라고 했어!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했지! 너 그렇게 살어! 못 살어!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

그래 안 그래!

 

원수를 사랑하고 먹이라고 했지!

그렇게 하고 있어! 안하고 있어!

돈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넌 돈 너무 사랑하고 있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

그런데 왜? 새벽에만 정해 놓고 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지!

그런데 넌 선별해서 감사하고 있지!

 

탐심은 우상숭배이니 버리라고 했지!

그런데 넌 온통 탐심뿐이지!

땅에 것은 버리고 위엣 것을 사모라하고 했어? 안했어?

너 이런 것 다 지켰어? 못 지켰어?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성도에게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닦달을 합니다.

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죄인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바울이 지금 성령이 몰아 부치는 이 회돌이에 걸린 겁니다.

회돌이가 뭔 줄 아세요.

바둑에 나오는 용어인데 여기에 걸려들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어요.

바울이 지금 하나님 말씀이 고발하는 그 회돌이에 걸린 겁니다.

 

아무리 봐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요.

그러니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줄 사람 없나!

이건 바울이 항복 한 것입니다.

나 항복입니다.

항복!

 

그러자 성령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알려 줍니다.

 

롬 8:2-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해방이 뭡니까?

가둬져 있던 것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못한 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너 대신 죄 값을 치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탄식하고 있으니 성령이 이 사실을 알려 주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씀이 너를 몰아치거들랑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만세 삼창을 부르는 겁니다.

오! 주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더러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셈이지요.

맞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고 있지 않아?

그러고도 너희들이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이 뻔뻔한 놈들아? 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복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지요.

성령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복음이냐를 증거합니다.

 

성령의 관심사는 성도들을 착한 사람 만들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도리어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오셨습니다.

너 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모든 삶 속에 예수님의 피를 남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고 가르쳐 줍니다.

넌 예수님 때문에 사는 놈이야! 라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죄인에게만 복음이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죄인과 한 셋트인 겁니다.

죄인이 없으면 예수님 피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의인에겐 복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성화주의자들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설교가 되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피는 성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성령 충만 만이 도움이 되요.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은 성령을 많이 운운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해 지세요! 라고 하면 말이 안 맞아요.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거룩해 지는 것이지 차츰 차츰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순을 감추기 위해 십자가를 말하면 아직도 그 십자가에 머물러 있느냐 라고 해요.

십자가를 넘어 가서 풍성한 세계로 진입하여야 한다고 해요.

그들이 말하는 풍성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얻어지는 자기 영광입니다.

나 괜찮아!

난 이정도야! 라면서 사람들 앞에서 뻐기고 싶은 욕망입니다.

 

죄인은 죄인다워야 합니다.

죄인이 죄인답지 않으려는 것은 사기입니다.

강도가 난 강도입니다 라고 해야지 타인이 피해를 안 봐요.

그런데 세상은 강도가 성자로 둔갑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겁니다.

 

성도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의로워진 사람입니다.

독단적으로 의로워진 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의는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것이지 성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만 의롭다고 인정이 되고 예수 밖에 나가면 벼락을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 안에 머물도록 합니다.

예수 밖에 나가면 여전히 저주가 쏟아집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라지지 않는 집은 죽음의 천사가 들이닥쳐 멸망시킨 것과 같습니다.

 

죄인의 몸에서 착함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것은 악입니다.

죄인의 몸에선 착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의 것을 붙잡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가 항상 구원의 근거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은 반칙이며 불가능합니다.

가지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나무이지 가지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생명은 예수님의 피에 있지 성도의 성화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은 예수님의 피에 있지 인간의 행실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피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예수 밖은 모두가 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빠진 성화는 이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죄를 이기지 인간의 착함이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령을 운운하면서 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고 비 신앙입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 오로지 예수님의 피를 남기는 일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생명의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는 법이란 뜻입니다.

아까 성령은 하나님 말씀으로 죄를 고발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다고 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바울에게 적용하면 성령은 하나님 말씀으로 너 왜?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바울의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지적에 자기 죄를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곤한 자라고 탄식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성령이 바울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안내하여 자신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가지고서도 죄가 고발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면서 죄를 고발하는 이중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처럼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기를 요구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가야할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라고 했으니 이 세상엔 발붙일 고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국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주류로 남고 싶어 하지 나그네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천국을 말하지만 몸은 세상에 붙박이처럼 쫙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영악해서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겠다고 합니다.

문어발처럼 천지사방에 발을 뻗쳐서 나무뿌리가 땅속으로 파고들듯이 세상 속으로 파고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세상과 간음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마치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처럼 붙잡아 두면 또 도망가곤 합니다.

주일날 말씀을 들을 땐 주여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지만 교회 문만 열고 나가면 언제 그랬느냐 라는 식으로 뻔뻔스럽게 땅강아지처럼 땅을 파고 듭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면 하나같이 타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 속에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잡고 계시는 것은 그 바탕에 예수님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꼬라지가 그래도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든 내지 않든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머금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잘나서 지켜져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도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 속에 하나님 자신이 한 약속을 담아 놓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과는 상관치 않고 지켜주신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스스로가 언약을 지켜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언약이 교회를 지켜줍니다.

언약 때문에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역시 언약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성도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은혜가 다름 아닌 언약입니다.

언약 위에만 은혜가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타락하여도 하나님은 책망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책망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확 갖다 버릴 터인데 예수님은 버리지 않고 책망만 하십니다.

 

책망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속에는 미움도 들어가 있습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남자들이 술집아가씨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하고, 자기 마누라를 사랑하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술집 아가씨가 다른 남자랑 술 마시는 것엔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누라가 다른 놈 하고 술 마시면 화가 나고 질투가 생기고 미워집니다.

이는 술집 아가씨에겐 사랑이 없고 마누라에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도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처럼 너희들을 버릴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의 역사는 한마디로 두들겨 팼다 사랑했다 두들겨 팼다 사랑했다 의 연속입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담아 놓았습니다.

그 약속이란? 다름 아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이 엄몰치 못하고 불꽃이 사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 어떤 것으로도 참소하여도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히브리서 11장의 선배들처럼은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자학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죄인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죽임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못남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자신의 못남을 알 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기쁨에 감사가 되어집니다.

 

좋은 신앙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그 길이에 풍성함을 깨닫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만이 토해 낼 수가 있는 구원에 향기입니다.

부디 은혜 속에 강한 자가 되셔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탄식 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원함은 있으니 그 원함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게 하심의 큰 위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에 십자가로 대속하신 용서하심을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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