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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8강. 이삭이라는 제물 속에 담긴 의미 (히 11:17-19)

by coroa 2022. 3. 1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강. 이삭이라는 제물 속에 담긴 의미 (히 11:17-19)

-.정낙원 목사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오늘 본문은 부흥사들이 교인들에게 돈을 울궈 낼 때 즐겨 사용하는 본문입니다.

흔히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함이라거나 또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돈이 필요할 때 설교의 단골 메뉴로 자주 사용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쳤는데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은근히 부담감을 주고 결국엔 돈을 뜯어내는데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교인들은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자신은 아무리해도 아브라함처럼 독자 이삭을 바칠 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목숨을 열개라도 바칠 수가 있는데 실제로는 바칠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다 하는데 행동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먹고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한번 살아 보아야겠다고 각오를 하고 성경을 펼쳐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는 것과 같은 말씀 앞에 서면 성경을 더 이상 볼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성경을 본다 한들 겉돌고 맙니다.

왜?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내용들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우리더러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를 죽이기 위함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우린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흔히들 사람들이 자식을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를 만들면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데 그건 인간들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신학교에 보내서 흔히 말하는 주의 종을 만들지 않았어요.

이삭을 죽였단 말입니다.

 

물론 이삭대신 숫양이 죽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인 것과 같아요.

이삭을 죽이는 척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이고자 했어요.

 

만약에 숫양을 준비해 놓고 우리더러 너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자식은 안 죽고 숫양이 대신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준비한 숫양이 없이 바치라고 하면 우린 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흥사들이나 목사들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으로 가지고 교인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가 사기 치는 것입니다.

설교 하는 목사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못해요.

말만 뻔지르르하게 하지!

 

저 역시도 불가능해요.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식을 바치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바치라고 하는 것은 공갈이고 협박하는 겁니다.

그래서 타협적으로 내어 놓는 것이 자식 대신 돈을 바쳐서 믿음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돈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거부였어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바칠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돈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독생자를 바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설교도 참 어려워지는 설교가 됩니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을 뭐라고 합니까?

독생자(獨生子)라고 하지요.

 

“독자(獨子)”가 아니라!

“독생자(獨生子)”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아니 독자나 독생자나 뭐가 다릅니까?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독자(獨子)와 독생자(獨生子)는 엄연히 달라요.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지혜와 상식으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독자가 아닙니다.

독자(獨子)란 말은 하나란 뜻입니다.

우리말로 외아들(only son)이라는 말입니다.

형제가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란 말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 여섯 명이나 있었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은 여덟 명이었어요.

그러니 이삭은 독자가 아니지요.

외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면 성질 급한 사람은 그럴 겁니다.

아니 그거야 이삭은 약속으로 낳았고 나머진 육으로 낳았으니까 그렇지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삭이 독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창세기가 말하는 이삭과 히브리서가 말하는 이삭은 달라요.

창세기에선 육과 영을 대비하기 위해서 독자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는 이삭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영과 육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삭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라고 하지 않고 독생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獨生子)라는 말은 “스스로 사는 자” 란 뜻입니다.

 

독생(獨生)이라는 말은 “홀로 독(獨)”이라는 말과 “날 생(生)” 즉 “스스로 산다” 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헬라어로 독생(獨生)이라는 “모노게네스(monogenhv)”라고 하는데 합성어입니다.

“모노스(movno)”라는 말과 “기노마이(givnomai)”라는 말의 조합입니다.

 

“모노스(movno)”는 “홀로 독(獨)”라는 뜻이고,

“기노마이(givnomai)”는 “산다는 생(生)” 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조합하면 “홀로 사는 자, 독자적으로 사는 자, 스스로 사는 자” 란 말이 됩니다.

 

이러면 힌트가 생기지요.

성경에 보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셨어요.

출애굽기 3장을 봅시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증거 하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스스로 산다는 말이에요.

즉 독생한다는 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 란 뜻이 되지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 달리 말해서 하나님과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생명으로 비유하면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라는 의미보다 “자존(自存)”하는 생명이란 뜻이 더 강해요.

자존(自存)이란? 독자적으로 사는 것, 외부의 도움이 없이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피조 생명이 아니고 창조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에 독생자란 외아들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을 일컬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잠시 육신의 몸으로 온 것입니다.

육신으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역사 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세계에 있는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구속을 하기 위함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려고 역사에 필요한 몸을 입고 오신 겁니다.

 

육신의 몸은 이 땅에 필요한 몸입니다.

알다시피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같은 그런 육신의 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몸은 우리 몸과 동일한 몸이에요.

비록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일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안 돼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믿을 일이지 분석하고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는 피조물의 지혜이기 때문에 창조주에 관하여서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어지니 믿는 것이지, 이해하고 분석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분석해서 믿으면 자기 이성에서 벗어나면 안 믿어져요.

 

자유주의자들의 악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이해를 하려고 하니 자기들이 이해되는 것만 성경에 남겨두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전부 삭제해 버렸어요.

신화로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이 안 믿어지니 안 믿으려는 쪽으로 성경을 난도질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믿음을 받은 사람은 어찌하든지 믿고자 하고,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안 믿으려고 해요.

예수! 예수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안하는 쪽으로 나아가요.

 

복음을 전해보면 꼭 두 부류로 나타나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감사하고 사세요! 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 열심히 할 것 없구나! 라고 하면서 안 하는 쪽으로 움직여요.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예수 믿는데요.

 

그러니 이런 사람에겐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말은 그러지 않아도 하기 싫은데 잘 되었다 싶어서 안 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꼭 자유주의자들과 같아요.

예수 믿기 싫은데 잘 되었다 쾌재를 부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그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서 주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몸이 움직여요.

그러니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하고,,,,

뭔가를 자꾸 하려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나잖아요.

한쪽은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한쪽은 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만큼 택한 자와 유기된 자간에는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독생자(獨生子)라는 것은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독생자 개념은 외아들이라는 개념이잖아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독생자 개념은 외아들에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주일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며” 라고 하는 외아들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외아들이라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됩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말은 본질 면에서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격으로 취급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발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돼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신봉하는 자들이므로 반드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해요.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참람죄로 죽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삭을 스스로 사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 독생자라고 하지요.

자 보세요.

이삭을 누가 낳았습니까?

아브라함이 낳았지요.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 믿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셨어요.

그러니 이삭은 하나님 자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 내(하나님) 아들을 바쳐라 라는 말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을 바치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맡겨 둔 것을 도로 찾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창 2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네 아들”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네” 가 누굽니까?

아브라함 이예요.

이삭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아브라함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이삭은 창세기에선 아브라함의 아들로 나타나고,

히브리서에선 하나님 아들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에선 독자(獨子) 라고 하고, 히브리서에선 독생자(獨生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선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유일한 아들로서 독자가 되지만,

히브리서에선 부활의 주님을 상징하는 의미에선 독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다시 말합니다.

독자라고 할 때는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독자입니다.

그러나 독생자라고 할 때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독생자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무턱대고 믿으면 안 돼요.

그러면 상식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은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하였다고 하지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아야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안돼요.

인간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성경은 그냥 인간들 역사 이야기가 되어 버려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들의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맞아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하지요.

장자란? 맏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리니 아브라함이라는 가문에서 일어난 자식들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라는 가문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예수님 이야기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독자와 독생자라는 전혀 다른 두 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이고 하나님이 낳은 자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받으십니다.

말이 이상하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으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이삭 대신 숫양을 잡게 하셨지요.

그 숫양은 누가 준비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했지요.

맞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 산(山)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이삭 대신 죽을 제물을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삭 속에는 “이중 계시” 가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이삭은 독생자라는 의미에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려질 때는 이삭 대신 죽어준 숫양이 예수님이 되어요.

이러면 이삭은 누구의 모형인가 하면 성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을 위해서 모리아 산의 숫양과 같은 제물을 친히 보내주시는데 그 제물이 바로 자기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 신약에선 누구입니까?

예수님지요.

 

그럼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산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산 것이지요.

신약에선 예수님 때문에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난 성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이삭을 다시 받은 것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18-19=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령이 히브리서를 쓰는 기자에게 아브라함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 이삭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자손들이 누구 때문에 살아나는 줄 아느냐?

숫양과 같이 하나님이 친히 보내주신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숫양이지요.

신약적으론 예수님이지요.

그럼 이삭은 누구 안에서 살아난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살아난 것이지요.

이해되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바친 겁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요?

그걸 본문에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겁니다.

 

그럼 본문이 아브라함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믿음이지요.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바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돈 바치라고 하는 설교는 모두가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가지고 돈 뜯어내는 놈들은 전부 강도 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 것은 받지 않아요.

예수님 것만 받아요.

예수님 것이란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믿어지지 않으면 예수 믿고자 하면 안 돼요.

헌금 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남 눈치 보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반드시 속상하고 본전 생각나고 후회해요.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꼼수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꼼수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목사들이 사기를 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면 복을 준다고 하니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열심 낸다고 복을 주지 않아요.

그리고 복은 우리가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복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뭔가를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부다 사기입니다.

원래 사기당하는 것은 욕심 부리기 때문에 당하는 겁니다.

사기꾼들은 욕심 없는 사람들에겐 접근하지 않아요.

사기꾼들은 욕심내는 자들에게 접근해서 일확천금을 주겠다고 하면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이걸 신앙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복 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아는 사람은 복을 따내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감사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성도는 신앙생활을 복 받는 수단으로 하지 않아요.

당연히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는 거짓 목사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해요.

내가 열심히 할 테니 복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마귀를 보내서 미혹하도록 합니다.

마귀가 가짜 하나님으로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고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정해진 코스예요.

육에 속한 자는 욕심이 발동하면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神)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그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하여 땅에 것으로 거래를 하고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것을 받지 않고 예수님 것만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님 것만 들고 나아가서 드립니다.

드릴 때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색을 내지도 않아요.

도리어 감사하며 드립니다.

이런 상태를 믿음으로 드린다고 하고,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으로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난 성도는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해도 그것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함으로서 도리어 감사하게 됩니다.

하면서 감사하는게 약속의 자녀들에 특징입니다.

봉사하면서 감사하고, 충성하면서 감사하고, 헌금 하면서 감사하고, 교회 나오면서 감사합니다.

모든 걸 감사해요.

 

너무도 중요하니 다시 한 번 복습하는 의미에서 정리합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예수님에게만 사용 할 수 있는 독생자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하다고 했지요.

동등하다는 말은 한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을 아버지와 아들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고 곧 자기 자신을 바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체라고 했으니 한 몸인 셈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은 한 몸인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본체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독생자 라는 말은 자기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를 드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쳤다는 말이에요.

 

인간이란? 어찌하든지 살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목숨을 덜컹 내어 놓는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비켜가면서 일을 해요.

그래야 그 일이 인간이 한 일이 아니고 믿음이 한 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는 제 정신으로 살지 않아요.

믿음이 그렇게 몰아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부모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쳤어요.

 

이런 내용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삭이라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있어 없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과 상관없이 태어난 자식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만들어낸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에게 자기 자식이라고 말할 주권이 없어요.

여기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을 시험하였다고 합니다.

 

시험이란? 아는지 모르는지의 알아보는 것입니다.

즉 이삭이 네 아들이냐 아니냐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자기 아들이라고 했으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삭이 누구 아들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네 인생이 누구 것이냐? 라고 묻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입니다.

내 인생이라고 한다면 내 뜻을 펼치고자 할 것이고, 하나님 것이라고 여기면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고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믿음이 알게 해 준 것입니다.

믿음을 받고 보니 이삭이 자기 자식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임하면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님을 압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자기 생각으로 읽고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 할 때는 자기 신학에 맞추어서 성경을 풀어갑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미 자기 안에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자기 신학과 생각을 합리화 시켜주는 수단으로 남게 됩니다.

이 시대 목사들마다 성경 해석이 제 각각인 것도 다 이런 사고 때문입니다.

목사가 옛 언약에 속하여 있으면 그 어떤 본문도 옛 언약 차원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새 언약에 속하여 있으면 어디를 펴도 새 언약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두 가지 틀이 있습니다.

옛 언약으로 해석하는 것과,

새 언약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두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입니다.

 

아담 안은 옛 언약에 속하였고, 예수 안은 새 언약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 옛 언약으로 풀어냅니다.

옛 언약으로 풀어낸다 함은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하는 방식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과 한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선 하나님과 인간이 맞닥뜨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말씀을 지켜야 할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보아도 이것을 어떻게 지키지 라고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선 하나님과 예수님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계약을 했어요.

인간이 빠져 있어요.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언약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말씀을 지킬 주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킬 주체가 아니니 하나님께선 인간들이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더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은 새 언약 하에선 맞지 않는 말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을 지킬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언약 대상이 아니란 말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논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언약 당사자인 예수님의 행동으로만 논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선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새 언약 하에선 말씀을 지킬 주체가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성령이 그렇게 관심사를 몰고 가요.

성령이 예수님이 지킨 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요.

마치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 행위로 나가지 않고 제물을 앞세우고 나간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들고 나간 제물이 곧 신약적으로 예수님입니다.

 

정리하면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 무엇을 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결국 “나” 냐?

“예수님” 이냐? 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을 자기가 지켜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지켜낸 흔적들을 마일리지 적립하듯이 해 놓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이 말씀을 지켜야 할 내용이라고 한다면 첫 계명부터 열 계명까지 하나 하나 지켜나가면서 체크를 해야 합니다.

아! 오늘은 몇 개 지켰지!

뭐가 모자라지!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도 자기가 지킨 체크 리스트를 들고 나아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열 개인데 오늘은 몇 개 지켰습니다.

마치 일수 도장 찍듯이 합니다.

정한 기준에 도달하면 뿌듯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없으니 자기 흔적을 남길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흔적을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을 들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만약 너! 기도 했어! 그러면 예수님이 했거든요!

너! 전도 했어! 예수님이 하셨어요!

너! 이웃사랑 했어! 예수님이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 내가 너희와 계약하지 않고 예수와 했지!

네 이름이 예수님 족보에 있는 것 보니 넌 새 언약 백성이구나!

앗! 내 실수! 미안!

난 네가 옛 언약에 있는 줄 알았잖아!

너 참 똑똑하고 믿음 좋네!

 

근데 네가 예수의 족보에 있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던데!

성령님이요.

아! 그렇구나!

너! 앞으로 누가 뭐라고 하면 지금 나 한데 한 것처럼 대답해라 알았지!

예!~에

그럼 가봐!

예!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잘 가라!

나중에 또 보자.

 

이처럼 새 언약에선 자기 흔적 남길 일이 없는데, 옛 언약에선 자기 흔적 남겨야 해요.

그러니 옛 언약 하에 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뭔가를 자꾸 남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적용하면 예수를 믿지 않고 목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부흥 시켜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게 있거든요.

 

약 15년 전에 일입니다.

그때 저희 교회가 지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세가 약 70은 넘었을 법한 생면부지 어떤 노인이 찾아 왔어요.

누구시냐고 물으니 저희 교회에서 두 블럭 옆 건물 2층에 있는 00교회 목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들 교회로 이사를 하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 교회는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 상가를 하나 분양 받아서 그리로 이사를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돈이 없어서 2층으로 이사 갈 형편이 못 됩니다,

그러자 자기 교회가 그 곳에서 20년 동안 있었대요.

그 건물을 지으면서 바로 입주하였답니다.

건물 주인이 자기하고 동년배이고 아주 잘 통한대요.

 

그래서 자기들은 싸게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사 오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돈이 큰 차이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뜬금없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해요.

자기 할 도리를 다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 교회 하나 지어서 바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아마도 아파트 상가를 하나 산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지하에 있는 저에게 자기는 교회 하나 샀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묻지도 않는 말들을 술술하면서 자랑하지요.

자신이 목회를 한지 50년 정도 되었는데 항상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이 있었는데 교회를 짓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건물 하나 분양을 받아서 하나님께 교회를 봉헌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도 마음이 기쁘고 뿌듯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목사님 하나님이 무슨 부동산 업자입니까?

하나님께 교회 바치면 고맙다고 하게요.

약간 실랑이 하다가 연세가 든 분이라서 심하게 말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만약에 이 목사님은 남은 여생동안 신앙이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면 교회 들고 하나님께 갔을 겁니다.

그럼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공로로 오지 않고 자기 공로를 들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 목사님의 믿음에 본질이라면 그 목사님은 옛 언약에 속하여 마귀를 섬긴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교회를 바치게 되었으니 자기가 할 일은 다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어디서나 볼 수가 있어요.

흔히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면류관 받아야 한다고 열심을 내라고 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전부 주워다가 무슨 생명의 면류관이다 무슨 영광의 면류관이다 라고 주워 생깁니다.

성구 사전에서 면류관이라는 단어는 다 수집해서 갖다 부치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유식한 척 하면서 천국 가서 개털 모자 쓰지 말고 면류관 쓰라고 닦달을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목사나 이런 목사에게 듣는 그 인간들도 몽땅 지옥에 갑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들고 가지 않고 자기들 것을 들고 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 목사에 말을 듣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한 자들아 다 떠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이미 말씀해 주셨으니 참고 하세요.

 

지금도 육에 속한 목사나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것들을 준비한다고 분주합니다.

마치 앵벌이하는 사람들 같이 죽을 맛으로 하고 있어요.

심판 때 난 이렇게 목회를 충실히 했습니다 라는 것을 들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저녁때가 되면 주인에게 오늘은 무엇 무엇을 하였습니다! 라고 보고해야 해요.

그래야 밥도 먹을 수가 잇고 쉴 수도 있어요.

 

그러니 옛 언약 하에 있는 목사는 성경을 보아도 이것이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에는 관심이 없고 이것이 목회에 도움이 되느냐? 라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이 좋아 하는가를 생각하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가 하고픈 말을 설교를 핑계 삼아 뱉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이 설교로 뱉어져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 뱉어지니 그게 무슨 설교입니까?

자기 생각을 강변하는 것이지!

자기 생각을 교인들에게 주입시키자니 인간의 상식을 동원하고 세상 이치를 동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빈둥거리고 노는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의 상식은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해요.

자기에겐 열심을 내라는 것이 상식에 맞는 설교가 되지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 튀겨 가면서 여러분 같으면 아브라함처럼 정성을 바쳐야 하나님도 복을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 협박 반 공갈을 칩니다.

봐라!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까지 바치지 않았느냐?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지 않느냐?

여러분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귀한 것으로 바쳐야 하지 않느냐?

 

여러분이 멀리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지 못하면 돈이라도 내서 여러분 대신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를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교회가 선교도 하고, 성전도 짓고, 구제도 하고, 이웃사랑도 해야 하니 돈을 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바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면서 박박 긁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에스겔 34장의 목자들같이 양의 털들을 깎아서 배를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겔 34:2-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미련한 교인들은 양처럼 자기 피와 살 같은 돈을 강탈당하고 있어요.

강도에게 강탈당하고 있는데도 그게 믿음인 줄 알고 히죽거려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겐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 맞아!

앞으로 열심히 해서 복을 받아야지!

이러면 멋지게 목사가 던진 낚시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는 낚싯줄만 밀고 당기면 교인들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결국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목사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번 묻겠습니다.

탕자 비유 아시지요.

여러분 같으면 탕자에게 복을 주겠습니까?

집에서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맏아들에게 복을 주겠습니까?

 

착한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겠습니까?

아니면 속 섞이는 놈에게 유산을 물려주겠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라면 당연히 착한 아들에게 물려 줄 것입니다.

 

저 같아도 착한 아들에게 주지 꼴통에게 안 주어요.

그러니 제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다른 겁니다.

하나님 생각과 다르니 전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가 탕자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었어요.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인감도장 맡겨 준 것과 같아요.

아버지 집을 맡으라는 말입니다.

아니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당연히 이해가 안 되지요.

 

그래서 맏아들이 펄쩍 뛰는 겁니다.

아버지 인감도장은 자연히 자기가 맡아야 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탕자에게 주고 있어요.

맏아들 입장에선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저 영감이 미쳤나!

 

맞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늘 그래요.

인간의 상식을 비껴가는 식으로 일해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늘 가짜 하나님인 겁니다.

자기 생각으로 조합해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가 비상식적인 일을 하셨는지 생각해 봤습니까?

안 해 보았지요.

워낙 믿음들이 좋아서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그렇게 안 했겠나! 라고 생각하지요?

왜? 그렇게 하셨는지!

숙제로 남겨 둘까요?

알려 드릴까요?

알려 드릴 테니 잘 이해를 하세요.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중요해요.

아버지가 만약 집안에 돈을 많이 벌고 경영을 목적으로 한다면 당연히 맏아들에게 유업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가 재산을 불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집안을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움을 널리 드러내는데 목적을 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소유한 아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집은 천국을 상징하고 있어요.

천국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그럼 맏아들과 탕자 중에 아버지의 은혜를 많이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탕자이지요.

 

탕자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요.

그러나 맏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죄인인줄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는 은혜를 아는 자식에게 집안을 맡긴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께 빚지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를 원해요.

산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자라야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잘난 놈은 항상 잘난 것으로 아버지 앞에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덤벼요.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라고 덤벼요.

맏아들은 자기가 행한 것으로 아버지 앞에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내가 뭘 잘 못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겁니다.

 

행함으로 따지니 탕자는 아버지 앞에서 한 것이 없어요.

맏아들은 10점 만점에 10점이예요.

탕자는 10점 만점에 0점이예요.

 

그러니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하는 짓이 못 마땅해서 덤비는 겁니다.

이런 놈에게 집안을 맡기면 집구석을 온통 법 천지로 만들어 버려요.

은혜와 사랑으로 넘쳐야 할 집안을 온통 인간의 잘남과 못남으로 판단하는 냉기가 철철 넘치는 집안으로 만들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아버지 집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했어요.

천국은 은혜와 사랑이 철철 넘치는 곳이지 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니 천국엔 맏아들 같은 놈에게 맞기면 안돼요.

온통 법 천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요.

 

법이 왜? 나쁜지 아세요.

법은 사람을 차별해요.

법은 지킨 것에 따라 우열이 생기고 우열이 생기면 반드시 상하서열이 정해지게 됩니다.

교회가 법이 지배하면 목사와 장로나 집사가 서열이 정해지기 때문에 상하 관계가 되어요.

 

사람들이 장로가 되면 승진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승진이 아니라 직분이 이동된 것뿐입니다.

교회 안에 장로나 집사나 권사는 직분이지 직급이 아니에요.

 

엄마가 높습니까?

아빠가 높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엄마 아빠는 기능의 차이이지 높고 낮은 관계가 아니잖아요.

누가 엄마가 높습니까? 아빠가 높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질문이 틀렸다고 말해야 합니다.

 

천국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서열이 없고 우열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떤 사람에겐 고급스럽고 어떤 사람에겐 저급스럽고 하지 않아요.

은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동일합니다.

천국에선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있어요.

차별이 없어요.

 

그런데도 이 시대 목사들은 자신이 옛 언약 아래 있으니 성경을 법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서열화 해 놓았어요.

교회 조직 자체를 전부 직제화 시켜 놓았어요.

그러니 교회 안에 있는 각 기관마다 회장이 있고 총무가 있고 힘을 서열화 상하관계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부목사도 수석 부목사니 차석 부목사니, 장로도 수석장로니 차석장로니 하면서 서열화 시켜 놓은 겁니다.

 

그러니 서로 서로 승급하려고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 투표에서 떨어지면 교회를 안 나오는 겁니다.

완전히 조직폭력배들의 운영체제를 교회 안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교회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맏아들처럼 전부가 법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해석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신앙생활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성령으로만 성경이 해석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을 배제하겠다는 것이 성경 자체의 잠금장치 인 것입니다.

성경해석이 어려운 것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일절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새 언약의 맥락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새 언약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옛 언약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로서 자기가 한 것을 들고 아버지 앞에 나온 겁니다.

그러나 둘째 탕자는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로서 아버지가 준 것으로 서 있어요.

맏아들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을 하지만 탕자는 입만 열만 아버지 자랑을 해요.

맏아들은 아버지께 따질 것이 많지만 탕자는 감사 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을 가지고 말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바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니 군말 없이 바친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 자식이기 때문에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삭을 하나님께서 준다고 할 때 예! 하고 받았으면 아브라함도 이삭을 자기 자식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이 찾아 와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둘 다 조롱하고 비웃었어요.

 

조롱하고 비웃었다는 말은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비웃음 속에서 이삭을 주었어요.

너희들 언제 내 말 믿었느냐 라고 고발하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비웃음이라는 의미로 이삭이라고 지어 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야! 너희들 비웃던 그 놈 갖다 바치라고 했어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싫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친 겁니다.

 

이걸 어린아이들 이야기 동화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야! 내 말을 비웃는 놈아!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하자.

아마 아브라함이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야! 저 영감탱이 잊어버리지도 않고 아직도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있네!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되었는데!

지독하구나!

끝까지 우릴 괴롭히는구나?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

그 놈 바칠게요!

나도 그 놈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비웃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미치겠었는데 잘 되었네요.

진작 데리고 가지?

 

그리곤 이삭에게 야! 이리 와 봐!

여기 장작 좀 지고 가자!

아버지 어디로 가는데요.

하나님 앞에 제사 지내려고 해!

 

그런데 제사 지낼 제물은 안 갖고 갑니까?

야! 임마!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한다고 했어!

잔말 말고 따라 나서기나 해!

 

그래서 모리아 산까지 갔습니다.

그리곤 장작을 쌓아놓고 야! 너 이리 와 보라!

왜 그러는데요.

하나님이 널 죽이래!

예~에!

 

하나님이 너를 제물로 바치랬어!

너 원래 하나님 꺼잖아!

날 원망하지 마!

난 너 안 낳았어!

너 알다시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너 준다고 할 때 웃기지 말라고 하면서 조롱했었어!

그런데도 하나님이 널 주었어!

그러니 넌 우리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 자식이야!

 

일이 이렇게 진행 되자 이삭도 믿음이 간섭해서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는 제물로 삼고자 보냈구나!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밧줄로 묶을 때 도망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갈 때가 된가 봅니다.

얼른 죽이세요.

여러 번 찌르지 말고 단번에 찔러 죽이세요.

 

그래 알았다.

아들아 잘 가라!

그리곤 칼을 높이 들고 내리 찍으려는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이 다급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둘 다 놀라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고 예 하나님! 말씀 하이소!

뭡니까?

 

그 아이 풀어 줘라!

그리고 저 옆에 수풀에 숫양 한 마리 보이제!

그거 죽여라!

저 놈을 이삭 대신 바쳐라!

아니 저 숫양이 언제 있었지!

 

하나님 저 놈 우리가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요!

안다!

내가 준비해 뒀단다.

아니 그럼 애초부터 저 숫양을 제물로 준비해 놓고 이삭을 죽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왜? 그랬는데요.

너희들 시험하려고!

무슨 시험을요!

이삭이 누구 자식인지 알아보려고 그랬다.

 

너희들 앞으로도 너희 인생이 너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

항상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

알았제!

그거 가르쳐 줄라고 시험 친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렇다 치지만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자기들이 하나님 것이란 것을 우째 압니까?

그거야 그 때 그 때 내가 알려 주지!

믿음을 줘서 알게 해 줄끼다.

 

지금도 이삭처럼 약속으로 난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 것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순간 순간 그런 생각들을 갖게 하여서 우리 정체성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잘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압니다.

정답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답은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정답을 알고도 정답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상함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정답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와 같이 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죽도록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은혜에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고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맏아들 같은 자세로 살지 말고 탕자 같은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허랑방탕하게 살란 말이 아니고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살라는 뜻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자기가 자기를 지켜내는 법에 사람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에 사람으로 사사기 바랍니다.

긍휼이 없는 자에겐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약 2: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법으로 살면 하나님도 법으로 대하고 은혜로 살면 하나님도 은혜로 대하십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법으로 살고, 은혜에 속한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

지금 마음에 천국이 임한 성도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 은혜의 사람으로 살게 되고, 마음에 천국이 임하지 않은 사람은 법에 사람으로 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죽은 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사나 죽으나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는 망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셔서 죽은 자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망할 수가 없고 이미 구원이 확정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알고 탕자처럼 아버지께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깨닫고 늘 감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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