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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10강. 야곱의 지팡이와 믿음 (히 11:21)

by coroa 2022. 3. 1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강. 야곱의 지팡이와 믿음 (히 11:21)

-.정낙원 목사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성경이 어려운 것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사건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사건임에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하여졌음을 보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야곱을 축복한 것이나,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이나 흡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멀쩡할 때 축복하지 않고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축복하였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둘 다 눈이 어두웠는데 이삭은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를 몰라보았지만,

야곱은 장자와 차자를 분명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은 의도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삭은 장자에게 축복하려고 하였는데 중간에 리브가가 개입하여서 차자가 받도록 하였고,

야곱은 요셉이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었다고 알려 주어도 다 안다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요셉의 뜻을 거부하고 차자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이삭은 자기 뜻대로 못하였고,

야곱은 자기 뜻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삭이나 야곱 모두가 믿음으로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이삭은 믿음이 간섭해서 이삭의 뜻과 반하는 축복을 하였고,

야곱은 믿음이 요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을 관철 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한 사람은 믿음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믿음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어째서 믿음이 이삭과 야곱을 다르게 역사하셨을까요?

 

이는 이삭과 야곱의 사건은 서로 뭔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반드시 야곱을 축복해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야곱은 반드시 인간의 상식을 띄워 넘어서 축복하여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야곱은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자였으며,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뒤 바뀌어야 했습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엄마 태중에서 이미 복을 받아야 할 자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축복하기 싫어하였음에도 믿음이 간섭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이 복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이치로는 므낫세가 장자이므로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야곱은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축복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방식대로 일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믿음이 야곱을 간섭해서 차자를 축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장자와 차자를 뒤 바꿔서 축복한 것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팡이로 하나님의 축복이 장자와 차자가 바뀌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선 동일한 사건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고정화 시켜서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늠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 것은 인간의 우상성을 타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상성이란? 신의 일하심을 인간의 고정된 틀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복 받는 비결이나 은혜 받는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비결(秘訣)이란? 정해 놓은 법칙 안에 들어오면 반드시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은 인간의 손에 조정 당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주어야 하고, 저주 받아야 할 짓을 하면 저주를 해야만 합니다.

신이 완전히 인간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인간에게 장악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조정 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인간의 고정된 틀을 깨트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비껴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고정화된 틀 속에서 일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비슷한 사건 속에 다른 의미를 담아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일을 고정화 하여서 속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동일한 모습의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일은 하나님이 일하셨고, 어떤 일은 마귀가 한 일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병 고침을 예로 든다면 어떤 병은 하나님이 고쳐주셨지만, 어떤 병은 마귀가 고쳐준 것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병 고침을 가지고 모두가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도 기적을 일으키지만, 마귀도 기적을 일으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하고 적그리스도를 새끼양이라고 합니다.

아니 어린 양이나 새끼양이나 뭐가 다릅니까?

어리다는 말과 새끼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마귀가 하나님을 모방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도 능력을 행사하고 새끼 양도 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니 능력이 나타났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이 하셨다 라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마귀가 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일로 붙잡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엔 비슷해도 속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은 속게 됩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만이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과 마귀가 한 일이라는 것을 판단 할 수 있습니까?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건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두 가지 믿음이 나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보면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앞에 있는 “믿음으로” 뒤에 있는 “믿음에 이르게 한다” 는 말입니다.

 

편의상 앞에 “믿음으로 를 기관차” 라고 한다면, 뒤에 “믿음에 는 객차” 와 같습니다.

객차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반드시 앞에 기관차가 끌어 주어야 움직입니다.

기관차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객차를 우리라고 합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흔히들 믿음에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끌고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일을 하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게 하였고, 믿음이 어떤 사람은 저렇게 살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주어(主語)가 되어서 사람들로 이런 저런 일을 하게 하는 동사(動詞)로 발전케 한 것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전부 동사(動詞)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반드시 가만 있지 않고 뭔가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오면 어떤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런 행동을 야고보서에센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은 기관차와 같이 앞에서 이끌어 주는 주어(主語)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행함을 낳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기를 생명이라고 합시다.

그럼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은 선풍기가 돌아가든지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선풍기가 돌아가지 않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전기는 죽은 것이므로 전기가 아닙니다.

가짜 전기입니다.

전기란? 힘이 공급 될 때만 전기이지 힘이 공급되지 않는 것은 전기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믿음은 반드시 믿음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어떤 행함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을 믿음이 토해내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성경이 누구를 믿으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요.

 

그럼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흔적들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면 그는 신자이고, 십자가 이외 다른 것을 증거하면 불신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신앙 고백으로 가늠해야 하지, 그 외 다른 행동으로 가늠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술 담배를 끊었다든가,

착하게 산다든가,

봉사와 충성을 많이 했다든가,

인류평화를 위해서 공헌했다든가 라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으로만 판단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도 립싱크가 아니고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알게 주실 때만 가능해 집니다.

 

그러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게 해 주어야만 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신 신앙 고백을 한 성도는 반드시 그 신앙 고백이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구습을 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 로마서에서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 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 을 말하고, 뒤에서 말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 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반응하는 믿음”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백케 해주시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자 그 고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게 해 주신 고백이라고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보고 너희들이 나를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제자들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도록 해 주시면 믿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면 예수 믿는 게 전혀 어렵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천국 복음을 전해도 오직 제자들만 알아먹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들었는데도 제자들은 알아듣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었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겐 알아듣도록 해 주셨고,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믿을 사람 안 믿을 사람으로 구분해 놓았단 말입니다.

예수 믿도록 작정 된 사람은 하나님이 믿음을 줘서 믿는다고 고백하게 할 것이고, 믿지 않도록 작정 된 사람은 믿어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시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듣고 보아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기 때문에 듣고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므로 전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고백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여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24장로가 자기들이 받은 면류관을 전부 어린 양에게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왜?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돌려 드립니까?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이 다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다 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이고, 구원받은 자이고 믿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저 사람은 왜? 예수 안 믿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난 어째서 예수를 믿게 해 주셨습니까?” 라고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 부모는, 우리 자식은, 우리 형제는 예수 안 믿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 같은 놈에게 믿음을 주셨나이까? 라고 하여야 합니다.

 

관심을 내가 했다는 것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에 관심을 두십시오.

그래야 신앙생활이 감사가 되어집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예수를 믿게 해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살아도 감사요 죽어도 감사가 나와야지요.

 

아까 하나님이 하는 일과 마귀가 하는 일을 분별하여야 한다고 했지요.

해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증거 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믿음이 이끈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증거되어지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한 일이 아니고 마귀가 한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어떤 기적을 행하였다고 무조건 따르지 말란 말입니다.

마귀도 얼마든지 기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기적으로 사람들이 시선을 예수에게서 빼앗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고 땅에서 올라 왔다는 것은 소속이 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 신인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상징하는 용이 이들에게 권세를 줍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용은 마귀이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적그리스도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 선지자 즉 이 시대 목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 창궐하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목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 신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짜를 추수하려고 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일곱 머리 열 뿔을 달고 있는데 하나님과 싸우다가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완전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모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예수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적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갖가지 기적으로 땅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여 처음 짐승 곧 바다에서 올라온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기적으로 사람을 쫓게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 누구를 경배하게 하느냐 하면 적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게 한다고 합니다.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다 경배 하더라고 합니다.

땅에 거한다 함은 뱀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조금 전에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기적이 누구에게로 인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어떤 사람은 기적을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 인간을 추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기적으로 예수를 만나게 하지만,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기적으로 자기를 추종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기도원 원장이라든가 혹은 은사를 부르짖는 자들이 거의가 여기에 속한 자들입니다.

전부라고 하면 어패가 있으니 “거의 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알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거짓선지자들에게 능력을 주어서 유혹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유혹을 역사하는 이유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입니다.

이걸 구약에선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정점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 최후의 종점(終點)이고, 최고의 정점(頂點)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 언약이란 신약에서 예수님이시다 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언약을 붙잡는다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언약대로 일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하신다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구약에선 예수님을 계시하는 일들이 진리에 속한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의 다른 모습도 결국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동일한 맥입니다.

이삭이 속아서 차자를 장자인줄 알고 축복한 것이나, 야곱이 고집을 피우고 일부러 차자를 장자로 축복한 것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하여서 벌어진 계시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동일한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이 아들을 축복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일의 진행과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난번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셨으니 이번에도 저번과 같이 일하실 것이야 라는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마귀는 지난번에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셨으니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이 일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고정화 시켜서 믿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이렇게 응답 했으니 이번에도 저번처럼 하면 응답하실 것이야 라고 믿게 됩니다.

지난번에 철야기도 했더니 응답을 해 주셨어!

그러니 이번에도 철야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것이야! 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고정화 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버릇은 우상성 때문입니다.

신을 고정화(형상) 시키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나 그 무엇으로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매여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들이 만든 고정된 틀에 따라 일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예측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예측이 가능해지면 인간 쪽에서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 쪽에서 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점쟁이들이 점을 치면 재앙을 막으라고 비법을 알려 주지요.

자기들이 알려주는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막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재앙을 막을 것이라고 돈을 주고 부적을 삽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인간들의 우상성 때문입니다.

인간 쪽에서 신의 계획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목사들은 축복 받는 비결이라든가, 은혜 받는 비결이라든지 방법론을 가르칩니다.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복도 받고 은혜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설교를 하든지 모두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로 귀결됩니다.

이건 하고 저건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술 먹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하지요.

그러면 무식한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믿고 하라는 대로 합니다.

이번엔 40일 특별 새벽기도 합시다! 라고 하면 벌 떼같이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부르짖잖아요.

이번에 철야 합시다!

그러면 밤잠 자지 않고 우르르 몰려 나와서 액땜 하려고 하잖아요.

복을 불러 오든지 오는 재앙을 피하려고 하든지 하잖아요.

 

자식 수능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사업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좋은 신랑감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좋은 직장 달라고 기도하고,

병 고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사가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고 했으니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이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복을 주고 저렇게 하면 재앙을 피하게 해 준다고 했습니까?

인간 쪽에서 복을 따내거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흔히 구약 신명기 28장을 들어서 말을 하는데 그것은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지 복을 따내고 저주를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죄인은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모든 말씀은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에요.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려 주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거짓 목사들이 인간의 상식을 동원하여 공교하게 지어낸 말로서 교인들이 열심과 충성과 돈을 뜯어내려고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교인들도 무식하기는 매 일반이니 자기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는 겁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복 받을 짓과 저주 받을 짓을 통해서 복과 저주가 오고 가도록 해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시면 복이 거부하지 못하고 예! 하고 가게 되어 있고, 저주를 명하면 예! 하고 가게 되어 있어요.

 

마치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겐 복을 명하셨고, 에서에겐 저주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복은 야곱을 찾아 갔고, 저주는 에서를 찾아 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완성입니다.

 

신약에서 가룟유다와 베드로를 비유하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면서 빨리 날 팔으라고 하니 마귀가 쏙 들어가서 반드시 팔도록 하였어요.

가룟유다가 거부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보세요.

예수님이 베드로가 장담하자 네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라고 했어요.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저주하고 욕을 했어요.

 

하나님이 복을 야곱에게 명하면 야곱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언제 복 받을 짓을 했습니까?

안 했어요.

솔직히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복 받을 짓을 했어요.

야곱은 수십 년 동안 저 하나 살거 라고 집 떠나갔어요.

 

여러분 자식을 집 떠나보내 놓고 살아가는 부모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 봤습니까?

속으로 피 눈물이 납니다.

비가 오면 이 놈이 비를 맞지나 않나.

바람 불면 이 놈이 바람에 추워하지나 않나!

밥 먹을 때만 되면 이놈이 끼니나 제때 챙겨 먹나!

나오는게 한숨이고 밀려드는게 집 나간 자식에 대한 근심 걱정입니다.

 

이런 부모님을 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봉양하고 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착하디 착한 에서에게 저주를 명하니 저주가 군소리 못하고 가 버렸어요.

반대로 악랄하고 못된 놈인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명하니 복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갔습니다.

에서가 저주를 막아낼 방법이 없고, 야곱이 복을 거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은 오는 저주를 막고 가는 복을 붙잡겠다고 난리들입니다.

아니 인간이 막을 수 있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무엇하려고 믿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하면 되지!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목사가 복과 저주를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자기는 왜? 복을 못 받습니까?

당연히 복 받는 방법을 알면 자기 자식들이 복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만약 목사가 복을 따 낼 수가 있을 것 같으면 전 이렇게 안 삽니다.

아마도 세계 최고가 되어 있을 겁니다.

모든 목사들이 교회 부흥되는 걸 꿈꾸잖아요.

 

며칠 전에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무슨 일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황당한지!

자기 교회 목사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아마 뇌출혈로 쓰러진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은데다가 병으로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병상을 지키면서 기도를 한답니다.

기도를 하면 조금 살아났다가 기도를 안 하면 다시 죽어간답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목사님을 위해서 릴레이 기도를 한 대요.

각 구역끼리 시간을 정해 놓고 마치 육상 계주 하듯이 시간 시간 바통터치 하면서 기도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 중에 혹시 친척이나 가족들 중에 목사님들이 계시면 기도를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조카가 외삼촌이 목사라는 걸 알고 마치 능력 있는 목사라도 되는 줄 알고 전화 한 겁니다.

그 소릴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욕을 하면서 소리를 쳤어요.

야! 이 사람아!

왜? 때가 되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느냐고!

하나님이 데리고 가겠다는데 왜? 인간들이 설치느냐고!

사는게 하나님이 뜻이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왜 모르느냐고!

 

제가 큰 소리로 나무라니까 외삼촌 왜? 나한데 화를 내느냐! 라고 따집니다.

그래서 지금 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을 아느냐?

내가 무당인줄 아느냐?

그러면서 왜? 네가 나서서 그러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 대답이 그 목사가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 줬대요.

제겐 그 목사가 죽으면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못하니 살려야 된다는 말로 들렸어요.

 

그래서 제가 네가 아주 무당을 믿는구나!

너도 무당이고!

자기보고 무당이라고 했다고 다시는 전화 안 한대요.

저도 그래 다시는 전화 하지 말라고 하고 끊었어요.

이 아이(집사)가 교회 다닌 지가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이 모양입니다.

 

이게 어디 제 조카만 그럽니까?

이 시대 교인들의 자화상인데!

부끄러움도 몰라요.

얼굴이 화끈 거리지도 않아요?

속된 말로 무대뽀에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을 가르치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켜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괴상한 논리를 가지고 밤마다 새벽마다 산마다 기도원마다 악다구니를 쓰면서 땡깡을 부리잖아요.

 

어떤 사람이 죽을병이 걸려서 금식기도를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누가 병이 걸렸다고 한다면 자기가 경험한 일을 제시합니다.

나도 지난번에 그런 병에 걸렸는데 금식기도 해서 낳았다고 당신도 그렇게 해 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병을 고치는 것은 금식기도라는 하나의 법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대로라면 다음에 병이 걸리면 또 금식기도를 할 것입니다.

예전에 금식기도해서 병 고침을 받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려도 안돼요.

자기가 경험 했는데!

 

그러면 앞서서 병을 고침 받은 것처럼 고쳐져야 하나님이 함께한 증거라고 합니다.

만약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왜? 지난번에 금식기도를 하니 들어주고 이젠 안 들어 주느냐 라고 항의 할 것입니다.

이게 고정성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고를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속에 가두어지시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때로는 죽이시면서 일을 하시고 때로는 살리시면서 일을 하십니다.

 

때로는 이삭처럼 자기 뜻에 반하도록 축복하게 하시고, 때로는 야곱처럼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 생각과 다르게 축복을 하였고, 야곱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서서 인간의 생각과 다르게 자기 뜻대로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체가 되어 믿는 사람으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을 증거하고자 기록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믿음으로 산 인물들을 기록한 것은 그 사람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믿음에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무슨 배짱으로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법도에 어긋난 축복을 하였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지팡이를 의지하여서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장자에겐 왼손을 얹고 차자에겐 오른 손을 얹어서 축복을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오른 손은 장자에게 얹고 왼손은 차자에게 얹는 것인데 야곱은 상식을 넘어서 어긋 맞겨서 축복을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삭이 야곱을 축복 할 때는 이삭의 의도와 반대로 이루어졌음을 알았습니다.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고 싶었으나 리브가가 야곱에 축복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믿음이 이삭의 생각과 다르게 일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볼 야곱이 축복한 사건은 의도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장자와 차자가 뒤 바뀌었다고 알려 주고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다 알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현장으로 가 보십시다.

 

창 48:8-20=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12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우수를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 맞겨 얹었더라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위 말씀을 보면 야곱도 아비 이삭이 자신을 축복 할 때와 같이 눈이 어두웠습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눈이 어둡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 할 때는 리브가가 일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은 요셉이 곁에서 도와주었지만 야곱은 요셉의 도움을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립니다.

 

이는 야곱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노망이 들어서 한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한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경배하였다는 말은 지팡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팡이가 무슨 머리가 있습니까?

이는 지팡이가 주는 계시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팡이가 담고 있는 의미로 축복하였다는 말입니다.

 

상황을 다시 한 번 그려 봅시다.

이 때 야곱의 나이가 147세 때입니다.

야곱이 나이가 많아 늙고 병이 들어서 오늘 내일 하면서 죽을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께 문안차 왔습니다.

당시 요셉은 애굽에 총리이기 때문에 궁궐에서 살았고 야곱은 고센 땅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이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 온 것입니다.

 

창 48:1-5=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침상에 누워있던 야곱이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말해줍니다.

과거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기를 자기에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살지 않고 가나안 땅에서 살 것이라고 약속 했다고 합니다.

 

지금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한 것은 모두가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야곱은 요셉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를 분명하게 알려준 것입니다.

네가 비록 애굽에 총리이지만 네가 살 곳은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한 가나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도 애굽에서 살지 않고 가나안에서 살아야 할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오자 자신의 자식으로 삼아 버립니다.

이는 곧 이 아이들은 애굽에 아이가 아니라 가나안의 아이란 뜻입니다.

요셉의 아이가 아니고 자기 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은 야곱의 위치에 서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창세기 37장에 보면 그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창 37:1-9=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야곱의 약전이라고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약전이란? 다른 말로 이력(履歷)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의 이력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요셉은 야곱의 인생을 산 자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벧엘 광야에서 돌 베게하고 잠을 자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 후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만나 싸움을 하다가 허리가 분질러지는 사건을 당합니다.

성경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다고 하는데 환도뼈가 정확이 어디인지를 몰라요.

저는 야곱이 일평생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을 유추해서 허리라고 합니다.

허리냐 아니냐 라는 것은 중요치 않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씨름을 한 후에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改名)을 시키시고 지팡이 하나를 주십니다.

지팡이 이전은 야곱이었지만 지팡이 이후는 이스라엘입니다.

그 후로 야곱은 혼자 지탱하며 살지 못하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험악한 세월을 삽니다.

 

알다시피 야곱에겐 4명의 부인이 있고 거기서 낳은 12 명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모든 자식들 중에서도 특별이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냥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를 먹고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합환채란? 문자적으로 보면 임신 촉진을 시키는 채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영적으로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에겐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가 있지요.

이 둘은 자매이면서 남편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입니다.

야곱은 원래 라헬을 사랑했는데 그 동네 풍습 때문에 언니 레아는 덤으로 얻은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덤으로 얻은 언니 레아가 자식을 순풍 순풍 잘 낳고 라헬은 못 낳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자 왜? 내겐 자식을 안 주느냐 라고 야곱을 달달 볶습니다.

이에 야곱이 성질을 내면서 내가 하나님이냐!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째 자식을 준단 말이냐! 라고 면박을 줍니다.

자나 깨나 지식 낳기를 소원하던 라헬이 어느 날 레아의 소생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얻어서 자기 엄마 레아에게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헬은 그 합환채가 어떤 것인 줄 알았기에 언니에게 오늘 밤은 야곱이 자기하고 잠자는 날인데 언니가 합환채를 주면 양보 하겠다고 남편과 합환채를 바꿔 버립니다.

언니 레아는 합환채를 동생에게 주고 대신 야곱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토록 임신을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여도 허사였는데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 임신을 하게 됩니다.

라헬이 합환채 덕분으로 임신을 하여서 낳은 자식이 바로 요셉인 겁니다.

그러니 요셉은 야곱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가 낳은 자식인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합환채를 얻을 때가 바로 맥추 때라는 겁니다.

맥추 때란 나중에 모세 언약 속에 있는 7대 절기 중에 맥추절이 됩니다.

이 맥추절이 바로 신약에선 오순절 성령 강림 절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보면 요셉은 성령으로 낳은 자식인 셈입니다.

 

야곱은 이 요셉의 비밀을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우고 병신이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면서 알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는 짓이 형들이 과실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들의 과실을 지적한다는 것은 죄를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 하신다고 했지요.

그러니 요셉이 형들이 죄를 지적한다는 것은 요셉이 성령에 사람이라는 뜻이 되지요.

 

꿈꾸는 자란?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란 뜻입니다.

신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으로 난 성도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의 12 아들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오직 요셉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자기의 후계자라는 것을 일고 채색 옷을 지어서 입혀 줍니다.

 

채색 옷이란? 무지갯빛 옷인데 이는 곧 언약의 옷과도 같습니다.

이는 곧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이 12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을 꾸게 하신 겁니다.

 

레아의 소생들이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고 자신들의 주가 된다는 소리에 화가 나서 시기하여 급기야는 죽이기로 작당을 하고 결국 애굽으로 팔아버립니다.

그리곤 아버지에겐 죽었다고 고합니다.

야곱에겐 요셉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죽었던 자식이 자기들을 살려내는 온 세상의 주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죽였던 자가 살아나서 도리어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은 신약의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려내서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주가 되게 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위골이 되어 절름발이가 되고 난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제 2의 인생을 사는데 그게 바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야곱의 2기 인생을 누가 사느냐 하면 요셉이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병신이 되고 나서 자신의 꿈을 요셉이 이루어 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자기 역사 속으로 끌어넣은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제 2기 인생 즉 이스라엘로서의 인생을 산 자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아들들은 곧 야곱의 아들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말하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비의 몫입니다.

육적으로 본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지 야곱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이 축복을 하여야지 할아버지인 야곱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의 약전에 기록이 되어진 자이므로 영적으로는 요셉이 아니라 제 2의 야곱인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야곱은 영적으로 아버지로서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야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주도면밀하고 집요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가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자기 아비 이삭과 같이 나이 들고 눈이 어두웠지만 지팡이를 의지하고 영적으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여서 축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이러한 일들을 믿음이 하게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요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일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는 것은 지팡이가 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든 증표입니다.

육적으로 얍삽하게 살고자 하던 야곱이 하나님께 깨어지고 난 후 영에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도록 한 증거물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잡고 다니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장자와 차자가 뒤바뀌는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지팡이 속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처음부터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교활하고 계산이 빠른 간교한 사람입니다.

마치 의지에 한국인과 같은 불굴의 투지와 집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양을 칠 때도 살구나무와 버드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서 양들이 교미를 할 때 그 물을 마시게 한 것으로 보아 아주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산 것도 아주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에서보다 힘이 없었을 뿐이지 계시를 읽는 머리는 에서보다 몇 수 위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한 여인(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투자하였다는 것은 보통 집념이 아닙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야곱의 뜻대로 인생사가 풀려 나갔습니다.

야곱은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자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자기가 꿈꾸는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까요?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 알았습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서 야곱이 선택이 되었음에도 야곱은 역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신관은 바로 죄인이 가지고 있는 신관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신관은 마귀적이고 이방인의 신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런 마귀적인 신관을 바로 얍복강에서 깨트립니다.

 

창 32:22-30=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얍복 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았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시켜 줍니다.

이스라엘이란?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이란? 야곱이 알고 있던 가짜 하나님을 말합니다.

결국 야곱 안에 있는 가짜 하나님을 몰아내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자로 세움을 입은 겁니다.

 

이스라엘이란? 가짜 하나님(우상)과 싸우는 자란 말입니다.

성도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도 가짜 하나님과 싸우는 자란 뜻입니다.

바울은 탐심을 우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늘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탐심과 싸우는 자입니다.

탐심은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부추기기 때문에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자기편이 아니라 자기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당함의 상징이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름발이가 된 것입니다.

평생 지팡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하나님의 실제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 할 때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경배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암튼 야곱은 얍복강 사건 이후로부터 지팡이 없이는 못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자기 힘을 믿고 살던 인생에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얍복강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었는데 얍복강 이후에 알게 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야곱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이젠 살아가는 삶에 자세가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신약적인 의미로 성도에게 적용한다면 성령이 임하기 전 에 알았던 예수님과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알게 된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다른 예수 즉 자기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었지만,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예수를 위해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탐심(貪心)을 우상이라고 했어요.

탐심은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늘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탐심과 싸우는 자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참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게 된 것은 성도가 성령이 임하고 난 뒤 예수님 십자가만 바라보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 할 때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축복을 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는 능력으로 다가 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겐 구원을 주시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믿는 자에겐 저주를 하십니다.

 

세상의 지혜와 원리대로 라면 장자인 므낫세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차자를 들어 장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생각에 반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걸 인간들이 원리로 만들어서 그래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으니, 죽고자 하여서 살아야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반대로 살고자 하는 자를 살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에게 이용당함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정된 틀에서 일하시지 않고 틀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과 상관없이 복을 주신다고 했으니 그럼 난 이제부터 열심을 안 내고서 복을 받을거야! 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열심과 상관없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는 그것을 죄로 규정하고 도리어 열심 없는 것을 책망하고 죽도록 충성해서 복을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상식과 지혜와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여서는 안 됩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는 하나님의 축복에 상징이면서 징계의 상징입니다.

지팡이를 볼 때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이 지팡이의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사는 야곱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야곱을 보고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실패처럼 보이는 그 지팡이를 자랑처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팡이야 말로 가짜 하나님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알게 해준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세상에서 실패한 자 같으나 실상은 성공한 자입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말입니다.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4:7-1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자기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인간들 눈에는 무명한 자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선 유명한 자이고 육적으론 거지 같이 불쌍해 보이지만 실상은 만유를 품은 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실패한 모습으로 세상에 남겨 둔 것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몸에 담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핍박과 고난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거꾸러지지 않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우겸쌈을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당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잇다는 것을 증거키 위해서 일부러 죽음에 넘기 운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입니다.

넌 이미 천국백성이니 지옥생활을 좀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에 잠시 몰아넣는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 백성인 성도들은 그 어떤 죽음에 밀어 넣는다고 하여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은 죽음이 성도를 가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죽음을 이기게 하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증거는 이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이 죽음에 넘기운다고 합니다.

 

야곱은 성도를 표상합니다.

그럼 이 시대 성도들도 하나님께선 야곱처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야곱처럼 병신이 되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게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하는 것마다 잘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는 것마다 안 될 수가 잇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 하나님께서 세상 것에 소망을 둘까봐서 미리 치워버리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돈을 잘 벌고 부자로 사는데,

왜? 예수 믿는 나는 가난하게 사는가! 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 하나님께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내가 돈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돈을 안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김 집사님이 하시는 말이 직장에서 교회 다니는 동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꼭 교인들 숫자를 묻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몇 명이다! 라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왜? 그것밖에 안 모이느냐? 라고 비아냥거린다는 거에요.

 

그래서 김 집사님은 그것은 모두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답니다.

복음을 안 전하면 교회가 부흥을 할 텐데 복음을 전하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거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 말입니까?

물론 그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해요.

 

맞아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요.

복음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도리어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집니다.

누가 기분 나쁘게 하는 복음을 듣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복음을 듣기 싫어서 떠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아! 하나님께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교회를 의지하지 말라고 교회를 부흥시켜 주지 않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해도 성도들이 많이 모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복음 보다 자기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목사를 선호합니다.

복음을 좋아하지 않더란 것입니다.

복음 속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으니 자연히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복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세상에서 실패케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은 땅에 것이 아니라 하늘에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땅에 것을 담고 있으면 하늘에 것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에 것을 쏟아버리게 하시고 하늘에 것을 채워 주시는 사건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귀향은 성도가 천국 가는 것의 모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자기 능력으로 얻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교활하게 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귀향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온갖 술수를 써서 모은 재물은 창기가 번 돈과 같습니다.

 

신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세상과 간음하면서 모은 재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간음하여서 번 돈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앞세우고 나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재물로 나아오지 말고 지팡이로 나아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공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지 않고 실패케 하여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나님과 동등한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재물을 의지할 때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다 떨어지고 나자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인간이 의지하는 것은 돈일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일 수도 있고,

부모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 일수도 있고,

건강한 몸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는 의지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겐 의지할 것을 하나 둘씩 빼앗아가는 일들을 하십니다.

 

구약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가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고멜이라는 창기로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한 것이 호세아 선지자와 그 아내 고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이 달콤한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호 2:6-17=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 ~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빼앗아 버린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망한 상태를 아골 골짜기로 비유하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해골이 묻혀 잇는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는다고 하십니다.

망하게 해 놓고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으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얍복강에서 야곱의 허리를 부러지게 하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도록 하신 것과 같이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얍복강 이후에 하나님은 야곱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빼앗아버리십니다.

빈털터리가 되게 하시곤 처음 아비 집을 떠날 때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모습으로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벧엘로 돌아 갈 때 야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식들과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 그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하는 겁니다.

머리란? 지시하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 했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지시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지팡이를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을 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야곱은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면 그대는 얍복강을 경험한 성도입니다.

얍복강을 건너온 성도는 야곱처럼 지팡이(십자가)만 의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오직 십자가 이외는 증거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만 자랑하고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이 지팡이로 인하여 세상을 꺼꾸러 보게 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너머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십자가 너머의 가치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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