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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15강. 내가 “바라바” 이다 (요 18:39-40)

by coroa 2022. 2.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5강. 내가 “바라바” 이다 (요 18:39-40)

-.정낙원 목사

 

요 18:39-40=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오늘은 지난 시간에 “바라바”에 대하여 못 다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자 합니다.

알다시피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바라바는 죽은 목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죄수로부터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강도 바라바가 살아난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그 속에 복음에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에 비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코자 함입니다.

죄가 지금 자기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걸 죄 아래 가두어졌다고 합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는 스스로 죄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꺼내 주어야 합니다.

죄 바깥에 있는 분이 빼내 주어야지만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자는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라야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럼 인간 중에서는 죄에서 건져 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 건져 줄 수 있느냐?

죄 바깥에 계신 분이라야만 합니다.

 

죄 바깥에 계신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죄 바깥에 있는 나라인 하늘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은 죄인을 구원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 하려면 죄가 없는 분이라야만 합니다.

죄가 없는 분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린 구원을 얻는데 단 1% 라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공짜로 혜택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인간 쪽에서는 전혀 예상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어떤 방식인가 하면 구원하는 분이신 예수님이 곧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인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는 방식으로 합니다.

이를 대속이라고 해요.

 

대속이란? “대신 바쳐졌다” 또는 “바꿔치기 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대신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 속에는 죄 없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신 희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자는 구원을 해 주신 분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이 구조를 벗어나면 이단이에요.

즉 칭의를 벗어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칭의란?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겨주는 것을 말해요.

여겨 주심을 말합니다.

실제로는 죄인인데 예수님을 보시고 죄인 아닌 것으로 간주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 혹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면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의롭다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산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의 중심에는 이 “예수 안에서”가 있어요.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마다 “예수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그 안에 거하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겨 준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담겨져 있어요.

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 인하여!

~ ~ 인하여! 란 말은 “예수 때문에” 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인하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 예수 때문에 구원 받았다!

이걸 잊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바탕엔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바탕에는 하나님의 은혜성이 늘 흘러 나와야 합니다.

이 은혜성이 날아가면 신앙생활이 자기 똑똑함이나 자기 잘난 것을 드러내게 되어요.

이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는 악이에요.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라지면 감사가 사라져요.

신앙이 자기 잘남으로 치닫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성경적 지식을 쌓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아는 것은 많아서 머리는 큰데 마음은 싸늘해요.

 

이렇게 지식적으로 성경을 많이 아는 자들의 특징이 마음이 차가워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양식으로 먹지 못하고 지식으로 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에 말로는 엄청난 비밀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정작 본인은 곤고하고 마음이 허해요.

그러다 보니까 마치 공갈 젖꼭지를 빠는 아이들과 같이 성격이 사나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적 지식을 쌓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을 빙자한 자기 잘남을 챙기는 종교 놀음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건 억지가 아니고 자연스러워요.

예수를 먹은 사람은 예수를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사랑으로 덕으로 나타나요.

생명의 따뜻함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죽은 자는 차갑고 살아 있는 사람은 따뜻한 것과 같아요.

그 안에 예수가 살아 있는 성도는 따뜻해요.

그러나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교인들은 차가워요.

 

예수를 먹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양념이 배지 않은 김치처럼 맛대가리가 없어요.

입술로는 온갖 신앙적인 말들로 진수성찬인데 정작 예수의 마음으로 녹아진 삶이 없어요.

그러니 매사에 비판적이고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일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복음 아는 척!

자기 혼자만 신앙 있는 척 하면서 남을 깔보고 남에 신앙을 폄훼하고 사나운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남을 가르치려고만 해요.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 기준이 되어서 남을 판단하고 심판 하는 일을 서슴치 않아요.

자기만 복음을 독점하고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남은 다 틀렸다고 헐뜯고 자기만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편협하고 폐쇄적이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종교는 자기 잘남이 자랑되어지고!

신앙은 자기 부인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걷어내게 되면 예수는 나를 구원하는데 이용만 당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다” 라고 해요.

 

“내가 예수다” 라고 하게 되면 “예수 안에서”가 사라져 버려요.

이건 엄청 중요해요.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의 핵심은 은혜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은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바탕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이 깔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빠지면 종교가 되어요.

이 은혜가 바로 “예수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어요.”

 

그래서 성도를 양자라고 하는 겁니다.

양자란? 원래 아들이 아닌데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서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양자에게 있어 항상 기억하여야 할 것은 칭의에요.

 

아들의 모든 권리를 행사는 하지만 양자 된 자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아들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난 아들이 아닌데!”

“아버지가 은혜로 나를 하나님 아들 삼아 주셨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은혜로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아들이다” 라고 하면 아버지의 은혜성이 날아가 버려요.

양자는 아들이 맞는 것 사실인데!

아버지 은혜 안에서 아들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먼저가 아니고 아버지의 은혜가 먼저에요.

아버지의 은혜가 사라지면 아들도 사라져요.

우리의 구원이 이러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날아가면 이단이 되어요.

 

그럼 신천지의 이만희처럼 “내가 보혜사다!” 라고 하게 되어요.

“내가 말씀이다!”

“내가 예수다!”

“내가 진리다!”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자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고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을 날아가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칭의를 무력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게 초대교회 때에는 헬레니즘의 그노시스파에서 유출설(流出說, theory of emantion)이라고 하는 하나의 철학 사상으로 나타났어요.

 

이것은 헬라 철학 사상 중에 회자 되는 하나의 사상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초대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복음을 가리는 영지주의 사상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변질 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던 하나의 철학 사조가 급기야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듯이 복음을 변질케 하는 사상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출설(流出說, theory of emantion)이란?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고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만물이 신으로부터 유출한다는 헬라 철학의 한 사상이에요.

이게 초대교회 안에서는 영지주의로 나타나서 “내가 신이다” 라는 것으로 발전하였어요.

왜냐하면! 내가 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내가 곧 신이다” 라고 한 겁니다.

 

이게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발전하는지 아세요.

내가 예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내가 예수다” 라는 것으로 진화하고 발전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예수를 넘어서서 “내가 예수로 살아라” 라는 것으로 발전을 했어요.

우째 그럴 듯하지요.

 

얼마 전에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 보았는데!

한국에서 예수만 30명이고 하나님이 20명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자들이 늘 교회사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마귀가 복음을 가리기 위하여 철학이라는 것으로 교묘하게 위장하여 시대를 거쳐 오면서 늘 진화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신앙으로 둔갑이 되면 이단 사상을 낳아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속이는 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경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상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어요.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골 2:4-8=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공교하게 지은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지요.

공교하게 지은 말이 뭔고 하니 철학적 바탕으로 만든 복음을 말합니다.

이건 헛된 속임수에요.

 

철학이란? 인간에 대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인간을 연구한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도 이성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빛이 없는 사람은 속아요.

왜냐하면! 들으면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 옳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유출설도 이러한 이성을 바탕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내가 보혜사다!

내가 예수다!

내가 말씀이다!

내가 진리다! 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가 빠졌어요.

“예수 안에서”가 빠졌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날아갔어요.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이에요.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 안”이 빠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면 이단이에요.

그 어떤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벗어나는 것은 이단이에요.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지!

내가 득도해서 그리스도를 넘어 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창세전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을 봅시다.

 

엡 1: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눈여겨보세요.

“그리스도 안” 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구속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서게)되게 하셨다고 하지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이 바로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거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이 빠지면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요.

 

우리의 만남도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어요.

그러니 우리의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가 빠지면 만남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연합케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교제할 수가 없어져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화목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과 하나님이 화목이 되었어요.

이 “그리스도 안에서”를 다른 말로 “은혜”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풍성한 은혜로”

“그의 사랑 안에서”

 

이걸 놓치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신앙이 아니고 종교가 되어요.

그럼 불교처럼 내가 신이 되는 것으로 치닫게 되어요.

 

이러면 내가 보혜사다!

내가 말씀이다!

내가 예수다!

내가 진리다! 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에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에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제발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이란? 내가 엄청난 비밀을 알고 고상한 신선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도사는 불교에서나 있어요.

 

기독교에는 도사가 없어요.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늘 주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으로 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예수에게 연합이 된 자로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나로 살지 않고 예수의 것으로 산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대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고 예수님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되는 운명 속으로 끌어당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살려고 구원을 했단 말입니다.

그리니 우리의 신앙생활을 단순하게 생각하여서는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걸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구원용으로 챙기게 되어요.

즉 내가 구원을 받고 싶은데 내가 죄인이라서 내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러면 예수는 나를 구원하는 수단이 되고 말아요.

예수가 구원의 수단이 되면 구원 이후에는 내 맘대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즉 자기 인생을 챙기게 됩니다.

이게 영지주의에요.

이런 구원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많은 자들 중에서 이런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입술로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삶이 쾌락주의로 나타나고 자기 육신 끌어안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마치 내가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복음을 빌미로 자기 육신 끌어안기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속에서 누룩처럼 퍼져 있어요.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육신 끌어안는 기복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기복신앙은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자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기복신앙은 복음을 빌미로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형식으로 나타나요.

둘 다 신앙을 자기 육신의 사욕을 좇아가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록은 동색이에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죄 지어도 된다는 것은 달라요.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달라요.

이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약함 속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그러면서 죄 지어도 된다고 하는 것에는 죄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어요.

 

성도가 죄를 인 짓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아픔과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단 말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죄와 싸운다고 합니다.

육신의 소욕과 싸운다고 해요.

이런 싸움이 없으면 그건 신자라고 볼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죄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가치해져요.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려면 자신의 불가능성을 처절하게 깨닫고 아파 할 때입니다.

그럴 때 은혜의 소중함과 감사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어요.

은혜의 소중함을 희석시키는 일을 해요.

초대교회 안에도 이런 인간들이 있었어요.

 

바울이 우리가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니까 그럼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지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항상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자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창궐하였던 육체는 악하므로 막 살아도 된다는 영지주의 사상들이 지금도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항상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거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몸에 사욕을 좇는 기복사상이 뭐냐?

구원은 예수 믿음으로 받고 행함으로 축복을 받자는 사상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복 받는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이 내 맘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함을 합리화 시켜주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왜? 복을 추구 합니까?

왜? 쾌락을 추구 합니까?

이는 모두가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입니다.

 

결국 몸뚱이 끌어안기에요.

복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나 복음을 빙자하여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이나 그 본질은 육신에 있기 때문에 똑 같아요.

그러니 초록은 동색이지요.

 

복 받기 위해서 충성하고!

복 받기 위해서 헌금하고!

복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내 맘대로 살기 위해서 복음을 이용하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요?

그 바탕은 모두가 자기 육신 끌어안는 것이기 때문에 둘 다 똑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우상숭배에요.

유대교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한 마디로 자기들 소원을 안 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소원은 육신 편한 거에요.

 

그리니 우리도 만약에 유대인들처럼 우리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이런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죽임 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이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에게 속한 선지자들이 죽임 당하는 사건으로 보여주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죽임 당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연장 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에요.

 

이러한 것을 예수님께서 세를 준 포도원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왕)이 포도원을 세를 주고 떠났어요.

그리곤 때가 되어서 세를 받고자 자기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경작하는 놈들이 종들을 죽입니다.

이 놈들이 그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주인의 은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예수 안에서” 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는 일들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급기야 주인이 맨 마지막에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설마 이놈들이 내 아들은 죽이지 않겠지! 생각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 놈들이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주인이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서 포도원을 경작하는 놈들을 다 쓸어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비유를 한다는 것은 지금 유대인이 바로 그 놈들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까지 죽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 속에서 늘 있어 왔던 사건인 것입니다.

구약에도 늘 있어 왔던 것이었는데 그 정점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가요?

이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순리를 역리로 어그러지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지면 이젠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지 않아요.

주인의 것으로 경작을 한단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문단 말입니다.

예수 안에 머문단 말입니다.

 

그 포도원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인데 죄가 내 인생은 나의 것으로 살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어요.

 

이에 하나님이 종들을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알려 주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종들은 우리에게 와서 야 임마! 너희 인생은 너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린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는 종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속으로 오셔서 이러한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계속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과 필연적으로 싸우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죽이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이게 복음에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는가요?

이는 구원 속에 하나님의 은혜성을 담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받은 자기백성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뭔가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창조의 목적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러니 우리의 존재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거에요.

 

이걸 의에 상태라고 합니다.

창조의 목적에 맞는 옳은 상태란 말입니다.

의에 상태란? 창조 목적대로 존재하는 것을 말해요.

 

죄가 뭐냐?

창조 목적에 위배되어 사는 것입니다.

죄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자들을 자기를 위하여 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종으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가 예수의 종으로 살아야 할 자들을 자기가 주인으로 살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도리어 예수를 자기 삶에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목적을 변질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하여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내 유익을 위하여 도용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아니거든요.

 

유대인들이나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들을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제 위치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자를 죽이고 의 안에서 사는 자로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자를 예수 안에서 나 자로 새로운 창조를 하시고 있단 말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맞게 원상 복구를 시켜 놓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도록 간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도들 속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들 속에서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고분 고분 간섭 당하느냐?

아니에요.

반발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간섭 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는 죄가 폭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모습으로 하신다는 것을 바라바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긍휼을 베풀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도 깊어서 우리가 측량 할 수가 없다” 고 탄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이 세상 관원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 할 수가 없는 방법으로 하세요.

경악스러울 정도로 역설적이에요.

 

이게 오늘 본문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라바” 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이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에요.

그런데 예수 때문에 살아납니다.

‘바라바’는 예수가 죽고 살아난 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붙잡히지 않았으면 바라바는 살아 날 수가 없었어요.

예수가 붙잡혔기 때문에 흥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엔 예수 대신에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는 예수 때문에 살아난 죄인인 겁니다.

이렇게 예수 때문에 살아난 ‘바라바’ 속에는 창세전 언약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 하면 자기 백성에게 죽임 당하고 용서하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즉 원수를 죽이지 않고 도리어 살려주신단 말입니다.

은혜로 폭 감싸세요.

이상하지요.

 

우리 같으면 원수를 죽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자기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살려주신단 말입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 한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자기 백성들과 원수 관계로 만들어 놓고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방식으로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의 구원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담아 놓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일컬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이에요.

진노의 자식이란? 원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냈다는 말은 예수를 내어주고 살려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은 “대속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대신 값을 치러 주셨다는 말이에요.

이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에요.

원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고 우리가 살아났어요.

 

누가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에게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가 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단 말입니다.

 

왜? 이런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지게 하셨나요?

이는 단 하나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세세토록 자랑하라고 그런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양을 하지요.

왜? 세세토록 찬양을 합니까?

이는 세세토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에요.

구원은 빚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범사에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용서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구원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란? 허물을 용서로서 폭 감싸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로 우리의 허물을 폭 감싸고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근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사건을 추억하면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빌립을 그에게 보내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물음은 예수가 왜? 죽었느냐? 에요.

이에 성령이 너를 위해 죽었다고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 자리에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가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 겁니다.

 

세례란?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의미에요.

즉 내가 사는 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그럼 이제부터 나는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사는 자라는 것을 알고 나는 죽어야 하는 자라는 뜻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내용이 뭔가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그”가 나오고 “우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때문에 혜택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하게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그가 담당했다는 말은 우리가 그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였어요.

쉬운 말로 우리가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을 섰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하고 있잖아요.

반면에 바라바라는 살려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동참을 한 자들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누구인가요?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 백성이에요.

그런 그들이 살인자인 바라바를 살리고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와 바라바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존재에요.

서로 극과 극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고, 바라바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어요.

예수는 죄가 없고, 바라바는 죄인이에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지금 인간의 상식에도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어요.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은 죽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 속에 있는 죄의 속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요.

이는 같은 종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죄인끼리 모이고, 의인은 의인끼리 모이는 것을 말해요.

빛은 빛을 좋아하고, 어둠은 어둠을 좋아해요.

 

그럼 묻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죽이라고 하고 바라바는 살리라고 합니까?

물론 바라바가 유대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하고자 민중봉기를 일으킨 민족주의자에요.

유대인 입장에선 독립 운동하는 사람이니 살려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고 그 속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로 볼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사건 속에는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영적 의미로 접근하여서 탐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엄청난 영적 비밀을 발견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그 비밀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단순한 살인자를 풀어주는 사건이 아니고 죄인인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의인이고 바라바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속한 산 자이고, 바라바는 죽음에 속한 죽은 자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의인인 예수는 죽이고, 반대로 죄인인 바라바는 살리고 있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이고, 죽음에 속한 바라바는 살리고 있어요.

 

이러한 모습을 유유상종이라는 말로 빌린다면 바라바를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은 곧 그들도 죄인이고 살인자이고 죽음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결국 바라바는 유대인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곧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니 유대인이나 우리 자신들도 곧 바라바 라는 말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서로 배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사람들은 예수는 함께 할 수가 없는 거북스러운 존재이고, 바라바는 함께 할 수 있는 편안한 존재란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편하지 의인을 거북스러워요.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해요.

왜? 하나님을 싫어할까요?

이는 세상이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인간의 실상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식으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어요.

 

애초부터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 손에서 죽임 당하고자 오셨어요.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실체를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려 달라고 하는 그 바탕엔 죄가 깔려 있어요.

마귀가 이들을 장악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마귀의 머리를 박살 내지 않고서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 뱀의 실체를 고발하고 그에 머리를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런 놈에게 붙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사건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이 인간들의 비상식적인 사건으로 얼룩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데도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그리하여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없게 하십니다.

입을 닫게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입을 막아 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측은지심으로 접근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죽음을 동정하면 안 되어요.

도리어 우리도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과 우리가 동질감을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할 때가 많아요.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성경 자체가 우리를 고발하는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과는 역설적으로 다가온다고 했어요.

말씀 앞에서 우리 실상이 발가벗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 실존을 고발하고 있어요.

어떻게 고발하는가 하면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고발합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랑인가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죽는 사랑이고, 이웃을 위하여 내 몸을 불사르는 사랑이에요.

이런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이건 죄인들이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죄인들은 자기만 사랑하지 남을 사랑 할 수가 없는 존재에요.

죄인들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을 해부해 보면 그 바탕에는 자기 사랑이 깔려 있어요.

자기 유익을 위해 사랑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그 속에 자기 사랑을 담아 놓았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바라던 것이 깨어져 보세요.

대번에 미움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얻어낼 것이 사라져 보세요.

그럼 우린 예수를 떠나요.

그러니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다 아세요.

그래서 우리의 속임에 속지 않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뿔따구가 나서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나를 살게 하고자 남을 죽이는 자들이에요.

이는 죄가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너희들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그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어요.

우리 몸이 그렇다니까요?

 

마음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우리 몸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움직인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러나 사랑이 안 되어요.

왠 줄 아세요?

예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을 좋아하지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가는 분은 싫어해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죽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유대인의 소원을 들어 주었으면 죽이지 않았어요.

도리어 살리고자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저러 놈은 필요가 없으니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믿었던 것이 부정당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적개심으로 돌변해요.

인간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뒷면에는 미움이 있어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를 미워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내 소원을 들어주면 따르지만 안 들어주면 죽여요.

이게 죄인이에요.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미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그 유대군중들 속에 내가 있단 말입니다.

나도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란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죄인 만들어서 용서하고자 하심이에요.

이게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창세전 언약이거든요.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고 우리가 예수를 죽여야 용서가 주어지고 구원이 주어져요.

즉 우리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 용서가 주어진단 말입니다.

이 말을 잘 음미하세요.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가 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내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면 내가 예수를 죽여야 구원이 주어진다는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오해해서 열심히 죄를 지으면 용서가 더 많이 부어지니 죄를 짓자고 합니다.

이건 그런 말이 아니에요.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니고 우린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일하지 않고 그들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함으로서 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게 하고선 봐라!

너희들이 이런 죄인이잖아!

내 원수들이잖아!

 

그럼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는 자는 어찌할꼬!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잖아요.

이에 백성들 속에서 어찌할꼬!

탄식이 나오지요.

 

성령이 증거케 하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래 맞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이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알려 주신 거에요.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어서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12장을 봅시다.

 

슥 12:10-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하지요.

그럼 그들이 찌른 예수를 보고서 큰 애통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독자를 잃은 아픔처럼 회개 한다고 했어요.

이게 각 사람에게 임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용서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을 입고 천하만국으로부터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너희가 바로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설교 하자 여기저기서 어찌할꼬! 라는 통곡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 내가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라는 반응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이는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가 되는 장면입니다.

 

이게 구원 받은 자들이 모습이에요.

지금도 성령이 임하면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이 깨달아져요.

그래서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그 은혜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순을 밟기 위해서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동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크게 소동을 하였으면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겁을 먹고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채찍질하면서 죽이라고 내어주고 당연히 죽여야 할 바라바를 내어 주었겠어요.

 

왜?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 되었는지 좀 이해가 되시는가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분위기로 몰아가는지 알겠습니까?

이 모두가 자기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기 위한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바라바를 왜?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이는 사람들의 목숨을 해치는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흉악범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것도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 바라바를 덜컹 집어넣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말도 안 되는 살인자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구원을 입게 되었어요.

만약에 공정한 재판이 일어났을 것 같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어요.

 

이는 빌라도의 고백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세 번 씩이나 예수를 살리고자 했어요.

 

빌라도는 예수를 살리고자 바라바를 가지고 거래를 시도한 겁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 때문에 실패 했어요.

결국 예수 때문에 당연히 죽여야 할 살인자인 바라바만 살려 주는 꼴이 되고 말았어요.

 

이렇게 되면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것이 되고, 예수님은 살인자인 바라바 때문에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건 역설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살리고자 죄수 중에서도 아주 악한 죄수인 살인자를 내어 놓았어요.

요즘 말로 예수와 바라바를 가지고 딜을 시도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봐도 이건 당연히 죽여야 할 놈이라는 것을 다 아는 자를 내 세운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바라바와 예수 둘 중에 누구를 풀어 줄 것인가 제안 했어요.

빌라도 생각에는 당연히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죽이고 예수를 풀어 달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건 빌라도가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그래서 빌라도가 어쩜이뇨! 라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건 아니지 않느냐! 라고 놀라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생각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를 미워한다고 하여도 살인자인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할 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서 빌라도는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마땅히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를 시켜야 할 정도로 악한 살인자를 내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유대인들이 선택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였어요.

그것도 아주 흉악한 강도를 말이에요.

 

이건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제 정신이라고 한다면 이런 결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죽이라고 한 자들은 지금 판단 능력을 상실한 영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것과 같아요.

 

뭔가 집단 최면에 빠진 자들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일으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유월절 때를 맞추어서 강권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에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가 정하세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때와 기한도 아버지께서 창세전 언약에 맞추어서 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도 창세전에 정한 때에 맞추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니 군중들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움직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어요.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이 된 일이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기도 할 때에 아버지여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감사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바라바도 이러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투입이 된 도구에요.

하나님은 바라바를 통해서 하실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뭔가 이야기 할 것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바를 가지고 우리에게 하실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 예수가 죽고 바라바가 살아난 사건을 가지고,

우리에게 야 이놈들아!

복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속에는 저와 여러분들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하면 안 되어요.

내가 바로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에요.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동조해 주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우리)의 생각에 동조 해 주었으면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어요.

동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편은 해치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와 반대하는 자를 죽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은 예수님은 유대인의 반대편에 서 계셨단 말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적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원수가 용서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이방인은 예수를 안 죽여요.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는 용서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 주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안 죽였으니까요.

 

구원은 원수에게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럼 원수가 누구냐?

예수를 죽인 놈들이에요.

 

예수를 누가 죽였느냐?

자기 백성들이 죽였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게 엄청난 비밀이에요.

 

알다시피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어요.

그것도 자기편을 안 들어 준다는 명목으로 말이에요.

 

이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누가 하나님의 원수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이면서 하나님의 원수 짓을 하고 있잖아요.

아이러니 하지요.

 

이게 성경의 비밀이에요.

누가 구원을 받느냐?

하나님의 원수들이 받아요.

 

이처럼 구원이란? 죄인이 용서받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죄인인가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함은 하나님과 원수진 자들이란 말입니다.

 

원수란? 은혜를 욕으로 갚은 자들을 말합니다.

원망할 일을 행한 자를 말해요.

여러분은 원한을 언제 갖게 되나요?

배신당할 때이지요.

 

나는 잘해 주었는데 상대가 그 잘해 준 것을 악으로 갚을 때 원수가 지잖아요.

내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은 원수질 이유가 없어요.

이처럼 원수란? 선을 악으로 갚을 때 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원수는 자기 백성들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누구랑 싸웁니까?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을 일컬어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하잖아요.

배은망덕이 뭔가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란 뜻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사 1:1-4=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가 어디에 관한 이상을 봅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이지요.

유다와 예루살렘이란? 신약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말하고 성도를 말해요.

 

뭐라고 합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우리라! 고 합니다.

이건 억장이 무너진다는 소리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억장이 무너져서 하늘과 땅에게 말하는 겁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자식을 키웠는데 이 놈에 새끼들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자식이 원수에요.

원수가 아니고 웬 수~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슬프다고 합니다.

아 슬프다!

차라리 짐승을 키웠으면 이러진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지금 예수를 죽이라고 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지금 우리가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하면서 지적하는 그 짓들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욕으로 갚고 있단 말입니다.

 

야! 정낙원이!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내가 짐승에게 너처럼 은혜를 주었으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놈아!

너는 그렇게 내 은혜를 받고도 그 모양 그 꼴이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배은망덕한 놈아!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예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소원 들어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들어 달라고 하는 소원이 뭔가요?

땅에서 잘 사는 것이에요.

 

우리는 눈만 뜨면 예수를 이용하여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꿈을 꿔요.

내 몸뚱이 끌어안고자 해요.

유대인들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면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 세상의 번영이나 행복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철거가 되어야 할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 영광을 주시지 않아요.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멸망 받을 마귀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세상 나라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마음을 미혹하는 겁니다.

여기에 미혹당하여서 인간들은 세상 나라를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여기에 미혹 당하였어요.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자기 백성들의 허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다정하게 말합니다.

떡을 주고!

세상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러한 것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라바 사건을 통하여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사고를 우리도 가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보다 바라바를 달라고 소리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원한다는 것은 곧 내가 바라바란 말입니다.

바라바는 곧 나이고!

나는 곧 예수를 이용하여 내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마귀입니다.

그럼 바라바를 달라고 하는 내가 곧 마귀와 유유상종하는 마귀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어떤 형상이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여 보세요.

하나님의 형상인가?

가이사의 형상인가?

사람의 삶은 그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표현해 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세상 것이 있으면 세상 것이 그려지게 되고!

하늘에 것이 있으면 하늘에 것이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우린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하늘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아요.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이런 장단에 춤을 춰주지 않아요.

도리어 우리의 소원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내가 마귀라는 것이 폭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어쭙잖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우린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목숨 바쳐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우린 늘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복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이고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을 욕하지 말고 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 대신에 살아난 바라바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리하여 예수님에게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가 없는 채무를 빚진 자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서 내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예수의 죽음으로 대신 살아난 바라바라는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로서 늘 상한 심령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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