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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43강. 무교절과 예수그리스도의 무덤 (레 23:4-8)

by coroa 2021. 12. 1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레 23:4-8절.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5. 정월 십 사 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6. 이 달 십 오 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8. 너희는 칠 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 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43강. 무교절과 예수그리스도의 무덤 (레 23:4-8)

-.정낙원 목사

 

 

 

7대 절기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을 절기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절기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 하실 구속사적인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절기는 세 텀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세 가지 텀 즉 세 가지 시제로 이루어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과거시제와 현재 시제와 미래 시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도 는 현재이고,

전에도 는 과거이고,

장차는 미래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에서 세 텀의 창조 사역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것으로 나타나고,

일곱째 날은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예수님의 구속사로 보면,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육체로 오셔서 하신 과거적 일이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는 현재적 일이고,

일곱째 날은 장차 재림하여서 천년왕국에서 안식하게 되는 미래적 일입니다.

 

과거적 구원은 초림 때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적 구원은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셔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미래적 구원은 장차 재림하신 후에는 천년왕국에서 만왕의 왕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7대 절기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실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7대 절기 역시 세 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 7일의 세 텀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7대 절기를 1년에 담아 놓았습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과거적 사역을 말하고,

여름 절기는,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현재적 사역을 말하고,

가을 절기는, 장차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에서 왕으로 다스리는 미래적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봄 절기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칠칠절(오순절)과 넉 달 농사 기간이 있고,

가을 절기로는,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장막절)이 있습니다.

 

7대 절기는 정월로 시작하여 7월에 마감이 됩니다.

이는 창조 7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창조 7일이 각각의 날로 구분이 되었듯이 절기 또한 각각의 마디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절기는 마디마디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1년 주기로 순환을 합니다.

역사가 1년 주기로 순환을 한다는 것은 1년은 역사 전부를 축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은 4 계절로 구분이 되어서 순환을 합니다.

 

계절(季節)이란? 마디마디로 잘라져 있다는 뜻입니다.

각각의 마디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서 순환을 하는 것입니다.

절기가 마디마디로 잘라져 있다는 것은 마디마다 각각의 의미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7대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7대 절기가 봄, 여름, 가을로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봄 여름 가을처럼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봄 절기도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로 마디마디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도 각각의 절기가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육체로 하시는 일도 마디마디처럼 구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무교절도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 중에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계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살펴볼 무교절은 유월절과 맞물려서 지내는 절기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절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과 또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무교절은 봄 절기 중에서 두 번째 절기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나는 저녁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과 초실절은 하루만 지키지만 무교절은 일주일간 지켰기 때문에 봄 절기를 통틀어서 무교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 14:12절. “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

 

무교절은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부터 시작이 됩니다.

목요일인 14일 저녁부터 일주일간 지켰습니다.

그래서 성경은‘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세 시간이 겹쳐서 지켜집니다.

그것은 무교절은 유월절 양이 죽는 시간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죽음과 동시에 유월절은 끝나고 즉시로 무교절로 돌입이 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구시인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감으로 유월절은 끝이 나고 무교절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무교병이라는 말은 누룩 없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무교절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집안에서서는 대대적으로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무교절에는 집안에서 누룩을 없애는 일입니다.

둘째, 사흘간 누룩 없는 떡을 보자기에 싸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는 것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보자기에 싸서 땅에 사흘간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는 것은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무교절에 풍습으로 지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 속에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짐승을 기르는 목축업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입니다.

목축을 하자면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기 때문에 빵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빵은 밀가루로 만듭니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효시키는 누룩은 없어서는 안 될 재료입니다.

누룩으로 밀가루를 부풀려서 부드럽게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누룩을 넣어서 만든 빵을 유교병이라고 합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고,

유교병은 누룩을 넣어서 만든 빵을 말합니다.

 

평상시에는 누룩을 넣어서 만든 유교병을 먹었습니다.

무교절 이외에는 거의 무교병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교절을 지키는 날 만큼은 집안에 누룩을 두어서도 안 되거니와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교절이 되면 누룩을 집 밖으로 내어가 바깥에 보관하였습니다.

대신 누룩 없이 만든 떡을 보자기에 싸서 땅 속에 사흘간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었습니다.

무교병으로 은물 교육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왜 무교병을 먹게 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출 12:29-34절.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 백성이 발교 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은 유월절 해질 때인 오후 3시에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의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장자가 죽는 재앙의 밤은 무교절이 시작되는 밤입니다.

이제 날이 새면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무교절의 밤은 온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나가는 죽음의 밤인 것입니다.

죽음의 밤이 시작 되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 전역에 죽음의 천사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집을 찾아가서 장자를 죽이는 일을 단행하였습니다.

 

바로의 장자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온 애굽의 집안마다 애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도하고서는 혼비백산하여 모세를 급히 부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런 재앙은 모두가 이스라엘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시라도 빨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날 것을 종용합니다.

9가지 재앙 속에서도 완강하게 버티던 바로가 온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 앞에서 백기 투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 재앙을 몰고 다니는 재수 없는 족속들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애굽이 이스라엘을 토하여 낸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장자가 죽어나가는 그 밤이 되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집 안에서 양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쓴 나물과 함께 먹으면서 날이 새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명하였습니다.

날이 새자 백성들은 귀중품과 은 금 패물들을 챙겨서 발교 되지 못한 떡 반죽 그릇을 보자기에 싸 어깨에 메고 급하게 애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출 12장 33-34절.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 백성이 발교 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상시에는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발효를 시켜서 떡을 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무교절 날 밤 애굽에서 탈출 할 때는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부풀릴 시간이 없어서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 나와서 그 반죽으로 떡을 해 먹었습니다.

 

출 12:39절.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나서 애굽을 도망치듯 나오는 이스라엘에게 누룩 없는 떡은 먹습니다.

이고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라는 기로에서 먹는 고난의 떡이면서도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절에 먹는 누룩 없는 떡을 일컬어 ‘고난의 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 16:3절. “… 칠일 동안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아울러 먹으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무교병을 먹으면서 우리는 애굽의 장자가 죽을 때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대신 죽여서 우리를 살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백성들에게 어린 양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먹게 한 것은 너희들은 어린 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무교절의 어원적 의미

 

무교절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 무교절 속에 담긴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무교절은 원어로는 “하크 함 마짜트(Hahk Ham Mazaht)”라고 하는데,

이는 세 가지 뜻을 가진 합성어입니다.

 

“하크(Hahk)”는 “축제일, 기념일” 이라는 뜻이고,

“함(Ham)”은 “그” 라는 뜻이고,

“마짜트(Mazaht)”는 “장례 지내다, 묻어두다” 라는 뜻입니다.

 

풀이하면 두 가지 뜻으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 묻어 둔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둘째로는, “그 장사 지낸 것의 축제일” 이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뜻으로 축약하면 “그를 장사 지낸 날을 기념하는 날”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라고 하는 정관사입니다.

본문에서 그는 “누룩 없는 떡” 을 말합니다.

그 떡을 의인화 하면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고 둘째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일차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께서 무교절을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넌 죽은 자야!

넌 이미 무덤에 묻힌 자야!”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을 ‘그를 장사 지낸 축제일’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해석하면 사흘간 땅 속에 묻었다가 꺼내서 먹은 무교병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간 무덤에 갇혀 있다가 부활을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흘간 땅 속에 묻혔다가 깨내서 먹는 누룩 없는 떡은 죄가 없는 예수그리스도가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을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 13: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은 무교절을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라고 합니다.

출애굽은 홍해를 건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케 하고자 하심입니다.

 

구원이란?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즉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일컬어 죽음의 바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음에 집어넣었다가 빼내신 것입니다.

이를 세례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홍해를 건너 온 것을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0: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는 장사 지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죽음을 건너 온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집단적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함으로서 어린 양의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다가 새기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모세에게 속하여서 건넜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연합하여서 홍해 바다를 건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애굽에서 군대를 인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출 12:17-18절.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거룩한 군대입니다.

거룩한 군대는 비거룩과 싸워야 하는 군대라는 뜻입니다.

즉 죄와 싸워야 하는 군대인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 없는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 없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무교병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여호와의 군대가 먹어야 할 양식인 것입니다.

 

누룩이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 없는 떡을 의인화 하면 죄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직역하여서 말하면 누룩 없는 떡을 먹으라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죄 없는 사람을 양식으로 준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 6:35-5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누룩 없는 떡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여호와의 군대들이 먹어야 하는 누룩 없는 떡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후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 보낸 것을 후회를 합니다.

그리하여 바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기에 이릅니다.

 

출 14:5-9절.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자 온 애굽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일을 하는 노예들이 탈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신하들이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고 나면 농사를 누가 짓느냐고 하면서 당장 가서 잡아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탄원을 합니다.

 

이에 바로는 애굽의 모든 장관들을 시켜서 애굽의 정예 부대 특별 병거 6백승과 모든 군대들을 동원하여서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가 출애굽 사흘이 지난 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가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 중에서 애굽의 바로가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전차 부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꼼짝없이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지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곳에 끄집어내어서 죽게 만드느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로 끄집어내서 무덤을 삼으려고 하느냐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출 14:10-12절.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에 모세는 백성들을 안돈 시키며 요동하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싸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닥치게 된 것은 모두가 너희들을 인도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대신 싸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동요하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분입니다.

 

출 14:13-14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은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고이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리곤 애굽의 군대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수장을 시켜 버렸습니다.

동일한 바다에서 한 민족은 살아났고 한 민족은 몰살당하였습니다.

 

홍해 바다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모두가 죽음의 바다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속에서 살아나온 민족이 있고,

죽음에 가두어지는 민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애굽의 군대들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바다 사건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진 자는 살고,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자는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서 나온 중다한 잡족들도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홍해는 건넌 것입니다.

 

잡족들도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뿌려졌느냐 아니냐 만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 바다 사건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말로만 이스라엘 백성이지 실제로는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 교육을 받고,

애굽에 음식을 먹고,

애굽의 풍습으로 살던 애굽 사람들입니다.

 

피만 이스라엘 피이지 껍데기는 완전히 애굽인인 것입니다.

의식구조가 애굽 것으로 가득합니다.

삶에 가치도 애굽 식입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의 피(약속)”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언약은 다른 말로 피이고 생명이고 씨앗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씨와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하나님의 자기 씨앗 찾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에게 가서 ‘내 장자’를 내어놓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신약적 사건으로 확대를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창세전에 작정이 된 자기 씨앗 찾기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구원해 내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죽였다가 살려 내는 방식입니다.

홍해바다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건은 죽였다가 살려내는 것의 표상인 것입니다.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의 집단적 죽음 사건입니다.

홍해 사건은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 사람이 몽땅 죽는 사건인 것입니다.

홍해는 건넘으로 애굽의 사람은 죽고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살아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홍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맏 물려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고,

홍해 바다 속에 들어간 무교절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약의 홍해 바다 사건을 신약적 용어로 세례라고 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홍해바다에서 죽어서 장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었다는 의미로서의 집단적 세례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란? 죽음을 말합니다.

 

골 2: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함께 붙어 있는 자입니다.

이를 연합이라고 합니다.

 

롬 6:3-4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 언약 안에서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서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에서 모두 죽은 것은 우리 옛 사람이 죽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옛 사람을 홍해 바다에 수장을 시킨 것입니다.

땅에 묻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의도된 사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일부러 홍해로 끌고 간 것입니다.

 

출 13:17-18절.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름길로 인도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름길을 놔두고서 멀고 힘든 홍해 바다가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은 이들을 무교절을 경험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로 인도한 것은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살아난 자들을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홍해에 담갔다가 빼내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죄인을 죽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곳은 언약의 후손만 들어 갈 수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생물학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사라의 죽은 몸에서 이삭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 몸에서 자식을 준다고 할 때 비웃었습니다.

즉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약속대로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산 자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산 자가 되어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들어갈 수가 있고 또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자란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에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애굽적 사고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입니다.

즉 내가 이해되고 믿을 수 있어야 믿는다고 하는 사고입니다.

그러니 애굽식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경험된 지식인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은 자에게서 산 자가 나온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죽어서 이스라엘의 장자가 살아난 것은 예수가 죽어서 성도가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치시는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바탕에 어린 양의 죽음이 있듯이 내가 사는 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 몸에 어린 양의 죽음을 새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바다를 통행케 하신 이유입니다.

이를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이 살아갈 땅은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가 없는 곳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은 존재양식이 다릅니다.

 

신 11:10-15절.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가나안 땅은 애굽과 다른 땅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은 농사짓는 법이 다릅니다.

애굽은 저수지에 물을 가두어 저축해 두었다가 내가 언제든지 필요하면 물을 퍼다가 농사를 지을 수가 있는 곳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산악지대라서 물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그때 그때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 갈 수가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은 내 힘으로 농사를 짓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주는 곳입니다.

쉬운 말로 애굽은 하나님 없이도 살아 갈 수가 있지만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살아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능성과 이성으로 살아가는 애굽의 사고방식으로는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만 언약백성이지 애굽의 사고방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는 애굽의 사상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 보아야 자기 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나안 땅에서는 망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애굽에 사고를 가진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가안의 예표적인 곳입니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먹여주시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하여서 광야로 나오니까 매일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은 애굽에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죽는 사건인 것입니다.

옛 사람을 무덤에 묻은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오기 전에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몽땅 죽이는 홍해 바다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교절에 누룩 없는 떡을 땅에 묻게 한 것은 애굽 사람을 장사지낸 것을 기념케 하는 것입니다.

즉“너희들은 죽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을 담고 있는 무교절에 누룩 없는 떡을 땅을 묻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교절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난 죽은 자야!”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선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도 함께 못 박혀 죽었어!”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난 예수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내가 사는 것이야!”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떡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누룩 없는 떡을 땅에 묻으라는 것은 죄인을 무덤에 묻으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죄인을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에서 올라온 것은 죄 없는 사람으로 올라온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초실절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한 묶음의 단과 같은 것입니다.

 

홍해바다 속에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동일하게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가 살아서 홍해바다를 걸어서 나왔습니다.

 

어째서 애굽인은 홍해바다에 수장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무덤에서 올라온 것인가요?

이는 애굽인에게는 어린 양의 피가 없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무덤과 같은 죽음의 바다에서 걸어 나오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호 우리는 살았다 라고 환호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애굽인처럼 같이 죽어야 했음에도 살아난 것은 어린 양의 피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무교절은 유월절의 연속선상에서 지켜지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홍해 바다 사건은 예수님의 무덤 속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원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무교절을 원어로는 “하크 함 마짜트(Hahk Ham Mazaht)”라는 합성어입니다.

“하크(Hahk)” 는 “축제일” 이라는 뜻이고,

“함(Ham)” 이란 “그” 라는 뜻이다.

“마짜트(Mazaht)” 는 “흡수하다, 장례 지내다, 묻어두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두 가지 뜻으로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 묻어 둔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둘째로는 “그 장사 지낸 것의 축제일”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 한 것은 “그” 라는 장관사입니다.

그런데 “그”를 묻어 두는 것을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장사를 지낸다는 말은 사람에게만 쓰는 용어입니다.

떡과 같이 어떤 물건을 묻어 두는 것을 장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흘간 땅 속에 묻혀 있다가 꺼냈다는 누룩 없는 떡은 의인화 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룩 없는 떡은 “누룩 없는 떡과 같은 사람” 이 됩니다.

앞서서 “누룩은 죄를 상징”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누룩 없는 떡은 죄 없는 사람” 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떡을 꺼내어 먹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사람이 사흘간 무덤에 있다가 살아난 사람이 누구인가요?

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목요일) 오후 3시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가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무교절(금요일)을 지나 안식 후 첫날인 초실절(토요일) 새벽에 부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무덤에 갇힌 사건을 요나가 밤 낮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나온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12:40절. “요나가 밤 낮 사흘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사흘간 땅 속에 계시다가 살아나심으로서 무교절에 땅에 묻어 두었다가 사흘 후에 꺼내서 먹었던 누룩 없는 무교병의 실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교절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교절을 예수그리스도가 완성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와 실상

 

절기는 그림자이고 실상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은 그림자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실상입니다.

실상이 왔음에도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불의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1500년 동안 무교절 날이 되면 집안에 누룩을 없애고,

누룩 없는 떡을 땅에 사흘간 묻어 두었다가 꺼내 먹으면서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 사흘간 계시다가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는 누룩 없는 떡을 땅에 묻었다가 꺼내서 먹을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무교절에 사흘간 땅에 묻어둔 누룩 없는 떡이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무교절의 실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사흘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던 누룩 없는 떡의 실상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눈은 성령이 오심으로 떨어집니다.

 

이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 식으로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절기를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절기를 지키는 것이라고 자기 동족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은 세상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가서 알려 주시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절기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기적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내가 자랑스러워지면 안 되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유대인들처럼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형식에 매이게 됩니다.

이 시대 많은 교회들이 구약적 절기 지킴과 같이 대강절이니 사순절이니 하면서 부활절을 지키고 성탄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형식 속에 내용이 담겨져 있을 때는 귀한 것이 되지만 내용이 빠진 형식만 있을 때는 그것이 미혹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키는 신약의 절기 속에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모든 신앙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주술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은 없으면서 그냥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립써비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누구를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삶이어야 하고 생명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나는 과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가? 

내가 믿는 예수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으로 믿고 있는가?

냉정하게 살펴보십시오.

 

예수는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셔야 합니다.

 

믿고자 하십니까? 

믿어지십니까?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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