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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성경강해)44강. 초실절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레 23:9-14)

by coroa 2021. 12. 1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44강. 초실절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레 23:9-14)

-.정낙원 목사

 

레 23:9-1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절기와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을 절기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일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7대 절기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7대 절기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절기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 하실 구속사적인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절기는 세 텀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세 가지 텀으로 이루어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창조 사역을 보면 세 텀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갈라내는 것이고,

둘째는, 채우는 것이고,

셋째는,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 텀으로 구원하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죄와 사망에서 갈라내는 일을 하시고,

그 다음에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시고,

다 채워지면 천국에서 안식케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 속 사역은 세 가지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초림 때 육체로 오셔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선지자 사역과,

둘째로,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셔서 도우시는 제사장 사역과,

셋째로, 재림하신 후에는 천년왕국에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7대 절기는 봄, 여름, 가을 절기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과거적 사역을 말하고,

여름 절기는,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현재적 사역을 말하고,

가을 절기는, 장차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에서 왕으로 다스리는 미래적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봄 절기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칠칠절(오순절)과 넉 달 농사 기간이 있고,

가을 절기로는,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장막절)이 있습니다.

 

역사는 1년 주기로 순환을 합니다.

그리고 1년은 4계절로 구분이 되어서 순환을 합니다.

1년이 4계절 주기로 순환을 한다는 것은 4계절이 역사 전부를 축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절이라는 말은 마디마디로 잘라져 있다는 뜻입니다.

1년이 마디마디로 잘라져 있다는 것은 마디마다 각각의 의미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7대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기마다 각각의 의미가 다릅니다.

 

7대 절기가 봄, 여름, 가을로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봄, 여름, 가을처럼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봄 절기도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도 각각의 절기가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육체로 하시는 일도 마디마디처럼 구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살펴볼 초실절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나와서 하실 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봄 절기 중에서 맨 마지막 절기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은 3일간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14일, 무교절은 15일, 초실절은 16일에 지켜졌습니다.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이고, 무교절은 안식일이고, 초실절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으면서 홍해바다에서 장사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초실절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은 후 첫 곡식을 추수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은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그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곡식을 추수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초실절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하신 일 중에서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10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초실이란 첫 과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실절은 첫 곡식을 추수하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의 땅입니다.

그럼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요 15:1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구원을 농사로 비유하는 것은 구원이 농사처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뿌린 씨는 그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씨를 뿌린 것입니다.

씨는 죽어서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열매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로서의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농부가 한 알의 밀알을 땅에 뿌려서 죽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밀알들을 끄집어내고자 함입니다.

하나를 죽여서 많은 것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게 농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라는 씨를 한 알의 밀알로 뿌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교절에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것은 마치 씨앗이 땅에 묻힌 것과 같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히면 자기 몸을 썩음에 내어주고 새로운 생명을 토하여 내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씨의 자양분을 힘입고서 땅을 뚫고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였습니다.

사흘 만에 무덤을 뚫고 나오셨습니다.

이를 초실절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실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기 전에 이미 죽은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중에서 첫째라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죽은 자를 잠자는 자라고 합니다.

왜 죽은 자는 잠자는 자라고 할까요?

이는 죽음에서 부활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깨어나신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으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예수님 이전에 죽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었음에도 잠자는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도 깨어날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무덤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깨워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는 첫 추수를 하신 것입니다.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실절의 첫 추수된 곡식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교절에 무덤 속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구약의 성도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트렸으니까 이제 죽음에서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초실절에 부활을 하신 후에 그들을 무덤에서 다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이를 초실절의 첫 곡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한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 다음에 줄줄이 살아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실절은 첫 곡물 한 단(한 무리)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왜 들어갔느냐?

잠자는 자들을 깨우러 가신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잠자고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초실절에 드려지는 첫 곡식으로서 “한 단(한 무리)”들인 것입니다.

 

레 23:10-11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초실절에는 첫 추수된 곡식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초실절이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은 후 첫 곡물을 추수하여서 그 중에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드립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곡물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열납되도록 드렸습니다.

 

한 단이란? 한 묶음을 말합니다.

한 묶음은 같은 종류가 여럿이면서도 하나로 연합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살아나실 때 예수님과 동등한 한 묶음의 사람들도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초실절의 첫 곡물 한 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홀로 살아나셨다면 한 단으로서의 초실절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한 무리들이 살아나야 예수님이 초실절의 첫 열매가 되고 함께 살아난 자들은 곡물들의 한 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부활 시에 한 무리들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52.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죽으시자 자던 자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데리고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무리가 부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이것은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여셨는데 이를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 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이것은 에덴동산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그 문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사야가 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남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에덴동산의 문은 죄인에게는 열려지지 않습니다.

죄 없는 자만이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에덴동산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이를 휘장이 찢어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를 휘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음으로서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자기백성들의 죄 값을 치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길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 길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간 자가 없습니다.

구약의 언약의 후손도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린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없습니다.

 

구약의 후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죄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이 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눅 2:22-31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구약의 마지막 제사장이라 할 수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해결 해 주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시므온은 자기의 반차에 따라서 성전에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규례에 따라서 태에서 난 첫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첫 아들인 예수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자 대뜸 알아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시므온에게 네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오매불망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안고 온 것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그 내용이 내가 이제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제 평안히 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서의 일을 끝내고 퇴근하여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집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 예수가 이제 이스라엘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들어가서 잠자던 자들을 깨워서 무덤에서 대리고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비로소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에 죄 문제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무덤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가 더 이상 성도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죄인만 가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죄 없는 사람은 가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는 사망이 모든 인간들에게 왕 노릇 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꼼짝하지 못하고 무덤에 가두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줌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이 붙잡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휘장이란? 구약의 성막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아 놓은 담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으로서 천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차례 7월 10일 대 속죄일 때 오직 대제사장만이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대제사장만 드나들 수 있는 그곳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활짝 열려진 것입니다.

이제 누구라도 예수님의 피만 앞세우고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 구약의 성도들이 무덤에서 깨어나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거룩한 성은 하늘 예루살렘 즉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들이 초실절에 드려지는 가나안 땅의 첫 소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초실절의 첫 곡식의 한 단이 되어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깨어난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과 한 단이 되어서 천국으로 인도된 최초의 예수님과 한 묶음의 단인 첫 곡물들인 것입니다.

 

이로서 1500년 전에 초실절이라는 절기를 통하여서 약속하시고 계시하셨던 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완벽하게 성취가 된 것입니다.

첫 곡식이 살아났다면 그 다음 곡식들은 순차적으로 살아나서 하나님께 바쳐질 것입니다.

 

그 다음 곡식들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깨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실절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이루실 일을 미리 표상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면서도 신약의 성도에게 말씀하고 계신 약속인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초실절로 예수님의 초림으로 받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받았지만,

실제적인 사건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소산물은 맏물 즉 초태생과 같은 것입니다.

 

출 13:2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을 출애굽을 시킨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러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초태생은 맏이를 말합니다.

 

맏이는 가문의 머리입니다.

맏이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집안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살아난 장자들을 전부 하나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은 첫 곡물들인 것입니다.

첫 곡물을 요제로 드리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는 것은 어린 양 안에서 살아난 자들만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영생의 나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유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들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초실절의 첫 곡식단을 요제로 드렸습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제물을 흔든다는 것은 곧 “살아난다,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마치 잠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은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간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 11:11-14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깨우러 가자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죽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죽음과 잠을 아직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는 죽었지만 예수 안에서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우러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죄인만 무덤에 가둘 수가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은 무덤에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인에게만 권세 놀음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예수님을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은 성도들도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이 예수님과 구약의 성도들을 토하여 낸 것입니다.

 

이걸 요나를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토하여 냄을 당한 것도 물고기가 요나를 소화 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물고기는 사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요나의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요나의 실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사망이 삼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으면 죽었다 하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죽음을 “주 안에서 잔다” 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는 반드시 살아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가 살아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죽었다 살아나는 과정을 겪은 것은 자기 백성들의 으뜸이 되고자 함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전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골 1:18절.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첫 열매란? 줄줄이 살아나는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살아나는가요?

그에게 붙은 자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가지고 증명을 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부터 부활하심은 모두가 성경대로 약속된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5:3-4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에 약속된 것이란? 창세전에 이미 작정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로 창세전에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를 예수그리스도를 가지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려내신다!

이를 예수그리스도 자신과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을 살려내심으로 시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음에서 살려내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프로그램’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의 약속은 부활 프로그램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프로그램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전 15:13-20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만약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은 부활 프로그램을 작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에 따라서 부활을 하신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이 부활 프로그램에 의하여서 줄줄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붙은 자들을 예수 안에서 부활된다는 그 프로그램에 따라서 부활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절기를 통하여서 부활 프로그램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고 복음 증거하는 일을 감당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이 예정된 부활 프로그램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부활할 것이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 하였던 것입니다.

 

살전 4:13-18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들의 나팔 소리로 강림을 하실 때 다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앞서 간 성도들과 만나게 됩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초실절에 첫 곡물의 이삭을 요제로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실절 제사는 안식 후 첫 날에 드렸습니다.

 

11절.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유월절은 안식일 전 날이었고,

무교절은 안식일이고,

초실절은 안식 후 첫 날입니다.

 

초실절이 안식 후 첫 날이니까,

그럼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하신 날이 됩니다.

과연 그러한가?

 

예수님은 과연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셨는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7대 절기를 통하여서 계시하신 약속된 메시야가 아닌 것입니다.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하셨다고 한다면 1500년 전에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맞습니다.

그럼 우리는 반드시 그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유월절은 14일 목요일”에 지켜졌고,

“무교절은 15일 금요일”에 지켜졌고,

“초실절은 16일 토요일”에 지켜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안식 후 첫 날이란 토요일이 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유월절은 목요일 저녁 6시부터 시작하여 금요일 저녁 6시까지이고,

무교절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이고,

초실절은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일요일 저녁 6시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하셨다고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간으로 하면 초실절인 일요일 날 새벽에 부활을 하신 것이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가까워 예수님을 유월절에 죽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미 1500년 전에 약속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므로 반드시 안식일 전 날인 유월절에 죽임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곤 안식일 날인 무교절 날에 무덤에 갇히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성취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초실절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살아나신 것이 맞다면 초실절에 드려지는 첫 곡물의 요제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절기로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 사흘을 무덤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예수님을 유월절 해 질 때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끝나기 3시간 전에 죽으셨습니다.

다른 말로 무교절이 오기 3시간 전에 죽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3시간 후면 안식일인 무교절이 되니까 서둘러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천에다가 둘둘 말아서 무덤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유월절 날 3 시간을 무덤 속에 계신 것입니다.

 

무교절인 안식일에는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6시까지 하루 종일 옴팡 무덤 속에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오후 6시가 지난 후 새벽에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흘간 무덤에 계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 16:21절.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7:23절.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마 20:19절. “ …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7:63절.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계신 시간은 시간적으로는 24⨯24⨯24 = 72 시간이 아닙니다.

유월절 3시간 무교절 24시간 초실절 약 12시간(새벽 6시에 부활을 했다고 하면)을 계셨습니다.

그러나 날 수로 따지면 비록 시간은 각각 다르지만 사흘을 계신 것입니다.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말은 초실절 날 새벽이라는 말입니다.

오후 6시부터 초실절이 시작이 되어서 밤이 지나고 오는 새벽은 안식 후 첫 날 새벽인 것입니다.

초실절의 새벽인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마 28:1-6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막 16:9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눅 24:1-6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일요일 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 일요일 새벽은 유대인들에게는 안식 후 첫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심으로 초실절을 완성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의 의미

 

제 칠 안식일은 첫 창조에 속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첫 창조에 속한 죽음입니다.

즉 첫 창조에 속한 것에 대한 죽음인 것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것은 죄 아래 속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죄 아래서의 끝이 되는 것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것들은 죽음으로 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도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죽음은 첫 창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첫 창조는 7일 안식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은 새로운 날입니다.

첫 창조를 넘어선 날입니다.

이를 묵시에 속한 여덟째 날이라고 합니다.

 

여덟째 날은 부활의 세계에 속한 날입니다.

이를 영생의 세계라고 합니다.

영생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곳입니다.

 

영생의 세계는 시간 개념이 없는 곳입니다.

이를 오늘 날이라고 합니다.

안식 후 첫 날은 오늘 날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오늘 날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7일 안식일은 먹고 마시는 물질적 가치로 살아가는 곳이지만,

둘째 창조에 속한 안식 후 첫날인 여덟째 날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영적 가치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초실절의 첫 곡물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먹을 수가 있습니다.

 

레위 23:14절. “너희가 이렇게 너희의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바로 그 날까지는, 빵도, 볶은 곡식도, 햇곡식도 먹지 못한다. 이것은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표준새번역)

 

초실절의 첫 곡물은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마치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놓고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에 자식들이 먼저 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자식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 예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초실절의 첫 곡물은 일차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맏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먼저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초실절의 척 곡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요 20:11-18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몰라봅니다.

이에 천사들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라고 부르니까 그제서야 알아봅니다.

반가운 나머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신 후에 마리아가 만지려고 하자 날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아직까지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에게 먼저 드려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먼저 보고를 드린 후에 나중에 만나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하늘에 평강을 주시면서 만나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손과 옆구리는 보고 예수님인줄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을 믿게 됩니다.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면서 죄사함의 권세를 주십니다.

이 일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각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사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귐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을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경험케 해 주십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영적으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새 언약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새 언약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새 언약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사람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무덤에 가두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 하던 언약의 후손들을 놓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죽음에서 놓여진 자들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에 죽음이 가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는 것은 아닙니다.

각오를 다지고 맹세를 한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이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의지가 약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죽음을 이겨내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실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기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베드로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각오를 다질 때는 왜?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였는가요.

이는 아직 예수님께서 초실절의 첫 곡식으로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살아나는 수순을 다 밟으신 후에 초실절의 요제로 완성하시고 난 후 성령을 베드로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오고 나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유월절을 앞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부활을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1:23-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는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나사로를 살리면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날 믿다가 죽어도 여기 나사로처럼 살아 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들려지고 계십니다.

 

그림자와 실상

 

절기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절기를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실상이 왔음에도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미혹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초실절만 되면 곡식의 첫 이삭을 제사장에게 가지고가 흔들고 있습니다.

실상이 왔음에도 아직까지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이 빠진 절기 지킴은 유대교처럼 의식 종교로 변질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천주교처럼 의식 종교로 변질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갖가지 이름의 새로운 절기들을 만들어서 성도로 하여금 율법적으로 지키게 하는 것은 구약을 답습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절기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념이란 과거에 경험된 시간을 현재화 시키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를 현재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현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과거의 예수를 현재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형식(의식)을 붙잡지 않고 그 내용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빌 3:10-14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신앙은 묵시에 속한 것입니다.

항상 오늘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인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 푯대를 바라보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의 양들처럼 자신이 행한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초실절이 이루어진 성도는 양들처럼 자신이 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께 받은 그 은혜로 범사 속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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