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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레위기강해)26강. 이방인의 풍속을 쫓지 말라 (레 18:1-30)

by coroa 2021. 11. 1.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26강. 이방인의 풍속을 쫓지 말라 (레 18:1-30)

-.정낙원 목사

 

레위 18:1-30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6.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27.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 땅의 풍속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는 이방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같은 자세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애굽 땅에 풍속을 본받지 말라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의 일을 벗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린 모두가 애굽(세상)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땅의 일을 버리라고 합니다.

땅의 일이 바로 애굽 땅의 풍속들인 것입니다.

 

삶 속에는 그 사람의 본질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출애굽 2 세대들입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 40년 동안 애굽의 사람이 죽임 당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모습이 출애굽 1 세대들이 광야에서 다 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애굽 1 세대들이 죽은 것은 애굽의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왜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의 것을 동경하였나요?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요?

그들은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40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 교육을 받았고,

애굽의 음식을 먹었고,

애굽의 풍습으로 살았습니다.

 

광야에 나온 자들은 무늬만 언약의 후손이지 실제는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나서 살던 사람을 광야로 빼내시고는 애굽의 삶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사람에게 애굽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결국 출애굽을 하였지만 그들은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홍해바다 앞에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을 할 때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이고자 하느냐 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대로 출애굽 1 세대들은 모두 광야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낸 것은 광야에서 죽이고자 하심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난 사람을 죽이려고 출애굽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실족하게 됩니다.

왜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의 생각을 비껴가시면서 역설적으로 일을 하시는지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아 질 때 비로소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하게 하고 죽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언제 사랑했느냐고 따집니다.

 

렘 29: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분명히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고 장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가장 신앙이 좋을 때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당할 때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자들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재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복음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규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성적(性的)인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근친상간을 하지 말고,

동성애도 하지 말고,

남의 아내와 통간하지 말고,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애굽 땅의 풍속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 풍속을 성적인 문란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문란”이라는 말은 “혼합”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거룩과 비거룩이 섞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혼합주의를 뜻합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보면 분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구원이 분리되는 것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출애굽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출애굽은 장소적인 분리만 뜻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풍속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풍속을 한마디로 성적인 타락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근친상간을 그 하체를 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6절.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골육지친의 하체를 범치 말라고 합니다.

“하체”를 히브리어 “에르와” 라고 합니다.

이는 “발가벗다” 또는 “발가벗기다” 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수치를 드러낸다” 혹은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스스로 수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타인의 수치를 드러내게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수치를 가려주는 일을 하는데 마귀는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은혜는 수치를 가려주고 법은 수치를 드러냅니다.

은혜를 가려주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수치를 드러내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서 하체를 드러내고 잠을 잤습니다.

이 모습을 함이 보았습니다.

 

함은 아버지가 하체를 드러낸 것을 덮어주지 않고 형제들에게 말하면서 아비를 조롱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하체를 범하는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함의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옷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주었습니다.

 

잠에서 깬 노아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누가 자신의 하체를 가려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셈과 야벳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발가벗은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함이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발가벗은 모습은 함이 보았는데 왜 셈과 야벳이 수치를 가려주었느냐고 합니다.

이에 셈과 야벳이 함이 아버지가 발가벗고 잔다고 조롱을 하길래 자신들이 옷으로 덮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노아가 수치를 가려준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하고 수치를 드러내게 한 함에게는 저주를 합니다.

 

저주 받은 함의 후예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애굽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을 함 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신이 성적으로 문란한 신인 것입니다.

 

애굽에는 여러가지 신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일신을 배척하고자 만든 하나님을 배도하는 사상입니다.

그 여러 가지 신들 중에서 심판과 부활을 다스리는 신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신입니다.

 

그 신의 이름이 “오시리스(Osiris)”입니다.

“오시리스(Osiris)”는 누이 동생 “이시스(Isis)”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神)이 근친상간을 한 신인 것입니다.

이러면 애굽 사람들의 풍속을 성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근친상간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이 근친상간하는 신이니까,

백성들도 자연히 성적으로 문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땅은 근친상간하는 것이 풍속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식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인들에게는 음행이 삶의 전반에서 횡행한 것입니다.

이걸 풍속이라고 합니다.

 

풍속이라는 말은 애굽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원주민들도 애굽과 같은 풍속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풍속과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을 한마디로 성적 문란함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잘 보시면 조금 모순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3절을 봅시다.

 

3절.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가나안 땅에 살려면 그 땅의 풍속과 규례를 지켜야지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 땅의 풍속을 본받고 살아가면 그 땅이 너희를 토해 낸다고 하십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가나안 땅의 풍속으로 살아서 그 땅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24-30절을 봅시다.

 

24-30절.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30.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가나안 땅이 가나안 원주민을 토하여 냈다고 합니다.

가나안 원주민은 가나안 땅의 풍속으로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그 땅의 풍속으로 살던 원주민 때문에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그 거민을 토하여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가나안 땅의 속성과 다른 풍속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잘 보시면 “내가(하나님) 그 악(惡)을 인하여 벌(罰)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은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원주민에게 세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거룩한 땅에서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방 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그 땅이 그들을 토해 냈다고 합니다.

 

너희들도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애굽의 풍속으로 살면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애굽의 풍속으로 사는 자는 토해내게 된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너희들도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당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쳐지게 된다고 합니다.

 

토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기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 몸이 상한 음식을 먹으면 본능적으로 토하여 내듯이 땅이 그 땅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은 토하여 낸다는 뜻입니다.

 

이 모습은 인류 역사의 시작 때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은 에덴동산에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는 것을 다 볼 수 있도록 불을 환히 밝혀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이 죽은 자를 토해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산 자들만이 살 수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는 에덴동산에 들어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들어 왔다고 하여도 땅이 토하여 내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죽으면 집안에 두지 않고 멀리 공동묘지에 가져다가 땅에 묻어버립니다.

이는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러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하는 말씀이 애들아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아무리 너희를 가나안 땅에 넣어 주어도 너희가 그 땅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그 땅이 너희를 토하여 낸다고 합니다.

 

그 땅의 성질이 죄인은 용납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그 땅은 죄인을 만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토해낸다고 합니다.

이러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천국은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천국과 세상은 살아가는 존재양식이 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천국(가나안)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너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쫓는 것이 바로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인 것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쫓는 것은 성적 문란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의 풍속을 성적 문란으로 말하는 것은 애굽의 삶이 인간들의 육신적인 쾌락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육신의 쾌락을 주는 것들입니다.

육신적 쾌락을 쫓아가는 것은 성적 쾌락을 쫓아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풍속을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수간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짐승의 나라라고 합니다.

근친상간은 짐승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친상간이라는 애굽의 풍속은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란? 생명을 낳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죄가 생명에 속한 것을 육신의 쾌락을 쫓는 도구로 변질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 속한 구원을 땅 차원으로 전락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 땅의 가치를 쫓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일컬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할까요?

이는 세상이 육신의 소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땅의 일이 바로 간음이고 성적 타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나라인 애굽에서 빼내시고는 다시 음란한 풍속으로 살아가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인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그들이 거하던 곳과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거하던 곳은 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 땅의 풍속이 있는 곳으로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풍속을 애굽 땅의 풍속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죄가 없는 땅으로 인도하여서 죄 짓지 말고 살라고 하여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한 곳으로 인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비밀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아무도 살지 않는 깨끗한 빈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음란한 족속인 가나안 원주민이 살아가는 땅에서 살아가도록 인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가나안 원주민은 애굽의 풍속으로 사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애굽의 풍속으로 살아가고 있는 땅으로 이스라엘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풍속을 쫓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아무도 없는 청정지역에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하면 그래도 좀 해 보겠는데,

애굽의 삶으로 최적화 된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눈 앞에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건들을 만들어 놓고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죄인에게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떡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떡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십니다.

죄 짓지 말라고 해서 죄를 안 짓는 인간들이 아니란 것을 다 아십니다.

죄를 안 짓게 하려면 죄의 요소들을 다 치워 버리고 살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악이 만연한 곳에 집어 놓고는 죄 짓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 지으면 죽인다고 하고 있습니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왜 그럴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역설적 비밀을 알아야 음란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살아가는 동네에 집어넣고 음란하게 살지 말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롬 11:29-36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 비유를 하면서 원래 이스라엘이 그 본 가지였는데 하나님이 그 중에서 합당치 않은 가지 일부를 찍어내고 이방인들을 접붙였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외인(外人)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에 접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어서 붙여주신 것입니다.

이를 은혜와 긍휼이라고 합니다.

 

잘려나간 본 가지는 잘난 척 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엄위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엄위란 법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으로 살아가던 자들을 은혜라는 참 감람나무와는 함께 살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솎아낸 것입니다.

법대로 사는 자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은혜와 긍휼로 이방인을 접붙임 한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는 은혜라는 나무입니다.

은혜라는 나무에 붙어 있으려면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이건 마치 거룩한 가나안 땅에 살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거룩한 땅에서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그 땅이 토하여내는 것처럼,

은혜의 나무에 붙어서 은혜로 살아가지 않으면 나무가 그 가지를 내침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 자체가 은혜와 긍휼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은혜와 긍휼로 살지 않고 법으로 산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곡식 속에 덧뿌려진 가라지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놈들은 은혜와 긍휼이라는 참 감람나무에 붙어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은혜와 긍휼로 접붙임을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고 긍휼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방인 중에서 시건방을 떠는 놈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법으로 사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사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자들을 잘라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전에 유대인 중에서 법으로 살다가 잘려 나간 자들을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서 다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면 참 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모든 가지들은 은혜와 긍휼의 가지들이 되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건방을 떨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은혜로 산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뉘라서 이를 알리요 탄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순종 할 수 없는 곳에 가두어 두고서 순종하라고 하신 것은 순종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서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죄 짓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 두 손을 들게 하여서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은혜임을 알게 하시려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난 척 하는 자들을 눈뜨고 못 보십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척 하는 자들입니다.

인간들이 무엇으로 잘난 척 합니까?

자기 행위입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을 죄가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은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 조상들이 하나님의 손에 죽어가는 모습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지켜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애굽의 삶을 살아가면 죽이는 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조상을 죽이던 그 일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일어나게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비에 그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였다면 아들도 불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이 말씀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 자인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상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겠다고 시내산 계약을 덜렁 했다가 계약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숭 숭배 하다가 결국은 40년 동안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도 자기 주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과연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을 본받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느냐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가나안 원주민이나 똑 같은 자들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도 애굽의 풍속으로 살던 사람이고,

이스라엘도 애굽의 풍속으로 살다가 나온 자들입니다.

도낀 개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원주민의 풍속을 쫓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왜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조상들이 출애굽을 하여서 광야에서 애굽의 삶을 동경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애굽의 풍속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살면서 가나안 원주민과 똑 같은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사사기의 역사는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왕정 국가가 되었어도 지속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가나안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럼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묻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처절하게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포로 당할 때 하나님의 생각은 너희에게 재앙을 주고자 함이 아니고 장래에 소망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감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역설적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범사 속에서 감사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일찍이 노아 언약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 인간 지음을 한탄하시고 노아의 식구만 남기시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창 8:20-21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9: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언약을 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악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원래 악한 자들인데 내가 상대해서 뭘 하겠나?

소귀에 경 읽기이지,,,

그러면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물을 보시고 사람으로 인하여서는 다시는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 몸에 새기고자 짐승을 양식으로 주십니다.

홍수전에는 육식을 양식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육식은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낸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 너희들이 짐승의 희생으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자신들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데 짐승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늘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것이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후대에 이것이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서 출애굽을 시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너희가 살고 있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 때문임을 기억케 하시기 위하여 성막의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바탕에는 어린 양의 희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성막을 앞세우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 바로 불의(不義)가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죄를 이길 수 없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애굽의 풍속으로 살아가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땅으로 들여보낸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않은 것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삿 3:1-6절.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나님은 가나안 원주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원주민의 아들딸들과 혼인하여서 그들의 신을 섬겼더라고 합니다.

 

“마침내” 라는 말은 “드디어”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 그렇지”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던 죄들이 고개를 드러낸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가나안 원주민을 가지고 하시고자 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사기는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고는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앞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어쩔 번 하였나,,,

이럴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복음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일하심으로 이해를 하여야지 인간 쪽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 입장에서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럼 죄 지어도 되겠네, 막살아도 되겠네” 라고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더 하려고 죄 아래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죄와 싸우는 자이지 죄를 즐기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어떤 논리를 펴더라도 죄 짓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는 이단인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자기 안에 성령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절대로 죄를 즐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죄와 싸우라고 하시지 막살아도 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어차피 죄인인데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받는다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슬만 먹고 살아가는 곳으로 인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애굽의 풍속이 전혀 없는 아무도 살지 않는 청정한 지역으로 인도하여서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의 풍속이 가득한 땅으로 인도 하여서 그것도 가장 타락한 가나안 원주민들과 같이 살아가게 하신 것은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 하자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실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진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짓고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에 은혜와 긍휼로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어린 양의 희생을 아는 자만이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뼛속 깊이 어린 양의 희생이 심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토해냄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가나안은 어린 양의 희생을 모르는 자를 토해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어린 양의 흔적을 새기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신약의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배워갔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고 있음을 배워가야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애굽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듯이 ,

신약의 성도들도 교회에서 옛 사람이 죽임을 당하여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아겔다마 라는 피 밭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그 피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으로 삼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곳입니다.

 

천상의 나그네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나그네들이 모여서 이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임 당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육신에 소욕을 뽑아내 주는 곳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애굽의 풍속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적인 타락과 같이 우리를 부패케 합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이 발호하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토해짐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왔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애굽에 풍속을 죽이는 가나안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옛 사람은 애굽의 풍속을 쫓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 3:1-8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냐?

그럼 하늘에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땅의 지체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를 음란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음란한 것과 싸우는 것은 우리 안에 탐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탐심이 우리 안을 장악하면 우리 안에 천국은 토하여짐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애굽의 풍속인 육신의 소욕이 우리를 이기면 지옥으로 살게 되고,

성령으로 애굽의 풍속인 육신의 소욕을 이기면 천국으로 살게 됩니다.

 

이 싸움이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에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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