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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43강. 아마겟돈 전쟁 (계 16:1-16)

by coroa 2021. 7. 18.

 

 

 

43강. 아마겟돈 전쟁 (계 16:1-16)

-.정낙원 목사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왜 심판을 하실까요?

용도가 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판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모습이 애굽과 그 성격이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심판 당하는 이유를 구약의 애굽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애굽을 심판했나요?

그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세요.



계 16:6절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저희란? 큰 의미에서는 이 세상 전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이므로 거짓 교회의 심판을 말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사단의 세력입니다.

교회사 적으로 말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입니다.



이들이 누구를 죽였나요?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성격은 하나님이 그 아들들의 죽음을 원수 갚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내 아들들을 죽였느냐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을 왜 심판했나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다짜고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하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한꺼번에 쏟지 않았습니다.

순차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회개치 않았어요.

이는 그들의 완악 함들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바로를 일컬어 “강퍅하다” 고 합니다.

강퍅이란? 고집이 세고 목이 곧은 것을 말합니다.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재앙을 당하여도 회개치 않는다고 합니다.

꼭 구약의 바로 왕과 같습니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으로 그렇게 혼이 나고도 고집을 피우다가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빼냈는데도 바로는 끝끝내 쫓아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붙잡아서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종노릇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홍해에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고집으로 결국엔 죽음으로 그 값을 치루고 만 것입니다.



왜 바로가 그렇게 고집을 피웠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무시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보통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왜 부모의 말을 안 듣습니까?

부모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왕 노릇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이 고집피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 할지라도 나를 간섭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않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 라는 것입니다.

이걸 목이 곧다고 합니다.



죄가 뭐냐?

불순종입니다.

왜 불순종하나요?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적은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서 있게 됩니다.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생각으로는 광야 길을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광야 길을 가면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 뜻과 충돌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바로만 강퍅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강퍅합니다.

우리도 한 고집을 하잖아요?

바로는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회개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둘 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 하는 짓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 나와서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애굽의 바로처럼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한 자” 라고 합니다.

이는 바로와 같이 회개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단순하게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울고불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울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본질적 의미는 “가던 길에서 돌아오는 것” 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집 밖에서 가슴치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아버지 잘못 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아버지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탕자처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처럼 죽어도 자기 자존심을 챙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죄인은 본질적으로 회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종자들이 아닙니다.

죽어도 안 돌아옵니다.

이게 죄인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돌이킨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돌이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강제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간섭하는 것이지, 우리가 알아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출애굽 하였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애굽에 내려지는 열 가지 재앙을 뻔히 보고도 애굽을 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강제로 하게 하시기 때문에 요만큼이라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하나님을 싫어해요.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불편해요.



그래서 틈만 나면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신랑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떠날 때마다 하나님은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끝에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가 나와야지, “하나님 나 잘했지요“ 가 나오면 안 되어요.

그게 바로 목이 곧은 것입니다.



죽어도 자기가 했다고 하는 것이 목이 곧은 거예요.

강퍅한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금도 내 것이고 은도 내 것이고 땅도 내 것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을 얻어먹고 사는 자에요.

하나님으로부터 하루하루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회개한 자이고,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강퍅한 겁니다.



우리의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믿음도 내 것이 아니고,

봉사도 내 것이 아니고,

구제도 내 것이 아니고,

헌금도 내 것이 아니고,

전도도 내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에요.

우리는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격발시켜서 토해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조차도 말이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기적을 보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은 인간들은 기적을 보여주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도 마땅히 애굽 사람들과 똑 같은데,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달리 대하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우리도 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을 우리도 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따지면 도낀 개낀이에요.

거기서 거기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달리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뭔가요?

정체성입니다.

살아가는 삶에 지향성이 다릅니다.

소속이 달라요.



신자나 불신자나 살아가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에요.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한 가지 다르다면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가치로 살고, 불신자는 땅에 가치로 삽니다.

신자는 말씀이 양식이고, 불신자는 떡이 양식입니다.

신자에게는 떡이 부분이지만, 불신자에게는 떡이 전부이고 생명이에요.



하지만 신자라 할지라도 떡을 먹어야 사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은 육신의 소욕이 몸을 주장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자들 안에서는 늘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일컬어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개인적으로는 성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에덴동산을 떠나온 인간은 전쟁으로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전쟁이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두 민족이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집안, 한 국가, 한 교회 안에 두 민족을 심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집안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사울 왕과 다윗 왕,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 편과 그 반대편으로 나타납니다.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나누입니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나누입니다.



이것이 의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행함이냐!



언약 적으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이냐!

은혜이냐!



우리 몸은 전쟁터에요.

오늘 살펴볼 아마겟돈 전쟁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요.

세상 전쟁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영적인 의미로는 아마겟돈 전쟁이 어느 한 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부터 늘 있어 왔던 것입니다.



옛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도 일어날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나타났고,

신약의 교회사 속에서는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종말에는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신앙적 싸움으로 일어나고, 육적으로는 세상 전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적 전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고수하는 신본주의 신앙과, 인간의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하는 인본주의 신앙과 싸우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을 알아봅시다.



이걸 알려면 먼저 계시록 9장을 보아야 합니다.



계 9:14-15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만 만이나 되는 마병대가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을 16장에서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데 동방에서 오는 왕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브라데 강이 마르자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지요.

동방에서 오는 왕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의미를 알면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 저편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과 앗수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들입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쪽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놈들이 종말에는 교회를 타락케 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교회를 타락케 하는 세력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7장에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가 앉은 곳을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교회가 바벨론 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항상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어떻게 어지럽혔느냐 하면,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하여서 망하게 하였습니다.



최초에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자기 생각을 심어서 선악과를 따 먹게 하였습니다.

이건 영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뱀의 말을 섞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걸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이면 홍수가 일어납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홍수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일어난 홍수는 겉으로 나타난 것이고,

영적인 홍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의 섞임과 같습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하셨지요.

이 때 집을 어떻게 심판합니까?

홍수로 하지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지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지요.



홍수가 뭔가요?

두 물이 합하는 것입니다.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는 겁니다.



물은 말씀을 상징해요.

궁창 윗물은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고,

궁창 아랫물은 뱀의 말을 상징해요.



언약적으로는 궁창 윗물은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이 맺은 새 언약을 말하고, 궁창 아랫물은 모세가 맺은 옛 언약을 말해요.



이걸 의(義)로 이야기 해 보세요.

자기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의는 어떤 것이고, 무너지지 않는 의는 어떤 것인가요?

율법의 의는 무너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는 무너지지 않지요.

그럼 모래와 반석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인간들이 종교성으로 세운 교회와 신앙을 말하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지은 교회와 그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님 초림 때 마귀가 어떤 의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나요?

율법의 의이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들고 나왔잖아요.

예수님은 이렇게 율법 지킴이라는 의를 들고 나온 자들을 뭐라고 하던가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지요.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신앙의 싸움은 의 싸움이에요.

누구의 의냐?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하나님이 원하는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에요.

하나님은 흙에서 난 자들의 의를 받지 않아요.

하늘에서 난 자의 의만 받아요.



하나님이 보내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 행한 것만 의롭다 여기시고 받아요.

이걸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한 의에요.이것은 창세전에 언약하신 의에요.



그래서 신앙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포커스가 있지 않고 무엇을 믿을까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을까 에서 발생된 믿음으로 난 의를 바탕으로 한 열심과 충성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발생된 열심과 충성은 우리 것이 아니고 믿음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여호와 이레가 되는 것입니다.



의를 또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이냐?

새 언약이냐?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난 의이고,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난 의에요.

율법의 의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깨어진 첫 번째 돌 판과 같아요.



첫 돌 판은 쌍무 언약으로 주신 것이므로 법이고 옛 언약으로서 율법이에요.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신 것이므로 은혜로서 새 언약이에요.

광야에서 난 2세들은 두 번째 돌 판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어요.



이것은 새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천국 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두 번째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두 번째 돌 판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두 지도자가 있었어요.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이라고 합니다.



시종(侍從)이란? 모세에게서 나온 모세에게 복속된 자라는 뜻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는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모세가 죽었으나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말해요.

그리고 여호수아는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것과 같아요.

성령은 새 언약을 믿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무슨 일을 해도 자기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가 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살아요.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해도 주의 것으로 영광 돌리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주께서 하신 것으로 영광 돌리고,

구제를 하고 봉사하고 산을 옮길만한 엄청난 일을 하여도,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주를 자랑하고 영광 돌립니다.



고린도전시 13장에서 이러한 일을 했음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요.

이는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랑을 의인화 하면 바로 예수그리스도에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가 행한 것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행한 일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이러한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 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행함이 있어요.

인간의 행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행함이 있어요.

인간의 행함은 종교성으로서 자기 의가 드러나요.



이걸 보통 자원봉사를 하고 난 후 보람을 느끼고 뿌듯해 하는 것과 같아요.

자기 자랑거리이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고 뿌듯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어도 모든 인간들이 행하는 것이에요.

이 행함은 모든 종교에서 아름다운 덕목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걸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에요.

이는 곧 인간은 자기 가치를 챙기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가치를 챙긴다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유익을 위하여 행하는 종교성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면서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도 너희를 위한 것이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누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의를 드러내고 자랑거리가 되면 그건 자기 행함으로서 우상 숭배적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이 그 안에서 일으킨 행함이 있어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로 행한 것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성령의 은사로 행한 것은 하고 나서도,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이건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알아요.

이런 사람들은 그 무엇을 하여도 자기 자랑이 없어요.

하면 할수록 주께 감사해요.

이게 믿음으로 행한 신앙생활이에요.



많은 분들이 믿음을 오해하여서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해요.

아니 살아 있는 생명이 어찌 가만히 있나요?

살아 있으면 뭔가 움직여요.



믿음은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산 믿음은 반드시 동사(動詞)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살아서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을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고 해요.



이 행함이 없는 자는 죽은 믿음이고 그런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머리로는 복음적 지식이 풍부해서 아는 것은 많으면서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는 것으로 힘을 삼아서 영적 깡패 노릇을 하면서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고 일 잘하는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가짜에요.

죽은 것이에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몸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참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억지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이러한 것을 성화라고 하면 전 반대하지 않아요.

이러한 삶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요.

도리어 이러한 삶이 없는 것이 이상한 거예요.



제가 성화와 성화주의를 구분하라는 말이 이 말이에요.

성화는 주께서 성도 안에서 일으키는 사건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이것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이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열심으로 자기 의를 쌓는 자들이 있어요.

이들은 자기가 행한 것을 힘으로 삼아요.

이러한 자들을 성화주의라고 합니다.

성화는 예수를 자랑하지만, 성화주의자들은 자기를 자랑해요.



성화주의자들은 자기 업적으로 힘을 삼아요.

자기 영광을 드러내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성화주의 원조가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자기 행함으로 힘을 삼아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어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세리와 창기들을 깔보고 “나 이러 이러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라고 자랑 질 하잖아요.



신앙은 자랑 질하는 것이 아니에요.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그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그 사랑이 감사로 찬송으로 우러나와야 해요.



여러분은 성화는 하되, 성화주의는 되지 마세요.

마음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세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내 의를 쌓고자 함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커서,,,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넉넉해지란 말입니다.



바울처럼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여유로워지라는 뜻입니다.

영악스러워지면 안 되어요.

계산적이 되지 말고,,

잘난 척도 하지 말고,,

점점 더 익어 가세요.

본질적인 면에서는 양보하지 마시고,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양보하고 사세요.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예수의 냄새가 나야지 마귀의 냄새가 나면 안 되잖아요.

오래 묵은 묵은지처럼 예수님의 깊은 사랑의 맛을 내셔야 해요.

은은한 향수처럼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잘 익은 과실처럼 은은한 향기가 나야해요.



열매가 익으면 농부가 추수를 하잖아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우리를 농사하고 있어요.

마치 조각가가 통나무를 깎아내고 다듬고 하면서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에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거룩을 생명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거룩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려고 삶 속에 기준을 두셨습니다.

두 가지 직조로 된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고,

밭에 두 가지 종자의 씨도 뿌리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과도 혼인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거룩 이란? 섞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가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가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쟁입니다.



마귀는 섞으려고 하고 하나님은 섞지 못하게 하십니다.

누가 섞게 하느냐 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 길로 동방의 왕들이 옵니다.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동방의 왕들은 적그리스도 세력이에요.

교회 안에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들어 와서 사단의 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유브라데 강을 건너게 하여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인 조상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을 경계하는 것이 강입니다.

옛날에는 강을 두고서 서로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 왔다는 것은 저쪽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합니다.

강이 마르자 길이 생긴 겁니다.

그러자 강 저쪽에 있던 동방의 군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민족이 하나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브라데 강은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입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말랐다는 것을 지정학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의미로 접근을 하세요.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강은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흐르는 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이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라고 합니다.

생명수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지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게 주고자 하신 물입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생수의 강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수를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요 10:10-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시 요한복음 7장입니다.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를 뭐라고 하나요?

성령이라고 하지요.

그 생수가 어디에 흐르게 한다고 합니까?

그 배에서 흐르게 한다고 하지요.



그럼 이걸 역으로 추적해 봅시다.

우리 안에서 흐르는 생수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령이 어디에서 온다고 합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온다고 하였지요.



이것이 창세기에서는 에덴에서 발원하는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브라데는 에덴에서 흐르던 강물입니다.

그런데 그 강물이 말랐어요.



에덴에서 흐르는 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영적 기갈을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여야 하는데, 생수가 말라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심령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강퍅해지면 사람 노릇을 못하고 짐승 노릇을 해요.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심령이 강퍅해지면 이방인이 되어요.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어요.



이러한 상태를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에요.



사람의 딸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 땅에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가는 뱀의 후손들인 땅에 사람을 좋아 할까요?



이는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이고 떡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 거민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우상이 땅에 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약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에 것을 바라고 사는 자에요.

그런데 곁에 사는 이방인들을 보니까 눈에 보이는 땅에 것을 움켜쥐고 사는 겁니다.

쉬운 말로 손에 떡이 가득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떡을 좇아가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몸뚱이를 배부르게 해 주지 못해요.

몸뚱이를 배부르게 하는 것은 떡이지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에 복을 주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겁니다.

이 일을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하면 사단의 종들이 해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계 16:12-16=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江)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靈)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靈)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靈)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그러자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 버립니다.

강물이 마르니까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지요.

동방의 왕들은 이스라엘의 적이에요.



신약식으로 말하면 교회의 적이에요.

교회의 적이 누구인가요?

마귀의 세력입니다.

뱀의 후손들입니다.



언제 뱀의 후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활개를 치는가요?

말씀이 사라질 때에요.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일을 하세요.



말씀이 사라자면 성령의 역사도 사라져요.

말씀이 사라지니까 교회 안에 각종 더러운 영들이 역사하기 시작을 한 겁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의 영이라고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13-14=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靈)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靈)이라”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지요.

더러운 영이란 말은 거룩한 성령과 반대 되는 말로서 거짓 영이란 말입니다.

악령이라는 뜻입니다.



계시록 13장에 용이 나오고, 짐승이 나오고, 거짓 선지자가 나오지요.

이 놈들이 무엇으로 미혹하던가요?

땅에 것으로 미혹해요.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무어라 하던가요?

“예수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라고 하잖아요.



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응수했나요?

“마귀야 내가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웅이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

이걸 한마디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땅에 짐승이 무엇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던가요?

이적으로 사람들 마음을 훔치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시한 이적이 뭔가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라는 거지요.



뛰어 내리면 누가 받쳐 준다고 하나요?

천사들이 받쳐 준다고 하지요.

이러한 것을 이적이라고 해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도 다 이적에 속한 것이에요.



여기에 누가 말려드는가 하면 말씀이 없는 자들이 말려들어가요.

육에 속한 자들이에요.

땅에 짐승이 이적으로 미혹해서 무얼 하던가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고 666 짐승표를 받게 하지요.

666 짐승표로 무얼 하나요?

매매하잖아요.

떡을 사잖아요.



애굽의 열 가지 재앙 때 개구리가 어디에 들어가던가요?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가지요.

이것은 애굽의 양식을 말해요.



애굽의 양식을 한마디로 떡이에요.

그러니까 더러운 개구리 영들은 땅의 신인 뱀의 영인 겁니다.

뱀인 귀신의 영은 세상 것을 주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입에서 나오는 세상 것을 추구하는 기복주의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진리의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밤에 울어요.

개구리 영이 교회 안에 들어 왔다는 것은 교회가 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가치로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성도 안에 하늘에 소망은 없고 땅에 것만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니까 세속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러해요.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돈의 가치로 세워졌어요.

교회가 하늘에 가치를 버리고 세상 가치를 택하였어요.



말씀을 버리고 떡을 택했어요.

말씀을 버리자 기근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말씀을 버리니까 성령의 역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니까 마귀가 일곱 귀신을 데리고 진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모스를 4장과 8장을 봅시다.



암 4:1-8=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8:1-14=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2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마리아 산에 “바산에 거하는 암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고 하지요.

바산은 요단 강 동편의 헬몬 산과 길르앗 산지 사이에 위치한 산이에요.

이곳은 푸른 초장이 있어서 목축하기에 매우 좋아요.



그래서 바산에 짐승들은 모두가 살진 것만 생산이 되었어요.

지금 아모스는 타락한 제사장을 바산의 암소라고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므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이에요.

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고 하니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 먹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밝히는 목사들이 교인들 주머니를 강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어요.

거기에 벧엘이 있어요.

벧엘이 어떤 곳인가 하면 짝퉁 성전이 세워진 곳이에요.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나라를 둘로 나누어 가진 겁니다.

르호보암은 남쪽 유다 왕이 되고,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요.

남쪽 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북쪽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중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여로보암이 반역을 하고 벧엘에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는 레위사람들 대신 일반인들로 제사장을 세우고 남쪽 유다와 7월 절기를 8월로 절기로 변경시켜서 지켰어요.

이건 짝퉁이에요.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짝퉁 성전을 짓고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지내는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벧엘 성전 문 앞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하지요.

그러다가 이단 소리 듣고 나중에는 옥에 갇히는 일을 당합니다.



아모스가 지금 그 벧엘 성전을 향하여 소리치고 있는 겁니다.

“야! 이 짝퉁들아!”

“너희들이 백성들의 고혈로 산해진미를 쳐 먹으면서 왕 노릇하고 있다” 는 겁니다.

바산의 짐승들은 모두가 살찐 놈들만 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에 돈 많은 사람들만 모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산 바산의 암소들을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 유명하고 돈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 목사들을 말해요.



이들은 그들의 돈과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아모스가 지금 이 시대로 말하면 “ 세상 가치로 물든 대형교회 목사들아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암소들이라고 할까요?

이건 사마리아인들의 배경을 알면 이해가 쉬워요.

사마리아 사람은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고 난 후 앗수르가 통혼(通婚) 정책을 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결혼하여서 생겨난 민족이에요.



이건 마치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서 네피림을 낳은 것과 같아요.

네피림은 거인 족이에요.

거인 족이란?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의미로 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들을 아모스 8장에서는 한 광주리의 여름 실과라고 합니다.

여름 실과란? 추수 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교회를 추수하면 어찌 될까요?

그동안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누리던 호사가 일순간에 망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궁전의 노래가 애곡(哀哭)으로 변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오늘 본문 다음 장에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7-18장 음녀 이야기로 나타나요.

음녀가 음행의 포도주로 여황처럼 사치하고 연락을 누렸는데 하나님께서 맷돌을 바다에 던지듯이 일순간에 멸망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자 거기에 빌붙어서 왕 노릇하던 자들이 애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일곱 대접으로 심판하는 것이 다음 장인 음녀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싸웠어요.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서 타락케 하였거든요.

그래서 종말에도 하나님은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은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거기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백성들이 있는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아마겟돈 전쟁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에는 세상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적인 전쟁이고 영적 전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혼합주의 적그리스도 세력과의 전쟁이에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세상 가치관과의 전쟁이기도 해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벌리는 전쟁인 겁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말씀의 전쟁이에요.



어떤 말씀을 듣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관이 정립이 되어요.

사마리아 산 바산의 암소와 같은 육적 목사들의 말을 들으면 떡에 가치로 살게 되고 아모스와 같은 참 선지자들이 외치는 말씀을 듣는 자들은 영적 가치로 살기 때문에 기근 속에서도 말씀에 기갈을 당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성읍은 비가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적 목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요.

하늘에 말씀이 없어요.

오로지 땅에 말만 있어요.

그러한 곳에는 말씀 보다 떡을 중시해요.

이렇게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에게는 말씀에 기갈을 당하게 하십니다.



암 8:11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때가 이르면 기근을 보낸다고 하지요.

기근을 닥치면 말씀에 기갈을 당해요.

말씀에 기갈을 당하면 그 마음은 광야처럼 삭막해져요.



말씀이 사라지면 성령의 역사가 사라져요.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면 짐승이 되어요.

돈 돈 돈 하다가 돌아버려요.



성도에게 있어 가장 큰 저주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말씀을 보아도 성령의 감동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목사에게 가장 큰 저주의 말이 “성령의 감동이 사라진 목회를 해라”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목사이든 성도이든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면 세상 사람과 똑 같아져요.

그럼 마음은 지옥으로 변하게 되어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 할 때는 천국이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지옥이 되어요.

아마겟돈이 되어요.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하르 므깃도” 라고 하는데,

“하르”는 “작은 산”을 의미하는데 이는 “므깃도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므깃도 골짜기에는 늘 전쟁을 하였어요.

그래서 므깃도 골짜기를 전쟁의 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기에 유명한 전쟁이 있었어요.

바로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간에 참 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갈멜산 전투입니다.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 850명과의 전쟁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봅시다.



왕상 18:19-46=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이로다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24 너희는 너희 신(神)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神)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神)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는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神)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 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은 신앙의 전쟁이에요.

누가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를 드러내는 전쟁이에요.

그러므로 이 전쟁은 종말의 영적 전쟁을 예표 하는 전쟁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전쟁이에요.



아합은 이스라엘 제 7대 왕으로 북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에요.

아합은 국내외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이방나라인 시돈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어요.

시돈 왕 엣 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에요.



엣 바알이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아합이 그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이건 여호와의 신앙을 버린 것과 같은 것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을 타락케 한 원흉이에요.



이세벨이 시집을 오면서 그가 섬기던 신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이 섬기던 신인 바알 신상과 아세라 목상을 가지고 와서 아합으로 하여금 경배케 했어요.



이 때 이스라엘의 궁중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과 합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를 친근하게 하려고 바알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에 섞어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라고 하면 안 섬기니까 바알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껍데기는 하나님이고 그 속은 바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섞어 놓은 겁니다.

성질이 다른 것이 섞이면 타락해요.

짝퉁 신앙이 되는 겁니다.



이 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건 영적으로 혼합주의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화가 나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당신이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누가 진짜 신을 섬기는지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몽땅 갈멜산으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와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자신은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겠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누가 진짜 하나님의 종인지를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 머뭇거릴 것이느냐?

여호와를 택하든지 바알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각 자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먼저 바알 제사장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하루 종일 제사를 지냈는데도 소식이 없는 겁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단을 수축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건 백성들의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형식이 다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예루살렘과 다른 짝퉁 신앙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도 날아가요.

형식은 그릇과 같아서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럼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형식과 같아요.

은혜를 담는 그릇이에요.

은혜는 반드시 율법을 통해서 드러나요.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짝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율법은 버려서는 안 되어요.

법이 없으면 은혜도 사라져요.



이 시대 왜곡된 복음 주의자들이 복음을 알면 신앙의 형식을 다 버리고 있어요.

교회의 모임도, 교회의 봉사와 헌신도, 헌금도 다 버렸어요.

복음 아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방인과 같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너지니까 삶이 육신의 편안함을 쫓아가는 방탕과 방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바알 신앙과 같아요.

그래서 엘리야가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겁니다.



그리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엘리야의 제단에 제물들을 다 태운 겁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알이 하나님이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냐! 입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바알로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바알이 어떤 신인가요?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이에요.

쉬운 말로 이 땅에 복을 주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 땅에 복을 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선지자들을 저 절간의 중들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목사들이에요.

거짓 목사들은 우상 숭배적 신앙을 가르쳐요.



우상 숭배적 신앙이란? 무얼 얻기 위하여 신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신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신과 거래하는 것이에요.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이 땅에 복을 주는 신으로 가르쳐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 다 바알 선지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바로 개구리 영이 하는 말이에요.

귀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림으로서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너희를 거짓 것으로 가르친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비가 없어서 타 죽어가던 초목들이 생명을 얻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백성 들 속에 있는 거짓 신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자 가물어 메마른 심령에 은혜의 단비가 부어진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타락된 교회로 나아갑니다.

가서 땅에 거하는 자들과 전쟁을 합니다.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의 교회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알신앙이란? 이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세속주의를 말해요.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자고 하는 기복주의에요.



예수님 초림 때도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와서 백성들이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일을 했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가 바로 바알 종교로 변질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매매하는 장소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므로 헐어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하셨어요.

이젠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은 끝이 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또 다시 교회가 구약교회처럼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교회가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와 같아졌어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바알 신전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종말에 두 증인들이 엘리야처럼 세례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인 기손 시내가 바로 므깃도 골짜기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유브라데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아마겟돈으로 모이는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을 심판하는 갈멜산 전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의 왕들을 하나님의 큰 잔치를 위하여 모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전쟁은 영적 전쟁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 종말에 일어날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을 알 수가 있겠지요.



타락한 교회와 싸우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신앙과 싸우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뭐라고 했나요?

자기만 남고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고 있다고 했지요.

이는 그 당시 백성들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타락을 했나요?거짓 선지자들 때문이에요.



교회의 타락은 항상 목사들 때문에 일어나요.

교인들은 어떤 목사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질이 결정이 되어요.

땅에 속한 목사를 만나면 땅에 것을 추구하고,

하늘에 속한 목사를 만나면 하늘에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한 자들은 땅에 속한 목사를 만나게 하고,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목사를 따르게 하였어요.

유유상종(類類相從)하게 되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가 달라요.

양과 염소는 종자가 달라요.

이처럼 하늘에 속한 성도와 땅에 속한 교인은 그 종자가 달라요.

하늘에 속한 성도는 땅에 말을 하는 목사를 따르지 않아요.

반대로 땅에 속한 교인은 하늘에 속한 목사의 말을 따를 수가 없어요.



이건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지요.

타인의 음성은 목자가 아니므로 듣지 않는다고 하지요.



엘리야가 뭐라고 했나요?

자기만 남고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겨진 7천 명이 있다고 하지요.



이들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겨진 것이 이들의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입니다.

종말에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남겨진 자들이 있어요.

큰 교회 숲에 숨어 있으니까 미미하여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



13-16=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靈)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靈)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靈)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잘 보세요.

13절과 16절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타락한 자들을 말하면서 그 중간인 15절에서 복 받은 자들 이야기가 나오지요.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데 그 중에서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한 자들이 있지요.

이는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당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복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에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말씀에 가치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자기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 밖에 없어요.

성도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로라” 는 고백 밖에 할 말이 없어요.

마귀의 속성은 항상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서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게 최초에 바벨탑 사건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은 힘을 가지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을 봅시다.



신 32:15-18=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여수룬이 살찌니까 여호와를 바로 찼다고 하지요.

여수룬은 예루살렘의 다른 말이에요.

예루살렘은 교히를 말하고 의인화 하면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도가 등따습고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을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더라고 합니다.

왜 마귀를 쫓느냐?

마귀가 땅에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등따습고 배부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부요로부터 시작이 되어요.

우리도 세상에서 잘 살수록 신앙은 떨어져요.

잘 사는 사람치고 신앙 좋은 사람 거의 없어요.

이건 자기 몸뚱이 이길 장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으로 고난 가운데서 지켜져 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힘을 가지면 반드시 타락해요.

이게 로마카톨릭으로 보여주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였어요.

하나님은 타락한 카톨릭에서 적은 무리인 종교개혁자들을 가지고 신앙의 회복을 일으켰어요.

이것은 마치 아합 왕 시절 다 타락한 이스라엘 속에서 7천명을 남겨둔 자들을 통해서 다시 여호와의 신앙을 화복케 하였듯이 중세에 타락한 카톨릭에서 종교개혁자들을 일으켜서 사단의 소굴인 카톨릭에서 개신교를 뽑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개신교가 카톨릭 화 되어가고 있어요.

세속 종교가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더 타락했어요.

돈을 더 밝히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타락한 교회를 음녀로 말하면서 카톨릭과 동의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대형화 하면서 교인들의 신앙을 신전 신앙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요.

마치 큰 교회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교인들을 우맹화 하고 세뇌시키고 있어요.

이게 결국엔 기복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교회가 크면 무조건 정통이고 진리의 집단으로 둔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靈)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기복주의 사상에 미혹당하여서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과 땅에서 왕 노릇 하고자 하는 땅에 속한 자들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겟돈 전쟁을 어떤 장소적인 의미로 보시면 안 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으로 보셔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이단들이 특징은 한결 같이 힘을 모으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 힘으로 자기들 뜻을 관철시키고자 했어요.

결국 힘으로 복음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모독당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이 시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지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것도 대형교회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무엇으로 그랬나요?

자기들 힘으로 그랬어요.

돈의 힘으로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요.



교인의 숫자가 힘이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교인들이 힘이고,

돈 많은 것이 힘이에요.



교회가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버렸어요.

이러한 거대한 힘이 예수님을 죽었어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교회가 힘의 근원이었어요.

그 힘으로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서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배를 타지 않았어요.

항상 작을 배를 탔어요.

그냥 배를 탔다고 하면 될 터인데도,

굳이 작은 배를 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던가요?

겨자씨 같다고 하지요.

이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화려하게 힘 있는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개가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영웅주의 가치와 전혀 다른 미미하게 볼품없이 이루어져 간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힘을 버리는 겁니다.

복음은 화려하게 전해지지 않아요.

항상 미미하게 전해졌어요.

복음은 세상의 화려한 힘에 논리로 사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요.



아모스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나요?

바산의 암소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지요.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나요?

사마리아 산에 살고 있어요.



사마리아 산에서 무얼 하고 있나요?

절기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지요.

이건 교회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산은 세상과 짝한 교회의 모습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이방의 가치로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산의 짐승들이 살찌듯이 세속적 가치로 세워지는 교회들이 부흥을 하고 목사들은 그 속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바로 귀신의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 자들이에요.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리잖아요.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주신 말씀이라고,,

교회의 타락을 말하고 있다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구랑 싸웠나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웠어요.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와 싸워요.

그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바산의 암소들이 있어요.

이들은 육적 가치로 교인들을 끌고 가요.

뱀의 말로 교인들을 떡에 가치로 살게 만들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비를 그치게 하십니다.

어떤 성읍에는 비가 오고 어떤 성읍에는 비가 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땅의 한 부분만 비를 맞게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에 말씀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주 작은 무리들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근이 들어요.

어떤 기근인가요?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지요.

비가 오지 않으면 식물이 죽어가듯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이 죽어가요.

말씀 듣기 싫어하는 자들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영적인 아마겟돈 전쟁은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우리의 신앙은 생명과 같아요.

하늘에 생명은 하늘에 말씀을 먹어야 살아요.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은 하늘에 말씀이에요.

여러분은 비가 내리는 성읍인가요?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내 마음에는 말씀이 살아서 달음질 하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지,

말씀 하나로 만족한지 스스로의 신앙을 확증해 보세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교회 안에 각종 더러운 개구리 영들이 떠들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가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므로 저 말이 하늘에 속한 말씀인지 아니면 땅에 속한 뱀의 말인지 분별하세요.

그 말씀이 나를 땅으로 끌고 가는지 아니면 하늘로 끌고 가는지 확인하세요.

아무나 덥석 받지 마시고 영분별을 잘 하시고 깨어서 믿음을 잘 지켜 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각종 더러운 영들이 교회 안에서 개구리처럼 울어대고 있는 악한 때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여서 미혹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세속적 가치가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주의 은혜로 간섭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항상 비가 내리는 성읍으로 남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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