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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48강.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 (롬 8:16-18)

by coroa 2021. 6. 16.

 

 

[48강.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 (롬 8:16-18)]

-.정낙원 목사

 

롬 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고난 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신앙생활도 다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를 찾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망을 채워줄 종교생활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왔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종교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쉬우면 신(神)을 찾고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신들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들입니다.

그래서 각자 필요한 신을 찾아서 빕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시곤 시내 산에서 참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십니다.

그 첫 일성이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너희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름 하여 우상(偶像)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신과 다투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이란? 우상을 말합니다.

죄인들이 알고 있는 신을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다른 하나님을 선호하고 있어요.

자기 유익을 채워주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깨트리는 일을 벌리십니다.

우리와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고난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께 얻어터지는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징벌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자기 백성들이에요.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을 죽이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우리들에겐 죄가 알려준 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신관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곤 우리의 본성대로 하나님께 구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면 어찌 될까요?

죄인의 세계만 확장이 되겠지요.

그럼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죄인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날마다 전쟁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죄인의 소욕을 거두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우린 여기에 반발을 하고 웁니다.

하나님 너무 합니다!

왜? 나를 이리도 힘들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이 또한 이름 하여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길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길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린 날마다 우리 안에 있던 죄가 고발당하고 하나님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섬기고자 하는 우상성들이 폭로가 되어집니다.

그리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도 예수를 통해서 자기 일신상의 유익을 얻고자 따랐습니다.



어떤 이는 병을 고침 받고자 따랐고!

어떤 이는 떡을 얻고자 따랐고!

어떤 이는 출세하기 위해서 따랐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그 군중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내가 있습니다.

우린 그렇게 예수에게 나아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따르자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전토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나 보다 그 어느 것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구름떼 같이 따르던 무리들이 다 돌아갑니다.

 

인간들은 착각하기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주신 자 이외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는 자들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영역 바깥에 일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시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 밖에 없고!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지 않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 척은 할 수는 있어도 믿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준 사람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안 믿기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 안 믿을래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 믿기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관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믿음을 우리가 관리를 한다고 하면 우린 조석(朝夕)으로 변할 겁니다.

아침에 천당에 있다가 저녁이면 지옥 구덩이에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뚱이의 컨디션에 따라서 예수를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합니다.

몸뚱이가 기분이 좋고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하늘에 별을 따서라도 주님께 바치고자 하지만 몸뚱이 컨디션이 나쁘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기가 싫습니다.

이게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이기지 못해요.

몸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이게 육에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에 한계를 뛰어 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덮쳐오면 육에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우리 육신을 끌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에 이끌려 산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이들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끌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우리 목줄을 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믿음이 이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모두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팔자들입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린 그 길을 꾸역 꾸역 가고만 맙니다.

마치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 등에 법궤가 실려서 끌고 가듯이 우리 등짝에도 예수라는 법궤가 올려져 있어요,

그 예수가 고삐를 잡고 이랴!~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끌고 가십니다.

 

자신이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그 길을 가고야 마는 길이 성도의 길입니다.

울면서 가는 길이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 하셨듯이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띄고 가는 길이 성도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원치 않아도 당하여야 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난의 말씀 앞에서 낙망하고 또 울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주소서! 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오냐! 하고 옮겨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은혜를 주어서 우리를 살살 꼬여 그 쓴 잔을 꾸역 꾸역 마시게 하시고야 맙니다.

 

그게 하늘에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뉘라서 이 사랑을 알까요?

뉘라서 이 깊디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릴까요?

 

오늘 한 번 그 깊디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려 봅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 고난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찬송과 기도가 터져 나오는 시간들이 되시길 소망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난과 영광이라는 극과 극인 말이 나옵니다.

 

고난과 영광은 서로 상반된 내용입니다.

고난은 싫은 것이고, 영광은 좋은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고, 영광은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등 따습고 배 부른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배를 위하여 신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등 따습고 배 부름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들을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십자가의 원수냐?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육신을 위하여 사는 자란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배(육신)를 위한 삶을 땅에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땅에 일이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땅을 떠나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땅에 일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일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치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겐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하여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린 그에 나라와 그의 의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땅에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걷어 부치고 간섭을 하십니다.

우리의 원대로 두지 않고 우리의 원함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여기서 우린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육신의 안락함을 꿈꾸고자 하던 죄들이 폭발을 합니다.

죄성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터져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길입니다.

애굽 백성과 똑 같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버림당하지 않고 끝까지 가나안으로 인도받는 것은 창세전에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그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로 맺은 그 긍휼의 언약 때문에 애굽 사람들과 똑 같은 짓을 해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서 약속에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에 사랑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광야 길을 가면서 많은 아픔을 당합니다.

자기 안에 탐욕이 빼앗기는 아픔을 당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이 광야 길과 같이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본성에 반하는 길을 가라고 간섭을 하시니 우리에겐 고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도에게는 현재는 고난이 주어지고, 장차는 영광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반대의 일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건 믿음이 없으면 수용할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숭이에게 사과를 주면서 아침에는 3개를 주고 저녁에는 4개를 준다고 하자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준다고 하자 좋아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인간은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당장 좋은 것을 원하지 나중에 좋은 것을 원하지 않아요.

현찰이 좋지 약속 어음은 싫어해요.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 같은 삶을 원해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천국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먼저 주고 나중에 천국을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도 천국을 주고 나중에도 천국을 달라고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주여 천국을 주옵소서! 라고 외칩니다.

어떤 사람은 밤이 맞도록 외치고!

어떤 사람은 굶어 가면서 외칩니다.

천국을 안주면 예수 안 믿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교회 안 다니겠다고 공갈을 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살아서도 축복 받고 죽어서도 천국에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목사들이 대신 빌어 주겠다고 합니다.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합니다.

이건 무당이지 목사가 아니에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비나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빌고 또 비는 일들이 불철주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절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보이는 이 세상에 복을 주시지 않았어요.

 

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요.

이름 하여 “하늘에 신령한 복”입니다.

글자 그대로 하늘에 신령한 복이에요.

땅에 복이 아니고!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나왔어요.

그럼 하나님 나라가 진짜이고 이 세상은 가짜에요.  

가짜에 속한 행복은 가짜이지 진짜가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가 가짜에요.

그럼 이 세상에는 참 행복은 없는 겁니다.

 

가짜 속에는 행복이 없어요.

행복은 진짜 속에만 있어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행복이 없는 가짜 세계를 만들었어요.

 

왜인 줄 아세요?

이는 가짜를 가지고 진짜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가짜에 있는 자들을 예수를 통해서 진짜 세상으로 부르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가짜인 이 세상에는 참 행복이 없고 오직 진짜인 하늘나라에게만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이 가짜이고 이 세상 속에는 참 행복이 없고 참 행복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을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요.

믿음을 왜? 주셨는가 하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여주려고 주셨어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려고 주었어요.

 

뭔가 있기는 있는데 죄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감지(感知)되지 않아요.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실상이 있어요.

그런데 안 보여요.

죄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실상을 볼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인데 말이죠.

그래서 죄인들은 가짜를 실상인줄 알고 살아요.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산단 말입니다.

저 세상 보다 이 세상이 좋다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하고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이 좋다는 말이에요.

우린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믿음이 오니까 이 세상은 가짜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야! 내가 지금까지 허상을 쫓아가고 있었구나!

이건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의미를 땅에서 하늘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참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땅에 것을 구하지 않고 하늘에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저 세상으로 가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보니까 자연히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합니다.

나그네의 길이란 고난의 삶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왜? 고난당하여야만 하는지!

또한 성도에게 있어 고난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해요.

 

지난 시간 우리는 성도는 “영으로 인도를 받는 자”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영으로 인도 받는다 함은 육에 법이 아닌 “영에 법으로 인도 받는다”는 말입니다.

육에 법이란? 자기 행위로 판단 받고 그 판단 받은 죄값을 자기가 치루어야 하는 것이고!

영에 법이란?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 인하여 정죄당하지 않고 은혜로 판단 받는 것을 말합니다.

 

“육에 법”은 정죄와 심판이 따르지만,

“영에 법”은 은혜로서 죄인을 용서와 사랑으로 덮어줌을 입기 때문에 정죄와 심판이 없습니다.

영에 법으로 인도 받는 성도가 정죄와 심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대신 정죄와 심판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에게 받은 것이에요.

 

이러한 법칙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이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시고 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결코 정죄함이 없나요?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독자로 보시지 않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에서의 옷에 향취를 맞고서 축복을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장자를 축복한 것이에요.

누가 장자냐?

장자의 옷을 입은 자가 장자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옷을 벗어 주시지요.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입고 있던 장자의 옷이에요.

이 장자의 옷을 자기 백성들에게 벗어 주었어요.

 

어미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듯이!

예수님이 물과 피를 쏟으시고 교회를 낳았어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곳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교회를 낳았어요.

그 교회 위에 예수님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셨어요.

교회는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옷이 바로 장자의 옷이에요.

 

우린 그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가 입고 있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 예수님의 옷을 보시고 축복(구원)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세우신 구원의 원리에요.

하나님은 이러한 원리의 창세전 언약을 세우셨어요.

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을 탁 깨 보면 그 안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어요.

율법과 은혜가 있어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 두 과실과 같아요.

먹으면 죽는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과 같아요.

 

언약도 죽이는 언약과, 영생하는 언약이 있어요.

하나님은 이 두 언약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자기 백성에게 두 언약을 주었어요.

먼저 죽이는 언약을 줍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라는 옛 언약은 모든 인간을 죄인 되게 하는 언약이에요.

온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 버려요.

너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야! 라고 고발하여서 할 말이 없게 한단 말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서 죽이는 일을 해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지켜도 그 안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율법은 선악과와 같아요.

선악과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그러니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고 하여도 인간은 영생 할 수가 없어요.

 

영생은 생명과 속에만 있어요.

영생 하려면 생명과를 먹어야 해요.

그러니까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어도 죄에요.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과 살려면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생이 생명과 속에 있어요.

그러므로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모두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안 따 먹었는데요!” 라고 하여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묻지 않고 생명과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묻고 있어요.

그 생명과가 예수에요.

예수 안에 영생이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묻는 것은 너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너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나쁜 짓한 것이 죄가 아니고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악이고 죄에요.

 

영생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긴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신 거에요.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라는 말은 예수 믿으란 말과 같아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 속에는 영생이 없어요.

영생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만 있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 안에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없고 예수 믿는 것만 있어요.

우리 행위가 낄 자리가 없어요.

 

이러면 꼭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막 살아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는 우리 공로가 없어요.

오직 은혜에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얻어요.

여기에 그 어떤 것도 첨가 될 수가 없어요.

물론 인간의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첨가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착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착함이 될 수가 없어요.

죄의 산물일 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義)냐! 불의(不義)냐! 하는 싸움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의는 예수 안에만 있지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막 사나! 막 안 사나! 차별이 없어요.

마치 인간 앞에서 바퀴벌레의 막 사나 막 안 사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죄인의 행위는 그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에요.

막 살아도 죄인의 행위이고 막 안살아도 죄인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되는 일에는 우리가 할 일이 없어요.

이건 예수님이 혼자서 하실 일이에요.

예수님 십자가에서 홀로 다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롭다 함을 입습니다.

 

그러나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싸워야 할 싸움이 있어요.

이건 은혜 안에서 사는 거에요.

이건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에요.

이건 의를 위한 싸움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로서 은혜 안에서 살아가면서 죄들과 싸워야 하는 싸움이에요.


이름하여 육신의 소욕과의 싸움이에요.  

우리는 평생 육신의 소욕과 싸워야 해요.

육신의 소욕은 죄의 산물이에요.

죄가 육신을 볼모로 역사해요.

그러니 우리 몸은 죄를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몸이 없으면 죄도 죽은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이 살아 있는 한 죄도 우리 몸을 가지고 역사를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런 몸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주십니다.

이제부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움을 해요.

 

이 싸움을 게을리 하면 안 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육신의 소욕들을 말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고서는 징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징계가 왜? 필요하냐?

어그러진 길을 가고 굽을 길을 가고 무릎이 연약해 지기 때문이에요.

즉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방탕과 방종과 게으름을 피운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몸에 사욕을 쫓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에 영광을 위하여 드리라는 말이 이 말이에요.

우리 몸에서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의 흔적들이 나타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을 그려내세요.

이게 육신의 소욕을 멀리하고 성령을 소욕을 쫓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세요.

그러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구원 받은 성도들이 무엇과 싸웠는가요?

어떻게 살았는가?

하나 같이 주님께 붙잡혀서 살았어요.

 

자기 삶이 차압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어디에 내 맘대로 막 산 사람이 있나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렇게 가르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복음을 말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저는 이들을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라고 해요.

영지주의자들이에요.

 

발람이 누구인가요?

모압 왕 발락에게 뇌물을 받고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한 거짓 선지자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입을 막고 저주치 못하게 하고 축복케 하였어요.

 

그러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는 일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을 행하게 하고 모압 신을 섬기게 하는 일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춤추는 여인들을 등장 시켜서 그들을 미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여기에 넘어 갔어요.

그리하여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고 만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은 말하는데 육신의 소욕을 부추기는 것과 같아요.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곧 육신의 소욕을 부추기는 음행케 하는 말이에요.

결국 복음을 자기 몸에 사욕을 채우는데 면죄부로 사용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보아요.

성령을 받지 못하니까 발람처럼 막살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오지요.

거기에 보면 버가모 교회가 나옵니다.

이 버가모 교회에 보면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을 봅시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발람이 이스라엘 앞에 뭘 놓았나요?

올무를 놓았다고 하지요.

 

발람이 놓은 올무가 뭔가요?

음행이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에요.

여기서 음행이란? 진리를 간음케 하는 것도 되지만 복음을 빙자하여 육신의 사욕을 쫓아가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우상에 대하여는 기드온의 에봇을 참고 하세요.

그럼 이 시대 에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음행이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나 다 영적인 의미에선 동일한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장차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언해 놓았어요.

그러니 너희는 성경을 통해서 이런 자들이 일어나거든 거기에 미혹당하지 말라고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를 해서 성도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일이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겠지요.

발람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일어나야 하겠지요.

그럼 성경을 아는 성도는 경계를 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이건 아니라고 싸운단 말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요.

모든 교회가 그 가운데 속해 있어요.

그러니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경고한 내용들이 지금 교회 안에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위장이 되어서 가르쳐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분별을 해요.

그건 주님의 음성이 아니고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과 사귐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성경을 보세요.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그 누가 복음을 공교하게 각색하고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그럴 듯하게 논리를 만들어서 말한다고 하여도 성경 속에 믿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세요.

우리에겐 성경이 거울이지 그 어떤 말 잘하는 사람이 거울이 아니에요.

 

우리는 내 맘대로 살도록 되어 있지 않아요.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이 내 맘대로 살도록 가만 두지 않아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띄고 간다고 했잖아요.

이건 베드로 네 맘대로 살도록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막 살고 싶어도 막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주인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고난이냐!

내 맘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고난인 거에요.

 

우린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데 예수가 가만 두지 않고 자꾸만 간섭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고난이고 아픔인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아파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구원이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주어졌다는 말이에요.

구원은 예수님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내 행위를 의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죄인 된 자들을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살려 내는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 속에는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죽이는 옛 언약과 살리는 새 언약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순이 아니고 서로를 드러내는 것이에요.

생명을 드러내고자 죽음을 준 것입니다.

은혜를 보이고자 법을 준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이에요.

천국이 있으므로 지옥이 있고,

지옥이 있으므로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서로 짝이에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짝이에요.

그런데 이 두 언약은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세요.

이게 중요해요.

 

옛 언약도 예수님이 이루시고,

새 언약도 예수님이 이루세요.

왜냐하면! 언약의 대상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언약은 우리가 생기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이에요.

 

그러니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룰 것이 아니에요.

우린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에요.

그냥 언약을 혜택 입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혜택을 입는 거에요.

 

그래서 창세전 언약의 하이라이트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죄인을 구원한 것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어린양에게 찬송을 한다고 하지요.

모든 영광과 존귀를 어린 양에게 돌린다고 하지요.

왜? 어린 양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까?

이는 모든 일을 어린 양이 홀로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구원을 예수님이 시작을 하셨고 예수님이 끝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기판에 말이에요.

 

예수님이 장기를 두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면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장기를 두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다고 했지요.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 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이루시는 예수가 있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그리스도가 있어요.

육체로 오신 예수와,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있어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가 있고, 은혜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요.

이건 예수가 두 분이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두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 죄를 고발하고 죽이는 일을 하세요.

율법 역할을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곧 죄인들에게는 율법과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 역할을 하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하지요.

어둠에게 있어서 빛은 곧 율법처럼 자기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이라는 이 세상에 오심 자체가 어둠에게는 율법적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인들 세계에 의인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죄 아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난 자는 다 죄인이에요.

 

의인은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만 의인이에요.

예수님이 세상 바깥에서 오셨어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세상 바깥에서 오신 예수 앞에서는 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 앞에 서면 우리 죄가 낱낱이 밝혀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하고서는 예수님이 너! 나 하고 같이 죽자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고발하고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몽땅 안고 논개처럼 물에 풍덩 빠져서 죽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인 줄 알았는데 부활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이 세상이 다 인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세상 사람으로 부활을 했어요.

그리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어요.

그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셨어요.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죽었던 자들을 살려 내십니다.

 

이걸 성령으로 거듭 났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옛 언약에 속하지 않고 새 언약에 속하였어요.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적용을 한단 말입니다.

 

새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죄값을 다 치루었다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 값을 예수님에게 이미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으로 인도 받는 삶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영으로 인도 받는 삶이 세상에서는 고난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사람들이 싫어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후사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영으로 인도 받는 성도와 육으로 사는 사람들 간에는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서로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은혜로 사는데 육에 속한 자는 법으로 살아요.

예를 들어서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도 성도는 은혜로 적용을 받아 용서받지만, 육에 속한 자는 법으로 적용 받아서 정죄를 당해요.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이 은혜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넌 뭐냐?

넌 뭔데 편애(偏愛)를 받아!

왜? 우리하고 달라!

그러면서 핍박을 하게 되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영으로 인도를 받은 하나님의 후사들이 받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요.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영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가 있어요.

법에 속한 자와, 은혜에 속한 자가 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육으로 난 아들과 약속으로 난 두 아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자로서 아담 안에 있는 자이고,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로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요.

이스마엘은 법에 속하였고, 이삭은 은혜에 속하였어요.

 

이게 교회 안에도 그대로 배치가 되어서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법에 속한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있어요.

율법으로 사는 자와, 은혜로 사는 자가 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있어요.

쉬운 말로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 안에 있는 자와, 예수 안에 있는 자를 달리 대하십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법으로 대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은혜로 대합니다.

법으로 대한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고,

은혜로 대하신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아담 안에 있는 자는 행위로 판단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행위로 판단하지 않나요?

이는 아담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예수라는 보혜사가 없으므로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라는 보혜사가 자기 백성을 변호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자기 죄를 대신 담당 해 줄 보혜사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감옥에 구속(拘束)을 당합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라는 보혜사가 있어요.

예수라는 보혜사가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주셨기 때문에 무죄방면(無罪放免)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세상 적으로 보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와 같아요.

즉 예수가 있으면 무죄(無罪)이고, 예수가 없으면 유죄(有罪)입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로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집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판단 받는 것을 영으로 인도 받는 삶이라고 합니다.

이걸 영에 법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러한 영에 법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세상은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법으로 다스려요.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 때 뱀도 쫓김 당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뱀을 일컬어 옛 뱀이라고 하며 또는 사단 마귀라고 합니다.

 

범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죄와 사망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와 사망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왕노릇하고 있어요.

 

마귀는 인류역사가 시작이 된 이래로 모든 인간을 법으로 다스려 왔어요.

법은 죄인을 죽이고자 주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이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하고!

이렇게 고발당한 자를 죄와 사망이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는 죄인에겐 죽음뿐이에요.

죄인에겐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법에 나라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세상에서 오셨어요.

하늘나라는 죄가 없어요.

 

거기에는 산 자들이 사는 곳이에요.

의인들이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는 율법이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하늘나라에는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평강의 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은혜의 나라에요.

 

법과 은혜는 서로 상충(相衝)해요.

 

서로 하나 될 수가 없어요.

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법은 사망으로 왕 노릇하지만, 은혜는 생명으로 왕 노릇해요.

그러니 법 아래서는 무조건 죽지만, 은혜 아래서는 무조건 살아요.

 

이렇게 되면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귀는 법으로 죄인을 죽이는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죄인을 은혜로 살리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나라 방식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 방식으로 다스리세요.

 

그러자 세상에 속한 자들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들과 다르게 대하느냐 입니다.

이러한 충돌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 성도의 고난인 것입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경건이란? 문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착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법칙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영으로 인도 받는 것을 말해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성경이라는 문자 속에 성령이 감동을 하였다는 말은 문자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이에요.

그러니 성경의 모든 문자 속에는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경건이라는 말 속에도 영적인 경건에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이 생각하는 경건과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경건이 다르단 말입니다.

비록 문자적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그 경건의 의미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경건에 의미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경건과 다르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경건을 인간의 반듯한 행동을 말해요.

한마디로 윤리 도덕적으로 착한 삶을 말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착한 삶을 경건이라고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행위와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어떤 삶을 가지고 경건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심판 하느냐?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로 해요.

 

너 소속이 어디냐!

너 어느 권세 아래 있느냐!

네 주인이 누구이냐! 로 판단해요.

 

아담 안은 무조건 죄이고!

예수 안은 무조건 의에요.

아담 안은 무조건 불경건이고!

예수 안은 무조건 경건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하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법으로 사는 자는 고난을 당한다는 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영으로 인도 받는 자는 고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나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들은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요.

왜? 마귀가 영으로 인도 받는 성도들을 핍박 할까요?

 

이는 세상의 법으로 보면 반칙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잘못한 놈은 반드시 징벌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죄인은 죄값으로 지옥을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면서 죄값을 용서받는단 말입니다.

막말로 아담 안에 있는 자나 예수 안에 있는 자나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지옥으로 보내는데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천국으로 보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겐 불공평하게 보여요.

이러한 불공평을 하나님에게는 따질 수가 없으니까

그 적개심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퍼 붓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게 최초로 나타난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에요.

가인이나 아벨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냈어요.

둘 다 가장 귀한 것으로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편애 하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어요.

가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받으면 둘 다 받든가!

아니면 받지 않으려면 둘 다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기에 적개심이 드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벨을 죽임으로 자기 안에 악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아벨에게 퍼 부은 것입니다.

결국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마는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새 언약을 말하면 핍박을 받아요.

행위를 말하는 자에게 은혜를 말하면 핍박을 해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는 성도는 세상에서 미운 오리와 같아요.

이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요.

다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다름을 드러내려고 성도를 구원 하시고서도 세상에 그대로 두신 것입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악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세상의 악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반기(反旗)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왜? 불순종합니까?

자기 맘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반항을 할까요?

이는 자기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는 말은 곧 자기 주체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살지 않고 나로 산다는 말이에요.

이게 죄에요.

 

인간은 원래 주체가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어요.

 

자기 생각이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어요.

피조물에겐 자기 생각이 없어요.

그냥 창조주가 살게 하는 대로 살면 되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창조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 했어요.

그냥 예수를 위한 도구에요.

여기에 무슨 자기 생각이 있겠어요.

없어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인간은 어떤 목적에 의하여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요.

쉬운 말로 인간은 예수님의 도구로 창조가 되었어요.

 

도구에게는 자아가 없어요.

그냥 주인이 사용하는 대로 따를 뿐이에요.

이걸 순종이라고 해요.

 

만물이 그 안에 섰다는 말은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도구에겐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불순종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어요.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말았어요.

죄가 자아를 갖게 하고 자아가 생기자 자기 주체를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주체가 생기자 이제부터 모든 것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은 왜? 그딴 식으로 일을 합니까?

“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항명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인 겁니다.

 

우리 자신을 보세요.

우리도 누군가와 사귐을 가질 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과만 사귀잖아요.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잖아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편해요.

사람은 불편한건 싫어해요.

본능적으로 불편한 것은 피하고자 해요.

그래서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 생각을 남에게 인정받고자 해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어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자기 사랑 때문이에요.

 

인간은 사랑 받지 않으면 못 살아요.

무슨 일을 해도 사랑받고자 해요.

그 사랑 받음이 상대방이 내 생각에 동의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주체 챙기기에요.

 

그래서 남들도 나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래요.

부부 간에도 그러하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친구 간에도 그러하고 사랑하는 사람 간에도 그러해요.

 

학문이든!

사상이든!

신앙이든!

 

모든 면에서 우리는 나와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과 사귐을 갖고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과는 사귐을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모두가 죄 때문이에요.

 

죄인은 자기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면 사귐을 가질 수가 없어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 싫어요.

 

그런데 이것이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동일한 행동을 해요.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면 밉듯이 나도 남에게 미운 짓을 해요.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그래 맞아 라고 동조 하지 않고 내 생각을 개진합니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하잖아요.

그리하여 내 생각이 그에게 관철당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잖아요.

 

서로가 서로의 주체를 행사하기 때문에 죄인들 세계에서는 항상 분쟁이 일어나고 다툼이 생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요.

같은 색깔의 신앙을 추구한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자아라는 주체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 주체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주체 챙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 챙기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고발을 당한단 말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체가 차압당하는 식으로 순응하는 반면에, 불신자들은 반발하는 것으로 반응을 합니다.

순응을 순종이라고 하고, 반발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자와 불신자 간에는 항상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은혜로 보는데, 불신자는 법으로 보아요.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법으로 행사하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율법을 은혜로 감싼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죄인을 법으로 정죄하지 않고 은혜로 감싸고 있단 말이에요.

 

이건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반칙이에요.

죄인을 벌주고 의인을 상 주어야 율법이 바로 서는데 예수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감싸면서 도리어 잘난 자들을 혼내고 있단 말입니다.

 

쉬운 예로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이런 여자는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적 정신으로 살리고 있어요.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자신들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예수를 가만 둘 수가 없지요.

그럼 자기들이 악당이 되잖아요.

그럼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내가 의인으로 남기 위해서 예수를 죽여야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이름으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오해할까봐서 율법의 본질적 정신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흔히들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죽이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바탕에는 살리고자 하는 정신이 깔려 있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누구에게 줍니까?

자기 백성에게 주지요.

 

왜? 줍니까?

이는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왜? 죄를 고발합니까?

살리고자 함이에요.

 

이건 마치 의사가 당신은 암이 걸렸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것과 같아요.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암이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고치라는 말입니다.

암 자체는 죽을 병이지만 의사는 살리고자 암에 걸렸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기 백성들에겐 이와 같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살리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것은 살리고자 함이에요.

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도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에는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걸 육에 속한 자들을 몰라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알 턱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 속에 담긴 그 진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면 싫어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은혜로 살면 욕을 먹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 미움 받음이 고난이에요.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의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에서는 예수님의 삶에 기준이 묻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이 기준이 우리에게 묻어나올 때는 법이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고난에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왜?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고 합니까?

고난당함으로서 너는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표식이에요.

법에 속한 자들이 야! 저 놈은 은혜에 속한 자라고 핍박을 하잖아요.

그러니 고난이 곧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없으면 이상한 겁니다.

그건 문제가 있는 거에요.

 

마귀는 그 속에 예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요.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자는 시비 걸지 않아요.

같은 편이니까요.

 

그러나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자는 가만 둘 수가 없어요.

자꾸만 시비를 거는 겁니다.

자기하고 다르니까 시비 거는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않으니 고난 좀 당한다고 댕댕거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 그거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너! 그거 엄청난 영광인 줄 알아라!

 

산상보훈에서 팔 복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요.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지요.

 

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이는 의에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을 세상이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복 있는 자에요.

의(義)!

 

의란 예수에요.

예수의 정신으로 살면 핍박 받아요.

그런데 그게 복이에요.

보통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고 감탄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제발 좀 아세요.

 

쉬운 말로 인생 70년 80년 고생하고 영원토록 평안하게 살잖아요.

아니~ 이런 장사가 어디 있어요.

기껏해야 예수 30년 40년 믿고 영생하는데 이런 복이 어디에 있나요.

그것도 어디 예수를 제대로 믿기나 하나요?

순 엉터리로 믿다가 가잖아요.

 

하나님께서 눈물 없고 고통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는 천국을 주시려고 잠시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애통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아프고 힘든 일이 있거들랑 하늘 한번 쳐다보고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다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죽고 싶도록 아픈 고통도 지나가는 것이에요.

머물러 있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머물러 있는 고통을 주시지 않아요.

시험 당할 즈음에 이미 피할 길도 예비해 두셨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죽여주어야 해요.

그 놈들이 안 죽여주면 큰일 나요.

천국에는 마귀에게 죽은 자들이 가고!

지옥에는 하나님에게 죽은 자들이 가요.

그러니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핍박을 하면 고맙다고 해야 해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환란 받는 너희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너희에게 환란을 주는 자들에겐 환란으로 갚으신다고 하셨어요.

안식을 위하여 잠시 환란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란을 주는 자들에게 감사하여야 해요.

 

전 솔직히 예전에는 누가 복음을 인하여 욕을 하면 엄청 화가 났어요.

그런데 이제는 덤덤해요.

하도 당하다 보니 이젠 내성이 생겼나 봐요.

어떤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당신은 성화를 부정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도 있는데 십자가 이야기만 하느냐고 욕을 엄청 해요.

 

그땐 속이 부글부글하지만 허~ 허! 헛기침 하면서 에이~ 하고 나면 금새 마음이 평온해져요.

그럼 속으로 그래요.

그래 당신이 나를 증명해 주는구나! 라고 해요.

 

스데반을 보세요.

자기에게 돌 던져 주는 자들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해 주세요! 라고 관용과 용서가 나오겠어요.

 

스데반만 되는게 아니고 여러분도 되어요.

우리 모두는 이런 사람으로 이런 자리에 가도록 부르심을 입었어요.

지금은 안 되더라도 낙망하지 말고 조금 있으면 그리로 가 있을 겁니다.

주께서 반드시 그 자리로 인도 하세요.

 

우리 안에 성령이 폼으로 와 있지 않아요.

이 성령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 시켜 주시려고 때론 고난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붙박이처럼 살까봐서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여서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자꾸만 헝클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후사에게만 주어져요.

그러니 고난이 오면 짜증 낼 것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으로 보시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솔직히 고난 받기 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고난이 닥칠 때마다 아! 나는 하나님의 후사이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구나 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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