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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34강. 뱀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 (계 12:1-17)

by coroa 2021. 3. 7.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4강. 뱀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 (계 12:1-17).-

-.정낙원 목사

 

 

 

오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쟁이란? 신앙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 세상에서 일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단도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제가 종종 창세전 언약을 드라마로 비유하는데 이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스스로 출연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의 허락 하에 출연을 하고 짜여진 각본에 따라 대사를 하고 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드라마를 위해서 셋트도 만들고 배우도 캐스팅하고 시나리오도 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지시 하에서 드라마는 완성이 되어집니다.

캐스팅 된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합니다.

 

이 세상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만물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드라마에 캐스팅 된 배우와 같습니다.

 

모든 드라마가 선악의 구도로 짜여서 펼쳐지듯이 이 세상 역사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투쟁하는 것으로 전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을 후손을 나누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회 때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하듯이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부활하여 승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하늘에서 용과 전쟁을 하여 이기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이 세상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로 대상만 다를 뿐입니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용과 미가엘의 전쟁이었다면 이 세상에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예수님이 자기 수하들을 가지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하는 대결장입니다.

이는 마귀와 예수님을 대리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이 하늘에서의 전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예수님이 용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정반대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이기고 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말입니다.

이 세상 관점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사단에게 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늘에 관점에서는 이긴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마귀는 이기고도 하늘에서는 진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 적으로 보면 진 것인데 하늘에서는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전쟁이 이 세상에서는 역리이고 역설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의 꿈처럼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먹힘 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아셔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 먹힘 당하도록 해 놓았을까요?

왜, 역리와 역설로 다스릴까요?

이는 이 세상이 죄 아래 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이라는 유업을 주시려고 지옥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지옥을 모르고서는 천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버려짐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설명하고자 버려짐을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그 후손들을 이방의 객으로 살게 합니다.

그리곤 찾아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지고 나중에 건져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역설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처절하게 버려지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국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봅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에 가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국에는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왜, 눈물을 닦아 줍니까?

이는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긴 자로 산 것이 아니라 진 자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성공한 자로 산 것이 아니고 비천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누가 가느냐?

 

예수 때문에 눈물 흘린 자들이 갑니다.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하고,

예수 때문에 애통하고,

예수 때문에 애곡하고,

예수 때문에 아파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이 세상에서는 역설로 숨겨 놓으셨습니다.

하늘로 나지 않은 자는 모르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는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비밀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만 세상에게는 숨겨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여서 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늘 백성이고 저희는 땅에 백성입니다.

너희와 저희의 전쟁이야기가 성경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상극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 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천지창조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그러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양과 염소처럼 종자(種子)가 다릅니다.

양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고 염소는 사단에게 속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심판 하실 때 양은 천국으로 염소는 지옥으로 각각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기를 두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장기판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같습니다.

장기판에는 초(楚)나라 군대와 한(漢)나라 군대가 싸웁니다.

그런데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이건 마치 하늘과 땅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늘에 의한 것들입니다.

이 땅은 하늘에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뜻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졸지에 사업이 망하고, 자식들이 죽어나가고,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급기야 온 몸은 병들어 죽어가게 됩니다.

 

욥과 그 친구들은 이러한 사실을 하늘에 뜻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욥과 그의 친구들은 왜 이러한 일들이 착한 욥에게 일어났는지 인과응보(因果應報)론 적으로 그 원인을 찾고자 설전(舌戰)을 벌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필시 네가 하나님께 어떤 잘못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욥이 당하는 고난은 필시 욥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재앙을 당하니까 빨리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이런 고난을 당할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네가 알지 못하는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서 회개해라!

욥은, 아니다 나는 벌 받을 일들을 하지 않았다!

나는 죄가 없다!

그래서 억울하다! 고 합니다.

 

결국 욥도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그들과 같은 논리에 빠져 들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벌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논쟁이 32장까지 진행 됩니다.

 

이러할 때 엘리후가 나타나서 욥이 당한 고난을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 욥이 당한 고난을 창조의 사건으로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습니다.

악어처럼 인간들을 해하는 것들도 있고 나귀처럼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악어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귀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비도 하나님이 내리고 우박도 하나님이 내리신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비는 좋은 것으로 여기고 우박은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비나 우박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악어도 좋은 것이고 나귀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어를 가지고 일을 할 때도 있고 나귀를 가지고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악어나 나귀나 비나 우박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려가는데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귀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 창조이야기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펼쳐 보이는데 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욥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욥을 장기판의 말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는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주인의 의도에 따라서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자기 입을 닫고 유구무언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욥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인과론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서 찍소리 못하고, 잘못한 것이 없으면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면서 따지고 듭니다.

 

죄가 뭐냐?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질책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것이 뭔가요?

욥이 무슨 근거로 자기는 의롭다고 여깁니까?

그건 자기 행위입니다.

 

왜 자기 행위로 의롭다고 여긴 것이 죄가 됩니까?

이는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이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강자지가 되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가 되듯이,

죄인이 자식을 낳으면 죄인이 됩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이 근본을 모르고 자기의 착한 삶을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자식들이 생일 날 그 기쁨으로 하나님을 잊을까봐서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욥은 이러한 자기의 행위가 의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난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까지 탄핵하는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나타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는데 하늘에 계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로 희비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건 마치 사람들이 개미나 바퀴벌레의 선과 악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퀴벌레 세계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개미의 세계에도 선과 악이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바퀴벌레가 착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지 않고 개미가 악한 일을 했다고 벌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세계의 선이고 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퀴벌레와 개미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선이다 악이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개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자기가 하나님께 대한 선한 행위를 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욥이 범사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산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로 여길 땐 악이 됩니다.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자기 잘남으로 가지고 나올 때는 화가 되어요.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의라고 여기면 죄가 되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 것도 의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의는 따로 있어요.

예수그리스도에요.

하나님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만이 의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것으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오는 것을 기뻐하세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의 잘못은 자기 행위로 아버지 앞에 나온 겁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명을 여기지 않고 순종한 것이 결국엔 아버지 앞에 목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덤비는 무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산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의가 되면 악으로 나타나요.

 

자식이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에요.

그런데 맏아들은 그 당연한 것을 자기 의로 삼았어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불효가 뭐냐?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킨 것은 잘한 일이에요.

예수님도 칭찬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 지킨 것을 의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게 저주 받을 죄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의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 자기들은 선한 자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세리와 창기들을 악한 자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이나 동일해요.

다 죄 아래서 난 죄인들이에요.

 

이 사실을 안다면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율법 지킨 것으로 나는 의로운 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비록 율법을 지키고 살아도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하여야 해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이게 신앙이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은 있는데 하나님 앞에 긍휼 구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제사 속에 긍휼을 담으라는 말입니다.

제사 지낸 것을 자랑하지 말고 제사 지내면서 난 마땅히 저주 받아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사는 것은 나 때문에 죽은 흠 없는 제물의 피 흘림 때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교회 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연보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제하고 충성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일 한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을 하게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굴 섬기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교회에 오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우린 누굴 섬기거나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우린 우리 밖에 몰라요.

나 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니까 안 하는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섬기기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연보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에요.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한 일들이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을 자기 의로 삼아서는 안 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어쩌자고 봉사하게 하고, 섬기게 하고, 교회에 충성하게 하고, 연보도 하게 하시나이까 라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는다고 공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앞 다투어 건축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들의 마음속에 건축 헌금할 수 있는 마음들을 주셨나이까 라고 말했어요.

 

역대상 29장을 봅시다.

 

대상 29:1-17=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5 금 은 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6 이에 모든 족장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어른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 감독이 다 즐거이 드리되 7 하나님의 전 역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다릭 일만과 은 일만 달란트와 놋 일만 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8 무릇 보석이 있는 자는 게르손 사람 여히엘의 손에 부쳐 여호와의 전 곳간에 드렸더라 9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백성들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앞 다투어서 헌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기쁘고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재물을 내어 놓은 것은 그들의 실력으로 보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신 일로 보았어요.

그래서 재물을 바친 백성들을 칭찬하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발가벗고 누웠을 때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이불로 가려 주었습니다.

노아가 잠이 깨어 이 모습을 보고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였어요.

왜 셈을 칭찬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이는 셈이 행한 일이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함은 노아의 벗은 것을 보고 놀렸어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에요.

지극히 죄인다운 것입니다.

 

셈과 야벳도 함처럼 그랬어야 해요.

왜냐하면, 함이나 셈이나 다 같은 아비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셈은 함처럼 아비의 수치를 보고 놀린 것이 아니고 옷으로 가린 것은 하나님께서 셈의 마음을 주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이걸 안 겁니다.

그래서 셈을 칭찬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해 주시기 때문에 요만큼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행한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을 하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행한 그 끝에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해요.

 

우리는 우리 마음조차도 제어하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지만 해요.

우린 장기판의 말이에요.

 

장기판의 말들은 스스로 싸우는 자가 아니에요.

주인이 싸워요.

때로는 상대를 이기게도 하시고 때로는 지게도 해요.

이기고 지는 것은 주인의 뜻이에요.

 

이러한 사고로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용이 땅으로 쫓겨나서 자기를 쫓아낸 후손들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늘에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미가엘과 용의 전쟁이 1라운드였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들과 뱀과 그 졸개들과의 전쟁은 2 라운드가 됩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두 개의 이질적 세력과의 충돌을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달라요.

육과 영은 그 근원이 달라요.

육과 영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한 형제잖아요.

그런데 달라요.

가인은 육에 속하였고, 아벨은 영에 속하였어요.

그래서 다투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 싸움을 기록하고 있어요.

가인과 아벨을 필두로 해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레아와 라헬, 브닌나와 한나, 사울과 다윗,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 이 시대로 말하면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어요.

 

육은 항상 세상 일에 관심이 있고, 영은 하늘에 관심을 가졌어요.

육에 속한 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합니다.

이게 카토릭에서 주창하는 인간존엄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서 민중 신학이 나오고 해방 신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해방 신학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는 사회개혁자에요.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면서 교회가 사회에 공헌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각종 사회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런 부류였어요.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족 해방을 꿈꾸는 독립운동가와 같아요.

예수를 이용해서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어요.

가룟 유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개혁할 선지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셨어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들과 함께 한 것은 그들이 약자라서가 아니고 그들의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해서 그걸 흉내 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은 육적인 일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고 하니까 이걸 흉내 내서 마치 복음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냥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항상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흉내를 내고자 해요.

이는 영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눈과 귀를 가려 놓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형제 싸움은 영과 육의 싸움이에요.

영과 육의 싸움이 지금은 진리와 비진리와의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법과 은혜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함이냐! 믿음이냐! 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있다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다름이란? 겉모양은 같은데 속이 다른 것을 말해요.

본질이 다른 것을 말해요.

마치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처럼 다르듯이 겉으로는 한 형제이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른 것과 같아요.

이 둘은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우리 생각 같으면 같은 형제이니까 사이좋게 살면 좋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본능적으로 싸우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심어 놓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이슬람주의자들을 보세요.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예이고, 이슬람주의의 아랍권은 이스마엘의 후예에요.

이들의 다툼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싸움으로 나타나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서 큰 근심을 하였다고 하지요.

 

이 근심이 바로 이 시대 이스라엘과 이슬람권의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는 기독교와 반기독교로 나타납니다.

 

이제 극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미 기독교와 반기독교의 전쟁은 시작 되었어요.

이것이 세상에서는 이념과 사상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싸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뉴스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어요.

뇌 과학자들이 진보와 보수가 싸우는 것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으로 연구를 한 것을 발표하였어요.

그 발표가 쇼킹해요.

아주 복음적이에요.

 

진보와 보수는 뇌 구조가 다르다고 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정 반대의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를 복음 적인 면으로 적극적으로 확대해서 말을 하자면 보수는 지키고자 하고 진보는 혁파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진보주의자들은 공격성을 띠고 보수주의자들은 수비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사람이 늙으면 다 보수가 된다고 하였는데 틀린 말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진보와 보수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중에서도 보수가 있고 어른 중에서도 진보가 있어요.

 

머리 허였게 하고도 데모하는 분들이 있지요.

이 분들은 데모 안하면 무료해서 못 살아요.

어디든 데모하는 곳에 나타나서 자기 자존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데모를 직업으로 하는 분이라고 하겠어요.

여기엔 목사나 신부나 스님도 동일해요.

뇌 구조가 진보이면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고자 해요.

 

이게 그대로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마치 셈과 함처럼 말이에요.

노아의 수치를 셈은 은혜로 접근하였고, 함은 법으로 접근하였어요.

이건 마치 진보와 보수의 뇌 구조가 다른 것처럼 셈과 함은 어떤 일이든지 접근하는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셈 속에는 은혜가 흐르고, 함 속에는 법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양과 염소처럼 달라요.

염소를 들이 받는 기질로 살고, 양은 얻어맞을 줄만 알았지 들이 받지를 못해요.

이게 성경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속의 전쟁 이야기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걸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걸 잘 기억하세요.

이 세상은 여호와의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여호와가 무슨 전쟁을 하십니까?

죄와의 전쟁이에요.

성경을 보면 여호와를 지칭 할 때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전쟁하는 여호와란 말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오셨어요.

누구랑 싸우러 오셨나요?

마귀에요.

 

자기 백성들이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 있어요.

죄와 사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죄와 사망 가운데 포로 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전쟁을 할 입장에 서 있지 않아요.

전쟁은 죄와 사망 권세 바깥에 계신 분이 해 주셔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여호와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전쟁이야기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출애굽 사건으로도 보여 주셨어요.

사사시대는 사사들의 전쟁을 통해서도 보여 주셨어요.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내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초림 때는 율법 아래서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를 예로 봅시다.

 

예레미야 33장입니다.

 

렘 33:1-18=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1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2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의 거할 곳이 있으리니 그 양무리를 눕게 할 것이라 13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절을 보면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여호와께서 성취하신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하시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가 다시 되찾는 일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가 해방시켜준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죽였다가 살려 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도 인도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세요.

그러니까 바벨론에 망하게 하는 것도 여호와의 뜻이고, 바벨론에서 해방 시키는 것도 여호와의 뜻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어요.

그래서 순순히 바벨론에게 포로 잡혀 가라고 했어요.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완전히 친일파에요.

그러자 거짓 선지자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예레미야를 이단이라고 하여서 매질을 가했어요.

 

남쪽 유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남쪽 유다는 독자적인 힘으로 바벨론을 막고자 하였어요.

애굽과 동맹하여서 막고자 했어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남쪽 유다를 망하게 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락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시체가 가득 쌓인 죽음의 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짐승조차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남쪽 유다가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찬송이 울려 퍼져야 할 도시가 애곡의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가득하여 하늘에 소리를 가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걸 누가 한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하신답니다.

 

이건 죄와 사망에 포로 잡혀서 신음하는 죄인들을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포로 잡혀가게 하셨다가 여호와께서 해방 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쪽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해방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여호와를 알려주기 위하여 시청각교제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전쟁을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하는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초림 때는 구약의 율법교회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사 적으로 보면 중세 시대에는 타락한 로마 카토릭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말에는 타락한 교회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종말의 교회들이 또 다시 카토릭화 되었어요.

 

지금은 중세 암흑시대와 같아요.

교회 안에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요.

뱀의 말들이 홍수처럼 흘러넘치고 있어요.

육에 속한 거짓 목사들이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육적 신자들도 세상의 떡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에게 신은 돈이에요.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 판단되어요.

돈 많으면 복 받은 것이고 가난 하면 저주 받은 것이에요.

큰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로 회자 되고 있어요.

교회 큼이 자랑이고, 교회 작음이 수치가 되었어요.

이 모두가 세속적 가치로 교회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복음의 전쟁이에요.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의 전쟁입니다.

세상의 떡을 줄 것이냐!

예수그리스도라는 떡을 줄 것이냐! 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죄에서 구원을 해 내셨나요?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러면 이 세상은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터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와 싸우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에요.

이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류 역사가 시작이 된 이래로 전쟁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 이야기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전쟁하는 것을 예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 전쟁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쟁이에요.

구원과 동시에 전쟁이 시작이 되었어요.

마귀가 그 동안 자기 것이라고 여긴 것을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이를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고난도 없고 원수도 다 사라지고 좋은 날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마귀의 미혹 때문이에요.

마귀가 신앙을 현세주의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만들어 놓은 현제주의 천국관을 깨트리는 일을 하셨어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은 모두가 현세주의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육적 나라의 해방을 꿈 꾼 것입니다.

로마로부터 해방하여 부국강성한 나라를 만들어 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게 마귀가 주는 현세주의 천국관이에요.

 

이에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귀가 주는 현세주의 천국관을 깨트리고 내세의 천국관을 심어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전쟁인 겁니다.

 

그 전쟁이 이제는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싸움꾼으로 부르셨어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군사란? 싸우는 자들이에요.

성도는 싸움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린 가만히 있고자 하여도 마귀가 가만있지 않아요.

싸움을 걸어 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것을 실감하잖아요.

용이 누구랑 싸우는지 봅시다.

 

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하지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누구인가요?

이 여자는 하늘로 올라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입니다.

이는 구약 교회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따지면 구약교회는 타락했어요.

예수를 낳지 않았어요.

도리어 예수를 죽였어요.

그럼에도 구약교회가 예수를 낳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언약을 따라 오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교회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타락이 되어야 해요.

 

모두 죽음에 가두어져 있어야 해요.

그래야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대로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교회의 타락은 언약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신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하지요.

이는 구약의 마지막이란 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세례요한이 뭘 했나요?

물 세례를 주었지요.

 

물 세례는 죽음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전부 죽였어요.

이걸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해골골짜기가 나옵니다.

골짜기에 해골들은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그런데 그 위에 생기가 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러자 죽었던 해골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룹니다.

이렇게 살아난 군대들 위에 다윗이 왕 노릇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육적인 다윗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진짜 이스라엘의 왕을 말합니다.

 

그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와서 보니 자기 백성들이 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들어가셔서 무덤 속에 갇혀 있던 구약의 이스라엘을 몽땅 살려내셨어요.

그리고 부활하셔서 이들을 하늘 예루살렘으로 대리고 가셨어요.

에스겔 37장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죽었던 해골들이 다 살아난 것입니다.

 

이게 종말에 또 다시 재현이 됩니다.

신약의 교회도 종말에 가면 또 다시 해골처럼 되어요.

영적으로 다 죽어 있단 말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은 자기의 분신인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시고 귀신의 처소가 된 타락한 교회로 보냅니다.

 

거기서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은 다 살아나게 되어요.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살아났듯이 종말에도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셔서 다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용이 누구랑 싸운다고 합니까?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운다고 하지요.

이들이 누구인고 하니 두 증인들이고 그들의 말을 듣는 성도들이에요.

종말에 두 증인들에게 뭘 줍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을 주신다는 것은 말씀이 타락하였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봅시다.

 

계 10:8-1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이지요.

그리고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고 하지요.

사도요한은 주의 종을 대표하고 있어요.

이들이 11장에 두 증인들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두 증인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예언한다는 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예수님 초림 때 모습과 같아요.

예수님이 먼저 12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주시지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이 일제히 천국 복음을 외칩니다.

사도들이 어디에서 천국 복음을 외쳤나요?구약 교회에요.

율법 교회에요.

 

사도 바울도 어디든지 가면 제일 먼저 유대인들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유대인들의 회당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유대인들 회당에 들어간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간 것과 같아요.

거기서 천국 복음을 전한 겁니다.

 

이게 종말에도 그대로 재현이 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교회가 다시 구약교회처럼 죽었어요.

복음이 사라졌단 말입니다.

 

교회마다 뱀의 말이 홍수가 되어서 흘러넘쳐요.

이름하여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떡에 복음이에요.

마귀가 육적 목사들을 가지고 교인들을 전부 땅에 묶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이 마치 복음인냥 가르치고 있어요.

이것이 666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초림 때 사도들처럼 천국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을 누가 핍박하는가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이는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자들이에요.

뱀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작은 책의 말씀을 먹이시고 어디로 보냅니까?

교회로 보냅니다.

이는 종말의 교회가 말씀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사도들이 외쳤던 그 복음을 다시 외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전쟁은 교회 안에서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 간의 전쟁인 것입니다.

복음의 전쟁이에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남은 여자의 후손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나요?

 

광야이지요.

독수리 날개로 받아서 자기의 곳으로 데리고 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1260일 동안 양육을 하십니다.

이건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여 광야로 빼내시는 것을 독수리 두 날개로 업어서 옮겼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했어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으로 양육했어요.

광야에서 율법을 준 것은 작은 책을 먹인 것과 같아요.

 

모세는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했어요.

애굽에 사람을 죽이고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걸 양육이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40년이란? 인생 전체를 말합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1260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260일은 신약의 전 기간을 말해요.

우리 인생 전체를 말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천국에서 살아갈 사람으로 양육을 받는 것입니다.

말이 양육이지 이건 전쟁이에요.

옛 사람이 죽임당하는 전쟁이에요.

떡에 가치로 살던 사람이 죽임 당하고 하나님 언약의 가치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들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보세요.

옛 사람을 죽이라고 하지요.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니까 세상의 가치로 살지 말라고 하지요.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광야와 같아요.

교회에서 떡에 사람이 죽고 말씀에 사람으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하늘에 산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죽임 당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가나안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우리 옛사람입니다.

이 놈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임 당하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우리 옛 사람과 전쟁을 하고 외부에서는 거짓 종들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광야란? 세상과 격리된 곳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출애굽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난 자를 죽이고 애굽에 가치관을 빼내는 것이잖아요.

 

애굽은 떡에 가치로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말씀에 가치로 사는 곳입니다.

광야는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있습니다.

그게 만나였어요.

만나는 육을 위한 떡이 아니에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양식이었어요.

 

결국 성도의 신앙 싸움은 떡에 가치로 사느냐?

아니면 말씀의 가치로 사느냐? 의 싸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사느냐?

하늘을 위하여 사느냐? 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전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666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66을 가지고 떡을 좇는 자와 말씀을 좇는 자를 갈라내는 것입니다.

 

용이 하늘에 전쟁에서 패하고 난 후 이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용이 어떤 놈인가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천하를 꾄다는 것은 미혹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무엇으로 미혹하는가요?

이는 뱀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하와를 미혹한 것과 같아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으로 말이에요.

그게 뭔가요?

떡이에요.

 

이 떡으로 어디서 누구를 미혹하는가요?

교회 안에서 육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귀가 사십일을 주리신 예수님을 찾아 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에서 성공하여서 증명해 보이라고 미혹을 한 것과 같이 미혹해요.

 

이건 마치 당신이 전하는 복음이 교회를 부흥시켜서 증명해 보이라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교회 부흥이 곧 복음인 것처럼 말해요.

교회가 부흥이 되면 그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곧 진리라고 생각해요.

이게 전형적인 마귀의 논리에요.

그러니까 그 속에 진리가 없는 교인들은 큰 교회 목사들은 다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힘으로 과시했어요.

물량적인 것으로 제시했어요.

땅에 속한 사람들은 다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그 말씀이 어디를 지향하게 하는지를 보아요.

하늘에 소리인지 땅에 소리인지로 분별해요.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는지 인간의 삶에 관심을 두는지 분별해요.

 

오늘 본문에서 용이 핍박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남자를 낳은 여자이지요.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남은 자들이지요.

여자와 그 남은 자들이란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와 같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아들이 누구인고 하니 아이를 낳은 여자처럼 아이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아이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지요.

 

그러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성도들이 그 여자의 남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여자의 남은 자들이에요.

영적으로는 구약 교회가 예수를 낳은 여자에요.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마리아가 낳았습니다.

그럼 아이를 낳은 여자가 마리아가 되겠지요.

마리아는 구약 교회를 표상하면서도 신약의 성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게 또 중요한데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마리아가 많았어요.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십자가 곁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지요.

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마리아’ 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있을까요?

이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 때문입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에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헬라어로서 ‘높다’는 뜻을 품고 있어요.

이게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메리” 또는 ‘미리암’이라고 하고 아람어로는 “마라”라고 해요.

“메리”는 “쓰다” “고난” 이라는 뜻을 품고 있어요.

“마라” 역시 “쓰다” “괴롭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마라의 쓴 물 사건 아시지요.

 

그리고 나오미가 모압에서 망하고 난 후 베들레헴으로 올라 와서 자기 이름을 마라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마리아”나 “메리”나 “마라”나 다 같은 뜻이에요.

모두가 “쓰다” “아프다” “고난 받다” “괴롭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마리아’ 속에는 ‘고난’ 이라는 뜻과 ‘높이 서 있는 자’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이는 곧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고 이러한 자들이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성전에 올라가니까 시므온이 하는 말이 네가 이 아이 때문에 마음에 칼이 찌르듯 하는 아픔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마리아가 누구냐?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모든 성도들을 말해요.

용이 누구를 핍박하느냐 하면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마리아들을 핍박해요.

 

왜 그런가요?

하늘에서 예수님에게 패하고 땅으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를 품고 사는 마리아들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봅시다.

 

요 19:25-30=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지요.

어머니는 마리아에요.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하지요.

이 말은 예전에 가나 혼인잔치 때 한 말과 같아요.

가나 혼인 잔치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 졌다고 하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어요.

 

여기서 ‘여자여’ 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입장에서 하는 말이에요.

인간적인 가족 관계로서의 말이 아니고, 구주(救主)로서의 관계로 말하는 것입니다.

구주로 말을 할 때는 어머니 마리아도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성도로서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요한의 교회에 부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에 모인 성도는 모두가 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낳았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낳았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예수로 낳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모두가 예수의 영으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그러면서 이 땅에서 예수를 낳는 삶을 살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잠시 후면 해산의 수고를 하고 아들을 낳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에요.

성령이 오면 제자들을 전부 예수로 낳게 만드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간 것과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의 옷을 입고 나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벗어준 대속의 옷을 입고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입고 온 예수님의 피 뿌린 대속의 옷을 보고서 우리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라는 말과 같아요.

그렇다고 내가 예수란 말이 아니고,,

말이 참 어렵 는데,,

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는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서 용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모래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용과 싸우는 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즉 새 언약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마귀는 교회 안에서 옛 언약으로 새 언약을 가리는 일을 해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킴을 의로 여긴 것처럼 말이에요.

이게 이 시대 인본주의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내 세운단 말입니다.

 

앞서서 말했지만 성도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앞세우고 나오면 안 되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셨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었어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다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는 예수 믿음으로 나와야 해요.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새 언약을 가리기 위하여 옛 언약식 신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어요.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속된 말로 신자가 신자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다움을 고급한 사람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윤리적이고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세요.

얼마나 뿌듯한지 아세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하고는 천지차이가 있어요.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장려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에는 반대에요.

왜냐하면. 의는 오직 예수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앞에서 자기 꼬라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나를 세워서 내가 어떤 자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은 온전히 지켜 낼 수 있는 자인지 아니면 지킬 수 없는 죄인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발가벗긴바 되어야 해요.

모든 것이 죄로 규정당해야 해요.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라고 말씀이 주어졌어요.

 

말씀이 율법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뭔가요?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잖아요.

신약의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세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하는가요?

우리의 영과 혼과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우리를 발가벗긴다고 하지요

우리 죄를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왜, 발가벗깁니까?

왜, 우리 죄를 고발합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입니까?

신약입니까?

신약이지요.

신약의 말씀이 누구를 바라보게 한다고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고, 신약의 교회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를 바라보게 하고, 신약은 다시 오실 예수를 바라보게 하세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거에요.

그런데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제시한단 말입니다.

 

전 여기에 동의하지 못해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의 싸움이에요.

마귀는 인간의 의로 나가라고 하고,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나가라고 해요.

인간의 의로 나오다가 망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율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 속에 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킨 것을 들고 나와서 아버지여 나는 저기 세리와 창기들과 다르다고 자기 우월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게 주세요’ 라고 나와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 지킨 것을 의롭다고 잘난 척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가라고 하셨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용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여자와 그 남은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가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있어요.

 

그 어떤 것도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해요.

죄와 사망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이에요.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어요.

 

오직 피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그 피가 뱀이 강같이 토하여 내는 홍수 속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뱀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예수 십자가의 새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 예수님의 피로 사단의 참소를 이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본주의 비 진리가 교회 안에 홍수처럼 엄몰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참으로 둔갑하여 외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멸할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듣는 귀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창궐하는 인본주의 사상과 시대의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땅에 가치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가는 길이 힘들고 험할지라도 천국을 소망하면서 잘 견디고 잘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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