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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32강. 일곱째 나팔과 그리스도의 나라 (계 11:14-19)

by coroa 2021. 2. 24.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2강. 일곱째 나팔과 그리스도의 나라 (계 11:14-19).-

-.정낙원 목사

 

 

 

오늘은 하늘나라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둘째 화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셋째 화가 남았습니다.

셋째 화는 일곱째 나팔과 함께 나타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이는 곧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면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천국이 도래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마치 일곱 나팔 소리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까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서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심판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양에게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하고, 염소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이 가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곳은 천국을 말합니다.

 

양들이 누구인가요?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여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이 세상으로 보내어진 성도들을 말합니다.

양들은 창세전에 천국에 가기로 작정이 된 상태로 이 세상으로 보내어짐을 당하였습니다.

비록 오늘 이 땅에서 살지만 이미 우리는 창세전에 천국백성으로 존재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언약 안에서 말입니다.

이건 선재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구원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 보내어질 때는 버려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버려진 상태로 보내어졌을까요?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되찾음을 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되찾음 당하여서 원래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되찾아짐을 당한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공로가 담겨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역사 속에 버려진 자로 보낸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담고자 하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담겨진 상태로 천국에 가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엄밀히 말해서 성도는 시간을 꺼꾸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난번 미국 집회를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벤쟈민 버튼의 시간은 꺼꾸러 간다” 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이 독특해서 보았는데 마치 우리의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복음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시간을 거슬러서 창세전의 그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인생의 시간을 역순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가 80세의 외모를 가진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자라가면서 점점 젊어지고 종국에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80세로 태어난 아이가 시간을 거꾸로 살면서 젊어지는 그 시기에 멋진 청년이 되어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내는 늙어 가는데 남편은 점점 어린아이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어른으로 자라 가는데 아버지는 어린아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도 자식도 감당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의 비밀을 다 말한 후에 가족 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떠나 혼자 살다가 어린 아이로 죽게 됩니다.

 

세상의 순리는 모든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서 늙어서 죽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세상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서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이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역설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 성도들의 인생과 같습니다.

우리의 육적 이 세상의 인생은 어린아이로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하늘나라 인생은 창세전이라는 완성된 곳으로부터 나와서 미완료라는 역사 속에서 완료라는 창세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완료에서 미완료로 나아왔다가 ~ 미완료에서 완료로 나아가는 시간을 꺼꾸러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취소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지상에서는 성도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데도 천상에서는 구원이 완성된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삼층천을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구원이 완성된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은 아직까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역사 속에 있습니다.

 

역사 속에 바울은 삼층천에서 보았던 그 바울로 나아가는 삶을 산 것입니다.

삼층천에서 완료된 바울을 보고 온 바울은 이 땅에서의 고난과 핍박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이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성도들이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이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그 환란이 너희의 구원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상에 가보니 주님과 동행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의 결말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결말은 고난을 이기고 벗어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이러면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사도 요한의 구원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낙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의 장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기고 벗어나 천국에서 영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들입니다.

너희가 비록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하다 하여도 그것은 다시 살리심을 얻기 위한 수순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두 증인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하여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 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의 24 장로들은 구원 얻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들도 이들 속에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이러면 두 증인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고 승리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비록 예수를 믿다가 죽임 당한다고 하여도 그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니까 낙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천상의 24 장로를 보아라! 그들 속에 너희도 있다’ 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이 불자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천상에서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전개가 됩니다.

시간의 특성상 앞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상은 이 세상은 창세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왔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인생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 되었다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영원하다는 말은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동그란 원과 같습니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어디가 시작점이고 어디가 끝 지점인지를 모릅니다.

이 원과 같은 세계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을 할 때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일을 계획 하셨습니다.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이 세상은 영원이라는 동그라미에 점 하나를 찍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게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있기 전을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 역사가 끝이 나도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역사는 창세전과 창세전이라는 틈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창세전에서 역사를 보면 점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역사를 한 경점과 같다고 합니다.

경점이란 눈 깜짝 할 시간을 말합니다.

 

마치 인간들 세계에서의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일평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하루일 뿐입니다.

하루살이의 일평생은 인간들에겐 한 경점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그러합니다.

 

영원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면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70-80년이라는일평생의 삶은 하루살이의 하루 시간과 같습니다.

이걸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 나라에서의 천년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루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천년이란? 꽉찬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를 꽉 채운 시간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눈 깜빡하게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인생이 어떤 것인지,

역사 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찰나 같은 곳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영원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영원을 사는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창세전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입니다.

두 증인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였지만 천상에서는 영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게 일곱째 나팔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태초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입니다.

이를 ‘시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 바깥의 태초를 말합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를 ‘공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이 역사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묵시의 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묵시에 속한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란? 이 세상 바깥을 말합니다.

이 세상 바깥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이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창세전에 가졌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하는 태초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태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태초를 두 번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에서 태초를 보았습니다.

이를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태초를 보았습니다.

이를 창세후라고 합니다.

 

창세전이나 창세후나 동일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창세전과 창세후로 구분하는 것은 역사라는 시간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즉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태초이므로 창세전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역사가 끝이 나고 난 후의 하나님 나라이므로 창세후가 됩니다.

시간이라는 순서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창세전이나 창세후 모두가 태초입니다.

창세전은 역사기 시작되기 전의 태초이고,

창세후는 역사가 끝나고 난 후의 태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태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의 천상의 모습은 역사가 끝나고 난 후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들은 창세전과 창세후의 중간에 끼어 있는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계획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다 끝나면 이 역사는 사라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브리서는 만물은 철거되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멸망할 것을 만드셨습니다.

왜? 멸망 할 것을 만드셨나요?

이는 만물을 가지고 창세전에 계획된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습니다.

모델하우스는 아파트에서 나왔습니다.

아파트를 설명하기 위해서 모델하우스를 만든 것입니다.

아파트가 설명이 다 되고 나면 모델하우스는 폐기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델하우스는 폐기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역사가 그렇습니다.

창세전에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창세전과 창세후의 중간에 끼어서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태초에 있었던 일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시작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계셨다” 라고 합니다.

왜? 말씀을 인격화 하여서 ‘계셨다’ 라고 할까요?

이는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이 됩니다.

 

요한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이러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됩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을 창조 하실 때 “우리” 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란? ‘함께’ 라는 뜻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이러면 창조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을 만드시고 이를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사람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창조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스린 것은 곧 하나님이 다스린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담 속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입니다.

짐승들 앞에서는 아담은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것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아담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에덴동산을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입니다.

아담이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 올 수 있는 길은 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지만 가능해 집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주십니다.

물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 한해서입니다.

성경은 죄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되찾아 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세계에 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세상으로 오면서 역사에 필요한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성육신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피조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내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예수로 알아진 하나님이 아니면 모두가 가짜 하나님입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모세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애굽에서 섬기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신관의 오류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모세만 진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만 하나님을 압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그동안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입니다.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에게 “참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교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하십니다.

 

성경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신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찾는 신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섬기던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출애굽은 나를 위한 하나님에서 언약을 위한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에 불러내시고는 제일 먼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떡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고난에서 해결시켜 주시기 위해서 출애굽 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출애굽 시킨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은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해서 생겨난 민족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먼저이고 언약이 나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먼저 떡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의 신관입니다.

 

이러한 신관을 광야에서 바꿔치기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내 언약이 먼저이고 너희가 나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매일 매일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려 주심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창조주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창조주는 반드시 피조물을 통하여서만 설명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피조물을 만든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드러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피조물이 목적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주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란?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언약하신 것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분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드러내기 위하여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구조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언약의 후손들에게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위하여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너희가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너희를 애굽에서 빼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6장을 봅시다.

 

출 6:1-8=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나는 여호와’라고 합니다.

나 여호와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 있는 너희를 빼내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걸 역설로 이해하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지 않았다면 애굽에서 빼내 주시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아브라함과 언약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할 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합니다.

네게 후사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곤 이삭을 아들로 주었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 아들을 낳고, 그 12 아들들의 후손들이 지금 애굽에 볼모로 잡혀서 종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여호와로 하여금 빼내심을 입는 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이 구원받는 것의 예표적 사건입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적으로 보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 때문에 죄 아래서 났고,

창세전 언약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한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 때문에 구원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과 25을 봅시다.

 

사 43: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그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조성’이라는 말은 ‘야짜르’ 라고 하는데, 이는 “주조하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다, 형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토기장이가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무슨 작품입니까?

죄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을 건져내서 의와 거룩으로 안식케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안식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죄를 도말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도말합니까?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이 죄 아래 있으면 하나님이 안식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쉴 수가 없습니다.

약속이 다 이루어져야 안식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아브람과 하신 약속이 뭡니까?

애굽에서 구원해 준다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도말해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선택을 입은 민족이라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시다바리로 살아야 하느냐고 반발을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하고 난 후 광야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충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고발당하게 됩니다.

죄가 뭐냐?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네 말을 믿느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열 가지 기적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 목전에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백성들에게 모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만이 참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알아진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짐승처럼 등 따습고 배부름을 쫓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라고 알려줍니다.

 

신약으로 오면 모세처럼 하나님을 대면하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분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를 왜 구원 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구원을 했는지 알려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로 살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의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의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는 의는 예수님이 주십니다.

 

의란? 옳음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가 없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가 없어집니까?

죄인으로서는 죄를 없앨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가 없는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전가 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는 의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까?

이는 천국에서 안식을 주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안식의 나라입니다.

안식이 되려면 먼저 일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이란? 일을 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천국에서 안식을 하자면 무슨 일을 하여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천국에서 안식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답이 나왔습니다.

천국에서 안식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어째서 예수를 믿는 것이 일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은 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일이라고 하셨나요?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안에 천국에 살 수 있는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갈 수가 있습니다.

그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천국에서 안식을 하려면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는 것을 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천국에서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장로들이 모두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결국 천국에서 안식하는 24장로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임을 믿고 산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예수를 믿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하지만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믿다가 고난당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 받는 길이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로 신앙을 판단하십니다.

그 아들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시편 2편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포고령을 하나 내렸습니다.

어떤 포고령인가 하면 누구든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는 진노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아브람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영접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몰라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되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창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는 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를 갈라내고 채우는 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을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창조로 운을 떼는 것은 장차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고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말씀되시는 성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은 말씀이신 하나님(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예수님)을 통해서 피조물에게 계시하십니다.

 

이러한 상태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중보자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연결해 주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들은 말씀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말씀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떠나서는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또한 성부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만 피조물을 만나주시는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럼 피조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중보자로 세상에 오신 말씀되시는 성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속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아는 자라야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지혜로는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은 오직 성령께서 알려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도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는데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고,

이 법칙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워놓으신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이러한 진리를 아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생명이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요 17: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 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만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가서 복을 주셨듯이 예수님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가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24 장로들이 천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천상과 지상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상에서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위로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환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환란 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보여주시고서는 이어서 그 눈길을 천상으로 돌려서 환란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장에서도 전반부에는 두 증인들의 순교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후반부에서는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에 있는 24장로들은 두 증인들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성도들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천상에서는 승리자로 서 있습니다.

이 땅에서 두 증인들처럼 예수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슬퍼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의 순교에 이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서 왕 노릇하는 천국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안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세 가지 화가 나옵니다.

첫째 화는, 8장에서 보여준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으로 인한 재앙이었습니다.

두 번째 화는, 9장, 10장, 11장에서 보여준 유브라데 전쟁입니다.

겉으로는 세상에 일어날 전쟁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셋째 화가 닥칩니다.

셋째 화가 이르기 전에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왜? 셋째 화가 이르기 전에 천상의 모습을 보여줄까요?

이는 일곱 째 나팔이 불려지면 세상 나라는 끝장이 나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잠시 고난당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들이 천상에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살게 되니까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천상의 모습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거기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세세토록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24장로들이 빨리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립니다.

그리고는 그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아울러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셋 번째 화가 이르기 전에 막간을 이용해서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치 큰 재앙을 내리기 위하여 준비하는 듯 하는 모습입니다.

언약궤가 보이고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과 같은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심판 하실 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언약에 근거하여서 심판을 단행하겠다는 하나님의 뜻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 성전을 보여주시고 언약궤를 보여 주실까요?

이는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언약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고, 언약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언약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언약에 의하여 저주 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 안에 언약이 심겨진 자들을 살고, 언약이 심겨지지 않는 자들은 멸망당합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예수 믿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벌을 주십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선지자들과 성도들은 언약대로 상을 받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세력들은 언약대로 멸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누구든지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아브람이 예수님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아브람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복의 조상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입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하신 언약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주어지지만, 그 이름을 배도하고 떠난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이 세상에 주어진 언약입니다.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의 나라를 이 땅에 몰고 오셨습니다.

이름하여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막 1:15절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기 직전까지 40일 동안 이 땅에서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행 1: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언약으로 다스려져 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성전에 언약궤가 나타난 것입니다.

언약이 완성된 나라가 곧 천국입니다.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나라가 하늘 나라이고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까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납니다.

그 소리가 뭡니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누구의 나라가 된다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서 세세토록 다스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옛 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분입니다.

 

이는 항상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계셨던 그 분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에 오셔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계시는 분이 왕으로 사는 나라에 언약궤가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있습니다.

 

두 돌 판과, 만나 항아리와, 싹이 난 지팡이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 한 증거물들입니다.

불순종한 자들을 뚜껑이 덮고 있습니다.

 

일 년에 단 한번 대 제사장이 그 뚜껑 위에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죄 없다 하십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피가 뿌려지는 그 뚜껑을 시은좌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앉는 자리라고 하여서 시은좌 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사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피로 씻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성전에 언약궤가 있는 것입니다.

 

왜? 언약궤 라고 합니까?

천국은 언약에 의하여 구원 받은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속에 담긴 이 세 가지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두 돌 판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깨어진 돌 판처럼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죽임당한 것을 상징합니다.

 

싹이 난 지팡이는,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하여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을 하여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말합니다.

 

만나는, 부활하여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이 이제는 성도들 안에 오셔서 생명의 양식이 되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늘나라 성전에 언약궤가 보이는 것은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죄로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의 피로 찾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습니다.

왜?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을까요?

이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오려면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나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 계신 성도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최초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셨습니다.

목 베임 당하셨지만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십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의 차례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의 순교와 부활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증인들입니다.

 

비록 가는 길이 험하고 아프더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성 되고 완료가 된 우리들의 구원을 오늘 본문 속의 천상의 모습을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기 바랍니다.

 

성도는 약속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사셨고,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 하시고, 성경대로 승천하셨습니다.

성경대로 하셨습니다.

 

모든 약속은 성경대로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다시 오심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제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몰고 오실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우리에겐 상을 베푸시고 원수들은 징벌하실 것입니다.

 

성경 속 이야기는 동화가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이고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 속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천상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천상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이 사실을 믿고 세상 속에서 당하는 아픔들을 이겨 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사도 요한처럼 밧모섬에 유배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 아래 있습니다.

서로의 삶에 모습들은 각양 다르지만 그 삶에 의미는 모두가 같습니다.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집은 저 천국에 있다고 믿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삶이 조금 힘들고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잠시 잠간 후면 주께서 오십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새벽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이가 세상을 철거하러 오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만물이 주께서 오시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난리와 소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창궐하면서 세상 종말이 가까웠다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의 종말이 되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인간들끼리 싸우고 교회 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난리와 소문에 소문을 더하고 거짓 그리스도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여서 날마다 새로운 예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종말의 징후 중에서 최고의 징후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성경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은 항상 세상 끝 날에 방문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하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속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방문 하셔서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십니다.

그 빛을 의인화 하면 성도를 말합니다.

 

성도는 빛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이건 마치 언약의 후손들이 애굽의 바로에게 압제 당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방문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 낸 것은 최초의 출애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흑암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의 종말에 모습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창세기 1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영적 의미가 같다는 말입니다.

 

노아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관영할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문하십니다.

 

소돔 고모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나요?

강도의 굴혈이었습니다.

거짓 종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빼 먹으면서 살찌우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강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뱀의 아가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예수님의 초림 때 모습 그대로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였습니다.

거짓 종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호의호식하면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주머니를 강탈하고 있습니다.

 

교인들 또한 위선과 외식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신은 돈입니다.

교회가 섬기는 신은 돈입니다.

돈에 가치로 엄몰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 판단합니다.

이 시대 판단 기준은 돈 있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고 돈 없음이 하나님 없음이라 여깁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이고, 부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는 고객들로 차고 넘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이 차고 넘쳐서 날마다 창고를 더 짓고 불려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장사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빕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교회를 찾습니다.

 

목사나 교인들이나 같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오로지 돈입니다.

 

돈이 목자이고,

돈이 구원을 주고,

돈이 천국도 주고,

돈이 영생도 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까에 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하여 혈안입니다.

 

목사들이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주고 있습니다.

떡을 주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고, 세상의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뱀 새끼들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땅에 것으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도만 받으면 만사형통이라도 되는 줄 알고 따릅니다.

호산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여 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독사 새끼들입니다.

교인들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흡혈귀들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뿔 달고 다가오는 줄 아십니까?

아니에요.

아주 점잖고 아주 멋지게 하고 다가옵니다.

말도 고상하게 하고 점잖게 행동하고 품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빛이 없는 교인들은 다 속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다시 오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함입니다.

뱀의 아가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었으면 교회의 모습이 어떠할까요?

흑암의 깊음 중에 있어야겠지요.

죄악이 관영하여야 하겠지요.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맞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교회 안에 진리가 사라졌습니다.

흑암이 깊음 중에 있습니다.

 

교인들 마음속에 떡에 가치로 채워져서 죄악이 관영합니다.

천국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배부르게 잘 살까에 만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떡을 달라고 합니다.

악한 때입니다.

 

제발 신앙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은 피 튀기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 대충 처 삼촌 벌초 하듯이 하는게 아닙니다.

 

눈 부릅뜨고 살피십시오.

저 소리가 지금 하늘에 소리인지 땅에 소리인지 분간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인지 뱀의 말인지 분별 하십시오.

저 목사가 지금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가는지 땅으로 데리고 가는지 살피십시오.

 

예수님 이외는 그 누구도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믿지 마시고 눈 부릅뜨고 살피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면 따르시고 세상 이야기 하면 내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경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는 모세처럼 시내산 꼭대기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해 주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눈을 시내산 위를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요한의 눈을 천상으로 향하게 합니까?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시내산 위이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왜? 천상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눈을 하늘로 향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까?

그럼 위에 것을 찾으십시오.

거기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곧 만나게 됩니다.

그 설렘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곧 오십니다.

반드시,,,,

 

그 날을 사모 하며 사십시다.

마라나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들어 24장로들이 찬양하는 하늘나라를 보게 하옵소서. 24장로들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주님이 오시고 있다는 소리를 보고 듣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조차 주관하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여서 세상에 가치를 버리고 하늘에 가치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고백합니다. 그 은혜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풍성히 부어 주셔서 이 세상을 담대히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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