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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30강. 성전을 척량하라 (계 11:1-3)

by coroa 2021. 2. 17.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0강. 성전을 척량하라 (계 11:1-3).-

-.정낙원 목사

 

 

 

여섯째 나팔 속에는 세 가지 환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은, 9장의 유브라데 전쟁이고,

두 번째 환상은, 10장의 작은 책을 먹는 내용이고,

세 번째 환상은, 11장으로서 두 증인들이 다시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섯째 나팔 속에 담긴 세 가지 환상 중에서 마지막 환상입니다.

여섯째 나팔 속에 담긴 세 가지 환상은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육적으로는 세상에서 일어날 전쟁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중적인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육적인 사건 속에 영적인 것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은 교회들을 위하여 육적 사건을 가지고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만 영에 속한 성도들은 나타난 현상 속에 담겨져 있는 영적인 것을 읽어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건 영에 속한 자들은 알아요.

 

보이는 것을 육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유한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한합니다.

보이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해요.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단선적으로 흘러가요.

하나님은 단선적으로 흐르는 역사 속에 묵시에 속한 것들을 사건으로 끼워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영적 사건이 복선으로 깔려져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는 비행기가 있고 땅에는 그림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비행기는 실상이고 땅에 그림자는 허상입니다.

우리는 허상인 그림자를 통해서 하늘에 실상을 읽어내게 됩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세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다릅니다.

시작의 현상이 다르고 끝의 현상이 다릅니다.

사람의 일생으로 비유하면 어린 아이 시절과 청년 시절과 어른의 시절과 노인의 시절이 다르듯이 세상의 끝이 다다르면 세상 끝에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걸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계절과 농사짓는 것으로 비유하여 이해해 봅시다.

역사는 일 년이라는 사이클로 순환하면서 흘러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이 되어서 흐릅니다.

 

봄은, 소생의 계절로서 씨를 뿌리면 싹이 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싹이 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보고 아~! 봄이구나, 합니다.

여름은, 벼가 풍성히 자라가는 계절이에요.

벼가 익어가고 나무들이 풍성하게 과일들을 맺으면, 아~! 여름이구나, 합니다.

가을은, 봄에 뿌린 곡식들을 추수하는 계절이에요.

곡식들이 잘 익어서 추수를 하고 나무에 단풍이 들면, 아~! 가을이구나, 합니다.

겨울은, 모든 게 움츠려 드는 시기에요.

낙엽도 떨어지고 을씨년스러우면, 아~! 겨울이구나, 해요.

 

역사 속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씨 뿌리는 시기가 있고, 농사짓는 시기가 있고, 추수하는 시기가 있어요.

그 시기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들이 달라요.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맞게 교회를 간섭해 가세요.

 

예수님의 초림으로 복음은 봄을 맞이하였어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씨를 뿌렸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오심으로 복음에 봄을 맞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복음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이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퍼져 나갑니다.

여름처럼 복음의 농사가 온 세상 속에서 풍성하게 전해져 갔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가 가리지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땅에 복음이 어떻게 방해를 받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육적 신자와 영적 성도가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곡식들이 심겨졌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라지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가시와 엉겅퀴처럼 온 밭을 잠식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곡식들을 상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 2천 년 역사입니다.

 

복음이 전해진지 어언 2천년이 흘러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2천 년 전에는 복음이 씨앗처럼 밭에 뿌려지는 봄이었지만 이제는 온 세상에 복음이 퍼져서 교회가 부흥하던 여름도 지나고 참과 거짓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가을이 왔습니다.

이제 곡식과 가라지를 추수하여야 하는 때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야 할 때입니다.

 

이게 종말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종말은 갈라지는 때에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곡식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추수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2천년을 흘러오면서 엄청난 양적 팽창을 이루었어요.

흔히들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흥과 동시에 엄청난 타락도 함께 몰고 왔어요.

부흥한 것만큼 타락도 함께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내듯이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오늘 본문에서는 성전을 척량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척량하는 것이 아니고 성전을 척량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추수를 하신단 말이에요.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극심하게 타락을 하여서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작은 책을 사도 요한에게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건 마치 일을 시키기 전에 일꾼들에게 밥을 든든히 먹이는 것과 같아요.

그리곤 다시 예언하라고 합니다.

 

다시 예언하라는 것이 뭔가요?

이미 경험 된 것을 다시 전하라는 뜻이에요.

이미 경험 된 것이 무엇입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사건이에요.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 교회를 무너뜨리고 신약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어요.

새로운 성전을 짓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성전을 척량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 주신 사건이에요.

보이는 성전을 바벨론에 불타 버리고 난 후 그 자리에 성신이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을 척량 사건으로 말해 주었어요.

 

그럼 먼저 본문을 보고 에스겔을 봅시다.

 

계 11:1-2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예수님이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고서는 성전을 척량하라고 합니다.

척량이란? 자를 가지고 여기 저기 재는 것을 말해요.

척량은 집을 짓거나 헐기 전에 치수를 재 놓고 새로 짓든지 아니면 헐었던 것을 다시 복원을 하든지 할 때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척량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이는 두 증인들이 하는 사역으로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본 환상이 여섯째 나팔 속에 담긴 유브라데 전쟁 속에 담겨진 세 가지 환상 중에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유브라데 전쟁이 영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두 증인이 교회 안에서 척량하는 일도 육과 영을 갈라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이 척량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낸다는 뜻이에요.

이걸 추수라고 해요.

 

아까 예수님의 재림은 가을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잖아요.

곡식과 가라지를 갈라내서 곡식은 천국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로 태우는 일을 하세요.

이게 종말의 심판이에요.

 

이 일을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성전을 척량하던 에스겔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일어난다고 증거 했던 것입니다.

 

에스겔 9장을 봅시다.

 

겔 9:6절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성전에서 심판이 시작이 된다고 하지요.

왜? 성전에서 심판이 시작이 되는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밭이에요.

하나님은 성전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는 일을 하세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민족이 나와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나타나요.

이 구조를 족장 시대에는 가정에 두셨어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이들은 모두가 서로 다름으로 존재하였어요.

 

하나님은 이 구조를 성전으로 축소 시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온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성전 안에는 참과 거짓이 공존하였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성전에는 참과 거짓이 공존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 교회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구약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과 아닌 자들을 추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을 척결하신 것을 일컬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타작마당이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예수님이 자기 밭인 교회에 천국백성인 곡식을 심어 놓았어요.

그런데 마귀가 지옥 백성인 가라지를 덧 뿌려 놓은 것입니다.

이에 두 증인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팡이로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인지를 척량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을 구약에서는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인자란?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에스겔이 행한 이 일을 종말에 두 증인들이 하게 됩니다.

두 증인들이 예수님을 대신 하여서 성전을 심판하는 일을 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성전에서 척량하는 모습을 구약의 에스겔을 배경으로 하여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척량 사건도 구약적 배경이 있겠지요.

구약에서는 언제 어느 때 무엇을 위하여 성전을 척량을 하였는지를 알면 신약적인 의미로 두 증인의 척량 사건도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자면 먼저 구약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구약에 보면 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요.

북쪽 이스라엘은 일찍 망하였고, 남쪽 유다는 나중에 망합니다.

둘 다 망하고 난 후 예수님이 오시지요.

 

북쪽 이스라엘의 망함을 구약 교회의 심판이라고 한다면,

남쪽 유다의 망함은 신약 교회의 심판과 같아요.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는 구약 교회를 심판하신 것은 북쪽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과 같고,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신약 교회를 심판하는 것은 남쪽 유다의 망함과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어째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 드릴게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는 두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두 이스라엘이란?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모습이 북쪽 이스라엘 속에 담겨져 있고, 영적 이스라엘의 모습은 남쪽 유다에 담겨져 있어요.

 

육적 이스라엘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해요.

이들은 완전히 망해요.

마치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당한 것과 같아요.

이들은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난 후 완전히 동화가 되어서 이방인 되어요.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합니다.

이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영적 이스라엘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약의 성도들을 말해요.

이들은 비록 타락하여도 완전히 망하지 않고 다시 회복을 하게 되어요.

은혜로 남겨짐을 당해요.

이게 남쪽 유다와 같은 겁니다.

 

남쪽 유다는 비록 바벨론에게 포로 잡혀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건 은혜로 세워진 신약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구약교회를 상징하고, 남쪽 유다는 신약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럼 두 증인이 신약의 교회를 척량하는 것을, 구약의 에스겔이 성전을 척량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 주셨던 의미를 신약의 영적 의미로 살펴봅시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에요.

그런데 두 증인들이 성전을 척량하는 것이 에스겔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이는 곧 종말의 교회 모습이 남쪽 유다의 멸망 당시의 상황과 같다는 말입니다.

영적 상태가 같다는 뜻입니다.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망할 당시의 신앙 상태를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종말의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모습들을 알 수가 있어지겠지요.

그럼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에스겔 8장을 봅니다.

 

겔 8:1-18=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2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4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7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10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11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 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의 행하는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강포로 이 땅에 채우고 또 다시 내 노를 격동하고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 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성신이 에스겔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그 안을 보여 줍니다.

가만히 보니까 성전 곳곳에 각양의 우상에 모습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장로들과 여인들이 그 안에서 각양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완전히 귀신의 처소인 것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나님이 투기하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 구석 구석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6번씩이나 인자야! 인자야! 인자야! 인자야! 인자야! 인자야! 하면서 탄식을 하겠어요.

너무 속이 상하니까 인자야! 인자야! 하는 거에요.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우리가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나면 기가 차서 넋두리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고서 하도 허탈해서 허참, 너 여기 좀 봐라, 저기 좀 봐라. 이 놈들이 이러고 있다, 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니까 하나님이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남쪽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애굽과 동맹을 맺었어요.

남쪽 유다 후반기에 보면 여호야김 왕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애굽 왕 바로느고와 동맹을 맺었어요.

 

이건 이방 나라와 하나가 된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이스라엘이 애굽화가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백성들 속에서 애굽적 신앙 풍조가 가득했어요.

이게 각양의 애굽적 신앙인 우상 숭배를 낳았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세속화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종말의 교회도 에스겔에 보았던 성전과 같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인 귀신의 치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음녀의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의 교회가 바벨론 사상에게 먹힘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남쪽 유다의 성전 안에 각양의 우상이 가득한 것은 구약 교회의 타락을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에 통해서 유다를 멸망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상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리게 하고 우상을 숭배한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모세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모세 언약을 보면 불순종하면 이방 나라에 팔아 버린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언약에 근거하여서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착실하게 언약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비록 유다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갔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비록 몸은 이방 나라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때 사역한 선지자에요.

 

하나님이 유다로 하여금 바벨론에게 포로 잡혀 가게 하신 후에 에스겔에게 나타납니다.

 

에스겔 40장을 봅시다.

 

겔 40:1-4절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 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

 

잘 보세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상 중에 임하십니다.

이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지 25년이 지난 후이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이 된지 14년이 지난 후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에스겔을 찾아 오셔서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놋같이 빛난 사람이 손에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성신이 그 위에 새로운 성전을 짓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40장 이후로는 성신이 성전을 짓는 내용이에요.

 

하나님이 무너진 성전을 척량케 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성전은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성신이 지어요.

성신으로 지어진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지을 성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척량하는 사람을 놋같이 빛난 분으로 보여주신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거룩한 분이 놋처럼 심판을 단행한다는 뜻입니다.

 

놋은 심판성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빛나는 놋처럼 오셔서 구약 교회를 심판하시고 그 위에 성령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이 본 성전 척량 사건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종말의 두 증인에게 다시 재현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 예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예언이 뭐라고 했나요?

다시 초림에 일어났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던 일들을 종말에 다시 재현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강해 할 때 종말에 다시 한 번 커다란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날 것이에요.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를 할 때 어찌 할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종말에도 다시 한 번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회개 운동을 벌린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자 하나님이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시지요.

세마포 옷이 베옷이에요.

하나님이 베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회개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러한 모습으로는 안 되어요.

우린 너무도 값싼 은혜에 취하여 있어요.

복음을 너무도 자기 위주로 이해하고 있어요.

우리 눈에 눈물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어요.

눈물이 사라졌다는 것은 회개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값싼 구원론에 빠져서 희희낙락하고 있어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 눈에는 가난하고 헐벗고 가련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육적으로는 부요한데 영적으로는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력하게 우리의 신앙에 허구들을 깨뜨리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바위를 깨트리는 방망이 같은 강력한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할 것입니다.

 

두 증인들은 광의적인 면에서는 신약의 전 교회 시대에 활동 한 참 종들을 말해요.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의 교회의 모습으로 보아야 해요.

 

이 시대 교회를 보세요.

이게 어디 교회인가요?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에요.

남쪽 유다가 망할 때 모습과 똑 같아요.

남쪽 유다가 망할 때 성전에 각종 더러운 우상으로 가득했듯이,

이 시대 교회 안에 각종 더러운 영들이 들어 와서 뱀의 물을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두 증인들이 성전을 척량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두 증인으로 하여금 성전을 척량케 하신 것은 기존의 성전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는 뜻입니다.

성전을 척량케 하신 것은 성전의 기능이 상실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짓는데 여기에 성신이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으로 보여 주셨어요.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여서 성전이 불 탄 것이나 예수님 초림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어서 마귀의 놀이터가 된 것이나 동일해요.

그 영적 의미는 같아요.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을 헐고 그 위에 성령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었어요.

신약의 교회는 인간들 손으로 짓는 건물이 아니에요.

성령이 성도들 심령에 지어요.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종말에 다시 재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이고 종말에 나타날 교회의 모습이에요.

이러면 예수님이 재림 직전에 교회의 모습이 에스겔 시대와 같고 예수님 초림 때와 같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 초림 때의 신앙을 한마디로 하면 외식신앙이라고 했어요.

모양은 있으나 내용이 없었어요.

종교적 외향은 있으나 실제 알맹이는 없었어요.

 

이걸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근데 이게 종말 교회에 다시 재현되어 나타나고 있어요.

종말의 교회가 또 다시 외식으로 흐르고 있어요.

 

영적으로 이 시대 교회는 죽었어요.

화석화 되었어요.

이름만 교회이지 실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절간이에요.

이름만 예수이지 그 안에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른 예수에요.

 

교인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어요.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일으켜서 마지막 회개 운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증인들이 어떻게 성전을 척량하는지를 살펴봅시다.

1절을 봅시다.

 

계 11:1-3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하나님이 두 증인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지요.

지팡이 같은 갈대가 뭔가 하면 말씀이에요.

작은 책이에요.

 

갈대는 치수를 재는 자로도 사용하였지만 당시에는 갈대를 엮어서 책으로도 사용했어요.

성경으로도 사용했는데 이걸 ‘파피루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두 증인에게 주신 지팡이 같은 갈대는 하나님 말씀을 말해요.

 

하나님 말씀으로 척량하라는 것은 교회가 말씀 위에 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인간의 상식으로 세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이 말씀 중심이 아니고 인본주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상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 자기 편의주의로 자기 필요에 의하여 행하는 종교 생활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말씀의 부재로부터 나타나요.

우리 안에서도 말씀이 사라지면 자기 상식으로 신앙생활 하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이미 그 영이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두 증인에게 말씀을 먹이시고 교회로 보내서 다시 예언을 하라는 말씀 운동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불순종으로 말합니다.

불순종이란? 하나님 말씀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된 상태를 말해요.

반대로 죽음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아야 해요.

이게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교회들은 말씀이라는 터가 사라졌어요.

신앙의 근본이 하나님 말씀에 세워져 있지 않고 인간의 상식과 이론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보내서 인본주의 신앙을 깨트리고 말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으로 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이미 구약에 많이 보여준 일입니다.

구약에 보면 두 증인의 맥이 있어요.

 

소돔 고모라에 두 천사가 가서 롯을 구원해 내지요.

여리고 성에 두 정탐꾼이 가서 기생 라합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지요.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지요.

이들이 특징은 모두가 심판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였어요.

 

두 증인들은 두 가지 일을 해요.

먼저 그릇된 것은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져 있어요.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9-16=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입에다가 말씀을 넣어주시지요.

이건 예수님이 두 증인에게 작은 책을 먹여 준 것과 같아요.

예레미야 입에 주신 말씀이 뭔가요?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허무는 것이에요.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시지요.

이것은 재개발 하기 위하여 판자촌을 허물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짓는 것과 같아요.

왜? 허무는가요? 이는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예레미야에게 뭔가를 보여 주시지요.

두 가지 환상을 보여줍니다.

먼저 살구나무를 보여 주십니다.

 

살구나무는 부활을 상징해요.

살구나무는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에요.

이는 겨울이라는 죽음을 뚫고 봄이 새 생명을 몰고 온 것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살구나무에요.

 

그리곤 북방으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여주시지요.

이는 바벨론 침공을 말해요.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죽였다가 살리는 환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죽는 것이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해요.

왜 살구나무를 먼저 보여주시고 나중에 끓는 가마를 보여주셨는가요?

이는 죽이기 전에 먼저 부활을 보여주고서는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왜 바벨론에게 붙입니까?

다른 신들에게 분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된 성전을 허물고 성신으로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이게 에스겔에게 보여준 성신으로 지은 성전이에요.

 

에스겔이 본 성신으로 지은 성전은 장차 에스겔처럼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 지으실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일을 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교회를 허물고 신약교회를 세우셨어요.

 

이걸 오늘 본문의 성전 척량으로 살펴봅시다.

 

계 11:1-2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어디를 척량하라고 하나요?

두 부분이지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과 성전 밖 마당이지요.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고 성전 밖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지요.

 

척량 받는 자가 있고 척량 받지 못하는 자들로 구분이 되지요.

이러면 척량 받지 못하는 자들도 척량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척량 당한 셈이 되어요.

그러니 둘 다 척량을 받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척량의 의미는 옳고 그름을 판단 받는 의미라고 했잖아요.

그럼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만 척량하라는 것은 성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성전 바깥은 척량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은 이들은 척량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코로 호흡하는 자는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코로 호흡한다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육적 신자들이란 말입니다.

이는 육적 신자들은 척량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짐승이에요.

그래서 성전 밖 마당을 이방인에게 내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적 신자들은 성전 밖 마당만 밟고 다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잘 보세요.

성전을 두 구분으로 나누지요.

이는 두 성도로 나누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나누는가요?

성전 안과 성전 바깥이지요.

성막을 예로 든다면 뜰과 성소로 구분합니다.

 

성막의 뜰은 겉으로 보이는 세계에요.

여기는 아무나 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성소 안은 가려져 있어요.

이곳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가 있어요.

 

이게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면 성막의 뜰에서는 구경만 해요.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번제 단에서 제물을 태우는 것을 구경만 해요.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을 구경만 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는 것은 모두가 다 할 수가 있어요.

신자나 불신자나 다 해요.

 

그러나 성소 안은 구경하는 곳이 아니고 자신이 일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성소 안에서 제사장들이 일하는 모습이에요.

 

성소 안에서는 떡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간검해요.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섬기는 것을 말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 섬기지요.

이게 바로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 모습인 것입니다.

 

두 예수가 있어요.

예수가 둘이란 말이 아니고 두 사역을 말해요.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임 당한 예수와 부활 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예수가 있어요.

예수가 우리 바깥에 있으면 우린 구경꾼이에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가 우리 안으로 오시면 우린 예수를 위하여 살게 되어요.

예수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비워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섬기게 되어요.

그러니까 성전 안에서 경배 하는 자들을 척량하라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위로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국에 소망을 삼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에 있는 자들은 떡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쫓아다니는 군중들과 같은 자들로서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는 말씀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말씀대로 사는 자는 말씀대로 살도록 권면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그냥 두라고 합니다.

이건 그냥 말씀대로 산다 혹은 안 산다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이냐? 예수 밖에 있는 자이냐? 에요.

 

그 안에 예수가 있느냐 없느냐 에요.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일을 하듯이 하게 되어 있고,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자들은 성전 뜰에서 구경하는 자들처럼 빈둥거리고 논다는 말이에요.

 

달란트 비유를 보면 두 종류의 종이 나오지요.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한 종과 땅에 묻어둔 종이 있지요.

열심히 일을 하는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받은 은혜로 열심히 일을 해요.

이건 그들 속에 주인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므로 주인이 출타하고 없음에도 주인이 계신 것처럼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은 그 속에 주인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있을 때는 하는 척 하다가 주인이 출타를 하고 눈에 안 보이자 특유의 본성인 게으름을 피우고 일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나타나요.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주인이 있으면 잘 해요.

하는 척 해요.

그런데 주인이 없으면 안 해요

 

이렇게 생각 해 보세요.

우리가 원래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 땐 엄청 열심히 했어요.

주일날 새벽부터 밤까지 충성 했어요.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했어요.

종처럼 일했어요.

 

그러다가 복음을 만났어요.

그럼 어찌 해야 할까요?

앗싸 하고 안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합니까?

 

율법 아래서는 안 하면 안 되니까 억지로 했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감사함으로 하게 되어요.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더 잘하고자 하게 되어요.

이게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어떤 자들은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요.

주둥이로만 나불거리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아요.

인색하기 그지없어요.

이게 바로 성전 바깥에 있는 자들이에요.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악한 종들이에요.

 

이게 성령 받은 종과 성령 받지 못한 종으로 나타나요.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성도와 그 속에 예수가 없는 교인으로 나타나요.

교인은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자들이에요.

이들의 특징은 게으르고 악해요.

 

복음을 전해보면 반드시 두 반응들이 나타나요.

어떤 분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서 더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핑계대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마치 복음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고 색욕거리로 삼는 자들이에요.

이들이 바로 성전 밖 마당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성경은 이들을 개와 돼지로 말해요.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이들을 진주를 밟고 해한다고 하지요.

진주란?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복음을 가지고 자기 쾌락을 좇는데 악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이란? 성전을 말해요.

성전을 짓밟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 마흔 두 달이라고 합니까?

마흔 두 달이란? 3년 6개월이에요.

날 수로는 1260일이고,,,

 

잘 보세요.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은 척량 대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그래서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에요.

이 땅에 속한 자에요.

그래서 이들에게는 땅에 달력으로 ‘마흔 두 달’이라고 월력을 쓰는 것입니다.

월력을 쓴다는 것은 육이란 말입니다.

 

근데 두 증인들이 예언하는 것은 ‘일천 이백 육십일’이라고 하지요.

‘일천 이백 육십일’이나 ‘마흔 두 달’이나 숫자상으로는 같아요.

그런데 두 증인들이 다시 예언하는 활동을 할 때는 ‘일천 이백 육십일’ 태양력을 쓰고,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흔 두 달’ 태음력을 쓰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이는 두 증인은 빛에 속한 자이고, 성전 바깥에 있는 자들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날이라도 빛에 속한 자들과 어둠에 속한 자들은 달라요.

하나님이 달리 취급하세요.

두 증인들은 빛에 보호를 받고 있고, 성전 바깥마당에 있는 자들은 어둠에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일천 이백 육십일’로 빛의 아들로 사는 자가 있고, ‘마흔 두 달’로 어둠의 아들들로 사는 자들이 있는 겁니다.

빛에 아들들은 예수님처럼 섬기고 살고, 어둠에 아들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들처럼 살아요.

각자의 삶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말씀에 합당치 않게 사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고전 5: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살후 3:14절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말씀 말씀하면서 방탕하게 사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합리화 하는 자들이에요.

바울은 방탕과 방종과 방임하는 자들은 이방인이라고 했어요.

이들은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두 증인들이 교회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땅에 거한다는 말은 세속적 가치를 쫓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또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간다는 말도 되어요.


씨 뿌리는 비유를 보세요.

모두 말씀을 받았어요.

그러나 중간에 세상의 일락이나 염려나 아픔으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좋은 밭이란? 주께서 관리하는 밭이에요.

주께서 관리하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이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종말에는 두 가지 타락이 일어났어요.

첫째로는 말씀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비진리가 난무해요.

 

이러면 신앙이 우상 숭배로 흘러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 버려요.

구원의 목적을 아전인수 격으로 바꾸어버려요.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것인데 말씀을 떠나게 되면 내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어요.

 

둘째로는 죄에 대한 감각이 상실해요.

우선은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하여 소경이 되어요.

신약의 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을 무가치 하게 돌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법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위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세상의 떡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세상의 가치에 두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땅에 것으로 미혹을 했어요.

예수님이 40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 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미혹을 했어요.

인간의 존재 목적을 자기 행복에 두게 하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의 떡을 위함도 아니고 세상에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함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에는 지나친 율법주의도 경계하여야 하지만 무 율법주의도 경계하여야 해요.

율법주의에 빠지면 인간의 가치를 챙기는 식으로 나아가고,

무 율법주의에 빠지면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는 방탕과 방종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성경은 지나친 의인도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철학과 심리학과 같은 각종 인문학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몰라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존재 하는지를 몰라요.

그러니 신앙이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리면 상식만 남아요.

그럼 세상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종교 생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이 종교로 전락하면 자기 편의주의에 빠지고 말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 시대 신앙생활이 취미 생활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필요하면 왔다가 싫어지면 가버려요.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내게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이 모두가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긴다고 했어요.

헛되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바로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이에요.

성전에 오기는 왔어요.

안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그런데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예수가 십자가에 왜? 죽었는지를 몰라요.

그리고 성령이 왜? 우리 가운데 오셨는지를 몰라요.

그러니 신앙이 외식으로 흐르게 되고 방탕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고 베드로가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에 나면서 된 앉은뱅이가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에 온 목적이 돈이에요.

앉은뱅이는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어요.

성전 밖에서만 돈을 구걸했어요.

 

베드로는 나는 은과 금은 없고 나사렛 예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을 주지 않고 나사렛 예수를 줍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땅에 기운으로 살던 자가 하늘에 기운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곤 나면서부터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전에 와서 돈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땅에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두 증인들이 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나사렛 예수를 가지고 갑니다.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땅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땅에 기운으로 살던 자들을 하늘에 기운으로 살도록 나사렛 예수를 줍니다.

 

이 시대 전도는 교회 안에서 해야 해요.

교회 안에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가득해요.

껍데기만 교회이지 그 속 내용은 절간이에요.

무늬만 성도이지 그 속은 불신자에요.

복음을 모르니 교회마다 무당들이 설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예수를 몰라요.

그러니 땅에서 성공하는 것이 복 받은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교회를 성전이라고 가르쳐서 성전 건축 하면 복 받는다고 해요.

그리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신전 신앙으로 붙잡아 두고 무속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입에서 예수가 자랑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교회 크게 짓는 경쟁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곧 목사들이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거짓말에 현혹되어 따라가요.

이는 곧 교인들도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요.

 

눈 뜬 사람은 소경을 인도자로 세우지 않아요.

복음을 아는 성도는 복음 모르는 목사를 따르지 않아요.

복음 전하지 않는 목사를 따른다는 것은 그 사람도 복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적 신자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세상 것을 추구하면 세상에 속한 자이고, 하늘에 것을 추구하면 하늘에 속한 자에요.

하나님은 창조시에 각각에게 먹을 양식을 주셨어요.

 

양식이란? 살아가는 의미에요.

육에 속한 자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고, 영에 속한 자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어요.

육에 속한 자는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구하고, 영에 속한 자는 하늘에 것을 구해요.

이건 본능적인 것이라 속일수가 없어요.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지만 구하는 것이 달랐어요.

에서는 떡을 위하여 장자권을 버렸지만, 야곱은 장자권을 위하여 떡을 버렸어요.

에서는 떡을 위하여 살았고, 야곱은 장자권을 위하여 살았어요.

 

세상에서 살자면 에서같이 살아야 해요.

야곱같이 살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야곱은 복 받은 자라고 하고, 에서를 일컬어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치 않아요.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해요.

그러므로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성경이 우리의 신앙을 옳다고 추인해 주어야 해요.

성경 속에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한 믿음에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가고 있으면 신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에요.


하나님은 진짜들에게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게 하세요.

이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얼마나 마음이 좋고 의리가 좋은가 하면 목사를 위하여 교회에 다녀요.

체면 때문에 예수를 믿어요.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것이 비즈니스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안에서 베풀어지는 풍성한 은혜들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예수를 멀찍이 구경하는 구경꾼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를 척량해 보세요.

난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

성전 안 입니까?아니면 성전 밖 마당입니까?

 

나는 지금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행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전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의 믿음을 달아 보세요.

 

내가 지금 교회에 왜? 왔는지?

예수를 왜 믿고 있는지?

나는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신앙생활을 목숨 걸고 합니까?

아니면 취미생활로 합니까?

내가 안다고 하는 복음이 나를 지금 어디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들은 성전 밖 마당에 버리워진 자들입니다.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 말에 현혹당하지 말고 내가 만난 예수를 내어 놓아 보십시오.

나는 이런 예수를 만났다고 증거해 보세요.

 

성경 속 이야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실제 사건입니다.

실제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천국에 갔습니다.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숨 바쳐서 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 믿음으로 걸어간 성도들을 보세요.

복음은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허구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값 싼 싸구려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무겁게 받으십시오.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말씀의 저울에 달아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옵소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오늘도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시대의 징조를 보게 하시고 세상이 종말을 알리는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멀리서 연기를 날리면서 우리를 데리러 오는 신랑의 마차 행렬들이 보이게 하여서 기쁨과 설렘으로 신랑을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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