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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5절 |
로마서 강해 30강. 하나님 약속을 믿게 하는 믿음 (롬 4:17-25)

롬 4:17-25=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義)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설교를 하는데 문자적 설교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이 마치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다고 할 때에 척 알아듣고서 아멘! 하면서 믿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여러분들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열심과 충성을 요구합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과연 이 말씀이 교인들로 하여금 충성케 하고 열심을 독려하는 말씀인가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열심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게 되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 이름을 이방인에게 모독당하게 하였어요.
신앙은 열심과 충성이 먼저가 아니고 앎이 먼저에요.
올바른 앎으로 행할 때 올바른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먼저 앎이 없으면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게 되어요.
그럼 아브라함과 사라를 본받으라고 소리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가 십상입니다.
봐라!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음에도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의심 없이 믿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셨다! 라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여기서 의아해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그러한가에요.
창세기를 보면 본문과는 전혀 다른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도리어 비웃었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고 갑시다.
창 17:17-19=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리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웃기지 마세요!
지금 내 마누라 사정이 어떤 줄이나 아십니까!
경수가 끊어진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죽은 나무와 같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아이를 낳는단 말입니까!
난 못 믿겠으니 그냥 여기 있는 이스마엘이나 데리고 살겠습니다! 라고 하였어요.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예! 하고 믿은 구석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믿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안 믿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에 비웃었어요.
비웃었다는 것은 조롱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내용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능통한 바울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럼에도 어째서 로마서에서는 창세기와 전혀 상반된 것처럼 이야기를 할까요.
바울이 진짜로 상반된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상반되게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바울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창세기의 증거와 로마서의 증거는 모순처럼 들려요.
이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 설교를 하게 되면 창세기에서의 설교와 로마서의 설교는 서로 모순으로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이 문자적으로 하면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럼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구약과 신약을 같은 사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의 줄거리로 보여요.
문자 뒤에 숨겨진 것이 보여요.
그럼 신 구약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반대를 믿음으로 이야기 해 왔어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행위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를 믿도록 일하시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적으로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게 해 주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로마서 1장 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는데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고 하지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여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요.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예수님이 한 것은 예수님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나는 타인(他人)이에요.
그러니 육적으로는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지식으로는 이해는 하겠는데 마음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걸 믿어지게 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이 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를 위한 일임이 믿어지게 해 주어요.
예수님과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럼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예!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거부감 없이 믿어져요.
예전에는 아무리 믿고 싶어도 안 믿어졌는데 믿음이 오니까 이젠 이상하리만치 의심 없이 술술 믿어진단 말입니다.
이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해요.
믿음이~ 믿음으로 이끈단 말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 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는 믿음이고, 나중에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에요.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앞에서 예수가 마음으로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앞에서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을 의롭게 여겨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 중요한 것이므로 오늘은 집중적으로 이 이야기만 할 것입니다.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지난 시간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게 되었느냐!
할례시냐!
무 할례시냐!
무 할례시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무 할례시란? 할례라는 행위와 상관없을 때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척점에 두고 말하고 있어요.
즉 행위의 반대를 믿음으로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이 마치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이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 하였음에도 그 불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붙잡고 하나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로마서의 주제가 뭡니까?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잖아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있음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일을 할 때는 우리의 믿음 있음이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어요.
이게 아주 역설(逆說)이에요.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요.
특히 성화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소경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을 하였으니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쳐요.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간과하고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육에 속한 자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이에요.
이렇게 성경을 해석한 자들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은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죽였어요.
아니 율법으로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어요.
그것도 율법을 근거로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말씀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안 믿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믿음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자기 행함이 나온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주여 제가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난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답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주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 의(義)를 쌓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유대인들과 똑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바탕엔 '우린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라는 불신이 깔려 있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아니~ 못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주신 것이에요.
우리가 믿을 수 있었으면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가 없어요.
그냥 믿으면 되니까요.
우리가 못 믿으니까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바탕엔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린 예수를 안 믿습니다!
'아니~ 못 믿습니다!' 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은혜에 속한 것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일을 하세요.
'믿음으로~' 일을 하신다 함은 우리를 부정하면서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에는 항상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 드러나요.
로마서 11장을 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푸시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고 하지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어요.
하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안 되어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만약에 우리 힘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될 것 같으면 전적인 타락을 말할 수가 없어요.
50% 죄인이고,
50%는 의인이라고 하여야 해요.

그러나 성경은 온 몸과 마음이 다 썩었다고 합니다.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란 말은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썩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가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진 상태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배경에는 항상 우리의 불순종이 깔려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하는데 거기서는 믿음으로 사라가 늙어 단산하였음에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죽은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히브리서 11 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은 것이 아니고 안 믿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안 믿었지만 하나님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더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으세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대 부분의 개혁주의 설교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에 포카스가 맞추어지지 않고,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는 자기 행위에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는 유대교 신앙이에요.
이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사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도 히브리서 식으로 이해하여야 올바른 해석이 되어요.
그렇게 되면 문자풀이식 해석과는 역설적인 해석이 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하나님이 “의(義)로 여기셨다” 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여러 번역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을 가장 잘 언약적인 관점에서 번역한 것이 “새번역”이에요.
분명하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가장 근접하게 번역해 놓아서 인용을 합니다.
8개 대조 신약 성경 중에서 “새번역”을 참고로 인용합니다.
롬 4:18-22= “아브라함은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믿고 바랐기 때문에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되라라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19) 그는 나이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가운데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2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라라고 확신했습니다. 22) 이렇게 해서 그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19절에 보면 밑줄을 친 빨간 색으로 된 부분을 잘 보세요.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몸과 같아서 이삭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고 하지요.
여기서 “그의 믿음이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은 믿음이 아니고 그들의 불신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내는 믿음을 말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그 믿음이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개의치 않고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믿음이 쉬지 않고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 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그 믿음이지요.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었다는 믿음이 아니에요.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믿음이에요.
이해가 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義)로 여기신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에도 의(義)로 여기셨어요.
무엇으로 그랬나요?
'믿음으로' 에요.
무슨 믿음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속에서 일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행위가 아니고 은혜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어요.
부르심 속에는 이미 행위와 상관없이 의로움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해요.
아브라함의 의(義)가 믿음에서 주어진 은혜가 되려면 아브라함은 안 믿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안 믿었는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여야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간섭하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어요.
“믿어서”는 행위이고!
“믿음으로”는 은혜에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예! 알았습니다 믿을게요!' 라고 하여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위가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야~! 아브라함아 이삭을 줄게 믿어라! '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척 알아듣고 '예! 믿겠습니다!' 라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믿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되어요.
이건 아니에요.
그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야~! 아브라함아 이삭을 줄게 믿어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아십니까!'
사라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그런데 어찌 아이를 생산 한단 말입니까!
우린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싶어도 도무지 못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비 웃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믿음으로 이삭을 낳게 했어요.
이럴 때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낳은 것이 됩니다.
그럼 이삭의 출생 속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순종과 오직 믿음이 일을 한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우리는 예수를 안 믿었는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예수를 믿게 해 주셨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걸 놓치게 되면 신앙생활을 우리가 뭔가 자꾸만 붙잡고 지켜야 하는 식으로 나아가요.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붙잡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붙잡아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믿어서”와 “믿음으로”는 천지 차이에요.
“믿어서”는 인간의 가능성이지만,
“믿음으로”는 인간의 불 가능성을 깔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의 범죄(불순종, 믿지 않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못 믿어요.
그런데 믿고 있어요.
아니~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 믿어지게 해 줍니까?
믿음이에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케 하는 것은 성령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걸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를 후사는 율법에 의(義)를 가진 자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義)를 얻은 자들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안 믿었는데 믿어지는 자들이 후사라는 말입니다.
안 믿었는데~ 믿어진다!
무슨 뜻입니까?
난 안 믿었는데~ 믿음이 와서 믿어지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후사들이에요.
알다시피 오늘 본문은 그 후사이야기를 이어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걸 이해 하셔야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라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반 복음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저는 성화주의자들이 충정은 이해를 해요.
그러나 충정이 좋다고 해서 옳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충정의 싸움이 아니고 옳음의 싸움입니다.
의에 싸움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
그 의(義)를 믿고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믿음이 뭐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에서 자식을 낳게 된 것을 믿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언뜻 들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한 것처럼 들리는데 그게 아니에요.
이건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을 붙잡고 있는 믿음을 말해요.
즉 이삭을 낳게 하신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분명하게 안 믿었어요.
그 증거물이 바로 이삭이에요.
이삭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었다는 증거물이에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안 믿었지만 사라는 이삭을 낳았어요.
안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이 이루어졌어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고 갑시다.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잘 보세요.
사라가 비록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지요.
이는 믿음이 이삭을 잉태케 하였다는 말이에요.
사라가 믿었다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그 믿음으로 늙어 단산한 사라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 하였음에도 하나님의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인 이삭을 낳게 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붙잡고 일하시는 그 믿음을 말하는 거에요.
봐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하였음에도 하나님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음이 성취하여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아브라함의 몸에 이루었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다는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일을 다 해 놓고서는 아브라함에게 야~ 넌 어쩜 그렇게 믿음이 좋으니!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공부 못하는 아이가 시험을 쳤는데 백점을 받았어요.
어떻게 받았는가 하면 그 아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 대신 시험을 쳐 놓고서는 그 아이에게 넌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 못하는 아이는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잘 했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선생님을 자랑하겠습니까?
선생님을 자랑하겠지요.
자기 자신은 알아요.
자기가 시험을 친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에요.
그런데 분명히 시험지는 백점을 받았어요.
사람들은 시험지만 보고 그 아이에게 너 공부 잘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아이는 자기는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누가 물을 때마다 2차 3차 4차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물으면 난 아니라고 하는 그것을 성경에선 그 아이의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꼴이에요.
자기들은 안 믿었어요.
그런데 자꾸만 믿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무얼 보고 그럽니까?
이삭이라는 아이를 보고 그런단 말이에요.
사람들 눈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어서 이삭을 낳은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칭찬해요.
하나님도 야~ 너희들 믿음이 좋네!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볼 때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고발당하게 되어요.
그러니 누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어쩌면 당신들은 그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라고 하면 우린 아닌데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삭은 우리가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 낳은 것인데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자기 고백을 가지고 야! 너희들 믿음이 억수로 좋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이게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져야 해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자랑되어지면 안 되어요.
우리는 예수 믿는 우리가 자랑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못난 놈으로 드러나야 해요.
그래서 우리 몸에서 예수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 몸에서 행하신 일들이 증거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야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근본에는 여러분의 믿지 않았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믿지 않음을 바탕으로 일을 하신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게 하신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속에는 항상 나는 예수를 못 믿고 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어! 라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겁니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여기 있다구요.
그 누군가의 힘이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이 도망가고!
툭하면 예수 안 믿겠다고 하고!
수 없이 반항하였음에도 지금 우리가 버젓이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믿음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히브리서 11장식으로 기술을 한다면 믿음으로 정낙원이는 목사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장로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집사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정낙원이는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고!
믿음으로 여러분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있고!
믿음으로 충성하고 있고!
믿음으로 봉사하고 있고!
믿음으로 헌금하고 있고!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교회에 다니게 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공로는 아무도 없어요.
모든 것이 믿음이 한 일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칭찬하겠어요.
아니에요.
도리어 아브라함과 사라를 붙잡고 이리 저리 끌고 다닌 믿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인간을 자랑하고 칭찬한 적이 없어요.
비록 인간을 칭찬한 것처럼 기술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인간을 칭찬하고자 함이 아니고 그 인간을 칭찬받게 하는 그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왜? 돌립니까?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했으면 자기가 영광을 받아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까?
이건 이삭을 자기들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를 움직이고 있는 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행위와 상관없는 때였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할례 시가 아니고 무 할례시다!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다!
율법이 아니고 은혜다!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육에 속한 자들을 못 읽어내요.
왜냐하면! 그들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그 하나님을 몰라요.
성경은 아브라함을 말하고자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성도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속에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에요.
겉으로 아브라함이 일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은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은 것은 사라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고 이렇게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를 가지고도 이삭을 낳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靈)에 속한 성도들은 어떤 인물을 본 받자고 한다거나 그 인물을 자랑하거나 칭찬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이 여러분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속에서 일을 하신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이잖아요.
여러분은 아닐지라도 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전 목사 되고 싶지 않았어요.
돈 많은 장로를 하고 싶었어요.
목사가 되어도 큰 교회 부흥시키고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목사를 하고 싶었지 교회 부흥도 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 피를 전하는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어요.
욕 먹어 가면서 말이에요.
일가친척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면서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모두가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날 잡고 이리 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신 분이 누구인가요?
믿음이에요.
믿음으로 누구는 무얼 하고!
믿음으로 누군 이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믿음이 개 목줄 매듯이 매어서 이리저리 끌고 다녔어요.
끌려 다니는 그 사람들 입에서 좋은 소리 나올 것 같은가요?
아니에요.
나오느니 원망이고 불평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이들이 원해서인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일은 죽도록 이 사람들이 하고는 성경은 이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믿음이 이들을 이런 일을 하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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