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강.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 (창 46장)
창세기 46장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8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11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13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16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18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야곱 일행이 애굽에 이르다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야곱의 일생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던 야곱이 이제는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에서 편안한 일생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살게 하십니다.
야곱은 우리의 모습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지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야곱을 어미 태로부터 죽을 때까지 인생 전반을 개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을 주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설적인 것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이 아니고 저주에 가깝습니다.
인간들은 사랑을 자기 유익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을 위하여 인생을 차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에게 인생이 차압당하는 것이에요.
간섭당하는 것으로 다가와요.
인간들은 간섭당하는 걸 싫어해요
죄인의 속성이 뭐냐?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해요.
누군가가 나를 간섭하면 반발을 해요.
이건 부모 자식 간에서도 부부간에서도 나타나요.
평생 동안 서로가 서로를 주장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간섭당함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다가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인간을 알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엄청난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어요.
약속대로 부활하신 후에 성령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고아처럼 버려둘 수가 없고 간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원수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은 남의 나라에요.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풍전등화와 같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부모가 되어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듯이 말이에요.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는 것은 세상을 알기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에요.
세상은 짐승들이 살아가는 정글과 같아요.
정글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다스려져요.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려고 시시콜콜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부모의 간섭을 싫어해요.
왜 간섭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요.
그래서 간섭하고 간섭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보세요.
사 43:1-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었고 조성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생 길이 물 가운데로 행하고 불 가운데로 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렐루야 아멘 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인간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요.
꽃 길만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함과 다르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과 샅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늘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자들이에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듯이 우리의 원함과 반대되는 것으로 자꾸만 헝클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이고 환란이에요.
아픔이란 말이죠.
인생이 자기 뜻대로 안 살아지니까 환란인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일평생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였어요.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부터 집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였어요.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종살이를 하였어요.
그러다가 30년이 지나서 벧엘로 돌아왔어요.
이제 남은 여생을 조상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에서 살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헤브론에서 살았어요.
헤브론에 살면서 기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은 기근으로 양식이 없고 애굽은 풍년으로 양식이 남아 돌았어요.
기근이 닥치자 야곱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식들을 보내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처음에 사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다시 보낸 겁니다.
자식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두 번 씩이나 사왔어요.
두 번째 양식을 사 와서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요셉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자식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은 더 더욱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총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버금 수레를 보내주었어요.
아무리 요셉이 보낸 수레와 물품들을 보아도 야곱의 마음 한 켠에는 조상들이 묻혀 있는 땅을 떠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베냐민이 볼모로 잡혀 있어서 막내 아들을 살리려면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하나님에게 물어보려고 브엘세바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브엘세바가 어떤 곳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에요.
그런데 밤 이상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셋팅을 해 놓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자식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이라 거역은 못하겠고,
암튼 야곱의 마음은 복잡하고 무거웠어요.
이게 우리들의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은 우리 맘대로 살아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간섭하시는가요.
기근으로 양식을 끊어지게 만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는데 안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막내 아들인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 놓고 강제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은혜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어요.
헤브론이 어떤 곳인가요.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이에요.
야곱은 선산을 지키면서 조상들의 흔적을 안고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늙은 나이에 또 다른 낯선 환경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을 “기럇 아르바”라고 합니다.
여기에 기가 막힌 뜻이 있어요.
그 이름은 “신의 성읍”이라는 뜻이에요.
신들이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신들이 사는 곳은 천국을 말해요.
그럼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것은 천국에서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과 같아요.
그럼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하나님이 야곱에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 속에 담겨 있어요.
본문을 봅시다.
창 46:1-4절.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2.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헤브론에서 조상들이 제사를 드리던 브엘세바로 내려가서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그날 밤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나타난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을 간섭하는데 아브라함을 간섭하듯이 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에ᅟᅦᆨ 그러는 겁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는 것은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하고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내가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할 때 네 후손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사대만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준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네 할아버지하고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 할아버지와 함께했듯이,
너와도 함께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려가야 나중에 큰 민족을 이루어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 언약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에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네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이곳에 올라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여 다루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언약은 어디에서 나온 언약이냐 하면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뭔가요.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둬졌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잖아요.
쉬운 말로 자기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으로 되어 있단 말이죠.
즉 죽었다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언약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큰 민족을 이루어서 올라온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시는 것을 아브라함 언약으로 적용하면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보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아직까지 나지 아니한 자기 백성들이 있는 거예요.
지금 눈에는 안 보여요.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야 할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룰 백성의 대표로 누가 붙잡혀 있느냐?
베냐민이 붙잡혀 있는 거예요.
베냐민이 누구인가요?
야곱의 아들이에요.
야곱에게서 나온 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 허리에서 나온 자를 찾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허리에서 나왔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어요.
그 물과 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나오게 된 것입니다.
베냐민이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이는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가 나오는데 한결같이 이기는 자들이 나와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같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어요.
이 세상에 왜 보내셨느냐?
죄와 사망 권세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할 자기 백성이 이긴 자로서 오른 손의 아들인 베냐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럼 진짜 출애굽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영적으로 똑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근거로 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야곱이 어떤 자인가요.
얍삽한 머리를 가진 자에요.
잔머리 굴리는데 도사에요.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자예요
어떻게 돌아갈까요?
죽을 궁리 할까요?
살 궁리 할까요?
살 궁리 하겠죠
만약 애굽에 자기 자식이 볼모로 안 잡혀 있을 것 같으면 안 내려가요.
얼마나 꾀가 많은 사람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버린 겁니다.
오늘 본문 28-29절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 굴리는 것이 잘 나와요.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잘 나타나요.
창 46:28-29. “야곱이 먼저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 고센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들이 고센 땅에 도착하자 29. 요셉은 수레를 타고 고센으로 와서 아버지를 만나 목을 끌어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30. 이때 야곱이 요셉에게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다. 31. 그리고 요셉은 형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바로에게 가서 가나안 땅에 살던 내 형님들과 아버지의 가족들이 모두 여기에 왔다고 말해야겠습니다. 32. 나는 또 왕에게 그들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모든 재산을 가지고 양과 소도 함께 끌고 왔습니다 하고 말하겠습니다. 33. 바로가 형님들과 여러 가족들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34.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처럼 목축을 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이집트 사람들이 목축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기 때문에 형님들과 여러 가족들은 고센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바로가 야곱의 가족들을 고센 땅에 살게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야곱이 고센 땅을 달라고 해요.
나는 고센 땅에 살겠다고 해요.
고센 땅이 어떤 곳이냐?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에 고센 땅을 정복해요.
그럼 고센 땅은 가나안 땅이란 뜻이에요.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완전히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애굽과 가나안의 경계에 있는 거예요.
여기에 또 다른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어요.
야곱은 그러는 거에요.
우리가 비록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우리는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정체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야곱은 지식들에게 그러는 겁니다.
우리는 애굽 사람과 달라.
애굽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땅은 애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 땅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가나안 사람이기 때문에 애굽과 가나안의 경계 지역에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센 땅은 영적 의미로 교회에요.
교회는 애굽과 가나안의 경계 지역이에요.
교회는 비록 세상이라는 애굽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곳이에요.
경계란 언제든지 구역이 이동될 수 있어요.
애굽으로도 편입될 수 있고 가나안으로도 편입될 수 있어요.
만약에 야곱이 고센 땅에서 애굽식 삶을 살 것 같으면 고센이 애굽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고센 땅에서 애굽식 삶을 살지 않고 가나안의 삶을 살 것 같으면 가나안이 되는 거예요.
야곱이 고센 땅에 머무는 것은 우리가 가나안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애굽의 삶을 쫒아가지 않고 가나안의 삶을 쫒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고센 땅에 살면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목축업을 하고 사는 겁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기업은 목축업이에요.
목축업은 한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유리하면서 살아가요.
이건 나그네 삶을 말해요.
이건 성도들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33-34절 보세요.
33-34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애굽 사람들은 목축업을 가증히 여긴다고 합니다.
싫어한다고 하지요
애굽 사람들은 땅에 코를 박고 사는 자들이예요.
그들은 유리방황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터를 잡고 살아가요.
이건 이 세상에 속한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나 언약의 후손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였어요.
이 땅에 분깃이 없어요.
그래서 유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고센 땅에 가서 목축업을 하고 사는 것은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애굽에 코 박고 사는 자들이 아니고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양식 때문에 내려간다.
하지만 우리는 애굽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 아니고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겁니다.
야곱은 자식들에게 우리가 양식 때문에 애굽에 내려가지만 너희들은 애굽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쫒아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애굽 사람처럼 농사짓고 빌딩 짓고 살지 말고 우리는 조상대대로 유목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고 유리합니다.
유리한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이곳에 정착할 것이 아니고 장차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걸 최초로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8-16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에게 줄 땅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민으로 살지 않고 유리하는 목축업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고 살게 하는 주체가 뭔가요.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하였어요.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받은 믿음은 똑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이사를 엄청 많이 했어요.
이사 다니는 것은 유리하는 것과 같아요.
왜 이사 다닙니까.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사를 하면서 간절한 소망이 뭔지 아세요?
내 집 갖고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경쟁을 하는 거예요.
결혼하면 제일 먼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요.
그리고 평생 대출금을 갚아요.
이게 우리나라 삶의 패턴이에요.
우리 민족은 허세 문화로 유명해요.
유교 사상이 허세 문화에요.
허세 문화란?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에요.
양반들이 집 크기로 서로 경쟁을 해요.
그것이 백 칸짜리 집들을 지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과시용이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산다.
이 모두가 허세 가치관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집도 큰 평수에 사는 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자동차도 큰 것 타는 것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큰 것을 부의 모습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서로 큰 집을 장만하고 큰 차를 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나 이런 사람이라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외국의 기독교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달라요.
집을 장만하려고 하지 않고 여행을 다녀요.
그 사람들은 여행을 다니려고 돈을 모아요.
한국은 빚내 가지고 집을 사서 평생토록 집값 내려고 일을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일 년 벌어서 여행을 다닌다니까요.
우리나라 정서로는 열심히 모아서 집을 사야 되어요.
그래야 지혜롭다고 해요.
집을 안 사고 좋은 차 타고 다니고 여행 다니면 한국 사람들은 다 욕을 해요.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헛 바람이 들었다고 욕을 해요.
돈 벌어서 집 사는 사람과
돈 벌어서 여행 다니는 사람하고 차이가 뭔가요.
가치관의 차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은 뭐냐?
돈 벌어서 집을 사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고,
외국인은 돈 벌어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즐기는 것이 좋다는 가치관이에요.
결국 가치관의 차이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가치관은 달라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가보니 하나님이 네 땅은 여기 없고 저 위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장막 생활을 하면서 살았어요.
장막 생활이란? 나그네 삶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이리저리 이동하고 살면서 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요.
이는 아브라함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쳤어요.
너희들은 이 땅의 가치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살아야 한다고 실물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에요.
하나님과 정확하게 만난 사람은 육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 가치로 살아요.
육적 가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쫓아가지만,
영적 가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게 되어요.
진짜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은 삶의 가치가 바뀌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돈 벌어 가지고 이 땅에서 잘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 못 만난 사람이에요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아요.
아브라함처럼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삶의 최고 가치관으로 여기고 살아가요.
어제 제가 경기도 고양에 있는 교회에 개척 예배 설교하러 다녀왔어요.
가기 전에 그 교회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목사님 여기 참석하는 분들이 대부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옵니다.
그러니 그 분들에게 잘 맞추어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목사가 그럴 때 제일 당혹스럽거든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되는데,
거기서 신앙은 영적으로 이런 것이다 하고 해 봐야 못 알아듣잖아요.
그래서 기도를 하였지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메르스(전염병)를 가지고서 설교를 하라고 지혜를 주시는 겁니다.
지난 번에 한국에 메르스가 상륙해 가지고 한국이 초토화 되어 버렸잖아요.
메르스 전염병 때문에 학교가 266개가 휴교하였어요.
이런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고 해요.
온 나라가 메르스에 벌벌 떨었어요.
의사들이 이야기하는 통계를 보면 사망률이 독감이 더 많다고 해요.
메르스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해요.
일 년에 독감으로 죽은 사람들은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수만 명이 된다고 그래요.
그런데 독감 가지고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아요.
메르스는 몇 백명 밖에 안 죽었는데 온 세계가 떠들썩하고,
독감으로는 수만 명이 죽었는데도 난리를 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백신 때문에 그래요.
독감은 백신이 있는데,
메르스는 백신이 없다는 겁니다.
독감 걸리면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나으니까 요동하지 않지만,
메르스는 약이 없으니까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최고로 두려운 것은 죽음이에요.
인류의 역사가 시작하고 나서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에요.
불교는 세상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에요.
그래서 세상 종교하면 불교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숙명으로 받아들여요.
석가모니가 도를 깨우치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서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고 방성대곡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슬퍼서 우니까 석가모니가 해결책을 하나 마련해 주었어요.
석가모니가 그 여인에게 이 동네 돌아다니면서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 집이 있을 것 같으면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 여인이 하루 종일 찾아다녔는데 안 죽은 집이 없는 겁니다.
할머니가 죽었든지, 할아버지가 죽었든지, 아버지가 죽었든지, 자식이 죽었든지,
모든 집 마다 다 죽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하는 말이 봐라 다 죽잖아,
네 아들만 죽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죽게 되어 있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인간에게 죽음은 숙명이야,
생노병사야,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어,
그러니 너도 아들의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기독교는 죽음을 뭐라고 하나요.
죽음을 복이라고 해요.
왜냐하면, 죽음으로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니까요.
알다시피 죽음은 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잖아요.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다 죽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을 이기게 하는 백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을 이기게 하는 백신으로 보내주신 거예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을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죽음에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죄가 그 메르스와 같은 거예요.
메르스 때문에 벌벌 떠는 것은 백신이 없어서이고
죽음을 벌벌 떠는 것은 죄를 이길 백신이 없어서에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는 예수라는 백신을 보내준 거예요.
그 예수라는 백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예수 믿으면서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믿음은 짝퉁일 확률이 높아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세상의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짝퉁일 확률이 많아요.
신앙이 지식이고 관념이 되어버리면 아는 것하고는 전혀 달라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예수가 그 속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가 주는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을 삶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언약의 후손은 언약이 그 속에 칩처럼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간섭을 당하는 겁니다.
언약이 그들을 간섭하는 거예요.
야곱이 잘나서 목축업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처럼 정착민으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이 세상 바깥에 속한 자라는 것을 그들의 직업을 통하여 나타나는 거예요.
직업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가인과 아벨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가인은 땅의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어요.
둘 다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어요.
가인의 제사는 왜 거부하였고, 아벨의 제사는 왜 받았나요.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잘 보와야 할 단어 두 개가 있어요.
더 나은 제사와 의로운 자라는 증거에요.
더 나은이란? 옳음이라는 뜻이에요.
옳음이란 정답이란 말이에요.
정답을 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는 예물을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거에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믿음이에요.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야! 아벨아 하나님은 양의 제사를 원하셔,
믿음이 알으켜 준 겁니다.
그럼 왜 믿음이 아벨에게만 알려 주어졌을까요.
그걸 히브리서는 의로운 자라고 하는 겁니다.
아벨은 의로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주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의 제사만 받아요.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믿음이 알려주어요.
믿음이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아가라고 해요.
그래서 의로운 자들은 자신의 피와 땀이 베여 있는 것을 상징하는 땅의 소산물로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어린 양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이 뭔가요.
양이지요.
그 당시에 양은 양식이 아니었어요.
아벨이 살아간 당시의 양식은 땅의 소산물이었어요.
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용이었어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짐승으로만 키운 것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 키운 것이 아니었다니까요.
아벨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아벨의 직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은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을 두었지만,
아벨은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에 관심이 있었어요.
결국 그들의 가치관이 작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농업은 애굽 사람들의 직업이고,
목축업은 언약의 후손들의 직업이에요.
그래서 야곱의 가족도 애굽 사람들이 천시 여기는 목축업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애굽 사람들은 목축업을 경시 여긴다고 하잖아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분주해요.
그런데 언약의 후손들은 예수 믿는 일에 열심을 내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릴 때 하는 말이 그러잖아요.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밥도 돈도 안 되는 그 일을 왜 그리 정성스럽게 하느냐 라고 해요.
맞아요.
예수 믿으면 돈도 떡도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러니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예수 믿는 것을 직업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아벨이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은 영적인 일이에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교제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벨이 양을 쳤다
그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것과 같은 거예요.
히브리서는 뭐라고 하냐?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그 예물을 드리게 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믿음이 우리에게 덥쳐 오면 믿음이 무엇을 바라보게 하세요.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게 하세요.
하늘 나라는 우리 힘으로 갈 수가 없어요.
예수 믿어야 갈 수가 있어요.
이 사실을 하나님이 알려주었어요.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고 오직 아벨처럼 의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아벨처럼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수 믿는 것을 삶의 최우선에 두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을 필두로 해서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 세상에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살고 있어요.
등신처럼 돈도 떡도 안 되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식솔들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겁니다.
애굽에 넓은 평야에서 농사를 짖지 않고 험악한 산악지대에서 양을 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보 천치에요.
아니 아들이 총리인데,
그럼 얼마든지 좋은 땅을 차지하여 살 수가 있잖아요.
당시 기근으로 인해서 애굽의 모든 땅을 요셉이 다 받았잖아요.
곡식하고 땅하고 바꿔치기 했잖아요.
모든 땅이 요셉의 것이에요.
그런데 야곱의 가족들은 땅 한 평 차지하지 않고 산에서 이슬 맞아 가면서 양을 치고 살았어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지혜예요.
나중에 모세가 와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 그 진가가 드러났어요.
애굽 땅은 작살이 나는데 고센 땅은 고요했어요.
결국 가인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자들은 다 죽어버리고 고센에서 아벨처럼 양을 친 이스라엘은 다 살아났어요.
지금 우리가 목축업을 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것이 목축업이에요.
교회가 고센 땅이구요.
유목민들은 하루하루 그냥 감사하며 살아요.
욕심부릴 필요도 없어요.
남과 경쟁할 필요도 없어요.
호사스럽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냥 가죽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만족하며 살아요.
이게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믿음이 그렇게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간섭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에요.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팔자 고치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약의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목축업이에요.
목축업이 교회 생활로 나타나는 거예요.
신앙생활로 나타나는 거예요.
교회는 고센 땅과 같은 곳이에요.
비록 애굽에 속했지만 애굽에 속한 것도 아니고 가나안에 속한 것도 아니에요.
교회가 그런 곳이에요
비록 이 땅에 있지만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였어요.
교센 땅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양을 쳤어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였어요.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교회가 세워지지요.
성령이 임하고 난 성도들은 날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었느냐?
날마다 모여서 교제하고 찬송하는데 의미를 두었어요.
지금 이 시대는 먹고 살만 하니까 다 교회를 떠나버려요.
골프 치러 다니고 여행하러 다닌단 말이죠.
성도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라고 하니까
주일날 교회 안 오고 놀러 다녀요.
놀러 다니는 것이 나그네가 아니에요.
요즘에 아주 이상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짓을 하고 있어요.
행위로 구원받는 것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교회생활을 등한시해요.
몸이 멀면 마음도 멀고,
마음이 멀면 몸도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했어요.
지금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전부 예수를 문 밖으로 쫓아내 버렸어요.
그 속에 예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진짜 신앙이 있다면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월,화,수,목,금,토,일요일 날 모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일요일로 모이는 것이 아니에요.
일곱째 날 여호와의 안식일로 모이는 것이에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신 날이에요.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그리고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하셨어요.
우리는 안식 후 첫 날로 모이는 것이에요.
안식 후 첫 날은 여덟째 날이에요.
세상적으로는 일곱째 날이지만 언약적으로는 여덟째 날인 겁니다.
일곱째 날은 역사 속의 날이지만
여덟째 날은 역사 바깥의 날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여덟째 날이에요.
우리가 일요일 날 모이는 것은 역사 바깥의 날 팔일째로 모이는 거예요
우리가 일요일에 모이는 것은 세상 바깥의 하나님 나라의 모임을 갖는 거예요.
세상 바깥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에요.
그래서 세상에 흩어져 있다가 주일 날 교회로 모여서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고 나중에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교제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세상 바깥에 계시잖아요.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세상 바깥으로 끌고 간단 말이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바깥으로 끌고 가는데 그곳이 어디냐.
교회란 말이죠.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한 곳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는 하늘 위의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세상 소식 들으려면 하면 안 되요.
교회는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해요.
서로가 사귐이 되려면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세상 사람들은 화제 중심에 무엇을 두고 있나요.
무엇을 막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요.
한마디로 돈이에요.
그런데 신자는 어디에 두고 있냐요.
하늘나라에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요.
한마디로 예수이고 복음이에요.
애굽 사람들이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싫어해요.
냄새난다고 밀어내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을 싫어해요.
재수없다고 해요.
목축업을 하는 사람하고 애굽 사람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통해요.
동상이몽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애굽 사람들이 여러분을 만나면 재수 없어 하면서 밀어내야 해요.
예를 들어서 예수쟁이는 술맛 떨어지니까 회식 자리에 오지 말라고 해야 되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어요.
예수 믿는 걸 드러내면 불이익을 당할까봐서 숨겨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다 따라 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술 파티하는데 가서 같이 술 퍼 먹을 것 같으면,
그 사람 신자다? 아니다?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하면 꼭 토를 달아요.
어디 행함으로 구원을 받나요, 믿음으로 받지,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를 해요.
그 사람은 믿음을 뭐로 쓰고 있나요.
자기 사욕을 위해 쓰고 있는 겁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에요.
신자로서 그런 행동이 나오면 안 돼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어요.
이건 단순하게 술을 안 먹으면 의롭고 먹으면 불의하다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믿지 않는 무리들과 어떻게 같이 합석이 되느냐 말이죠.
그러면 차라리 미안하다 내가 있으면 술맛이 떨어지니까 나 갈게 하고 나와야지요.
그러지 않고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면 그들이 욕을 해요.
술 실컷 먹여 놓고서 저 새끼 짝퉁이네 라고 해요.
진짜 신앙을 지켜보세요.
일시적으로 핍박이 오지요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해요
그것을 받아야 돼요.
뭣 때문에?
신앙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그게 싫어 가지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사람이 술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불신자의 세계와 신자의 세계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벨리알이 함께 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은 멍에를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에요.
예전에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있었어요.
내가 그때 실수한 것이 있어요.
그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는 중에 인간의 행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금기사항과 같은 술과 담배 문제를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술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봄에 소풍을 바닷가로 갔었는데 그 분이 술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그리고 목사님 먹어도 되겠느냐 라고 묻기에 제가 여긴 그런 자리가 아니니까 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사람들은 자유를 오해하는 거예요.
아! 뭐 소주 한잔 정도.
아닙니다!
이런 걸 방종이라고 해요.
제가 그것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를 해버리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안 먹고 제사를 안 지낸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신자가 믿지 않는 자들과 술잔을 대작할 것 같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대번 짝퉁이라고 하겠지요.
너 교회 다닌다면서,
교회 다니면서 왜 술 먹는데,
그럼 아니야! 천국은 술 먹는 것과 상관없이 가는 거야
그러면 불신자들이 아 그래 그럴 것 같은가요.
아니에요.
도리어 조롱을 해요.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과 있을 때는 항상 행동을 조심하라는 거예요.
야곱이 그러잖아요?
야곱이 자식들을 너무도 잘 알아요.
자식들이 세상을 너무 좋아 한다는 걸 알아요.
예전에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해서 야반도주를 하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가서 양을 치고 있어요.
요셉이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쉬운 이야기로 할 것 같으면 세겜은 화려한 곳이에요.
야곱의 가족들은 촌놈들이에요.
산골 오지에 살던 놈들이 저 화려한 곳에 가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예요
자기 동생이 강간당했을 것 같으면 그곳에 다시 가지 말아야 하잖아요.
세겜에서 쫓겨나서 벧엘로 올라갔잖아요.
그런데 그곳에 양 치러 갔어요.
이놈들이 양들을 끌고 세겜으로 내려간 겁니다.
야곱은 다 아는 거예요.
이 새끼들은 세겜의 매력을 못 잊는다는 것을,,
그래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을 주저주저 한 겁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을 잘 아시고 내가 함께 내 갈 테니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어야 하니까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이리로 올라오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 행을 택한 것입니다.
몇 명이 내려갔나요.
70명이에요.
내용을 잘 보면 야곱의 후손 전체에요.
실제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과 셀라가 있어요.
그런데 엘과 오난은 이미 가나안에서 죽었다고 하면서 숫자에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에서 죽은 자들도 야곱의 가족 숫자에 포함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들이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게 나온 후손들 전체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70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수는 창조의 수에요.
그리고 10은 만수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 70명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했다는 것은
애굽에서 창조의 수인 7을 가지고서 세상의 만수인 10을 이루어서 올라오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모든 자를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영적인 의미로 애굽에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모두 구원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큰 민족을 이루어서 올라 오게 하신다는 말이에요.
아브라함 언약도 그러잖아요?
네 후손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는데 그들이 애굽에 갔다가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돌아올 때에는 큰 민족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에 가서 창세전 언약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요셉이 네 눈을 감기 울 것이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요셉이 야곱의 눈을 감겨 준다는 것은 야곱에게 한 언약을 요셉이 완성을 한다는 소리에요.
그래서 나중에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나온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산 겁니다.
야곱의 2기 인생이란? 신약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인생을 말해요.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뼈를 뿌러뜨림을 당하였어요.
그 후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절름발이가 되었어요.
그리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치기 당합니다.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을 상징해요.
야곱의 새 사람의 인생인 이스라엘의 인생을 요셉이 산 겁니다.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산 사람이에요.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주지요.
이는 야곱의 언약을 이룰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 아들도 아버지에게 빼앗겨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그때 야곱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두 아들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을 합니다.
축복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행위에요.
그래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애굽에서 정한 기간 동안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출애굽을 시킵니다.
이 때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나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모두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이에요.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이에요.
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2기 인생을 상징하는 요셉이 그들의 아비가 되어서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징하는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려내서 하나님의 산이 호렙산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나온 것은 요셉이 이 민족을 이루었다는 뜻이에요.
야곱과 요셉을 에수님 이야기로 하면,
야곱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요셉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해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 옛 사람의 죄를 담당하여 죽으신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새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이나 요셉이나 다 예수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눈을 요셉이 감긴다고 하지요.
이 말은 야곱아 너는 편히 쉬어라,
너한테 한 약속은 네 아들 요셉을 통해서 이룰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셉이 네 후손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올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 재밌잖아요?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이주시켰다가,
요셉을 통해서 애굽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에요.
우린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품고 이 세상에 왔어요.
이 세상이 애굽이에요.
우린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이라는 애굽으로 내려 온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낳았는데 큰 민족들을 이룬 거예요.
장차 이 세상을 떠나는 진짜 출애굽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이유가 이 땅에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에요.
그 때 우리는 세상아 잘 있거라 우리는 간다,
bye! bye! 하면서 하늘나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은 유황불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주저하자 하나님이 조상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서 약속을 합니다.
야곱아 너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따라 갈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를 통해서 내가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을 이루어야 하니까 너 혼자 보내지 않고 나도 따라가는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요셉이 하라는 데로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애굽에 내려가지만 고센 땅에 머물게 할거야.
고센 땅에서 가나안에서 살 듯이 살면 돼.
애굽 사람들처럼 농업에 종사하지 말고 목축업을 해.
그럼 정한 때가 되면 내가 네 후손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올 거니까.
이에 야곱이 알았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고센이 어떤 곳인지 출애굽 때 보세요.
모세가 야곱의 후손들을 출애굽 시킬 때에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지요.
그 때 고센 땅에는 재앙이 안 내려요.
고센 땅에는 재앙이 안 내리고 애굽 땅에만 재앙이 내렸어요.
이건 고센 땅은 죽음의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이에요.
앞서서 고센 땅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그랬죠.
예수님께서 교회를 일컬어 뭐라고 했나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지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 고백을 하자,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어요.
영적 의미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애굽의 가치가 점령할 수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교회나 고센이나 같아요.
고센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목축업을 하면서 살았어요.
물론 나중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종살이를 시켰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인 겁니다.
애굽이 음부일 것 같으면
고센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음부의 권세를 이긴 것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에도 고센 땅은 재앙이 없는 땅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고센 땅과 같은 교회에 왔어요.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뭐해야 되느냐?
애굽의 사고를 죽여야 돼요.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애굽의 가치를 죽이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계속 살아야 돼요.
생명의 원리는 날마다 먹어야 해요.
한끼 잘 먹었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산 사람은 먹는 것을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떡으로 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말씀으로 살아요.
그러므로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은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는 죽이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땅의 가치관을 죽어야 해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셔야 해요.
나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내가 하늘의 사람인데,
세상에 속아서 땅강아지처럼 세상의 가치로 살았구나.
고발당하여야 해요.
그리고 주여 다시 한번 힘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해요.
야곱이 비록 애굽에 내려갔지만 애굽과 동화되지 않고
고센 땅에서 자기 자식들을 목축업으로 살게 하였듯이
우리도 비록 겉 사람은 세상에 살지만
속 사람만큼은 세상 가치로 살지 않도록 싸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어요.
겉 사람은 애굽의 가치를 쫓아가려고 하지만
여러분의 속 사람은 애굽의 가치를 따라 가면 안 돼요.
부디 스스로의 싸움에서 지지 마시고 믿음으로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한 주간도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정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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